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9화 (9/400)

Round 09. 과거와 미래

놀라는 알버트의 반응에 준영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워낙 광대한 스케일의 글이라 아직 초반부, 그러니까 일루바타르가 세상을 창조하는 부분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있어요.”

“…….”

“그 이상 보면 곯아떨어지기 일쑤라서, 잠이 잘 안 올 땐 수면제 대용으로 활용하곤 했죠.”

아마 톨킨 옹이 아시면 그 두꺼운 책으로 자신의 뚝배기를 갈기지 않을까.

너스레를 떨던 준영은 이어지는 알버트의 말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실마릴리온은 아직 미완성이야.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걸 읽을 수 있었나?”

“예?”

갑자기 막다른 골목에 갇힌 기분.

외통수에 걸렸다는 게 이런 상황을 말하는 모양이다.

이 상황에선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진땀을 뻘뻘 흘리는 준영을 가만히 바라보던 알버트가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가 준영을 데려간 곳은 서재 바로 옆방이었다.

거기엔 많은 사람들의 사진이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알버트는 그중에 오래된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 찍힌 흑백 사진을 가리켰다.

“내가 1차 대전 당시에 참전했을 때 찍었던 사진이지.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톨킨이야. 나와 같은 대학을 나온 동기이지.”

‘설마 이런 유명인과 친분이 있었을 줄이야!’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준영에게 알버트는 다음 사진을 보여 주었다.

클래식한 스타일의 경주용 자동차를 배경으로 두 남자와 어린아이가 찍힌 사진이었다.

“나와 내 아들, 그리고 아들의 대부인 루이스 즈보로프스키지.”

“유명한 분이신가요?”

“그래. 나랑 같은 폴란드계 혈통인데, 자동차 엔지니어이자 레이서로 이름을 날렸어.”

안타깝게도 사고로 요절을 했다고 한다.

루이스의 이름도 그 대부에게서 따온 거라고.

“즈보로프스키랑 나는 한때 같이 애S턴 마틴에서 일하기도 했어. 자네 차도 애S턴 마틴이지?”

“네, 맞습니다.”

“차 시트에는 DB12라 찍혀 있더군. 올해 DB 넘버링으로 나온 최신형은 마크3야. DB12는 없어.”

출판되지 않은 책의 제목과 내용을 알고 있다.

또한 현존하지 않는 모델, 그것도 황홀할 정도의 세련된 디자인에 알 수 없는 기술이 잔뜩 적용된 자동차를 몰고 왔다.

거기다 현재의 축구 선수들보다 진보한 경기 능력을 습득하고 있고, 용모나 행색도 특이하다.

이런 증거들을 보면 준영의 정체는 알 만하지 않은가.

“지금까진 자네가 곤란해할까 봐 묻지 않았네만… 도대체 자넨 어디서 온 건가?”

준영은 이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뭐, 이렇게 된 이상 확실히 털고 가는 게 맞겠네요.”

물러설 틈은 없다.

언제까지 감추고 속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설픈 거짓말과 침묵은 지금 쌓아 놓은 신뢰와 호의도 무너트리고 말 터.

이에 준영은 정면 승부를 택했다.

“전 미래에서 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후인 2026년에서요.”

***

“맙소사! 이 무슨…….”

알버트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계속 터져 나왔다.

혹시나 했던 것이 진짜였다.

준영이 증거물로 꺼내 든 스마트폰과 거기에 담긴 생생한 영상과 다양한 기능들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만큼 미래에서 왔다는 준영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아니 미국에도 이런 기술이 있다고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어, 어떻게 과거로 오게 된 건가? 설마 자네 자동차는 웰스의 소설에 나오는 타임머신 같은 건가?”

“그런 영화가 있지만, 그렇지는 않고요…….”

준영은 자신이 과거로 오게 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알버트는 번개를 맞고 시간 이동을 했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우연한 사고란 말인가?”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누군가 손을 쓴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누군지 짐작이 간 모양이군.”

“예, 루이스 대령 같습니다.”

준영이 루이스의 유령을 봤다는 말에 알버트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녀석이 모두를 구해 달라고 했다고?”

“네, 그래서 전 루이스 대령이 절 이 시대로 보낸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자네를 택했을까?”

“글쎄요… 아마도 축구를 좋아했으니 그랬을지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광팬이니 새로 입단한 신참을 찍었을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어 보였다.

“이 저택을 제가 매입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자네가 우리 집을 샀다고?”

“네, 미래에서요.”

준영은 스마트폰에 저장된 주택 매매 계약서 파일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21세기에서 찍었던 프레드로 저택의 사진들도.

“많이 황폐해졌군.”

“네, 누가 살진 않고 대충 관리만 했다고 들었습니다.”

준영은 씁쓸한 표정을 짓는 알버트를 위로하듯이 말을 이었다.

“뭐, 이젠 이렇게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불행한 사고를 막았으니까요.”

“확실히 자네가 리즈를 구해 줬지. 하지만 아직 ‘다른 불행들’이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야.”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다.

알버트는 스마트폰을 돌려주며 준영의 어깨를 도닥였다.

“자네가 와서 정말 다행이야.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군.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그런 말씀은 마세요. 남작님께서 절 이 시대로 소환하신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연관이 있는 건 사실 아닌가.”

알버트가 짐작하기에, 준영은 21세기에서 굉장한 대우를 받던 특급 선수가 분명했다.

그러니 애S턴 마틴 같은 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대저택을 소유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는 아무도 그의 경력을 알아주지 않는다.

거기다 재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과 생이별까지 하게 되었으니!

“내 능력으론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잃은 만큼 새로운 걸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네.”

“말씀만으로도 고맙네요.”

준영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앞날은 불투명하다.

그래도 자신을 아낌없이 후원해 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생겨서인지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아, 그런데 21세기는 어떤가? 혹시 미국과 소련이 3차 대전을 벌이지 않았나?”

한 가지 의문이 풀리자, 알버트는 미래에 대해 궁금해졌다.

제일 궁금했던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냉전의 결과였다.

“그럴 뻔한 적이 몇 번 있긴 했지만, 다행히 피해 갔죠.”

“전쟁의 공포가 불안한 평화를 이어 간 모양이로군.”

“예, 또 세계 대전을 벌였다간 이번엔 인류가 멸망할 걸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요.”

“앞서 두 번의 끔찍한 전쟁이 아주 헛되진 않았군. 인류에게 큰 교훈을 줬으니 말이야.”

알버트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 손녀들이 무서운 핵전쟁에 휘말리는 건 아닌가 걱정을 했었으니까.

“자네가 사는 시대엔 냉전이 끝났나?”

“예,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20세기 말에 망했습니다. 심지어 소련도요.”

“허! 그럼 폴란드도 해방되었겠군. 아 참, 여왕 폐하께서는 어찌 되었나?”

“Very Long Live The Queen이시죠. 그 바람에 왕자님은 손자까지 본 나이에도 즉위를 못했습니다.”

“저런! 좋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구만. 아,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같이 호기심이 샘솟은 알버트는 미래의 일들을 연방 물어보았다.

덕분에 준영은 밤늦게까지 그의 말상대가 되어 줘야 했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손웅민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믿지 못했다.

앞날이 창창한 후배가 갑자기 실종되었다니!

“여기서 사고가 난 게 분명해요?”

웅민은 경찰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사내에게 물음을 건넸다.

앙드레라는 이 흑인 사내는 이준영의 에이전트였다.

그도 손웅민만큼이나 어이없고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로 CCTV에 준영이 이쪽 길로 진입하는 게 찍혔어요. 흔적이 남은 타이어도 애S턴 마틴에서 사용하는 모델이고요.”

“그러니까 여기서 교통사고가 난 게 맞다 이거군요.”

“그렇다고 봐야 하는데…….”

문제는 타이어 자국을 제외하면 사고가 난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는 점.

경찰이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부서진 차량의 파편 같은 건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누가 사고를 내고 재빨리 치웠을 가능성은……?”

“그건 아닐걸요. 이걸 봐요. 급정거를 하면서 생긴 타이어 자국인데, 여기서부터 끊겼어요.”

자국이 그냥 사라진 게 아니라, 마치 지우개 같은 걸로 싹 지워 버린 것처럼 없어졌다.

“그래서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외계인이 납치해 가기라도 했대요?”

“휴우! 모르죠, 그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답답해하는 건 웅민이나 앙드레만이 아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 관계자들도 찾아와서 정신없이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난감한 실종 사건을 맡게 된 현지 경찰들도 골머리를 앓았다.

사고 흔적도, 실마리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기자들은 이리저리 쑤시고 돌아다녔다.

유망한 스타플레이어의 실종.

다들 유례없는 사고를 취재하러 와서는 뭔가 건수를 찾으려 난리였다.

“이봐요, 아무 데나 막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아직 수색이 덜 끝났다고!”

경찰들이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기자들을 단속하는 사이, 맨체스터 쪽에서 온 승용차가 멈춰 섰다.

고개를 내민 운전자는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순경에게 물음을 건넸다.

“여기 무슨 일이 터졌어요?”

“뉴스 안 보셨구만. 축구 선수 한 명이 실종됐습니다. 그쪽은 무슨 일이죠?”

“우리 할머니께서 고향에 가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고향이 어딘데요?”

“저 앞의 모즐리요.”

경찰은 뒷좌석에 앉은 노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낡은 곰 인형 하나를 부둥켜안고 있는 노파는 경찰에게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요, 경찰 아저씨.”

“아, 예. 안녕하십니까.”

“이쪽은 내 친구 루지예요. 루지야, 경찰 아저씨에게 인사해야지?”

마치 어린애처럼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노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곰 인형에게 손 인사를 한 경찰은 손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께서 좀…….”

“네, 오락가락하세요. 힘들게 살아오셔서 그런지 어린 시절 추억을 그리워하시죠.”

“저런, 고생이 많으시군요.”

“뭘요.”

경찰은 바로 길을 열어 주었다.

차가 이동하자, 노파는 사고 현장을 슬쩍 바라보고는 물었다.

“조지, 사람들이 왜 모여 있는 거야?”

“축구 선수가 실종됐대요.”

“축구 선수?”

“네, TV에 나오잖아요. 음바페나 홀란드, 뎀벨레 같은 애들.”

“흐음… 몰라, 그런 녀석들.”

고개를 내젓던 노파.

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눈에서 묘한 이채가 번득였다.

그러곤 뭔가 생각났는지 입을 열었다.

“축구는 존이 제일 잘하지.”

“예? 누구요?”

그녀는 곰 인형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거기서 꺼낸 낡은 흑백 사진.

노신사와 세 자매가 찍혀 있는 사진에 홀연히 또 한 사람의 형상이 떠올랐다.

큰 키에 당당한 체격을 가진 동양인 청년.

그리움이 가득한 미소를 지은 노파는 그의 모습을 쓰다듬었다.

“존… 존 영 리…….”

***

루이스 즈보로프스키를 비롯해 당시 영국에는 폴란드계 이민자나 그 후손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19세기부터 늘었다는데, 2차 대전 때 폴란드 망명 정부까지 오면서 규모가 꽤 커졌습니다. 폴란드계에 대한 대규모 영주권 발급과 관련한 법안도 마련했을 정도로.

에버튼에서 뛴 수비수 필 야기엘카가 이런 폴란드계 영국인이라고 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