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22화
빈자리 (2)
-저벅, 저벅.
은회색 통로. 마치 SF영화에 나오 는 함선의 내부처럼 온갖 복잡한 기 계장치가 가득한 통로를 한 청년이 걸어가고 있었다.
단정한 흑발.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듯한 온화한 인상을 가진 청년은 콧 노래를 훙얼거리듯 경쾌한 발걸음으 로 통로 중간에 있는 문을 두들겼다.
- 똑똑.
≪... 뭐야.”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방 안에서 홀 러나왔다.
방문 틈으로 살짝 들어난 날카로운 눈빛이 단테리온을 향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루시아 씨?”
“이딴 음침한 장소에서 잘 지내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녀는 씹어뱉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단테리온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 며 가볍게 웃음을 냈다.
“하하. 확실히 이곳이 조명이 좀 어둡긴 하죠. 하지만 꽤나 아늑한 곳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전혀.”
“이런...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 신 모양이군요.”
“납치되다시피 끌려왔는데 마음에 들길 바라는 거야?”
“하하하. 죄송합니다. 처음 루시아 씨를 이곳에 데려왔을 때는 다소 강 압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죠.”
그가 말한 ‘다소 강압적’인 방법을 떠올린 루시아는 거칠게 표정을 일 그러뜨렸다.
은회색 슈트를 쓴 영식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무형의 기운. ‘역장’이라 고 불리는 힘에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끌려왔으니까.
“하지만 제 얘기를 듣고는 계획에 동참해 주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루시아는 말끝을 흐렸다.
단테리온의 제안.
그것을 처음 들었을 때는 워낙 혼 란스러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심 코 동의해 버렸지만 시간이 지날수 록 정신 나간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모두 당신의 복수를 위해서입니 다. 아니면… 당신의 부하들을 모두 죽게 만든 대장님을 용서하실 생각 이십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그녀는 살짝 동요가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복수.
돌아갈 곳도, 함께할 사람도 잃어 버린 그녀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남 아 있는 목표였다.
‘하지만….’
루시아는 굳게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눈빛에 갈등의 빛이 서렸 다. 영식과 함께했던 시간이, 살바토 르 길드와 함께 했던 시간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저녁식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을 만드 는 티리아와 영식을 사이에 두고 신 경전을 펼치는 자신과 아라.
힐끔힐끔 그쪽을 쳐다보는 유나와 그를 놀리는 채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행복했던 시간들.
그 장소에 대한 깊은 미련이 그녀 의 가슴속에서 점점 더 커져가고 있 었다.
“아직 미련이 님'아 있으신 모양이 군요.”
“시끄러워.”
“하하. 그 미련도 계획이 성공한다 면 모두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단테리온의 말에 루시아는 굳게 입 을 다물었다.
단테리온의 제안.
그 제안이라는 것은 영식을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루시아가 ‘그 를 죽일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준 다는 것이었다.
‘멍청한 짓이지.’
루시아는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정신 나간 그의 계획에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자신은 영식을 죽일 수 없었 다. 그것은 영식의 목에 검을 가져 다 대었을 때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 이었다.
그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뒤섞여 차마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식을 과거 창조주들을 이끌던 냉혈한 악마의 모습으로 되돌려 마음속의 망설임을 없애버리겠다니,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녀도 자신의 지금 행동이 얼마나 머저리 같은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그의 제안을 들었을 때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거 절하려고 했었다.
그 뒤에 덧붙여진 다른 하나의 제
안을 듣기 전까지는.
-저희들에게 있어 기억이라는 것 은 일종의 데이터입니다. 필요한 부 분만 추출하여 다른 신체에 이전하 는 것도 가능하죠. 즉, 당신이 증오 하는 과거의 대장님과 사랑하는 지 금의 대장님을 두 개체로 분리하는 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일.
하지만 미칠 듯한 갈등에 빠진 그 녀에게 있어서 너무나 달콤한 제안 이기도 했다.
-복수와 함께 사랑하는 사람을 독 점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 각하시지 않습니까?
악마의 속삭임.
그녀는 이 제안이 자신을 파멸로 인 도할 것을 듣는 그 순간에 깨달았다.
과거의 영식, 즉 그녀에게 복수의 대상이 되는 영식은 지금 자신의 힘 으로는 감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순간 그녀의 복수는 이미 성립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단테리온이 그의 말
한 대로 영식을 두 명으로 만들어 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낭떠러지로 돌진하는 마차에 몸을 실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알고 있어.’
후회할 것을 알고 있었다.
좌절하고, 절망에 빠질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복수와 동시에 그 녀가 사랑하는 영식을 얻을 수 있다 는 것은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예정된 파멸에 몸을 집어 던질 정 도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이 멍청한 선택을 벗어 날 수 있었다.
“읏….”
- 찌릿.
그녀는 그의 제안을 거부할 생각을 하자 머릿속에 희미한 통증이 달리 는 것을 느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세요. 현재로 서는 이게 최선의 길입니다. 제 말 을 믿고, 저를 따르세요.
마치 최면을 걸 듯 나긋나긋한 목
소리.
그녀는 머릿속에 들리는 그 목소리 가 무척이나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루시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단 테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그녀에게 말했다.
“하하. 그보다 루시아 씨의 슈트가 완성되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알았어.”
루시아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 다. 단테리온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루시아씨에게 저희 연구실을 보여드린 적은 이번이 처 음이겠군요.”
“실험실?”
“예. 슈트 제조 및 블랙큐브 제조, 각종 실험이 이뤄지고 있는 장소입 니다.”
“흐응.”
루시아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현 인류의 공적, 괴물들의 창조주 가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에 신경 을 쓰기에는 지금 그녀의 정신 상태 가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자, 이곳입니다.”
단테리온은 굳게 닫힌 문 옆에 손 을 올렸다.
-삐빅.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은 전자음과 함께 두꺼운 문이 열렸다.
단테리온은 연구실 한쪽에 있는 보 랏빛 슈트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자, 이게 바로 루시아 씨의 슈트 입니다. 머리색에 맞춰서 도색을 했 죠. 이 슈트 제조에는 레노스가 신 경을 아주 많이 썼습니다. 만족하실 만한 성능일 겁니다.”
루시아는 그가 가리킨 슈트를 바라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바라볼 수 가 없었다.
“이게, 뭐야.”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보랏빛 슈트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연구실의 중앙, 거대한 유리관 안 에 들어 있는 ‘괴물’이었다.
“끼에에에에에에엑.”
‘녹아내린 살덩어리’라고밖에 표현 할 수 없는 기괴한 생명체.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마물을 보는 것처럼 끔찍하게 생긴 괴생명체였 다.
인간의 시체를 어설프게 합친 뒤 녹여내면 저런 형태를 가진 존재가 되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로테스 크하게 생긴 그 괴물을 바라보며 루 시아는 몸을 떨었다.
“왜, 왜 쟤가 저기에 있는 거야.”
그녀가 몸을 떤 것은 그 괴물의 끔찍한 생김새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 바 로 저 살덩어리의 중앙에 섞여 있었 기 때문이었다.
“아아, 엘리아 말입니까.”
단테리온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평 온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관 쪽으로 걸어갔다.
괴생명체에게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 장님. 아파, 아파, 요….”
괴생명체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분명 루시아가 들었던 엘리아의 목 소리였다.
단테리온은 버튼을 조작해 유리관 을 열더니 살덩어리에 파묻혀 있는 엘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전 대장이 아니라고 말씀드 렸잖아요. 제게 그 칭호는 너무 과 분합니다.”
“아, 아파. 너무 아파요.”
“하하. 통각 기능이 아직 남아 있 는 모양이군요. 좋은 징조입니다.”
단테리온은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연구는 레노스도 성공 가능 성이 희박하다고 말했었거든요. 하지 만 역시 엘리아입니다. 많이 아팠을 텐데 이렇게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네요.”
“너,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예‘?”
단테리온은 영문을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주먹을 움켜쥐며 그에게 소리쳤다.
“네 부하잖아!”
“하하. 엘리아는 부하라기보다는 함께 뜻을 같이 하는 동료죠.”
“지금 그딴 게 중요해?!”
루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단테리온을 바라보았다.
단테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중요하죠. 저는 지금 엘리아를 올 바른 길로 이끌어주기 위해 노력하 고 있는 걸요.”
“이게… 올바른 길이라고?”
“그럼요. 저희의 사명을 위한 가장 최선의 선택이죠.”
단테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아 를 내려다보았다.
살덩이에 뒤섞인 엘리아에게서는 질척한 점액과 고통에 찬 신음이 계 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리아는 절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제, 제발… 죽여, 줘요….”
“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엘리아.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잖아 요?”
“아, 아아…. 왜, 왜 제게 이런 짓 을... ”
“하아. 저도 참 마음이 아픕니다. 간발의 차이로 코어가 박살 나버려 서요. 코어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영 웅들의 시체에 있는 막대한 에너지 를 이용해 엘리아를 융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코어가 남아 있었다면 조금 더 엘 리아를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예전의 힘을 되찾 는 건 어려울 것 같네요.”
“아, 아아아….”
“하지만 걱정 마세요. 엘리아가 약 해졌다고 해서 저는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엘리아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가는 소중 한 동료이니까요.”
그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당신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 다다단테, 리온, 님….”
-찔꺽.
녹아내린 살덩이가 움직였다. 마치 그를 향해 손을 뻗듯 살덩이가 뭉쳐 단테리온을 향했다 엘리아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 사랑, 사랑해요….”
“저도 사랑합니다, 엘리아.”
단테리온은 자신을 향해 뻗어 나오 는 살덩이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제가 이 끌어 들이겠습니다.”
루시아는 아연한 표정으로 그 자리 에서 주저앉았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눈빛으로 단테 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단테리온이 미쳤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