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막-6장 (20/21)

<3막-6장>

“설마 이 보라색도 내놓으시게요?”

루이즈가 아예 고개부터 도리질 치며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비올레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즈가 반질반질한 옷감을 뒤적거리며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전하, 이건 안돼요! 세상에, 이 섬세한 드레이핑 봐…….”

“작년 추수제 때 정말 잘 어울리셨는데. 다시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잠자코 비올레타의 말에 따라 드레스를 분류하던 디아나도 루이즈가 든 드레스를 보고는 한마디거들었다. 비올레타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 정도로 눈에 남을 정도였다면, 더욱더 내야지. 영애들도 기억할 만하고.”

“진짜, 진짜 아까운데…….”

루이즈는 울상이 된 얼굴로 제 곁에 서 있던 하녀에게 드레스를 겨우 넘겼다.

“분명 그 올데 가 계집이 사갈 거예요. 그 계집, 전하가 하시는 건 뭐든 꼭 따라 했잖아요. 그러잖아도 작년 추수제 기간 내내 이거랑 엇비슷한 것 입고 돌아다니는 통에…….”

“올데는 돈이 많으니 잘됐지. 디아나, 볼루아 영애더러 가격이나 잔뜩 올려 두라고 해.”

“전하, 그런 게 바로 경매 조작인 건 알고 계시죠?”

“그 영애는 볼루아 영애만 보면 못 이겨서 죽으려고 하잖니. 쓸 만한 사람은 다 써야지.”

“전해는 둘게요.”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해요? 자선 경매든, 빈민 구제든 뭐든, 다 좋지만 이건 전부 다 황후 폐하께서 생전에 주신 것들인데…….”

발랄하던 목소리가 조금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파사칼리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디아나가 조심스레 비올레타의 눈치를 살폈다. 비올레타는 다른 드레스 사이를 헤집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동쪽 방을 가득 채운 그 모든 게 다 모후께서 남기신 거야. 이런 드레스 몇 벌이나 부채나 잔 보석들 정도는 괜찮아.”

“전하께서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공작 각하께서 돈을 주시면 되잖아요. 각하께선 돈도 많으신데!”

루이즈가 순진하게 툴툴거렸다. 디아나가 피식 웃으며 루이즈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그냥 그 돈을 받으시고, 그 돈으로 기부하시면…….”

“그가 이미 내놓은 것들이 많아. 그러자면 티도 안 나.”

잠자코 비올레타와 루이즈의 실랑이를 듣고 있던 디아나가 핀잔처럼 물었다.

“자선을 베푸시겠다면서, 이렇게 당당하게 티 내자고 하시는 거예요?”

“이왕 하는 것.”

이런 때야말로 돈으로 사람 마음 사기 제일 좋은 시기라며, 수북이 쌓인 구제 어음에 흔쾌히 사인하던 라키엘의 모습을 떠올린 비올레타가 픽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라키엘이 이번 겨울 제 영지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그는 꽤 진심이었다.

그 어음의 절반 정도가 라키엘의 개인 재산에서 빠져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랬다. 그는 에델가르드 령에 사는 사람이라면 겨울에도 살이 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어찌 보면 라키엘은 묘한 부분에서 욕심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그런 면을 좋아했지만, 똑같이 굴지는 못했다.

이 상황을 진짜 ‘기회’로 치부하는 것은 오히려 제 쪽이었다.

흉년은 본디 겨울에 가장 잔혹한 법이다. 파사칼리아가 죽은 여름이 지나고, 추수제가 있던 가을이 지나 어느덧 수도에는 겨울이 찾아왔고, 이제 수도 뒷골목에서는 굶어 죽은 부랑아의 시체가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해졌다.

비올레타는 이미 라키엘이 대신 그녀의 이름을 서명한 몇 개의 자선 병원에 수많은 돈을 기부해 두었다. 물론 라키엘의 돈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모후가 준 것들을 굳이 내놓겠다는 것은 어떤 고결한 의지가 아니었다. 기실 제가 진짜 황녀라도 되는 양 선심이나 쓸 입장이 아닌 것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그녀가 진심으로 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나눠 준다고 한들, 처음부터 제 것도 아닌 것을 마치 제 것처럼 여기는 것만이 우스워질 것이다.

제 눈에도 아직 아픈 것을 굳이 내놓는 이유는 그녀가 빈민들을 안타까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를 진짜 기회처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제 상황을 조금만 덧붙이면 이야기가 새로 생겨나고, 회자될 만한 화제가 될 것이다.

그녀는 저 자신을 그리 경멸하지도 않고서 그 사실을, 혹은 제 정신머리가 정말로 닳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현실은 그녀의 생각처럼 흘러갔다.

에델가르드 공저에서 열린 자선 경매에는 고작 황녀가 내놓은 스무 개 남짓한 품목이 전부였음에도 황녀의 인기를 입증하듯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나이 지긋한 귀부인부터 부유한 젠트리, 젊은 귀족 청년까지. 죽은 황후가 13년 동안 헤어져 있었던 제 딸을 위해 맞춰 줬다는 호화로운 드레스들과 크고 작은 장신구들이 높은 단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제값보다 몇 배는 비싸게 팔려 나갔다.

죽은 모후 생각에 차마 다시는 입지 못할 정도로 특별하게 여겼던 것들. 비올레타는 제가 뻔뻔하게 내뱉었던 말을 떠올리며 계단을 천천히 올라섰다. 정작 그렇게 특별한 것들은 혹여 닳을 게 두려워 한 번 건드리지도 못하고 고이 보관해 둔 주제에. 그녀는 너른 계단 위를 하나씩 오르며 답답한 듯 장갑을 하나씩 벗었다.

찬 공기가 피부 위를 파고들었다.

황녀가 그렇게나 가슴에 사무칠 것들을 기꺼이 내놓는 이유라는 게 ‘고작’ 빈민들의 손에 빵을 쥐여 주기 위함이란 것에 귀족들은 꽤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경매에 내놓은 드레스들과는 달리 장식 하나 없는 수수한 차림새로 그녀가 경매에 나타난 것은 그 감명에 확신을 주었으리라. 그녀의 드레스는 결코 검소하다고 할 수는 없는 최고급 벨루티가산 벨벳으로 만들어졌으나 적어도 검소한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비올레타는 벨벳에 감싸인 제 목을 쓸며 5층에 올라섰다. 복도 중간, 거대한 관문 앞에 서 있던 기사 중 하나가 그녀를 발견하고 문을 열었다. 2층은 족히 넘을 높은 천장을 타고 그녀의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비올레타는 높은 문 아래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그녀는 이 관문을 공식적으로 통과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

“라키엘.”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노크 없이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곧장 라키엘이 보이지 않아 비올레타는 몸을 틀어 엘데르디움 쪽을 바라보았다. 책장이 훤히 열려 있었다. 비올레타가 라키엘을 발견하고 걸어가다 멈칫 발걸음을 멈추었다.

“왔어?”

“이게……, 뭐예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비올레타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자그마한 검은색 털뭉치 같은 것이 공작의 침실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시선을 따라 흘낏 눈길을 던졌다가 다시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개지. 아직 새끼고.”

그냥 강아지라고 말해도 됐으리란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마치 원래 그런 것이 있었다는 듯 당연한 태도였다. 비올레타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얼굴로 계속 강아지와 라키엘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녀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비올레타가 가까이 다가서자 강아지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잡으려고 앞발을 꼼지락대며 움직였다. 그 앞에 풀썩 쭈그려 앉은 비올레타가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곱슬곱슬한 털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들고, 차가운 손바닥 아래로 이내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검은색 푸들이었다.

“웬 강아지예요? 당신 동물 싫어하잖아.”

“그건 네 거다. 난 평생 만질 일 없어.”

“진짜 귀여워…….”

금세 의아해 하던 것도 잊고, 비올레타는 제 드레스 자락을 작은 발이 짚고 올라서는 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어? 네 선물인데.”

“안 어울리게 이런 짓은……. 진짜 귀엽잖아요.”

타박처럼 말을 꺼낸 것과는 달리 말끝이 숫제 녹아내리는 음성이었다. 그녀가 강아지를 들어 제 품 안에 넣었다. 라키엘이 그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생각 못 했군.”

“뭘?”

“그 손으로 나 만질 생각은 마.”

“…….”

“날 안지도 말고.”

“그럴 계획이라곤 전혀 없는데 당신 혼자 지금 무슨 꿈을 꾸는 거예요?”

“그건 지나 봐야 알지.”

라키엘이 매끄럽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네 이름은 뭐가 좋을까.”

비올레타가 강아지를 조심스레 안은 채로 일어섰다. 제 아이라도 안은 양 어르는 폼이 벌써부터 눈꼴사나웠으나 라키엘은 별수 없이 그것을 지켜보았다. 비올레타는 강아지를 허공에 들어 눈을 맞추었다.

“까만색 아이니까…….”

“뭘 고민해. 어차피 내 이름자나 갖다 붙일 거면서.”

“그러고 보니 일부러 사 온 거네요. 그거 노리고 말이야. 싫다더니 그렇게 싫었던 것도 아닌가 봐. 그렇지? 저렇게 기대하는 것 봐.”

“…….”

“뭐가 좋을까? 너희 엄마는 널 어떻게 불렀니?”

“그건 최근 네 입에서 나온 얘기 중 제일 멍청하다.”

“라키엘은 역시 별로지? 저런 인간이랑 동명이물이 되는 건 너도 싫을 거야.”

라키엘더러 들으랍시고 개에게 묻는 모양새가 벌써부터 그를 후회하게 하고 있었다. 비올레타가 방긋 웃으며 강아지를 안고 라키엘을 지나쳐 걸었다.

“생각해 보니 ‘라키엘’은 이제 좀 지겨운 것 같아요.”

묘한 어조에 라키엘이 말없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첫사랑 이름도 괜찮을 것 같고. 어울려.”

“내가 지금 그 이름을 물어봐야 할까?”

“이름이 예뻤거든요. 그 사람.”

“해.”

“진짜로?”

“그래. 해. 저기 창문으로 던져 버릴 테니까.”

비올레타가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라키엘이 피식 마주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비올레타가 강아지를 내려 본 채로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라키엘 생각이 많이 났어요. 당신 말고, 내 새까만 말.”

“착각 안 할 테니 그렇게 자르지 마.”

“고마워요. 당신이 무슨 의미로 이 아이를 주는 건지 알아요.”

“그래서 이름은.”

“베타beta. 내 두 번째 라키엘.”

비올레타가 강아지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라키엘이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그 입도, 내 입에 대지 말고.”

“아직도 꿈꾸고 있어요?”

비올레타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픽 웃은 라키엘이 말없이 열린 책장 쪽으로 다가가 책을 꺼내고 안쪽을 눌렀다. 엘데르디움과 집무실을 가르는 책장이 무겁게 닫혔다. 비올레타는 여전히 강아지를 만지작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비올레타가 강아지를 응시한 채로 무심코 물었다.

“얘 때문에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거예요?”

“아니. 축하하려고.”

“뭘?”

“에비가일 딜로아.”

오래된 이름이 불렸다. 낮은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그 목소리가 부르는 이름은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에비가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이름은 여기에서만 말할 수 있으니까.”

“…….”

“생일이니 참지. 이리 와.”

그 털 뭉치는 좀 놓고.

라키엘이 그렇게 덧붙이며 긴 팔을 벌렸다. 에비가일이 망연하게 앉아 있다가, 라키엘의 말대로 강아지를 놓고 뻣뻣하게 일어섰다. 라키엘이 에비가일에게로 빠르게 걸어와 안았다.

“……나더러 오라면서.”

에비가일이 습관적으로 그의 등을 마주 안으며 뭉개진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라키엘이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난 지금 네가 나한테 손대는 것도 참고, 네가 날 안는 것도 참고 있어.”

“당신이 안았잖아요. 그거 진짜 정신 나간 소리다.”

“기다리는 것까지 참는 건 도무지 수지가 안 맞았고.”

“장사해요, 지금?”

“난 곧 네가 입 대는 것도 참을 거거든.”

라키엘이 에비가일의 입술을 말끄러미 응시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라는 듯 복잡한 눈으로 제 소매를 들어 그녀의 입술을 닦았다. 셔츠 소매가 아무렇게나 입술 위를 문질러 대는 통에 에비가일이 얼굴을 팍 찡그렸다. 누가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이런 취급을 당하자니 제 기분도 복잡했다.

에비가일이 이내 무언가 떠올린 듯 슬며시 미소지었다. 갑자기 빙그레 웃는 얼굴은 퍽 앙큼해 수상한 냄새를 풍겼다. 라키엘이 문득 제 팔을 멈추었다.

그때, 에비가일이 마치 그를 습격하듯 갑자기 그의 목을 휘감고 발돋움을 했다. 입술이 부딪치는 것에 가까운 모양새로 맞물렸다.

유례없이 전투적인 키스였다. 잠시 당황해 굳어 있던 라키엘이 이내 그녀의 허리를 잡고 돌려 책장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주도권이 그에게로 기울기 무섭게 에비가일이 거짓말처럼 말끔한 얼굴로 그에게서 입술을 떼어 냈다.

“개와 처음으로 뽀뽀하게 된 기분은 어때요.”

에비가일이 개에 질색하던 그를 놀리듯 가볍게 속삭이며 물었다. 정념으로 조금 흐려져 있던 라키엘의 눈이 금세 깨끗하게 돌아왔다. 라키엘이 조금 기막힌 얼굴로 한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잔소리가 터져 나오기 전에 에비가일이 그의 목을 안아 다시 제게로 당겨 안았다.

“얼마나 날 좋아해요?”

“…….”

밑도 끝도 없이 목 아래로 쑥 들어온 물음에 라키엘이 황당한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그녀답지 않은 말이었고, 그가 들을만한 말도 아니었지만 그는 일단 잠자코 그녀를 안아 주었다.

에비가일이 제가 물어놓고도 제 말이 우스운지 몇 번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조금 음울해진 눈으로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답하지 마요.”

“너도 눈 뜨고 꿈꾸나 보군. 그럴 생각 없다.”

라키엘의 심드렁한 대꾸에 에비가일이 작게 웃었다. 라키엘이 그녀의 어깨 위로 턱을 괴며 문득 낮게 물었다.

“네 생각에는 어떤데.”

에비가일은 한참 말이 없었다. 라키엘의 목을 껴안고 있던 팔에 점차 힘이 사라졌다. 라키엘이 마치 에비가일이 도망가기라도 할 것처럼 허리를 세게 안았다.

“말해 봐.”

“……당신이, 아마도 날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에비가일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라키엘의 목 뒤에서 탁하게 울렸다. 라키엘은 가만히 그녀를 안고 선 채로 책장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말을 고르다, 결국 고르지 못하고 한마디를 떨어트렸다. 제가 여태 보지 않으려고, 알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너는.”

“…….”

“너는, 어떤데.”

“슬플 거예요.”

“…….”

“당신이, 정말로 날 좋아한다면.”

에비가일은 그의 말을 더 듣기 두려운 듯 그에게서 몸을 떼며 서둘러 말했다. 그녀의 허리를 세게 감싸고 있던 팔이 힘없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착각하지 말라고 말해요.”

“…….”

“비올레타 말고, 나한테, 그런 착각하지 말라고 해요. 그럴 리 없지 않느냐고…….”

에비가일의 말은 숫제 애원에 가까웠다. 그 말이 정작 말하는 이보다 듣는 이를 더 참담하게 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애원이라 해도 좋았다.

“그런 일은 사실 애초부터, 있을 수가 없는 거…….”

“착각은 아닌 것 같군.”

라키엘이 입매를 신경질적으로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우스운 일이지. 네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었는데.”

“…….”

“이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 사실 난 네가 어려워.”

“라키엘.”

“그리고 넌 날 잘 아는 것 같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비참한 곳만 찌를 리가 없지.”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라키엘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얼굴로 에비가일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착각한 거네요.”

에비가일이 뜨거운 숨을 몇 번이나 삼키려다 결국 삼키지 못하고 제 말과 함께 뱉어냈다. 라키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비올레타는, 당신이 만들었어요.”

“…….”

“내가 생각해도 난 퍽 잘해내고 있고요.”

에비가일이 밀랍처럼 굳은 얼굴로 잔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이 사랑스럽겠지.”

“더 들어야 하나?”

“더 들을 수 있으면 들어요.”

“그래, 더해 봐.”

“당신이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죠. 그럴 거예요. 착각 같은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거고, 당신이 모를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도 못해. 당신은 완벽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날 절대로…….”

“내가 뭘 더 알아야 하는데.”

“…….”

“네가 날,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지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타고 차분한 절망이 흘러나왔다. 에비가일이 입을 다물었다. 라키엘이 서늘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차라리 날 사랑하는 척이라도 해. 그게 어려워?”

“그래서, 하고 있…….”

에비가일이 책장으로 세게 밀려났다. 정념 한 점 없는 차가운 손이 드레스 자락 안을 파고들었다. 에비가일은 조금 굳어 있다 이내 말없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라키엘은 제게 순순히 안겨 오는 몸에 오히려 절망했으나 멈추지는 않았다. 라키엘의 손이 긁어내듯 모직 스타킹을 끌어내리며 그녀의 허벅지를 세게 움켜쥐었다.

목까지 채워져 있던 단추가 아무렇게나 풀려 나갔다. 라키엘이 숨이 막히는 듯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쇄골 위로 잇자국을 남기며 목덜미를 거슬러 올라간 입술이 이내 에비가일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숨도 못 쉬게 몰아붙이는 것을 에비가일은 조금도 밀어내지 않고 그저 견뎌 냈다.

라키엘이 입술을 부딪친 채로 그녀를 안아 올려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어느새 딱딱하게 경직된 몸을 침대 위로 누였다.

엉망으로 뒤집힌 드레스 자락 아래로 한쪽만 헐벗은 다리가 손자국으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에비가일이 밭은 숨을 몰아쉬며 라키엘을 올려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원망 한 점 없는 말간 눈으로, 혹은,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눈으로. 라키엘이 허탈하게 웃었다.

“넌, 날 안 믿지.”

“……그렇게 비약하지 말아요. 당신 믿어요.”

라키엘은 에비가일을 가두듯 그녀의 가슴 옆을 짚고 있던 손을 시트 위에서 몇 번 세게 쥐었다 폈다. 역겹게 들끓어 오르는 속이 어떤 순간을 기점으로 천천히 식어 내렸다.

라키엘은 차분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라키엘의 손이 그녀의 드레스를 내려 다리를 덮어주고, 제 잇자국에 발그스름하게 물든 쇄골을 쓸었다. 그리고 어쩌면 체념에 가까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물었다.

“너도 날, 그냥 사랑하면 안 되나.”

진이 다 빠진 목소리였으나 남자의 말에는 여유가 없었다.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는 주제에 라키엘은 ‘너도’ 날 사랑하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다. 에비가일은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백인 것을 알았다. 견디고 견디다 못해 밀려 나온.

라키엘은 제 말 뒤 이어지는 침묵을 몇 분이나 가만히 참아냈다. 그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에비가일은 미친 사람처럼 생각 없이 시간을 쟀다. 이윽고 라키엘이 몸을 일으켰다.

라키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늘 그랬듯 잘 만들어진 조각 같은 표정을 하고 일어섰다. 자로 잰 듯 우아한 손길이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갈하게 다듬었다.

기다란 손이 크라바트를 다시 단정하게 매고, 버튼을 잠근다. 에비가일은 그가 상처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물먹은 솜처럼 입술을 달싹일 힘조차 없이 온몸이 무력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비올레타를 일으켜 아무렇게나 풀려 있던 단추를 잠가 주었다. 비올레타는 침대에 앉아 그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마차는 불러 놓을 테니 천천히 나와.”

“…….”

“내일 저녁은 같이 먹고.”

라키엘은 평상시처럼 말하고, 평상시보다 다정하게 비올레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엘데르디움이 열리고, 남자의 우아한 발소리가 멀어졌다. 멀리서 집무실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발밑으로 베타가 걸어왔다. 눈물이 현실감 없이 몇 방울 떨어져 내렸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무릎 위로 고개를 떨궜다.

“베타, 여기!”

밀로일라의 목소리 위로 루이즈의 청명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짧게 손질된 누런 잔디 위로 까만 강아지가 어설프게 뛰어다녔다. 겨울답지 않게 햇볕이 따스한 날이었다. 다른 시녀들이 높게 떠드는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비올레타는 볕이 잘 드는 자리에 누워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다 제 곁에 디아나가 풀썩 앉자 책을 옆에 내려 두었다.

“날씨가 꼭 가을 같네요.”

“그러게. 바람도 없고.”

“이런 날엔 교외로 나들이가면 좋을 텐데. 드레스덴이나, 시실리나……. 지난가을 추수제 때 말고는 제대로 바깥에 나가신 적이 없으시잖아요. 그마저도…….”

말을 꺼낸 것과 동시에 추수제의 결말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을 떠올린 디아나가 말끝을 흐렸다. 비올레타가 웃으며 무릎을 세우고 몸을 일으켰다. 비올레타의 손이 아무렇게나 제 옆에 펼쳐져 있던 책을 단정하게 다시 덮어두었다. 그녀는 루이즈가 베타를 잡고 안아 올리는 것을 바라보며 디아나에게 물었다.

“드레스덴, 얼마나 남았다고 하던?”

드레스덴에 지어지고 있는, 파사칼리아의 묘가 될 사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비올레타의 물음에 디아나가 한숨처럼 대꾸했다.

“보고 온 시종 말로는 최소한 사오 년은 족히 남았을 거랍니다. 매일 만 명이 동원된다는데, 근방주민들이야 이 흉년에 일거리 떨어지니 좋아들 한다지만 벌써부터 원성이 자자한데 해가 바뀌면 어찌 될지…….”

그 말은 즉 파사칼리아가 사오 년은 족히 어디에도 안치되지 못하리란 뜻이었다. 비올레타는 말없이 무릎 위로 팔을 포개 턱을 괴었다. 디아나가 심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원성이 전하께 튀면 어찌해요.”

“별수 없지.”

비올레타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고무공을 문 채 제게로 총총 걸어오는 베타에게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녀가 곁에 있던 바구니에서 비스켓을 몇 개 꺼내 드레스 위에 올려 두자, 베타가 좀 더 빠르게 걸어와 고무공을 비올레타 앞에 놓고 던져 달라는 듯 코로 밀었다.

비올레타가 고무공을 잡고 던졌다. 베타가 공을 쫓아 폴짝폴짝 뛰어갔다.

비올레타는 그 작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디아나에게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루이즈 편지는?”

“아직 답이 없어요. 루이즈는 편지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뭐야. 펠론이 거절했다는 소리야?”

“그런 경우는 사실 거절도 아니죠.”

“애인이라도 생겼대?”

“볼루아 영애 말로는 그런 것도 아니라던데.”

“그 영윤도 예의가 없네. 우리가 그날 괜히 시킨것 같아. 다 취해서는, 환상 속에서 잘 살던 애를 몰아붙여서…….”

“실례가 안 된다면 고쳐 주셨으면 해요. 우리가 아니라 나로. 전하께서 취하셔서는 시키셨잖아요. 심지어 몇 자 보태시고요.”

“실례라고 할래. 쟤가 울면 너랑 밀로일라도 같이 책임져.”

어느덧 다시 공을 물어온 베타가 비올레타의 드레스 위로 제 뺨을 비비며 그녀를 간절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앞에 비스켓이 있는데도 허락 없이는 입도 대지 않는 것이 기특해, 비올레타는 말을 멈추고 베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비스켓을 툭 잘라 조금씩 입에 넣어주었다.

비올레타가 조금씩 주는 비스켓을 얌전히 잘 받아먹던 강아지가 문득 멈칫 입을 멈추며 귀를 세웠다. 베타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따라 비올레타와 디아나가 시선을 옮겼다.

메이어가의 휘장을 단 급사가 달려오고 있었다.

루이즈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던 밀로일라가 제 가문의 휘장을 보고 조금 굳은 표정으로 걸어갔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윽고 급사에게서 서편을 받아 든 밀로일라의 얼굴이 파삭파삭 굳었다. 비올레타가 미간을 찌푸리며 밀로일라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시녀들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밀로일라.”

“동생이 죽었, 대요. 전염, 병이……. 대체 무슨말인지…….”

메이어의 후계자가 5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리고 그해 808년 겨울, 그란토니아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여인이 황제의 침대에서 몸을 비척비척 일으켰다. 황제는 이미 침실에 없었다. 그녀는 제 허리께에 느슨하게 걸쳐져 있던 하얀 모직 드레스를 들어 제 팔을 다시 끼워 넣었다. 약 기운에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여인은 거울로 걸어가 제 몰골을 비추었다. 아직도 온몸이 나른했다.

너른 침실 가득 밀포프 향이 넘실거렸다. 그녀는 비어 있는 황제의 침대를 보며 혀를 쯧 찼다. 제 손으로 피운 잎 뭉치에 정작 저만 취한 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미련 없이 침대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성의 없이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갓 서른을 넘어선 여인은 그리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으나 눈길을 끌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거울 속에 이리저리 얼굴을 비추어 보던 여인이 대강 머리를 틀어 올리고 콘솔로 가까이 걸어갔다. 우아한 듯 요염하게 내리깔린 눈매가 콘솔 위에 놓인 모자들을 찬찬히 살폈다.

여자의 손이 이내 중앙의 모자를 집었다. 공작새 깃털과 카메오로 장식한, 화려한 하얀색 벨벳 모자였다.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쓴 여자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녀는 벽에 제가 장식해 두었던 산사나무 가지를 힐끗 보고는 침실을 나섰다.

황제의 젊은 시종들이 황제의 정부를 보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들에게 뒤클로 남작부인이라 불리는 아드리아나 뒤클로는 캐롤링 출신의 먼 방계 왕족으로, 겨울 어느 날 갑자기 그란토니아 궁정에 나타났다.

상단을 운영했다던 그의 남편을 따라 그란토니아로 이주해 왔다고는 하지만 기실 그녀의 남편이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고, 그녀가 이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말은 많았으나 사실 그녀의 출신 성분이 어떻든지 간에, 사람들은 황제가 어떤 여자랑 붙어먹는다고 해도 그리 난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는 날이 갈수록 방탕하고 광폭해졌다.

그의 가까이에서 죽어 나간 시종만 해도 벌써 스무 명 가까이 되었고, 젊은 아들들의 시신을 받아 든 가문들은 조용히 증오를 키웠다.

그 원한만이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랐다. 황제가 캐롤링 출신 창부에게 홀렸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수도에 전염병이 퍼진 것과 거의 동시였다.

소문을 누군가 부풀려 낼 필요도 없었다. 황제가 제 정부에게 영지를 하사하고, 정부의 다섯 살배기 아들의 머리에 친히 스크리브 남작의 관을 씌워 주었던 탓이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그 남자아이는 황제의 아들이 아니었다. 겨울 들어 궁정에서 열린 가장 큰 행사가 그 작위 수여식이었다는 것만 봐도 사태가 점점 미쳐 간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러나 바깥에서 무어라 떠들든, 적어도 이 드넓은 황제궁 안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등에 대고 말 한마디 던지지 못했다. 평생 제 정비들조차 누구 하나 유난스레 총애하는 법 없었고, 달리 뒤로 정부를 둔 적도 없는 황제였다.

게다가 황후가 죽은 여름 이후로 추밀원의 의원들조차 알현이 불가했던 상황을 미루어 보자면, 그가 수십 일이나 그 곁에 두고 있는 여자의 존재가 가벼울 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간에서 재어 둔 무게와 같이, 아드리아나는 제 세를 과시하듯 궁정을 거닐곤 했다.

낮이면 황제가 늘 기거하는 방을 아드리아나는 꽤 익숙해진 발걸음으로 찾아왔다. 하루 종일 볕이라고는 들 일이 없는 북향 방이라 들어서기 무섭게 꽤 선득한 기운을 풍겼다.

그녀는 그것을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제 뒤로 문을 천천히 닫았다. 굳이 따지자면 이 방의 문제는 햇빛이나 서늘한 기운 같은 것보다는 오래된 아편 냄새였다.

창가에 놓인 기다란 벨벳 의자 위로 루드비히는 아편에 취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아드리아나가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푸른색 벨벳 위로 아드리아나의 하얀 손바닥이 살며시 얹혔다. 아드리아나가 루드비히의 목울대에 입 맞추며 의자 위로 제 몸을 겹쳤다.

“폐하의 즉위 이후 사상 최악의 사태인 것에는 틀림없습니다. 저 역시 이견을 표할 수 없군요.”

지방 총감과 감독관들의 보고가 끝나자, 황제의 외사촌이자 최고 고문인 브나리오 백은 ‘사상 최악’이라는 내용과는 달리 꽤 평온한 어조로 사태를 평가했다.

라키엘이 말없이 싸늘한 얼굴로 제 앞의 보고서들을 몇 번 헤집다, 이내 한숨처럼 놓고 일어섰다. 브나리오 백의 뒤에 서 있던 관료들이 흠칫 시선을 내렸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떼지 않는 무거운정적이 흘렀다. 수도 지방 총감인 하인리히 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도 동부에서만 사만 명이 죽었습니다. 다른 곳은 더 셀 수도 없습니다. 고작 열흘도 안 되어……. 각하께서는 무엇 하나 삐뚤어짐 없이 조치하고 계시나, 그런 문제들은 차치하더라도 황제 폐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제는, 더는 안 됩니다. 민심이 더는 걷잡을 수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은 하인리히 백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라키엘이 곤란한 듯 입매를 미미하게 끌어올리며 대꾸했다. 브나리오 백이 그것을 조금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다 별다른 내색 없이 눈을 깜빡였다.

“황녀 전하께서라도, 폐하께…….”

“전하께서는 필요한 것 이상의 노력을 해 오셨습니다. 지난여름 이후로요. 이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보셔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내무부에서는 지금 최대한의 조치를 하고 있습니다. 폐하의 최고 고문이신 브나리오 백과 더불어.”

라키엘은 단정하게 말하며 하인리히 백이 들고 있던 잔에 줄어든 만큼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폐하의 건강이 도무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나마 요사이 마음의 안정이나마 찾으신 듯은 하나…….”

그가 말하는 ‘안정’이라는 것이 황제의 캐롤링 출신 정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았다. 불과 십여 분 전에 친절한 태도로 보고를 받던 젊은 공작과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라키엘이 선득하게 말을 이었다.

“굳이 이렇게 ‘안 좋은 소식’으로 폐하께 심려를 끼칠 이유가 없습니다.”

“…….”

“그리고 그런 골치 아프고, 정신 사납고, 성가신 것들은 모두 제가 일임하게 될 겁니다.”

이젠 대놓고 내정을 모두 제가 다루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달리 대안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그를 당연하게 만들었다. 황제가 저버린 모든 일은 공작과 가장 가까웠다.

에델가르드는 이제 추밀원과 내무부를 오롯이 양손에 쥐고 있었다. 라키엘의 말에 굳어 서 있던 관료들이 브나리오 백의 눈짓에 집무실을 나갔다.

“조금 헷갈리는군요.”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각하께서 보란 듯이 제 손에 약점을 쥐여 주신 것 말입니다.”

라키엘이 했던 말들은 황제의 최측근 앞에서 할 수 있는 종류는 결코 못 되었다. 라키엘이 비식 웃었다.

“약점이라 생각하면 약점일 테고. 기실 그 정도 쥐여 드려도 여전히 이 손에 쥔 것이 많아 백이 하실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는 않으실 겁니다. 거창한 선물도 아니니 부담은 접어 두시죠.”

“각하의 뒤로 당연히 분류된 느낌이 들어 썩 유쾌하진 않군요.”

“그럴 리가. 이제 곧 정중히 제안이나 할까 했는데요. 이 뒤에 서 주십사, 하고.”

줄곧 차분하던 주름진 눈가가 조금 일그러졌다. 브나리오 백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

“내가 이미 공작의 반대편에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고려해 보진 않았습니다만, 그 뜻은 존중해 지금부터 생각해 보죠.”

“부친은 하나도 안 닮으셨군요.”

“자주 듣는 소립니다. 칭찬으로 여기고 있기도 하고요.”

“황녀도 이렇습니까?”

“속이야 어찌 됐든 브나리오 백의 친척 조카께선 겉은 예쁘장하니 저보다는 보기 좋으실 겁니다. 장담하죠.”

그렇게 말하고 말끔하게 웃는 얼굴 위로 그의 조부가 희미하게 겹쳤다. 브나리오 백은 오래전 기억을 더듬었다.

라키엘이 웃으며 얼마간 브나리오 백을 응시하다, 이내 손을 아래로 뻗어 테이블 위의 잔을 쥐었다. 크리스탈 잔 속에서 투명한 황금빛 액체가 얕게 찰랑거렸다. 라키엘은 잔을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다, 이내 무표정하게 남은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켰다.

“1황자께서 돌아오시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습니다.”

“…….”

“형식이 어찌 됐든 지금 제가 브나리오 백에게 지껄인 모든 것은 제안입니다.”

잔이 테이블 위로 소리 없이 놓였다. 라키엘은 일견 친절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결말은, 그 전에 듣고 싶군요.”

웃는 얼굴과는 달리 웃음기 하나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브나리오 백이 표정 없이 그를 응시하다, 이내 몸을 돌려 나갔다.

황제궁의 외벽을 두르는 기다란 회랑은 시기 탓인지 평소와 달리 거니는 이가 없었다. 라키엘은 천천히 걸으며 회랑의 지붕 아래로 반쯤 가려진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멀리서 크고 작은 연기들이 하늘로 뿌옇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벌써 스무 날 가까이 지났음에도 시체 태우는 연기는 끊이질 않았다.

아직 이름조차 없는 병이었다. 라키엘은 제 입가를 형식상 가리고 있던 리넨 조각을 내리며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전염병이 슬슬 잦아들고 있을 무렵, 6황자 이안이 죽었다. 고작 열 살의 나이였다.

라키엘로서는 별다른 감상을 가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나 그 어린 나이와 죽음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데는 그도 동의했다. 사실 잘된 일이었다.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이 계승권자가 하나 사라졌다. 비올레타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했고, 그렇게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라키엘은 언젠가 제가 한 번 안았던, 또래보다 훨씬 작은 그 소년을 떠올렸다. 다른 황제의 아들들과 다를 것도 없는데 그 죽음이 그리 개운하지 못한 것은 그가 계승권자보다는 아직 어린아이에 더 가까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라키엘은 제 물러진 속을 비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굳이 이유를 더 찾자면, 아비의 사랑이라곤 한 점도 받지 못한 그 어린 아이의 모습이 죽은 미하일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리라.

문득 맞은편에서 또각또각 걸어오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라키엘은 코너를 돌아 제 앞에 나타난 여인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검푸른 빛의 벨벳 위로 은사가 화려하게 수놓인 드레스로부터,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 그리고 단아한 얼굴선까지. 황제의 정부였다.

“마담 뒤클로.”

라키엘이 예의상 리넨 조각을 들어 제 코와 입을 막고 아드리아나에게 인사했다. 아드리아나가 활짝 웃었다.

“난 각하께서 그렇게 캐롤링 식으로 불러 주는 게 참 좋더라. 뒤클로 남작부인이라니, 그란토니아인들은 너무 딱딱해요. 그런데 각하께서 그 흉측한 천 쪼가리라니, 대체 뭐예요? 그리 소용도 없어 보이는데 시종들도 늘 하고 있고.”

“전염되거나 전염시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성의 때문이죠.”

“미안해요. 난 성의 같은 거랑은 거리가 멀어서. 괜찮죠?”

“물론입니다.”

“어차피 전염시킬 데라곤 폐하뿐인데, 각하께선 그런 결말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죠.”

아드리아나가 은밀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키엘은 요염하게 입매를 끌어 올리는 여자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라키엘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다지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군요. 지나치게 건강해 보이는 게.”

“그야 이제 겨우 살 만한데. 나도 조금 더 누려야 하지 않겠어요?”

“아이는 잘 지냅니까?”

“아, 나의 작은 스크리브 남작. 물론이죠. 아주 잘 지내요.”

“아이에게는 성의를 지켜요. 그리 입 열고 떠들지 말고.”

라키엘이 건조하게 말했다. 아드리아나가 실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를 알현하러 가시나요?”

“그런 참입니다.”

“그 방에 밀포프를 피워 둔 지 얼마 안 돼서 제대로 된 대화는 오늘 밤이나 되어야 할 수 있을 거예요. 방으로 들라고 말씀하실 정신은 아직 남아계실 테니, 대화가 아니라 혼자 떠들고 대화한 체하실 거면 지금이 좋겠군요.”

“아직 정오도 안 됐는데.”

“이제 와 때가 중요할 분은 아니죠.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다른 때를 찾고 싶긴 하나, 6황자께서 돌아가셨으니 일단 대화한 척은 해야겠군요.”

“맙소사, 6황자가 돌아가셨나요? 그 어린 나이에, 가여워라…….”

아드리아나가 정말로 놀란 듯 물었다.

“높으신 분들 사정이야 어차피 잘은 모르나 많은 것이 변하겠군요. 혹시 내가 베갯머리에서 더 떠들어야 할 것이 있나요?”

“그리 변하지는 않을 테고, 마담은 그 충실한 태도 그대로, 늘 하던 대로 하면 될 겁니다.”

“충실할 수밖에요. 각하께서 날 찾아낸 이후로, 아비도 없는 내 아들에게 작위가 생겼는데.”

라키엘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입매만 끌어 올려 웃고는 그녀를 지나쳤다. 아드리아나가 문득 입을 달싹였다.

“그런데 말이에요.”

아드리아나의 목소리에 라키엘이 멈춰 섰다. 아드리아나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닮았나요?”

라키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담비털 모자 아래로 파사칼리아와 닮은 여자의 우아한 이목구비가 말간 빛을 냈다.

“왜 묻습니까.”

“약에 취할 때마다, 내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더군요.”

생략된 주어는 뻔했다. 그러라고 데려온 계집이긴 했으나 쾌재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라키엘이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파사칼리아, 그분의 이름인가요?”

“그 입에 담기엔 조금 값비싼 이름이군요.”

“송구하지만 어쩔 수 없죠. 이 얼굴에 대고 수백 번도 더 들었거든요.”

아드리아나가 나른한 눈매를 접으며 나직하게 웃었다. 요염한 눈매가 사람을 홀리듯 휘어졌다. 라키엘은 물끄러미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툭 내뱉었다.

“제정신이 아니니, 착각할 수밖에.”

황자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으나 그의 시신은 최소한의 방부 처리만 된 채로 방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장례식도, 그의 묘도, 그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아 이안의 시신은 갈 곳이 없었다. 황제의 승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4황비 엘로이즈는 관을 짚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시종장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모든 절차가 이루어지리라 말했으나 그녀는 황제가 애초에 제아들의 죽음을 알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들의 죽음을 믿지 못하던 여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차가운 외면 속에서 아들이 진짜로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외로운 일이었다.

엘로이즈가 비척비척 침대로 걸음을 옮기자 시녀인 베리스모 남작부인이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그녀를 부액했다. 사흘 밤낮을 울어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이제 제가 우는 줄도 모르고 울었다. 지난 나흘간, 그리고 황자가 죽어간 그 이틀 동안 엘로이즈는 그나마 제 생에 남아 있던 기운을 다 써 버린 듯했다.

선천적으로 병약한 체질 탓에 평생을 병마와 함께 살아왔던 여자는 제 아들의 죽음을 겪자 급속도로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창백한 낯빛 위로 희미한 분노가 차올랐다.

엘로이즈 드 시데른. 시데른의 대공의 딸. 그리고 시데른의 전리품. 엘로이즈는 제게 매달린 몇 안 되는 수식어를 떠올렸다. 그녀는 십수 년 전, 시데른 공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그란토니아가 시데른에 요구했던 수많은 전리품 중 하나로 그란토니아에 왔다.

스무 살, 결혼은 굴욕적이었다. 엘로이즈가 평생 그 굴욕을 곱씹을 정도로 그녀의 처지는 계속 하잘것없이 흘러갔다.

그란토니아 인은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엘로이즈가 스스로를 지켜온 방법이라곤 고작 고립과 불신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바라고 갈망하던 미래는 바로 제 아들이었다.

그란토니아의 거창한 황위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대공위 승계권을 가진 이안이 장성하면 시데른으로 함께 돌아가 사는 것. 오로지 그것만 바라고 살았다.

엘로이즈가 허탈한 웃음을 토해 냈다. 이젠 평생 여기 갇혀 살아도 좋았다.

시데른에 돌아가지 않아도 좋았다.

너만, 너만 살아 돌아온다면…….

“전하…….”

“왜 하필이면 저 아이였어야 했을까.”

엘로이즈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이죽거렸다. 베리스모 남작부인이 엘로이즈가 들고 있던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전하…….”

“스무 살에 여기로 끌려와 십수 년을 조용히 살았다. 누구 눈에 띄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도 죽은 것처럼 그렇게 살았는데.”

“…….”

“내가 가진 거라곤 오직 저 아이 하나였는데, 내 아이는, 고작, 열 살이었는데…….”

나직하게 뇌까리는 음성이 뜨거웠다. 엘로이즈는 벌건 눈으로 아들의 관을 노려보았다.

“전염병. 전염병이라고 했지.”

엘로이즈가 문득 실성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황자가, 이 깨끗한 방에서 빈민 아이들이나 걸릴 전염병에 걸려?”

“…….”

“지나가는 개가 웃지. 내가 그걸 믿을 것 같나.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황자의 놀이 동무였던 소년 역시 전염병으로 죽었으나 엘로이즈는 그것을 그리 신빙성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년이 어딘가로 사라졌을 뿐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엘로이즈 역시 몇 번이나 독살로 죽을 뻔했던 몸이었다.

그 일이 모두 3황비의 짓이었고,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엘로이즈는 그란토니아인이라면 죄다 믿지 않았다.

당연했다. 남편인 황제조차 믿을 수 없는 타국이었다.

그들이 제게 먹여 온 독을, 제 아들에게 먹이지 않았을 리가 없다.

“독살당했어.”

“…….”

“내 아들은, 독살당했어.”

의심은 순식간에 증오로 속을 태웠다. 그리 많은 이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황제의 자녀들, 혹은 남은 계승권자들. 이안을 죽일 필요가 있었던 이들은 오로지 그들뿐이었다. 엘로이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관으로 다시 걸어갔다.

유순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떨리는 손이 허공을 가로질러 관 위에 겨우 닿았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엘로이즈가 관 위에 머리를 댔다.

“이안, 누가 너를 죽였니.”

어수선한 시국 탓에 메이어가의 장례는 그 위세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간소했다. 그마저도 후계가 죽고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비올레타는 검은 망사 사이로 관이 천천히 들리는 것을 응시했다. 곁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렀다. 비올레타는 밀로일라를 위로하듯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얇은 장갑 천 아래로 차갑게 굳은 손이 느껴졌다. 밀로일라가 리넨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로 겨우 입매를 끌어 올려 희미하게 웃었다.

“어쩌면 저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밀로일라는 가까스로 웃고, 자조하듯 말했다. 비올레타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 네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이 있었거든요.”

“밀로일라.”

“네가 대체 왜 태어났을까. 차라리 빨리 태어났으면 계집답게 주제 파악이나 하고 살았을 텐데, 왜 뒤늦게 나타나서 내 것을 다 뺏어 가느냐고. 저 어린애를 두고, 우스운 일이에요.”

“그때는 너도 겨우 열다섯이었어.”

“전하가 늘 제게 못된 계집애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장난이야. 네가 못됐으면 난 지옥 가야 해.”

“정말로 그래요. 전 못됐어요.”

“밀로일라.”

“그래도…….”

“…….”

“정말, 사랑했어요.”

밀로일라의 말끝이 조금 뭉개졌다. 밀로일라는 제 남동생의 관이 깊은 땅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후계는 이 손에 돌아왔어요. 이제 다음 메이어는 오로지 저뿐이고요.”

“제발 어쩔 수 없는 일로 너를 탓하지는 마, 밀로일라.”

“전하, 이제 저는 가장 바라던 것을 가지게 됐어요.”

“…….”

“하지만 생각보다 행복한 일은 아니네요.”

가만히 그들의 뒤에 서 있던 디아나가 밀로일라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밀로일라는 제 어깨를 잡은 디아나의 손등에 얼굴을 살짝 기댔다가 저를 부르는 사촌의 손짓에 앞으로 걸어갔다.

노란 국화를 받아 든 밀로일라가 관을 내린 자리까지 천천히 걸었다. 겨울에는 피지 않는 값비싼 이국의 꽃들이 관 위로 하나둘 떨어졌다.

비올레타가 한숨처럼 숨을 얕게 뱉으며 창백한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기는 이제 두어 곳에서 멀찍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병은 거의 사라졌다. 죽은 자와 산 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메이어 백작 부처와 함께 추도사를 끝낸 라키엘이 비올레타에게로 걸어왔다. 디아나가 자리를 피해 주듯 루이즈가 있는 곳으로 갔다. 라키엘이 피곤한 얼굴로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지. 네가 돌아갈 거라고 해 뒀어.”

“벌써?”

“아직은 밖에 오래 있기 위험해. 백작 부처는 이 시국에 네가 황궁을 나선 것만으로도 감격하고 있고.”

“당신이 못마땅한 건 알지만 이왕 나온 것…….”

“감격은 짧아. 슬퍼하기도 바쁜 사람들이니 황송한 나머지 불편하게 만들지 마. 네게 탈이라도 나면 저들부터 곤란해져. 메이어 백이 걱정이 많아.”

라키엘이 무심하게 비올레타의 말을 잘랐다. 비올레타가 결국 밀로일라를 안고 울음을 터트린 백작부인을 보고 나직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가요.”

“먼저 가. 6황자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그 일로 황제와 독대할 생각도 당분간은 하지 마. 가만히 궁에 있어.”

“당신은?”

“들를 데가 있어.”

“당신은 죽지도 않을 것 같아요? 남은 수십 일을 궁에 가둬 놓고 매일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요.”

“난 늘 내 몸을 신전처럼 가꿔. 네 부실함과는 비할 바가 못 되지.”

라키엘이 입매를 쓱 끌어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비올레타가 기가 막힌 듯 짧게 코웃음을 치고는 라키엘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그들은 그렇게 사람들을 뒤로하고 걸었다.

“난 오래 살 거야.”

“그러시겠죠.”

“젊어서 고생한 것 다 누리다 죽어야지.”

“어련하실까.”

“그러니까 너도 오래 살아.”

비올레타가 멀거니 앞을 응시하다 작게 웃었다.

“지금은 불가하십니다.”

“지금?”

엘로이즈의 반문에 젊은 시종이 곤란한 듯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제 입으로 4황비라 말하기 전까지 감히 황비를 알아보지도 못했던지라 시종은 계속 어쩔 줄 몰라 했다. 엘로이즈가 신경질적으로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래, 가능한 것은 언제건대.”

“송구합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최악의 급박한 상황을 제하고, 모든 알현을…….”

“황제의 아들이 죽었다. 내가 그보다 더 급박한 핑계를 찾아야 폐하를 뵐 수 있겠는가. 아뢰기나 하라.”

“하오나, 전하.”

“나는 더 이상 지껄일 힘도 없다. 네가 문을 열고 여쭐 것이 아니면, 내가 들어가마.”

“저는 감히 이 문을 열 수 없나이다. 그러니 차라리 시종장께서 돌아오시면…….”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람.”

엘로이즈는 문득 제 뒤에서 들리는 가느다란 음성에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가 엘로이즈의 앞으로 여유롭게 걸어왔다. 시종이 습관적으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뒤클로 남작부인.”

“베르텐, 폐하께서는 아직 오수 중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조심해야겠네.”

아드리아나가 나른한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엘로이즈를 흘끗 응시했다.

“남은 황비 전하 중 한 분이신가?”

“…….”

“자주 들었던 것과 어느 것 하나 일치하지 않는 걸로 보아 분명 4황비님이시겠군요.”

엘로이즈는 말이 없었다. 아드리아나가 무안한 기색도 없이 생긋 웃었다.

“아름답다는 공치사는 지금 그리 듣고 싶어 하시는 것 같지 않고, 다음에 또 뵙겠다고 인사드리고 싶지만 전하께는 제가 다시 보이지 않는 게 더 좋을 테고, 무슨 용건인지 묻는 것도, 도와 드리는 것도 실례일 테니.”

“…….”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마치 황제에게 아뢰듯 공손히 말한 아드리아나가 고고하게 몸을 돌렸다.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허락은커녕 시종에게 통보조차 없이 이루어진 일련의 일이었다.

엘로이즈는 벌게진 눈으로 제 앞에서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저 계집이 곧 죽기라도 하느냐.”

“예?”

“아니면 죽어 가는 자식이 있느냐?”

“…….”

“무슨 핑계로 저 계집은 이리 드나들고, 나는 아들의 시신을 방에 덩그러니 두고도 여기 서 있어야 하는지, 네 입이 설명할 수 있겠느냐.”

“송구하오나…….”

엘로이즈가 시종의 말을 더 듣지 않고 그를 지나쳐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비틀비틀 위태로운 걸음에는 기묘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짙은 발피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엘로이즈가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오수 중이라던 황제는 창가에 길게 앉아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그녀에 놀란 아드리아나가 황제의 곁에서 엘로이즈 쪽으로 다시 걸어왔다. 엘로 이즈의 창백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전하.”

아드리아나가 빠르게 걸어와 엘로이즈를 막아섰다. 엘로이즈가 악을 쓰며 아드리아나를 밀쳐냈다. 그러나 그녀는 루드비히에게 더 가까이 걸어가지도 못했다. 연약한 입술이 잇새로 몇 번이고 짓이겨졌다. 숫제 울음을 토해 내듯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흘을 기다렸습니다.”

“…….”

“폐하!”

“들었다. 6황자가 전염병에 그만 휩쓸려, 죽고 말았노라고.”

루드비히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서 평온하게 말했다. 방 안 가득한 발피움 냄새와는 달리 약에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

“불행하게도,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장례에 관해서는 프란츠가 곧 그대에게 갈 것이다.”

“에델가르드를, 카디링거를 심문하시길 원합니다.”

엘로이즈는 비정상적인 차분함으로 말했다. 그제야 루드비히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지금 사태와 그다지 상관없게 들리는군.”

“둘 중 하나, 혹은 둘.”

루드비히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분명 책임이 있습니다. 황자의…….”

“아이는 전염병에 걸렸다고 들었다. 아닌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이가 죽는 것을 보지 못했나?”

루드비히가 건조하게 물었다. 죽었다는 말에 또 울컥 역겨운 것이 차올라, 엘로이즈는 간신히 숨을 골랐다.

“이안은 독살 당했습니다.”

“그렇게 믿는 이유가 아이의 징후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대의 꿈에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군.”

“폐하.”

“에델가르드와 카디링거는 한낱 시골 영주가 아닌 추밀원의 일원이다. 변변한 정황조차 없는 그대의 말 한마디에 심문실에 밀어 넣을 수 있는 인사도 못 되고, 또한…….”

“…….”

“시데른에서 그대 같은 계집 열을 보내도 그들과 바꿀 수 없다.”

엘로이즈가 멀거니 서 있다 문득 날카롭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그녀는 황비가 아닌, 시데른의 수많은 전리품 중 하나였다. 그녀는 그것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저만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발끝부터 뜨겁게 솟아오르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제가, 보잘것없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궁정에 저를 둔 것이 전시에 가깝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선 단 한 번도 저를 아끼신 적이 없지요. 그러나 황자는 폐하의 아들이었습니다.”

엘로이즈는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제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대공의 세 번째 딸이 무게가 너무 가볍다면, 아들을 재어 보실 수는 없었습니까.”

“이미 죽고 없는 황자를 위해서 말인가.”

“저 창녀의 아비 모를 아이에게는 봉토까지 하사하시면서!”

엘로이즈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루드비히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데른의 이름을 걸고 내가 낳은 당신의 아이가, 당신의 다른 자식들에게 죽는 것은 그저 두고 보십니까!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엘로이즈가 목이라도 졸린 듯 급히 숨을 몰아쉬며 조각난 말들을 토해냈다. 아드리아나가 걱정스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부디 진정하시고…….”

“내 아들이, 내 아들이 죽을 때도, 이 창녀와 붙어먹기만 하고 있었겠지.”

“무슨 말을 해도 좋으니 숨을 고르게 쉬세요, 제발.”

“……죽어야지.”

“전하.”

“죽어야지, 당신이라도.”

“전하!”

엘로이즈가 홀린 것처럼 칼이 매달린 벽으로 달려갔다. 앞으로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가느다란 몸이 휘청거렸다.

“베르텐! 근위병!”

아드리아나가 새된 목소리로 바깥의 시종을 부르며 엘로이즈를 쫓아갔다. 아드리아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시종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 엘로이즈가 제 몸의 반만 한 칼을 벽에서 빼어 들었다. 무거운 날붙이가 선득하게 허공을 가르자 아드리아나가 뒤로 물러났다.

엘로이즈가 루드비히에게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루드비히는 동요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베르텐, 전하를!”

“전하!”

엘로이즈는 고작 네 걸음 정도를 남겨두고 시종에게 붙잡혔다. 그녀가 휘두른 칼이 시종의 팔을 스치듯 베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엘로이즈는 이윽고 근위병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 목구멍 속 살을 갉아 낸 것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루드비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시데른으로 돌려보내졌다.

빌키어스가 피곤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갈로이스 드 카디링거, 후작이 테이블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를 발견한 빌키어스가 반색했다.

“외숙, 언제 오셨습니까.”

“오후 늦게 도착했으니 얼마 안 되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하.”

빌키어스의 뒤에 서 있던 시동이 빌키어스의 프록코트며 그의 얼굴을 반절 가리고 있던 리넨천 같은 것들을 바쁘게 받아 들었다. 가벼운 베스트 차림이 된 빌키어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테이블로 걸어왔다. 빌키어스가 가까워지자 약 냄새가 찬 기운과 함께 풍겼다. 후작은 피식 웃었다.

“젊음이 좋긴 한가 봅니다. 이 외숙은 이제 방 안에서도 코트를 껴입고 사는데.”

후작의 바짝 날이 서 있던 날카로운 인상에 온기가 돌았다. 제법 오랜만에 조카를 본 눈이 흡족한 듯 휘어졌다. 빌키어스가 멋쩍은 듯 설핏 웃었다.

“순방 때문에 조금 날이 서 있는 것도 있고, 그러합니다. 아, 몸은 괜찮으십니까. 제 가까이 계시면 아직은……. 오늘 종일 구호소에 있었거든요.”

“전염병이야 이제 다 지나갔고, 전하께서 정작 피해 지역을 돌고 계시는데 제가 이조차 꺼린다면 좀 우스울 겁니다.”

“괜한 고집 부려 죄송하군요. 어차피 캐롤링에서 돌아오던 길목에 있으니 지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전하께서 알아서 제 이름값 하신다는 데 말릴이유야 없습니다. 다만 피해 지역 순방까지 겹쳐 수도가 오래 비어 있으니 슬슬 불안해지기는 하는군요.”

카디링거 후의 말에 빌키어스가 옅게 짓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6황자가 죽었습니다.”

후작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안이…….”

“전염병이 한풀 꺾이던 차에. 안된 일이긴 합니다만 어찌 보면 잘된 일이기도 합니다.”

빌키어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란토니아에서 자라기엔 앞이 막막한 아이였습니다.”

시데른에서 온 6황자의 모친은 측근 하나 없이 평생 제 궁에 틀어박혀 산 것이 전부였으므로, 실상 6황자는 곧 어리다는 그 초라한 방어막조차 사라지면 당장 한 치 앞도 불안할 존재였다. 굳이 카디링거나 에델가르드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제 막막함에 눌려 스스로 사그라지고 말 것이다.

제 부황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빌키어스는 그 사실을 쓰게 인정했다. 그리고 이 일이 제게 장차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루드비히의 말대로 어쩌면 그것이 바로 제 태생이었다. 지극히 고귀하고도 추한. 그는 목구멍 아래로 역겹게 차오르는 욕지기를 가까스로 눌렀다.

“곧 장례가 치러질 것이나 그 어미조차 없으니 전하께서 돌아와 계셔야 합니다.”

“4황비는?”

“그녀는 황자가 죽고 며칠 후 시데른으로 돌아갔습니다.”

“…….”

“어쩌면 돌려보내진 것이기도 하고요.”

“황자가 죽은 지 고작 며칠 만에.”

“그랬지요.”

“부황께서 그리하셨습니까?”

빌키어스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후작이 비식 웃었다.

“적어도 그 일에 관하여 폐하를 원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황비가 카디링거며 에델가르드에 꽤 부질없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어차피 물정 모르는 그 어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지나치다 생각하십니까.”

“본디 누가 죽으면 그것이 어떤 형태였든 반대편부터 바라보고 마는 것은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죽음이 도무지 죽을 리 없다고 믿어 온 열 살짜리의 것이라면 더더욱.”

후작은 빌키어스의 말을 들으며 느긋하게 뒤로 몸을 기댔다.

“설령 바깥으로 그 소음이 샌다고 해도, 차라리 죽은 이에 대한 예의나 다름없을 겁니다.”

“이 외숙은 전하가 그리 말씀하실 때마다 흐뭇합니다마는, 이번은 실상 황비를 쫓아낸 것보다는 살려 준 것에 가깝습니다.”

빌키어스가 가만히 후작을 바라보았다.

“밀정에 의하면, 황비가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는군요. 들어 보니 결코 성공할 수 없을 방법으로 시도한 것 같기는 하나.”

“…….”

“전하께서 부황의 안위를 물어 주시지 않아 기쁩니다. 이 외숙은 생각이 바뀌었거든요.”

카디링거 후는 우아하게 몸을 앞으로 일으켰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벽안 위로 서늘한 예기가 떠올랐다.

“더 이상 폐하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기로.”

“외숙.”

“그가 마지막으로 제정신이었을 때 전하께 주신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

“전하를, 저버리신 것입니다.”

빌키어스는 문득 말없이 돌아서던 제 부황의 등을 떠올렸다. 그가 후작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후작은 어느덧 날이 선 얼굴로 입매를 끌어 올렸다.

“황제께서 종일 끼고 사시는 그 캐롤링 계집이 듣기로 죽은 황후를 빼다 박았다지요. 황제께서는 이제 그 계집을 죽은 황후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뫼시고, 그 계집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제 말처럼 생각하라고 공언했습니다. 황제궁은 이제 그 계집의 입으로 돌아갑니다.

고작 다리 벌려 출세한 그 젠트리 계집 말입니다. 차라리 그 계집이 에델가르드 손을 탄 것은 다행이지요. 적어도 그 계집 뒤에서 멀쩡하게 떠들기는 할 테니까.”

“…….”

“그는 결코 회생할 수 없을 겁니다. 놓아 버린 것들을 되잡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새로운 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이복형제들은 모두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빌키어스는 제 목은 언제 치겠느냐는 물음에 기묘한 시선으로 저를 내려다보던 루드비히를 떠올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 황제가 바라는 다음은 자신이었다. 빌키어스는 그리 어렵지도 않게 황제가 제게 남겨 둔 날들을 세어 보았다.

빌키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천천히 걸 어갔다. 후작은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그의 뒤에 대고 말을 이었다.

“전하와, 에델가르드의 그 계집뿐이지요.”

“폐하를 끌어내리실 작정입니까?”

“이제는 황녀보다 그가 더 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비올레타보다, 더.”

빌키어스가 제 외숙의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

“저 황위가 더 너절해지기 전에, 말입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빌키어스의 입매가 조금 비틀렸다.

“온 수도에 전염병이 돌고, 그 병에 제 열 살배기 아들마저 죽어 가는데도 계집을 품에 안고 밀포프에 취해 널브러져 있던 황젭니다. 세상은 그를 버렸습니다. 이제…….”

“…….”

“전하께서만 부황을 버리시면 됩니다.”

정말로, 우리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하십니까. 제 앞에 없는 루드비히는 다시 묻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있다 해도 않을 것을 안다. 기실 그에게는 제 부황을 버릴 자격이 없었다. 제게는 단 한 번도 아비가 없었다.

빌키어스는 싸늘한 벽안을 들어 어두운 하늘 위로 연기가 흐릿하게 번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시체들은 끊임없이 다시 생겨나고, 태워졌다. 빌키어스는 문득 그 아수라장을 모두 루드비히의 발아래 헝클어진 형상처럼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가,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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