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머신-259화 (259/284)

레벨업 머신 259화

신성 (神性) (2)

“뭐, 라고?”

그는 가늘게 떨리는 눈빛으로 베냐 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왜 락테온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전해들을 수 있었는지 이해 가 되지 않았다.

“설마… 락테온이 지금 살아 있다 는 의미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꿈속에서의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 랐다.

거친 백발을 가진, 난폭한 인상의 청년. 단테리온과 완전히 상반되는 그 청년은 처절한 목소리로 자시에 게 외치고 있었다.

-저희들은, 보이지 않는 신을 조각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진의를 알 수 없는, 추상적인 말.

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은 영식 의 머릿속에 낙인처럼 선명하게 새 겨져 있었다.

‘만약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과거를 알아낼 수 있 을 것이다.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 어갔다. 그렇게 알고 싶었던 과거였 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머릿속이 복 잡해졌다.

과거에 대해 알고 싶으면서도, 알 고 싶지 않은 기묘한 감각.

영식은 긴장감에 찬 표정으로 베냐 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는 죽었다.”

“아...”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베냐의 말 에 영식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턱 끝까지 차올랐던 긴장이 한 번 에 풀어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후우. 그렇다면 그에게 어떻게 전 해 들었다는 거지?”

“그가 대전쟁에서 죽기 전, 나를 찾아왔었다.”

베냐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나는 목

숨이 정말 경각에 달아 있었다. 상 처를 회복하지 못해 레어에서 조용 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도중 그자가 레어로 들어왔다.”

“그게 언제쯤이지?”

“대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렇군.”

“처음 나는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짜내 그와 싸우려고 했었다. 뭐… 당장 죽어가는 상황이라 그럴 힘도 없었지만.”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말 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싸우러 온 것 이 아니라고 하더군.”

“그 말을 믿었어?”

“말하지 않았나? 내게는 상대가 진 실을 말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권능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씁쓸히 웃었다.

“그때 그자는… 무척이나 절박해 보였다.”

“ 절박했다고?”

“그래. 그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 듯이 레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날 치료해 줄 테니 몇 가지 정보를 달라고 부탁하더군.”

“?계속 말해봐.”

“그의 나노머신? 뭐 그런 치료로 인해서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 었다. 보다시피 상처가 너무 커서 완전히 회복은 못 했지만 말이야. 그리고 난 거래대로 그에게 내가 알 고 있는 정보를 전해주었다.”

“잘도 그런 거래를 받아들였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을 그런 꼴로 만든 적대 세력의 거래를 받아 들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행동이 었다.

“하하. 나도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군. 하지만… 그만큼 그때 그자는 처절해 보였다.”

“그에게 알려주었다는 정보는 뭐 지?”

“천마대전에 대한 정보였다.”

“천마대 전?”

베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천마대전 중 죽은 신에 대한 것이지.”

“천마대전 중에 신이 죽었나?”

그것조차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응? 그 락테온이란 자에게서 전해 듣지 못한 것이냐?”

“?무슨 의미야 그게.”

“락테온이라는 자는 분명 너를 설 득시키기 위해서 그 정보를 찾고 있 다고 말했다.”

“나를 설득시킨다고?”

“그래. 너를 설득해 지금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얼마나 허무하며, 부질없는지 알려주어 이 아무 의미 없는 전쟁을 멈춘다고 말했지.”

“뭐, 그 이후에 대전쟁이 일어났으

니 그 설득이 바로 이루어진 건 아 닌 것 같지만…. 네가 지금 연합군 의 총사령관이라는 의미는 나중에라 도 마음을 바꿨다는 의미가 아니었 나?”

“모르겠어.”

“모른다니?”

영식의 대답에 베냐는 눈살을 찌푸 렸다.

영식은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붙잡 으며 말을 이었다.

“난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어. 어 느 정도는 다시 기억을 되찾았지 만... 그가 나를 무슨 말로 설득하려 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그렇다면 네가 인간들의 편으로 등을 돌린 이유는….”

“나도 몰라. 내가 왜 같은 창조주 들을 배신했는지.”

베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락테온에게 전해 듣던 ‘대장’이라 는 자가 기억을 잃고 있을 거라고는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너도 복잡한 상황이로군.”

“부정하지는 않겠어.”

지금 자신의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 이 아니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배신을 한 이유를 모르는 배신자라 니,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었다.

“그래서 그 죽은 신에 대한 정보라 는 게 정확히 뭐지?”

“흐음.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봐서 천마대전 자체에 대해서 얘기해 줘 야겠군.”

베냐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천사와

악마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다. 에 르노어 대륙에 살고 있었던 모든 드 래곤들과 아인종, 인간들을 휘말리 게 만든 거대한 전쟁. 이게 흔히 말 하는 천마대전이다.”

“그것까지는 알고 있어.”

“그 천마대전의 시발점은 악마 대 공 안드라스가 신의 신성을 탐하면 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성?”

“신의 근원, 에르노어 대륙의 근간 을 이루는 힘. 우주의 법칙을 거스 를 수 있는 힘이 바로 신성이다.”

“?뭔가 쓸데없이 거창한데.”

영식은 거창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설명에 헛웃음을 홀렸다.

그 신성이라는 것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너무 허황된 정보라 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말에 베냐는 단호한 표 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창하지 않다. 신성은 아득 하고, 절대적인 힘이다.”

“뭐… 그렇다 치고. 그래서 그 안 드라스는 어떻게 되었는데?”

“안드라스는 신의 힘을 찬탈하기 위해 악마들을 이끌고 에르노어 대 륙을 침공했다.”

“그리고 천사들은 그런 악마들을 막으려고 에르노어 대륙에 왔고?”

“아니, 그건 아니다.”

베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 었다.

“대천사 세라핌은 악마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먼저 신성을 가로채기 위해 에르노 어 대륙으로 침공했다.”

“?그럼 천사와 악마 모두 그 신성 이라는 걸 노렸다는 거야?”

“그렇다. 그들은 모두 신성에 대한 욕심에 눈이 멀어 거대한 전쟁을 일 으켰다.”

“상당히 막장인데.”

영식은 헛웃음을 흘렸다.

악마는 그렇다 치고 천사 또한 신 성에 대한 욕심으로 대륙에 왔다는 사실이 홍미롭게 느껴졌다.

‘이것 또한 편견인가.’

‘악마는 인간의 적이다. 천사는 인 간의 편이다’라는 것은 결국 편견에 불과했다.

근엄하고 지혜로운 이미지의 드래 곤 중에서 루크델라와 같은 머저리 가 있었듯이 그들이 꼭 기록상에 나 와 있는 대로 악하고, 선할 필요는 없었다.

“신은 천사와 악마들의 합공을 받 으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무수한 천 사들과 악마들이 이 전투에서 죽어 나갔지. 전투는 백년이나 지속됐다. 대륙 전체가 피로 물들었고, 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드래곤들과 인간들, 아인종들이 죽었다.”

그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이 고개를 저었다.

“전황이 불리해진 천사들은 인간들 을 자신들의 세력을 끌어들이기까지 하며 전쟁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신이 죽었지.”

“그렇다면 그 신성이란 건 천사와

악마들 중 누가 가져간 거지‘?”

“둘 다 가져가지 못했다. 아니, 정 확하게 말하면 악마 대공 안드라스 만이 그 신성의 일부를 찬탈하는 데 성공했지.”

“응? 신은 죽었는데 왜 둘 다 신 성을 가져가지 못한 거지?”

“신성은 그 누구도 온전히 다룰 수 없는 힘이다. 심지어 신 스스로조차 그 힘을 완전히 다루지는 못했지.”

“자기가 자신의 힘을 다루지 못했 다는 게 무슨 의미야.”

“신성이란 것은 이 세계, 에르노어 대륙을 이루고 있는 힘 그 자체다.

신이라는 것은 그 근원이 스스로 만 들어낸 방어기제 중 하나지. 신이었 기에 신성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 라, 신성이라는 자아를 가진 힘이 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다는 건….”

“방어기제가 사라진 신성은 아주 깊은 동면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쟁 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천사와 악 마들은 각자의 세계로 돌아갔지.”

“결국 아무도 승자가 없는 전쟁이 었군.”

“그렇다. 신성에 대한 욕망으로 벌 어진 전쟁이었지만… 결국 아무도 그 힘을 다루지 못한 채 피해만 남 기고 끝나버렸지.”

“흐음.”

솔직하게 말하면,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린 애들이 읽는 동화 이야기를 들은 감각이랄까.

“웅? 그런데 대천사 세라핌이라 면… 잉그리움 제국 황가의 시조 아 냐?”

티리아가 가진 힘의 원천이 바로 대천사 세라핌의 힘이었다.

“그렇다.”

“모든 천사는 전쟁이 끝난 후에 돌 아간 게 아니었어?”

“전부 돌아가지는 않았다. 대천사 세라핌과 악마 대공 안드라스는 자 신들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 니… 정확하게 말하면 돌아가지 못 했지.”

“못 했다고?”

“대천사 세라핌은 전쟁에서 너무 큰 상처를 입어 죽어가고 있었다. 세라핌은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그 누구도 신성을 가져가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에게 협력한 인간 들에게 그 힘을 계승시켰다.”

“그게 잉그리움 제국의 시조가 된 거군.”

“그렇다.”

“그렇다면 안드라스는? 아니, 애초 에 안드라스는 어떻게 신성의 일부 를 가져갈 수 있었던 거지?”

영식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신이 죽고, 신성이 깊은 동 면에 빠지는 그 찰나에 신성의 일부 를 자신에게 이식했다. 뭐… 그 대 가는 만만치 않았지만 말이야.”

“대가?”

“말하지 않았나. 신성의 힘은 그 누구도 다룰 수 없다. 안드라스는 자신의 몸에 억지로 신성을 받아들 인 대가로 기나긴 융화의 시간을 아 무것도 하지 못한 채 깊은 던전 속 에서 보내게 되었다.”

“융화의 시간?”

“그래. 신성이라는 힘이 자아를 잃 어버릴 때까지의 시간을 말하는 것 이다.”

루크델라가 드래곤 하트가 가진 자 아가 사라지기까지 3년을 기다리려 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최소 만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 지.”

아득할 정도의 시간에 영식은 허탈 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안드라스라는 놈은 만년 동 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건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다. 신성이 융화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죽지도, 스스 로 자살하지도 못한 채 신성에 사로 잡혀 있지. 뭐… 그릇된 욕망의 대 가라고 할 수 있지.”

“흐음. 그 신성이라는 게 대체 뭐

기에….”

이렇게 되니 그 신성이라는 힘이 뭔지 궁금해졌다.

‘만약 그 힘을 다룰 수만 있다면.’

단테리온을 이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 랐다.

“그 신성이란 힘은 어디에 잠들어 있는 거야?”

“음….”

영식의 질문에 베냐는 어색한 미소 를 지었다.

의자에서 일어선 그녀는 황성의 벽

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다.”

“응?”

“신성은, 이 황성의 아래에 잠들어

있다.”

황성을 둘러싸고 있는 정체불명의 보호막.

신비에 쌓여 있던 그 정체가 밝혀 지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