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182화
올드 원(1)
“……직접, 창조주와 싸우셨다고 요?”
영식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서강 준을 바라보았다.
설마 창조주와 직접 싸우고 나서도 살아남은 인간이 소환자 중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래. 이 한쪽 눈도 그때 불타버 리고 말았지.”
≪=1 99
어...
영식은 짧은 탄성을 지르며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얘기를 들어야 해.’
이제까지 수수께끼에만 쌓여 있던 창조주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영식은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창조주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흠. 창조주에게 꽤나 관심이 많은 것 같군.”
서강준은 팔짱을 낀 채 느긋한 표 정으로 영식을 바라보았다.
“뭐, 일단 이곳의 소란부터 잠재우 고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지. 안 그 래도 나도 자네에게 부탁이 좀 있으 니까 말이야.”
“그렇게 하죠.”
그 부탁이라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 지만 기대 이상으로 우호적인 서강 준의 태도에 영식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가 적대적으로 나왔다면
최악이었겠지.’
그는 영식의 이목을 가볍게 속일 정도의 실력자였다. 아니, 그전에 창 조주와 싸우고도 살아서 빠져 나올 수 있을 정도의 강자였다.
어쩌면 루시아를 능가할 수도 있는 강자.
그런 그와 척을 지기라도 한다면 여간 곤란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한성 씨, 그 아이는 괜찮습니까?”
“……아뇨. 이걸 괜찮다고 할 수는 없겠죠.”
한성은 품에 안은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것처 럼 초점 없는 눈빛으로 한성을 올려 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이제 몬스터는 없단다.”
한성은 바들바들 떨리는 소년의 손 을 잡아주며 말했다.
하지만 소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 지 않았다.
한성을 올려다보던 소년의 눈가를 타고 투명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 렸다.
“엄, 마……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기절해 버 렸다.
한성은 마지막으로 소년이 내뱉은 그 말에 거칠게 입술을 깨물었다.
“유진 씨, 이 아이를 부탁할게요.”
“?그래.”
한성은 유진에게 아이를 넘겨준 후 바바라가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바바라는 전투에 휩쓸렸는지 상처 를 입은 채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 을 몰아 내쉬고 있었다.
“하아. 하아. 이, 사악한 이교도 놈 들……! 너희 때문에…… 너희들 때 문에!”
“왜 아이를 죽게 만들려고 한 겁니까.”
한성은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운 목 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바바라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한 성을 노려보았다.
“내 아이를 낙원으로 보내줄 수 있 는 기회였는데! 감히 너희들이 그 걸 망쳐 버려?!”
바바라는 악귀에 쓰인 것처럼 일그 러진 얼굴로 한성에게 달려들었다.
한성의 목을 움켜쥔 그녀는 전력을
담아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힐러 클래스라고는 하지만 한성은 80레벨 대의 소환자.
가뜩이나 깡말라서 힘도 없는 여인 이 목을 조른다고 하더라도 아무렇 지도 않았다.
“당신이 하려던 짓은 아이를 낙원 에 보내주려는 것 따위가 아니었습 니다. 그냥 몬스터의 먹잇감으로 아 이를 던져주려고 한 것뿐이죠.”
“네가,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사제님께서 낙원 의식을 치 르면 아이가 낙원으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단 말이야!”
한성은 광기에 물들어 있는 그녀의 외침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바바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당신은…… 이미 늦었군요.”
더 이상 바바라에게는 논리도, 상 식도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가 만든 세계에 갇혀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이 손, 놔……! 아, 으……!”
한성의 손에 새하얀 빛이 뭉치기 시작했다.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마력의 빛이 아닌, 공격을 위해 물리력을 띤 마 력. 사제의 몇 안 되는 공격 기술인 홀리 라이트가 그의 손에서 만들어 졌다.
- 퍼석.
한성의 손이 검붉은 피에 젖었다.
한성은 머리를 잃고 쓰러진 바바라 의 몸을 내려다보며 두 눈을 감았 다.
“……영식 씨.”
“예.”
그런 한성의 모습을 침묵을 유지한 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영식이 낮 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꼭, 찾도록 하죠.”
그가 찾자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영식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자신들이 뿌린 불 행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죠.”
영식 또한 이 처참한 모습을 보고 아무 동요를 일으키지 않을 만큼 냉 혈인이 아니었다.
영식은 바닥에 쓰러진 바바라의 시 체를 슬쩍 내려 보더니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대충 주변을 정리한 영식 일행은 제압한 사제들을 끌고 밖으로 나왔 다.
“아, 주인님!”
그가 밖으로 나오자 루시아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영식에게 손을 흔들 었다.
그녀의 발아래에는 네 명의 사제들 이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제압되어 있었다.
영식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듯 경쾌 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던 그녀는 영 식의 뒤를 따라 나오는 서강준을 바 라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시죠?”
그녀는 서강준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딱딱하게 굳은 표 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이 정도로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은 것은 카르가스의 접근 을 감지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안에서 좀 일이 있었거든.”
영식은 집회 때 있었던 일들을 길 드원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올드 원……?”
“올드 원이라면 가장 먼저 에르노 어 대륙에 소환되었다는 그 사람 얘 기하는 거야?”
길드원들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서 강준을 바라보았다.
이런 시선이 익숙한지 서강준은 덤 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누군가요?”
티리아는 유진이 안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식 은 씁쓸한 표정으로 바바라에 대한 얘기를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요그런..”
“여관 아주머니가 광신도였다고?”
영식의 얘기를 들은 길드원들은 걱 정스러운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 다.
“일단 사제들을 데리고 돌아가자.”
영식은 그렇게 말하며 거칠게 몸을 비틀고 있는 사제의 멱살을 잡아끌 었다.
영식 일행은 사제들을 데리고 어젯 밤 묵었던 허름한 여관으로 향했다.
바바라가 없는 여관 주방을 본 영 식은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더 이상 그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 을 시간은 없었다.
“그럼. 이제 창조주에 대해서 질문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얘기해 보게.”
테이블에 앉은 서강준은 앞에 앉은 티리아와 영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그 창조주는 어떻게 하시다 가 만나게 되신 겁니까?”
“중앙으로 원정을 갔을 때 만나게
되었지. 아마…… 영웅의 무덤 근처 였을 걸세.”
“서강준 씨와 싸운 창조주는 어땠죠?”
“어땠냐니?”
“외모나 성격, 무력 수준 같은 거요.”
“홈……
영식의 물음에 서강준은 살짝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외모는 나도 잘 모르겠네. 붉은색 슈트를 입고 있었으니까. 목소리는 여자였지만 창조주들에게 성별이라 는 개념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네.”
‘붉은색 슈트.’
서강준의 말을 들은 영식의 눈이 반짝였다.
붉은색 슈트.
그 동안 블랙큐브를 해석했을 때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 치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보였던 붉 은색 형체.
‘그게 붉은색 슈트였나.’
영식은 허탈한 웃음을 홀렸다.
‘.잠깐.’
그때, 영식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 간 하나의 기억이 있었다.
레크라스를 상대했을 때. 그는 마
지막에 자신을 바라보며 ‘왜 네가’ 라고 절규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붉은색 슈트와 내가 입은 슈트를 착각해서 그렇게 소리쳤던 거였어.’
그때 당시 영식은 락테온 2식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레크라스는 그 의 슈트를 보고 자신에게 블랙큐브 를 심은 창조주를 떠올린 것이리라.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감각.
영식의 머리에 희미한 두통이 달렸 다.
“……이름이 뭐던가요.”
“엘리아라고 했네.”
엘리 아.
이 역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영식의 표정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단테리온에 레노스, 엘리아까지.’
대체 창조주들의 숫자가 몇인지 감 도 잡히지 않았다. 영식은 깊은 한 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여자의 목소리라……
기계 몬스터의 부품을 해석할 때 분명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짜증이 가득 섞여 있는 여인의 목 소리.
영식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엘리아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격은 약간 거칠고 짜증을 부리 던가요?”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 나?”
서강준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영식 을 바라보았다.
영식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생 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창조주들에 대한 정보가 조 금 있거든요.”
?...”
“그들은 얼마나 강하던가요?”
“괜히 그들이 창조주라고 불리겠 나. 상상 이상의 강력함이었지.”
서강준은 자신의 안대를 쓰다듬으 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부분의 부족원들이 그 전투로 죽었네. 나도 한쪽 눈을 잃고 간신 히 도망쳐 나왔지.”
영식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창조주들이 강하다는 것은 굳이 깊 게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강하지 않았다면 카 르가스를 제압하여 기계 몬스터로 만들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서강준과 그 부족을 단신으로 상대 해서 이기다니. 대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 서강준 씨는 그 엘리아라는 창조주에게 복수하는 게 목적이신가 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서강준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움 켜쥐었다. 그의 몸에서 짙은 살의가 뿜어져 나왔다.
“창조주에 대해서 단서를 찾던 도 중 이 창세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 지. 확신할 수 있네. 이놈들의 배후 는 분명 창조주와 연관되어 있는 놈 이야.”
“그런 의미에서, 자네들에게 부탁 하고 싶은 게 있네.”
서강준은 영식에게 시선을 옮겼다.
“창세교를 습격하는 것을 도와주 게. 지금 나 혼자서는 그들의 지휘 부의 위치를 알아내도 습격할 수가 없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개인 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 가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한 집단 을 상대할 때는 더더욱 그 단점이 크게 드러났다.
차라리 그들이 부나방처럼 그에게 달려들면 모를까 도망이라도 친다면 서강준 혼자의 힘으로 그들을 모두 추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제안을 들은 영식의 눈이 반 짝였다.
‘이건 기회야.’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다는 말은 바 로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리라.
애초에 창세교를 습격할 생각을 하 고 있었던 영식에게 서강준의 제안 은 더 없이 반가운 제안이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
서로의 목적이 일치하며, 가진 바 능력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루시아조차 경계할 정도의 힘을 가 진 그를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면 이 이상 든든한 아군이 없을 것 이다.
영식은 티리아에게 슬쩍 눈짓을 보 냈다.
그의 눈짓을 받은 티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저희 살바토르 길드 는 서강준 씨를 도와 창세교의 배후 를 조사하도록 하죠.”
“……고맙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티리아는 서강준의 두 눈을 바라보 며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영식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