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78화
하우스 파티 프로토콜(1)
“당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사라진 그 불쌍한 오우거. 그를 분해해서 만든 개체가 바로 저 기계몬스터들 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영식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 물었다.
“뭐, 라고?”
“음…. 조금 더 설명이 필요했던 것 같네요. 대장님께서 중앙에 계신 동안 이브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브가 널 찾아왔다고?”
“예. 그가 직접 저를 찾아왔죠.”
단테리온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 을 이었다.
“이브는 자신을 병기로 만들어달라 고 제게 부탁했습니다. 감정도, 지성 도 없는 기계몬스터로 만들어 달라 고 애원했죠.”
“하하하.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 간 상대에게 감정을 지워달라고 애 원한다는 사실이요.”
단테리온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 려 퍼졌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단어가 되지 못한 언어의 편린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몸의 떨림이 점점 더 강해졌다.
‘차라리 병기가 되는 게 좋았을 걸
그랬어요.’
이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흉측하 게 일그러진 얼굴로 내뱉은 그 말이 낙인처럼 그의 뇌리에 새겨졌다.
“제가 직접 만들기는 했지만 참… 멍청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장님?”
사실, 영식은 이브와 크게 친밀한 사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길드원들처럼 오랜 시간을 같이 보 낸 것도 아니고, 목숨을 건 전투를 함께한 사이도 아니었다.
친구라고 할 수도 없었고, 동료라 고 부르기도 애매한 관계.
지금 그와 천태황, 알렉과 비슷한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지인보다는 친밀하지만, 동료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사이. 그것이 이브 와 자신의 관계였다.
하지만.
“만약 대장님이 만드셨다면 이런 멍청한 개체 말고 더 좋은 개체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아, 아아.”
영식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 왔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시야가 새 하얗게 점멸하는 듯한 감각이 느껴 졌다.
하지만, 이브는 그에게 다른 무언 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잊고 있던 기억을, 사라진 무언가 를 자극시켰다.
‘ 이브.’
불쌍한 오우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울부짖고 있는 그의 모습에 다른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그의 모습에 겹쳐진 것이 누구인지 영식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꼭두각 시 병기로 사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언젠가 자신의 안에서 그 해답을 찾게 되면 그를 찾아가 말해주려고 했었다.
‘거짓말.’
영식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 각을 부정했다.
해답을 찾게 되면 그를 찾아가려고 했다니, 자위나 다름없는 생각이었다.
자신은 그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 았다. 떠올리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기억에서 영영 지우려 했다.
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꼭두각시가 되지 말고 자신의 인생 의 주체가 되어 살라고?
말은 좋은 말이었다. 듣는 것만으 로 달콤한 말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말로는 해 석할 수 없는 감정이 있는 법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 얼마나 위선적으 로 들리겠는가.
자식이 살해당한 부모에게 복수는 무의미하니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개소리로 들리 겠는가.
이브도 같은 상황이었다.
영식이 할 수 있었던 건 언젠가 그에게 해답을 알려줄 수 있을 거라 는 헛된 기대뿐이 없었다.
“저는 이브의 애원을 들어주었습니 다. 그의 몸을 친절히 조각내서, 클 론을 만들어 기계몬스터를 양산했죠. 그가 바라는 대로 감정도, 지성도 없 는 꼭두각시 병기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헛된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 해답을 알려줄 수 있으리라
는 자위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영식의 눈에서 붉은색 빛이 흘러나 오기 시작했다.
임계치를 넘는 감정에 정신이 이상 해질 것만 같았다.
이브는 단테리온 손에 의해 만들어 지고, 그의 목적을 위해 희생되었으 며, 결국 죽었다. 아니, 차라리 죽은 것이 나은 상태로 전락했다.
“아, 그러고 보니 대장님이 만든 저 기체와 이브는 과거 꽤나 친한 사이였던 모양이더군요. 외형이 많 이 바뀌었지만 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친했는지 이름도 ‘이브’라고 지어주셨잖아요?”
“단, 테리온.”
단테리온은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그럼 지금 상황은 이브가 이브를 죽이고 있는 건가요? 참 아 이러니 하게 됐네요. 그녀가 이 사 실을 알면 아마 참 슬퍼하겠죠?”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터질 듯한 감정의 격류가 영식의 몸 전체를 집어삼켰다.
영식은 그 격류를 거스르지 않았다.
“단테리오오오오오오온!”
-콰아아앙!
포효와 같이 내질러진 발걸음에 제 어실이 지진이 난 듯 뒤흔들렸다.
코어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에너 지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음속을 넘는 속도로 쏘아진 영식의 몸이 단테리온과 격돌했다.
-콰드드득!
강렬한 힘의 격돌에 제어실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영식의 일격을 막아낸 단테리온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무너진 바닥으 로 몸을 던졌다.
영식은 부스트를 최대 출력으로 뿜 어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콰아앙!
단테리온을 따라 내려간 장소를 본 영식이 흠칫, 굳었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복잡한 금속 장치로 이루어진 벽. 그 금속 장치의 위에 있는 왕좌.
‘왕좌가 아니야.’
희미한 실루엣으로 남아 있던 커다
란 의자는 왕좌가 아니었다.
그가 왕좌라고 생각했던 것의 정체 는 전함의 조종석이었다.
“이 전함의 조종석입니다. 아, 지금 은 레노스가 자동 조종 장치를 만들 어서 자동으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들 었지만요.”
“원래는 이 조종석에 앉아, 대장님 만이 이 전함을 움직이실 수 있었습 니다. 하하. 어떠신가요? 조종석을 다시 보니 앉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시나요?”
“전혀.”
영식은 씹어뱉듯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쿠궁
그때, 그가 서 있던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역시 자동 조종 장치로는 한계가 있나 보네요. 이런 거친 운전이라 니… 대장님이 직접 조종하셨을 때 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주절주절 이어지는 그의 말을 무시 하고 달려들려고 했던 영식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너무 흥분했어.’
그는 머리를 가득 채운 감정의 격 류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침착해.’
현실은 분노만 하면 다 때려 부술 수 있는 소년만화와 달랐다.
분노를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이 성과 목적을 잃어서는 곤란했다.
영식은 품속에서 통신기를 꺼냈다. 몇 번의 신호가 지나간 후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지금 어디신가요?!
“루시아, 부탁할 게 있어.”
-?말씀해 주세요.
“사정이 생겨서 제어장치를 파괴하 지 못했어. 나 대신 제어장치를 파 괴해 줘. 그리고….”
-네, 주인님.
“이브는 지금도 기계몬스터들이랑 싸우고 있어?”
-네! 기계몬스터 쪽도 거의 정리 가 끝났어요! 빨리 남은 놈들을 정 리하고 주인님이 계신 곳으로 갈게 요!
-왜 그러세요, 주인님? 호,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신 건 아니죠? 그 냥 지금이라도 빨리….
“아니. 우선은 제어장치부터 파괴 해. 걱정하지 말고. 알았지?”
-으…. 네, 알았어요!
영식은 통신기를 내려놓으며 다시 금 차오르는 분노를 마음속 깊이 갈 무리했다.
“응? 사실을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 십니까? 자신이 죽인 기계몬스터들 이 ‘진짜’라는 사실을요.”
“그래, 알려주지 않을 거야.”
“하하! 왜죠?”
“모든 진실을 알 필요는 없으니까.”
“흐응. 아쉽게 됐네요. 진실을 알았 을 때 그녀의 반응도 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단테리온.”
“네, 대장님.”
“나를 설득시키는 게 네 목적이라 고 했던가?”
“맞아요. 전 대장님이 과거의 모습 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드리려 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넌 병신에, 머저리 새끼 야.”
갑작스러운 욕설에 단테리온의 미 소가 살짝 흔들렸다.
“설득이란 건 말이야. 들으면 들을 수록 그 말에 매료되는 게 하는 게 설득이야. 근데 네가 지껄이는 건 전혀 그렇지 않거든.”
“하하. 시간이 지나면 대장님께서 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넌 네가 똑똑한 줄 아나 보지?”
영식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 를 바라보았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분노가 단테리 온을 향했다.
방금 전에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 며 달려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영식의 목소리는 침착 하기 그지없었다.
“머리 꼭대기에 선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마냥 지껄이면 뭐라 도 된 것 같아? 최후의 흑막처럼 대중 의미심장한 말 몇 번 던져주면 좀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어?”
“하하. 대장님 뭔가 오해가 있으 신...”
“오해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의 사실을 말해줄 뿐이야. 넌 구제 가 불가능한 놈이다.”
“왜? 못 믿겠어?”
영식은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 증거를 보여줄게.”
여유에 차 있는, 아니, 정확하게는 여유를 가장한 광기에 차 있는 단테 리온을 혼란시킬 수 있는 방법.
미래를 알고 있는 예언가인 양, 모 든 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종 하는 절대자처럼 행동하고 있는 그 의 본성을 한 번에 드러나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최적의 방법.
영식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그의 진짜 모습을 드러나게 할 수 있는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 지….”
“단테리온.”
내뱉는 말의 의미는 몰랐다.
하지만 몰라도 상관없었다.
‘이 말’은 단테리온이 쓰고 있는 가식의 가면을 한 번에 박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영식은 차가운 목소리로, 칼로 내려
긋는 듯한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락테온이 옳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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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리온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 러 졌다.
온화함으로 위장한 가식의 가면이 벗겨지고, 광기에 물든 그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쿠웅!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단테리온은 거칠게 발을 구르며 광 기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락테온은 틀렸습니다! 그는 완벽
했던 당신을, 아무 결점도 없었던 당신을 바닥으로 끌어내렸습니다. 대장님은 완벽해야 합니다. 신성해 야 합니다. 그런데, 그자가 모두 망 쳐 버렸습니다. 당신을 하찮게 만들 었습니다. 고뇌하고, 슬퍼하고, 좌절 하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딴 개자식이 옳다는 말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거 봐.”
울부짖는 단테리온을 바라보며 영 식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넌 그냥 미친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