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서포터 (94-2)화 (95/156)

문혁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짐은 조촐했다. 얼마나 조촐했냐면, 크로스백 하나면 충분했다. 사실 도희네 집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게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문혁이 챙긴 거라곤 추가로 입을 옷가지와 속옷, 공부할 자료들과 과외 노트 몇 가지가 전부였다.

우선 데몬헌터 끝날 때까지 필요한 물품들만 챙기고, 나머지는 그 후에 지내본 다음에 천천히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열어본 도희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씨발.”

“어?”

“아니에요, 형. 옷 내가 걸어둘 테니까 다른 거 정리하고 있어요.”

체크무늬 셔츠가 몇 개야. 가장 아낀다던 그 패턴의 체크무늬만 세 개. 그리고 처음 보는 패턴의 체크 셔츠가 두 개나 더 있었다.

‘진짜 언젠가 내가 이거 불태운다.’

도희는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옷을 잘 펼쳐 옷걸이에 걸어두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자신의 셔츠가 걸린 행거 끝에 차곡차곡 걸리는 문혁의 셔츠들을 보니, 촌스러운 패턴의 좆같음과는 별개로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분명 지금은 자신이 옷을 한 박스 가져와서 안겨준다 해도 문혁이 받지 않으려 들 게 뻔했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문혁은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익숙해진다면 좋겠다.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주고 싶다. 문혁이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사줄 수 있었다. 뭘 원하지 않아서 문제이긴 했지만.

아무튼 언젠가 반드시 문혁을 데리고 백화점 투어를 해야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맛대로 싹 입혀서 옆에 세워 두면 얼마나 예쁠지 감히 상상도 안 된다. 아마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거다.

옷 정리를 얼추 끝낸 도희는 드레스 룸을 한 번 둘러봤다. 계속 여기서 재우는 게 맞나 싶다.

“형.”

“네?”

“계속 여기서 자는 거 괜찮아요? 드레스 룸 가구 배치를 다시 할까?”

“…어? 아, 아니! 괜찮아요! 진짜로 괜찮은데.”

“좀 불편하지 않아? 뭔가 침실 같은 느낌도 안 들고…. 반 나눠서 행거를 이쪽으로 옮겨 달까 싶기도 하네. 그리고 이쪽은 제대로 침대 프레임도 놓고, 저쪽엔 서랍장도 하나 놓고, 옆에 작은 테이블도 하나 놓을까? 침대 밑에 러그도 놓고 여기 문 옆에는 스탠드 등도 하나 세우는 거야. 그럼 좀 침실 같지 않을까?”

“지, 진짜 나는 괜찮은데….”

문혁이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내저었다. 자기 때문에 방을 뜯어고친다는 얘기를 들으니 부담스러워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도희는 개의치 않고 조금씩 문혁을 몰아갔다.

“아니면 거실을 좀 바꿀까요? 거실은 넓고 비는 공간도 많으니까. 가구 몇 개 옮기고 침대 놓는 거지. 형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한 거면 파티션이라도 치면 되니까.”

“나…!”

“응?”

“나는 개인적인 공간 막, 그런, 그런 거 필요 없는데….”

“그래? 아니, 형이 거실을 방처럼 쓴다고 가정해 봐. 근데 내가 거실 나왔다가 형이랑 마주치거나 하면 안 불편하겠어요?”

“네….”

“진짜?”

“응. 그냥… 나는 어디서 자도 다 괜찮아요. 막, 소파에서 자도 되는데….”

“거기서 왜 자? 소파는 TV 보거나 공부할 때만 앉아. 잠은 편하게 자야지.”

“어디서든 다 잘 자서….”

“그럼 내 방에서 잘래?”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어?”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디서도 다 잘 잔다면서요. 내 방 침대 엄청 커. 방도 넓고. 욕실도 안에 있고.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자본 적 없어?”

“아… 하, 할아버지랑….”

“할아버지랑?”

“응, 응. 할아버지랑 같이 잤어요. 그냥 이불 깔고… 어, 그, 근데 그럼 내가 도희 공간 방해하니까….”

“방해는 무슨. 내 방 구경할래요?”

내친김에 도희는 문혁을 향해 손짓을 했다. 마지막 속옷을 서랍 안에 쏙 넣은 문혁이 몸을 일으켰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이 귀여운 놈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진짜 한입에 꿀떡 집어넣을 수도 없고.

“형이 내 방 한 번도 못 봐서 아침에 날 깨우지도 못하고 나가는 건가 싶기도 하네.”

“그런 건… 아닌데.”

“어차피 이제 여기서 지낼 건데. 만약에 나 자고 있어도, 그냥 편하게 들어와도 괜찮아. 문 안 잠가 놓으니까요.”

“으응….”

방문을 열며 도희는 문혁에게 자신의 방을 안내했다. 발도 제대로 못 디디던 문혁은 이내 침을 꼴깍 삼키고 조심스레 방 안으로 몸을 들였다.

저건 책장이고, 여긴 서랍장인데 뭐가 들어 있고, 이건 화장대인데 형 필요한 거 있으면 쓰고…. 줄줄이 늘어놓는 설명을 들으며 방 안을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장신의 미남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뿌듯해진다.

“우선은 드레스 룸에서 자다가,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하면 이 방에서 같이 자요. 다른 사람하고 자는 거 안 불편하면요.”

“아… 불편한 건 아닌데.”

“아닌데?”

“막, 그냥… 뭔가 더 못 잘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시무룩한 표정으로 문혁이 대답했다. 어차피 첫술에 배부를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지금은 이런 선택지도 있다는 걸 문혁에게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친김에 부엌에 있는 조리 도구들 위치도 다시 한번 알려주고, 욕실에 있는 용품들도 설명해줬다. 문혁은 무슨 전시회를 둘러보는 사람처럼 열심히 집 안을 구경했다. 하루 이틀 자고 가던 날과는 달리, 자신이 지낼 곳이라는 생각을 해서였을까? 어떻게든 더 잘 알아두려는 노력이 가상하다.

집안을 다 둘러본 문혁이 거실에 놓은 테이블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도희는 게임룸으로 들어왔다. 혹시나 공부하는 문혁에게 방해가 될까 문을 꼼꼼히 닫는 것도 잊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얼렁뚱땅 이뤄진 동거의 첫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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