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03. 첫 번째 시합
‘동네 아마추어 클럽인가?’
본인이 축구 선수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그리고 플레이를 품평하게 되었다.
‘9번은 빠른데 드리블이 서툴군. 10번이 근처에 와서 도와줘야 하는데 영 어정쩡한 위치에 박혀 있으니…….’
보던 중에 하품이 절로 나왔다.
자체 연습 경기 같은데 전술도 단순하고, 그리 특출한 플레이를 보이는 선수도 없었기 때문.
아마추어라고 해도 좀 너무한 수준이었다.
“에휴, 우리 학교 후배들이 너희들보다 더 잘하겠다.”
준영이 고개를 젓고 있을 때, 빨강 머리가 날린 회심의 슈팅이 골대를 훌쩍 넘기고 그에게로 떨어졌다.
‘응?’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인 준영은 바운드된 공을 잡아챘다.
하지만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발목에서 느껴지는 공의 무게가 만만찮았기 때문.
‘헐, 이게 1950년대 축구공인가?’
거칠고 투박하게 생긴 가죽 공.
무게도 상당히 묵직하고 탄력도 둔했다.
이에 비하면 21세기 축구공은 장난감 탱탱볼이나 마찬가지.
“이런 걸로 강슛을 날렸다간 사람 잡겠군.”
준영이 발끝으로 이리저리 리프팅을 해 보고 있을 때, 필드 쪽에서 고함이 날아들었다.
“이봐, 돌려줘!”
“재롱떨지 말고 빨리 공을 내놔!”
웬만하면 돌려줬을 텐데, ‘재롱’이라는 단어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킹 오브 허접들 주제에……. 진짜 축구가 어떤 건지 한번 보여 줘?’
“젠장! 귀 먹었냐, 원숭이? 공을 달라고 했잖아!”
아까 홈런 슛을 날린 빨강 머리가 펜스를 넘어와서 준영에게 다가왔다.
녀석은 준영을 밀치고 발치에 있는 공을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준영이 잽싸게 공을 굴리며 물러났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빨강 머리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이게……!”
머리털만큼이나 얼굴이 붉어졌던 녀석은 또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허탕을 쳤고, 세 번째 시도에서도 준영의 페인팅에 농락당했다.
“크악! 빌어먹을 쪽바리(Jap) 자식!”
“일본인 아니거든.”
빨강 머리가 날린 회심의 태클마저도 가볍게 뛰어넘은 준영.
그의 앞에 또 다른 상대가 나타났다.
제법 노련해 보이는 30대 중반의 선수.
하지만 그라고 딱히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라, 준영의 발밑에서 공을 가로채지 못했다.
그래도 제법 끈질기고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발 기술로 안 된다 싶으니 손을 쓴 것.
“어이, 그건 반칙이잖아!”
“하하하, 휘슬을 불 심판도 없는데, 뭘.”
뻔뻔한 웃음을 지은 상대는 준영의 옷에서 손을 뗐다.
“어디서 공 좀 차 본 모양이군.”
“좀 찬 게 아니라 많이 찼지. 댁들 같은 아마추어는 아니거든.”
넉살 좋은 준영의 대꾸에 상대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재미있군.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어디 제대로 필드에서 붙어 보자고, ‘자칭’ 프로 양반.”
“좋아!”
준영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타임 슬립이라는 황당한 일을 겪어 답답하고 골치 아픈 상황.
이럴 땐 필드에서 한바탕 뛰며 시원하게 땀 흘리는 게 최고였다.
***
모즐리 공원 옆의 실파크는 모즐리 AFC의 홈구장이다.
영국 북서부 지역 리그인 체셔 카운티 리그에 소속된 이 팀은 다가오는 1957-1958 시즌을 대비해 훈련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연습 경기는 엉뚱한 트러블로 중지되고 말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동양인 탓이었다.
“쪽바리가 키가 엄청 크군.”
“일본인이 아니라던데?”
“그럼 중국인인가?”
호기심 반, 불쾌함 반.
모즐리 선수들이 수군대는 사이, 준영이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트레이닝복과 축구화를 챙겨 오길 잘했군.’
혹시나 싶어서 옷과 개인 장비는 이삿짐과 별도로 차에 따로 챙겨서 가지고 왔다.
덕분에 촌티 나는 50년대 유니폼과 축구화를 빌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21세기식 차림에 모즐리 선수들은 연방 쑥덕였다.
“상의에 칼라가 없어.”
“축구화도 좀 이상한걸. 발목이 다 드러나잖아.”
“중국에선 저렇게 입고 축구 하나?”
대다수 선수들은 아까 준영이 동료를 농락하던 광경을 봤다.
나름 왕년에 프로 물 좀 먹은 선수들은 보다 경계하는 입장이었다.
“비슷한 차림을 본 적이 있어.”
“어디서?”
“웸블리에 찾아왔던 헝가리 놈들이 저랬지.”
아까 보여 줬던 테크닉도 헝가리 선수들의 기술과 유사했다.
그래서 경험 있는 선수들은 준영이 유럽에서 공을 차다 왔을 거라고 확신했다.
“정말 프로일까?”
“뭐, 발재간은 좀 좋을 수 있겠지. 그래도 프로 선수는 아니었을걸.”
“하긴, 키도 쓸데없이 크니까.”
체격이 너무 크면 느리고 지구력도 약하다.
그 때문에 현재 축구계에 장신 선수는 드문 실정이다.
“여기 이 동양인이랑 같이 뛸 사람?”
좀 전에 준영을 도발했던 고참 선수의 말에 반수 정도가 손을 들었다.
대부분 불청객의 실력에 호기심을 가진 이들이었다.
‘켄과 힐튼은 이쪽인가.’
그 둘뿐만 아니라 상당수 주전들이 동양인과 맞붙는 쪽을 택했다.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고참 선수에게 준영이 물음을 건넸다.
“근데 여기 감독은 없는 거야?”
아무리 기분 전환 목적에서 끼어들었다지만, 감독 허락도 없이 이래도 되는 걸까.
그런데 엉뚱한 대답이 들려왔다.
“감독? 우리 팀에 지금 감독은 없어. 이 에디 님께서 임시 감독을 맡고 있지.”
‘역시 아마추어 팀이군.’
멋대로 하는 데 이유가 있었구나.
수긍한 준영은 자신과 한편이 된 선수들과 모여 포지션을 정했다.
“중국인 친구는 발재간이 좋아 보이니 공격수를 맡아 줘.”
“이봐, 난 한국인이야.”
“그래? 아무튼 기왕에 같이 뛰게 되었으니 힘내자고.”
원래 포지션은 센터백인데.
준영은 그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다른 포지션도 맡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상황에 따라 최전방으로 올라가 헤딩을 떨구는 원톱 역할도 해 봤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궂은일을 도맡아 본 적도 있다.
심지어 골키퍼가 퇴장당하는 바람에 잠시 골대를 지킨 적도 있었을 정도.
‘더구나 어차피 상대는 아마추어잖아.’
프로에서 골키퍼로 뛰던 선수도 아마추어 무대에 가면 메시 같은 사기 유닛이 될 수 있다.
애초에 이 경기는 진지한 시합도 아니다.
고수를 못 알아보는 저랩들을 꾹꾹 밟아 주고 땀 좀 흘리며 기분 전환을 하는 게 목적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포메이션이 이게 뭐야?’
준영은 자기편은 물론, 상대 주전 팀의 포진을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MW 포메이션.
1920년대 아스날 FC를 지도한 명장 허버트 채프먼 감독이 고안한 전술이다.
공격 5명, 수비 5명.
3-2-2-3의 형태로 공수를 분할해서 운영하는 이 전술은 21세기에는 그야말로 고대 유물과도 같은 포메이션이었다.
‘50년대라 그런가, 아니면 아마추어 팀이라 그런가.’
둘 다일 수도 있고, 정식 감독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그 50년대식 축구판에 자신이 뛰어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
심판을 맡은 선수가 휘슬을 불면서 시합은 시작되었다.
선축을 한 주전 팀은 초반부터 거센 공세를 펼쳤다.
물론 준영이 보기엔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엄청 투박하고 거칠구만.’
태클도 높은 편이고, 몸싸움도 꽤 격렬했다.
21세기라면 휘슬을 불 상황도 그냥 넘어가곤 했다.
‘방금 그건 백태클인데……. 50년대 기준으론 파울이 아닌가.’
이렇게 따지는 것도 이젠 피곤했다.
일단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는 데 집중하자.
그리 결정한 준영은 선수들의 움직임을 연방 주시했다.
“후후후, 애송이 녀석들, 꽤 끈질기게 버티는군.”
주전 팀의 공격을 주도하는 켄 브리어리가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체격 좋고 발재간이 좋은 동양인이 후보 팀에 있다고 하지만, 축구는 어디까지나 단체 스포츠.
한 명이 잘한다고 팀 전체 전력이 크게 상승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 칭크 놈 어디로 갔지? 보이지가 않는…….’
“빈틈투성이구만.”
“앗!”
뒤쪽에서 슬그머니 접근했던 준영이 번개같이 켄의 공을 가로채 갔다.
상상도 못한 상황.
설마 최전방에 있는 공격수가 와서 인터셉트를 해 갈 줄이야!
‘이, 이 녀석, 날 망신 줄 생각인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한 켄 브리어리는 곧바로 달려들었다.
그는 4년 전까지 리버풀에서 뛰었다.
프로 물을 먹은 화려한 경력자인 만큼 다른 선수들과 움직임이 사뭇 달랐다.
물론 그 남다른 실력도 준영에게 비빌 수준은 못 되었다.
공을 되찾아 오려던 켄의 몸부림은 준영의 능숙한 발놀림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어설프군.”
‘저, 저건 역시……!’
발바닥으로 공을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굴리는 절묘한 테크닉.
켄은 방금 자신을 농락한 페이크 동작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웸블리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무참히 박살 냈던 헝가리의 마법사들,
그 에이스인 푸스카스가 썼던 기술이었으므로!
‘틀림없어! 빌리 라이트(* 잉글랜드 역대 레전드 수비수)를 농락했던 그 기술이다!”
경이롭다는 시선을 보내는 켄의 모습에 준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저래? 드래그 백이 그렇게 신기한가?’
축구 선수라면 다들 할 줄 아는 드래그 백.
하지만 이 시대에는 이제 나온 지 몇 년 안 되는 고난도 테크닉이었다.
“까불지 마라, 원숭이 새꺄!”
켄을 제친 직후, 단신의 선수가 꽤 깊은 태클을 날렸다.
아까 준영에게 공을 내놓으라고 했다가 망신을 당했던 빨강 머리.
그가 날린 회심의 태클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준영은 가뿐하게 뛰어넘었다.
“원숭이보다 못하구만.”
“크악!”
펄펄 뛰는 녀석을 뒤로하고, 준영은 주전 팀 골대로 돌진해 나갔다.
미드필더, 아니 이 시대에는 하프백이라고 불리는 포지션의 선수가 허둥대며 마크에 나섰지만, 준영의 페인팅에 속아 제풀에 픽 쓰러져 버렸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었던 준영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거참, 압박도 안 하고, 협력 수비도 안 하고.’
측면에 공간이 뻥 뚫린 미드필드와 전진해서 마크할 생각은 않고 이를 멀뚱히 지켜보는 3선 수비.
이건 뭐 중거리 슛을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원하시는 대로!”
뻐엉-
자세를 잡은 준영이 바로 슛을 날렸다.
발목에 전달되는 낯선 감촉.
묵직하고 둔한 공은 의도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쳇, 골키퍼 정면이잖아.’
준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을 때, 골키퍼가 공을 잡지 못하고 흘려 버렸다.
“우와, 골이다!”
“대단한데, 꺽다리!”
‘어?’
감탄하는 후보 팀 선수들과 달리 준영은 황당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아마도 골키퍼는 갑자기 날아든 슈팅을 잡을지 펀칭을 할지 빨리 결정하지 못하다 실수를 했던 모양.
하지만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저 자식, 왜 맨손이야?’
충격 흡수와 미끄럼 방지가 되는 골키퍼 장갑을 꼈으면 손쉽게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아마추어 팀이라서? 아냐. 어쩌면 이 시대엔 아직 그런 장비가 없을지도…….’
새삼 지금이 1950년대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
모즐리 AFC는 실제로 있는 팀입니다. 현재 9부 리그인 노던 프리미어 리그 디비전 1에 속해 있는데, 작년에는 다른 아마추어 클럽들처럼 코로나19 때문에 시즌을 포기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