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8화 (8/400)

Round 08. 꼬리가 길면 밟힌다

‘맙소사! 데니스 로라니!’

1964년 발롱도르 수상자, 세계 축구 베스트 11에 선정된 스타플레이어!

별명은 King.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되는 레전드 스트라이커다.

‘진짜 데니스 로인가? 확실히 실력을 생각하면…….’

“왜 그래? 뭔가 문제라도?”

“아니, 문제는 없고……. 근데 지금 몇 살이냐?”

“내 나이? 16살인데.”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준영이 데니스의 머리에 박치기를 날렸다.

“으악! 왜, 왜 그래?”

“내가 형이야, 인마.”

레전드가 될 놈이 싸가지가 없어서 되겠는가.

미래에 제왕이라 불릴 그의 품격을 위해서라도 준영은 그 말투나 언행을 바로잡아 주기로 했다.

이 점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던지 선수나 코칭스태프도 그냥 피식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앞으로 형님이라 불러.”

“알았어… 요, 형님.”

이렇게 데니스의 훈계가 끝난 직후, 섕클리가 오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이제 최종 평가를 해 줄 모양이라 생각한 준영은 냉큼 그에게 달려갔다.

“어떻습니까. 아직 럭비 선수처럼 보입니까?”

“축구 선수는 맞는구만. 근데 말이야… 이거 알고 있나?”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섕클리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지금 풋볼 리그에 동양인 선수는 한 명도 없어.”

유색 인종 선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심지어 백인 선수라도 영어를 못하면 뛸 수 없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야.”

“그럴 테죠.”

준영도 이미 겪어 봤다.

이 시대는 인종 차별이 심하다는 사실을.

하나 21세기로 돌아갈 수 없는 이상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못하면 여기서 축구화를 벗어야 하리라.

“하지만 난관이 힘든 만큼 결실도 크고 달콤하겠죠.”

신부님이 했던 말씀이다.

그 말에 섕클리의 거친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 팀에서 뛰어 보겠나?”

“네, 재밌을 것 같네요.”

비록 2부 리그 팀이지만, 레전드가 될 감독에 선수가 있다.

그들과 함께 승격을 이뤄 내면 자신의 가치는 높아지지 않겠는가.

그러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붉은 저지를 입는 꿈을 다시 이룰 수 있을 터!

‘할 수 있어. 여기서부터 출발해 보는 거야!’

자신 있는 미소를 지은 준영은 섕클리가 내민 손을 잡았다.

***

준영과 합의를 끝낸 섕클리 감독은 알버트에게 감사를 건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선수를 건진 것 같습니다.”

“만족했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데니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준영을 슬쩍 바라보던 섕클리가 말을 이었다.

“대체 저런 선수를 어디서 찾으신 겁니까?”

영국에 동양인은 소수였고, 그렇기에 동양인 선수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런데 남다른 체격에 상당한 실력을 갖춘 선수가 뚝 떨어질 수가 있는지?

“공원에서 공을 차고 있는 걸 보고 데려왔네.”

“예? 그 무슨 버스비 같은 말씀이신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버스비는 예전에 동네에서 공을 잘 차는 애송이를 눈여겨보고 데려와 키운 적이 있다.

그 선수가 바로 지난 시즌에 데뷔한 바비 찰튼이었다.

“어디서 왔다고 하던가요?”

“한국에서 왔다고 하더군. 루이스와도 약간 안면이 있던 모양이던데…….”

그것 말고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알버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거참 미스터리한 녀석이군요.”

“그래, Mr. Lee지.”

“아이고, 그런 썰렁한 소리를 하시다니…….”

섕클리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사실 알버트는 준영의 이상한 자동차를 보고 짐작하고 있는 게 있었다.

오늘 테스트나 훈련을 봐도 그랬다.

이건 단순히 월등한 정도가 아니라, 뭔가 한 차원 선진화된 플레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알버트는 자신의 추측을 보다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 그리고 함부로 발설해서 좋을 것도 없고.’

손녀를 살려 준 고마운 젊은이다.

그런 은인을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건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제대로 알고 싶긴 하군.’

준영의 정체나 그가 온 곳 등등.

기다리다 보면 들을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

준영이 허더스필드를 다녀오고 사흘 후, 알버트의 첫째 손녀 엘리자베스가 퇴원을 했다.

남작 부인이 전쟁 중에 눈을 감고, 4년 전에는 폐렴으로 루이스의 부인마저 세상을 뜨면서 장녀인 엘리자베스가 저택의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녀마저 잘못되면 어쩌나 다들 걱정하고 있던 차에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자 가족과 고용인들 모두가 기뻐했다.

“리즈 언니, 이제 괜찮은 거야?”

“응. 그동안 검사도 몇 번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대.”

“그런데 머리의 붕대는?”

“꿰맨 상처가 있어서. 실밥을 뽑았으니까 금방 나을 거야.”

“다행이다, 다행!”

껌딱지처럼 매달린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던 리즈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정말 갑갑했고, 마음이 불안해서인지 무서운 꿈도 꾸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상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저 사람은……?’

리즈의 눈길이 이방인 청년에게 향했다.

그녀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는 그에게 다가가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존 Y. 리 씨죠? 할아버지께 이야기 들었어요.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무사하셔서 다행이네요.”

준영은 정말 구해 주길 잘했다 싶었다.

단지 활짝 미소 짓는 리즈가 아름답기 때문은 아니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다.

비록 타인이라도 그런 고통을 겪는 걸 원치 않았다.

남의 슬픔을 지켜보다 보면 자신이 겪은 아픔까지 떠올라 버리니까.

“근데 손을 다치셨나요?”

리즈의 시선이 준영의 손에 난 상처로 향했다.

아물긴 했지만, 피딱지가 두껍게 앉은 게 제법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

“아, 이거요? 영광의 상처죠.”

“네?”

“그러니까 그때 리즈 양을 구할 때…….”

자신을 구하다 다쳤다는 준영의 설명에 리즈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세상에… 정말 미안해요.”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이젠 다 나았으니까.”

준영은 아무런 문제없다는 듯 손가락을 움직여 보였다.

잠시 말을 주고받았던 그들은 응접실로 이동해 다과를 들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와! 축구 선수라고요?”

“그래요. 이 덩치에 축구를 한다니 못 믿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근데 축구 좋아하세요?”

“네,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셔서 저도…….”

세 자매의 아버지 루이스.

준영은 런던에서 보았던 그 군인 유령 아재가 타임 슬립의 원흉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학창 시절에 선수로 활동했지. 의욕은 넘쳤지만, 실력은 별로였어.”

손녀의 말에 옛 생각이 났던 알버트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개인기만 하려고 들었다는 둥, 멋도 모르고 알렉스 제임스(* 아스날 FC의 레전드 공격수)를 따라 배우려 했다는 둥.

이리저리 흉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에 준영은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루이스가 누구의 영향을 받아 축구광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으므로.

그때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던 앤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들 신사답지 않은 취미라고 했죠.”

“그래도 아버지는 개의치 않으셨는걸. 시간이 날 때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합은 꼭 찾아가서 보셨고.”

리즈의 말에 준영이 물음을 건넸다.

“맨유 열성팬이셨던 건가요?”

“네, 유나이티드가 세계 최고라고 하셨어요. 저랑 앤지도 어릴 때 종종 아버지를 따라가서 경기를 봤는데…….”

이야기를 들은 준영은 루이스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분명히 모두를 구해 달라고 했지.’

지금까진 ‘모두’라는 게 그의 가족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리즈를 구하기도 했고.

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모두’에 또 다른 이들이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맨유의 광팬이었다면, 혹시 버스비의 아이들의 운명도……?’

1957년 현재 맨유의 주역이자, 영국 축구의 아이돌.

루이스는 몇 달 후 뮌헨 참사로 희생되는 버스비의 아이들을 구해 주기를 원하는 게 아닐까?

‘물론 그것도 추측일 뿐이지.’

이미 빌 섕클리와 인연을 맺은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버스비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들을 구할 수 있을지?

미래를 알고 있지만,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

준영은 훈련 외의 시간에는 여러 가지 취미 활동을 즐기곤 했다.

피로를 풀고 해외 생활로 인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하지만 1957년으로 오면서 일부 취미는 포기해야 했다.

대표적인 게 SNS와 웹서핑.

TV 시청도 마땅찮았는데, 작은 흑백 브라운관 화면에 나오는 프로그램들은 뉴스 말고는 그리 볼만한 게 못 되었다.

“라디오에 나오는 음악도 옛날 노래들뿐이니…….”

이럴 줄 알았으면 스트리밍 서비스로 듣지 말고 많이 다운받아 놓을 것을.

후회하던 준영은 거실에서 기타를 발견했다.

전형적인 어쿠스틱 기타.

연주법은 예전에 신부님께 배운 적이 있었다.

‘요즘은 통 쳐 보지 않았는데, 손이 굳지 않았으려나?’

한번 쳐 볼까.

기타를 집어 든 준영은 알고 있는 곡 중에서 쉬운 걸 골라 연주해 보았다.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다행히 실력이 영 녹슬진 않았다.

흥이 나서 노래까지 흥얼거리던 준영이 곡을 마쳤을 때, 등 뒤에서 감탄이 들려왔다.

“좋은 노래네.”

고개를 돌리자 앤지가 서 있었다.

“제목이 뭐죠?”

“Imagine.”

“가사에 딱 맞는 제목이네.”

고개를 끄덕이던 앤지는 준영에게 기타를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이거 앤지 양 거였어요?”

“취미라서요.”

준영에게 기타를 건네받고 자리에 앉은 앤지는 방금 들었던 Imagine을 연주했다.

‘잘하네. 한 번 만에 외워 버리다니…….’

취미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내심 감탄하는 준영에게 앤지가 다시 물음을 건넸다.

“근데 이거 누구 곡이죠?”

“그게… 나도 잘 몰라요.”

존 레논이 부른 거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속한 비틀즈가 이미 활동 중일 수도 있는 데다, 이 노래는 1971년에 발표되었으니까.

“모르는데 알고 있다고요?”

“하하, 지나가다 들었는데 너무 좋은 곡이라…….”

준영은 대충 얼버무리고는 자리를 떴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앤지는 이내 다시 연주에 집중했다.

***

‘나 참, 노래를 듣거나 연주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다니.’

내심 한숨을 내쉬던 준영은 책이나 보자는 생각에 저택 서재로 향했다.

프레드로 저택의 서재는 컸다.

웬만한 작은 도서관이랑 규모가 비슷할 정도.

이는 독서를 좋아하는 알버트의 취향 때문이었다.

그가 모아 놓은 책 중에는 준영이 예전에 본 책도 있었다.

“반지의 제왕… 세계적인 대작이지.”

터너 신부님이 1년에 한 번은 완독하는 필독서, 반지의 제왕.

그 때문인지 몰라도 보육원에서 영어를 배울 때 교재가 이 소설 원서였다.

‘옛날 생각나네.’

추억에 젖은 준영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을 때, 알버트가 책을 고르다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톨킨의 소설을 좋아하나?”

“예. 호빗도 봤고, 실마릴리온도 봤습니다.”

“뭐? 실마릴리온을?”

알버트가 알기로 실마릴리온은 출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준영이 어떻게 그걸 본 걸까?

***

실마릴리온은 톨킨 선생이 젊은 시절부터 계속 구상해 왔다고 합니다. 반지의 제왕보다 먼저 실마릴리온을 출판하려 했을 정도.

하지만 너무 난해하고 방대해서 결국 생전에 완성되지 못했고, 아들분이 1977년에 출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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