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23화
빈자리 (3)
“아… 유나야.”
어둑한 조명의 방 안, 침대의 옆에 앉아 잠들어 있는 영식의 이마를 하 염없이 쓰다듬고 있던 티리아가 자 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꺼질 것 같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레비아탄 길드를 도와서 던전을 공략했다며? 아무 일 없었 어?”
“응. 던전보다는 그 주변에 기계몬 스터들 처치하는 게 더 힘들었어. 뭐, 이번 던전 공략은 개인적으로 대만족이야. 무기의 힘도 전보다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됐고.”
“다행이네.”
티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 리에 앉았다. 유나는 침대에 누워있 는 영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영식이는 어때?”
“?똑같아.”
티리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분하 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수개월 전, 엘리아와의 전투 이후 영식은 눈을 감은 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외관상 남아 있는 상처는 없었다.
불꽃에 그슬려 벗겨진 피부는 모두 재생되었고, 심각하게 파손되어 푸 른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던 상처 도 자연스럽게 원래 상태로 되돌아 왔다.
하지만.
분명 상처가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어깨를 붙잡고 격렬하게 흔들어 봐 도,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쳐봐도, 심 지어 찬물을 쏟아 부어도 그는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의 코에 가만히 귀를 기 울이면 미약하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는 것이 느껴졌고, 피부를 만지 면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살아 있는 시체와도 같은 모 습.
그것이 지금 영식의 모습이었다.
“티리아 언니….”
유나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티리 아를 바라보았다.
영식이 일어나지 않게 된 이후, 가 장 큰 혼란에 빠졌던 건 그와 연인 관계에 있던 티리아와 아라였다.
처음에 두 여인은 밥도 제대로 먹 지 않고 며칠 밤을 새워 영식이 있 는 방에서 함께 지냈을 정도였다.
“후후. 괜찮아, 유나야.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까.”
티리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영식 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 녀는 감정에 짓눌린 채 의무를 저버 리지 않았다.
‘지켜야 할 사람이 많으니까.’
그녀에게는 살바토르를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언제까지고 절망에 빠진 채 허우적 거릴 수는 없었다.
현재 티리아는 잉그리움 제국 황성 에 펼쳐져 있는 정체불명의 보호막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 자신의 몸속에 있는 세라핌의 힘을 다루기 위해 정 신없이 바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하루에 한 번은 꼭 영식의 방에 들어와 그를 만나는 것 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영식 씨의 머리를 쓰다듬 고 있으면 조금 기운이 나. 영식 씨 가 다시 눈을 뜨기 전까지 조금 더 힘내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겠 다, 라는 의욕이 샘솟는 달까.”
지금 그녀에게 하루에 한 번 영식 의 방에 들어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 어주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언제쯤 눈을 뜨는 걸까?”
“글쎄. 몇 개월이 될 수도 있고, 몇 년이 될 수도 있고 앞으로 영영 눈을 뜨지 않으실지도 모르지.”
“언니!”
“괜찮아.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걸
린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난 다고 하더라도 난 영식 씨를 평생토 록 기다릴 테니까.”
눈부실 정도로 올곧고, 굳건한 사랑.
유나가 과거 알고 있던 상냥하지만 마음은 소녀처럼 여렸던 티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꼭 눈을 뜰 거야. 지금만 해도 다 리 사이에 싸커킥이라도 한 번 날리 면 벌떡 눈을…!”
“그, 그만 둬, 유나야!”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짓을 벌이려 하는 유나를 티리아가 허둥지둥 말 렸다.
“거, 거기는 안 돼….”
“헤에? 뭣 때문에 안 되는데?”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티 리아를 바라보며 유나가 히죽 미소 를 지었다.
티리아는 가볍게 주먹을 쥐어 그녀 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자꾸 채린이랑 붙어 다니더니 이 상한 것만 늘어가지고….”
“하하하. 농담이야, 언니.”
“농담으로라도 그런 얘기는 하지 말아줘.”
티리아는 핀잔을 주며 방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오늘은 푹 쉬어, 유나야. 나 도 이제 일하러 가볼게.”
“보호막에 대한 연구는 잘 진행되 어 가?”
“큰 진전은 없어.”
황성을 보호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보호막.
창조주들조차 뚫지 못했던 그 신비 한 보호막의 힘은 지금 대륙 연합군 이 가장 총력을 기울여 조사하고 있 는 힘이었다.
문제는 조사가 시작된 지 수개월이 지날 동안 별다른 진척이 없다는 것.
대체 이 보호막을 유지하고 있는 힘이 어디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지, 어떻게 해야 이 힘을 이용할 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지금 보호막을 이루고 있 는 힘이 천마대전과 관련 있다는 걸 알아낸 게 진전이라면 진전일 수 있 겠네.”
“끄응. 대체 이 황성에 뭐가 있기 에 이렇게 단단한 걸까?”
유나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희미한 붉은빛과 함께 후끈한 열기 가 주변에 퍼져 나갔다.
?쿵.
황성을 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지 만 묵직한 소리 이외에 황성의 벽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불어 넣은 힘 정도라 면 바위를 가볍게 박살 낼 수 있을 정도였는데도 이 정도였다.
‘전력을 다해도 결과는 똑같겠지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녀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 부어서 황성 벽을 향해 공격을 날린 적이 있었다.
그때도 결과는 지금과 똑같았다.
신비한 보호막으로 보호되고 있는 이 황성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가 아닌 서강준이 해도 결과는 같았으니 지금 이 보호막이 가진 절 대적인 방어력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그 단테리온이라는 놈의 슈 트보다 단단했어.’
에너지 분해라는 기술이 들어갔다 는 단테리온의 슈트.
그 슈트 또한 무서울 정도의 방어 력을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일정 이 상의 마력을 쏟아 부으면 공격이 가 능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황성을 뒤덮고 있 는 보호막을 뚫은 존재는 단 한 명 도 없었다.
“이 보호막의 비밀만 알 수 있다면 그 단테리온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놈을 상대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으, 영식이라면 뭔가를 알려줄 것 같은데….”
그녀는 침대에 누워있는 영식을 바 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식이라면 이 신비한 보호막에 대 한 해답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유나야. 계속 이곳에 있는다고 해서 영식 씨가 일 어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응. 알았어.”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티리아의 뒤를 따라 방문을 나섰다.
- 달칵.
“아, 길드장님, 유나 씨. 여기 계셨 었군요.”
“한성 씨?”
“무슨 일이야? 보급품 사이에서 비 명을 지르고 있던 것 아니었어?”
유나의 질문에 한성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방금 전까지 그랬었습니다만… 급 한 전보가 들어와서 전해드리려 왔 습니다.”
그는 둥그런 안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 전보?”
“예. 요새 주변을 순찰하던 레드 로즈 길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 생명체에게 습격 당했다고 합니다.”
“?몬스터가 아니라?”
유나는 가늘게 눈을 뜨며 한성을 바라보았다.
한성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며 고 개를 끄덕였다.
“예. 몬스터… 라고는 말하지 않았
다고 합니다. 우선 수정 구슬을 통 해 보내준 영상이 있다고 하니 지금 긴급 회의를 열어 영상을 확인해 본 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회의실로 갈게요.”
“으... 오자마자 또 사건이라니.”
유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성과 티리아를 따라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들 모인 건가?”
“레비아탄 길드장은 아직 복귀 중 이라서 늦어질 것 같다는 연락이 왔 습니다.”
“흠. 던전 공략을 마치고 복귀 중
이니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지금 모 인 인원으로 회의를 진행하겠네.”
현재 영웅의 요새에서 ‘지휘관’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알렉과 서강준, 티리아와 박시아였다.
원래라면 지휘관 위에 총괄책임자 로 영식이 있었겠지만 그는 수개월 전 사건 이후 줄곧 깨어나지 못했기 에 총괄책임자의 자리는 계속해서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 임시로 총괄책임자 업무를 수 행하는 것은 아르난 제국 1군을 책 임지고 있는 알렉 볼프강이었다.
“30여 분 전, 요새 주변 순찰을 돌
던 레드 로즈 길드가 습격당했네.”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알렉의 말을 듣고 있던 서강준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음. 이곳에서 꽤나 떨어진 장소더 군. 과거 잉그리움 제국의 오리하르 콘 광산이 있던 곳이라고 하네.”
“?그쪽은 순찰 루트가 아니지 않 은가?”
“맞네. 순찰 루트를 이탈해서 그쪽 으로 간 건데… 정확히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네.”
“알 수 없었다?”
“습격 당한 레드 로즈 길드원들은 영상을 보낸 후에 전멸했네.”
이어지는 알렉의 말에 회의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알렉은 테이블 위에 수정 구슬을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선 모두 이 구슬 속의 영상을 봐줬으면 하네.”
수정 구슬에서 미약한 푸른빛이 흘 러나왔다.
[아아아아아악!]
[저, 저건 뭐야 대체?!]
처음 들린 소리는 끔찍한 비명소 리. 살이 터지고, 짓뭉개지는 소리였 다.
영상 속 구슬을 든 주인은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주변 모습이 너무 흔들려서 영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여, 여기 위치는 요새 동북쪽 오리하르콘 광산! 도, 도와 줘 제발!]
그는 절박한 목소리로 구슬을 향해 소리쳤다.
?찔꺽.
필사적으로 외치는 그의 뒤에서 점 액질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히, 히익!]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을 습격한 괴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저게….”
“무슨….”
회의실 안에 동요가 퍼져나갔다.
그 영상에 찍힌 것은… 거대한 살 덩어리로 이루어진 ‘무언가’였다.
어두운 조명의 방 안.
죽은 듯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영식의 몸에서 푸른 스파크가 순간 적으로 튀어 올랐다.
_파직.
-오버로드로 인한 데이터의 손실 복구 중.
-실패. 실패.
-코어 손상으로 인해 데이터 복구 에 필요한 에너지를 수급할 수 없습 니다.
-별도의 에너지원이 없을 시 영구
히 기능이 정지됩니다.
차가운 기계음.
영식의 몸에서 튀어 오르는 스파크 가 더욱 강렬해졌다.
-우우우웅.
그때, 그가 누워있는 방의 ‘벽’에서 무형의 기운이 흘러나와 영식의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코어를 대체 가능한 추가 에너지 원을 확인.
-해당 에너지원의 정체는 ……라 고 추정.
-복구에 필요한 에너지 이상의 에
너지 확보 완료.
-코어 수복 및 추가 메모리 데이 터 다운로드 중.
-메모리 데이터에 남아 있는 ‘역 장’ 구성에 필요한 데이터 추출 중.
-경고. 현재 단계에서 ‘역장’ 구성 에 필요한 데이터 분별 불가능.
-해당 데이터를 구현하는 것을 불 가능하다고 판단. 기본적인 조건을 위해 신체 구성 데이터를 변경 중.
-모델명 0식.
-완전 재가동까지 남은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