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18화
기계장치의 신(3)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없었다.
공기 저항이 존재하지 않는 라이트 세이버는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영 식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영식은 바닥에 쓰러진 채 멍한 표 정으로 루시아를 올려다보았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아니, 피하고 싶지 않은 공격이었다.
영식은 증오와 슬픔으로 일그러진 루시아를 볼 뿐이었다.
눈을 감았다고 세상이 사라지는 것 이 아니듯, 과거를 잊었다고 해서 과 거에 한 짓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버렸다.
‘너에게라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면, 차라리 그녀의 손에 죽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대한 사죄가 될 수 있다면.
짧은 침묵이 흘렀다.
루시아의 검은 영식의 목 앞에 바 로 멈춰져 있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손을 떨며 거칠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차마 영식의 목을 베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영식은 고개를 들어 루시아를 올려 다보았다.
그녀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영 식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해.”
“닥쳐!”
루시아는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영식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적어도 그 말만은 하고 싶었어.”
“입 닥치라고 했잖아!”
“루시아.”
영식은 천천히 손을 들어 루시아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뭐가… 뭐가 괜찮다는 거야.”
“이 걸로 조금이라도 네 기분이 풀 린다면, 그래도 괜찮아.”
“마지막 부탁이 있어.”
“?뭐야.”
“내 목을 벤 후에,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쳐 줘.”
영식은 살짝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엘리아의 공격에 휘말려 쓰러져 있 는 길드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 영식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려고 하 고 있었다.
하지만 탈진에 가까운 상태에서 엘 리아의 공격을 받은 길드원들이 제대 로 몸을 가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과거에 널 그렇게 만든 건 나야. 길드원들은 상관없잖아.”
“시끄러! 너도 아무 상관도 없는 내 부하들을 죽게 만들었잖아!”
그녀는 발작을 일으키듯 소리쳤다.
리베리에라는 격식 높은 무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친구라고 부를 만한 존재도 없이 훈련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뼛속까지 무인이었던 그녀의 아버 지 또한 그녀에게 사적으로 사랑을 표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그녀가 타고난 검의 재능을 개화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반복시킬 뿐이었다.
외로움이라는 감각을 느낄 새도 없 이 반복되는 훈련.
그것은 그녀가 8영웅이라는 영광스 러운 자리에 올라선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처음으로 생긴 ‘마 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가 바로 그녀의 부하들이었다.
전우라는 이름 아래 뭉친 자신의 부하들은 그녀와 함께 웃고 떠들며, 미래를 얘기하는 소중한 동료였다.
그런 그들이 모두 죽었다.
그것도 그녀의 손에 의해서.
그 모든 일의 원흉은 바로 눈앞에 있는 영식이었다.
루시아의 가슴속에 다시 한번 증오 의 불길이 타올랐다.
“네게도 내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주겠어. 네게도…! 내가 느꼈던 그 지옥을 경험하게 해 주겠다고!”
루시아는 그렇게 소리치며 영식에 게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멀찍이 쓰러져 있는 티리아 를 향해 다가갔다.
-꽈악.
“꺄악!”
“이리 따라와.”
황금을 녹여 만들어 낸 것 같은 금발을 거칠게 손에 쥔 루시아는 난 폭하게 티리아를 잡아끌었다.
티리아는 영식의 앞으로 질질 끌려 왔다.
“영식 씨….”
티리아는 꺼질 듯이 희미한 목소리 로 영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루시아는 영식에게 뻗어지는 그녀 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라이트 세 이버를 들어올렸다.
“루시아...!”
영식은 거칠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루시아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사지가 움직이지 않는 그는 비참하 게 몸을 꿈틀거리며 어기적어기적 기어서 그녀에게 접근했다.
“너도 느껴봐. 내가 어떤 고통을 느꼈는지!”
루시아는 증오로 일그러진 목소리 로 검을 휘둘렀다.
티리아의 새하얀 목에 검이 닿기 직전, 지금까지 살바토르 길드와 함 께 지내왔던 지난 기억이 그녀의 머 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길드라는 테두리 안에 모인 것이 아닌, 차라리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 이 어울릴 정도로 따듯했던 공간.
만약 이 검을 계속 휘두르게 된다면.
다시는 그 공간으로 되돌아가지 못
할 것이다.
그녀의 표정에 망설임이 어렸다.
루시아는 거칠게 입술을 깨물었다.
티리아의 목 앞에서 멈춘 검 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영식을 내려다 보았다.
절박한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손을 내뻗고 있는 영식의 모습.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가슴 속이 찢겨나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루시아의 머릿속에서 과거 영식의 모습과 지금 영식의 모습이 난잡하 게 뒤섞였다.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괴리감이 그 녀의 전신을 짓눌렀다.
영식의 앞에서 티리아를 죽이는 것 도, 그렇다고 검을 완전히 거두는 것도 아닌 애매한 대치 상황이 이어 졌다.
“하아? 아주 못 봐주겠구만.”
그 대치 상황의 종막을 고한 것은 엘리아의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짜증 나게 괜히 뜸들이지 말고 빨 랑빨랑 그어버려.”
“?시끄러워.”
루시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엘리 아를 노려보았다.
엘리아는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흘 렸다.
“키키킥. 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 구나. 변한 게 없어.”
“뭐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머저리처럼 망설 일 셈인데? 복수하고 싶잖아? 그럼 빨랑 그년을 죽여 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아아, 답답해서 더 이상 못 봐주 겠네.”
-철컥.
엘리아의 손등에서 붉은색 블레이 드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루시아에 게 머리채를 잡힌 티리아를 향해 블 레이드를 휘둘렀다.
-까앙!
“무슨, 짓이야 너…!”
엘리아의 공격을 막은 것은 다름 아닌 루시아. 그녀는 도끼눈을 뜨며 엘리아를 노려보았다.
“저 악마에게 복수를 하는 건 나
야…!”
그녀는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그녀 는 과연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진짜 ‘복수’인지 알 수 없었다.
“흐응.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것 같은데.”
엘리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슈우
그녀의 다리에서 부스트의 빛이 뿜 어져 나오며 루시아의 종아리를 걷 어 찼다.
“크윽….”
루시아의 몸이 반 바퀴를 빙그르르 돌며 바닥에 쓰러졌다. 엘리아는 바 닥에 쓰러진 그녀의 배를 거칠게 걷 어찼다.
?퍼억!
“커 헉!”
“난 네가 복수를 하건 말건 아무 상관없거든? 그러니까 괜히 방해만 될 거면 그냥 찌그러져 있어.”
엘리아는 낄낄 웃음을 터뜨리며 티 리아를 향해 걸어갔다.
티리아의 머리채를 잡은 그녀는 영
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때, 대장님? 지금 무슨 기분이 야?”
“그 손, 놔….”
영식은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분노 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엘리아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그 눈빛이야! 하 아…. 네가 배신했을 때부터 이런 날이 오길 쭉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녀는 티리아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끌어 그녀의 머리를 땅에 내려 찍었다.
-쿠웅
“꺄아아아악!”
“티 리아!”
흙바닥에 머리를 내려찍힌 티리아 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영식은 덜덜 떨리는 손을 그녀를 향해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티리아에게 닿기 전에, 티리아의 머리 위에 엘리아의 발이 올려졌다.
“아윽, 아악!”
티리아는 머리가 짓눌려지는 고통 에 비명을 내질렀다.
“흐응. 어떻게 할까? 이대로 머리 를 터트려 버릴까? 아니면 좀 더 괴롭혀 줄까? 응?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대장님?”
“이, 개 같은, 년이…!”
영식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 왔다. 그는 몸을 비틀거리며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경고.
-바이러스로 인하여 정상적인 움 직임이 불가합니다.
-바이러스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권고 드립니다.
“닥쳐….”
영식은 귓가에 울리는 시끄러운 기 계음을 무시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 로 왼손을 들어올렸다.
수많은 적을 도륙 냈던 그의 블레 이드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꺄하하하하! 아주 영웅 납셨네! 그렇게 화가 났어?”
엘리아는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폭 소를 터뜨렸다.
“자, 이러면 어때?”
-우드드드득!
“아아아아악!”
엘리아는 바닥에 쓰러진 티리아의 팔꿈치를 거칠게 짓밟았다.
뼈가 박살 나는 섬뜩한 소리와 함 께 티리아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만...”
영식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전력을 다해 블레이드를 내질 렀다.
하지만 지금 그의 공격은 어린아이 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릿느릿하 기 그지없었다.
?퍼억!
“커 헉!”
엘리아는 영식의 배를 거칠게 걷어 찼다.
영식이 뒤로 튕겨져 나가며 바닥을 굴렀다.
“아주 꼴사납네. 예전 당신이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야. 그렇 게 이년이 소중해?”
엘리아는 티리아의 반대편 팔로 발 을 움직였다. 그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다행이야. 당신이 이년을 소중하 게 생각해 줘서.”
- 우드드드드득!
“꺄아아아아아악!”
“꺄하하하! 비명소리가 꽤나 깜찍 한데? 그렇게 생각 안 해? 사랑하 는 우리 대장님?”
티리아의 입에서 다시금 비명이 터 져 나왔다.
엘리아는 짓밟은 발을 거칠게 비틀 었다. 뼈가 우그러진 티리아의 팔이 기이한 각도로 비틀렸다.
티리아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영식은 거칠게 입술을 깨물며 고통
에 몸을 비트는 티리아의 모습을 바 라보았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이 기이한 각도로 비 틀어진 상황에서도 영식을 향해 애 써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영식만 알아볼 수 있도록 입모양만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도망가요, 영식 씨.
그녀의 입모양을 본 영식은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도 망치라는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허탈한 웃음까지 절도 나올 정도였다.
무력감.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 했던 미칠 듯한 무력감이 그를 짓눌 렀다.
“으, 아아.”
억지로 몸을 움직인 탓일까.
영식의 몸에 끔찍한 고통이 퍼져 나갔다. 시끄러운 경고음이 그의 귓 가에 울려 퍼졌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분노가 끓어올 랐다.
시야가 일그러지는 듯한 감각.
머리가 뜨거워졌다. 강렬한 열기에 머리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 끝없는 분노 속에서 떠오른 것 은 이브의 모습이었다.
밤비의 시체를 끌어안으며 울부짖 는 이브.
그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브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노이즈가 섞인 목소리가 그의 입에 서 흘러나왔다.
-아직도 락테온이 옳다고 생각하 시나요?
“아아...”
영식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머리가 너무나도 뜨거웠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와 누군가를 끌어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치익.
망가진 라디오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은, 익숙한 잡음.
-무리한 신체 활동으로 인하여 바 이러스 치료에 실패하였습니다.
-긴급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강제
로 보안 레벨을 해방시킵니다. 오버 로드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일시적, 혹은 영구적인 성능의 감소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강제로 보안레벨을 해방시키겠습 니까?
영식은 비틀거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에. 아직도 포기 안 한 거야?”
“?치워.”
“응? 뭐라고?”
“발, 치우라고.”
영식은 거칠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철컥.
그의 몸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제로 해방할 수 있는 모든 보 안 레벨을 해방합니다.
-신체에 퍼진 바이러스를 치료 중 입니다.
-치료 진행률 57%
-84%
-바이러스의 치료가 완료되었습니 다. 모든 신체 기능이 정상적으로 복구됩니다.
“하아….”
전율스러운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압도적 인 고양감.
영식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 었’는지 깨달았다.
-우우우우웅!
그의 왼쪽 손등에 새겨진 바코드 문양이 빛을 뿜어냈다.
그의 전신에 바코드 문양이 퍼져 나가며 형상을 만들어냈다.
은회색 슈트가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치익.
-다용도 기능성 전투 슈트 데우스 엑스 마키나 0식.
-가동합니다.
슈트의 바이저에 붉은빛이 떠올랐다.
폭발적인 증기가 주변으로 뻗어나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