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02. 1957년
‘뭐? 1957년?’
자신이 잘못 들은 걸까, 아니면 아나운서가 연도를 잘못 말한 걸까.
더구나 왜 정오란 말인가.
맨체스터의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했던 게 1시였는데.
「다음 뉴스입니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의 핵무장 결정에 대하여 소련 정부는 깊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소련이라고? 아니, 왜 옛날이야길 하는 거야?’
준영은 괴상한 뉴스를 흘리는 라디오를 끄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하지만 아직 벌렁거리는 가슴 한편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이 싹트고 있었다.
***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예스러운 붉은 벽돌집과 건물들.
복고풍으로 멋을 낸 사람들이 길을 오가고, 도로에는 우아한 클래식 자동차들이 오갔다.
저편에 보이는 철로에는 증기 기관차가 우렁차게 달렸다.
마치 구시대의 테마파크 같은 분위기의 거리.
그래서 준영이 탄 붉은색 컨버터블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여기가 모즐리라고?”
준영은 눈을 비비고 주변을 다시 살펴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즐리와 전혀 다른 풍경.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입에서 저도 모르게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제기랄! 어떻게 된 거야!”
모즐리에 다녀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을 정경이나 분위기가 이렇게 테마파크인 양 싹 달라질 수 있는가!
‘혹시 내가 길을 잘못 든 건가? 다른 동네에 온 건 아닐까?’
그리 생각해 보고 싶어도 마을의 가장 큰 풍경들은 다르지 않았다.
강과 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언덕 등등.
‘가만, 이거 마을 회관에 갔을 때 봤던 옛날 사진의 풍경이랑 비슷한데?’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강가의 다리만 해도 그랬다.
틀린 게 있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흑백이 아닌 총천연색이라는 점뿐.
‘설마… 시간 이동?’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코웃음을 치며 부정하기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일들이 걸렸다.
갑자기 돌변한 날씨, 위성 신호가 끊긴 내비게이션, 그리고 라디오에서 알려 준 옛날 뉴스.
‘아냐. 아니야. 그럴 리 없다고. 그런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질 리가 없잖아.’
억지로 불안과 당혹감을 누른 준영은 차에서 내렸다.
진짜든 아니든, 일단 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
그런 생각에 자신의 차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보비 헬멧의 경찰에게 말을 건넸다.
“수고 많으십니다. 올해가 몇 년도죠?”
“1957년이잖소.”
경찰은 그걸 왜 묻느냐는 듯이 당연한 태도로 대꾸했다.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믿을 수 없었던 준영은 이번에는 가까운 노천카페로 들어갔다.
점주고 손님이고 다들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칭크잖아?”
“무슨 동양인이 저렇게 커?”
“머리 꼴이 가관이군. 자다가 뛰쳐나왔나?”
신기함, 호기심, 불쾌감 등등.
그들의 반응을 살피던 준영은 개중에 친절하게 생긴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실례합니다. 올해가 몇 년도죠?”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던 노인은 손에 든 신문의 날짜를 가리켰다.
1957년 7월 20일.
1면에는 영국 교통 노동조합의 전국적인 파업을 우려하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진짜 오늘 신문 맞아요?”
“물론이지.”
신문을 매만지던 준영은 주위로 고개를 돌렸다.
카페의 오래된 축음기에선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쪽에선 홍차로 입을 축인 신사가 경쾌하게 타자기를 두들기고 있는 중이다.
준영을 보고 쑥덕이는 아가씨들은 마치 오드리 헵번이나 그레이스 켈리 같은 옛날 배우들처럼 꾸미고 있었다.
21세기의 풍물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누구도 스마트폰으로 SNS를 하거나, 인증 샷을 찍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 1957년인 거냐?’
정말 영화 백 투 더 퓨처처럼 1950년대로 오기라도 한 걸까.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설마 내 차가 본드카가 아니라 타임머신 드로이안이었나?’
너무나 당혹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준영이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쿵!
갑자기 들려온 타이어의 비명과 둔탁한 소음.
저도 모르게 준영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
“사고다!”
“다리에서 트럭과 승용차가 박았어!”
갑자기 차선을 넘은 트럭과 충돌한 차는 빙글 돌면서 다리 난간에 처박혔다.
근방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다리로 모여들었다.
“이런 얼간이 자식! 차선을 넘으면 어떡해!”
“그, 그게, 배송 시간에 쫓겨 추월을 하려다…….”
경찰들이 트럭 기사를 잡아 놓고 닦달하는 사이, 사고 차량에서 사람이 나왔다.
제법 덩치가 있는 인도인 운전기사는 사고 충격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운 듯 연방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살폈다.
“으으… 리즈 아가씨, 괜찮으세요?”
뒷좌석을 살피던 그의 입에서 이내 당혹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앗,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깨진 뒷좌석 차창 너머로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소녀가 보였다.
운전기사와 경찰은 황급히 그녀를 밖으로 끌어냈다.
“큰일이군! 숨을 안 쉬는데?”
“의사! 빨리 의사를 불러 줘요!”
상황을 본 몇몇 사람들이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갔다.
운전기사가 발을 동동 구르는 가운데,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거나 쑥덕였다.
‘뭐 하는 거야. 응급처치부터 해야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준영은 답답한 상황을 보다 못해 직접 나섰다.
저렇게 허둥지둥 시간만 끌다간 정말 위험해진다.
응급처치 시기를 놓치면 뇌에 산소 공급이 끊기며 뇌가 손상되는데, 그럼 뇌사 상태에 빠져서 식물인간이 될 수 있다.
“비켜요. 좀 봅시다.”
“혹시 의사요?”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경우는 봤어요.”
머리에 갑자기 큰 충격을 받고 의식을 잃는 사고는 축구 경기 중에도 종종 벌어진다.
헤딩 경합을 하다 부딪치거나, 점프했다가 착지를 잘못해서 머리부터 떨어지거나.
‘이런 경우엔 혀가 말려 기도를 막고 있는데… 역시나!’
소녀의 입을 벌려 살펴보던 준영은 손끝으로 혀를 기도에서 빼냈다.
“아얏! 씁…….”
소녀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다물면서 손가락을 물렸다.
하지만 아파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준영은 바로 심폐 소생술을 펼쳤다.
두 손을 모아 가슴 중앙을 강하게 눌러 준 후, 입을 맞대고 숨을 불어넣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저 노란 원숭이 자식!”
“당장 그만두지 못해!”
험악해진 군중들이 달려들었지만, 준영은 거칠게 그들을 밀쳐 냈다.
“방해하지 마! 이 여자 죽이고 싶어?”
군중들과 드잡이가 벌어지자, 경찰이 준영을 옹호하고 나섰다.
“진정해요. 나도 전쟁 때 의무병들이 저렇게 치료하는 걸 봤으니까!”
“정말이야?”
“그래요. 분명 포격 때 뇌진탕으로 기절한 병사를 저렇게…….”
경찰의 설명과 만류에 사람들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준영은 다시 응급처치를 계속했다.
“으으…….”
낯빛이 파리하던 소녀가 정신을 차리고 가늘게 눈을 떴다.
“우와, 살았어!”
사방에서 안도의 탄성이 쏟아졌다.
방금 전까지 준영을 때려죽이려고 하던 이들도 누그러졌다.
“수고했네. 난 그 와중에 추잡한 짓을 하는 줄 알았지.”
“근데 정말 키가 크군. 진짜 중국인 맞아?”
준영은 자신을 툭 치며 묻는 사내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난 한국 사람이야.”
“Korean? 그런 나라도 있었나?”
사내의 대꾸에 인상을 와락 찌푸리던 준영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쳇, 모르는 게 당연하지.’
21세기에도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이들이 많다.
하물며 지금은 1957년.
안다고 해 봐야 몇 해 전에 전쟁이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으리라.
‘떨어져도 하필 이런 암흑시대에 떨어지냐!’
돌아갈 수는 있을까.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을까.
준영의 구겨진 미간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
잠시 후, 구급차가 와서 다친 소녀를 싣고 갔다.
구급대원들은 손가락을 다친 준영은 살펴보지도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부상이라 여기는 건지, 아니면 동양인이라고 차별을 하는 건지.
따지기도 귀찮았던 준영은 여행 캐리어에 넣어 둔 상비약 통에서 연고와 밴드를 꺼내 치료했다.
“야무지게도 물었군. 인대를 다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인가.”
한바탕 소란이 마무리되자, 준영은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생각해 봤다.
‘일단 번개를 맞았던 곳으로 돌아가 보자. 거기 가면 현대로 통하는 웜홀 같은 게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
예전에 TV에서 봤던 옛날 영화 마지막 부분에도 그런 장면이 있지 않았던가.
준영은 곧장 차를 몰고 사고가 났던 지점으로 돌아갔다.
제발 돌아갈 수 있기를.
하지만 그 바람은 이내 실망으로 돌아왔다.
웜홀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몇 번이고 차를 돌려 그 지점을 지나쳐 봤지만, 딱히 변화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고 스마트폰을 켜 봤지만, ‘통화권 이탈’이라는 문구만 계속 떠올라 있었다.
“으아아! 빌어먹으으으을!”
차 밖으로 튀어나온 준영은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이러진 않고선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1957년.
무려 70년 전의 과거 시대다.
자신은 물론이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태어나지 않은 때.
다만 터너 신부님은 올드 트래퍼드 근처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난다고 해도 지금의 신부님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터.
“빌어먹을! 또 외톨이가 되다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세상에 혼자 내팽개쳐졌다.
그 설움과 외로움을 이겨 내고 기반을 잡았더니, 또 모든 것이 날아갔다.
재산과 명예, 친구와 가족들,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까지 모두!
도로 위에 벌렁 드러누운 준영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왜 이러세요? 제가 대체 뭘 잘못했습니까?’
잘나가는 축구 스타라고 자만하고 허영을 부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앞으로 한솥밥을 먹을 팀원들을 씹었기 때문일까.
그래도 억대의 기부도 하고 봉사 활동도 했건만.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련을 주신단 말인가!
‘신께서는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을 주신단다. 네가 그 시련을 이겨 내면 보다 성숙하고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을 게다.’
암담함을 느끼고 있을 때, 신부님이 해 주신 말이 떠올랐다.
꼴찌 팀 수비수 시절, 축구를 그만두려고 했을 때 들었던 충고였다.
“극복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 극복할 수 있는…….”
신부님의 말을 몇 번이고 되뇌던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짜증만 내고 원망한다고 이 상황이 해결되진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가며 부딪쳐 맞서 싸워야 한다.
계속 그렇게 살아왔고, 축구 스타로 성공을 거두지 않았던가.
“일단 뭐라도 좀 먹자.”
이리저리 놀라고 설친 탓에 배가 좀 고팠다.
준영은 조수석 글로브 박스에서 꺼낸 에너지바로 열량을 보충한 후, 모즐리로 돌아갔다.
‘1957년이면 신용카드는 쓸 수 없을 거야.’
현금도 얼마 없지만,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있다.
당장 손목에 끼고 있는 롤렉스 시계만 해도 이 시대에는 명품일 터.
그러니 한동안 살 만한 자금을 마련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근데 전당포 같은 게 어디 있지?”
마을로 들어와 돌아다니던 준영.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이 공원 옆의 작은 필드에서 멈췄다.
거기엔 하얀 유니폼을 걸친 선수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
요즘 시대야 심폐 소생술 같은 응급처치에 대해 직접 해 보진 않아도 대충 이렇게 한다더라 정도는 알고 있지만, 저때는 정말 아는 사람만 알던 것이었습니다.
인공호흡도 18세기 스코틀랜드 광부들이 갱도에 매몰된 동료를 구할 때 했던 건데, 어느 정도 대중화된 건 20세기에 들어서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