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57화
북방 정벌 준비(4)
‘상황이 반대잖아.’
원래라면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해 소중한 사람을 지킬 때 사용되던 대 사가 가차 없이 버리고 도망가며 내 뱉는 비열한 조롱으로 뒤바뀌었다.
“걱정하지 마 오빠! 오빠를 위한 보트는 내가 따로 준비해 줄 테니 까!”
‘뭔 소리야 그건 또.’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도망치 는 채린을 바라보며 영식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으 로 도망칠 것이라고는 그도 예상하 지 못했던 일이었다.
‘슈트까지 줬는데.’
갑작스러운 억울함이 밀려왔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다른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투두두두두두!
“주이이이이인니이이임? 제가 왔 어요! 아아! 제가 없는 동안 외로우 셨죠?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제가 주인님과 한 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 을 테니까요!”
황성 전체를 울리는 폭음.
마치 거대 괴수가 돌진하는 듯한 충격이 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아마 이곳이 정체불명의 기운으로 보호되고 있는 황성이 아니라면 성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을 정도의 충 격이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루시 아가 영식에게 도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루시아. 수련은 잘 끝 났….”
“주인니이이이이이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려는 영식의 말을 끊으며 그녀가 돌진했다.
그 기세는 말 그대로 눈이 뒤집힌 황소.
영식은 그녀를 피해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왜 피하려고 하시나요 주인님?!”
‘무서워서.’
영식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한 채 그녀의 시선을 피 했다.
루시아가 다시 영식을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후웅
“이리 오세요, 주인님! 루시아가 여기 있다니까요!”
루시아는 자꾸 자신의 손을 피하는 영식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다급해진 그녀의 손이 한줄기 빛살 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읏...!”
영식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놀랍다는 표정으 로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읽을 수 없어.’
영식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어 있는 그녀의 움직임과는 달랐다.
루시아의 움직임은 영식이 가장 많 이 분석한 움직임이었다.
상대적으로 루시아에 비해서 힘과 속도 면에서 모두 뒤지고 있는 영식 이 그녀를 압도할 수 있는 것도 모 두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보여주는 움직 임은 그가 알고 있던 루시아의 움직 임이 아니었다.
단순히 영식을 붙잡기 위해 손을 내뻗는 것조차 달랐다.
“주인님! 왜 자꾸 피하시는 거예 요!”
‘이게 뭐지?’
영식은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그녀의 움직임을 살폈다.
이해할 수 없다, 는 생각이 가장 먼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분명 눈으로는 그녀의 손이 다가오 는 것이 보였다.
어디로, 어떻게 피하면 되는지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하지만 정작 그 경로를 따라 몸을 움직이면 그녀의 손이 예상하지 못 한 곳에서 나타나 그를 붙잡으려 하 고 있었다.
‘마치….’
인식의 괴리.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를 의도 적으로 왜곡시켜 상대방을 반응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술.
영식은 루시아가 이런 기술을 사용 하는 것을 딱 한 번 본 기억이 있 었다.
‘칼기아의 검술을 마스터했구나.’
전투도 아닌, 영식을 붙잡으려는 단순한 동작에서 조차 칼기아의 검 술이 가진 가장 큰 묘리가 묻어나는 것을 보면 그녀가 칼기아의 검술을 마스터 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도망칠 수 없어.’
고작 한 달 만에 전설적인 검사의 기술을 마스터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뿌듯함보다는 두려움이 먼저 솟아올 랐다.
영식은 그녀의 손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지만 소 용없는 짓이었다.
루시아의 손은 마치 굶주린 야수처 럼 난폭하고, 끈질기게 그를 추적하 고 있었다.
‘슈트도 없어.’
슈트라도 입는다면 좀 상황이 달랐 겠지만 그가 가진 락테온 2식은 이 미 이브에게 건네준 상황.
대비책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도 아 직은 완성 단계가 아니었다.
“히히. 잡았어요, 주인님.”
“하아, 하아. 아…. 오랜만에 주인
님의 냄새를 맡으니 너무 기분이 좋 네요.”
루시아는 굉장히 위험한 눈빛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영식은 더 이상 그녀에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루시아...”
“주인님.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영식을 붙잡은 루시아는 생각보다 침착한 태도로 그를 끌어안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영식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에 게 안겨오는 루시아의 머리칼을 쓰 다듬었다.
‘생각보다 심하지 않네?’
수련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폭발 시키며 폭주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꽤나 얌전한 모습이었 다.
‘내가 루시아에 대해서 좀 오해하 고 있었던 건가.’
그녀의 광기 어린 중얼거림을 엿듣 고 너무 과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때는 스트레스를 너무 받고 있 었나보네.’
평소 루시아가 영식과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폐관 수련을 하며 느꼈을 스 트레스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 었다.
하지만 지금은 꽤나 진정된 모습을 보니 영식도 여러 의미로 마음이 놓 였다.
“고생 많았어, 루시아. 오늘 저녁은 길드원들하고 같이 파티라도 열자.”
영식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뭍은 루시아를 살짝 힘주어 끌어안으며 말했다.
“싫어요.”
“응…?”
하지만 그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영식이 예상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 었다.
“길드원과 같이라뇨. 제가, 제가 얼 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데요. 후, 후후후후…. 오늘은 저와 주인님 둘 만의 파티를 열어야죠. 암, 그렇고말 고요. 아…!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길드원들 앞에서 한다고 해도 괜찮 을 것 같아요. 히히.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그 발칙하기 짝이 없는 고철 덩어리에게 누가 더 주인님에게 어울리는 보여줄 수 있 는 좋은 기회니까요.”
“…루시아 씨?’’
“지난 한 달 동안 주인님을 한 시 라도 잊은 순간이 없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아주 많아요. 후후 후. 하루나 이틀로는 다 말할 수 없 을 정도로 말이에요.”
‘뭐지.’
“일단 방으로 들어가요, 주인님. 지 난 한 달간 하지 못했던 얘기를 잔 뜩 나누어 봐요.”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아, 물론.”
루시아는 영식의 귓가에 입을 가져 다대며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핥았 다.
“얘기 말고도 나눌게 많지만요.”
루시아는 먹잇감을 낚아 챈 포식자 처럼 영식을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 다.
쾅
방문이 굳게 닫혔다.
-치익.
익숙한 기계음.
잡음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가 머릿 속에 울려 퍼졌다.
-치이이익.
잡음에 섞여 들리는 말을 들은 영 식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네모난 메모리칩 이 바닥에 떨어졌다.
금속 장치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동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 침묵 속 에서 영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게… 뭐지?”
“진실입니다.”
백발의 청년은 망설임 없는 표정으 로 대답했다.
“진실이라고?”
“그렇습니다. 이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허망하고, 허무한 것이… 진 실이었습니다.”
“ 대장님.”
백발의 청년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들은… 이미 실패한 겁니다.”
“실패했다고?”
“예. 실패했습니다. 저희는 지금까 지….”
청년의 말이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신을 조각하고 있던 겁니다.”
차갑게 내뱉어진 그 말이 영식의 머릿속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시끄러운 노이즈와 함께 시야가 일 그러 졌다.
영식은 천천히 눈을 떴다. 창문으 로 들어오는 빛이 눈 사이로 들어왔 다.
‘뭐지?’
무언가 중요한, 아주 중요한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꿈이 으레 그렇듯 눈을 뜨 고 난 이후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이 아무리 선명했던 꿈이라고 할지라도.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는 기 분이 들어.’
이런 감각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이 었다. 반드시 기억해내야 하는 무언 가가 기억 속에서 도려내져 있는 듯 한 상실감.
영식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방금 전 꿨던 꿈에 대해 떠올렸다.
‘보이지 않는 신을 조각하고 있던 겁니다.’
누군가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 랐다.
하지만 그 말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것이 ‘중 요했다’라는 감각 정도.
“흐웅…. 주인님?”
그의 가슴에 기대고 있던 루시아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움찔. 그녀를 본 영식의 몸이 반사 적으로 떨렸다.
“일어났어?”
“헤헤헤. 네, 일어났어요, 주인님.”
루시아는 행복에 찬 미소를 지으며 영식의 가슴에 뺨을 기댔다. 꽤나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이 평화를 찾기까지 많은 시련을 넘었지만.’
영식은 지난 일주일간을 떠올리며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 었다.
루시아에게 끌려 방 안에 갇힌 이 후 영식은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녀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광란과 광기가 점철된 시간.
영식은 그 시간 속에서 필사적으로 이성을 유지하며 루시아를 진정시켰 다.
‘설마 방금 꾼 꿈이 주마등같은 건 아니겠지.’
지난 일주일 간의 고생을 생각한다 면 불가능한 가능성도 아니었다. 지 난 일주일은 체력적으로 초인에 가 까운 영식일지라도 견디기 힘든 시 간이었으니까.
“이제 좀 스트레스는 풀렸어?”
“으응….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더 조르기엔 주인님이 힘드시겠죠.”
‘죽을 수도 있어.’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았으니까.”
“헤헤. 알겠어요. 아, 대신 오늘부 터 주인님의 밀착 경호는 제가 맡을 거예요!”
“그건 우선 이브하고 먼저 상의해 야 하는 것 아냐?”
“흥. 칼기아의 검술을 모두 깨우쳤
다고요. 이제 그 고철덩어리에게 지 지 않아요!”
“흐음. 이번에 이브에게 내 슈트를 줬으니 승리를 자신하긴 아직 이를 걸?”
“어, 언제 그런….”
루시아는 다급한 표정으로 흠칫 몸 을 떨었다. 전에 나름 팽팽한 승부 를 벌였으니 칼기아의 검술을 마스 터한 지금은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일대일 승부에서 슈트를 사용 하는 건 반칙이 아닐까요?”
“슈트도 충분히 힘의 일부라고 생
각하는데? 그런 의미라면 무기를 들 고 대련을 하는 것도 반칙이지.”
“으으….”
말문이 막힌 루시아는 뚱한 표정으 로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두, 두고 보세요! 주인님의 경호 는 반드시 제가 맡을 테니까!”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하.”
영식은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바 라보며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영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살짝 표정을 굳혔다.
북방 정벌을 시작할 때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모든 일이 끝난다면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방금 전 꾸었던 꿈에 대한 찝찝한 감각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영식은 빛이 흘러나오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는 신을 조각하고 있다,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