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36화
게임을 제안하지(2)
‘왔군.’
영식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 개를 돌렸다.
푸른 머리칼을 가진 미청년이 날카 로운 눈빛으로 그를 보려보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은 어려
운 일이 아니었다.
‘루크델라.’
연합군이 수많은 피를 흘리며 쟁취 한 보상을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날 로 먹으려고 하는 존재.
기록상 남아 있는 4마리의 드래곤 중 하나이며 얼음을 관장한다고 알 려져 있었다.
‘드래곤이고 나발이고 간에.’
명분과 힘, 양쪽 모두에서 앞서고 있는 영식의 입장에서 그에게 숙이 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전투에서 승리한 보상을 정당하게 챙기고 있 는 겁니다.”
영식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식을 본 루크델라는 살짝 표정을 일그리며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인간이로군. 저번에 그 알렉이라는 인간에게 얘기를 듣지 못한 건가?”
“드래곤 하트가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3년간 손대지 말라는 것 말 입니까?”
“?알면서도 이런 짓을 했단 말인 가?”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영 식을 바라보았다.
마치 ‘감히 알면서도 내 말에 거스 른단 말이야?’라고 묻는 듯한 오만 한 태도.
영식은 피식 웃음을 홀렸다.
‘꼴값 떠네.’
가진 바 능력도, 명분도 없는 존재 가 드래곤이라는 이름값만 믿고 설치 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영식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예. 알면서 그랬습니다. 카르가스 는 저희가 처치했으니까요. 그 사체 에서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권리 아닙니까?”
“?3년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 그렇 게 어려운 조건인가.”
“예. 어려운 조건입니다. 드래곤 하 트는 아시다시피 엄청난 가치를 가 지고 있는 물건입니다. 그를 가공하 면 강력한 무기를 만들 수도 있겠 죠. 그것을 아무 대가 없이 포기하 라고 하는데 그게 쉬운 조건이겠습 니까?”
쏟아지는 영식의 말에 루크델라는 불 쾌하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혐오에 찬 눈빛으로 영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군.
그렇게도 강한 힘이 필요한가?”
“당연히 필요합니다. 대륙을 지배 하려는 괴물들의 창조주와 싸워야 하니까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왜 강한 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십 니까? 창조주를 이길 자신이라도 있 습니까?”
“한 가지 더 물어보자면, 이제까지 어디에 처박혀 있었습니까? 카르가 스의 사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면 그가 창조주들의 습격을 당해 꼭 두각시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 고 있었을 텐데, 이제까지 뭘 하다 가 지금에서야 기어 나온 겁니까?”
“그건….”
정곡을 찌르는 영식의 말에 루크델 라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는 그들이 가진 절대적인 힘 에 대해 알지 못한다.”
“장담컨대 제가 당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영식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루크 델라를 바라보았다.
기억이 없다고는 하나 과거 창조주 의 일원이었고, 창조주와 직접 싸워 보기까지 한 그에게 ‘알지 못한다’
라니.
우습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 힘을 알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인간들은 역시 멍청하군. 그들은 이 기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드 래곤 하트를 사용해서 힘을 키운다 고? 고작 인간 따위가 힘을 키워서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궁지에 몰린 쥐가 적을 이기기 위 해서 무는 것 같습니까? 발에 밟힌 지렁이가 상대방을 죽이려고 꿈틀거 리는 것 같습니까? 다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서 어떻게든 발악하는 겁 니다. 당신들은 그렇게 머리가 똑똑 해서 다가올 최후를 그냥 멍청하게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여, 영식 씨….”
티리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영 식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그는 분명 루크델라를 우선 ‘설득’ 해 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설득은커녕 싸우자고 시비를 걸고 있는 듯했다.
“ 괜찮아.”
영식은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주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크델라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잠 시 망설이는 듯 침음을 삼키다 어렵 게 입을 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군.”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당신입니 다. 창조주들이 대륙의 반을 가져갈 때, 카르가스가 창조주에게 패배해 괴물이 되었을 때, 당신들은 뭘 하 고 있었습니까? 어디 안전한 구석에 찌그러져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 않 았습니까? 이제 와서 대체 무슨 낯 짝으로 기어 나왔냔 말입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영식의 말.
루크델라는 반론을 찾기 힘든 그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드래곤이라는 것은 에르노어 대륙 에서 그 이름값만으로 치트키에 가 까운 영향력을 가졌다.
만인에게 떠받들어지는 것이 당연 했고, 루크델라 자신도 그것이 자연 의 이치라고 생각했다.
천마대전으로 드래곤의 숫자가 폭 발적으로 감소하기 전, 인간들은 기 나긴 세월 동안 드래곤의 노예로 살 아왔다.
물론 지금 그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인간은 거의 없었다.
천마대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기록 이 소실되었고 인간의 입장에서 자 신들 스스로가 노예로 살아왔다는 기록을 굳이 남기려 하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영혼 속에 각인된 드래곤에 대한 경외심 과 복종의 감정은 계속해서 남아 있 었다.
거의 모든 기록상에 드래곤이 절대 적이며, 경외의 존재로 기록되어 있 는 이유도 그 탓이었다.
“건방지군!”
이제까지 기나긴 시간을 살아오며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모 욕을 당한 기억이 없었던 루크델라 는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자신을 떠받들며 설설 기어야 마땅 할 존재가 기기는커녕 목덜미를 물 어뜯을 기세로 쏘아붙이고 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이런 반응을 보이 는 것도 당연했다.
“뭐가 건방지다는 겁니까? 당신에 게는 제게 대우받아 마땅할 능력도, 지위도, 권위도, 명분도, 연륜도, 인 성도 없습니다. 대우를 받고 싶으면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난 이후에나 요구하시죠.”
“?우리라고 그들을 상대할 시도조 차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우리들 은 그 외계의 존재들이 북방에 떨어 지는 그날 바로 침입자들을 처단하 기 위해 그곳으로 향했다. 너희 인 간들보다 훨씬 더 빨리 말이지.”
“흐응. 그래서요?”
“거기서… 악마를 보았다.”
루크델라는 창백한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은은한 녹색빛 갑주를 입은 존재.
칠혹 같은 검은색 갑주를 입은 존재.
혼탁한 갈색 갑주를 입은 존재.
타오르는 듯한 붉은 갑주를 입은 존재.
그리고….
찬란히 빛나는 은회색 갑주를 입은 존재.
그들을 상대한 드래곤들은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천마대전으로 인해 신이 죽고, 천 사와 악마들이 중간계에 간섭할 수 없게 되면서 에르노어 대륙에서 그 들을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는 존재 는 없다고 생각해 오던 것이 순식간 에 무너져 내렸다.
특히 그중 은회색 갑주를 입은 존 재의 힘은 가히 압도적.
바람을 다루는 용, 베냐가 치명상 을 입고 바닥에 추락했다.
대지를 관장하는 용, 데모스가 그 의 손에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반으 로 찢어지고 말았다.
그들의 크기가 인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얕잡아 보고 있던 드래곤 들에게는 그 이상 경악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거신이라도 강림한 것 같은 그 압 도적인 위압감에 루크델라를 비롯한 용들은 다급하게 도망치는 것이 전 부였다.
그때의 기억은 그들의 영혼에 새겨 질 만큼 깊은 공포심을 새겨주었고, 외계의 침입자들이 대륙 중앙으로 쳐들어오는 동안 아무것도 못 하도 록 만들었다.
“은회색 악마…. 그자를 직접 보지 못한 네놈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루크델라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 으로도 끔찍한 공포에 시달리며 덜 덜 몸을 떨고 있었다.
이어지는 루크델라의 말을 들은 영 식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지만 그는 내심 동요하고 있었다.
‘설마 드래곤들이 개입하지 않는
이유가 나 때문이었어?’
그가 말하는 은회색 슈트의 주인이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 았다.
과거의 영식.
창조주를 이끌고, 대륙의 전란을 일으켰던 그가 드래곤들이 나타나지 않게 만든 원인이었다니.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한 상황이 었다.
‘그럼 지금 난 내 손으로 직접 겁 쟁이로 만든 놈에게 왜 아무것도 하 지 않았냐고 따지고 있는 건가.’
아무리 영식이라고 해도 양심의 가
책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루크델라는 영식의 존재가 바로 그 은회색 악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영식이 직접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명 분’의 당위성을 떨어뜨릴 필요는 없 는 노릇.
알렉이 바이올렛에 대해서 물어보 았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은 숨기는 것 이 좋다.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말하지 않
은 것이 좋다.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그 어 떤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 좋다.
루크델라는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됐다.
어디까지나 루크델라는 인간이 피 를 흘려 쟁취한 보상을 뻔뻔하게 나 타나 가져가려고 하는 무뢰배가 되 어야 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처럼 보이는 것들이 중요할 뿐 이지.
‘너는 악역이 되어줘야겠어.’
영식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 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은회색 악마가 무서워 서 벌벌 떨고 있었다는 겁니까? 그 렇다면 왜 이제 와서 권리를 주장하 는 거죠? 아, 인간이라면 당신에게 설설 기면서 말을 따를 거라고 생각 했습니까?”
“그,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을 리가.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저희들이 수많은 피를 흘 려가며 쟁취한 카르가스의 시체를 뻔뻔하게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겠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창피하지 도 않습니까? 겁을 먹었다면 차라리 레어에 처박혀서 영영 나오지 마세 요. 왜 굳이 기어 나와서 얘기를 복 잡하게 만드는 겁니까?”
“난...”
“분해요? 화가 납니까? 지금 당신 에게 그럴 자격이라도 있는 것 같아 요?”
조금도 쉬지 않고 쏟아지는 영식의 말들.
그 단어의 편린이 루크델라의 가슴 을 거칠게 휘저어 놓았다.
영식은 동요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 지금인가.’
이 정도로 채찍을 휘둘렀으니 당근 을 쥐어줄 차례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겁을 먹고 숨어 살 생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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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그렇게 만든 은회색 악마에 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고작 넷밖에 남지 않은 용들 중 둘이나 죽 여 버린 그들이 화가 나지 않습니 까? 드래곤이라는 경외의 이름을 시 궁창 바닥으로 떨어뜨린 그들을 정말
가만히 내버려두실 생각이십니까?”
영식은 날카롭게 쏘아붙이던 것을 멈추고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제가 당신이 그 은회색 악마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