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6화 (6/400)

Round 06. 클래스는 영원하다

준영은 가볍게 러닝을 시작으로, 개인 훈련을 시작했다.

“There are places I’ll remember∼ All my life, though some…….”

스마트폰에서 재생한 비틀즈의 ‘In my life’를 흥얼거리며 아직 어둡고 텅 빈 새벽의 길을 뛰었다.

“Some are dead, and some are living… 가만, 비틀즈가 활동하던 것도 이맘때였나?”

터너 신부님이 좋아한 비틀즈.

잘하면 그 전설급 아이돌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틀즈야 그렇고, 신부님이 말씀하신 이 시기 영국 축구 최고의 아이돌이라면…….’

버스비의 아이들.

이 시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명장 맷 버스비가 탄생시킨 드림팀이다.

천재 던컨 에드워즈, 미소의 암살자 토미 테일러, 그라운드의 노동자 바비 찰튼 경 등등.

신부님은 그들과 그들의 시합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곤 하셨다.

“잠깐, 지금이 1957년 7월이면…….”

잠시 멈춰서 날짜를 헤아려 보던 준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뮌헨 비행기 참사.

약 반년 후, 영국 축구계에 크나큰 충격을 안겨 준 끔찍한 사고가 터진다는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내가 버스비의 아이들을 구할 수 있을까?’

그건 미래를 안다고 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그 사고가 벌어질 걸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니까.

거기다 당장은 축구 선수는커녕 불법 체류자나 마찬가지인 신세다.

‘그 문제는 일단 나중으로 미뤄 두자.’

준영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당장 내 앞가림부터 하는 게 우선이고, 그래야 남을 도울 여유도 생길 테니까.

***

준영이 한바탕 땀을 흘리고 돌아왔을 즈음.

아침 해는 완전히 떠올랐고, 프레드로 저택의 사람들도 일상을 시작하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준영은 샤워를 하고 남작 일가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할아버지, 아까 몰리 아줌마가 그랬는데 새벽에 이상한 새소리를 들었대요.”

“몰리? 하녀장이 말이냐.”

“네. 삐리릭, 삐리리릭 그랬대요.”

카린의 말에 찔끔한 준영은 하마터면 포크를 놓칠 뻔했다.

그 이상한 새소리라는 건 분명 스마트폰 알람이었으므로.

‘디지털 알람이면 이상하게 들릴 만하겠지. 좀 더 아날로그에 가까운 소리로 바꿔야겠군.’

아니, 그 전에 개인 용품 관리를 잘해야 하리라.

미래에서 왔다는 게 들통나면 CIA에 잡혀갈지 모르니까.

아니, 여긴 영국이니 MI6이 찾아올지도?

“존, 자네는 듣지 못했나? 분명히 새벽에 운동을 나갔다면서?”

“글쎄요. 저도 들은 것 같긴 한데,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습니다.”

알버트의 물음에 준영은 대충 대꾸하며 웃어넘겼다.

그러고는 혹시나 싶어 냉큼 화제를 바꾸었다.

“어제 계단에서 어떤 장교의 사진을 봤는데, 혹시 아드님입니까?”

알버트의 아들이 공군 장교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는 말을 들었기에 물은 것이었다.

맞는지 알버트나 두 자매의 낯빛이 달라졌다.

“그래. 내 아들 루이스야.”

“그렇군요. 어쩐지…….”

준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앤지가 물음을 건넸다.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어요?”

“네?”

“말하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아서요.”

혹시 존은 한국에서 아버지를 만난 게 아닐까.

앤지를 비롯한 모두의 진지한 눈길에 준영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잠깐이었어요. 그땐 이렇게 가족분들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죠.”

“그랬군요.”

준영은 루이스를 보았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구해 줘, 모두를…….’

21세기에 있을 때 부동산 중개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프레드로 남작은 말년이 몹시 불우했고, 그의 사후에 가문은 몰락해 버렸다고.

하지만 그 운명은 달라지고 있는지 모른다.

당장 어제 교통사고에서 준영은 장녀인 리즈를 구했으니까.

‘설마 그 유령 아저씨가 날 과거로 보낸 건가? 자기 가족의 불행을 막아 주길 바라면서 말이야.’

정말 그렇다면 열 받는 일이다.

사람을 멋대로 과거로 보내다니!

‘하지만 그 심정도 이해는 돼.’

준영도 어릴 때 가족을 잃었다.

부모님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 참, 어제 내가 친분 있는 축구팀 감독에게 소개해 주겠다고 했던 거 생각나나?”

알버트의 말에 준영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셨죠.”

“좀 전에 그 친구에게 전화를 했는데, 한번 실력을 보고 싶다고 하더군. 오후에 훈련이 있으니 그때 오면 된다고 했네.”

“잘됐네요!”

반색을 했던 준영은 이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 감독분은 어떤 팀을 맡고 있죠?”

어제 오후에 같이 ‘놀았던’ 아마추어 팀이면 난감하다.

물론 아마추어 팀이나 독립 구단에서 몸 관리를 하고 프로로 입단하는 선수들도 있다.

‘그래도 이왕이면 하이패스로 프로팀에 들어가는 게 낫잖아.’

기대 반, 걱정 반.

이런 준영의 표정에 알버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시시한 팀일 것 같아 걱정되나?”

준영은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팀이면 좋겠습니다.”

“좋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아.”

살짝 뜸을 들인 알버트가 곧장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친구가 맡은 팀은 허더스필드 타운 AFC야.”

‘아, 거기…….’

21세기의 대표팀 동료가 거기서 뛰고 있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웨스트요크셔 주에 자리한 구단으로, 2부와 3부를 오락가락하는 약팀이라고.

2017-2018 시즌에 프리미어리그로 반짝 승격한 적도 있지만, 다음 시즌에 강등당하고 말았다.

“지금은 2부 리그에 있지만, 과거엔 퍼스트 디비전에서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거둘 정도로 강했지.”

“왕년의 강호라는 거군요.”

“그렇지. 여기서 거리도 멀지 않으니 그리 나쁘진 않다고 보네.”

‘2부 리그 팀이라…….’

썩 내키진 않았다.

그래도 최악은 아닌 데다 알버트가 애써 주지 않았던가.

이에 준영은 한번 찾아가 테스트에 응하기로 마음먹었다.

***

허더스필드.

맨체스터 북동쪽 약 40킬로미터 거리에 자리한 이 도시는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물들이 즐비했다.

“공업이 발전한 곳인데, 현재도 섬유와 기계, 자동차 등의 산업이 융성하지.”

“활기 넘치는 산업 도시라 이거군요.”

”그렇지. 자네의 차를 만든 애S턴 마틴의 현재 경영자도 이 고장 출신이야.”

준영과 동행한 알버트는 마치 가이드처럼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사실 여긴 축구팀보다 럭비팀이 더 유명하지. 자이언츠라고,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팀이 있어.”

“하긴, 축구보다 크리켓이나 럭비가 더 인기 있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터너 신부님께 듣기로 이 시절엔 축구가 3순위였다고 했다.

방송이나 언론도 주로 서민들이 좋아하는 축구보다 상류층이나 중산층에서 인기가 많은 크리켓이나 럭비를 더 선호했다고.

“저기가 리즈 로드라네. 허더스필드 타운 AFC의 홈구장이지.”

“혹시 리즈 유나이티드와 관련 있습니까?”

“아니. 다만 허더스필드의 라이벌이 리즈이긴 하지.”

두 사람은 리즈 로드 안으로 들어갔다.

필드에서 훈련을 준비하던 선수들은 준영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동양인인 데다 눈에 띄는 장신이었으므로.

물론 준영도 그들을 살펴보는 건 마찬가지였다.

‘혹시 이 시대는 단신 선수들이 많은가?’

일전에 맞붙었던 아마추어 팀도 그렇고, 허더스필드도 180센티미터대의 선수들이 드물었다.

재빠르고 기술이 좋은 단신 선수를 선호하는 걸까, 아니면 21세기만큼 체격이 좋은 선수가 없는 걸까.

“오셨습니까, 남작님.”

준영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거친 인상의 40대 사내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나, 빌?”

“뭐, 다음 시즌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지요.”

알버트는 준영에게 사내를 소개시켜 주었다.

“인사 나누게. 내가 이야기했던 허더스필드의 감독이야.”

“처음 뵙습니다. 준영 리라고 합니다.”

“난 빌 섕클리야. 반갑네.”

빌 섕클리?

분명히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머릿속의 정보를 뒤져 보던 준영은 이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빌 섕클리? 리버풀 FC의 레전드 감독이잖아!’

더 레즈(The Reds)가 현재의 강호로 떠오르게 만든 주역.

더구나 스포츠 업계에 아주 유명한 명언을 남긴 사람이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2부 리그 감독을 하는 걸 보면 아직 유명해지진 않은 시점인 모양이다.

그런데 대체 알버트는 이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빌은 지난 대전 때 공군에 복무했네. 그때 내 아들의 당번병이었지.”

“루이스 대령은 축구를 굉장히 좋아했어. 스탠리 매튜스 초대 발롱도르 수상자

가 공군 부사관으로 있다고 해서 일부러 만나러 갔을 정도였다고.”

“그랬군요. 그런 인연이…….”

준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빌 섕클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남작님, 소개해 주신다는 축구 선수는 어디 있습니까?”

“지금 자네 눈앞에 있지 않나.”

“예?”

섕클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동양인인 건 둘째 치고, 체격이 남달라서 남작이 새로 고용한 경호원인 줄 알았다.

“이 덩치면 럭비팀에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네만, 존은 축구 선수가 맞네. 1부 리그 주전 정도는 충분히 할 실력이었어.”

“그럴 리가…….”

섕클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알버트의 말이 영 믿기지 않았기 때문.

“제가 축구 선수로 보이지 않으신가 보군요.”

“자네 같은 체격이면 럭비나 농구를 하기 마련이니까.”

준영의 말에 섕클리는 유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사실 축구도 체격이 좋은 선수가 유리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고, 눈앞에 있는 청년은 지나치게 커 보였다.

“좋습니다. 어디 똑똑히 보시죠. 제가 축구 선수인지, 아님 럭비 선수인지.”

으르렁거리듯이 쏘아붙인 준영은 환복을 하러 탈의실로 향했다.

‘자존심이 제법 강한 모양이군.’

너털웃음을 짓던 섕클리.

준영이 다시 나왔을 때 그의 미소는 싹 지워져 버렸다.

‘저건……!’

밸런스가 잘 맞춰진 근육, 단단해 보이는 상체와 잘 단련된 하체.

척 봐도 가공할 폭발력이 느껴졌다.

가벼운 운동으로 예열을 끝낸 준영은 허더스필드의 훈련에 동참했다.

몇 가지 방식의 러닝에 순발력과 지구력 강화 운동, 여기에 허들을 넘는 점프까지.

대부분 체력 강화 훈련들이었다.

‘숨이 흐트러지지 않는군. 체력은 자신 있다는 건가?’

‘흥, 훈련이 너무 구식이라고요.’

잠자코 지켜보는 섕클리의 모습에 준영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지금 이들이 하는 건 21세기의 체계적인 피지컬 훈련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선수들의 체력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거기다 두꺼운 하체 근육에 비해 상체는 부실해 보였다.

‘그렇다고 설렁설렁해선 안 되지.’

지금 중요한 건 태도다.

저 레전드 감독이 자신을 인정하도록 만들자면, 실력보다 먼저 축구 선수로 성실한 자세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

빌 섕클리. 본문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현재 리버풀 FC를 있게 한 명장입니다.

허더스필드에는 2군 코치로 부임했다가 나중에 정식 감독이 되었는데, 이 시절에도 아주 유명한 선수를 키웠죠. 누군지는 다음 편에 언급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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