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04. 기묘한 인연
준영이 어처구니없어하는 사이, 망신을 당한 주전 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역시 예사 놈이 아니야.”
“설렁설렁 뛰어선 안 되겠군!”
켄과 힐튼, 그리고 임시 감독인 에디는 바로 만회 골을 넣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공격 전개를 하던 에디는 미드필드, 아니 수비 라인 가까이 내려온 준영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너 공격수잖아.”
“원래 포지션은 수비수거든.”
“하지만 지금은 공격수잖아! 공격수가 왜 수비 지역에 있어?”
“왜? 공격수가 수비하면 반칙이야?”
“그, 그건 아니지만…….”
공격과 수비는 분담해서 경기하는 게 상식.
물론 팀이 수세에 몰려 있다면 공격수도 수비를 어느 정도 거들어 줘야 한다.
근데 선제골까지 얻었으면서 왜 이러는 건지?
“내가 뛰던 곳에선 공격수도 수비 안 하면 욕먹어.”
“거참 이상한 나라군.”
“당신처럼 쓸데없이 공만 잡고 있어도 욕먹고.”
“윽!”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준영이 강한 마크를 펼쳤다.
당황한 에디는 가까이 있는 힐튼에게로 패스를 보냈다.
하지만 그 패스는 읽혔고, 후보 팀의 수비수가 전진해 나와 잘라 냈다.
“좋았어. 공격이다!”
재빠르게 역습을 펼친 후보 팀.
그들은 빈 공간으로 파고든 동료 공격수에게 길게 패스를 보냈다.
패스를 받아 측면을 내달린 후보 팀의 공격수는 골문 쪽을 보다가 크로스 패스를 띄워 올렸다.
‘바보 녀석, 성급하잖… 어!’
크로스를 잡아채려 뛰어올랐던 골키퍼.
그의 눈에 바람같이 쇄도해 온 꺽다리 동양인이 보였다.
‘빠르다. 대체 어느 틈에?’
질주한 탄력을 살려 그대로 점프한 준영.
이마에 정확하게 맞은 헤딩슛은 골대에 그대로 떨어졌다.
“우와, 저놈, 대체 뭐냐?”
“그냥 키만 큰 게 아니었어.”
주전 팀 선수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못했다.
역습에 맞춰 공격 지역으로 뛰어 들어가는 스피드, 거기에 수비수의 공중 경합을 가볍게 이겨 내는 피지컬까지.
이건 그냥 발재간만 좋은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프로팀에서도 저런 놈은 보지 못했다고.”
“완전히 괴물이네.”
어안이 벙벙한 건 필드의 선수들뿐만이 아니었다.
동네 팀 선수들의 훈련을 구경하러 왔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는 점잖은 인상의 노신사도 있었다.
“저 젊은이란 말인가?”
“예, 나리. 틀림없습니다.”
덩치 좋은 인도인 운전기사의 말에 노신사는 다시 준영을 바라보았다.
“축구 선수… 그것도 프로인가.”
체격이나 움직임을 보면 평범한 프로 선수는 아니다.
호기심과 호의가 뒤섞인 노신사의 눈빛은 이후로도 계속 준영의 모습을 한참 동안 좇았다.
***
시합은 해 질 무렵에 끝났다.
스코어는 3 대 1.
준영은 중거리 슛 선제골과 헤딩 추가 골, 이후 후반전에 얻은 프리킥에서 또 한 골을 넣으며 헤트트릭을 기록했다.
이에 반해 주전 팀은 후반전에는 심기일전했지만, 준영의 적극적인 수비 가담과 후보 선수들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만회 골 하나를 넣는 데 그쳤다.
‘컨디션만 좋았으면 더 넣었을 텐데.’
준영은 후반전엔 배가 고파 뛰는 게 좀 힘들었다.
체격이 있다 보니 에너지바 하나로는 역시 턱도 없었던 것.
그래도 적극적인 수비로 공격을 차단했고, 주전 팀의 세트 플레이도 월등한 신장과 뛰어난 위치 선정으로 막아 냈다.
거기다 라크로케타 같은 개인기도 종종 보이며 감탄을 끌어냈다.
“정말 놀라운 실력이었어!”
“중국, 아니 한국인이랬나? 아무튼 분명히 국가대표 선수일 거야!”
후보 팀뿐만 아니라 주전 팀의 선수들 대부분도 준영의 실력에 반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초특급 플레이어에게 한 수 지도받은 것을 큰 행운이라 여겼던 것.
그 점은 최고참이자 임시 감독인 에디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자네, 이름이 뭐야?”
“이준영.”
“Legion Young? 좀 이상한 이름이군.”
이상하게 들으니까 그렇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던 준영에게 에디가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해서 묻는데, 혹시 우리 팀에서 뛸…….”
“내 몸값 엄청 비싼데?”
“그, 그렇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의해 봤던 에디는 입맛만 다시고 물러났다.
‘거참, 타임 슬립을 해서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다니.’
아마추어 팀의 영입 제안은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이 시대에서도 축구 선수 생활을 하며 사는 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여긴 축구 종가 영국이니까.
‘이 시대의 프로 수준은 어떠려나? 신부님은 꽤 굉장했다고 하셨지만…….’
아마추어 팀만 보고 판단할 순 없지만, 테크닉이나 전술적인 부분에서는 21세기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자신은 21세기에도 UEFA 챔스나 월드컵에서 내로라하는 슈퍼스타들과 맞붙어 보기도 했고, 승리를 거둔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절대 한 수 아래는 아니라는 거지. 경쟁력은 충분히 있어.’
이 시대에도 축구 선수로 생존할 수 있다!
레전드급 슈퍼스타로 이름을 남기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터!
이렇게 준영이 자신감과 야망에 부풀어 오르고 있을 때였다.
‘누구지?’
에디와 이야기를 나누던 노신사가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꽤 명망 있는 사람인 모양이군.’
에디나 선수들은 노신사에게 상당히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고개를 갸웃하는 준영에게 다가온 노신사가 말을 건넸다.
“실례하네. 자네가 우리 리즈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 들었네만?”
“리즈……? 아아!”
노신사의 등 뒤에는 아까 사고 현장에서 봤던 덩치 큰 인도인 운전기사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기 체트리 군에게 연락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다행히 응급조치가 잘되어 별 탈이 없다고 하더군.”
“잘됐군요.”
“그렇지. 정말 고맙네.”
준영은 감사의 뜻에서 손을 내민 노신사와 악수를 나누었다.
“병원에서 나와서 뒤늦게 자넬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지.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체트리가 여기서 축구를 하는 자네를 발견한 거였어.”
“그랬군요.”
“아차, 이거 소개가 늦었군. 난 알버트 존 프레드로라 하네.”
“저는 이준영입니다. 영국식으로 하면 Jun-young Lee가 되겠네요.”
“John Young Lee? 허허, 이름이 내 미들네임이랑 같구먼.”
‘존이 아니라 준인데요.’
잠깐, 그보다 프레드로라면?
깜짝 놀란 준영이 노신사, 알버트에게 물음을 건넸다.
“방금 알버트 존 프레드로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어디서 내 이름을 들어 본 겐가?”
알버트 존 프레드로.
분명히 저택을 살 때 중개인이 이야기해 준 적이 있던 과거 소유주였다.
그런 사람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
“왜 그러나? 마치 유령이라도 본 표정이구먼.”
번쩍 정신을 차린 준영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게… 말로만 듣던 사람을, 그것도 귀족분을 만난 건 처음이라서요.”
중개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알버트는 남작이었다.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 이 지역에선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재력과 권세를 누리는 귀족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수수하고 친근한 인상이었다.
거기다 본인도 신분에 대해서는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귀족이라고 해 봐야 남작위의 일대귀족인걸. 허울 좋은 명예직이지.”
뭔가 씁쓸한 표정을 짓던 알버트가 준영에게 물음을 건넸다.
“그런데 존, 자네는 무슨 일로 이 마을에 왔는가?”
“사적인 일 때문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곤란한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내가 남작님의 집을 산 미래인인데, 과거로 와 버렸어요.
이렇게 말하면 미친놈 취급을 당할 테지.
그러니 이렇게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다.
“사기를 당한 모양이군.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주겠네. 법률이나 재계 쪽으로 인맥이 좀 있으니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뭘, 우리 손녀를 살려 준 은인에게 이 정도도 못할까.”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세상에는 보은을 잊거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들도 적지 않다.
준영은 그런 인간 망종들을 이 낯선 시대에서 만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도와준 데도 날 미래로 돌려보내 주진 못하겠지만.’
준영이 내심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알버트가 다시 말을 건네 왔다.
“근데 자넨 어디서 왔는가? 용모를 보니 아시아, 그것도 극동에서 온 듯싶네만?”
“한국입니다.”
“Korea?”
“예, 그리 알려지지 않은 나라라 잘 모르실 겁니다.”
이 시절 영국, 아니 유럽 사람들은 한국의 존재도 모르는 게 일반적.
하지만 알버트는 달랐다.
“남쪽인가, 아님 북쪽인가?”
“당연히 남쪽입니다만… 그런데 한국을 아세요?”
“알지, 알다마다. 내 아들이 그 땅에 잠들어 있는걸.”
“예?”
알버트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왕립 공군의 장교인데, 공산당 군대와 싸우다 전사했지.”
‘맞다. 영국도 6.25 전쟁 때 참전했었지.’
저택에 심어져 있었던 개나리나 무궁화 등도 그와 관련이 있었던 모양.
감정을 추스른 알버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로군. 아들이 구한 나라의 청년이 내 손녀를 구해 주다니.”
“살다 보면 정말 신기한 일을 겪을 때가 있더군요.”
준영의 입가에 쓴웃음이 절로 떠올랐다.
거의 70년 전의 과거 시대로 와서, 옛날 집주인을 만나다니.
정말 이런 황당한 일을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건 그렇고, 해가 지는데 우리 집에서 묵고 가는 게 어떤가? 저녁 식사도 같이하고 말이야.”
“사양할 이유가 없지요.”
안 그래도 배가 몹시 고픈 상태라 알버트의 초대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좋아. 그럼 체트리가 차를 가져오면 같이 타고 가세.”
“저는 차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
준영은 공원 외곽에 세워 둔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
매끈하고 세련된 라인의 빨간 컨버터블.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본 알버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허, 이렇게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차는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예, 저건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과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특별 모델입니다.”
하마터면 미래의 자동차라고 말할 뻔했다.
알버트는 이리저리 준영의 차를 살펴보았다.
“이상한 차로군. 열쇠 구멍이 안 보이는데?”
“리모컨이랑 차량에 등록된 지문 인식으로 열립니다.”
“지문으로? 어떻게?”
“글쎄요. 저도 자세한 원리나 기술은 모릅니다.”
준영이 차 문을 열어 주자, 알버트는 조심스럽게 안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내비게이션을 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이건 TV 아닌가? 차에 TV가 달려 있다니!”
“TV도 되지만, 그걸로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갈 수도 있어요.”
“거참! 그런 기술도 있다고? 마치 SF나 첩보 소설에 나오는 자동차 같구만!”
알버트는 마치 어린아이같이 흥분하며 눈빛을 반짝였다.
이렇게 들뜬 건 젊었을 적 포드 자동차를 샀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으므로.
“자동차를 좋아하시나 보군요.”
“좋아하고말고. 젊었을 땐 스피드광이었지. 부모님 몰래 자동차 경주에도 몇 번 나가 봤고.”
그는 기대 어린 표정을 지으며 준영에게 말했다.
“한번 같이 타 봐도 괜찮겠나?”
“물론이죠.”
알버트는 이 낯선 시대에 고립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거기다 한국을 도우러 왔다가 산화한 참전 용사의 부친이 아닌가.
우대해 드리는 건 마땅한 일이었다.
***
6.25 전쟁 때 영국은 총 56,000여 명의 장병들을 파병했습니다. 사상자와 실종자는 4,909명에 달하니, 거의 10명 중 한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셈입니다.
영국뿐만 아니라 저 시절에 먼 나라에 와서 피를 흘린 분들의 희생엔 항상 감사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