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29화
이번엔 네가 졌어(2)
“커헉, 쿨럭!”
영식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홀러나왔다. 그는 루시아의 손에 꿰 뚫린 가슴을 움켜쥐었다.
구조파악의 도중 들어온 기습적인 공격.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불가 능한 일격이었다.
“어, 어...?”
루시아는 자신이 영식을 공격했다 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혼 란에 빠진 표정으로 손을 내려다보 았다.
피가 묻어 있지는 않았다.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파 편들이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을 뿐 이었다.
“아, 아아.”
루시아는 그것이 어째서인지 영식 이 흘리는 피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끔찍한 두통이 그녀를 덮쳤다.
“아아아아아아!”
아주 조금 남았었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그녀가 갈 망하던 따듯한 공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 이 한순간만은 약에 취 한 듯이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손으로 그 행복을 박살 내버렸다.
자신을 믿고 끌어안아준 영식에게 상처를 입혀 버리고 말았다.
높은 곳에서의 추락이 더욱 상처가 크듯, 희망에 부풀어 있던 그녀가 절망에 빠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우우우웅.
그녀의 왼손 등 위에 새겨진 문양 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루시아는 그 변화를 깨닫지도 못하 고 영혼을 잃어버린 듯이 멍한 표정 으로 가슴이 꿰뚫린 영식을 바라보 고 있었다.
“루시, 아.”
그녀의 손등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본 영식은 표정을 일그리며 루시아 를 불렀다.
농밀한 불길함이 그의 전신에 퍼져 나갔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주인님. 이, 이럴 생각이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 아아. 내가, 내가 주 인님께 무슨 짓을….”
“정신 차려, 루시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아, 어, 떻 게 하지. 어떻게 해야….”
점점 광기를 띠기 시작하는 목소리.
영식은 그녀가 정상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영식은 그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루시아를 조종하고 있을 블래큐 브를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크윽.”
-파직, 파지직.
루시아에게 뚫린 가슴에서 푸른 스 파크가 튀어 올랐다. 시끄러운 경고 음이 그의 귓가에 울렸다.
끔찍한 고통이 가슴을 타고 전신에 퍼져나갔다.
영식은 그런 경고음을 무시한 채 덜덜 떨고 있는 루시아를 향해 접근 했다.
“싫어, 이제, 싫어….”
루시아는 몸을 감싸 쥐며 절망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쉽게도 그에게 사랑받는 건 틀 린 것 같네요.
-자, 봐 봐요. 당신이 사랑하던 주 인님이 분노한 표정으로 당신을 죽 이러 오잖아요.
“아, 아아.”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다 가오는 영식을 바라보았다.
거칠게 일그러진 표정이 정말 머릿 속에 들리는 말처럼 ‘화난’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끝났어.’
자비를 베풀어준 존재에게 배신당 한 것과 마찬가지. 영식은 결코 자 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말했죠? 저희에게 있어 기 억은 데이터와 같습니다.
-지금 이 기억은 삭제한 채 추출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정말…? 정말이야?”
-네, 물론이죠. 당신의 실수를 돌 이킬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죠.
‘뭘, 하면 되지? 내가 뭘 하면 되 는 거야?’
-조건은 처음과 같습니다. 그가 보 는 앞에서, 티리아를 죽이세요. 그렇 다면 모든 게 해결될 겁니다.
절벅 아래에 내려진 동아줄.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철컥, 철컥.
-치이이이익!
보랏빛 슈트가 그녀의 전신을 덮었 다. 새하얀 증기가 슈트의 틈 사이 로 뿜어져 나왔다.
바이저에 떠오른 붉은 빛과, 전신 에 끓어 넘치는 힘.
‘이게 주인님이 느끼던 기분이었구나.’
전능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힘에 루 시아는 검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노 리는 것은 영식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 쓰러져 있는 티리아.
-쿠웅!
“크윽!”
루시아가 티리아를 향해 달려들자 영식은 다급하게 블레이드를 꺼내들 어 그녀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슈트로 증폭된 힘은 그의
계산을 한참 뛰어넘는 충격으로 몸 을 튕겨냈다.
영식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가 벽 에 틀어박혔다.
“쿨럭! 쿨럭!”
- 경고.
-파손율이 위험 수치에 도달하였 습니다.
-전투를 종료할 것을 권고합니다.
“하아, 하아. 헛소리, 하지 마.”
지금 그만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영식은 자신의 왼쪽 손등을 슬쩍 바라보았다. 전능에 가까운 힘을 가 진 은회색 슈트가 그의 머릿속에 떠 올랐다.
-현 상태에서는 해당 슈트를 사용 할 수 없습니다.
‘제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슈트는 사용할 수 없는 모양.
영식은 거칠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보랏빛 슈트를 입은 루시아를 바라 보았다.
‘어쩔 수 없지.’
영식은 인벤토리에서 락테온 2식을 꺼냈다.
문양에 있는 슈트를 사용할 수 없 는 이상 락테온 2식을 사용할 수밖 에 없었다.
-치이이이익!
슈트 틈으로 뿜어지는 새하얀 증기.
검은색 슈트를 입은 영식과 루시아 가 격돌했다.
- 쿠구구궁!
“크으으…!”
루시아의 검을 막은 영식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녀의 손에 꿰뚫린 가슴. 그 상처가 그의 움직임을 막아버리고 있었다.
-카앙! 캉!
슈트를 입었다고 해서 그녀의 움직 임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식의 눈에는 그녀가 어떻게, 어 디로 움직일지 훤히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모든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보랏빛 슈트는 그녀에게 ‘알아도 못 막을’ 정도의 강대한 힘을 부여해 주었다.
-쿠웅
“거기서 비켜요!”
그나마 영식이 그녀를 상대로 버틸 수 있는 것도 루시아가 노리고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티리아만을 주시 하며 그 앞을 막아서는 영식을 향해 소극적인 공격만을 취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영식에게 공 격을 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경고. 경고.
-신속히 파손 부위를 치료하지 않 을 시 영구적인 성능의 감소가 발생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퇴각할 것을 권고드립 니다.
“하아, 하아.”
하지만 그런 억지에 가까운 공격에 도 지금의 영식이 버티는 것은 불가 능에 가까웠다.
필사적으로 루시아의 공격을 막아 내고는 있지만 전황은 점점 더 그에 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켜주세요, 주인님.”
루시아는 간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 라보았다.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하아, 하아. 그럴 수는, 없지.”
영식은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면서도 그 자리에 굳게 섰다. 지금 상황에 서 그가 물러선다면 목표가 되는 것 은 티리아일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영식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루 시아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계속해서 그녀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처만 없었더라도 어떻게 버텨볼 수 있었겠지만 치명상에 가까운 상 처를 입은 상태에서 그녀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주인님….”
루시아는 서글픈 목소리로 그를 부 르면서도 손에 쥔 검을 내려놓지 않 았다.
그녀는 거칠게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다 잊을 수 있다고 했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어….”
자기 자신에게 세뇌를 거는 듯한 중얼거림.
그녀는 다시금 티리아의 앞을 막아 선 영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악
“크윽!”
그녀의 검이 슈트를 가르고 영식의 몸을 베어냈다.
영식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옆으 로 몸을 빼냈다.
‘이제 한계야.’
가슴에 뚫린 상처에서는 더 이상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이 무거운 무언가에 짓눌리고 있는 듯한 감각. 전투 데이터로 인 해 검로를 알고 있어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읏….”
영식을 공격한 루시아는 그의 살을
베어내자 다급한 표정으로 몸을 뒤 로 빼냈다.
공격을 멈추자마자 그녀의 귓가에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들었 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어차피 잊 힐 기억입니다. 조금 더 강력하게 밀어붙이세요. 제가 당신에게 준 힘 은 이 정도가 아니잖아요?
“아, 알았어.”
루시아는 머릿속에서 들리는 말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그런 루시아의 상태를 본 영식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본능적인 영역에서 영식을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식에게 남은 방법이 하나 있었 다.
자신의 목숨을 절벽 끝으로 밀어 넣는, 위험천만한 방법.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 이외에는 없었다.
‘믿을 수밖에.’
루시아와 함께 지내면서 쌓인 많은 추억들.
자신에게 한결 같은 사랑을 보내왔 던 그녀의 감정.
그리고….
자신의 목 앞에서 멈췄던 그녀의 검.
지금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슈우우우우!
영식은 얼마 남아있지 않은 힘을 쥐어짜내며 부스트를 뿜어냈다. 그 의 몸이 강렬한 속도로 앞으로 쏘아 졌다.
방어에 전념해도 모자랄 판에 갑작 스러운 공세를 취한 영식을 보며 루 시아는 다급히 검을 내질렀다.
영식은 그녀가 내민 검이 보이지 않기라도 하다는 듯이 계속해서 그 녀를 향해 접근했다.
“어? 어어?”
뼈를 주고 살을 취한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대로 검을 휘두 르기만 한다면 영식은 머리가 둘로 갈라질 것이 분명했다.
-곤란하게 됐군요. 조금 검을 틀어 서 어깨 쪽을 잘라버리세요. 그의 손이 머리에 닿아서는 안 됩니다.
“하, 하지만.”
-무얼 망설이고 계십니까? 어차피 그는 이 일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합 니다. 어서 팔을 자르세요.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에 루시아 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점점 더 가까 이 접근하는 영식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몸을 뒤로 빼내 면서 왼쪽 팔을 향해 검을 휘두르세 요.
루시아의 검이 휘둘러졌다.
-콰직!
영식의 슈트가 박살 나며 그의 왼 쪽 팔이 어깨에서부터 떨어져 나왔 다.
“크윽! 아아아아아악!”
영식은 잘려나간 팔을 붙잡은 채 몸을 웅크렸다. 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주, 주인님!”
루시아는 다급한 표정으로 영식에 게 다가갔다.
-접근하지 마세요. 함정입니다. 대 장님은 오버로드의 고통도 몇 번이 나 겪으신 분입니다. 팔이 잘린 고 통 따위로 저 정도의 비명을 지르지 않아요. 침착하게 거리를 벌리고 이 제 티리아를 노리세요.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루시아는 단테리온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식을 향해 접근 했다.
-거기까지. 더 이상 접근하지 마세 요. 제 말을 잊으셨습니까? 고작 팔 을 하나 잘린 것으로 대장님은 절대 저런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시끄러워! 주, 주인님이 저렇게 아파하고 있잖아!”
-대장님은 당신은 원수가 아니었 습니까?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상황 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제 말에만 따르세요. 모든 것이 해결될 겁니다.
“아, 아아.”
루시아의 머리에 끔찍한 고통이 느 껴졌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단테리 온의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혼미 하게 만들었다.
“주인, 님….”
-무슨 짓입니까. 분명 멈추라고 했 잖아요. 제 말을 들으세요, 루시아 씨.
“시, 시끄러워. 주인님이 저렇게 아
파하고 계신데!”
루시아는 머리에서 전해지는 끔찍 한 고통 속에서도 영식을 향해 천천 히 접근했다.
그녀가 영식을 향해 접근할 때마다 단테리온의 목소리가 초조해졌다.
-정신 차리세요. 당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이게 아닙니다.
“주인, 님….”
고통이 임계점을 넘어갔다.
루시아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바이저가 벗겨져 바닥을 굴렀다. 입 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거품으로 범 벅이 된 그녀의 얼굴.
루시아는 그런 와중에도 영식을 향 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루시아 씨, 저 사람은 당신의 원 수입니다. 증오에 불타던 당신은 대 체 어디 간 거죠?
“하지만 그래도 난….”
이 사람이 아파는 모습을 보고 싶 지 않아요.
루시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영 식에게 손을 뻗었다.
“단테리온.”
영식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그녀 의 손을 뒤로 잡아당기며 루시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는 언제 그렇게 비명을 질렀냐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네가 졌어.”
이브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테리온의 계략에 휘말려, 자신에 게서 등을 돌렸던 불쌍한 오우거.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루시아는, 결국 그에게서 등을 돌 리지 않았다.
“구조파악.”
강렬한 푸른빛이 그의 손에서 뿜어 져 나와 루시아의 머리로 흘러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