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07. 될 놈이 나타났다
준영의 생각과 달리, 빌 섕클리는 그 성실함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혓바닥과 달리 몸의 근육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장신인데도 민첩하고 탄력이 뛰어나. 전신의 근육이 골고루 균형 있게 발달했기 때문이지.’
그런 근육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에 섕클리는 준영이 얼마나 장신의 단점을 보완하려 애썼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축구는 근육과 체력이 전부는 아니지.’
체력 강화 훈련이 끝났다.
잠시 휴식을 취했던 준영과 선수들은 이후 공을 쓰는 훈련에 들어갔다.
‘어디 발재간은 얼마나 좋은지 볼까?’
호기심을 품고 계속 지켜보는 섕클리 감독.
준영은 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려 애썼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공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긴장한 건가?’
섕클리는 그리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젠장, 이놈의 골동품!’
준영은 아직 이 시대의 공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엔 볼 컨트롤이 약간 불안했다.
하지만 점점 이 딱딱하고 무거운 공에 익숙해졌다.
‘패스는 정확하고 빠르게! 드리블은 부드러우면서 과감하게!’
기본부터 시작해 조금씩 난이도 높은 기술로.
이렇게 한 수 선보이는 준영의 몸놀림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발바닥을 이용해 전후좌우로 공을 가볍게 다루는 드래그 백, 공을 가운데 두고 헛다리를 짚는 스텝 오버(Step Over).
현란한 발재간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투우사같이 화려하구만.”
“저런 개인기는 헝가리 놈들에게서도 본 적이 없어요.”
코치들이 감탄하는 사이, 섕클리는 준영의 개인기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발목이군. 발목의 움직임이 부드러우니 저런 개인기가 잘 나오는 거야.’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건 선수의 능력도 있지만, 축구화의 역할도 무시 못한다.
지금 준영이 신은 축구화, 그건 웸블리에서 악몽을 보여 준 헝가리의 마법사들이나 월드컵에서 우승한 독일 선수들의 최신식 축구화와 흡사했다.
아니, 더 가볍고 착용감이 좋아 보인다고 할까.
그에 반해 허더스필드나 대다수 영국 선수들이 애용하는 축구화는 튼튼한 쇠가죽으로 만들어졌고, 목이 높았다.
이것은 발목을 보호하는 데는 좋지만, 발목 움직임이 부자유스럽기에 개인기를 쓰기에는 애로 사항이 있었다.
‘그런데 저 동양인 녀석은 그 푸스카스보다 더 능숙해 보인단 말이지.’
마치 이 정도는 기본이라는 듯한 자연스러운 움직임.
혹시 그게 기본이면 다른 놀라운 개인기도 또 있는 걸까?
준영을 바라보는 섕클리의 눈길은 점점 더 깊어졌다.
***
“이번엔 슈팅 훈련인가?”
골키퍼가 있는 골대로 슈팅을 하는 간단한 훈련.
준영이 보기에 이는 슈팅 훈련이라기보다 골키퍼의 선방 훈련에 더 가까웠다.
‘어휴, 저 녀석도 장갑은 끼지 않았군.’
골키퍼의 모습에 준영은 혀를 찼다.
21세기의 공보다 훨씬 무겁고 딱딱한 가죽 공을 맨손으로 막다니!
‘저러다 잘못하면 손가락 관절을 다치게 될 수도 있는데…….’
“어이, 네 차례라고.”
코치의 부름에 준영은 거침없이 슈팅을 날렸다.
퉁-!
가볍게 발에 맞은 공이 살짝 떠서 정면으로 느릿하게 날아갔다.
하지만 이미 몸을 날린 골키퍼의 자세는 완전히 무너졌고, 공은 여유롭게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파넨카 킥.
실제 역사보다 20년 정도 앞서 등장한 이 슈팅에 다들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푸하핫! 뭐야, 저 슈팅?”
“저런 것도 들어가는구나.”
“정신 차려, 네일. 이런 엉터리 슛도 못 막아서 되겠어?”
동료들의 웃음과 코치의 질책에 골키퍼 네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섕클리는 웃지 않았다.
전혀 엉터리 슛이 아니었으니까.
‘골키퍼의 움직임을 100퍼센트 예상하고 찼군!’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느리고 약한 슛이 들어갈 리 없다.
“배짱 한번 두둑하구만.”
구경하던 알버트의 말에 섕클리도 동감했다.
방금 그건 정말 엄청난 자신감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슈팅이니까.
하지만 농락당한 피해자는 납득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봐, 중국인! 다시 차!”
표정이 굳어진 네일이 준영에게 공을 던져 보냈다.
“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차 보라고!”
“진지하게 한 건데?”
파넨카 킥은 실패하면 키커의 데미지가 더 크다. 그러므로 절대 건성으로 할 수 없는 슛이다.
“다시 찰 배짱은 없는 거냐? 이상한 꼼수 부리지 말고 남자답게 제대로 된 슈팅을 날려 봐!”
‘참 나, 배려해 준 것도 모르고…….’
맨손으로 슈팅을 막는 게 안쓰러워서 일부러 난이도 높은 슈팅을 했건만.
“좋아, 원하는 대로 해 주지.”
공을 슈팅 지점에 놓은 준영.
살짝 뒤로 물러나 제자리걸음을 하던 그는 한순간 달려들며 슛을 날렸다.
뻐- 엉!
발등에 제대로 걸린 슛.
정면으로 날아간 상남자식 슈팅은 네일의 왼쪽 귀를 스치며 지나갔다.
“What the f…….”
“방금 봤어, 그거?”
“저런 덩치가 차면 저런 슈팅이 나오는구나.”
허더스필드 선수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공이 한순간 사라진 것 같았다가 골대 그물을 세차게 출렁이며 나타났으므로.
워낙 빠르고 강하게 들어갔기에 네일은 막을 엄두도 못 냈다.
아니, 만약에 공이 스쳐 지나간 게 아니라 얼굴에 정통으로 날아왔으면?
섬뜩한 공포감에 그의 낯빛이 파랗게 질렸다.
“자, 이제 만족하나?”
준영의 물음에 네일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오금이 저린다는 게 어떤 건지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
이어지는 훈련에서도 준영은 단연 돋보이는 능력을 선보였다.
수비 훈련에서 뛰어난 위치 선정과 집중력을 보여 줬고, 대인 방어에서도 강한 차징과 태클로 상대를 압도했다.
“아시아에도 저런 선수가 있었다니!”
“피지컬까지 좋은데, 테크닉도 수준급이라니. 뭔가 반칙 같아.”
“쳇, 럭비나 할 것이지…….”
휴식 시간에 선수들의 시선이 준영에게 쏠렸다.
호기심 혹은 감탄, 또는 시기의 눈빛.
하지만 정작 그들은 준영이 자신들의 실력을 살펴봤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눈에 띄는 녀석은 얼마 없군. 역시 2부 리그 팀이기 때문인가.’
그래도 꽤 실력이 있어 보이는 녀석은 2명 정도 있었다.
레이 윌슨이라는 단신의 젊은 수비수와 금발의 10대 애송이 공격수였다.
먼저 레이는 발이 빨랐고, 체력도 다른 선수들보다 뛰어났다. 태클도 정확했으며, 플레이도 매우 적극적이고 부지런했다.
‘아마 쟤는 21세기에 가도 윙백으로 잘할 거야.’
하지만 그 레이보다 더 눈에 띄는 건 금발 애송이.
양발도 잘 쓰고 테크닉도 상당히 뛰어났다. 나이에 비해 판단력도 좋고, 슈팅도 정확하고 강했다.
그뿐만 아니라 준영이 보여 줬던 몇 가지 드리블 기술도 금방 쉽게 따라 할 줄 알았다.
‘보통 놈이 아닌데……. 혹시 나중에 유명한 선수가 될 놈인가?’
준영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제의 금발 애송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이, 존이라고 했던가? 와, 가까이서 보니 정말 크네.”
“무슨 용건이라도?”
준영의 물음에 애송이는 살짝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일대일로 한번 붙어 보고 싶어서.”
“뭐?”
“연습이든 실전이든, 댁같이 큰 선수랑 맞붙어 본 적이 없거든.”
이놈 봐라?
제법 당돌하지 않은가.
이미 수비 훈련에서 자신의 실력을 봤을 텐데도 덤벼들다니!
사실 바로 그 점이 애송이의 도전 의식을 자극했다.
녀석이 보기엔 준영이 보여 준 개인기나 슈팅보다 수비 능력이 더 인상 깊었다.
분명히 포지션이 수비수일 거라 확신했다.
“자신 있는 태도치곤 시선은 소극적이군.”
“어, 그건…….”
“좋아, 한번 붙어 주지.”
좀 건방지긴 하지만 적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제법 실력도 있어 보이니 나름 밟아 주는 맛도 있을 것 같았다.
“이봐, 데니가 동양인이랑 붙을 모양이야!”
“힘내라, 데니!”
“저 꺽다리 칭크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버려!”
준영과 애송이, 아니 데니가 마주 서자 선수들이 들떴다.
코칭스태프들도 관심을 가지고 이 대결을 지켜보았다.
섕클리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음은 물론이다.
“자, 어디 한번 덤벼 보시지.”
“좋아.”
슬쩍 공을 굴려 가던 데니는 준영이 앞을 딱 가로막자 슬쩍 시선을 피했다.
시작부터 주눅이 든 것인가.
준영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이러고도 잘도 도전할 생각을… 아니!’
한순간 헛다리 짚기에 가까운 동작을 보이던 데니가 날카로운 돌파를 시도했다.
황급히 몸을 날린 준영은 데니의 앞을 막아섰다.
“아깝네. 성공할 수 있었는데.”
‘위험했다!’
역시 보통 녀석이 아니다.
자신이 보여 준 기술을 베껴서 써먹는 건 물론이고, 순간적인 움직임도 날카로웠다.
***
화들짝 놀란 준영의 모습에 섕클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후후, 저 녀석, 데니를 얕보고 있었나 보군. 괴물 같은 녀석인 줄도 모르고.’
아직 덜 여물긴 했지만, 기량이 무르익을 20대엔 단연 영국 축구 최강의 공격수로 군림하리라!
이렇게 평가하는 건 섕클리뿐만이 아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맷 버스비도 데니에게 러브콜을 보낼 정도였다.
그만큼 장래성이 대단한 유망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준영이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또 한 차례 돌파를 허용할 뻔하다 가까스로 차단했다.
‘젠장, 잘못하면 된통 망신당하겠군.’
숨겨진 고수든, 미래의 될 놈이든.
테스트받으러 와서 2부 리그 애송이에게 깨지면 그야말로 개망신.
이에 준영은 실전에 준하는 수준의 집중력을 펼쳤다.
‘이 녀석, 매번 다른 곳을 보는 척하다가 제치려 들던데…….’
처음에는 주눅이 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일부러 속이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래, 그거군!’
준영이 확신한 순간, 데니가 세 번째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엔 앞서 두 번과 달리 뭔가 해 보기도 전에 금방 가로막히고 말았다.
“너 인마, 사시였구나.”
‘헉, 눈치챘나?’
데니는 사시, 소위 말하는 사팔뜨기였다.
좀 심한 편이었지만 교정을 부지런히 받은 덕분에 꽤 나아졌다.
하지만 아주 완전히 고쳐지진 않았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종종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점이 도리어 좋은 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수비수가 앞에 있을 때 손쉽게 속인다거나.
‘하지만 들통난 이상 더는 통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상체를 흔들며 페이크 동작을 취하던 데니가 앞서보다 훨씬 빠른 몸놀림으로 준영을 제치려 들었다.
“까불지 마.”
“캑!”
순식간에 턱 하니 막아선 준영이 어깨로 데니를 밀어 버렸다.
꽤 거친 차징에 저만치 날아간 데니는 필드에 나동그라졌다.
“으으, 이건 반칙이라고!”
울상을 지은 데니가 그렇지 않냐는 듯 감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섕클리는 고개를 저었다.
거칠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정당한 몸싸움이었으므로.
데니에게 다가간 준영은 그를 일으켜 세워 주며 말했다.
“나같이 큰 선수랑 맞붙어 본 적이 없다고 했지? 근데 난 너처럼 빠르고 발놀림이 좋은 놈들과 여러 번 붙어 봤단 말이지.”
“그랬구나. 역시 경험이…….”
“한 수 배우고 싶으면 어디 계속 덤벼 봐.”
“알았어.”
공을 넘겨받은 데니가 다시 자세를 잡으려는 때, 준영이 물음을 건넸다.
“아 참, 너 이름이 뭐냐?”
“나? 데니, 데니스 로.”
‘뭐!’
준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시대 축구계를 경험하고 이렇게 놀란 건 처음이었다.
***
이름만으로 이미 아는 분이 있을 것 같네요.
데니스 로는 14살 때 허더스필드 타운과 계약했는데, 맨유와 리버풀에서 영입하려고 했을 정도로 당시 굉장한 유망주였습니다. 그 뒤의 행보 역시 엄청났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