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45화
쓰레기 치우기 좋은 날(1)
“내 고백을 받아주게.”
“?예?”
영식의 표정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서렸다.
갑자기 자신에게 고백이라니?
뜬금없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설마 형님이 날…?’
끔찍한 가능성 하나가 그의 머릿속 을 스쳐 지나갔다. 피부를 타고 소 름이 돋는 감각.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자연스럽게 영식의 목소리가 떨리 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튜토리얼 공간에서 눈을 뜬 후 줄 곧 그와 함께해 왔던 길수의 이미지 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잠깐. 그럴 리가 없잖아.’
길수에게는 포르테라는 사람이 생 겼다. 아직까지는 사귀는 관계까지 는 아니라지만 서로 마음이 있는 것 은 확실했다.
“응…? 아, 아아! 이거 미안하군. 그런 의미가 아니네! 하하하.”
길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머리 를 긁적였다.
“사실 얼마 후에 포르테 양의 생일 이라고 하더군. 그때… 먼저 그녀에 게 고백을 해보려고 하네.”
“ 오오 까?”
. 드디어 마음을 정하신 겁니
“마음이야 전부터 정했지. 하지만 그녀처럼 아름다고, 젊은 여자는 나 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어.”
“하하. 그런데 그런 생각이 좀 바 뀌신 겁니까?”
“뭐, 나도 두 쪽 다 달고 태어난 남자 아니겠나.”
길수는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영식이 자네가 또 여자의 마음을 기가 막히게 녹이지 않나. 그래서 조언 좀 구하고 싶어서 온 것이네.”
‘형님이 하실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길수는 그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던 포르테의 마음에 한 발자국 다가간 남자.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하 게 듣지 못했지만 영식의 도움이 필 요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천태황이면 몰라도
외모도, 스펙도 뭐 하나 꿀리지 않 는 그가 두 여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것에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해줄 수 있었지만, 길수의 경 우는 딱히 그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사실 생각 중인 이벤트가 있는 데... 한번 보겠나?”
“예. 형님이라면 믿을 수 있죠.”
“크흠. 조금 부끄럽지만….”
길수는 쑥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 이며 영식에게 한 뭉치의 종이다발 을 건넸다.
“이건….”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을 담은 편지 일세.”
“예? 편지요?”
“후후. 지금 생각해도 마음을 울리 는 글귀라고 자신할 수 있네.”
영식은 자신감에 찬 길수를 바라보 며 그가 건네준 종이다발에 시선을 옮겼다.
-포르테 씨. 당신을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요즘 잠을 들 수가 없습니 다.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제 마음 은 싸늘합니다. 차가운 비수가 날아 와 가슴에 꽂히는 기분입니다. 하지 만 걱정 마세요. 제 손은 입보다 빠 릅니다. 당신에 대한 이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모두 이 편지에 녹여내 보이겠습니다. 당신을 얼마나 사랑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우선 저 포르테 씨에게 저에 대해 알려드 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서로 마 음의 공유를 통한 진정한 사랑은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우선 제 옛날이 야기부터 시작할까요? 때는 제가 LA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아 여기 서 LA란…….
‘뭐야 이게.’
무슨 벌칙을 받은 것처럼 종이 한 가득 쓰여 있는 글을 바라보며 영식 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하하. 어떤가? 그녀가 나에 대해 서 조금이라도 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이 편지에 녹여냈네.”
“형님….”
“웅? 왜 그러나? 크흠. 혹시 자네 도 이 편지를 보고 감동한 건가? 하하. 걱정하지 말게. 자네에게는 이 미 아리따운 애인이 셋이나 있 지….”
-화르르륵!
“아아아아아니! 영식이! 자네 지금 뭐하는 건가!”
영식은 부스트의 불꽃을 이용하여 손에 쥔 흉물스러운 물건을 불태워 버렸다.
“형님.”
“여, 영식이 자네….”
“앞으로 절대, 편지는 쓰지 마세 요.”
“그리고 포르테 씨에게 뭐 이벤트 같은 걸 하기 전에 모두 얘기하고 하세요.”
하마터면 잘 순항 중이던 길수의 인생이 반으로 쪼개져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뻔했다.
‘있던 호감도 사라지게 만드는 편 지였어.’
무슨 대서사시도 아니고 저만한 두 께의 편지를 고백 대상에게 내밀다 니, 새로운 고문 방법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형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을 줄 이야.’
가만히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저와 같이 다른 방법을 찾
아보죠.”
“다른 방법…?”
“예. 고백 같은 경우 편지나 전화 등의 다른 매개체를 사용하는 방법 보다는 직접 하는 것이 훨씬 더 성 공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여기 서는 역시 직접 찾아가서 고백하는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편지로는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 건가?”
‘너무 과하게 전해져서 문제인 겁 니다.’
영식은 머릿속의 말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하하.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다기 보다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얘기 죠.”
“그렇군. 역시 혼자 고민하기보다 영 식이 자네와 상담한 게 정답이었어.”
길수는 껄껄 미소를 지으며 영식의 어깨를 두들겼다.
영식은 길수의 손을 붙잡으며 진지 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앞으로는 절대, 절대로 편지는 쓰시면 안 됩 니다.”
“아, 알겠네.”
“그러면….”
영식은 잠시 고민에 잠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정석대로 가죠.”
“정석?”
“고백의 정석이라고 하면 역시 선 물입니다. 밖에 나가서 괜찮은 액세 서리라도 하나 사죠.”
선물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특 히 포르테처럼 기본적으로 길수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여인이라면 그의 선물에 더욱 기뻐할 것이 분명 했다.
“호오. 좋은 생각이로군.”
“혹시 포르테 씨가 좋아하는 색상 이나, 물건에 대해서 아시는 건 있 습니까?”
“전에 넌지시 물어보니 백합을 좋 아한다고 하더군.”
“백합이라….”
다행히 찾기 어려운 종류의 취향은 아니었다.
‘제가 끝까지 책임지고 장가 보내 드리겠습니다, 형님.’
영식은 눈을 반짝이며 의욕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웅의 무기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주선한 관계였지만 길수가 진심으로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 이상 도와주 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나가볼까요, 형님?”
“영식이 자네와 이렇게 둘이서 돌 아다니는 건 처음 아닌가?”
“뭐… 그럴 만한 기회가 없었으니 까요.”
“하하. 이거 자네의 애인들에게 미 안하게 됐군. 나 때문에 소중한 시 간이 뺏겨서 말이야.”
길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
확실히 영식에게 이런 여유로운 시 간이 주어진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 었다.
그는 지금 연합군 내에서 가장 바 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 으니까.
“형님도 제게는 소중한 사람입니 다. 그런 생각 마세요.”
“영식 군….”
길수는 감동 받았다는 표정으로 영 식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아주 묘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그때 였다.
- 우두둑.
섬뜩한 소리와 함께 어딘가에서 강 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소리가 들린 방향에 보이는 것은 옆방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 는 루시아의 모습.
“주인님이 그럴 리 없어. 주인님이 그럴 리 없어. 주인님이 그럴 리 없 어….”
그녀의 입에서는 마치 저주와도 같 은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식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길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데이트 라도 해줘야겠네.’
“크홈. 그, 그럼 이제 출발하죠.”
“알겠네.”
길수와 영식은 황성 밖으로 빠져나 와 요새 내의 시장으로 향했다.
“이번에 새로 입수한 A급 장비 팝 니다?!”
“각종 제조품 팝니다!”
“어이, 형씨! 이 물건 한번 보고 가시오! 지금 바로 만든 물건이오!”
“직접 만든 물약 팝니다!”
요새의 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 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물건을 팔고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생산직.
그들은 자신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팔아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면접에서 떨어진 생산직들인가.’
영식이 대규모로 모집했던 ‘헤파이 스토스’의 멤버들.
능력과 성격, 각종 이유로 면접에서 떨어진 소환자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장에 모여든 것 같았다.
“열기가 장난이 아니군.”
“아마 생산직들이 흘러들어오면서 더욱 시장이 활발해진 것 같습니 다.”
“물건 찾기는 더 좋을 것 같구만.”
길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영식 과 함께 시장을 둘러보았다.
“아, 저 사람….”
“맞아. 그때 연합군 면접관 맞지?”
“저 개자식….”
시장을 거닐자 영식을 향해 적의가 담긴 시선이 쏟아졌다. 면접에서 떨 어진 생산직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곤란하게 됐네.’
영식은 주변에서 쏟아지는 적의에 짧은 침음을 흘렸다.
이런 적의가 쏟아지는 이유는 영식 의 정체가 소환자들 사이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드래곤 슬레이어 부대처럼 함 께 전투를 치렀던 소환자들 사이에 서 영식은 유명하지만 일반 소환자 들 사이에는 그렇지 않았다.
영웅의 요새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지난 수개월 간 그는 의식 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깨어난 이후 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으 로 공식 석상에 설 일이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 면접 관 역할을 하니 아니꼽게 봤겠지.’
목숨을 걸고 요새로 와서, 희망에 부푼 가슴으로 면접을 본 생산직 소 환자들.
가뜩이나 떨어진 것만 해도 절망스 러운 상황에서 생산직 면접관으로 나온 사람조차 본적도 없는 사람이 니 악의가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 었다.
그들이 보기에 영식은 운이 좋아 낙하산으로 연합군의 간부자리를 차 지한 생산직 소환자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음…. 얼굴을 가리고 올 것 그랬 네요.”
“허허. 자네가 연합군 총사령관이 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뭐, 수개월 간 얼굴을 한 번도 비 친 적이 없으니 당연하죠. 아마 대 부분은 알렉 장군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걸요?”
“끄응. 아쉽게 됐군. 일단 다시 황 성으로 돌아가겠나?”
“아뇨. 이런 시선들이 귀찮은 건
사실이지만 저희 쪽에서 도망칠 이 유는 없죠.”
영식은 정당하게 면접을 봤고, 능 력이 되지 않은 자들을 쳐냈다. 이 번 면접에 한해서는 연줄도, 뇌물도 통하지 않았다.
순수한 능력, 혹은 기본조차 되지 않는 인성으로 인해 갈린 결과이니 영식의 입장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 낄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분노하는 이유는 이해하지 만 그 분노를 피해 도망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도망치는 게 말이 되지 않
지.’
갑이 을의 눈치를 보며 도망칠 이 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귀여운 새끼들.’
영식에게 있어 이들이 보내는 적의 가 가득한 시선은 오히려 귀엽게 느 껴질 정도였다.
“저희는 그냥 물건이나 천천히 살 펴보죠.”
“알겠네.”
길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건들을 살폈다.
한참을 둘러보던 도중, 그의 눈에
백합 문양의 펜던트가 들어왔다.
좌판 위에 놓은 펜던트를 본 순간, 길수의 머릿속에 반짝임이 스쳐 지 나갔다. 그의 직감이 저 물건이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저걸로 하지.”
“오. 이건… 상당한 물건인데요?”
영식은 놀랍다는 눈빛으로 좌판을 내려다보았다.
정교한 세공부터 완벽한 마감처리 까지. 이런 길거리에 있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펜던트 였다.
“저기 이 펜던트….”
길수가 펜던트를 집어 들고 좌판 뒤에 앉은 여인에게 가격을 물어보 려고 했을 때였다.
-콰앙!
여인의 앞에 있는 좌판을 옆에 다 가온 누군가가 거칠게 걷어찼다.
영식과 길수의 시선이 좌판을 걷어 찬 남자를 향했다.
얼굴에 새겨진 기다란 흉터, 근육 질 팔뚝에 새겨진 화려한 용 문신.
누가 보더라도 ‘나 힘 좀 쓴다’라 고 주변에 광고하고 싶어 안달 난 양아치 였다.
“어이, 형씨. 연합군 생산직 면접관 맞지?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지?”
용 문신의 양아치는 영식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건방진 목 소리로 말했다.
영식은 그를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 을 흘렸다.
‘이 새끼는 좀 과하게 귀여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