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머신-266화 (266/284)

레벨업 머신 266화

출정식⑴

금속장치로 뒤덮인 방 안.

혈관처럼 어지럽게 얽힌 금속관들 의 더미 위에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왕좌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아...”

그 왕좌의 앞에는 온화한 인상을

가진 한 청년이 무릎은 꿇은 채 앉 아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어요 대장님.”

그는 마치 떠나간 연인을 그리는 사람처럼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빈 왕좌에서 들려오는 대답 은 없었다.

광기에 물든 그의 눈빛에서는 항상 보여주던 온화한 인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망가진 인형처럼 떨리는 그의 손길 이 왕좌에 닿았다.

단테리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열 락에 찬 한숨이 거칠어졌다.

-끼익.

“단테리온 님.”

그때, 방문이 열리고 새하얀 가운 을 입은 한 사내가 들어왔다.

일그러진, 보는 것만으로 역겨운, 못생긴 사내.

“무슨 일이죠, 레노스?”

단테리온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이 방해 받은 것이 불쾌하다는 듯이 표 정을 일그리며 물었다.

“말씀하신 병기의 개발이 끝났습니 다. 이제 저희 쪽에서 먼저 중앙으 로 향해도 아무 걱정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 중앙으로 향하자고요?”

“그렇습니다. 언제까지고 그자에게 시간을 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 까?”

레노스는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쿠우우웅!

거대한 충격과 함께 금속장치로 이 루어진 방 전체가 뒤흔들렸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압력이 단테리온에게서 뿜어져 나와 레노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으..I 아, 악!”

“말을 조심해 주세요, 레노스. 그자 라뇨. 그분은 저희의 대장님입니다. 설마 잊지는 않으셨겠죠?”

“쿨럭! 쿨럭!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입에 담을 때는 예의를 갖춰주세요.”

레노스는 답답하다는 눈빛으로 단 테리온을 바라보았다.

‘단테리온 님의 집착은 알고 있었 지만….’

예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 니었다. 그래도 자신의 내면에서 끓 어오르는 광기를 제어할 줄은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루시아를 이용한 계획이 실패한 이 후 단테리온은 완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 제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그는 미쳤다.

그것도 아주 철저할 정도로.

“단테리온 님.”

“뭐죠?”

“이 방에 계신 지도 오래 지나셨습 니다. 이제는 슬슬 움직이시는 게….”

“왜 그럴 필요가 있죠?”

“왜라니요…. 인간들이 지금 신성 의 영향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직까지는 괜찮지만 더 시간이 흐 른다면 위험해질 겁니다.”

“하하하. 상관없습니다, 레노스. 어 차피 대장님만 저희 쪽으로 돌아온 다면 다 해결될 일이니까요.”

“…지금 인간들을 이끌고 있는 것 은 바로 그 대장님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레노 스. 하지만 그럴 날도 얼마 남지 않 았습니다. 대장님은 이곳으로 돌아 올 겁니다. 흐}, 하하하하. 그래, 맞 아요. 다시 이 왕좌에 앉아, 제가 바라는 그때 그 모습으로 남아주실 겁니다.”

숨이 막힐 듯한 광기.

레노스는 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그 광기어린 모 습에 몸을 떨었다.

“그는 배신자일 뿐입니….”

-콰직!

“커헉, 쿨럭!”

눈으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레노스의 몸을 꿰뚫었다.

그의 입을 타고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단테, 리온, 님….”

“배신자라뇨.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됩니다, 레노스. 대장님은 저희를 배신한 게 아니에요. 그냥 그분은 락테온의 저열한 혀 놀림에 잠시 혼 란스러워하고 계신 겁니다.”

“쿨럭! 쿨럭! 아, 으, 아아.”

“레노스, 전에 말했던 자동 공격 장치는 모두 고치셨나요?”

“그, 그렇습니, 다.”

레노스는 전신에 차오르는 고통을

필사적으로 견디며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테리온의 입가에 방긋 미소가 지 어 졌다.

“다행이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손을 내리그었다.

-콰직!

“커, 억….”

레노스의 몸이 무형의 기운에 반으 로 쪼개졌다.

-콰직! 콰직! 콰지지직!

망치로 내려찍는 것처럼 반으로 쪼

개진 레노스의 몸이 처참하게 박살 나기 시작했다.

단테리온은 오랜 시간을 자신과 함 께 해온 그를 직접 죽이면서도 아무 렇지도 않다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짓고 있었다.

“그럼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겠네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단테리온은 환희에 찬 한숨을 내쉬 며 빈 왕좌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아, 대장님.”

그는 일그러진 미소를 입가에 머금 으며 빈 의자의 바닥을 혀로 핥았다.

-왜 그런 짓을 한 것입니까?

이곳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가 자연 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들은 실패했으니까.

-실패라뇨. 대장님은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실패했다. 이제야 그 말을 이해했다.

-락테온…. 또 그 빌어먹을 자식의 말입니까?

-그가 옳았다.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신을 조각하고 있었다.

차갑게 이어지는 목소리.

“아닙니다. 대장님. 저희는 보이지 않는 신을 조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 니다.”

단테리온은 떨리는 손으로 왕좌를 쓰다듬었다.

이곳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의 눈빛이 떠올랐다.

벅찬 환희가 그의 전신을 짜릿하게 전율시 켰다.

“제 신은 바로 당신입니다.”

그는 신에게 기도하는 사제처럼 경 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컥.

“와아...”

“이, 이게 다 영식이 네가 만든 거 야?”

“맞아. 물론 직접 만든 건 아니고 스킬로 공장을 만들어서 대량 생산 한 거지만.”

창고의 문을 열자 엄청난 숫자의 탱크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는 모습 이 보였다.

영식을 따라온 길드원들은 감탄사

를 흘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전에 영식 씨가 만드셨던 차…? 랑 같은 건가요?”

“그거랑은 좀 달라. 목적 자체가 이 동 수단이 아니라 공격 수단이니까.”

그가 만든 장갑차 정도라면 사실 탱크와 비교해도 크게 꿀릴 일 없는 무기였지만 그 점은 굳이 말하지 않 았다.

“아, 영식 씨. 오셨군요.”

창고에 있던 한성이 영식을 향해 다가왔다.

“예. 출정식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체크해 보려고요.”

“하하. 무기들에는 이상 없습니다. 조종사 훈련도 거의 막바지 단계고 요.”

“다행이네요.”

“출정식은 언제입니까? 최근 이쪽 일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듣지 못해 서….”

“3일 후입니다.”

“?그렇군요.”

영식의 말에 한성은 씁쓸한 표정으 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영식 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 전투로군요.”

“예.”

“뭔가… 길면서도 짧았던 것 같습 니다. 영식 씨와 만나기 전에는 설 마 창조주와 정면 대결을 벌이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 데 말이죠.”

그 당시에는 창조는커녕 당장 엘노 트 왕국 하나를 상대하는 것만 해도 아득하게 느껴졌었다.

그런 살바토르 길드를 이끌고 여기 까지 온 것은 바로 영식 덕분이었 다.

“후훗. 저도 한성 씨와 같은 생각

이에요. 영식 씨를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해요.”

“흐음. 티리아는 영식이가 없었으 면 평생 남자 경험 없이 홀로 살았 을 테니 정말 그렇겠네.”

“그, 그런.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 라 씨.”

“응? 그럼 다른 남자랑 만났을 거 라고?”

“그런 건 아니지만….”

티리아는 쑥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라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역시 티리아는 놀리는 맛이 있어서 좋아. 그에 비해 저것들 은...”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영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영식의 몸에 매미처럼 찰 싹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뭐예요? 불만 있어요?”

“본 기체는 마스터를 밀착 경호하 는 중임. 부적절한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알림.”

“…아, 예. 그러시겠죠.”

아라는 반쯤 포기했다는 듯이 건성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식 씨는 전투가 끝나면 뭘 하실 계획입니까?”

“음. 글쎄요. 한성 씨는요?”

“저야 지구로 돌아가 동생을 만날 생각입니다. 아, 물론 다시 이곳으로 오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우스운 말일 수도 있지만… 이곳도 꽤 정들 었거든요.”

한성의 말을 듣던 길드원들도 동의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야 지옥과 같이 느껴지던 에 르노어 대륙이었지만 막상 좋은 사 람들을 만나 생활이 안정적이 되니 정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하. 그럴 수 있다면 좋겠네요.”

영식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길드 원들을 돌아보았다.

“저는 지구에 갈 생각은 없으니… 전망 좋은 곳에 집 하나 만들어서 조용히 살고 싶네요. 물론… 결혼도 하고 싶고요.”

영식은 루시아와 티리아, 아라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결혼이라는 말에 세 여인의 표정이 붉어지며 꼼지락꼼지락 몸을 움직이 는 것이 보였다.

- 꾸욱.

옆구리를 꼬집는 감각에 고개를 돌 리니 볼을 빵빵 부풀리고 있는 이브 의 모습이 보였다.

“마스터는 본 기체에 대해서는 아 무런 감정이 없냐고 물음.”

“음…. 그게….”

“본 기체를 이런 몸으로 만들었으 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방치하는 것 은 너무하다고 알림.”

‘이런 몸으로 만들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데.’

“본 기체를 사용할 만큼 사용하

고... 마스터는 귀축이라고 알림.”

‘너무 오해의 여지가 많은 말인데.’

“하아. 일단… 나중에 생각해 볼 게.”

“흥! 이런 고철 덩어리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으세요! 저와 단 둘이 행복하게 살아요, 주인님!”

“…단 둘이라니?”

“그건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네요, 루시아 씨.”

루시아의 외침에 아라와 티리아까 지 발끈한 표정으로 나섰다.

영식은 더 얘기가 복잡해지기 전에

슬쩍 네 여인의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한성은 그런 여인들의 모습을 바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번 생에 단명하실 일은 없으시 겠군요.”

“예… 뭐 죽창만 조심하면요.”

평소 루시아가 소란스럽게 그에게 붙어 다니다 보니 그와 다른 여인들 의 관계는 이미 연합군 내에 쫙 퍼 져 있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불멸에 가까운 욕을 먹고 있는 것도 사실.

영식과 여인들의 흐뭇한 모습을 떠 올리며 밤낮없이 죽창의 날을 갈고 있는 남자 소환자들은 한 둘이 아니 었다.

‘뭐, 내가 상관할 건 아니지만.’

그도 어엿한 남자.

서로 크게 싸우지만 않는다면 네 여인과 함께 다니는 시간이 싫지는 않았다.

아주 가끔이지만 과시하고 싶은 욕 심까지 생기기도 했다.

‘모두 예쁘니까 말이지.’

외모만 놓고 본다면 포르테 이외에 그녀들을 따라갈 수 있는 존재는 손 에 꼽았다.

그런 여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 고 있으니 어찌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영식 쪽에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거리낌 없이 다니다 보니 연합군 사 이에서 그의 평판은 최악에 가까웠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설 것 도 아니고.’

그의 정체는 전과 같이 드래곤 슬 레이어 부대를 제외한 일반 부대에 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영식은 어디까지나 생산직 소환자 부대 ‘헤파이스토스’의 수장으로 살 바토르 길드의 인맥으로 들어온 낙 하산 취급을 받고 있었다.

‘굳이 정체를 떠벌리고 다닐 필욘 없지.’

어차피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알렉 이 총사령관 역할을 대신 해줄 수 있다.

영식이 직접 병력을 이끈다면 몰라 도 실제 드래곤 슬레이어 부대와 이 번에 따로 그가 준비한 탱크 부대를 제외하고는 그가 직접 명령을 내리 지도 않았다.

영식의 평판이 바닥을 친다고 하더 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마음껏 짖어라, 이 패배자들아.’

영식은 다소 유치한 승리감까지 느 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에게 눈덩이처럼 불어난 악 평의 대가가 돌아오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