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63화
안드라스의 던전(3)
천 년.
정확히는 구백 년하고 몇십 년의 시간 동안 그는 손가락하나 움직이 지 못한 채 살아 있었다.
신성 (神性).
우주의 법칙을 초월한, 세계의 근
간을 이루는 힘.
감히 필멸자의 몸으로 그 힘을 받 아들인 대가였다.
신성과 마기가 융화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육체를 날카 로운 칼날로 끊임없이 도려내는 그 지옥 속에서 그는 살지도, 죽지도 못 하는 몸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 으, 아아아.]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정신이 무너지는 것도 허락하지 않 는다.
융화가 진행될수록 그의 육체는 강 해지며, 정신은 맑아져갔다.
지옥.
그는 그가 태어난 마계보다 지금 이곳이 훨씬 더 지옥에 가깝다고 느 꼈다.
[이, 히히히. 히히히히히.]
그런 고통의 향연 속에서 안드라스 는 광기에 찬 웃음을 흘렸다.
그가 고통을 즐기는 미치광이인 것 은 아니었다.
그가 갈망하던 신성에게는 마땅히 그 고통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 기 때문이었다.
만년의 시간?
지옥과도 같은 고통?
그런 사소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이 시간만 견디면….]
불같은 욕망이 그의 가슴속에서 끓 어올랐다.
끈적한 욕망은 융화의 과정에서 느 껴지는 끔찍한 고통조차 집어삼켰다.
이 힘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비를 넘겨야 했던가.
심지어 그런 고비를 넘겼음에도 불 구하고 그가 이 힘을 얻은 것은 기 적과도 같은 우연의 결과였다.
[히, 히히히히!]
우연이면 어떤가.
그는 그렇게 갈망하던, 갈구하던 신성을 손에 넣었다.
세계의 법칙을 조롱할 수 있는 힘 을 받아들였다.
신성을 가진 자에게는 여러 권능이 주어지지만, 그중 그가 가장 욕망하 는 것은 단 하나였다.
불멸!
필멸자에게 있어서 과연 그 단어보 다 달콤한 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악마에게도 수명이 있었다.
천사에게도, 용에게도 수명은 존재
했다.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 랜 세월을 살 수 있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성은, 그 법칙 위에 선 힘만은 영원했다.
필멸자의 한계를 벗어던지고 영원 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영원에 비하면 만년의 시간 따위는 하찮기 그지없었다.
[응?]
그때, 그의 감각에 다른 존재가 감 지 됐다.
[또 헛짓을 하고 있군.]
그의 목소리에 조롱과 경멸이 섞였다.
자신의 신전을 탐하려는 무리들. 지난 천 년의 시간 동안 수도 없이 봐오던 존재들이었다.
[필멸자들은 어찌 이리 어리석단 말인가.]
더 이상 자신에게는 아니지만, 그 들에게 시간은 유한했다.
그 유한한 시간을 쪼개어 이런 무 의미한 일에 힘을 쏟다니!
참으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흐흐흐. 세라핌 그년도 뚫지 못한
신성의 보호를 감히 어디서 인간들 이...]
그는 사념의 눈으로 밖을 관찰했 다. 드래곤 두 마리가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대부분은 인간으로 이루어 진 무리였다.
어차피 드래곤이건 인간이건 중요 하지 않았다.
이 신성의 보호는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테니까.
[응…?]
회색 머리칼의 청년이 자신의 신전 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청년을 지켜보던 안드라스는 이
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를 흘렸다.
[뭐지?]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드래곤도, 천사도 아니었다.
그는 그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 재였다.
[이히히히히, 도마뱀 놈들이 키메
라라도 만들었나.]
부질없는 짓. 무의미한 짓이다.
어떤 발악을 하더라도 법칙 위에 존재하는 이 힘에 닿을 수는 없었다.
안드라스는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 통 속에서도 광기에 찬 폭소를 터뜨 렸다.
발에 밟힌 지렁이들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꼴을 봤을 때 이런 기분 을 느낄 수 있을까.
가소롭고, 우스웠다.
그 무의미한 발버둥에 동정심마저 들 정도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과는 똑같 다. 나는, 이 안드라스는 이 세계의 신이 될 것이다.]
그는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목소리 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였다.
신성이, 자신의 신전을 보호하고 있는 절대적인 힘이 저 회색 머리의 청년의 손을 타고 흩어지는 것이 느 껴 졌다.
[무슨!]
그는 이 믿을 수 없는 일에 다급 한 소리를 내질렀다.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길 리가 없었다.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신성의 보호 가 무너지며 그의 신전에 구멍이 뚫 렸다.
[아, 안 돼!]
안드라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 의 신전에 침입하는 침입자를 향해 나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침입자들은 무자비할 정도 로 망설임 없이 그가 누워 있는 제 단으로 걸어왔다.
“딱 좋을 때 왔네.”
신성의 보호를 무력화 시켰던 회색 머리칼 청년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 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안드라스는 체면도 잊어버리고 절 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소, 손을 치워라 이 사악한 자식!]
‘너한테 들으니까 마치 내가 진짜 쓰레기가 된 것 같잖아.’
악마에게 사악하다고 말을 듣는 기 분은 아주 묘하기 짝이 없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고 나 무라는 꼴이랄까.
영식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정신을 집중 했다.
안드라스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넌 대체 뭐지! 어떻게 신성을 제 어할 수 있는 거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글쎄.”
영식은 필사적으로 소리치는 안드 라스를 바라보며 약간 홍에 겨운 목 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절박하게 소리칠수록, 지금 안드라스가 영식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확 실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 힘을 흡수해야 해.’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영식은 꽤나 긴장한 상태였다.
외벽을 무너뜨릴 때처럼 단순히 그 힘을 흩트려 놓는 것만으로는 부족 했다.
이 힘을 자신의 코어 안으로 흡수 해서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로 만들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여기까지 와서 만 년 후에나 있을 위험을 제거하는 이유가 없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제거했 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 지만 지금 영식의 상황은 그런 긍정 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고 나발
이고 당장 눈앞에 단테리온이라는 명확한 위험이 드리워져 있는데 무 슨 긍정적인 생각을 한단 말인가.
‘할 수 있어.’
역장을 사용해 신성의 힘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
이제는 그 힘을 제어해서 자신의 코어 안쪽으로 이끌면 될 문제였다.
“후우….”
영식의 입에서 긴장에 찬 한숨이 흘러나왔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 력했지만 실제로 그 과정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코어의 한계를 넘는 용량의 에너지가 들어와서 과부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과부화만 일어나면 차라리 다행이지.’
그대로 코어가 폭발하여 죽을 수도 있었다.
지금 코어 안에 신성의 힘이 깃들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더 많은 신성 에너지를 넣을 수 있는 지는 그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모두 여기 밖으로 나가줘.”
“예? 무, 무슨 말씀이세요, 주인님.”
“혹시 위험한 일을 하시려고 하시 는 건가요?”
“잠깐. 여기 오면서 그런 말은 없 었잖아.”
영식의 말에 세 여인이 다급한 표 정으로 다가왔다. 그는 깊게 가라앉 은 눈빛으로 이브를 향해 고개를 돌 렸다.
“이브,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 가. 그리고… 루크델라에게 내 명령 이라고 전하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
만약 자신의 코어가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그 범위와 위력이 얼마나 될 지는 영식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위험에 길드원들을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왔을 텐데.’
혹시 던전 공략 중에 다른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생각에 길드원들을 데려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의 미가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마스터….”
“알겠지?”
?
한참을 망설이던 이브는 천천히 고 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알림.”
“영식이 자네….”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모를 상황 에 대비하는 겁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절 믿어주세요.”
그의 말에 길드원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번만큼 영식의 믿어달라는 말이 가슴 아프게 들린 적이 없었다.
“주인님…. 괘, 괜찮은 거죠? 아무 일 없는 거죠?”
루시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았다.
영식은 그녀의 주인이자, 신이었다.
그가 없는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 영식의 반응은 너무나도 큰 공포로 다가왔다.
“말했잖아. 괜찮다고. 아니면 날 못 믿는 거야?”
영식은 불안에 떨고 있는 루시아의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그,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믿어.”
영식은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날, 믿어.”
그는 이제까지 수많은 기적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a ≫
“?가자. 루시아, 티리아.”
아라는 루시아와 티리아의 두 팔을 잡아끌며 통로로 향했다.
문을 나가기 전 그녀는 고개를 돌 려 영식을 바라보았다.
“ 영식아.
≪ O ”
흐.
“나, 남자들은 그… 가, 같이하는 게 꿈이라며?”
‘뭘 같이해.’
“돌아오면 그… 생각해 볼게.”
아라는 자기가 말하고도 부끄러운 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두 여인 의 팔을 잡아끌었다.
“앗! 치사해요! 저도 주인님이 돌 아오면 화끈한 서비….”
“빠, 빨리 가자!”
“웅? 방금 무슨 말을 하신 거예요,
아라 씨?”
각자의 반응과 함께 길드원들의 모 습이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하.”
영식은 마지막 아라가 남긴 말에 실소를 터뜨렸다.
‘이거 죽을 수가 없겠는데.’
신성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생겼다. 이데아. 머릿속으로 꿈꿔왔 던 로망이 현실로 이뤄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이깟 신성쯤이야.
“자, 그러면 한번 가져가 볼까.”
영식은 다시금 안드라스를 향해 손
을 뻗었다.
그가 다가오자 안드라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윽! 아, 안 된다! 안 된다 이 악 마야!]
‘악마는 너잖아.’
[내가, 내가 이 신성을 가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투를, 죽음을, 지옥을 넘어 왔는지 알고 있나! 천 년의 시 간 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아왔 는지 알고 있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이 고독 속에서, 얼마나 영 원을 갈망했는지 알고 있나!]
처절한 절규.
안드라스가 얼마나 지금 이 상황에 절망하고 있는지 절절히 느껴지는 절규였다.
영식은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안드 라스의 신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알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