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머신-189화 (189/284)

레벨업 머신 189화

무식한 자는 용감하다(3)

“채 린아……‘?”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유나는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 지는 채린을 내려다보았다.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기 분이었다.

배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채린은 유나를 바라보며 힘겹게 미소를 지 었다.

“헤헤, 바보 언니…… 조심했어야지.”

채린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유나 의 뺨을 쓰다듬으며 끊어질 듯이 희 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채, 채린아! 채린아!!”

유나는 피를 쏟아내고 있는 채린의 몸을 다급하게 움켜쥐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인벤토 리에서 회복 포션을 꺼내어 그녀에 게 들이 부으려고 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슈트를 입은 창 세교의 사제 하나가 달려들었다.

“신의 길로 그대를……

“닥쳐!”

유나는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일식 을 들어 사제에게 찔러 넣었다.

-콰직.

사제의 슈트가 박살나며 검은색 검 이 사제의 몸을 파고들었다.

사제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유나는 채린의 몸을 끌어안고 자리 에서 일어섰다. 길드원들과의 거리는 이미 꽤나 벌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난전에 가까운 전투 구도에서 길드원들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 웠다.

무엇보다 지금 길드원들은 전력으 로 포위망을 뚫고 있었기 때문에 낙 오된 그녀와 채린에게 신경을 쓸 여 유가 없었다.

‘위험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길드원들과 합 류하지 못한다면 슈트 군단에게 완 전히 둘러 싸여 버리리라.

“ 언니?

채린은 조용히 그녀의 팔을 붙잡았 다. 울먹이는 듯한 채린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유나는 어 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조용히 있어.”

유나는 어딘가 화가 난 목소리로 채린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 화르륵.

그녀의 몸에서 검붉은 불꽃이 뿜어 져 나와 채린의 몸을 감쌌다.

철도 순식간에 녹여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끔찍한 온도를 가지고 있는 불꽃이었지만 채린에게는 포근한 이 불 속에 있는 것 같은 따듯함만 느 껴졌다.

‘빨리 이곳에서 도망쳐야 해.’

최상급 회복 포션을 사용했지만 잠 시 상처의 악화를 막았을 뿐이었다.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힐러 클 래스의 스킬이 필요했다.

빨리 길드원들의 본대를 따라잡고 한성에게 채린을 맡겨야 했다.

유나는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혀오는 슈트 군단의 틈으로 발을 박찼다.

“비켜, 이 미친놈들아!”

유나는 전력을 다해 자신의 단전 안에 잠들어 있는 쌍식의 기운을 끌 어올렸다. 조금씩 꿈틀대며 힘을 토 해내는 쌍식의 기운.

‘제길……

이 순간만큼 쌍식의 기운을 완전히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적이게 느껴졌을 때가 없었다.

“신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 걸어 라. 낙원이 우리를 찾아오리라.”

“제발 비키라고!”

유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제들 을 바라보며 거칠게 표정을 일그러 뜨렸다.

양손으로 채린을 안고 있었기 때문 에 쌍식도 휘두를 수 없는 상황.

그녀는 오로지 몸에서 타오르는 검

붉은 화염만으로 슈트 군단을 뚫어 내야 했다.

‘무기를 사용 못 하는 게 너무 커.’

유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사제의 검 격을 피했다.

화염 스킬을 사용하여 슈트 군단을 최대한 물러나게 만들고는 있었지만 직접 무기를 휘둘렀을 때에 비하면 너무 공격력이 낮아졌다.

“……바보 언니. 이제 그만해.”

“조용히 있으라니까.”

채린은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 에게 말했다.

유나는 거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 었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유나는 사제들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내며 단전 안에 뭉쳐 있는 쌍식 의 기운을 조금 더 끌어 올렸다.

힘을 끌어올린 유나의 표정이 일그 러졌다. 단전에 뭉친 기운은 마치 ‘너 따위가 내 힘을 사용하려 하느 냐’라고 묻는 듯이 부동의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제발 움직여줘.’

유나는 조조한 표정으로 거친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채린을 내려다보 았다. 상처가 고통스러운지 채린의 표정에서는 평소 밝은 웃음기를 조 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발!”

유나는 질끈 눈을 감으며 처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위급한 상황인 것 같군.

그때, 그녀의 귓가에 묵직한 중저 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주변 배경이 천천 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폭음으로 가득한 전장 속에서 갑작 스럽게 죽음과 같은 정적이 내려앉 았다.

‘ 이건?

정지한 시간 속에서는 입조차 열리 지 않았다.

유나는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쌍식?’

그녀의 머릿속에 지금 귓가에 들린 목소리의 주인이 떠올랐다.

이 목소리는 분명 과거 잊혀진 자 들의 무덤에서 처음 쌍식을 얻은 이 후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쌍식의 목소리였다.

-그렇다.

‘어째서 지금……

이제까지 그녀는 쌍식과 대화를 하 기 위해 수십 번은 넘게 시도했다.

자아를 가지고 있는 무기이니만큼 단전에 뭉쳐 움직이지 않는 이 기운 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물어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 실패. 쌍식 은 그녀의 부름에 한 번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마치 자아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그 모습에 유나는 쌍식과 대화 하기를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왜 지금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쌍식 이 말을 걸었는지 생각할 때가 아니 었다.

지금은 자신을 감싸다가 상처를 입 은 채린을 한시라도 빨리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부탁해. 조금이라도 더 힘을 사용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

-힘을 사용하고 싶다고?

‘그래. 지금 무기도 사용하지 못하 는 상황이라고. 강력한 화력이 없으 면 저 슈트를 뚫을 수가 없어.’

-그렇다면 지금 손에 든 소녀를 내려놓고 무기를 들면 될 문제 아닌 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니까 이러는 거잖아!’

유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살짝 표정 을 일그러뜨렸다.

- 한심하군.

- 나약해.

-영웅 라그나의 후예라고는 도저 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야.

-고작 한 명의 희생을 견디지 못

해서는 영웅의 힘을 다룰 수 없다.

‘……뭐라고?’

유나는 귓가에 들리는 쌍식의 목소 리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일식과 월식은 그녀의 물음을 무시 한 채 서로 말을 주고받듯 말을 이 어나갔다.

-처음부터 재능이 부족했지.

-실력 또한 형편없었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나아 지리가 생각했지만.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군.

“ O 01-0.”

―, I ―― ?

그들이 말이 이어질수록 유나의 몸 에서 뿜어지는 불길이 약해져갔다.

그나마 다룰 수 있었던 미량의 힘 마저 그녀의 의지를 따르지 않기 시 작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유나는 전신의 힘이 점점 빠져나가 는 감각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우리가 주었던 힘을 도로 가져가 는 것뿐이다.

-너는 영웅을 이을 자세가 되지 않았다.

-능력 또한 되지 않았지.

-그런 네게 한 가지 제안을 하도 록 하지.

제안, 이라는 그들의 말에 유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 쳐 지나갔다.

-그 소녀를 포기해라.

-그리고 무기를 들어 올려라.

-그렇다면 네게 힘을 주도록 하지.

머릿속에 이어지는 쌍식의 말에 유 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마치 야차처럼 흉포

하게 변했다.

‘채린이를…… 포기하라고?’

- 그렇다.

-무릇 영웅이란 포기할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모든 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오만에 불과하다.

-교만에 불과하지.

양쪽에서 번갈아가며 들리는 쌍식 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졌다.

유나는 자신의 품에 안긴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채린의 모습을 내 려다보았다.

그녀와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 나갔다.

함께 싸우는 동료라기보다는 여동 생에 가까운 아이였다.

에르노어 대륙이라는, 힘과 폭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에 떨어졌 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은 조금도 보인 적 없던 소녀였다.

‘무섭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성인조차 되지 못한 아이가 몬스터 가 우글거리고 살인이 당연시 되는 세계에 떨어진 것이다.

거기서 그녀가 억지로라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적에 가까웠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고민할 가치가 없는 제안이었다.

유나는 허리춤에 있는 쌍식을 날카 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엿이나 먹어.’

‘영웅의 후예’라는 거창한 칭호를 가지고 있는 여인의 입에서 나올 말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저급하고 저 열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우리는 거래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경고를 하는 거지.

“그러니까, 엿이나 처먹으라고, 이 중2병 걸린 고철덩어리 새끼들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던 주변 풍경이 다시 원래대로 되 돌아오기 시작했다.

유나는 씹어뱉듯이 흉포한 목소리 로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너무나도 저급하기 짝이 없는 그녀 의 태도에 쌍식은 할 말을 잃었다.

영웅 라그나를 위해 만들어졌던 그 들은 자아를 가지게 된 이후 이런 모욕을 들어본 경험이 한 번도 없었 다.

-더 이상 얘기할 가치도 없군.

-네게 라그나의 뒤를 이을 자격은 없다.

-다른 후계자를 찾아보도록 하지.

쌍식은 기가 차다는 목소리로 그렇 게 말했다. 노기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홍, 다른 후계자를 찾아본다고?”

유나는 쌍식의 말에 코웃음을 쳤 다. 최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그런 말을 하 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썩은 중2병 고철덩어리들이.’

그녀는 영식, 유진과 같이 화가 나 더라도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는 성 격이 아니었다.

유나의 성격은 그녀가 사용하는 불 처럼 격렬하게 타오르는 종류의 성 격이었다.

“어, 언니……?”

채린은 가쁨 숨을 내쉬는 와중에도 유나를 올려다보며 불안하다는 목소 리로 중얼거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유나가 무슨 짓을 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야 너희들! 창세교는 북방의 신 을 믿는다고 했지?!”

유나는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창세 교 사제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까지 병이라도 걸린 듯 기도문 이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사제 들이었지만 그들이 믿고 있는 교리 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너도 나도 앞서서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북방에서 온 신은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몬스터와 인간이 함께 하며, 그 어 떤 분쟁 또한 없는 세계…… 그것이 바로 신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그들의 대답을 들은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입가를 비틀었다.

그녀는 과거 ‘잊혀진 자들의 무덤’ 에서 들었던 푸른 구체의 말을 떠올 렸다.

“너희들이 믿고 있는 그 북방의 신 중에 한 놈이 이 검에 의해서 죽은 건 알고 있냐?!”

유나의 외침에 사제들의 움직임이 살짝 멈췄다.

“……신은 절대적이다. 그분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는 없다.”

“그럼 적어도 북방의 신들과 잉그 리움 제국의 8영웅이 싸웠다는 건 알고 있겠지!”

괴물들의 창조주를 낙원으로 이끌 어주는 메시아라고 믿고 있는 창세 교.

그들의 입장에서 8영웅은 낙원으로 이끌어주는 신들과 대적한 잔학무도 한 역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유나는 한 손으로 채린을 안은 채 일식을 뽑아들었다.

-지금 무슨 짓을…….

“이 무기의 이름은 쌍식! 8영웅 중 하나인 영웅 라그나가 사용했던 무 기의 이름이다! 너희가 증오해 마지 않는 영웅의 무기라고!”

그녀의 외침에 사제들의 몸이 흠칫

떨렸다.

바이저에 얼굴이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광기에 가까운 증 오가 느껴졌다.

유나는 사제들의 반응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악마’의 무기를 사용해 너희들의 신과 싸우겠다! 꼬우면 뺏 어서 파괴해 봐!”

그녀의 외침에 사제들은 아무런 대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운만으로 그들이 ‘쌍식’이라는 악 마의 무기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 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예상 할 수 있었다.

-미치기라도 한 건가, 인간.

-지금 상황에서 그들을 자극해서 뭘 할 생각이지?

쌍식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유나 의 행동에 당황스럽다는 듯이 물었 다.

“다른 후계자를 구하려고 한다고 했지?”

그녀는 한 손에 쥔 일식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흉포한 눈빛을 빛냈다.

“이제는 못 구할 거다, 이 고철덩

어리들아. 저 광신도 놈들이 너희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을 테니까.”

유나의 말에 쌍식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무식한 자가 분노했을 때 어디까지 용감해질 수 있는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