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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머신-206화 (206/284)

레벨업 머신 206화

서부에 부는 피바람(3)

적귀 권오진의 죽음.

그 소문은 순식간에 서부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적귀만의 일이 아니었다.

적귀를 비롯한 서부의 강자들이 차 례차례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동, 남부 연합이 이뤄낸 성과였다.

영식과 루시아, 서강준, 알렉으로 나눠진 연합 조원들은 동시다발적으 로 서부의 강자들을 습격했다.

사실상 지역 간에 대규모 전쟁이 일 어났다고 표현해도 좋은 상황이었다.

아르난 제국처럼 한 지역의 전력이 정규군으로서 모여 있는 곳과 달리 서부는 소수의 강자에 의해 전력이 뿔뿔이 나눠져 있었다.

서부 세력 간의 통신 수단은커녕 서로 적대하기 바쁜 그들이 노도처 럼 밀려오는 연합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특히 영식과 루시아, 서강준과 같 은 강자는 ‘초인의 땅’이라고 불리는 서부에서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를 찾을 수가 없는 경이로운 강자였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는 서부의 강자 들이 손을 잡고 세력을 합친 뒤 강 력한 군대를 만들어 상대해야 하는 데 지금 서부에 상황에서 그런 것이 가능할 리도 없었다.

작전이 시작된 지 2주일.

서부 전체에서 불어오는 피바람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영식 씨, 오늘도 세 개의 도시에 서 항복 선언을 했다네요.”

수정 구슬을 통해 다른 조들과 작 전 진행 상황에 대해서 정보를 주고 받던 박시아가 영식에게 말했다.

영식은 살짝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거의 다 넘어왔군요.”

“예. 굉장히 강압적이긴 했지만 영 식 씨가 말한 것처럼 대륙 연합의 완성이 가까워진 거죠.”

박시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

답했다.

옆 나무 위에 누워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강하린이 표정을 일그 러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다 죽 이고 다녀도 괜찮은 거야? 이렇게 되면 동맹을 하는 의미가 없잖아.”

“뭐, 최상위급 소환자들을 전력으 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의미가 없는 정도는 아니지.”

강하린의 말에 영식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적귀 권오진 과 같은 최상위급 랭커를 연합에 끌 어들이지 않고 죽여 버린 것은 아쉬 운 일이었다.

시간이 많다면 그들을 하나하나 회 유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인류에게는 그리 시간 이 많지 않았다.

강력한 기계 몬스터들을 만드는 공 장이 언제 다시 가동될지 알 수 없 었다. 아니, 애초에 공장이 하나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단테리온이 이후 창세교와 같은 세 력을 다시 만들 가능성도 있었다.

‘창조주들에게 더 이상 시간을 주 어서는 안 돼.’

지금 서부의 세력을 천천히 회유하

겠다는 것은 홍수로 물이 차오르는 방 안에서 느긋하게 티타임을 갖자 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창조주들은 착실하게 인류의 숨통 을 조여오고 있었다.

느긋하게 있을 시간은 없다.

“그리고 애초에 적귀 권오진 같은 인간은 회유가 불가능한 인간이야.”

“뭐…… 그렇긴 하지만.”

적귀 권오진만이 아니었다.

한 세력의 수장으로 있는 대부분의 서부 소환자들이 회유될 수 있을 만 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가 노리는 건 적귀가 아니라 흑귀 같은 놈들이지.”

“흑귀라면 우리랑 싸웠던 그 검은 놈들?”

“그래, 기존 세력에 지배받고 있었 던 부하들.”

서부에서는 길드, 국가와 달리 충 성심이라는 것이 없었다.

강자에 대한 경외, 혹은 두려움으로 인해 그를 따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권오진과 같은 ‘지배층’의 입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배를 당 하고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회유를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서부 랭커들이 하나하나 박살 났 다는 소문이 더욱 퍼진다면 애매한 위치의 소환자들도 연합으로 모여들 기 시작할 거야.”

“……이제 북방 정벌이 시작되기까 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네.”

강하린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북방 정벌.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이 세계에 소환된 소환자들에게 있 어서 궁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목표 였다.

물론, 이 세계에 적응하여 이미 지 구에 대한 그리움을 잊은 소환자도 있었다.

그중에는 오히려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하린이 그런 부류였다.

그녀는 굳이 지구에 남기고 온 것 도, 딱히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이 세계에서 그녀는 지구에서는 상 상할 수 없는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북방 정 벌에 대한 필요성이 없다고는 생각하 지 않았다. 아니, 그건 더 이상 ‘필요 성’이라는 문제를 넘어서 있었다.

말 그래도 살기 위해서 먼저 죽여 야 한다는 수준이었으니까.

“흐음. 태황아.”

“예, 하린 씨.”

“너 지구에서는 꽤 잘나가는 운동 선수였지?”

“뭐, 그랬죠.”

강하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천태 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구에 서 천재 검도 선수로 세계 대회를 휩쓸었었다.

“히히. 그러면 이번 전쟁이 끝나고 지구에 가면 나 색시로 받아줄 거이T

“?…”그건.”

“이미 놀고먹을 돈은 충분히 벌었 을 거 아냐? 이 누나랑 같이 여생 을 보내는 건 어때?”

강하린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천 태황에게 말했다.

천태황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시 선을 피했다.

“……그때가 오면 생각해 보죠.”

“뭐? 나랑 같이 싫다는 거야?”

강하린은 뿔난 표정으로 천태황에 게 달려들었다.

영식은 소란을 피우고 있는 강하린 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장난스러운 미소 속에 숨어 있는 짙은 불안감이 느껴졌다.

괄괄한 성격의 그녀 또한 불안감을 잊기 위해서 억지로 소란을 떨고 있 는 것이다.

“ 후우?

영식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북방 정벌. 막연하게 생각해 오던 단어가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 다.

‘그곳에 가면 알 수 있으려나.’

영식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 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억지로 잊고 있었던 의문들이 다시 금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잊어버린 과거에 대한 것.

자신이 그들을 배신했던 이유.

단테리온과 락테온과의 관계.

모든 의문들이 영식의 머릿속에 복 잡하게 뒤엉켰다.

‘알 수 있겠지.’

영식은 굳게 주먹을 쥐었다.

북방으로 간다면, 모든 것이 시작 된 그 장소로 간다면 그 의문들에 대한 답이 나올 것이라는 희미한 예 감이 들었다.

이후, 서부에서 부는 피바람이 모 두 잠잠해진 것은 몇 주가 더 흐른 뒤였다.

* * *

“주一 인- 니임-”

아르난 제국의 황성.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만에 돌아온 영식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루시아의 목소리 였다.

영식은 자신을 향해 말 그대로 잔상 이 보일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달려 오는 루시아를 향해 고개들 돌렸다.

-후우우웅!

음속을 돌파한 그녀의 속도에 주변 에 소닉붐이 휘몰아쳤다.

“하아, 하아. 주인님, 주인님. 한 달이나 주인님을 못 보다니… 지옥 같은 시간이었어요.”

그녀는 흥분에 찬 표정으로 영식에 게 달라붙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녀 뒤로 길드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길드원들은 격전을 치르고 온 것처 럼 초췌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많이 지쳐 보이시네요.”

영식은 점점 눈빛이 병들기(?) 시 작한 루시아를 살짝 몸에서 떼어 놓 으며 길드원들에게 걸어갔다.

영식은 유독 지쳐 보이는 유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투가 그렇게 힘들었어? 조 자체 는 루시아가 있는 조가 가장 전력이 강했는데.”

작전 자체가 소주 정예로 진행되었 던 것을 생각하면 애초에 소수 정예 가 모인 살바토르 길드가 있는 루시 아의 조가 가장 전력이 강했다.

“아니, 전투는 별로 힘들지 않았는 데….”

유나는 초췌한 표정으로 영식의 팔 에 달라붙어 있는 루시아를 바라보 았다.

“루시아가 정말 쉬지 않고 칭얼거 려서 말이야.”

“하루 종일 너랑 만나고 싶다는 말 만 10시간 이상씩 쏟아내는데… 정 신병이 걸릴 뻔했어.”

“.미안 ”

영식은 초췌해진 길드원들에게 사 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엄밀히 말해서 그가 사과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왠지 말이라도 그렇 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아, 하아. 킁킁. 주, 주인님. 많 이 지치셨죠? 어서 침실로 가죠. 지 금 당장!”

루시아는 굶주린 짐승과도 같은 눈 빛으로 영식의 팔을 당겼다.

영식은 훙분에 차 있는 그녀를 보 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언제까지고 성 앞에서 소란을 일으 킬 수는 없는 노릇.

영식은 이번 서부 원정에 대한 회 의를 하기 위해 제이슨의 집무실로 향했다.

-끼익.

“한 달 만이군. 작전은 어떻게 됐 나?”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기존 서 부의 지배자들을 따르는 세력을 대 부분 흡수했어요.”

“호오.”

“이들은 따로 부대를 만들어서 정

규군에 합류시킬 생각입니다.”

“좋군.”

제이슨은 영식의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는 아무 일 없었습니까?”

“음. 사실 사건이라면 사건이 하나 있었지만... 포르테 장군과 길수군에 의해 해결되었네.”

제이슨의 말에 영식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건이었죠?”

“하하. 나중에 설명해 주겠네. 꽤나 큰일이었지만…… 도리어 얻은 것이 더 많았던 사건이었으니까 말이야.”

“음……‘?”

그가 말한 ‘얻은 것’0] 무엇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제이슨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기 다란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이건?

“약속했던 영웅 이벨린의 유산일세.”

“이걸 왜 지금……

영식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그가 영웅의 유산을 건네주기로 한 것은 분명 길수와 포르테의 결혼을 조건으로 내건 거래였다.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상당히 깊게 들어가 있는 거래.

그 보상품을 이렇게 간단하게 건네 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 는 일이었다.

“약속했지 않은가? 포르테 양과 길 수군의 결혼을 조건으로 이벨린의 유산을 자네에게 주겠다고.”

“예.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 까지나 두 사람이 결혼을 받아들인 후에 얘기 아닙니까?”

“그렇지.”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었다.

“그러니까 지금 자네에게 유산을 넘겨주는 것이 아닌가.”

w..2”

영식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마치 두 사람 이 결혼을 결심하기라도 했다는 듯 한 말투였다.

“하하. 뭐,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이니 자네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저길 좀 보게.”

제이슨은 집무실 밖 창문을 가리키 며 말했다.

영식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

선을 옮겼다.

“허.”

영식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제이슨의 집무실 아래 정원 에는 포르테와 길수가 함께 걷고 있 는 모습이 보였다.

둘은 한 달 전에는 상상할 수 없 을 정도로 다정다감한 분위기를 풍 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한 달 만에?”

분명 길수에게 포르테를 꼬시라고 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무뚝 뚝하기 그지없는 포르테와 잘 이어 질 거라고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 었다.

안 그래도 둘 사이를 진전시키기 위해 어떤 계획을 짜야 할까 고민하 고 있던 영식은 허탈한 표정으로 둘 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영식을 보며 제이슨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늦바람이 무섭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지.”

40대 독신 김길수.

그는 영식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능력 있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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