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16화
기계장치의 신(1)
“ 아.”
땅으로 추락하고 있는 영식의 입에 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왼쪽만 남은 팔로 허망하게 허공을 움켜쥐며 빠른 속도로 추락 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허망하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끝나는 건가.
주마등조차 스쳐 지나가지 않은 허 무한 최후.
영식은 자기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 을 홀렸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이 최후가 더 없이 절망스럽게 느껴 졌다.
“아도니스 디 리베리에!”
영식의 눈빛이 완전히 절망으로 물 들었을 때, 루시아의 외침이 영식의 귓가에 들려왔다.
-콰지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카르가스의 머 리가 완전히 터져나갔다. 그의 입에 서 뿜어지려고 했던 붉은빛도 함께 사그라졌다.
“주인님!!”
카르가스의 머리를 터뜨린 루시아 는 재빨리 몸을 돌려 땅으로 추락하 고 있는 영식을 재빨리 안아들었다.
브레스의 영향으로 주변 땅 전체가 녹아 용암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으신가요, 주인님?!”
아….
그녀의 다급한 질문에 영식은 다른 의미의 헛웃음을 토해냈다.
절망에 빠졌던 것이 한 순간이었 듯, 절망에서 깨어나는 것 또한 찰 나에 불과했다.
영식은 루시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고마워.”
“후훗. 고마울 게 뭐가 있어요. 주 인님이 브레스를 끊어주시지 않았다 면 저도 공격할 틈을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도 고마워.”
영식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
아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난 그녀는 구원 그 자체였 다.
“엇?! 혹시 이거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타이밍인가요? 그렇죠? 그런 거죠?”
루시아는 호들갑을 떨며 고개를 두 리번거리다가 영식을 향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자, 그럼 고마운 루시아를 향해 감 사의 키스를 선물해 주세… 으읍!”
절망의 늪에서 구해줬는데 키스 정 도가 뭐가 대수랴.
영식은 우쭐해하는 그녀의 목을 잡 아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짧지만 깊은 키스를 나눈 후, 루시 아는 약에 취한 듯이 몽롱한 표정으 로 영식을 바라보았다.
“하아. 주인님…. 저 더 이상 참기 힘들어요. 어서….”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지금 여기서 는 아니지.”
“칫
루시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토라 진 듯이 고개를 돌렸다.
“영식 군!”
“영식 씨!”
카르가스가 완전히 쓰러지자 그의 목에 아슬아슬하게 달라붙어 있던 길드원들이 영식을 향해 달려왔다.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다 친 길드원은 없나요?”
“예. 모두 무사해요. 화상이 심한 분이 몇 계시기는 한데 목숨에는 지 장이 없어요.”
티리아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다행이네.”
영식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에게 알렉이 다가왔다.
“자네 말대로 무시무시한 괴물이었군.”
“알렉 장군님도 무사하셨군요.”
“그럼. 지휘자가 먼저 죽어서는 안 될 일이지.”
“몬스터 부대의 본대 쪽은 어떻게 되었나요?”
“브레스 탓에 주변 마력이 일그러 졌는지 연락이 안 되고 있네. 하지만 그쪽도 슬슬 정리가 되었을 걸세.”
5만에 달하는 병력.
거기에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나름 정예병만 추린 것이 바로 연합군의 본대였다.
카르가스처럼 규격 외 괴물을 상대 로는 별 힘을 못 쓸지라도 다른 몬 스터를 상대로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럼 이제….”
“창조주들이 있는 북방은 몰라도… 적어도 중앙 지역에서 가장 위험한 괴물은 처치한 셈이지.”
알렉의 말에 영식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카르가스의 시 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상대하지 못할 것 같았던
괴물이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첫 단추는 잘 채웠어.’
북방 정벌.
그 거대하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계획의 첫 단추는 성공적으로 채워 졌다.
영식은 탈진한 듯 카르가스의 몸 위에 널브러져 있는 길드원들을 향 해 걸어갔다.
‘다행히 아무도 죽지 않았고.’
물론 이번 카르가스와의 전투에서 죽은 소환자는 백 명이 넘었다.
하지만 그중 영식이 가족처럼 생각
하는 살바토르 길드원은 속해 있지 않았다.
영식은 희생자가 생겼음에 씁쓸해 하면서도 그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 리며 안도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닌 것을, 아직 넘 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 은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길드원 모두가 살아 남아줬다는 자 체가 너무 감격스러웠다.
‘정말 다행이야.’
영식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미 소를 지었다.
“허허. 아까까지만 해도 꼼짝 없이
불타 죽는 줄 알았는데… 영식이 자 네에게 또 목숨을 빚지는구만.”
“길수 아저씨도 최선을 다해주셨잖 아요.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었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군.”
“카르가스를 잡았다고 해서 아직 끝이 아닙니다. 부상자들에게 신속 히 응급처치를 하고 본대와 합류해 야 해요.”
“알겠네.”
길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였다.
영식을 바라보고 있던 채린이 무언 가 묘한 위화감을 깨달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아, 영식 오빠.”
“응?”
“영식 오빠 오른팔, 어디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영식은 카르가스를 향해 쏘아냈던
오른팔을 아직 회수조차 하지 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며 피식 을 흘렸다. 않았 웃음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해도 중 하나를 잊어버리다니.’ 사지 영식은 쓴웃음을 지으며 팔꿈치만 남은 오른팔을 살짝 들어올렸다.
“?웅‘?”
머릿속으로 오른팔의 회수를 명령 했음에도 불구하고 떨어져나간 자신 의 오른팔은 돌아오지 않았다.
로켓 펀치의 레벨이 상승한 이후로 는 한 번도 생긴 적 없던 일.
‘바이러스 때문에 그런가?’
영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이 직 접 오른팔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혹시 찾고 있는 게 이거야?”
그때, 그의 귓가에 여인의 목소리
가 들렸다. 마치 사나운 짐승이 으 르렁거리는 것 같은 흉포함이 느껴 지는 목소리였다.
영식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 개를 돌렸다.
진홍색 머리칼을 한 여인은 브레스 의 열기로 녹아내린 땅을 아무렇지 도 않다는 듯이 평온한 발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영식이 방금까지 찾 고 있었던 자신의 오른팔이 들려 있 었다.
“너, 는….”
“오랜만이야. 빌어먹을 배신자야.”
엘리 아.
메모리 큐브의 영상 속에서 익히 봐왔던, 붉은 형상의 창조주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영식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 녀를 바라보았다.
“전부 보고 있었던 건가.”
“그래. 처음부터 저 용의 눈을 통 해서 지켜보고 있었지. 중간에 내가 준 선물도 받았잖아?”
“.?지금에 와서야 나타난 이유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 받았으니까.”
“명령 받았다고? 누구에게?”
“그야 당신이 매몰차게 버린 단테 리온 님이시지. 너… 네가 왜 배신 했는지도 모른다며?”
신랄한 그녀의 말에 영식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영식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빠르게 주변 상황을 살폈다.
‘최악이야.’
아까 카르가스를 상대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드래곤 슬레이어 부대의 소환자들 은 대부분 카르가스와의 격전으로 탈진한 상태였고, 본대와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어쩌면 카르가스 이 상의 힘을 가지고 있을 엘리아와 싸 우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 해.’
“그래. 내가 왜 배신을 했는지, 과 거의 내가 너희들에게 뭔 짓을 했는 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해.”
“모른다고 하면 아, 그렇습니까 하 면서 끝날 일이 아니잖아? 네가 지 은 죗값은 모두 토해내야지.”
“?단테리온과는 상당히 다른 의견 인 것 같군.”
“흥. 내가 단테리온 님처럼 아직도 널 못 잊어 오매불망 돌아오기를 기 대한다고 생각하지 마. 난 지금 이 순간에도 널 찢어 죽여 버리고 싶으 니까.”
“그렇다면 왜 공격하지 않는 거지? 지금의 난 널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영식은 침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 라보았다.
굳이 허세를 떨거나 감추려고 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엘리아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분이 널 하도 애타게 생각하셔 서 말이야.”
엘리아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친절하시게도 너를 설득해 달라고 말씀하셨거든.”
그 말과 함께 엘리아는 영식을 향 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앞을 막아선 것은 서 강준이었다.
“엘, 리아.”
그는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 를 노려보았다.
과거, 그녀에게 모든 동료들이 몰 살당했을 때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 에 떠올랐다.
“으응? 아, 전에 도망쳤던 그놈인 가? 용케 살아 있었네?”
“네년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목에서 수백 가닥의 와이어 가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한 와이어들
이 그녀를 향해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이 꿈틀거렸다.
“서강준 씨, 진정하세요. 지금 움직 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지금 서강준은 카르가스와의 싸움 에서 너무 많은 힘을 쏟아 탈진에 가까운 상태다.
엘리아를 상대하는 것은 도저히 불 가능한 일이었다.
‘도망쳐야 해.’
영식은 거칠게 표정을 일그러뜨리 며 엘리아를 노려보았다.
피해가 얼마가 생기든 도망치는 것 이외에 답이 없었다. 아니, 최소한 본대와 합류한 후에 그녀를 상대해 야 했다.
“낄낄. 뭐야? 도망치려고? 흐응, 그때처럼 또?”
엘리아는 서강준에게 도발적인 눈 빛을 보내며 물었다. 서강준의 표정 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네년!”
서강준은 와이어의 칼날을 만들어 엘리아에게 휘둘렀다.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왼손을 들어올렸다.
-철컥! 철컥!
그녀의 왼손 손등에 새겨진 문양이 빛을 뿜더니 순식간에 진홍색 슈트 가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위험…!”
-뻐억!
“커 헉!”
와이어의 칼날을 정면으로 받아내 며 돌진한 엘리아의 차지 어택에 서 강준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미안하지만 넌 찌그러져 있어. 지 금은 너랑 놀아줄 상황이 아니거 든 ”
엘리아는 도도한 목소리로 말하며
영식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거기까지. 더 이상 다가오면 가 만두지 않겠어.”
“응? 아… 너 설마 루시아야?”
“하, 하하하하하! 다른 사람도 아 니고 네가 저 새끼를 지킨다고? 이 거 걸작이네!”
엘리아는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 며 루시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좋아. 너로 하자고.”
“?무슨 소리야?”
“아, 걱정하지 마. 네게는 아주 좋
은 일이니까 말이야.”
그녀는 낄낄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네게 진실을 알려주지.”
-쿠우우웅!
엘리아가 거칠게 발을 박차며 루시 아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