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19화
기계장치의 신(4)
“뭣…‘?!”
은회색 슈트를 본 엘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가늘게 몸을 떨었다.
“어, 어째서……? 지금 ‘그걸’ 사용
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혼란스러운 목소리.
경악과 공포에 뒤섞인 표정.
지금 영식은 과거 그녀를 이끌었던 대장이 아니었다.
모든 힘을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조 차 상실해 버린 패배자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저것’을 입고 있는 것 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은회색 슈트를 보고 전신에 퍼져 나가는 전율을 느꼈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은회색 슈트가 얼마나 규격 외
의 힘을 가지고 있는 물건인지.
저것은 그를 그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만들어준 핵심적인 물 건이었다.
과거 그의 슈트를 무력화시키기 위 해서 얼마나 막대한 희생을 냈는지 를 떠올리면 아찔했다.
간신히 그를 이기고 난 이후 한동 안은 대부분의 힘을 상실해 버려 라 칸 같은 하급 몬스터 이외의 다른 몬스터들은 지배하지도 못했을 정도 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 혼자의 힘으로 저 슈트를 상
대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 다.
아득한 감각이 그녀를 조금씩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엘리아는 거칠게 입술을 깨물며 블 레이드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떨었다는 사실 자체 에 굴욕을 느꼈는지 거칠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흥, 무슨 방법으로 슈트를 소환했 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억지로 소환한 슈트가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
자기위로에 가까운 변명.
그녀는 지금 영식이 보여준 모습처 럼 그가 가진 슈트 또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아.”
바이저에 떠오른 붉은빛이 그녀를 향했다.
흠칫.
엘리아의 몸이 본능적인 공포로 딱 딱하게 굳었다.
“발, 치우라고 했지.”
-쿠우웅!
허공에서 만들어진 무형의 기운이 그녀를 후려쳤다.
-끼기기직!
진홍색 슈트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커헉!”
튕겨져 나간 그녀의 몸이 황무지를 갈랐다.
그녀의 몸이 지나간 자리로 땅에 깊은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팔에라도 후려 맞은 듯한 모습.
영식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티리아 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기형적으로 꺾인 두 팔이 그의 시
야에 들어왔다.
팔 전체의 신경이 완전히 짓이겨진 모습.
제때 치료한다고 하더라도 평생 팔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처였다.
“영식, 씨…?”
“가만히 있어.”
영식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검지에서 주사 바늘 하나가 튀 어나왔다.
그는 그녀의 팔에 조심스럽게 주삿 바늘을 꽂았다.
-치료용 나노머신을 주입합니다.
-신경의 손상 정도를 체크합니다.
-손상 정도, 위험. 즉시 신경 복구 에 들어갑니다. 불필요한 움직임을 배제하기 위해 진통제와 수면 마취 를 사용합니다.
“아.”
티리아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홀러 나왔다. 양팔에서 느껴졌던 끔찍한 고통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항거할 수 없는 졸음 이 밀려들어왔다.
“영식, 씨….”
그녀는 애탄 목소리로 그를 부르다
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영식은 그녀를 바닥에 눕힌 후 가 볍게 손바닥을 펼쳤다.
그녀의 몸 주변으로 무형의 막이 펼쳐졌다.
“크으…!”
영식의 공격을 받고 저 멀리 튕겨 져 나갔던 엘리아가 비틀거리며 자 리에서 일어섰다.
“제길, 제길, 제길!”
그녀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 쳤다.
그녀를 튕겨낸 무형의 기운.
그녀는 그것이야말로 저 슈트가 가 진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모든 것의 핵심이 되는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 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눈앞의 현실을 부정했다.
그가 힘을 되찾았다니,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철컥.
“그럴 리가 없다고!!”
엘리아는 오른팔을 들어올려 영식 을 겨눴다.
슈트의 손바닥에 박힌 진홍색 구슬
이 강렬한 붉은빛을 뿜어냈다.
초고열의 레이저가 그녀의 손바닥 에서 발사되었다.
-쿠구구구구궁!
레이저가 영식에게 닿기 전, 갑작 스럽게 허공에 생겨난 무형의 벽이 레이저를 튕겨냈다.
사방으로 퍼진 레이저가 주변 대지 를 초토화시켰다.
“ 역장?
허무하게 튕겨나간 자신의 레이저 를 바라보며 엘리아는 떨리는 목소 리로 입을 열었다.
역장(方場).
순수한 에너지를 사용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물리력을 가진 무형의 필드를 만들어내는 기술.
허공에 물리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 은 언뜻 듣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실상을 안다면 그 누구 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역장은 초고도의 에너지 제어 기술 이 집약된 힘이었다.
모든 것을 막아내며, 동시에 모든 것을 뚫어냈다.
정해진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상대의 감지 자체에서 벗어 난 공격이 아닌 이상에야 역장을 피 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거인의 주먹이 될 수도, 신 의 창이 될 수도, 짐승의 이빨이 될 수도 있었다.
역장을 만들어내는 존재 이외에 그 형체의 한계를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상상하는 모든 형태를 만들 수 있 고, 형상에 구애받지 않는 모든 기 적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역장을 상대하는 방법은 같은 역장
을 사용하거나, 역장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 장기 전으로 끌고 가는 방법 이외에는 없 었다.
말 그대로 신의 힘.
인류의 공포로 군림하는 창조주들 사이에서도 영식과 단테리온 단 둘 만이 사용 가능한 기술이었다.
“이익!”
엘리아는 전신을 가늘게 떨며 영식 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눈앞에 드 리워진 현실을 더 이상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과거 그를 바라볼 때마다 느꼈던
숨 막히는 압박감이 다시금 그녀를 조여 왔다.
‘도망쳐야 해.’
미친 듯이 분하지만, 다른 선택지 가 없었다.
역장을 사용하지 못하는 그녀가 지 금의 영식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슈우우우우!
엘리아의 등 뒤로 강렬한 제트 엔 진이 뿜어져 나왔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 리고 단테리온에게 이 사실을 알려 야 했다.
“어딜 가려고.”
영식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수십 발의 미사일을 쏘아낼 필요 도, 수백 발의 총탄을 쏘아낼 필요 도 없었다.
허공에 만들어진 거대한 손이 도망 치려는 엘리아의 두 다리를 붙잡았 다.
-쿠웅! 쿠웅! 쿵!
“꺄아아아아악!”
그녀의 두 다리를 붙잡은 무형의 손은 엘리아의 몸을 패대기쳤다.
굉음과 함께 그녀가 입고 있는 진 홍색 슈트가 일그러졌다.
단순히 땅에 그녀를 내려찍은 것은 아니 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슈트의 강도는 강철을 아득히 뛰어넘는 물건.
설사 수백 미터 깊이로 땅에 처박 힌다고 하여도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영식 또한 그런 슈트의 단단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역장을 깔아 그 위로 엘리아를 내려찍었다.
“쿨럭! 크으… 너어!”
엘리아는 거친 눈빛으로 그를 노려 보았다.
“이 배신자 자식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 는 거칠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에게도 그를 믿고 따르던 시절 이 있었다.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주어진 사 명을 완수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믿음의 대가로 돌아온 것은 철저한 배신이었다.
그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저버렸다. 존재 이유를 부정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들로 자신들 을 기만하려고 했다.
그에 대한 믿음이 컸던 만큼 그녀 가 느끼는 배신감 또한 컸다.
그녀는 분노에 젖은 눈빛을 그에게 향했다.
‘지금 상태로는 도망칠 수도 없어.’
어설프게 도망치려고 했다가는 방 금 전과 같이 역장에 허무하게 붙들 릴 뿐이었다.
‘역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그녀도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버 히트.”
-치이이이익!
그녀가 입고 있는 진홍색 슈트에서 폭발적인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슈트의 표면이 붉은색 빛으로 달아 올랐다.
초고열의 에너지가 주변에 휘몰아 쳤다.
“좋아, 네가 그렇게도 싸우길 원한 다면.”
엘리아는 흉악한 미소를 입가에 지 었다.
“싸워주도록 하지.”
-콰아아아앙!
아찔할 정도의 열기가 주변을 불태 웠다.
영식은 역장을 장막처럼 넓게 펼쳐 그녀가 뿜어내는 열기가 다른 소환 자들을 덮치지 않도록 만들었다.
≪ O ”
X.
영식은 그녀가 내뿜는 열기들을 모 두 막아내지 못하고 역장이 움츠러 드는 감각을 느꼈다.
에너지 분해 기술이 담긴 슈트를 무력화시킬 때와 같은 원리.
역장이 시간당 분해할 수 있는 총량 보다 많은 양의 에너지가 그녀의 슈 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오버히트라면.’
이전 락테온의 코어를 해석하면서 알아낸 슈트의 기능.
영식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강제 해방과 비슷한 효과의 기능이었다.
단시간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뿜 지만, 그 대가로 슈트의 착용자를 오버로드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 ‘오버 히트’였다.
‘저쪽도 여유가 없다는 말이지.’
영식의 눈이 반짝였다.
오버로드의 리스크는 엄청났다.
미칠 듯한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신 체 기능이 영구적으로 하락한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디메리트였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 버히트를 사용했다는 것은 엘리아 쪽 에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라던 바지.”
영식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엘리아가 조급해 한다는 것은 그에 게 있어서 좋은 소식이었다.
‘어차피 나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테니까.’
강제 해방에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냥 여유롭지만은 않다는 정도는 지난 경험들로 충분 히 알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상대가 오히려 지레 겁 을 먹고 전력으로 맞상대를 해준다 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있어서 반길 만한 소식이었다.
‘도망치게 둬서는 안 돼.’
창조주 중 하나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영식은 자신의 몸을 덮은 은회색 슈트를 내려다보았다.
강제 해방을 통해 많은 사실을 알 게 되었다.
그의 왼손에 새겨져 있던 문양의 의미부터, 왜 그곳에 ‘영식’이라는 단어가 표시되어 있었는지까지.
“설마 그게 그런 의미인 줄은 상상 도 못했지만 말이야.”
영식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떠올렸다.
0식.
모델 넘버를 뜻하는 그 단어를 자
신의 이름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뭔가 우습게 느껴졌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이름 따위 어떻게 되도 상관없었 다.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영식이건, 대장이건, 데우스이건 그가 변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죽어!”
-화르르르륵!
엘리아의 슈트에서 강렬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티리아와 길드
원들을 돌아보았다. 혼란스러운 표 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모습도 보였다.
영식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역장 을 펼쳤다.
강제 해방을 한 순간, 그는 본능적 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이번 강제 해방의 대가는 그의 목 숨이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