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20화
기계장치의 신(5)
처음 강제 해방을 했을 때, 그는 끔찍한 통증을 느꼈다.
두 번째 강제 해방을 했을 때, 그 는 영구적으로 힘이 감소했다.
그리고 지금이 세 번째.
영식은 이번 해방이 단순한 힘의
감소나, 고통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을 직감했다.
‘모든 보안 레벨을 해방했으니.’
영식은 이번에 들린 기계음을 떠올 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신에 붉은빛을 내뿜고 있는 엘리아가 그 의 지척으로 다가왔다.
“하아아아압!”
‘뭐, 아무것도 못하고 죽는 것보다 는 훨씬 낫겠네.’
영식의 앞에 떠오른 역장이 엘리아 의 공격을 막아냈다.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다가 죽는 것보다는 엘리아를 길동무 삼을 수 라도 있다는 것이 어디인가.
영식은 엘리아와 거리를 벌리면서 루시아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 렸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사랑과 과거에 대한 증오가 뒤섞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쉬움이 하나 남는다면….’
그녀에게 속죄하지 못했다는 것.
자신의 안에서 휘몰아치는 두 개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에 빠진 그녀에 게 위로의 말조차 건네주지 못했다 는 것.
이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블레이드.”
-철컥.
하지만 언제까지고 아쉬움만을 곱 씹을 수는 없는 노릇.
영식은 손등에서 블레이드를 꺼내 어 엘리아와 격돌했다.
-쿠웅! 쿵!
두 사람의 격돌에 주변 대지가 거 칠게 뒤흔들렸다.
땅이 갈라지며 지반이 내려앉았다.
‘여기서 싸우는 건 좀 곤란하겠는걸.’
영식은 처참하게 변해가는 주변 풍 경을 바라보며 살짝 표정을 일그러 뜨렸다.
지금 그와 엘리아가 싸우고 있는 주변에는 아직 많은 소환자들이 남 아 있었다.
“자리를 좀 옮기지.”
영식은 그렇게 말하며 소환자들에 게서 떨어진 곳으로 몸을 이동했다.
엘리아는 거친 목소리로 소리치며 그를 따라왔다.
“하! 나와 싸우면서 주변 잡것들을
신경 쓴다고? 그렇게 여유가 넘쳐나 나 보지?!”
그녀는 굴욕적이라는 듯이 더욱 흉 포하게 그를 쫓아왔다.
영식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잘 알고 있네.”
“뭐?”
“실제로 좀 여유롭거든.”
“이 자식이!”
바이저 너머에 있는 엘리아의 이글 거리는 눈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성을 조금씩 잃어가는 듯
이 주변에 마구잡이 화염을 뿜어냈다.
‘창조주라고 하기보단 몬스터에 가 깝군.’
영식은 이성을 잃고 날뛰는 엘리아 를 바라보며 냉정한 표정으로 그렇 게 생각했다.
사실을 말하면 딱히 여유롭기까지 한 상황은 아니었다.
강제 해방을 통해 억지로 사용 가 능하게 된 ‘역장’이라는 힘을 그가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너지 제어.
역장의 가장 근간이 되는 그 기술 마저 습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에너지 제어의 궁극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역장을 익히다 니, 파이어볼을 쓰고 있었는데 갑자 기 헬파이어가 된 것과 비슷한 상황 이었다.
락테온의 슈트가 아닌, 자신의 슈 트를 입었다고는 해도 결국은 과거 의 모든 기억과 경험들이 돌아온 것 은 아니었다.
지금 그가 사용하는 역장은 정말로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뭐지 이 감각은….’
영식은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달
려드는 엘리아를 바라보며 묘한 감 각을 느꼈다.
그녀는 강했다.
카르가스의 브레스와 비슷할 정도 의 열기를 뿜어내면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영식은 그런 그녀의 모습 이 어째서인지 가소롭게 느껴졌다. 나약하고, 하찮게 느껴졌다.
어딘가 높은 위치에서 그녀를 내려 보는 듯한 기분.
자신의 머릿속 어딘가에 ‘이것 밖 에 안 돼?’라고 실망하는 자신이 있 었다.
“이익…!”
엘리아는 분노에 일그러진 표정으 로 두 팔을 들어올렸다.
- 화르르륵!
양 손바닥에 박혀 있는 붉은 구슬 에서 강렬한 화포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쏘아낸 화포가 역장을 밀어 내며 영식의 슈트를 덮쳤다.
-치익.
-기체 외부에 강한 열에너지를 감지.
-냉각제를 사용하여 열을 차단합 니다.
_치이이으].
영식의 슈트 내부에 냉각제가 돌아 다니며 열을 중화시켰다.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주변에 안개 처럼 자욱하게 깔렸다.
“고속 연산.”
바이저에서 붉은빛이 점멸했다.
슬로우 모션을 사용한 듯이 주변 풍경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엘리아의 움직임이 그의 눈에 횐히 들어왔다.
영식은 엘리아를 향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중력 제어.”
-쿠우우웅!
“커허억!”
엘리아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수만 톤의 무게가 그녀를 짓눌렀다.
엘리아는 전력으로 부스트를 사용 해서 간신히 중력 제어의 범위를 벗 어났다.
“하아, 하아….”
엘리아의 입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 왔다. 그녀는 아연한 표정으로 영식 을 바라보았다.
‘ 괴물.’
과거 그가 배반하기 전,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강력한 힘이었다.
엘리아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녀의 표정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과거의 기억 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녀의 지도자.
신과 같았던 그가 냉담하게 등을 돌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왜….”
엘리아의 입에서 분노에 찬 중얼거
림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도 그녀 에게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대체 왜 배신한 거야….”
절박하기까지 한 엘리아의 목소리 에 영식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믿었는데. 당신을 따랐는 데! 왜! 왜 우리들을 배신한 거냐 고!”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하는 듯한 외침.
발작을 일으키기라도 하듯 격렬하
게 소리치는 그녀의 외침에 영식은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대답해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그들을 배신한 이유는 영식 본인도 알 수 없었으니까.
“네가 배신만 하지 않았더라도…!”
엘리아는 전력으로 부스트를 뿜으 며 영식에게 달려들었다.
- 화르르륵.
그녀의 블레이드의 날이 수십 미터 로 길어졌다.
강렬한 화염으로 만들어진 검이 영 식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쿠우우우우웅!
대지가 뒤흔들렸다. 강렬한 불꽃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냉각제를 뚫고 들어온 열기에 영식 의 피부가 녹아내렸다.
끔찍한 고통이 그의 전신에 퍼져나 갔다.
‘잡았다.’
그런 강렬한 고통 속에서도 영식은 눈을 반짝였다.
큰 공격은 필연적으로 그만큼의 허 점을 노출했다. 지금 엘리아는 완전 히 무방비와 다름이 없는 상태.
영식은 역장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팔로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키기기기기직!
“아아아악!”
역장으로 만들어진 팔에 붙잡힌 그 녀에게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영식은 다른 하나의 팔을 더 만들 어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콰드드득!
진홍색 슈트가 우그러지며 반으로 갈라졌다.
엘리아의 몸이 반 토막으로 찢어지 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엘리아는 몸이 반으로 찢겨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필사적으로 몸을 비 틀었다.
그녀의 슈트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 한 불길이 역장을 밀어내기 위해 격 렬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한 방법.
역장을 역장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막아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완벽하게 제압 당해
버린 상황이라면 더더욱.
‘ 아.’
엘리아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자신을 점점 조이는 죽음을 느꼈다.
시야가 검은색으로 점멸했다.
‘단테리온 님….’
온화한 인상을 가진 청년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단테리온.
영식이 배신한 후 혼란에 빠졌던 그녀를 이끌어준 존재.
과거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 하 나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왜… 대장님은 왜 저희를 배신한 걸까요.”
기억 속의 자신은 처참하게 일그러 진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단테리온은 특유의 따스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글쎄요.”
“단테리온 님은 대장님에게 그 이 유를 듣지 않으셨나요?”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되는
이유는 아니었죠.”
“?무슨 이유였기에 그렇게 말씀하 시는 거죠?”
그녀의 물음에 단테리온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엘리아에게는 말씀드리기 어 렵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말을 한다 고 해도… 엘리아는 이해하지 못하 실 겁니다.”
“전… 대장님이 왜 저희를 배신했 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장님의 그 깊은 뜻을 이해하기에는 제가 아 직 많이 부족하네요.”
단테리온은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 며 엘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는 엘리아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조급해 하지 마세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제가 대장님을 설득하겠습니다. 다시 저희를 이끌 어주도록 만들어드리 겠습니 다.”
“단테리온 님….”
“엘리아, 우리는 주어진 사명을 따 라 착실하게 나아가면 됩니다. 대장 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은 제가 당신 을 이끌어드리겠습니다.”
“아아...”
엘리아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단테 리온을 바라보았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믿고, 따라갈 존재가 있다는 것은 혼란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있어서 한 줄기 등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는 얼굴은 엘리아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단테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상냥하 게 그녀를 껴안았다.
엘리아의 가슴 속에 따듯한 감각이 퍼져나갔다.
그녀는 약에 췬한 듯이 멍한 표정 으로 단테리온을 바라보았다.
“그, 그 말씀은….”
“당신은 평소처럼 쾌활한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읏….”
엘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 랐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단테리온의 말 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에 게 물었다.
“그럼… 대장님이 계시지 않는 동 안은 단테리온 님이 대장님… 이라 는 거죠?”
“아뇨. 제가 감히 대장이라고 불리 다뇨.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과분한 호칭은 제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단테리온은 칼로 내려치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그녀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테리온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 녀를 끌어안은 몸을 조금 더 자신에 게 가까이 끌어당겼다.
엘리아의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몸 을 떨었다.
“저, 저기….”
“그렇게 아쉬운 표정은 짓지 마세 요. 대장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겠 지만... 당신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도 록 제가 잘 이끌어 드리겠습니다.”
U 99
?
달콤한 최면과도 같은 그의 말에 엘 리아는 다시금 활짝 미소를 지었다.
“예. 엘리아 4식. 명령을 받들겠습 니다.”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떠올렸다.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 그녀가 살 아가야 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그의 배반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던 머리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단테리온이라면, 그녀가 가진 궁극 적인 사명을 향해 똑바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테리온 님….’
엘리아는 처음 느끼는 감각에 자신 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신체 부품 중 하나가 고장이 난 것처럼 찌릿한 통 증이 느껴졌다.
생소한 이 감각이 그녀는 싫지 않 았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끌어안은 단테리온 의 등에 손을 올리며 마음속으로 맹 세했다.
그리고….
-콰지지직!
“커헉….”
점멸했던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되 돌아왔다.
역장에 붙잡힌 그녀의 몸이 반으로
찢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