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197화
업그레이드(2)
“휴우……
티리아는 굳게 닫힌 방문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 을 돌렸다.
루시아와 아라가 그녀 뒤에서 딱딱 하게 굳은 표정으로 영식이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많이 혼란스러우신 것 같아요.”
“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아라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이브와의 일이 떠올랐다.
등을 돌린 채 떠나가는 이브를 바 라보는 영식의 표정에는 그녀가 감 히 가늠하기 힘든 짙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라는 살짝 쓸쓸하다는 표정을 지 었다.
항상 옆에 있다고 생각했던 영식이 마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사 라진 기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죠.”
티리아 또한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 를 끄덕였다.
이브의 일만 해도 머릿속이 복잡할 텐데 거기에 연달아 자신의 과거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 것이 다.
에르노어 대륙에 있는 모든 인류의 궁극적인 적.
자신이 그 적의 일원이 사실을 들 은 그가 혼란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 다.
“주인님을 지금 혼자 두는 게 맞을 까요? 역시 옆에서 같이 있어드려 야…… 루시아는 초조한 표정으로 방문 앞 을 서성거렸다.
짙은 슬픔이 서려 있는 영식의 표 정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럴 때야말로 내가 위로를 해드 려야 하는데!’
이렇게 영식이 혼란해하고 있을 때 야말로 그의 몸을 끌어안아준 후 자 신의 육체로 위로(?)를 해주는 것이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식을 위로해 주는 것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사랑도 키울 수 있는 일석 이조의 방법 이 었으니까.
‘역시 여기서는 내가 발 벗고 나서 야……
발이 아닌 다른 것을 벗을 기세로 그녀는 방문에 손을 올렸다.
티리아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가려는 루시아의 팔목을 잡고 가볍 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영식 씨가 원하는 대로 혼 자 있게 해드리죠. 가끔은…… 생각 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니까요.”
“ O ”
루시아는 마치 ‘전 영식 씨의 모든 것을 이해해요.’라는 분위기를 풍기 고 있는 티리아를 바라보며 짧은 침 음을 삼켰다.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을 이었다.
“저,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거든 요 다만…… 좀 걱정될 뿐이죠.”
“그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지금 은 영식 씨를 믿고 기다려보죠.”
티리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아라가 다가 오며 물었다.
“티리아 씨는…… 괜찮으신가요?”
“뭐가요?”
“영식이가…… 과거 괴물들의 창조 주였다는 사실이요.”
괴물들의 창조주는 인류에게 있어 타협이 불가능한 궁극적인 적이었 다.
그중 원래부터 에르노어 대륙에 살 고 있던 원주민들에게는 더욱.
대륙이 전란에 휩싸인 것도, 서부 와 같이 국가 자체가 파탄 난 장소 가 생긴 것도 모두 창조주들의 짓이 었다.
지금에야 꽤나 복구했지만 처음 엘 노트 왕국에서도 서부 지역과 비슷 한 지옥도가 펼쳐졌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도 혼란 스럽기는 해요.”
티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러 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실감이 나지 않는 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영식이 과거의 ‘창조 주’들을 이끄는 존재였다는 말을 들 었다고 해서 그 말이 와닿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영식은 괴물들의
창조주가 아닌, 따듯한 미소가 어울 리는 청년이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제가 보 고 겪어온 영식 씨라면 믿을 수 있 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상냥한 미소 를 입가에 머금었다.
엘노트 왕국의 지하 감옥에서 절망 에 빠졌던 자신을 따듯하게 안아줬 던 영식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그가 그녀를 등지고 떠 났다면 살바토르 길드가 이렇게 재 기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식 씨가 절 믿어줬으니... 이
제 제가 영식 씨를 믿을 차례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수줍은 소녀 처럼 뺨을 붉혔다.
루시아는 그런 그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흥. 역시 그 본처 오오라가 마음 에 들지 않네요.”
“보, 본처라쇼?”
“마치 주인님이 이미 자기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그 말투요.”
루시아는 도끼눈을 뜨며 티리아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티리아의 가슴을 손가락을
콕 찍으며 말을 이었다. 가볍게 찔 렀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살집(?)이 많다 보니 손가락이 깊게 들어갔다.
“꺄악!”
티리아는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잘 알아두세요. 주인님의 본처는 어디까지나 제가! 될 테니까요.”
“호오. 그건 홀려들을 수 없는 말 이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라 또한 발끈한 표정으로 루시아에게 다가왔 다.
“넌 영식이의 노예라고 하지 않았
어? 노예가 본처가 된다는 얘기는 못 들어본 것 같은데.”
“흥, 제삼자는 저리 가주실래요? 본처랑 가장 거리가 먼 건 아라 씨 아닌가요?”
“가장 거리가 멀다니…… 그건 무 슨 소리야.”
아라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루시아는 입가에 조소 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존재감 이 없잖아요? 이런 걸 공기? 라고 하던가요.”
“뭐, 뭐라고?”
루시아가 던진 묵직한 팩트(?)에 아라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뼈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존재감의 부재는 아 라 또한 신경 쓰고 있었던 문제였 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방법이 없 었다.
끝없이 전투가 일어나는 에르노어 대륙의 사정상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있어야 했다.
아라의 힘은 티리아와 루시아에 비 하면 하찮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고,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존재감’의 부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였다.
“사, 사랑에 존재감이 뭐가 필요하 단 거야.”
“후훗. 그런 말을 하시면서도 표정 에는 확신이 없으시네요. 아라 씨도 알고 계시죠? 그. 한국이라고 했 던가요? 거기라면 몰라도 적어도 에 르노어 대륙에서만큼은 그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루시아의 말이 옳았다.
에르노어 대륙에서 ‘강하다’라는 것은 다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권력이었다.
그리고 예로부터 본처라는 것은 가 장 권력이 강한 여성이 거머쥐게 되 는 자리였다.
“그, 그보다 갑자기 본처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 아.”
티리아의 말에 루시아는 흠칫 몸을 굳혔다.
영식이 세 여인을 다 받아들이겠다 고 한 말을 들은 것은 루시아뿐이었 다.
아라와 티리아는 그 얘기에 대해서 아직 듣지 못했다.
나중에 세 여인을 모아두고 따로 말할 계획이었던 것 같았지만 단테 리온이 나타나고 그 계획은 이미 영 식의 머릿속에서 기억나지도 않을 것이다.
마음 편하게 사랑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그러네. 너, 영식 이에게 무슨 얘기를 듣기라도 한 거 야?”
“으..”
티리아와 아라의 추궁에 루시아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 다.
나중에 영식이 진지하게 말하려는 것을 지금 미리 말해버려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서 말씀해주세요, 루시아 씨.”
“그래.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루시아는 둘의 계속되는 추궁에 깊 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는…… 다 받아들일 생 각이신 것 같아요.”
“다 받아들인다니……
“그 말씀은……
“생각하시는 게 맞아요. 뭐, 그리
이해할 수 없는 선택도 아니잖아 요?”
루시아는 살짝 불만스럽다는 목소 리로 말했다.
에르노어 대륙에 있어서 중혼은 굉 장히 일반적이었다.
과거 지구와 다른 점은 여자 쪽에 서 여러 명의 남자들을 받아들이는 일도 일반적이라는 점이었다.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중혼이 일반적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몬스터 와의 전쟁 때문이었다.
과거 지구의 경우 대부분의 전쟁은 남자들만 참여해서 죽었기 때문에 남자의 숫자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한 여자가 여러 남 자를 데리고 있는 경우는 굉장히 ‘부적절하게’ 인식되었다.
하지만 에르노어 대륙의 경우 레벨 시스템으로 인해 여자도 남자와 비 슷하게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 했다.
즉, 남자 여자 둘 다 부족하기 때 문에 힘을 가진 자에 의한 중혼이 오히려 중용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 다.
“후훗. 전 오히려 다행이네요. 영식
씨가 저를 싫어하시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이 많았거든요.”
그런 에르노어 대륙에서 태어나고 자란 티리아는 영식의 당당한 하렘 선언에 오히려 기쁘다는 표정을 지 었다.
적어도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그것만 하 더라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였다.
‘보, 본처 자리가 욕심나기는 하지 만.’
티리아는 살짝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자, 잠깐만. 둘 다 그걸로 정말 괜찮은 거야?”
아라는 너무 순순히 그 결정을 받 아들이려는 루시아와 티리아의 모습 을 보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관념과 상식이란 것은 무서운 것이 었다.
한국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서 둘의 반응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 운 것이 당연했다.
“흥, 마음 같아서는 주인님을 독점 하고 싶지만…… 주인님의 뜻이 그 렇다면 어쩔 수 없잖아요?”
“저, 전 오히려 그편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나중에 아라 씨나 루시아 씨랑도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 같 고.”
아라는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그녀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정 말 그들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끄응……
아라는 복잡하다는 표정으로 침음
을 삼켰다.
영식에 대해서 큰 호감이 있는 것 은 사실이었지만 여러 여자를 한 번 에 받아들인다는 그의 생각에는 동 의하기 힘들었다.
‘나만 봐줬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자신의 옷자락을 살짝 움켜 쥐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자신이 그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 만한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루시아의 말처럼, 그녀에게는 힘이 라는 절대적인 권력이 다른 여인들 에 비해서 한창 떨어졌으니까.
사랑에 뭔 힘이 필요하냐고 따져 물었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그 녀도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사랑에 뭔 돈이 필 요하냐는 말과 비슷한 말인데 사실 사랑에 돈이 필요하지 않는 경우가 더 드물었으니까.
‘사이좋게…… 지낸다, 라.’
그녀는 티리아와 루시아를 바라보 았다. 사실 티리아만이라면 이렇게 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티리아의 상냥한 성격을 생각한다 면 그녀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저 병(?) 걸린 여자인데.’
루시아가 가진 영식에 대한 집착은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아라의 입장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 다.
“ 하아?
아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 금 당장 결정하기는 힘든 문제였다.
“일단…… 나중에 상황이 괜찮아지 면 영식이랑 같이 얘기해 봐요.”
“네, 그렇게 해요. 후훗. 뭔가 기쁘 네요. 그렇지 않나요, 아라 씨?”
“예? 아…… 네. 그러네요.”
아라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티리 아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오래 함께할 사이인데 말 씀을 편하게 해주세요.”
“……알았어, 티리아.”
“후훗. 잘 부탁드려요.”
티리아는 영식의 발칙한(?) 제안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지 방긋 미소 를 지으며 아라의 손을 잡았다.
“끄응. 제가 본처라는 사실을 잊으 시면 안 돼요.”
루시아는 티리아를 힐끔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리 우겨 봐도 그녀가 가진 본 처 오오라를 넘어서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럼 같이 식사나 하러 갈까요?”
티리아는 미리 친목을 다져두고 싶 었는지 아라와 루시아에게 식사를 권유했다.
그때 였다.
-쿠우우우웅!
영식의 방에서 거대한 폭음이 홀러 나왔다.
“주, 주인님?!”
그 소리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것 은 루시아였다.
그녀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영식의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