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28화
이번엔 네가 졌어(1)
“늦어져서 미안.”
공동 천장을 박살 내며 나타난 영 식은 바닥에 주저앉은 티리아의 머 리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어, 어떻게 여기에….”
“통신기 가지고 있었지? 거기에
GPS 기능이 달려 있었거든.”
“쥐 피에스요?”
그녀는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식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 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 지금은 먼저 할 일이 있으니까.”
영식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개 를 돌렸다. 자신을 보자마자 창백하 게 질린 얼굴을. 몸을 떠는 루시아 를 볼 수 있었다.
“루시아.”
“주, 주인…. 아니, 네놈. 잠들어 있 다고 하더니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네.”
루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영식을 주 인님이라고 부르려다 다급히 호칭을 바꿨다.
“아니. 사실이야. 일어나자마자 이 곳으로 온 거거든.”
“홍. 그런 말을 믿을 것 같아?”
“믿지 않아도 딱히 상관없어.”
영식은 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왜 내가 아니라 티리아를 습격한 거지?”
“그건….”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지는 않고… 누군가 시킨 건가?”
영식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테리온이에요.”
“단테리온…?”
영식의 질문에 답한 것은 루시아가 아닌 티리아였다.
티리아는 영식이 오기 전 루시아에 게 들었던 말들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허.”
아무리 영식이라도 자신을 두 명으 로 나누겠다는 말에는 실소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블랙큐브인가?’
아무리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고 하 더라고 그녀가 저런 정신 나간 제안 을 순순이 받아들였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가능성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머릿속에 아직 남아 있는 블 랙큐브.
단테리온이라면 엘리아가 무력화시 킨 블랙큐브를 다시 복구하는 것 정 도는 어렵지 않았으리라.
루시아는 거칠게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그, 그게 뭐 어때서! 누군가 시킨 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거야? 그 렇다면 너는 애초에 날 왜!”
“난 널 비난하려고 하는 게 아니 야. 다만 누가 네게 이런 헛짓거리 를 하도록 유도했는지 궁금했을 뿐 이지.”
“그건 너와 상관없는 일이잖아!”
“상관없지 않을 리가 있나. 널 이 렇게까지 몰아붙인 놈을 가만히 둘 수는 없지.”
“읏….”
영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루시아 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오, 오지 마!”
“단테리온이 네게 무슨 짓을 한 거 지?”
“오지 말라고!”
자신을 낱낱이 분석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 루시아는 거칠게 입술을 깨 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는 지금 당 장 영식을 공격하라고 소리치고 있 었다.
오히려 영식이 와서 잘됐다고, 그 의 눈앞에서 티리아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속삭이고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 목소리에 저 항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둘 중 무엇을 따라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이 혼란스러운 표정 을 지었다.
“잘 들어, 루시아. 네 머릿속에 있 는 블랙큐브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냐. 단테리온이라면 충분히 그걸 복구할 수 있었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네 모습이 정상이라고 생각해?”
“흥, 내가 조종이라도 당하고 있다
고 생각하는 거야?”
루시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 었다.
김재현 때와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단테리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영식을 둘로 나 누어 사랑과 복수를 둘 다 이뤄내겠 다는, 그 정신 나간 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력은 없었다. 아니, 적어도 그 녀 강제력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영식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부정하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아는 넌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지껄 이는 거야!”
루시아는 거칠게 발을 구르며 영식 을 향해 소리쳤다. 마치 어린 아이 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모습.
“과거의 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 만, 적어도 지금의 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아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이 건 내 의지로 결정한 일이야! 당신 에게 복수하겠다고, 나와 똑같은 고 통을 주겠다고!”
“그래? 그렇다면 그때 왜 검을 멈
췄지?”
“날 죽일 수 있었잖아. 조금만 힘 을 주면 목을 베어낼 수 있었잖아.”
“시, 시끄러워!”
“하지만 너는 결국 날 죽이지 못했 지. 티리아도 마찬가지야. 결국 넌 네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검을 휘두 를 수 없는 인간이야.”
“시끄럽다고!”
루시아는 발작을 일으키듯 소리 질 렀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과 무의식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그녀는 끔찍한 두통을 느끼며 이마 를 감싸 쥐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선택해 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탈출구가 없는 미로 안을 끝없이 배회하는 감각.
그녀는 당장에라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 아윽. 아악!”
영식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루시아 를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지금 상태의 그녀에게 더 이상 혼란을 가 중시키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먼저 블랙큐브를 무력화시켜야 해.’
단테리온이 어떤 방법으로 한 번 무력화된 블랙큐브를 복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언행은 블랙큐 브에게 지배 받는 이들이 보이는 전 형적인 모습이었다.
블랙큐브를 통해 그녀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영식은 그녀의 머리 쪽에 구조파악 을 사용하기 위해 발을 박찼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루시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 치며 영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영식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블레이 드를 꺼내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예전처럼 힘으로 그녀를 제압한 후 에 구조파악을 사용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카앙! 캉!
블레이드를 꺼내든 영식과 루시아 가 격돌했다. 라이트 세이버와 블레 이드가 부딪히며 불꽃을 피워 올렸 다.
‘검로가 보여.’
처음에는 살짝 루시아에게 밀렸던 영식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영식은 그녀가 가진 검술의 허점을 노리고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에 저장된 막대한 전투 데이터. 그 데이터들이 루시아의 움 직임을 낱낱이 분석하고 그 해결책 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영식은 자신의 몸에서 끓어 넘치는 알 수 없는 힘에 눈을 반짝였다.
죽음을 예상했을 정도의 오버로드 를 겪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 로 활력이 넘치는 몸.
업그레이드를 겪은 직후, 아니, 그 이상으로 몸에서 힘이 넘쳐나고 있 었다.
단순히 신체 능력이 상향된 것만이 아니었다. 영식의 눈에는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있었다.
루시아가 뿜어내는 강렬한 보랏빛 마력. 그 에너지의 흐름이 손에 잡 힐 듯이 보였다.
마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공기 의 흐름이 직접 눈에 보이게 된 것 같은 감각.
어떤 방식으로 마력을 발현하여 검
기를 만들고 있는지, 몸을 움직일 때 어느 쪽으로 마력을 보내고 있는 지 훤히 보이고 있었다.
“아도니스 디 리베리에!”
-쿠르르릉!
그녀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솟구치 는 마력. 아찔할 정도의 힘이 그녀 에게서 느껴졌다.
‘틈이 있어.’
마력의 흐름.
이제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그 흐름 사이에 미세한 틈이 있는 것이 보였다.
영식은 블레이드를 그 틈에 쑤셔
넣으며 칼날에 닿는 에너지를 분해 했다.
“ 엇…?!”
루시아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침음 이 흘러나왔다.
기술이 완성되기 직전, 검날에 모 인 기운을 그에게 휘두르는 것만이 남았을 때 갑자기 둑이 무너지기라 도 한 것처럼 마력이 그녀의 제어를 듣지 않고 흩어졌다.
‘이건….’
이제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감각.
단테리온과 싸웠을 때 느꼈던 감각
과는 또 다른 기이한 감각이었다.
급소에 깊이 침을 박아 넣었을 때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영식 의 블레이드가 내질러진 후 그녀의 마력 자체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퍼억!
“꺄악!”
영식은 멈춰 있는 루시아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
그녀는 비명을 흘리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쿠, 쿨럭! 바, 방금 그건….”
“글쎄. 나도 정확한 건 몰라.”
영식은 황성에서 눈을 뜨자마자 통 신기를 통해 들리는 루시아와 티리 아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방에서 뛰 쳐나왔다.
지난 수개월 간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정확히 체크해 볼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없었던 것이 다.
‘이게 역장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능력, 인가.’
꿈을 꾼 것처럼 희미한 기억이었지 만 분명 역장 구성에 필요한 최소한 의 조건을 위해 신체를 재구성한다 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 지금 에너지가 보이는 등의 변화가 바로 그런 ‘최소한의 조건’ 중 하나일 것이다.
‘나쁘지 않아.’
오히려 너무 좋아서 걱정스러울 정도.
에너지의 흐름이 보인다는 것은 그 가 가진 ‘에너지 제어’라는 능력을 극대화 시키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 쳤다.
보이지도 않는 것을 직감적으로 제 어하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을 제어 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 니까.
“이익!”
루시아는 거칠게 표정을 일그러뜨 리며 다시금 영식을 향해 달려들었 다.
?퍼억! 퍽!
“커헉! 쿨럭!”
하지만 몇 번을 덤벼도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영식은 그녀가 검술을 사용할 틈조 차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그녀를 몰 아붙였다.
‘ 어째서?’
루시아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영식을 바라보았다.
분명 힘도, 스피드도 그녀가 우위 에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검을 마주치면 그 결 과는 너무나도 일방적인 그녀의 패 배였다.
그녀가 어디를 향해, 어떻게 검을 휘두를지 모두 알고 있는 듯한 모 습.
‘이길 수 없어.’
몇 번의 격돌 끝에 그녀는 자신이 영 식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 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영식을 이길 수 없었다. 지금 그에게 패배하고 순순 히 말을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 속에 떠올랐다.
루시아는 어딘가 평온해 보이는 미 소를 지으며 라이트 세이버를 쥔 손 에 힘을 풀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다시금 악마 의 속삭임이 흘러들어왔다.
-지금 포기하기는 이르다고 생각 하지 않으신가요?
이제는 익숙해진 그 목소리.
루시아는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걸로 충분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영식이 있는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주인, 님….”
“조금만 더 참아. 이제 단테리온에 게 해방시켜 줄 테니까”
영식은 그렇게 말하며 루시아를 가 볍게 끌어안았다.
루시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인님. 저, 주인님을 사랑해요.”
“그래. 알고 있어.”
루시아는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그 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하지만… 주인님을 용서할 수 없 어요. 주인님이 제게 한 일들이… 잊히지가 않아요.”
“어떻게 해야 하죠, 주인님? 전 어 떻게…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루시아.”
영식은 그녀의 머리 쪽으로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네게 죽어줄 수 없어. 아 직은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거 든.
“만약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내가 모든 기억을 되찾은 다음에… 그 다 음에 내 목숨은 네 선택에 맡길게. 그러니… 그때까지만 이라도 같이 있어 줄 수 있겠어?”
“주인님….”
루시아는 떨리는 눈빛으로 영식을 바라보았다.
선택의 보류.
그것은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 그 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주인님…!”
루시아는 영식의 몸을 강하게 끌어 당기며 그의 온기를 전신으로 느꼈 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영식의 온기는 마약과도 같이 그녀의 전신에 퍼져 나갔다.
인간은 눈앞에 닥친 일을 뒤로 밀 어내는 것만으로도 상상이상의 안도 감을 얻는다.
자위나 다름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것만으로 깊은 절망에 빠진 그녀에 게는 구원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흐윽... 허어어엉. 죄송해요. 죄송
해요 주인님…. 저, 티리아 씨에게 상처를 줬어요. 주인님에게도….”
루시아는 펑펑 눈물을 쏟아내며 영 식의 몸을 한층 더 강하게 끌어안았 다.
영식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 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구조파악.”
영식의 손에서 흘러나온 푸른빛이 그녀의 머리를 향해 흘러들어갔다.
이대로 블랙큐브를 무력화시키기만 한다면 그녀는 단테리온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허어어엉...”
루시아는 눈물을 쏟으며 지난 수개 월의 시간을 떠올렸다.
지옥과도 같았던 그 시간.
영식이 곁에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도 미칠 듯한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나날이었다.
‘조금이라면….’
아직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 다. 자신은 아직도 그에 대한 증오 와 사랑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가 진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 안 기고 싶었다.
-치익.
시끄러운 잡음.
-하하. 그렇게 둘 수는 없죠. 루시 아 씨, 당신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 이 남아 있습니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콰득.
“어...?”
루시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 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영식을 안고 있던 그녀의 손은, 자 기도 모르는 새에 그의 가슴을 꿰뚫 어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