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103화
황금 물고기를 낚다(1)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길 게 늘어진 아라의 흑발이 영식의 뺨 을 간질였다.
짜릿한 전율이 입술을 타고 전신으 로 퍼져나갔다.
무거운 적막이 방 안에 내려앉았 다. 한동안 이어지던 키스가 끝나며 그녀의 얼굴이 멀어졌다.
영식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아라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입을 맞춘 아라 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숙 였다.
“이건..
“지,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아라는 다급한 표정으로 그에게 소 리쳤다.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변한 그녀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이걸로 잘 알겠지?! 네가 인 간이건 아니건 상관없다는 걸!”
≪ O ”
M...?
“아, 알겠어, 모르겠어?!”
그녀는 영식의 멱살을 틀어잡은 채 흥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빨갛게 물든 그녀의 얼굴에서 성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영식은 피식 웃음을 홀렸다.
“잘 알겠어.”
“그, 그렇지?! 흐흠. 아, 알면 된
거야. 알면.”
아라는 괜히 으스대듯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녀는 딱딱하 게 굳은 몸짓으로 몸을 돌렸다.
“그,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영식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라 는 문을 쾅 닫고 후다닥 밖으로 달 려 나갔다. 영식은 아라가 나간 방 문을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 다.
“……곤란하게 됐네.”
티리아도 그렇고, 아라에게서도 상 당히 명확한 구애의 표현을 받아버 렸다.
그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 둔한 것도,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두 여인의 감정에 대해서는 이전부 터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4하지만..?’
영식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 는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이 아닌 자신이 그녀들의 감정 을 받아줘야 하는지 어떤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 들이기에는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아직은 아냐.”
영식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
다. 조금 더 알아야 했다. 자기 자 신에 대한 것. 과거에 대한 것. 왜 이런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녀 들과 관계를 가질 수는 없었다. 그 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 다.
‘뭐,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기도 하고.’
다른 감정을 가지기에는 지금 살바 토르 길드에게 주어진 상황이 급박 했다.
1년 안에 지금의 3대 길드와 어깨
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전력 을 강화하는 것. 그것에만 모든 정 신을 집중해도 부족했다.
‘일단 골드런 길드를 만나볼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라와 그런 일이 있은 지 3일 지 났을 때였다.
영식은 박시아의 주선으로 골드런 길드의 간부와 약속을 잡을 수 있었 다.
“그럼, 갔다 올게.”
“무슨 일이 생기면 통신 구슬로 연 락주세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영식과 한 성이 문 앞에 섰다. 그들을 배웅 나 온 티리아가 초조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역시 저도 같이 가야 하지 않을 까요……? 그래도 길드장인데……
“아뇨. 이런 일은 오히려 길드장이 직접 나서면 격이 떨어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세요.”
한성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티리아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 를 끄덕였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그녀는 정장을 입은 영식에게 다가 갔다.
“넥타이가 비뚤어졌어요, 영식 씨.” 그녀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 의 넥타이에 손을 뻗었다. 그녀와 영식 사이에 묘한 핑크빛 분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읏……. 여, 영식아. 중간에 목마 를 수도 있으니까 이걸 가져가. 마 법으로 시원하게 해놨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라가 티리
아를 견제하듯이 엉덩이로 살짝 밀 어내며 영식에게 물통을 내밀었다. 아이스 마법을 걸어둔 물통은 얼음 이 동동 떠올라 있을 정도로 차가웠 다.
“호호호. 아라 씨,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런 길드장님도 영식이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뭘 하고 계신지요?”
티리아와 아라 사이에 뜨거운 신경 전이 벌어졌다.
영식은 난처한 표정으로 끄응, 침 음을 삼켰다.
“하아, 하아 영식 오빠를 둔
싸움이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고 있 네. 그렇지 유나 언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채린은 흥분에 차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유나는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 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 로 영식을 노려보았다. 채린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흐응? 조금 심기가 불편한 것 같 은데 언니? 왜 그럴까아?”
“시, 시끄러워 이 꼬맹아!”
“꺄아아아악!”
유나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길드 하우스가 소란스러워졌다.
“……빨리 가죠, 영식 씨.”
“……예.”
영식과 한성은 그 소란을 뒤로 하 고 길드 하우스 밖으로 나섰다. 강 렬한 햇빛이 내리쬈다.
영식과 한성은 약속 장소로 향했 다. 북방경계선 주변에 굉장히 드물 게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 약속 장소 였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으 로 보이는 청년이 그들을 룸 안으로 안내했다.
“반갑습니다. 이클로젼 길드의 배 한성이라고 합니다.”
“영식입니다.”
“하하하. 걸출한 신성 길드를 만나 게 되어 영광입니다. 골드런 길드 부길드마스터 한준만이라고 합니 다.”
동그랗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뚱뚱 한 체형. 푸짐한 살집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눈. 맵시 있게 기른 콧 수염과 전신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값비싼 보석들.
졸부, 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생각 나는 인물이었다.
영식은 그와 악수를 나누며 날카로 운 눈으로 그를 살폈다. 한준만 또 한 가늘게 눈을 뜨며 영식을 위아래 로 살펴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만,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한준만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영 식을 바라보았다. 원래 이런 어중이 떠중이 신생 길드 따위의 사업제안 같은 경우엔 거들떠도 보지 않는 그 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레비아탄 길드마스터의 추천이
라……
레비아탄 길드는 골드런 길드 입장 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물이자 굉장한 수익을 가져다주는 큰손이었 다.
그 길드마스터가 직접 추천한 자리 니 평범한 물건이 나올 리는 없을 것이다.
“골드런 길드에는 상품의 마케팅 및 유통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흐음, 어떤 상품이냐에 따라서 대 답이 달라질 것 같군요.”
“주력으로 생각 중인 상품은 두 개 입니다. 아마 준만 씨도 보시면 알 겁니다.”
영식은 인벤토리를 열어 사람 키만 한 크기의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를 꺼냈다.
그 물건을 본 한준만의 눈빛에 경 악이 서렸다.
“자, 잠깐만요? 설마 이건……
“예. 냉장고랑 전자레인지입니다.”
“허……. 지, 진짜입니까?”
한준만은 체면을 차리는 것도 잊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두 물건을 살폈다.
확실했다. 그의 눈앞에 있는 물건
들은 4년 전 에르노어 대륙에 오기 전에 사용했던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였다.
“대체 어떻게 이게……
한준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물건을 바라보았다.
지구에 비해서 문명이 낙후된 이곳 에 현대 문물을 들여놓으려는 시도 가 이제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대부분 실 패로 돌아갔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만들려고 한다 고 하자.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세부 부품들을 알고 있는 존재 는 거의 없었다. 설사 알고 있을지 라도 플라스틱을 비롯한 석유 화학 물질이 없는 에르노어 대륙에서 현 대 물품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냉 장고와 전자레인지는 지구에서 사용 하던 것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 을 정도로 완벽한 형태와 기능을 가 지고 있었다.
‘이건?
한준만의 눈이 빛났다.
골드. 하늘 끝까지 솟아 오른 황금 의 산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농밀한 돈 냄새가 그의 코를 간질였 다.
‘제대로 팔기만 하면 무조건 대박 이야!’
성공적인 보급만 이뤄진다면 무시 무시할 정도의 돈방석에 앉을 수 있 다, 라는 계산이 그의 머릿속을 스 쳐 지나갔다.
꿀꺽.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혹시 이 물건의 양산이 가능하십 니까?”
“물론입니다. 양산이 불가능했으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지도 않았겠 죠.”
“동력은 뭡니까? 보아하니 전기 코 드가 없는 것 같은데.”
“충전식 외장 배터리로 가동됩니 다. 4개월 정도 지속되며 주기적으 로 교체를 해줘야 합니다.”
“……지속적인 수익도 기대해 볼 수 있겠군요.”
한준만의 눈이 반짝였다. 뛰어난 상인의 자질을 타고난 그는 이 ‘외 장 배터리’라는 것이 현재 에르노어 대륙 상황에 얼마나 정확하게 들어 맞는 장치인지 한 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준만은 두툼한 살집에 파묻힌 눈 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의 머릿속에 서 빠른 속도로 계산이 이루어졌다.
‘신생 길드라……
한준만은 가늘게 눈을 뜨며 영식과 한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가 비 틀어 올라갔다.
“흠흠. 확실히 사업 아이템은 엄청 나군요.”
“그렇다면 골드런 측에서 유통을 맡아주실 수 있는 건가요?”
“아아.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맙시다. 이런 중요한 사항은 저 혼자 결정하 기는 힘들어서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앉았 다.
한성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언제쯤까지 답변을 주실 수 있죠?”
“하하하. 늦어도 3일 안에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만 느긋하게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사 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 아니 겠습니까?”
“ o 으.”
?
한성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 으로 한준만을 노려보았다.
그는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를 손으 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물건을 몇 개 더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저희도 양산이 가능하 다는 증거가 있어야 해서요.”
“……보내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 니다.”
“하하! 좋군요. 그런데…… 비율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한준만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영식과 한성의 눈빛이 동시에 반짝 였다. 수익 비율. 이 자리에서 결정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한준만은 헤실헤실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러한 유통에 관해서는 유 통하는 측이 더 많은 비율을 가져간 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계시죠?”
“하지만 이 물건은 저희 길드가 아 니면 제조할 수 없죠. 일반적인 상 황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흐음…….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 도 마케팅과 유통 없이는 팔리지 않 을 텐데요?”
“아무리 마케팅과 유통이 좋더라도 물건이 좋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 것 도 마찬가지죠.”
한성과 한준만 사이에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배율은 80 대 20을 제안합니다. 물론, 저희가 80이죠.”
한성은 시작부터 세게 비율을 불렀 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터무니없 는 수치였다. 한준만의 말대로 이런 물건을 유통할 때는 생산자보다 유 통하는 측이 더 많은 비율을 가져가 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흐음……. 그 정도를 생각하고 계
시군요.”
한준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선 길드장님과 상의한 후에 답 변을 드리겠습니다.”
한준만의 대답을 들은 영식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영식은 굳게 입을 다문 채 한준만의 표정을 살폈다.
“자, 앞으로 함께 거사를 도모할 사이가 아닙니까? 이런 즐거운 자리 에서 서로 얼굴을 찌푸리고만 있을 순 없지요.”
한준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와인의
뚜껑을 땄다. 고급스러운 와인의 향 기가 방 안에 퍼져 나갔다.
“한 잔씩 받으시죠.”
한성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한 준만을 바라보며 술을 받았다. 두 사람에게 술을 따른 한준만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올렸다.
“이렇게 좋은 자리에 칙칙하게 사 내들끼리만 술잔을 기울여서야 되겠 습니까?”
-탁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은 미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의 숫자는 여섯. 여인 들은 익숙한 몸짓으로 한준만과 영 식, 한성의 양 옆자리에 앉았다.
“어머, 왜 그렇게 표정이 굳어 있 어 오빠? 우리가 마음에 안 들어?”
“후훗. 잔뜩 기분 좋게 해줄 테니 표정 풀어?”
그녀들은 꺄르르 웃음을 흘리며 양 팔에 엉겨 붙었다.
“이런 속셈이었군.”
한성은 거칠게 표정을 일그러트리 며 양팔에 달라붙는 여인들을 거칠 게 뿌리쳤다.
고급 창녀들과 술을 이용해 기분을
달아오르게 만든 후에 쥐도 새도 모 르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하는 방 법. 남자의 본능을 이용한 치졸한 거래 방법이었다.
‘이래서 비율에 관해서 아무 말도 없었던 거군.’
한성은 한준만의 가소로운 계획에 콧방귀를 꼈다.
“돌아가죠, 영식 씨. 골드런 길드는 저희와 거래를 할 생각이 없는 모양 입니다.”
“어, 어디가 오빠?”
한성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날카로 운 목소리로 영식에게 말했다.
날카롭게 주변을 살피던 영식은 갑 작스럽게 얼빠진 웃음을 흘리며 한 성을 돌아보았다.
“한성 씨.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미녀들에게 대접받을 기회를 날리는 건 좀 아깝지 않아요?”
“호호! 어머? 미녀라니! 오빠도 차 암!”
어수룩해 보이는 영식의 말에 창녀 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달라붙 기 시작했다.
“영식 씨……?”
한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