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62화
안드라스의 던전(2)
“이게… 던전 입구라고?”
“그렇다.”
영식은 아주 반듯한 구체의 형태를 하고 있는 거대한 암석을 올려다보 았다.
암석의 크기는 못해도 수백 미터
이상. 숲 한가운데 거대한 달걀이 박혀 있는 듯한 이질적인 광경.
“이게... 어떻게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거지?”
악마 대공의 던전이라기에 당연히 은밀한 장소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실상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던전이라고 이름 붙여진 주 제에 이 정도로 대놓고 있어도 되냐 는 의문이 들 정도로 눈에 띄는 장 소에 있었다.
“발견 자체는 되었다. 하지만 아무 도 던전의 입구를 뚫어내지 못했을 뿐이지.”
“영식 씨, 이거... ‘숲의 눈’이라고 불리는 장소입니다.”
암석을 살펴보던 한성이 말했다.
“숲의 눈이요?”
“예. 소환자들 사이에서도 몇 번 말이 오갔던 장소입니다. 너무 형태 가 특이해서 여기를 조사한 길드도 몇몇 있다고 들었어요.”
“흠….”
“물론, 이 숲의 눈의 정체가 밝혀 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이게 던전 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네요.”
한성은 신기하다는 듯이 암석의 표
면에 손을 올렸다.
숲의 눈에 대한 조사는 블랙큐브의 조사와 같은 절차를 밟았다.
일단 이것저것 해볼 수 있는 일은 모두 시도해 봤지만, 결과가 전혀 나오지 않자 자연스럽게 중단된 케 이스.
그 비밀이 과거 에르노어 대륙에서 일어난 거대한 전쟁과 이어져 있다 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보다 영식 씨, 이 결계는 어떻 게 뚫으실 생각이십니까?”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습니다.”
영식은 매끄러운 암석의 표면에 손 을 올렸다. 천천히 눈을 감고, 표면 에 흐르는 에너지를 느꼈다.
“아...”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의식이 확장되며 영식의 눈에 놀라 움이 서렸다.
암석의 표면을 타고 흐르는 기운은 분명 황성 외벽에 흐르는 기운과 동 일한 기운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동일 한 기운은 아니었다.
외벽에 흐르는 기운과 암석 표면에
흐르는 기운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 이가 존재했다.
‘ 약해.’
황성 외벽에 흘렀던 가늠할 수도 없는 거대한 기운에 비하면 이 암석 표면에 흐르는 기운은 확연히 차이 가 느껴질 정도로 약한 기운을 가지 고 있었다.
‘밀도 차이가 있다고 할까.’
황성 외벽에 흐르는 기운이 물이라 면 지금 이 암석 표면에 흐르는 기 운은 기름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물론, 애초에 신성 자체가 가진 힘 이 워낙 막대하기 때문에 기름 정도 의 밀도라고는 해도 쉽게 뚫리는 것 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능해.’
영식의 직감이 이 외벽에 흐르는 에너지는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 다. 막연히 생각했던 가능성이 실제 눈앞에서 이뤄지자 짜릿한 전율이 밀려왔다.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신성을, 역장을 넘어선 기적을, 이 세계의 근원이 되는 힘을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은 단테리온이라는 강대한 적을 눈앞에 둔 영식에게 있어서 가 뭄에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근데 좀 이상한데?’
암석 외벽에 흐르는 신성의 기운을 느끼던 영식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 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내 코어 안에 들어있는 신성의 기운은 이 기운보다 더 짙은 거지?’
신성의 일부만을 가져갔기 때문에 기운이 옅어진 거라면, 영식의 코어 안에 들어 있는 신성도 옅은 기운을 뿜어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 영식의 코어 안에 들 어 있는 신성의 기운은 암석 외벽에 흐르는 기운보다 훨씬 더 짙었다.
‘아니, 애초에 황성 외벽에 흐르는 기운보다도 짙었어.’
신성 그 자체가 묻혀 있는 장소보 다 더욱 짙은 기운. 그런 기운이 지 금 영식의 코어 안에 자리 잡고 있 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영식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암석 외벽에 흐르는 신성을 그가 제어할 수 있다 는 사실이었다.
“으음. 아무리 네가 강하다고는 해 도 이 결계는….”
베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끝 을 흐렸다.
그가 과거 북방의 악마들 중의 일 원이라고는 하나 신성을 다룰 수 있 을 리가 없었다.
신성이란 것을 말 그대로 신의 힘.
우주의 법칙을 조롱하는 기적의 힘
이었다.
애초에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필멸자 가 다룰 수 없는 종류의 힘인 것이다.
“할 수 있어.”
“응…?”
“이거라면, 충분히 다룰 수 있어.”
영식은 그렇게 말하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피어오 르기 시작했다.
-치익.
-고속 연산을 개시합니다.
-‘역장’의 사용이 부분적으로 가능 해집니다.
-역장 구성에 필요한 연산 장치의 사용으로 보안 레벨 1 이하 무기만 사용 가능합니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시야가 어지러 워지며, 시끄러운 잡음이 귓가에 들 렸다.
짜릿한 전능감이 그의 전신에 퍼져 나갔다.
역장을 사용했을 때만 느낄 수 있 는 독특한 전능감.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발아래 있 는 것 같은 그 감각은 마치 각성제 를 통으로 들이킨 것 같은 전율을 가져다주었다.
“하아….”
전율에 찬 한숨이 흘러나왔다.
암석의 외벽에 흐르고 있는 강력한 에너지가 역장의 기운으로 점차 흩 어지고 있었다.
-쿵! 쿠구구궁!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을 기점으로 암석의 외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굉음이 주 변에 울려 퍼졌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베냐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영식을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진 장 소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루 크델라도 소리쳤다.
[어, 어떻게 인간이 신성을…!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냐!]
영식의 정체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그는 베냐보다 더욱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몸을 떨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상식이 무 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후훗. 역시 주인님이라면 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음. 이런 걸 ‘영식’했다고 해야 하
나….”
반면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살바토르 길드의 태도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신성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탓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이 제까지 영식이 보여줬던 행보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기적을 행사했다.
마치 기적을 만들어내기 위해 태어 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영식의 모습에 익숙해진 살바 토르 길드원들은 덤덤한 표정으로 무너진 외벽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이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건 가요?”
“후우. 잠깐만, 일단 정비하고.”
역장을 사용해서 신성을 뚫어낸 영 식은 자리에 앉아 숨을 골랐다.
처음 역장을 사용할 수 있을 때에 비해서는 훨씬 나아졌지만 아직도 수족처럼 자연스럽게 역장을 사용하 지는 못했다.
“믿을 수 없군. 어떻게 신성을….”
“내가 원래 그런 말 자주 듣는 편 이야. 그보다 혹시 이 안에 대한 정 보는 없어?”
“없다. 이제까지 이 결계는 한 번 도 뚫린 적이 없었다.”
“흠.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안드라스가 신성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이상 큰 위험요소 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말에 영식은 고개를 끄덕이 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볼까.”
더 이상의 정보가 없다면 직접 들 어가서 확인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 었다.
영식을 비롯한 살바토르 길드원들
은 무너진 암벽 사이로 발걸음을 옮 겼다. 암벽 안으로 들어가니 어두컴 컴한 통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나가라. 이곳에서, 나가라.]
“읏….”
“이 목소리는….”
저주에 가득 찬, 듣는 것만으로 머 리가 어지러워지는 광기서린 목소리 가 통로 안에 울려 퍼졌다.
“안드라스?”
[이곳은 나의 성역이자, 보고(寶庫) 이다. 나가라, 이곳에서 나가라.]
광기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드라스는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아니었어?”
“맞다. 육체는 움직이지 못하는 상 태지만 사념은 남아 있는 것 같다.”
“사념이 라.”
[나가라, 더러운 침입자들아!]
“혹시 사념만으로 무슨 힘을 낼 수 있거나 그런 거야?”
영식은 통로 안에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안드라스의 목소리를 무시하 며 베냐에게 물었다.
그녀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 로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았나. 그는 지금 아무것 도 하지 못한다고. 사념만으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힘 이 필요한데 지금 그는 그 힘이 없 는 상태다.”
“즉, 입만 살아 있다 이거지.”
영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두컴컴 한 통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귓가에 안드라스의 외침이 다 시금 울려 퍼졌다.
[나는 안드라스. 악마의 대공이며, 마계의 지배자다. 참혹한 최후를 맞 이하고 싶지 않으면 여기서 나가라.]
“이 새끼 말 한번 더럽게 많네.”
“뭔가 초조해 하는 것 같기도 한 데?”
“당연히 초조하겠지.”
영식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 었다.
‘지난 천 년간 고이 간직해 오던 신성이 빼앗길 위기에 처했으니까 말이야.’
신성에 대한 안드라스의 집착은 광 기에 가깝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영식의 존재는 공포 그 자체 일 것이 분명했다.
“가자.”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했 다, 인간.]
“더 들어가면 어떻게 할 건데?”
[저주! 참혹한 저주를 그대에게 내 릴 것이다!]
“아, 예. 마음대로 하세요.”
영식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하며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몸을 움직였 다. 그가 통로 안쪽으로 들어갈 때 마다 안드라스의 목소리가 더욱 커 지고, 빨라졌다.
-콰앙!
영식은 통로 끝에 있는 거대한 문
을 거칠게 발로 걷어찼다.
문이 열리며 그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안드라스인가?’
넓은 제단 위에는 검은색 기운이 뭉쳐 일렁이고 있었다. 그 기운 너 머로 제단에 누워 있는 흑발의 사내 가 보였다.
그 사내의 등에는 박쥐와 같은 악 마의 날개가 돋아 있었다.
[이익!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 인간!]
제단에 누워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안드라스의 몸과 달리 주변에서는 그의 외침이 시끄럽게 이어지고 있 었다.
육체는 움직이지 못한 채 사념만 남아 있다는 말이 이해됐다.
‘정말로 입만 산 거잖아.’
물에 빠져도 입만 둥둥 뜬다는 표 현이 있다. 지금 안드라스의 상태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정작 중요한 육체는 신성과의 융화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 지만 의식만은 남아 필사적으로 영 식을 쫓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자, 그럼 어디.”
영식은 검은 기운이 뭉쳐 있는 곳
으로 걸어갔다. 강력한 마기로 뒤덮 인 기운 안에는 이제는 익숙해진 신 성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신성의 기운이 그의 마기와 뒤섞이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저게 융화 과정이란 건가.’
신성과 마기가 뒤섞이는 과정.
새로운 힘을 받아들인 육체가 그 힘을 사용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비가 되기 위해 애벌레가 번데기 의 과정을 거치는 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한 상황.
‘만화로 치면 변신 도중인 건가.’
흔히 변신을 할 때 보이는 무방비 한 모습과 지금 안드라스의 상태가 비슷했다.
“딱 좋을 때 왔네.”
변신 도중 공격을 하지 않는 다는 금기.
영식은 그 금기를 깨기 위해 안드 라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 손을 치워라! 이 사악한 자식!]
악마 대공, 마계의 지배자가 영식 을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