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31화
행복해도 괜찮아(2)
“아, 아라 씨?”
티리아는 평소의 아라답지 않은 화 끈한 행동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유나라면 그러려니 했겠지 만 아라가 이런 행동을 할 것이라고 는 예상치 못했다.
“읏…! 뭐, 뭔가요!”
“왜 답지 않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찌그러져 있는 건데? 네 문제에 대 해서는 영식이랑 나중에 같이 생각 해 보기로 했다며! 그러면 지금은 평소처럼 하루 종일 영식이랑 찰싹 달라붙어서 사람 속을 박박 긁으란 말이야!”
“아, 아라 씨는 지금 제 마음을 모 르실 거예요!”
“네 마음이 뭔데 대체! 말을 해줘 야 대처를 하든 얘기를 하든 해줄 거 아냐!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다고 뭐가 바뀌기라도 해?! 남 들이 먼저 이해해 주기를 바라기라 도 하는 거야?”
“으으... ”
폭풍처럼 쏟아지는 아라의 말에 루 시아는 침음을 홀렸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티리아와 영식을 바라보았다.
“저, 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쳤잖아요! 티리아 씨도 저를 싫어 할 테고, 주인님도 저 때문에 팔이 잘리고 가슴이 뚫리셨는데! 부, 분명 절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전처럼 대할 수 있겠어요!”
“그건 네 생각이겠지! 지금 길드원
중에 널 싫어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 어!”
“거짓말!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직접 확인해 보든가!”
아라는 답답하다는 듯이 표정을 일 그러뜨리며 영식의 어깨를 잡아 루 시아에게 밀어버렸다.
“웃…!”
루시아는 영식과 거리가 가까워지 자 움찔 몸을 떨며 고양이와도 같은 유연한 동작으로 다급히 뒤로 물러 섰다.
“나랑 티리아는 밖에 나가 있을게. 둘이서 잘 얘기해 봐, 영식아.”
“?고마워.”
영식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폭풍 처럼 쓸어 놓은 아라를 향해 감사의 말을 입에 담았다.
“…아주 혼내주라고.”
아라는 평소 하지 않은 행동을 했 기 때문인지 뒤늦게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티리아의 팔을 끌고 방문을 닫았다.
_ 탕.
굳게 닫힌 방문을 보며 영식의 희
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아라 덕분에 뭔가 무거운 마음속의 짐을 하나 내려놓은 것만 같은 기분 이었다.
영식은 몸을 돌려 루시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주, 주인님.”
루시아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영식 을 바라보았다. 마치 주인에게서 버 림받은 애완동물과도 같은 그녀의 모습에 영식의 가슴이 저렸다.
“루시아.”
“오, 오지 마세요. 지, 지금은 아 직...”
“여기 앉아.”
영식은 도망치려는 루시아의 팔을 끌어 침대 위에 앉혔다.
그는 기습적으로 루시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 며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으읏! 주, 주인님. 지금 무슨….”
“앉아.”
영식은 다소 강압적인 말투로 그렇 게 말했다.
“…네.”
루시아는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모습 에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침대에 다 시 앉았다.
영식은 침대에 앉은 그녀의 손을 잡 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시아. 나는 널 싫어한 적 없어. 물론, 티리아도 마찬가지야.”
“하, 하지만! 저는… 주인님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루시아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영식 의 가슴과 팔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멀쩡히 상처가 나았지만 당 시에는 심각한 상처였다.
영식에 대한 루시아의 사랑은 병적 일 정도였다. 거기에 수개월 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한 번 에 폭발했기에 그 병적인 사랑이 더 더욱 심각해졌다.
그런 그녀의 입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영식에게 작은 생 체기 하나 내는 것만으로 엄청난 죄 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작은 생채기는커녕 그의 목 숨이 위험할 정도의 치명상을 그녀 의 손으로 직접 입히고 말았다.
티리아와 다른 길드원들을 말려들 게 한 것도 마찬가지.
영식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은 그녀에 게 감당하기 힘든 죄책감을 가져다 주었다.
“괜찮아, 루시아.”
“주인님….”
“네 의지가 아니란 걸 알아. 아니, 설사 네 의지로 한 일이라고 해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어째서….”
“난 네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 으니까. 평생 너를 괴롭힐 악몽을 꾸게 했으니까.”
영식의 말에 루시아는 표정을 굳혔다.
과거의 그가 자신에게 한 일.
그에 대해서 떠올리면 지금도 영식 에 대해서 순수한 사랑을 보내기 힘 든 것이 사실이었다.
영식은 그녀의 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해. 조금 더 일찍 만나러 오지 못해서. 사실 나도 어떻게 널 대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거든. 과거의 나 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는 한심한 변 명은 하지 않을게. 나는 네게 결코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죄인이야.”
“?주인님.”
“처음에는 네 손에 죽는 게 좋겠다 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 마음이 조 금이라도 편해진다면, 그것도 나쁘 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영식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루시아는 영식이 풍기는 날카로운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아무런 대답조 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근.
영식의 눈빛을 본 루시아의 가슴이 크게 고동쳤다. 전신에 짜릿한 전율이 퍼져나갔다.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 처럼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영식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 을 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네 손에 죽기에는 내가 짊어지고 있는 게 너 무 많아. 그러니까… 네게 목숨을 바치는 건 나중으로 미뤄둘게.”
“하지만 주인님…. 저는….”
루시아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떨 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결국 주인님을 죽이지 못 할 거예요. 이렇게 사랑하는 걸요. 주인님만 보면 당장에라도 어딘가로 납치해서 혼자 독점하고 싶을 정도 라고요. 어떻게… 어떻게 제가 주인 님을 죽일 수 있겠어요.”
그녀는 울먹이며 영식의 가슴에 머 리를 기대었다. 영식은 그런 그녀의 보랏빛 머리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어.”
그녀가 결코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이번 사건으로 증명 되었다.
처음 과거를 깨닫고 가장 강렬하게 분노를 표출했을 때조차 그를 죽이 지 못했던 그녀였다.
앞으로 시간이 더 흐른다고 그를 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에게 선택권을 준 것은 그녀 스스로가 느끼고 있을 무거운 죄책 감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네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얼마나 큰 죄책감을 짊어지고 있을 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어. 하지 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어떻 게 하고 싶은 지야.”
“루시아. 너는 너무 오랜 시간 절 망 속에서 살았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자유를 구속당한 채 살았어.”
지금의 영식은 모르지만, 루시아는 딱딱한 가정환경으로 인하여 극단적 으로 자유를 구속당한 채 살아왔다.
영웅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가문 의 속박은 그녀를 계속해서 따라다 녔다.
블랙큐브의 지배를 받은 이후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진정으 로 자유로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네 자유롭게 살아도 괜찮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 아. 억지를 부려도 괜찮아. 물론 어 떤 선택을 하더라도 죄책감이 널 따 라다니겠지. 하지만 괜찮아. 자신에 게 떳떳하게만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영식은 그녀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
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행복해도 괜찮아.”
“아….”
루시아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행복해도 괜찮다.
그의 말이 그녀의 가슴에 깊게 스 며들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감정 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끌어 올랐다.
“흑, 아, 으아, 아.”
루시아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8영웅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닌, 리베리에라는 역사 깊은 무가의 이 름이 아닌, 순수한 루시아가 흘리는 눈물.
“흐아아아아아앙!”
루시아는 참았던 설움을 폭발시키 듯 큰 소리로 울었다.
그녀는 영식의 품에 안긴 채 마치 아이가 된 것처럼 울부짖었다.
“흐윽! 주인님…!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요! 다시 주인님하고, 살바토 르 길드의 사람들하고 웃으며 지내 고 싶었어요!”
“그래.”
“흐아아앙!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 인님!”
지난 수개월 동안의 기억을 떠올렸 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장치들 이 가득한 방 안에서 홀로 고독하게 보낸 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행복을 상상 하며 끔찍한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그 시간들.
“흐윽. 다시, 다시는 행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행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그런 생각하지 마. 루시아
너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행복 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영식은 그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 다듬어주며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 다.
그 일이 있은 후, 단 한 순간도 잊 어버리지 못했던 그의 온기였다.
“주인님…!”
루시아는 끓어오르는 격정에 몸을 맡기고 영식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쌓여 있던 울분을 풀어내는 듯이 격 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다행이야.’
영식은 그녀와 키스를 하는 도중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어떻 게 해야 하나 굉장히 고민이 많았는 데 다행히 그녀의 마음속에 응어리 진 감정을 풀어낸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을 하나 내려놓은 기분.
영식은 자신의 혀를 휘감는 그녀의 혀를 느끼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
“하아... 주인님….”
그렇게 15분의 시간이 흘렀다.
“흐응. 좋아요.”
그렇게 1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잠깐.’
“너무 그리웠어요….”
그렇게 2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만해.’
“하아. 행복해요, 주인님….”
그렇게 3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멈춰.’
“주이이이인니이이이임?”
영식은 자신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를 향해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3시간이라니.
키스를 하다가 숨이 막혀 쓰러진다
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그때, 영식은 서강준이 중태 상태 에서도 숨을 쉬지 않고 20시간을 버틴 것을 떠올렸다.
그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 했다.
‘안 돼.’
“사랑해요오오오?”
‘제발 그만해.’
영식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키스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행복을 위해서 억 지를 부리라고 방금 말해놓고 그녀 의 몸을 밀치는 쓰레기 같은 짓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영식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비워 내며 그녀를 받아들였다.
“푸하.”
결국 그렇게 5시간이 흐른 후, 루 시아는 기나긴 키스를 마치고 그에 게서 떨어졌다.
영식의 눈에 희망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침에 흠뻑 젖은 영식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광기 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절대 주인님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억지를 부려도 괜찮다 고 하셨죠? 그러면 우선 같은 방을 쓰는 것부터 시작해요, 주인님.”
희망의 빛이 절망으로 바뀌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영식의 목에 팔을 두른 후 다시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앞으로는 평생 함께예요, 주인님.”
영식은 다시금 그녀와 입술을 겹치 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