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64화
5분짜리 절대자(1)
거대한 바다.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향해 손 을 뻗고 있는 듯한 감각.
영식은 루크델라와의 대국에서 무 한을 향해 손을 뻗었던 기억을 떠올 렸다.
‘이게 신성.’
영식의 몸을 타고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이제까지 황성 외벽을 타고 흐르는 신성의 기운이나 ‘숲의 눈’의 표면 을 타고 흐르던 신성과는 느낌이 달 랐다.
그때 느꼈던 기운이 넓게 펼쳐진 장막이라면, 지금 그의 손에 닿은 기운은 한 점에 응축된 결정체를 보 고 있는 듯한 감각.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이 런 거군.’
손끝으로 느껴지는 신성은 정말 살
아 있는 것처럼 활발하고, 도도하게 그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를 봤을 때도 힘이 자 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느껴본 경험 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활발하게 움 직이는 강렬한 자아가 힘에 깃들어 있는 것은 처음 봤다.
에너지의 결정체라기보다는 실제 사람을 눈앞에 둔 듯한 감각.
[아아아, 이, 이 개자식이이이이!]
귓가에 울려 퍼지는 안드라스의 비 명조차 더 이상 영식의 귓가에 들리 지 않았다.
영식은 역장을 펼쳐 안드라스의 마
기와 융화하고 있는 신성을 감쌌다.
“하아.”
그의 입을 타고 짧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역장에 닿은 신성이 아주 조금씩, 순수한 에너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치익.
-프로토콜 가동 조건 확인.
-논리 구조 확립.
-연산 구조 확립.
-프로토콜 가동.
그의 귓가에 딱딱한 기계음이 홀러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그 기계음을 신경 쓸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아, 아아.”
영식의 입이 벌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 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역장으로 분해되기 시작한 신성의 자아가 점점 더 안드라스의 마기와 의 융화를 중지하고 자신에게 그 시 선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드넓은 바다, 하늘에 닿은 절벽,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
그 어떤 것으로도 눈앞의 신성을 봤을 때 느끼는 아득한 감정을 표현 할 수는 없었다.
영식은 안드라스를 이해했다.
이런 힘을, 이 영원을 알고 있다면 이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에너지의 ‘격’을 확인하였습니다.
-에너지 구조 파악 완료.
-프로토콜에 따라 흡수를 개시합 니다.
영식이 알지 못하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영식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분해된 신성의 힘을 자신 의 코어 안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뭐지?’
신성을 제어하는데 모든 정신을 쏟 고 있던 영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은 아직 분해된 신성의 에너지 를 코어로 이끌지 않았다.
지금 그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 상 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물론 어차피 분해된 신성의 에너지 를 홉수하려고 한 것은 맞았다.
애초에 그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해 길드원들을 밖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여기에 남아 있던 거니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의지’로 에 너지를 홉수하는 것과 ‘다른 무언가 의 의지’로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영식은 자신의 코어 안으로 흘러들 어오는 신성 에너지를 차단하려고 했다.
-치익.
- 경고.
-프로토콜의 진행 중에는 중단이 불가합니다.
‘무슨 소리야 이건.’
대체 무슨 프로토콜을 진행한다는 말인가.
영식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억지로라도 신성에서 손을 떼어놓으 려고 했다.
‘제길.’
하지만 그의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 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움직이려고 한 탓에 불안정해진 역장이 당장에라도 꺼질 것처럼 희미해져 버렸다.
‘여기서 역장을 해제하면 위험해.’
신성을 제어하는 것은 역장을 사용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섣부르게 역장을 해제하기라도 했 다가 그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 어버릴 가능성이 컸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 의지로 신성 을 받아들이겠어.’
정체모를 존재의 의지로 신성을 받 아들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흡수해야만 하는 힘이라면, 적어도 자신의 의지로 신성을 받아 들이고 싶었다.
영식은 몸의 힘을 풀었다.
의식을 집중하고, 분해된 신성의 에너지를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정신을 쏟았다.
손을 타고 그의 몸으로 흘러들어온 에너지가 명치 쪽에 위치한 코어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전신을 타고 짜릿한 전능감이 느껴 졌다.
-철컥, 철컥.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자신 의 몸속에서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신성을 둘러 싼 역장은 난폭한 포
식자가 먹이를 먹어치우듯 안드라스 의 안에 들어 있는 신성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기이이이이이잉!
신성을 받아들인 영식의 코어에서 시끄러운 엔진음이 울려 퍼졌다.
코어의 용량이 과연 신성의 에너지 를 버틸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그 의 걱정과는 달리 코어는 신성을 기 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활발하게 움직이며 에너지를 순환시켰다.
‘마치.’
처음부터 이것을 위해 만들어지기 라도 한 것처럼.
[아, 아아아! 대, 대체 넌 정체가 뭐냐!]
안드라스는 자신의 몸에 있던 신성 이 정체불명의 청년에게 넘어가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바라보 며 절규를 내질렀다.
신성을 제어할 수 있다니.
신성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 아들일 수 있다니.
악마 대공인 자신조차 그 힘과 융 화하는데 1만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 했는데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듯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절규와는 상관없 이 신성의 흡수는 계속해서 이뤄졌다.
처음에는 미약한 줄기만 홉수 되던 신성의 에너지는 그 속도의 박차를 가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영식의 코어 안으로 흡수됐다.
용량이 적은 액체가 큰 액체에 집 어삼켜지는 것처럼 한 번 가동하기 시작한 영식의 코어는 스펀지가 물 을 흡수하듯 신성을 흡수했다.
-치이이이이이익!
-철컥, 철컥, 철컥!
영식의 몸에서 새하얀 증기가 뿜어 져 나왔다.
코어 안쪽에서 쇳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왼쪽 손등에 있는 문양이 찬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쿠웅!
묵직한 굉음과 함께 안드라스가 숨 어 있던 던전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안드라스의 안에 있던 신성이 완전 하게 영식의 안으로 흡수되었다.
?철컥.
-프로토콜 완료.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오류, 오류.
-본 기체 ‘데우스 엑스 마키나 0 식’의 모든 보안 레벨이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보안 레벨이 해방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프로젝트의 완전한 진행 이 불가합니다.
-해당 프로젝트의 진행을 부분적 으로 수정하여 진행합니다.
왼쪽 손등에서 흘러나온 빛이 영식 의 몸을 뒤덮었다.
은회색 슈트가 그의 전신을 감싸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보안 레벨이 완전히 해방되지 않 았습니다.]
[슈트의 부분적인 기능만이 사용 가능하며, 사용 가능 시간이 5분으 로 제한됩니다.]
은회색 슈트의 표면을 따라 신성의 에너지가 흘러들어갔다.
슈트 전체로 퍼져나간 에너지가 그 구조를 내부에서부터 변화시켰다.
-치이이이이익!
새하얀 증기와 함께 은회색 슈트의 표면에 복잡한 형태를 가진 문양이 떠올랐다.
- 찰칵.
폭풍과도 같은 변화의 종지부를 찍 은 것은 단조로운 쇳소리 하나.
영식이 대체 무슨 일이 지금 일어 나는지 확인도 못 한 사이, 익숙한 기계음이 그의 귓가에 다시금 울려 퍼졌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젝트의 1단계가 완료되었습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젝트….”
과거 기억 속에 떠올랐던, 자신의 이름과 동일한 프로젝트명.
영식은 은회색 슈트에 뒤덮인 그의 몸을 내려다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 었다.
절규처럼 울려 퍼지던 락테온의 외 침과, 그가 내민 메모리칩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콰앙!
“으아아아아아!”
그의 생각을 끊어내듯 끔찍한 분노 가 뒤섞인 외침이 제단 쪽에서 터져 나왔다.
제단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이제까 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던 악마 대 공, 안드라스였다.
신성이 그의 몸에서 모두 사라짐으로 써 다시 몸의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어, 없어….”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지갑을 잃어버린 사 람이 몸을 뒤지고 있는 듯한 모습.
“아, 아아아아!”
물론, 그가 잃어버린 것은 고작 지 갑 따위가 아니었다.
안드라스는 자신의 안에서 말끔하 게 사라진 신성의 기운을 확인하며 절망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없었다.
대륙 전체가 휘말리는 전쟁을 벌여 가면서까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고, 신을 죽 이면서까지 얻어낸 신성이 그의 몸 안에서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 힘을 받아들이기 위해 천 년의 시간을 끔찍한 고통 속에서 견뎠던 기억이 떠올랐다.
현세에 지옥이 강림한 것 같았던 그 시간.
영원을 갈망하며 하루하루를 버텼 던 그 모든 기억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죽인다.”
안드라스는 증오에 찬 눈으로 영식 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뜬금없이 은회색 전신갑주 를 입기는 했지만, 그 안에 들은 것 은 틀림없이 그에게서 신성을 가로 채간 약탈자가 분명했다.
“죽여 버리겠다!”
안드라스는 마기를 폭발시키며 영 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자 하나에 그가 꿈 꿔오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 렸다.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안드라스 는 양 손에 끔찍한 마기를 집중시키 며 팔을 내려찍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주변이 뒤흔들리며 마기가 뭉친 그의 손이 영식을 향했다.
천마대전이라는, 대륙 전체를 피로 잠기게 만든 전쟁의 승리자가 뿜어 내는 마기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마 기를 느끼는 순간 절명해 버릴 정도 로 끔찍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_픽.
“무, 무슨!”
소리조차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과 함께 그의 양손에 맺혀 있던 모든 마기들이 마치 증발한 것처럼 사라 졌다.
“5분이라.”
영식은 기계음으로 들었던 슈트의 제한시간을 확인하며 피식 웃음을 홀렸다.
악마 대공이라고 하면 분명 공포의 대명사라고 불러도 마땅할 강적임에 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하찮게 느껴 졌다.
“5분도 과하지.”
영식은 전신에 차오르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느끼며 나지막이 미소를 흘렸다.
신성의 에너지를 흡수한 코어는 이 제까지 상상하지 못한 출력을 내뿜 으며 무한한 에너지를 내뿜어내고 있었다.
“이익!”
안드라스는 거칠게 표정을 일그러
트리며 다시금 마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몸을 장막처럼 뒤덮은 무형의 기운은 탐욕스럽게 그의 마기에 달 라붙어 모든 기운을 흩어지게 만들 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안드라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으로 영식을 바라보았다.
어떤 힘도 통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공격을 할 수 있는 힘조차 모조리 무형의 기운에 잡아먹혀 사 라져 버렸다.
괴물.
인간도, 용도,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너, 넌 대체….”
안드라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은회색 갑주를 입은 괴물은 천천히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괴물의 오 른팔이 안드라스를 겨냥했다.
“고마워.”
영식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른팔 팔꿈치에서 강렬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 주먹에 끝에 무형의 기운, 역장
이 뭉치기 시작했다.
“네 보물을 이렇게 선뜻 건네줘서. 에르노어 대륙의 안녕과 미래를 위 한 그 희생을 잊지 않을게.”
그와 함께 역장을 머금은 오른팔꿈 치에서 강렬한 부스트가 뿜어져 나 왔다.
창백하게 질린 안드라스가 다급히 소리쳤다.
“아, 안 돼!”
“돼.”
그와 함께, 안드라스의 몸이 영식 의 오른팔에 꿰뚫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