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0화 (10/400)

Round 10. 슬기로운 선수 생활

딱! 딱!

“무슨 소리지?”

거실에 있던 카린은 밖에서 들려오는 망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루지야, 무슨 소린지 궁금하지 않아?”

맞은편에 놓여 있던 곰 인형.

돌아가신 엄마가 선물로 사 줬던 루지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뭔지 한번 보러 가자.”

가정교사가 내준 숙제를 하는 게 지루했던 카린은 곰 인형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뒤뜰에서 준영을 발견했다.

“존, 거기서 뭐 해?”

손에 작은 망치를 든 준영은 신창을 두들기고 있는 중이었다.

“신발이 고장 났어?”

“그래, 스터드가 덜렁덜렁해.”

“불량품이구나. 물건은 잘 보고 샀어야지.”

카린의 근엄한(?) 잔소리에 준영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확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꼬마 아가씨.

호기심이나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함 때문인지 금방 친해졌다.

그래서 준영은 그녀를 막냇동생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카린 말대로 확실히 불량품이네. 이런 걸 신고 경기를 뛰어야 한다니…….’

지금 준영이 손보는 축구화는 21세기의 것이 아니다.

이 시대 축구화가 어떤가 싶어서 섕클리 감독의 추천을 받아 주문 제작한 물건이었다.

‘무겁고, 발목까지 감싸서 움직이기 불편하고, 심지어 스터드는 금방 덜렁거리거나 빠지고.’

잘못 만든 물건은 아니다.

허더스필드의 동료 선수들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경기나 훈련이 끝나면 라커룸에서는 스터드를 두들기는 망치 소리가 예사로 들려왔다.

아니, 아예 망치가 선수들에게 필수 장비였다.

‘21세기 축구화랑 비슷한 게 없진 않은데 말이야.’

동료들이 보는 스포츠 잡지에는 최신형 축구화가 소개되어 있었다.

날씨나 필드 상황에 따라 스터드를 교환 가능한, 나름 이 시대에 있어 혁명적인 구조였다.

‘이때도 아D다스는 있구나. 근데 아직 나2키 없나?’

나2키의 유무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현재 영국 선수들은 최신형 축구화를 그리 애용하지 않는다는 사실.

단지 돈이 부족하거나, 독일 놈들의 상품은 안 쓴다는 반감 때문이 아니다.

‘비도 자주 오고, 필드 배수도 개판이고, 플레이도 엄청 거치니까.’

진창 같은 필드에서 발목이 드러나는 신형 축구화는 벗겨지기 일쑤.

준영도 엊그제 연습 경기를 하다 아끼던 축구화를 진창 속에서 잃어버릴 뻔했다.

거기다 걸핏하면 들어오는 높은 태클에서 발목을 보호하자면 목이 높고 튼튼한 구형 축구화가 유리했다.

‘하지만 기동력을 높이고 섬세한 테크닉을 하기엔 가벼운 신형 축구화가 유리해.’

어느 쪽이나 장점은 있다.

그러니 구형 축구화에도 적응할 필요는 있었다.

‘의료 기술도 뒤떨어져 있는데, 다치면 나만 손해잖아.’

그래도 축구화 밑창이나 스터드는 제대로 좀 만들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매번 이런 식으로 망치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다음번에는 제화공에게 21세기 축구화를 보여 주리라 마음먹었다.

카피를 제대로 뜰 수 있을지 없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볼 필요는 있었다.

***

불편한 건 축구화뿐만이 아니다.

유니폼도 거칠고 답답한 데다, 훈련 장비도 많이 부족했다.

라커룸이나 샤워실 등 인프라도 열악한 수준이었다.

‘2부 리그 팀이라 이런 건가?’

하지만 동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규모의 차이는 있어도 질적인 수준은 1부 리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무튼 21세기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고, 부상 치료 같은 것도 간단한 해결책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 물집은 너무 커. 병원에 가서 껍질을 잘라 내고 소독하는 게 나을 거야.”

“안 돼요! 그럼 사나흘은 뛰기 힘들잖아요.”

“그럼 쉬어야지.”

“어떻게 좀 해 줘요. 곧 리그 개막인데, 이런 시시한 부상 때문에 놀고 있다간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말 거라고요.”

준영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의무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래의 레전드 데니스 로.

그가 나이 지긋한 팀 닥터에게 칭얼대고 있는 중이었다.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성가셨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보자, 물집이 생겼다고? 이 정도 크기라면 빨리 나을 방법이 있는데.”

“정말이에요, 형님?”

데니는 바로 반색을 했다.

지난 한 달가량 준영과 같이 훈련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단지 드리블이나 볼 컨트롤 같은 발 기술만 익힌 게 아니다.

스쿼드와 같이 간단하면서도 효율이 좋은 맨손 체조나 훈련법으로 운동 능력도 한결 향상되었다.

그 때문에 데니는 준영의 말이라면 콩으로 치즈를 만든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동양의 비술 같은 건가?”

“예전에 어깨너머로 배운 야매(?) 시술이 있어요. 실과 바늘, 주사기랑 빨간약 있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팀 닥터는 서랍에서 준영이 찾는 것들을 꺼내 주었다.

“형님, 혹시 수술을……?”

“그렇게 거창한 거 아니니까 겁먹지 마.”

데니를 안심시킨 준영은 소독한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 난 부위에 조심스럽게 찔러 넣어 빼냈다.

“보세요. 이렇게 하면 상처 안에 있는 물기가 실에 흡수되어 빠져나오죠.”

“허, 이런 방법이 있었군!”

물기를 모두 제거한 후, 준영은 주사기에 빨간약을 채워 물이 빠진 상처 부위에 주입했다.

“아야야야얏!”

“짜식, 엄살은…….”

“진짜 따갑다고!”

좀 무식한 처방이지만, 효과는 좋다.

지금 인상을 구긴 데니도 내일이면 다시 팔팔 뛰어다닐 것이다.

“그런데 아우야, 이것은 무엇이냐?”

“어, 그건…….”

준영은 데니의 소지품들이 놓인 자리에서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인상을 구기고 있던 데니는 금방 진땀을 뻘뻘 쏟았다.

“산 건 아니고 팬에게 선물받은 거라…….”

“야 인마, 내가 담배 피우지 말라고 했지?”

준영이 허더스필드에 와서 제일 경악한 것은 흡연 문화였다.

세상에 프로 선수라는 녀석들이 담배를 피우다니!

그것도 라커룸에서도 아주 당당하게 연기를 뿜어냈다!

“흡연은 폐에 나쁘다고 몇 번을 말해야 돼? 니코틴에 절어 버린 폐로 근육에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될 것 같아? 금방 지쳐 버리고 힘을 내지 못한다고!”

“잘못했어요, 형님.”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은 준영은 뿌옇게 날아드는 담배 연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리니, 팀 닥터가 파이프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게 보였다.

“하아… 선생님이 이러시면 제가 설교하는 의미가 없잖아요!”

“이거야 원. 허버트 채프먼이 부활해서 온 것 같군.”

팀 닥터는 투덜대며 불을 껐다.

MW 포메이션의 창시자인 1920년대 영국 축구의 명장, 허버트 채프먼.

그는 아스날 FC를 맡기 전에 허더스필드 타운의 감독으로 있었다.

그는 선수들의 흡연을 엄격히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음주도 허락하지 않았다.

현재 감독인 빌 섕클리도 강요하진 않지만 금연과 금주를 권장하는 편이다.

그렇다 보니 금연에 철저한 준영을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다.

“근데 이건 아나? 담배라면 학을 뗀 채프먼은 일찍 죽었지만, 골초인 처칠은 장수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야.”

“처칠 총리가 축구 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습니다.”

준영도 이 시대에 와서 알았지만, 윈스턴 처칠은 아직 팔팔하게 살아 있었다.

그리고 흡연을 숨쉬기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1950년대 애연가들의 우러름을 받는 중이다.

‘혹시 1부 리그 팀들도 이 지경인가?’

아직 안 봐서 모르겠지만, 사회적인 분위기를 봐선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피우기∼’라고 노래 부르고들 있으니 말이다.

21세기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준영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

“뭐 해, 안토니! 후딱 뛰어 올라가지 않고!”

“레이, 얼른 마크를 붙어!”

8월 하순으로 접어들자, 팀 훈련은 더없이 진지해졌다.

1957-1958 시즌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주전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

그렇다 보니 오늘 같은 연습 경기도 거의 실전을 방불케 했다.

이 와중에 단연 눈에 띄는 건 준영이었다.

장신을 십분 이용한 뛰어난 공중 장악, 침투 패스를 제대로 끊어 내는 날카로운 인터셉트 등등.

그중에 섕클리가 가장 만족하는 건 공격수에 대한 강력한 마크 능력이었다.

“좋아! 그래, 바로 저게 수비지!”

준영이 몸싸움과 태클에 성공할 때마다 그는 반색을 하며 박수를 보냈다.

물론 그렇다고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간혹 패스나 상대 공격수를 방치해 버릴 때가 있었던 것.

“뭐 하는 거냐, 존! 왜 멀뚱히 서 있어!”

“오프사이드였네요.”

코치의 말에 불구하고 섕클리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방금 준영은 오프사이드라는 걸 알고 내버려 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대 침투 패스가 들어오는 순간에 순간적으로 전진해서 오프사이드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오프사이드를 이용한 함정이라……. 꽤 영악한 수법이군.”

“제가 온 곳에선 곧잘 써먹던 거였어요.”

연습 경기가 끝나고 섕클리에게 불려 온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프사이드 트랩.

공격수를 순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이 수비 방식은 6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70년대 네덜란드에서 아리에 한이라는 함정 파기 전문가가 나오면서 만개한다.

다시 말해 아직은 이른 수법.

섕클리는 기발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그래도 너무 위험해. 심판이 오프사이드를 잡아내지 못하면 어쩔 거야?”

“물론 그런 위험은 있습니다만…….”

“특히 넌 더 손해 볼 수 있어. 심판들 중에 인종주의자들이 없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감독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한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시대는 VAR도 없기에 오심이 번복되는 일은 드물다.

섕클리의 말대로 심판이 의도적으로 무시해서 사고가 터지면 자신이 독박을 쓰게 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끝까지 마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섕클리는 이번에는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정식 계약은 언제 할 거야?”

준영은 현재 가계약 상태.

물론 이 상태로는 리그에 출전은 불가능했다.

“그게 말씀드렸다시피…….”

“그래, 신분 관련 서류들을 분실했다지? 근데 아직 재발급이 안 된 건가?”

21세기에서 온 준영은 이 시대에서는 불법 체류자나 마찬가지.

다행이라면 2차 대전이 끝난 후로 영국 정부가 비자나 신분증 제도를 취소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건 살아가는 데 불편이 없다는 것뿐, 취업이나 계약을 할 때는 필요한 서류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혹시 딴 팀이랑 계약하려고 미루는 건 아니겠지?”

“하하하, 설마요.”

사실 라커룸 스모킹 건에 충격을 받아 다른 팀을 알아보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 팀들에 대한 정보나 인맥도 부족하고, 당장은 훈련을 하며 경기 감각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기에 포기했다.

‘어차피 신분 증명도 안 되고 말이지.’

준영은 이 문제를 도와주고 있는 알버트에게 상황이 어찌 되어 가고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계약은 시즌 개막 전에 반드시 끝내 놓아야 하니까.

***

당시 축구화는 지금처럼 튼튼하지 못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분은 한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신 홍덕영 옹이신데, 보다시피 저땐 저렇게 망치로 축구화 스터드를 틈틈이 두들겨 놔야 했습니다.

본문에서 준영이 했던 야매 시술은 군대에서 경험해 보신 분이 있을 거라 봅니다. 물 뺀 자리에 빨간약 넣는 건 2002년 대표팀 닥터였던 최주영 선생님이 했다고 하는데, 이천수 선수가 이걸 배워서 스페인 레알 소시에다드에 있을 때 혼자서 치료하고 그랬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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