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27화
재가동 (4)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몽롱한 시야.
단단한 무언가에 구속된 듯이 움직 이지 않는 몸.
‘여긴….’
영식은 약에 취한 듯 몽롱한 감각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기계 장치가 가득한 방.
금속으로 만들어진 왕좌 위에 자신 이 앉아 있었다.
자신의 앞에는 날카로운 인상을 가 진 백발의 청년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알아냈다고?”
영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이 열 렸다.
그제야 영식은 지금 이 광경이 자 신의 과거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깨 달았다.
“그렇습니다.”
백발의 청년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 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식은 그의 이름이 ‘락테온’이라 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해할 수 없군. 그 이유라는 게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거지?”
“중요합니다. 이건 지금 저희들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 니까요.”
“애초에 설명이 필요한가? 우리에 게는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을 완수 할 뿐이다.”
“대장님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 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왜 이곳에 서 인간들과 싸우고 있는지. 아니…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누구인지.”
락테온은 타오르는 듯이 이글거리 는 눈빛으로 말했다.
왕좌에 기대듯 앉아 있던 영식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락테온의 눈빛
을 본 순간 그는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각을 느꼈다.
호기심이라고 불리는 이질적인 감각.
“…들어보지.”
영식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락테온은 품속에서 손가락만 한 메 모리칩을 꺼내었다.
“이건?”
“이 메모리칩에 모든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락테온이 내민 메모 리칩에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 젝트’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치익.
시야가 일그러졌다.
시끄러운 기계음이 영식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몽롱했던 시야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몸을 구속하고 있던 단단한 구속구가 하나씩 풀리기 시 작했다.
-모델명 데우스 엑스 마키나 0식.
-재가동합니다.
좁은 공동.
칠혹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공동 안에서 새하얀 뇌전이 번쩍이고 있 었다.
“하아, 하아.”
티리아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놀랍네요.”
티리아를 상대하던 루시아는 살짝 지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알고 있던 티리아라고는 생 각하기 힘든 무력.
자칫 방심한 채 상대했으면 뇌전에
전신이 불탔을 뻔 했을 정도로 티리 아는 강력했다.
‘저것 때문인가.’
루시아는 티리아의 등 뒤로 시선을 옮겼다.
찬란하게 빛나는 여덟 장의 날개.
과거 열두 장의 날개를 가지고 있 었다고 전해지는 세라핌의 힘을 점점 더 완벽하게 다루고 있는 증거였다.
이전에도 한계를 넘은 힘을 운용하 면 여덟 번째 날개가 희미하게 빛났 지만, 지금처럼 선명하진 않았었다.
‘저게 열 장이 된다면.’
그녀를 상대하기 벅찰 것이라는 예 감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열 장의 날개 를 펼칠 수 있을 때의 이야기.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가정 이다.
“이제 그만 포기하세요. 희망이 없 다는 것 정도는 티리아 씨도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루시아 씨….”
티리아는 서글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해.’
루시아는 그 영식조차 슈트 없이는 상대할 수 없는 강자.
자신의 힘으로 그녀를 이길 수 없다 는 것은 싸우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루시아가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고 제정신 을 차리길 바라며 버티는 것 이외에 는 없었다.
“제발 정신을 차려주세요. 루시아 씨 도 지금 이 일의 끝에 좋지 않은 결 말이 있을 거라고 알고 계시잖아요.”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먼 곳까 지 와버렸어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늦지 않았다
고요. 다시 생각해 보세요, 루시아 씨. 살바토르 길드는 루시아 씨에게 있어서 이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장소였나요?”
티리아의 간절한 말에 루시아는 굳 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거칠게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곳은 제 인생에서 가장 안심할 수 있고, 행 복한 장소였어요.”
“그렇다면 왜. 왜 멈추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 이상으로 주인님이 소중하니까요”
“?정말로 영식 씨를 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티리아는 주먹을 움켜쥐며 루시아 를 노려보았다.
루시아는 그녀의 말에 바로 대답하 지 못하고 변명거리를 찾듯 눈을 내 리깔았다.
“?그자가 그렇게 말했는걸요. 제 사랑과 복수, 두 개를 모두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그 말을 진심으로 믿으시는 거예 요? 설령 그자의 말대로 영식 씨를 둘로 나눈다고 하더라도 과연 루시 아 씨가 원하는 게 이루어질 것 같 아요?”
티리아는 힐난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영식 씨가 어떤 상태 인지는 알고 계신가요?”
“어떤 상태라니….”
“영식 씨, 수개월 전부터 눈을 뜨 지 못하고 계세요.”
“그, 그런! 설마 주인님에게 무슨 문제라도….”
루시아는 다급한 표정으로 티리아 에게 다가가려다 이내 발을 멈췄다.
지금 자신이 영식이 깨어나지 못하 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지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영 식 씨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만 은 확실해요.”
“다시 한번 물을게요. 정말로 루시 아 씨가 원하는 게 이뤄질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루시아의 눈동자가 떨렸다.
라이트 세이버를 쥔 그녀의 손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티리아의 말 이 그녀의 가슴 속에 깊게 박혔다.
알고 있었다.
처음 단테리온의 제안을 받아들였 을 때부터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 정도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말을 따랐던 것은 지금 그녀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시아 씨, 같이 영식 씨가 깨어 나길 기다려요. 그리고 영식 씨가 일어나면 서로 같이 얘기해 봐요.”
“얘기한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거 예요.”
“지금의 영식 씨가 과거와 같다고
생각하시나요? 만약 그랬다면 저 또 한 영식 씨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 입장이에요.”
비단 티리아에게 국한된 얘기는 아 니었다.
과거 영식은 창조주를 이끄는 대장 이었고, 대륙을 전쟁터로 만든 장본 인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에요.”
“저도 알아요. 그래서 함께 얘기해 보자는 거예요.”
루시아의 눈빛에 서린 동요가 더 커졌다.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몸으 로 고개를 숙였다.
살바토르 길드.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따듯했고, 행복했던 그 장소.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알겠… 으읏!”
티리아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려 고 했던 루시아의 표정이 거칠게 일 그러 졌다.
-치직.
그녀의 귓가에 시끄러운 잡음이 울
려 퍼졌다.
그 잡음 사이로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정말 대화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 하시나요?
그와 함께 그녀의 눈앞에 영상이 떠올랐다.
과거 영식의 명령에 따라 부하들을 죽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
절규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제발 멈춰달라고 애원하던 그때의 기억이 그녀의 눈앞에서 재생되었다.
-당신에게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 른 존재입니다. 뭘 망설이는 거죠?
당신이 느꼈던 고통만큼 그에게도 상실의 고통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마치 그녀를 조롱하는 듯한 단테리 온의 목소리.
루시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귀를 막아도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자, 다시 검을 드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 다.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어요.
최면과도 같이 귓가에 울리는 말.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
그와 함께 또 다른 영상이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둘로 나누어진 영식.
자신은 과거의 영식에게 검을 내질 렀다. 비참하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복수가 끝난 그녀를 또 다른 영식 이 상냥하게 껴안았다. 입을 맞췄다.
남은 것은 그녀와 영식 단 둘뿐.
그에 대한 독점욕을 억누를 필요도 없었다. 그가 티리아와 아라, 자신을 모두 함께 받아들인다고 했을 때 포 기했던 욕망이 다시금 농밀하게 불 타올랐다.
그를 독점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만이, 그와 사랑을 속 삭이며 함께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욕망이 그녀 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시끄러워.”
“루시아 씨?”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네가 뭘 안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 는 거야!”
루시아는 발작을 일으키듯 거친 목
소리로 소리쳤다.
그녀의 눈빛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보랏빛 마력이 주변에 휘몰아쳤다.
좁은 공동이 당장에라도 붕괴할 것
처럼 뒤흔들렸다.
티리아는 갑작스럽게 돌변한 그녀 의 분위기에 표정을 굳혔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 다.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김재현에 게 조종하고 있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루시아 씨….’
티리아는 서글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양팔을 벌렸다. 그녀의 양 손에 새하얀 뇌전이 맺혔다.
지금 상태의 루시아에게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죽어!”
루시아는 광기에 찬 외침을 내지르 며 티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두운 공동 안이 환해질 정도로 강렬하게 뿜어지는 보랏빛 기운.
광기에 차있는 와중에도 그녀는 공 동이 무너질 정도의 충격이 퍼져나 가지 않도록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제어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티리아와 루시아의 전투가 이어졌다.
-촤악!
“꺄아아악!”
티리아의 가슴에 기다란 검상이 새 겨 졌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루시아 를 올려다보았다.
싸움의 결과는 시작하기 전부터 이 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
가뜩이나 공동이라는 제한된 공간 에서 원거리 클래스인 티리아가 근 접 전사인 루시아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 이상 네 헛소리를 들을 여유는 없어.”
루시아는 씹어뱉듯이 말하며 바닥에 주저앉은 티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아….”
티리아는 짧은 탄성을 흘리며 고개 를 떨어뜨렸다.
그녀의 눈을 타고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영식 씨.’
어둑한 방 안에 누워 있는 영식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 다. 따스한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 었다.
-후웅.
그런 그녀의 바람을 짓밟듯 라이트 세이버가 휘둘러졌다.
티리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라이 트 세이버를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 였다.
-쿠우우우웅!
거대한 충격과 함께 공동이 무너져 내렸다.
한 줄기 빛이 어두운 공동 안을 비췄다.
_ 탁.
바닥을 밟는 소리와 함께 티리아의 앞에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영식 씨?”
티리아는 눈앞에 떨어진 사람을 올 려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