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69화
출정식 (4)
“자, 모두 어떻게 생각하나?”
영식은 뜨거운 눈빛을 불태우고 있 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손 을 흔들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시선 을 주지는 않았다.
마치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병사들은 지구로 돌아간 이후에 대 한 망상에 부풀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탐욕스럽다는 단어는 가진 자에게 많이 사용되지만 사실 은 그렇지 않았다.
약하고,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탐욕스러웠다.
다만 그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영식은 그들에게 정의감에 호소한 어설픈 감성팔이를 하지 않았다.
에르노어 대륙을 지키기 위해 북방 의 창조주와 싸워야 한다고?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 한 몸 바쳐야 한다고?
겉만 번지르르한 말이었다.
자신에게 구체적인 이득이 돌아오 지 않는 이타적인 행동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이득을 위해, 욕망 을 위해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로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 었다.
“영식 씨, 이건….”
티리아는 병사들에게서 느껴지는 예사롭지 않은 광기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꽤나 많은 전쟁사를 공부한 그녀였 지만 이렇게 저열할 정도로 노골적 인 연설은 들어보지 못했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자리는 뒷골 목 폭력 조직의 두목이 아니었다.
무려 동부, 남부, 서부가 힘을 합 친 대륙 연합군의 수장이었다.
격식을 차릴 때는 그래야 할 필요 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에서는 격식 은커녕 일말의 매너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아. 사기를 끌어 올린다는 목 적만 생각하면 이쪽이 훨씬 효과적 일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전쟁 상황에서도 승리에 대한 보 상을 미끼로 사용하는 경우는 자주 있잖아?”
사람을 움직이는 데 달콤한 보상보 다 효과적인 것은 많지 않았다.
실제 전쟁에서도 적장의 목을 벤 병사에게 포상을 주는 것도 이와 같 은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통 그걸 출정식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죠.”
“하하하. 그건 그렇지.”
영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도 그냥 교장 선생님의 훈화나 다름없는 상 투으로 연설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이미 나락에 떨어진 것처럼 바닥을 친 상태.
그런 상황에서는 일방적인 정론도 아니꼽게 들릴 것이 분명했다.
‘평판과 상관없이 사기를 끌어 올 릴 수 있는 방법.’
그 방법으로 가장 좋은 방법이 바
로 병사들의 질투심과 욕심을 자극 하는 것이었다.
‘특히 나한테 이런 말을 들었으니 더욱 효과가 크겠지.’
허름한 차람의 거지가 와서 노력하 면 나처럼 될 수 있다고 하는 건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런 말은 이미 성공한 사람이 했 을 때야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말이 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들에 비해서 모 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남자.
힘과 권력, 아리따운 여자들까지 가지고 있는 그의 모습은 병사들의 본능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창조주를 죽이고 지구로 돌아간다 면, 나도 왕과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있다.
나도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모든 것 을 가질 수 있다.
달콤하기 짝이 없는 그 유혹은 병 사들에게 큰 파란을 만들어냈다.
“그, 그래.”
“창조주를 죽이고 지구로 돌아간다 면….”
“나도 저렇게….”
감정과 공유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
었다.
상대적으로 욕심이 적었던 소환자 들도 눈앞의 열기에 휩쓸려 꿀꺽 마 른 침을 삼키기 시작했다.
마치 주식 투기로 큰 성공을 한 사람이 ‘이렇게 하면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효과.
몇 명이 그의 말을 따르기 시작하 면 우르르 그 뒤를 따라가기 마련이 었다.
눈앞에 드리워진 욕망의 가능성에 병사들은 손에 쥔 무기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그들의 눈에 서린 빛은 차라리 광 기라고 부르는 편이 옳으리라.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었군.’
병사들의 눈빛이 바뀐 것을 본 영 식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직 병사들의 사기진작 계획은 끝 나지 않았다.
“너희도 할 수 있다.”
영식은 그 광기에 쐐기를 박듯 말 을 이었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 생각이냐.”
점점 커지는 목소리.
“창조주만 죽인다면, 너희는 원하 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쿵. 쿵.
대형 스피커에서 영식이 미리 준비 해 둔 거대한 북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원하는… 모든 것.”
“솔직해져라! 정말로 정의감에 불 타서 이 전쟁에 한 목숨을 희생하려 고 하는 건가? 아니지! 그건 영웅놀 이에 취한 머저리가 할 만한 소리 다! 너희는, 아니, 우리 모두는 개인 의 욕망과, 이념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식은 과장된 동작과, 몸짓으로 소리쳤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거대한 북소리가 조금씩 빨라졌다.
모든 것이 그가 계산한 대로였다.
과장된 동작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 로잡는다.
심장 박동 수를 계산하여 점점 빨 라지는 북소리는 인간의 흥분 상태 를 고조시킨다.
흥분 상태에 들어간 광기는 탐욕스 럽게 사람들의 마음을 잠식해 나갔다.
이건 개인의 의지로 극복할 수 없
는 광기였다.
인간이 타자에 의존하는 사회적인 동물인 이상 이 광기에 잠식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아, 아아.”
“그래! 나도 계속 이렇게 살고 싶 지는 않다고!”
술렁임이 커져갔다. 광기가 증폭되 며 주변을 휩쓸었다. 더 이상 걷잡 을 수 없이 커진 그 광기에 알렉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정도였다.
지금 영식이 하는 것은 집단 최면 이나 다른 없는 일이었다.
욕망의 구체화.
그림 속의 떡보다는 바로 눈앞에 내밀어진 떡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가상화폐의 열풍이 광기에 가깝게 불어 닥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기대감 때문이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 나도 성 공할 수 있다는 생각.
눈앞에 구체화된 욕망이 드리워졌 을 때 인간의 이성은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렸다.
“무기를 들어라!”
?쿵!
영식의 목소리에 맞춰 거대한 폭음 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는 스크린 에서 요란한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너희도 할 수 있다! 가질 수 있 다! 올라설 수 있다!”
그 말과 동시에 영식은 역장을 다 시 넓게 펼쳤다.
이번에는 그들을 제압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영식은 역장을 통해 역으로 병사들에게 에너지를 불어 넣었다.
에너지를 불어 넣어준다고 해서 격 자체가 다른 영식의 에너지를 그들 이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 에 ‘강해진 것 같은’ 착각만 들게 해줄 뿐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가 준비해 둔 장치에 따라 사람 들의 시각, 청각, 촉각이 한곳에 어 우러졌을 때.
영식은 다시금 목소리를 높이며 손 을 번쩍 들어올려 북쪽을 가리켰다.
“모든 것은 북방에 있다! 내가 보 장하겠다! 창조주가 죽는 순간, 너 희에게는 그 무엇보다 찬란한 미래 가 펼쳐질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무시무시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영식에게 검을 들고 달려들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열광적인 눈빛으 로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절정에 달한 광기가 함성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북방으로 가자! 당장 그 창조주란 놈을 죽이러 가자고!”
“우리도 할 수 있다!”
“지구로만 돌아가면 저 정도는 아 무것도 아니지!”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광장이 단숨 에 광신도의 집회처럼 변했다.
연합군의 출정식을 구경하러 온 상 인들마저 그 광기에 휩쓸려 당장 연 합군의 입대 신청을 넣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있을 정도였다.
“가즈아아아아!”
한 번 불이 지펴진 광기는 쉽사리 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영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사기에는 아무런 문제 가 없겠지.’
사기가 충만하다 못해 아예 터질 지경이었다.
“가자! 내가 너희들을 모두 주인공 으로 만들어주마!”
“영식 장군님 만세!”
“총사령관 만세!!”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알렉을 찾 던 병사들은 손바닥 뒤집듯 간단하 게 태세를 바꾸며 영식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낙하산이라고 바닥을 치던 영식의
평판은 이번 한 번의 연설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영식은 말 그대로 욕망의 목표.
그가 서 있는 높은 단상, 옆에 늘 어선 눈부신 미녀, 직접 몸으로 경 험해봤던 영식의 힘.
그 모든 것이 병사들의 욕망을 자 극시 켰다.
질투와 선망은 종이 한 장 차이라 고 했던가.
병사들의 눈빛에는 어느새 영식에 대한 신뢰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方
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알렉의 입에서 허탈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도 병사들 앞에서 연설을 한 경 험이 여럿 있었지만 이 정도로 광기 에 가까운 반응을 이끌어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이걸 과연 연설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할까.’
차라리 집단 최면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적합한 표현이었다.
영식이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성공적으로 연설을 끝마칠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방법으로 병사들을 광란에 가까운 상태로 만 들어 버릴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다.
‘대체 저 청년은….’
이건 지도력이 뛰어나고 말고의 문 제를 떠나 있었다.
그에게는 사람의 심리 자체를 마음 껏 주무르는 능력이 있었다.
단순히 카리스마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가 가진 카리스마는 그 능력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영식이라는 청년은 철저한 계산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반응을 모두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어.’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정확한 타이 밍에 의도적으로 동작을 크게 하거 나 북소리를 울리지 못했을 것이다.
시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이 사 람의 심리 상태에 주는 영향은 엄청 났다.
아니,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심리 상태는 대부분 감각 통 해 결정됐다.
영식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가장 적절한 상황에서 장치들을 사 용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 것에 열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낸다. 가슴속에 억눌려 있는 욕망에 억지로 불을 지핀다.
지도자라기보다는 선동가가 어울리 는 청년이었다.
알렉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저 영식이라는 청년이 더욱 아득한 높 이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으로 총사령관님의 연설 을 마치겠습니다.”
당황한 표정의 사회자가 더듬거리 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식은 별다른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뒤로 병사들의 뜨거운 함성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영식 사령관님을 국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