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5장>
견고한 석벽을 비추며 작은 불빛이 움직였다. 비올레타는 불빛을 따라 어둠 속에서 돌계단을 내려갔다.
수도 북문 바깥에 위치한 이름 없는 탑, 통칭 북의 탑이라 불리는 감옥은 바깥보다 훨씬 더 낮은 땅에 위치해 있었다. 바깥에서 보기엔 탑이 아니라 4층 정도의, 그저 조금 오래된 석조 건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북의 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통해 꽤 아래까지 내려와야만 했다. 비올레타는 돌바닥 사이로 자꾸만 끼이는 제 구두 굽을 신경질적으로 빼내며 밤하늘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마치 거대한 우물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낮에도 을씨년스러운 이곳은 밤이 되자 괴기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겼다. 비올레타는 경직된 얼굴로 빠르게 걸어 북의 탑에 들어섰다.
사실 북의 탑은 그 황량한 외관과는 달리, 고위 귀족이나 황족 신분의 죄인들이 주로 격리되는 곳이었기에 꽤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는 편이었다. 비올레타는 작은 불이 간간이 밝혀져 있는 복도를 걸으며 제 드레스 아래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낡은 카펫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쥐색의 카펫은 곳곳이 헤져 있었으나 기묘할 정도로 정갈했다.
이윽고 계단이 나타나자, 비올레타의 기사들과 탑의 간수들이 멈춰 섰다. 북의 탑을 총괄하는 틸렌 백은 층계참에서 비올레타의 곁에 서 있던 미첼에게만 고갯짓을 했다.
기사 중 그 하나만 올라올수 있다는 뜻이었다. 틸렌 백을 따라 층계를 올라서는 비올레타의 뒤로 미첼이 따랐다.
숨 막히게 고요한 정적 속에 그들의 발소리만 조용히 이어졌다. 틸렌 백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6층이었다.
계단이 낮고 평평해 올라오는 것 자체는 그리 힘들지 않았으나, 바깥에서부터 쉬지 않고 빠르게 걸어온 탓에 어쩔 수 없이 숨이 찼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미첼이 조심스럽게 묻는 소리에 앞서 걷던 틸렌 백이 고개를 돌렸다. 비올레타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었다.
6층의 복도는 1층과 별다를 바 없었으나 불빛이 훨씬 더 드물었다. 비올레타는 가늘게 눈매를 좁히며 희미한 불빛 사이를 걸었다.
기다란 복도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 하나도 없었다. 바깥의 쌀쌀한 가을 공기와는 다른, 눅눅하고 음습한 찬 기운이 폐부를 파고들었다.
틸렌 백은 비올레타를 복도의 끝까지 안내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비올레타는 문밖에 서서 잠시 안을 들여다보다, 미첼에게 문밖에서 기다리라 지시하며 방 안으로 혼자 들어섰다.
테이블 위에 화병까지 놓여 있는 방은 결코 감옥 같지는 않았으나, 이 방의 주인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작은 침대와 테이블을 제하고도 방 안은 조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지만 마치 낡은 여관방 같은 인상을 주었다.
비올레타는 제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좀 더 걸어 들어갔다. 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던 남자가 우아하게 일어섰다.
“베론 후.”
남자가 천천히 뒤돌았다. 그러나 비올레타를 바라보진 못했다. 비올레타의 시선이 복잡해졌다.
“이카르트.”
비올레타가 조금 더 누그러진 목소리로 한 번 더 이카르트를 불렀다. 이카르트가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여름부터 가을의 절반에 이르기까지, 햇빛 한번 쐬지 못한 남자의 낯빛이 창백했다.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은 여전히 미려하고 단정했으나 마른 탓에 예전 같지 않았다.
이카르트 드 베론, 베론의 장자는 제 아비가 참수형을 당하던 날 북의 탑으로 끌려와 감금된 채로 작위를 승계받았다. 베론 령에서 살고 있던 그의 어린 이복형제들마저도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도 그만이 살아남은 이유는 오직 알브레흐트 칙령에 따른것이었다.
알브레흐트 칙령은 황가를 제한 추밀원 10가문을 황제에게서 대대로 보호하기 위해 크리스티안 대제가 내린 칙령으로, 칙령에 따라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의 가문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었다. 그리고 이카르트는 황제가 베론을 앞으로도 세상에 남겨두겠다는, 단 하나의 표식 같은 존재였다.
‘때로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 평생입니다.’
비올레타는 클레이런스 후의 목소리를 문득 떠올렸다. 거대한 가문 속에, 그 막연한 미래 앞에 홀로 남겨진다는 것을 그녀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살아남는 것만이 의무가 되는 삶.
“……평생, 면목이 없습니다.”
지독한 피로에 잠긴 목소리였다. 연한 청록색의 눈동자가 어스름한 불빛을 받고 일렁거렸다. 비올레타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다, 이내 말을 돌렸다.
“많이 말랐네요.”
이카르트가 비올레타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엷게 웃었다. 마른 눈가가 해사하게 휘어졌다.
비올레타는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말간 얼굴 위에는 신기할 정도로 원망이 없었다.
그에게는 원망할 사람이 수없이 많은데도 그러했다. 그중 대부분이 이미 죽어 버렸다고 해도. 그의 눈에는 그가 가지지 않아도 될 죄악감만이 가득했다.
비올레타는 어쩔 수 없이 이카르트가 안타까웠다. 그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다.
이카르트의 허름한 행색을 천천히 훑던 비올레타가 이윽고 살짝 벌려져 있던 입매를 차갑게 다물었다. 어느덧 무심해진 시선이 이카르트의 눈을 향했다. 이카르트는 눈을 내리깔았다.
“황제께서는 베론 경이, 아니, 베론 후께서 평생 북의 탑에서 그 작위를 이어 나가길 원하십니다.”
“마땅한 처우라 생각됩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것이 그리 적당하지 않아요.”
비올레타의 말에 이카르트가 시선을 들었다. 비올레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매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후께서는 곧 이곳을 나올 수 있을 거예요.”
“……어째서입니까?”
“내가 원하니까.”
“옛정에 기대어 동정하실 필요도, 저를 도우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후작, 나는 얄궂은 동정 하나 떨겠다고 이 수고를 감수한 것이 아녜요.”
비올레타가 천천히 이카르트의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서 나가면…….”
비올레타의 손끝이 이카르트의 셔츠 칼라를 정돈하듯 매만졌다. 이카르트가 조금 딱딱하게 굳었다.
“베론 령으로 곧장 가요.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 원하는 대로 살아요.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 극작, 그림…….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 그리고 당신이 잘하는 것들을 해요.”
“…….”
“그 안에서, 평생 살아도 죽은 것처럼, 그렇게 살아요.”
비올레타가 낮고 차갑게, 그러나 기묘한 온기가 도는 목소리로 이카르트에게 속삭였다. 이카르트는 비올레타를 향해 내리깐 눈을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속을 헤집어 보는 듯한 시선에도 비올레타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은 다시 행복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내가 그행복의 대가로 바라는 건 단 하나예요.”
“…….”
“장래에 내 황위가 당신의 앞에서 거론될 때, 당신이 내 이름에 손을 드는 것.”
이카르트는 천천히 비올레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비올레타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죄인인 당신은 할 수 없지만, 베론 후인 당신은 할 수 있는 일이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어요. 당신은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나와야 해요. 당신이 베론 후로서 자리를 잡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것뿐입니까.”
“…….”
“제게 바라시는 것이.”
비올레타는 가만히 시선을 들었다.
“행복해요. 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많이.”
“…….”
“이 제안에 동정 한 점 들어가지 않았다고는 나도 말 못 해요. 난 당신의 가문을 증오해요.”
비올레타는 제가 매만지다 되레 조금 더 흐트러진 이카르트의 칼라에 손을 뻗어 가볍게 바로잡았다.
“하지만 당신은 내 친구였죠. 그리고 여전히 그렇고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노란색의 크고 작은 등롱들이 걸려 있던 가게들과, 밤하늘을 별처럼 수놓은 풍등들, 그리고 귓가를 가득 메우던 온갖 소음, 술집의 노래……. 비올레타는 몇 년 전 야시장을 아득하게 떠올렸다. 그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름을 달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웃고 떠들었던 단 하룻밤.
그것만큼은 에비가일도, 비올레타도 누려 보지 못한 단 한 번의 호사였다. 그녀는 우아하게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조금 흐려져 있던 암녹색 눈동자가 다시 선명한 빛깔을 띠었다.
“어쩌면 오래된 빚을 갚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요.”
“……그 책.”
이카르트가 천천히 웃었다.
“처음 만났던 때. 기억하십니까, 레이디 드봐리?”
“아…….”
대뜸 튀어나온 상상도 못 했던 화제에 비올레타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사실은 그 책을 읽지 않으신 것, 알고 있습니다.”
“……뭐?”
“그 책은 그날 제가 빌렸었거든요.”
비올레타가 눈만 깜빡이며 순간 망연해진 것을 이카르트가 말끄러미 제 눈에 담듯 응시했다. 이카르트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제안은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멎어 있던 마른 입술이 이내 천천히 달싹였다.
“이름,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올레타는 그를 얼마간 조용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녀는 다시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베론 후의 처형 이후 줄곧 공석이었던 궁내부 장관의 내정자 이야기로 수도가 시끄러웠다. 장관 직무를 대행 중인 브나리오 백이 어젯밤 판틸루아 백작부인의 살롱에서 넌지시 꺼낸 말이 그 시초였다.
5황녀가 계승 전쟁에 뛰어들고, 그로도 모자라 1황자에 이은 유력한 차기 계승권자로 떠오른 것이 봄이 끝날 무렵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의 모후인 황후가 죽었다. 그로 인해 쇠락한 것은 다름 아닌 4황자 측이었다. 장성한 황자가 하나 사라지면서 1황자 빌키어스의 위치는 더욱더 공고해졌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황제는 그 사태를 보상이라도 하듯 에델가르드에 많은 것을 안겨 주고 있었다. 내무 장관인 에델가르드 공이 쥐게 된 더 많은 권세와 더불어 그와 관련된 수많은 인사들이 고위 관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본래 카디링거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수많은 영역들 속으로 에델가르드가 사방에서 파고드는 형세였다.
크고 작은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것이 바로 여름 내내 일어난 일이었다. 또한 가을의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일이었다.
추수제가 가까워지도록 비어 있던 궁내부는 그중 소란의 중심이었다. 뻔한 예상으로는 에델가르드와 오랜 동맹 관계인 메이어 백이, 그리고 황제의 유일한 친조카이자 5황녀를 지지하는 로드리고 후가 있었다.
죽은 황태자를 전폭 지지했던 루도비카 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몇 가지의 예상은 지금의 판도로 봤을 때 꽤나 타당한 것이었다.
브나리오 백이 입을 열어 전혀 다른 말을 흘리기 전까지는.
비올레타는 기다란 회랑 끝에서 라키엘이 나타나자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새하얀 포렐 산 대리석 위로 붉은 공단 구두가 또각또각 빠르게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천천히 마주 걸어오던 라키엘이 이내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이윽고 비올레타가 라키엘 앞에 섰다.
“당신 들었어요?”
“내가 들었으니, 네가 들을 수 있었겠지.”
라키엘의 시선이 가볍게 비올레타를 훑었다. 라키엘이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매끄럽게 끌어올렸다.
“어제 선물한 거군.”
“…….”
“잘 어울려.”
비올레타가 라키엘의 칭찬에 눈가를 찡그렸다. 태평하게 드레스나 칭찬한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옆을 지나 걸어갔다. 비올레타가 몸을 돌려 그를 따랐다.
“다이크 백? 이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말이 안 되는 건 브나리오 백이 판틸루아의 살롱에 앉아 있었다는 거지.”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말에 여상하게 대꾸하며 낮게 웃었다. 브나리오 백이 젊은 시절 판틸루아 백작부인과 꽤 불같은 연애를 하다 헤어졌던 사이인 것을 두고 비꼰 말이었다.
판틸루아 백작 부부의 유난스러운 금슬은 꽤 유명한 일이었으므로 그 모임이 그리 달가운 분위기는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할 거리는 못 되었다.
“궁내부 장관 내정, 언제 나온 이야기예요?”
“일주일 전?”
“당신은 언제 알았는데?”
“어제. 브나리오 백이 살롱에서 그 말을 흘리고 나서.”
라키엘조차도 전혀 진행 상황을 몰랐다는 소리였다. 비올레타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로지 황제와 브나리오 백 사이에서 조용히 일어난 일. 라키엘의 곁에서 나란히 걷던 비올레타가 멈춰 섰다. 라키엘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말 안 했어요. 어젯밤에 왔으면서.”
“산통 깨기 싫어서. 드레스 받고 좋아했잖아.”
라키엘이 담백하게 대꾸했다. 비올레타가 순간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좋아해서 깨기 싫었던 게 아니라, 그 뒤에 내 침대로 가는 길이 막힐까 봐 그랬던 건 아녜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라키엘이 뻔뻔하게 수긍했다. 비올레타가 얄미운 듯 라키엘을 노려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있는 사안도 아니야.”
“로드리고 후로 거의 기울었었잖아요. 이제 와서 다이크라니.”
“본인이 싫은 티를 오죽 냈어야지.”
“좋아하는 눈치였는데?”
“그건 네 앞이라.”
“무슨 상관이에요, 그게.”
“네 앞인 거. 그게 중요하지.”
라키엘이 삐뚜름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비올레타는 그제야 이해한 듯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라키엘이 가늘게 눈을 좁혔다.
“아?”
마치 비아냥거림처럼 똑같이 돌아오는 소리에 비올레타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납득하는 것 같기에.”
“뭘 납득해요, 내가?”
“로드리고가 자꾸만 네 앞에서만 가당찮게 체면 차리고, 기꺼워하고, 달가운 척하는, 그 같잖은 이유.”
“당신은 대체 혼자서 몇 년째 무슨 꿈을 꾸는 거예요? 지금 수도에 그 사람 애인이 몇인데.”
가당치도 않다는 듯 비올레타가 코웃음을 쳤다. 라키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픽 소리만 내어 웃었다.
“꿈은 그자가 꾸는 거고.”
“……이 일, 당신이 그대로 둬도 되는 문제예요?”
켕기는 것도 없이 괜히 켕기는 기분이 들어 비올레타가 말을 돌렸다. 라키엘이 모른 체하며 대꾸해 주었다.
“별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별일 할 필요 없는 일이기도 하지.”
“필요 없다면…….”
“카디링거 후가 줄곧 주시하고 있던 자리야. 작위를 승계 받은 후로 그가 마땅히 낚아챌 자리가 없었기도 했고.”
“그 가능성은 당신이 여름 내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거였어요. 차라리 그가 잡았어야죠.”
“잡았지, 그가.”
라키엘의 말에 비올레타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크는 카디링거와 아주 오래전부터 잦은 혼인과 거래를 해 온 관계였다. 에델가르드와 메이어가 그래 왔듯이. 특히 그 유대는 선대 카디링거 후의 대에서 대대적인 협력관계로 발전하게 됐는데, 몇몇 이들은 다이크를 일컬어 카디링거의 충신이라 비꼴 정도였다.
“그럼, 본인은 전면에 나서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기다리다 지친 김에, 더 뒤로 몸을 숨길 심산이지. 조심성 많던 제 아비를 닮아 가는 건지는 몰라도. 제가 앞에 서 있었으면 바로 구정물 뒤집어쓸 일을 꾸며 보는 중일지도 모르고. 어차피 그가 하나는 쥐어야 했어.”
그러다 진짜 빈손이 되면 무슨 미친 짓을 할지 모르니까. 라키엘이 평온한 어조로 덧붙였다. 비올레타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잃을 게 없으면 조심할 것도 없거든.”
“…….”
“그리고 세상 모르게 황제와 거래할 수 있는 게 카디링거 후만은 아니고.”
라키엘이 입매를 비스듬히 말아 올렸다.
“1황자는 추수제가 열리기 전에, 캐롤링에 보내질 거야.”
메이어가의 홀에 조심스레 들어선 청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야회복을 입은 젊은 남녀들이 제각기 무리를 지어 홀 안을 걸어 다녔다. 경쾌한 음악 소리가 발밑으로 흘렀다.
야회의 주인공이 이제 갓 스물이 된 메이어가의 영애였으므로, 참석자들 역시 대부분 수도 귀족의 또래 영윤이나 영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청년이 미려한 얼굴을 조금 찡그리며 그 속으로 걸었다. 몇몇 영애들이 그와 눈을 마주치며 수줍게 웃고는 이내 제 동행과 수군거렸다. 청년은 익숙한 듯 그것을 모두 지나쳤다.
“막시밀리안!”
홀 안쪽, 멀찍이 서 있던 청년들이 막시밀리안 헬텐을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몰려왔다. 막시밀리안이 웃었다.
“헬텐, 늦게 왔군.”
“너 안 오면 오늘 빈손으로 돌아갈 뻔했어. 네가 오늘 온대도, 길렛, 그년이 네가 오는 건 믿지도 않고…….”
벨루느 백작의 조카로, 종종 잘생긴 막시밀리안의 이름을 팔아 여자에게 접근하던 사관학교 동기였다. 그가 아마 제 가문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고 다닌 것이 막시밀리안일 것이었다.
그나마 잘난 혈통 덕분에 제 친구들을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기는 했다. 수도 명문가 자녀들이 대부분인 이 고급스러운 야회에 막시밀리안이 지금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구구절절 이어지는 벨루느의 말을 예의상 듣고 있던 막시밀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매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메이어 영애는?”
“지금 메이어 영애가 문제가 아냐. 너 오늘 여기 오길 진짜 잘한 거라고.”
“왜.”
“황녀께서 곧 오신다고 난리야.”
막시밀리안은 친구들의 말을 그다지 귀 기울여 듣지도 않고, 가늘게 뜬 눈으로 저 멀리 서 있는 밀로일라 메이어를 찾아냈다. 그녀는 지금 그가 잡을 수 있는 최대한의 가능성이었다.
열여덟에 궁정에 들어가 황녀의 최측근이 된 메이어의 영애. 어차피 그로서는 꿈도 못 꿀 상대였다. 그러나 추밀원, 메이어의 은행들, 거대한 자산,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막시밀리안에겐 새로운 줄이 필요했다. 잠깐의 불같은 연애와, 그것이 제게 줄 기회.
막시밀리안 헬텐은 기병대 견습 사관 출신으로 잉거스트전 당시 밀니로의 칼베르 지역에서 복무 후 제대했다. 후방으로 돌려져 실제 전투조차 겪은 적 없으나 그는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후에도 사관학교 시절처럼 제복을 입고 다녔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솔란테어참전 훈장뿐이었기 때문이다.
카디링거 후를 따르던 제 후견인이 에델가르드에 의해 여름에 실각한 후, 막시밀리안은 허공에 붕 떠 있는 상태였다. 카디링거는 실각한 개를 돌보지 않았다.
가난한 방계 귀족이었던 부친이 그나마 죽기 전 쌓아 둔 인맥이 그를 사관학교까지 보내 주었으나 그것이 한계였다. 1황자를 우상처럼 여기던 청년은 이제 없었다.
어차피 1황자는 평생 제 얼굴도 모를 테니까. 그는 출세하고 싶었다. 출세해야 했다.
문득 주위가 웅성거렸다. 막시밀리안이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그가 지나온 작은 문과는 다른, 홀 중앙의 커다란 문 사이로 로드리고 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황녀가 들어섰다. 한쪽 어깨로 우아하게 넘긴 적갈색 머리칼 위로 샹들리에 빛이 쏟아져 내렸다.
막시밀리안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시끄럽게 유난을 떠는 제 친구들 사이에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문보단 못하네.”
막시밀리안이 짧게 감상을 내뱉자 곁에 있던 친구 하나가 정색하고 그의 옆구리를 쳤다. 베르됭 회담 이후 황녀를 숭배하다시피 하던 친구였다. 막시밀리안이 픽 웃었다.
“빌어먹을 새끼가. 그 싸구려 신문이 반도 못 담은 건데, 무슨 개소리야.”
“헤른, 저기 네 여신이네.”
“네 여신님을 드디어 영접한 기분이 어때.”
청년들이 헤른이라고 불린 청년을 놀리기 시작했다. 헤른이 벌건 얼굴로 화내면서도 부정하지도 못하고 황녀를 바라보았다.
막시밀리안은 그를 따라 황녀를 응시했다. 어느덧 그녀의 앞에는 보엘리테 가의 젊은 백작이 서 있었다. 막시밀리안도 크고 작은 연회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연회에서 하급 장교들을 볼 때마다 경멸스럽다는 듯 일그러지던 눈매가 문득 떠올랐다.
“황녀가 이제 실세긴 실세인 모양인데.”
“그 콧대 높은 보엘리테도 줄을 서는군. 이제 청탁이 5황녀궁 먼지 닦는 하녀들한테까지 들어간다던데. 여제도 어쩌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계집이 황제가 돼.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 줄 알고 벌써부터 섣불리 줄을 서고 있는 건지.”
“지금 황녀만큼 황제에게 더 말이 잘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아? 적어도 당장 얻어먹고 싶은 게 있으면…….”
평생 자신들과는 상관도 없을 이야기를 아는 척 떠들어 대는 것이 우스웠지만, 막시밀리안은 그것을 비웃지 않고 들었다. 마침 보엘리테 백에게서 어떤 농담이라도 들은 듯 황녀가 웃었다.
막시밀리안은 제 친구들의 무의미한 토론 속에서 그것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막시밀리안의 시선이 못 박힌 것처럼 그녀의 얼굴 위에서 멈추었다.
시녀들조차 깨지 않은 이른 오전이었다. 비올레타는 홀로 피곤한 눈을 깜빡이며 서고에 들어섰다. 늦게까지 야회에 있다 돌아오고도 얼마 자지 못해 피곤했다. 더 잘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도록 이미 아침에 길들어 버린 몸이 야속했다. 그녀는 거의 병적으로 부지런해졌다.
비올레타가 책장 사이로 천천히 걸었다. 마른 종이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그녀의 궁에 딸린 서고는 개축 당시 라키엘이 몇 개의 방을 합쳐 넓혀 둔 것이라 규모가 제법 컸다. 선반 위 책들을 눈으로 훑으며 걸음을 옮기던 비올레타가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서고를 관리하는 시녀이겠거니 싶어 비올레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책장 끝을 돌아 몇 칸을 지나자 비올레타의 예상대로 시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른 사람도.
“황녀 전하.”
비올레타를 발견한 서고 시녀 에일로테가 급히 허리를 숙였다. 비올레타가 웃으며 인사를 받고, 시녀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잘생긴 남자였다. 에일로테가 곤란한 얼굴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비올레타가 묘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남자가 황제의 시종 중 하나이리라 생각한 비올레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귀족 출신인 시종과 시녀가 궁정에서 눈 맞아 연애하는 일은 흔했고, 혼인까지 해 궁정을 나가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아, 이분은…….”
“연인이지? 소개해 줄래?”
“막시밀리안 헬텐입니다. 에일로테의 사촌 오빠고요.”
남자가 우아하게 머리를 숙였다. 비올레타가 허락하기도 전에 스스로 말한 것이 무례했으나, 비올레타가 그 무례를 바로 느끼지도 못할 만큼 그는 당연하게 행동했다. 에일로테가 조금 놀라 막시밀리안을 나무라듯 힐끗 보고는 황급히 덧붙였다.
“막시밀리안은 제 고모의 아들인데, 궁정 법도가 익숙하지 않아서…….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전하.”
“괜찮아. 재밌는 사람인데.”
“이틀 전 스트라고에서 책 수백 권이 한꺼번에 들어와서, 정리가 막막한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막시밀리안에게 도움을 청해 어제 궁으로 들여왔고요. 글자도 제대로 모르는 하녀 아이를 잡고 함께할 수도 없고, 마땅히 도와줄 만한 시녀 분도 계시지 않고…….”
“사내의 힘도 필요했겠지. 괜찮아.”
비올레타가 구구절절하게 변해 가는 에일로테의 설명을 끊으며 말했다. 밀로일라나 디아나, 루이즈를 비롯한 비올레타의 측근 시녀들을 제해도 그녀의 궁에는 귀족 시녀가 열 명은 족히 넘었다.
작은 문으로 그녀들이 초대한 친인척이 넘나드는 것이야 그리 별일이 아니었다. 그녀들에겐 그럴만한 지위가 있었다.
비올레타는 그들의 뒤로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들과, 그들이 정말로 책들을 정리하고 있었던 흔적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든, 그들의 말대로 진짜 친척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비올레타가 다시 눈을 들어 막시밀리안과 에일로테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흐트러진 셔츠 칼라와 밑단이 구겨진 드레스, 말려 올라간 리본 위를 훑었다. 비올레타는 그 주위의 책들을 모두 내다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로 말갛게 웃었다.
막시밀리안이 비올레타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에일로테가 황녀 전하의 시녀로 입궁하긴 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뵐 수 있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정말이지 꿈만 같습니다.”
“사실 그리 꿈같은 존재는 아니에요.”
“그날의 델 포르데는 충격이었습니다. 이후로 늘 흠모해 왔고요.”
“그 얼굴로 그렇게 말해 주니, 나쁘지 않네요.”
비올레타가 픽 웃었다.
“한 번, 실제로 멀리서라도 뵐 수만 있다면, 하고 얼마나 바랐었는데 오늘…….”
“그게 영윤의 바람이었다면, 이룬 적 있죠.”
“예?”
“어제 야회, 나도 영윤도 있었잖아요.”
막시밀리안이 조금 당황한 듯 입을 벌렸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눈에 띄어요.”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지.
비올레타가 뒤돌아 걸어가며 낮게 덧붙인 말을 듣지 못한 막시밀리안이 진하게 웃었다.
“아주 전도유망한 청년이라지. 어린 나이에 자원해 전장에 뛰어들고, 솔란테어까지.”
“감사합니다.”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막시밀리안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요즘 귀족가 영윤들은 너무 안일해. 태만하고. 아비가 물려준 것 좀먹는 짓밖에 못하지.”
막시밀리안의 앞을 천천히 걸어 다니던 중년 남자가 이내 막시밀리안의 앞에 섰다. 남자의 손이 막시밀리안의 타이를 바로잡았다.
“자네는 달라 보여.”
언젠가 한 번, 제 후견인을 따라간 연회에서 저 높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카디링거 후의 왼편에 서서 오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던 남자.
“그래서 카디링거 후께서도 전해 들으신바 기대가 많네.”
“……감사합니다.”
“요즘 5황녀의 궁에 자주 드나든다지. 사촌인 시녀가 있어 황녀 전하 앞에서 차도 몇 잔 마셨고.”
“시녀들과 함께 있다가, 우연히 운이 좋아 그런 적은 있습니다.”
“사실 시녀로 들어갈 만한 친척이 자네에게 없는 건 알아. 사촌 여동생 같은 것도 없지.”
폰트넬 백작이 그 얕은 속을 다 알겠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막시밀리안이 얼굴을 굳혔다.
“야망이 있다는 건 좋은 걸세.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 역시 자네가 열심히 산다는 증거지.”
“…….”
“하지만 자네의 후견인인 빌론 남작이 실각했다고 해서 자네가 우리 아래에 있지 못할 이유가 없어. 자네는 아직 어리지. 굳이 늙은이에게 자네의 장래를 묶어 둘 필요는 없네.”
“그 말씀은…….”
“자네가 꿈꾸고 계획했던 그 창대한 일은 그만 접게. 그저 우리의 귀가 되는 거야. 황녀는 어차피 자네에게 꼬이지도 않을 걸세. 황녀는 자네가 생각한 것처럼 넘어올 계집이 못 돼. 그녀는 무늬만 어린 계집이지. 그것은 차치하고, 그저 지금처럼 시녀들 곁에 붙어 열심히 들어 보게. 가능한 오래.”
“…….”
“그러면 자네가 원하는 기회는 우리가 쥐여 주지.”
막시밀리안은 그 후로 거의 보름 가까이 부지런히 궁을 드나들었다. 그동안 막시밀리안과 친해진 시녀들은 대부분 막시밀리안이 듣기에 쓸데없는 소리만 했다. 혹은 원치 않았던 과도한 관심 또한 몇몇 영애에게 받았다.
잘생겼다는 것은 막시밀리안이 생각하기에 차라리 죄였다. 정작 중요한 황녀의 측근 시녀인 메이어나 몬드리올, 네이튼의 영애들은 황녀만큼이나 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작은 수확도 없던 와중에 황녀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은 막시밀리안에게 마치 꿈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물론 황녀의 사마관인 로이트 남작이 자리를 비웠으니 대신 말을 부릴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었으나 막시밀리안은 그렇게 들었다.
그는 자신을 볼 때 황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었는지를 떠올렸다. 잘생겼다는 말을 굳이 몇 번이나 할 필요가 없을 텐데. 설레는 얼굴로 그렇게 몇 번이나 말하던 것이 떠올라 막시밀리안은 미소 지었다.
황녀의 말은 갈기까지 칠흑처럼 새까만 말이었다. 막시밀리안이 본 수많은 고위 장교들의 준마들 중에서도 본 적 없는 큰 덩치였으나, 날렵하게 빠진 선이 아름다웠다. 막시밀리안은 황녀의 말과 제가 탈 사마관의 말을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왔네요.”
비올레타는 회랑에서 우아하게 내려섰다.
막시밀리안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갑자기 부탁해 미안해요. 시녀들에게 들으니 영윤이 말을 참 잘 다룬다기에.”
“내세울 만한 것은 아니나 부족함 역시 없노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신감이 좋네요.”
막시밀리안이 말 옆에 한쪽 무릎을 세워 꿇었다. 비올레타가 당연한 듯 그의 무릎을 딛고 말 위로 올라탔다. 드레스 자락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며 라벤더 향기가 훅 스며들었다. 막시밀리안은 조금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옆에 있는 사마관의 말에 올라탔다.
“헬텐, 궁정은 어때요?”
“어떻다 감상을 할 정도로 겪어 보진 못했으나, 아직까진 좋습니다. 늘 기분 좋은 일만 일어나고요.”
“시녀들이 요즘 얼굴이 밝아요. 영윤 덕분이겠죠.”
“원래 늘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내가 보는 눈이 있거든요.”
느긋하게 걷는 말 위에서 비올레타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쓰다듬었다. 막시밀리안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말이 참 멋집니다.”
“모후께서 선물하신 말이에요.”
“아…….”
“괜찮아요. 이름은 라키엘이고요.”
“그렇군요……. 네?”
“라키엘. 잘 어울리지 않아요?”
“설마 공작 각하…….”
“설마가 맞아요. 잘 어울리죠?”
여상하게 대꾸하는 비올레타를 막시밀리안이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올레타가 문득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적어도 이 라키엘은 나를 참 좋아해요.”
마치 이름의 주인인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 같아 막시밀리안이 어설프게 웃고 있던 표정을 흐렸다. 공작이 황녀에게 지극정성이라는 것은 꽤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그것이 알고 보니 겉치레일 뿐이었다고 해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편이 더 당연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엔 황녀의 말이 걸렸다.
비올레타가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어리석은 생각이죠. 이름 하나에 기댄다는 건.”
“…….”
“영윤, 그렇게 볼 필요 없어요. 좋은 족보에 제 이름 올린 사람치고, 진짜 사랑해서 결혼하는 자들이 어디 있겠어요? 아마 당신의 부모들도 그랬을 텐데.”
“그것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불행하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인걸요.”
비올레타는 처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막시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영윤은 몇 번 본 적도 없는데 참 신기하네요. 이렇게 편하게 말이 나온다는 게.”
“그러시다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비올레타가 옅게 웃으며 말의 허리를 찼다. 라키엘이라 불렸던 검은 말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자기도 모르게 안쓰럽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막시밀리안은 불현듯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폰트넬 백작이 절대 가망 없다고 못 박아 둔, 제 본래 계획으로.
그리고 그 결론은 곧 확신이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임시로 머물던 제 방에서 계산을 다시 하던 도중, 하녀의 방문을 받았다.
곧바로 알아볼 정도로 익숙한 얼굴이었다. 5황녀궁 내에서는 비올레타가 아끼기로 유명한 하녀 아이였다.
하녀는 황녀의 서편만 문 사이로 내밀어 전하고 곧장 사라졌다. 펴보자 간략하게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오늘 밤, 아홉 번째 종이 칠 때 내 방으로.
인생이 통째로 뒤집히는 기분에 막시밀리안은 방 안을 불안하게 걸어 다녔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던 것이었다.
누군가 절대로 안 될 거라 말했던 그 계획은 이제 현실이 되기 직전이었다. 제가 손하나 까딱 안 한 채로, 그렇게 가만히 있었는데도. 막시밀리안은 들떴다기보다는 차라리 초조했다.
제 후견인이 본디 카디링거로부터 예닐곱 계단은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제게 손을 내민 폰트넬 백작은 카디링거의 곧장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미래는 이미 달라졌다. 거창하진 않더라도 출세는 이제 정해진 수순이었고, 그는 그것을 천천히 기어 올라가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황녀의 눈에 든다면…….
종일 작은 방 안에서 저울을 재어 보던 막시밀리안은 결국 아홉 번째 종이 치자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는 빠른 길이 필요했다. 제 보잘것없는 출신, 제 불운한 처지를 뛰어넘을 만한 커다란 행운이 필요했다.
막시밀리안은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서쪽의 작은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불이 꺼져가는 어스름한 복도 위로 딱딱한 구두 소리가 울렸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비올레타의 하녀가 조금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가, 막시밀리안에게 따라오라는 듯 다시 뒤돌아 걸었다. 막시밀리안은 하녀를 따라 얼마간 걷다가 이내 비올레타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으나 하녀는 그에게 묻지 않고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제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만한 표정을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윽고 그의 등 뒤로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왔네요.”
낮과 똑같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황녀는 기다란 소파 위로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얇은 모슬린 드레스가 아래로 쏠려 허리 곡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저 드레스 안에 천이 몇 꺼풀 없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도, 드레스를 부풀릴 페티코트도 없는 옷이었다. 막시밀리안이 시선을 조금 낮추고, 공손히 예를 취했다.
“가까이 와요.”
막시밀리안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목울대 아래로 맥박이 시끄럽게 뛰었다. 비올레타가 몸을 조금 일으켰다.
“아주 오랫동안 흠모해 왔습니다. 이런 날은 감히 고대할 수조차 없을 만큼, 막연하고 간절하게. 이제 와 고백하건대 사촌인 에일로테를 핑계로 이곳에 온 것은 오로지 먼발치에서나마 전하를 한 번이라도 뵙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막시밀리안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비올레타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비올레타는 그것을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영윤은 계속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비올레타가 우아하게 막시밀리안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빼냈다.
“영윤의 후견인에 대해서도 들었죠.”
카디링거와 관련이 있지 않느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막시밀리안이 순간 얼굴을 굳혔다. 순진해 보이는 말간 눈동자에 희미하게 의심이 스며들었다. 막시밀리안은 서둘러 해명했다.
“빌론 남작께는 분명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 후견인을 따를 생각은 없습니다. 또한, 빌론 남작은 여름의 그 실각과 더불어 카디링거에서는 버려졌습니다.”
“…….”
“마치,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카디링거가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는 듯 막시밀리안이 치를 떨며 말했다. 물론 폰트넬 백작을 만나기 전만 해도 그가 카디링거에 대해 가진 감상은 오로지 그것이었으므로, 막시밀리안의 말에는 꽤 진정성이 있었다.
비올레타는 조금 가늘어진 눈매를 다시 온화하게 떴다. 막시밀리안이 그 눈에 조금 안도하고 겨우 숨을 뱉었다.
“믿어 주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막시밀리안의 뺨에 입 맞춰 주었다. 순간 달아오른 막시밀리안이 소파를 짚고 비올레타 쪽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비올레타가 그를 밀어내지도 않고 웃으며 속삭였다.
“그럼 당신은 아마도, 새로운 줄로 날 선택한 모양인데.”
막시밀리안이 굳은 얼굴로 비올레타에게서 몸을 뗐다.
“불쾌한가요? 내가 영윤을 오해한 건가?”
“불쾌합니다. 아무리 전하라고 하셔도, 제 마음을 그런 식으로 모욕하실 수는 없습니다.”
“나도 불쾌해요, 영윤.”
“예?”
“기회를 놓쳤군요. 새로운 줄 정도는 기꺼이 고려할 의사가 있었는데.”
비올레타가 쓰레기를 털어내듯 저를 가두고 있던 막시밀리안의 팔을 걷어 냈다.
“영윤에게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어요. 이 궁에 애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었고, 오늘 내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었죠. 어쩌면 방금, 당신이 얼마나 출세하고 싶은지 나한테 말할 수도 있었고요. 나머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영윤 스스로도 잘 알리라 믿어요.”
“…….”
“적어도 이 방에 당신이 온 것만큼은, 카디링거와 관련이 없다는 건 확인했어요. 그가 이렇게 어설플 리가 없지.”
비올레타가 화사하게 웃었다. 사랑 없는 결혼을 걱정하던 낮의 그 처연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여자가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그제야 황녀가 저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갖고 놀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충고 하나만 하자면, 줄은 하나만 잡는 게 좋아요. 하나 더 하자면 주제 파악은 잘할수록 좋고.”
“……전하, 저는.”
“카디링거 후에게는 즐거웠다고 전해 줘요. 전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약혼자가, 질투가 좀 심해서.
비올레타가 낮게 속삭이는 말에 막시밀리안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공작이 서 있었다.
“언제까지 모른 척하나 궁금했는데.”
“너무 짧았나?”
라키엘이 살벌하게 이죽거렸다. 비올레타가 빙그레 웃었다.
“조금 실망인 정도라고 해 두죠.”
“재밌었어?”
“별로.”
“재밌어 보이던데.”
라키엘은 비올레타의 앞에 편지 몇 장을 툭 던졌다. 막시밀리안이 그녀에게 연습 삼아 쓴 연서들과, 비올레타가 낮에 그에게 짧게 보낸 서편이었다. 비올레타가 환하게 웃으며 막시밀리안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라키엘이 그것을 바로 뺏었다.
“보라고 준 것 아니에요? 왜 뺏어?”
“죽을 때까지 볼 일 없을 거야.”
라키엘이 친절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비올레타가 코웃음을 쳤다.
“여태 별일 없었잖아요. 당신이라면 다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 스무날 가까이 아무 일도 없었지. 아까 전까지는.”
“…….”
“키스할 필요는 없었잖아. 안 그래?”
“불쌍하잖아요. 이용조차 제대로 못 당하고.”
“위로 선물이라도 돼?”
“그도 추억 하나쯤은 있어야죠.”
라키엘이 기가 막힌 듯 웃었다. 그리고 이내 서늘해진 얼굴로 다가왔다.
“내가 보고 있는 거, 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었으니까 했죠. 난 그 영윤이 너무 괘씸했거든.”
비올레타가 해사하게 웃으며 라키엘의 크라바트를 잡아 당겼다. 비올레타에게 순순히 몸을 숙여 준 라키엘이 소파를 짚었다. 얼굴이 아주 가까웠다. 집요한 시선이 맞부딪쳤다.
“이제 날 갖고 놀기도 하는군.”
라키엘이 비식 웃었다. 비올레타가 매끄럽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당신 작품이에요.”
파사칼리아가 죽은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추수제도 가까워졌으나 파사칼리아의 시신은 아직 어디에도 안치되지 못했다. 드레스덴 외곽에서는 파사칼리아의 무덤을 위한 거대한 사원이 지어지고 있었다.
나라 곳곳이 흉작으로 시름에 잠긴 시기였다. 당연하게도 반대가 거셌으나 루드비히가 백 일도 넘게 정무 회의에 나타나지 않아 소용이 없었다.
황제는 이제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그동안 황제의 시종은 일곱 명이나 죽었다. 오늘로 그렇게 되었다.
별다른 이유조차 없었다. 황제의 시종들은 모두 명문 귀족가의 아들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결코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끝날 수 없는 일이었다. 루드비히는 날이 갈수록 광폭해졌다.
비올레타는 시종장 프란츠가 사후 처리에 관해 보고하는 것을 루드비히 대신 홀로 들었다. 빌키어스는 캐롤링에 대사로 떠났고, 황궁 안에 장성한 황족이라곤 오로지 비올레타 하나였던 탓이었다.
비올레타는 황제가 없는 접견실에서 프란츠의 보고를 듣고, 궁내부에 그대로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이번으로 일곱 번째였다. 황제를 위해 무언가를 감추거나 포장할 의사가 없어 보이는 황녀를 보고도 프란츠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접견실을 나갔다.
거대한 홀 안에 홀로 남은 비올레타가 문득 저 문으로 제가 처음 들어오던 날을 떠올렸다. 지금처럼 그때도 그녀는 혼자였다.
그 막막했던 공포, 두려움, 경외감. 비올레타는 건조한 눈으로 아득히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무겁게 달려 있었다.
비올레타가 그 아래로 걸음을 옮기며 다시 제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 백색의 대리석 위로 웅장하게 새겨진 지도가 발밑으로 지나갔다.
그녀는 옐로 다이아몬드 조각들이 빼곡히 박힌 그란토니아의 영토를 노려보듯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파사칼리아는 아직도 이 바닥 아래에 있었다.
비올레타는 접견실을 나서던 몸을 돌려 다시 접견실을 가로질렀다. 루드비히를 만나야 했다.
그녀는 황제의 집무실로 곧장 통하는 문 옆으로 시종들이 드나드는 작은 문을 밀었다. 좁은 복도로 걸어오던 시종 몇 명이 비올레타를 발견하고 놀라 고개를 숙였다.
비올레타는 그것을 무심한 얼굴로 지나쳤다. 그녀의 발걸음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루드비히가 오후에 머무는 방은 단 하나였다. 황제궁에는 특별한 용도 없이, 단지 호화로움을 위해 나누어진 수많은 방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방은 그중 하나로, 그 덧없는 가치만큼 어떤 작은 일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파사칼리아가 죽은 이후로 대부분의 날을 그 방 안에서만 보냈다.
사람들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황제를 두고 많은 말을 수군거렸지만, 조금만 세부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대부분의 말이 맞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웃으며 방 안에 들어섰다.
흔한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은 방은 하루 종일 햇빛이 들지 않아 조금 습하고 쌀쌀했다. 그러나 번듯하고 깨끗한 방이었다. 황제나 황제 주변의 모든 집기가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으리란 세간의 상상과는 달리.
루드비히는 조금도 망가지지 않았다. 이 깨끗한 방만큼이나.
“폐하.”
비올레타는 어느새 바뀌어 있는 카펫을 힐끗 보고는 다시 루드비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루드비히가 이발사를 잠깐 제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비올레타가 마주친 눈에 싱긋 웃었다. 루드비히가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곧 부를 참이었다.”
루드비히가 느긋하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침 면도가 끝난 모양이었다.
비올레타는 루드비히의 말끔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과 두어 시간 전에 사람을 죽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루드비히는 단정했다.
이 고풍스러운 방이 사람이 몇 명이나 죽어 나간 방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올레타는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그 모든 사태는 비올레타가 감히 말릴 수도 없는 일이었고, 말려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라키엘이 조장하고 있는 세간의 모든 이야기처럼, 황제는 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은 과오를 저질러야 했다. 그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저 방관하고 있으면 되었다. 사실은 조장조차 필요 없었다.
그는 실제로 많은 일을 저질러 왔고, 사람들은 비난할 만한 이야기를 좋아했으며 더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라키엘은 점점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비난과 원성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혹은 황제가 서서히 추락하고 있는 것을.
루드비히가 고요한 눈으로 비올레타를 응시했다. 비올레타는 울렁대는 속을 억누르며 가만히 웃었다.
루드비히에 대해 사람들이 떠드는 말이 대부분 정확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비올레타는 제가 별반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올레타가 세간의 이야기에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한 가지 있었다. 그가 점점 미쳐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모습으로.
루드비히가 손짓하자 시종 하나가 방을 나갔다.
“부르심을 받을 줄 알았더라면, 좀 더 기다릴 걸 그랬습니다. 좀 더 보란 듯이 거만 떨며 올 수도 있었을 텐데.”
“짐이 부르기도 전에 네 발로 이곳을 드나드는 것이야말로, 거만 떨 만한 일이 아니냐.”
루드비히가 입매만 쓱 끌어 올리며 다시 들어오는 시종에게 눈짓했다. 시종이 공손히 걸어와 검은 벨벳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린 뒤 조심스레 열었다. 비올레타가 테이블 근처로 몇 걸음 걸어갔다.
“선물이 잦으십니다.”
비올레타가 상자 속을 들여다보며 여상하게 말했다. 커다란 물방울 모양으로 세공된 블루 사파이어가 빈틈없이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호화로운 목걸이였다. 비올레타의 손끝이 짙은 푸른색을 띤 보석들을 살짝 쓸었다. 루드비히가 피식 웃었다.
“짐이 돈 쓸 계집이라곤 이제 황녀뿐이니 어찌하겠는가.”
“저는 기쁘지만 황비들께서 들으시면 섭섭해 하시겠군요.”
“네가 기쁘면 된 것이지.”
루드비히는 그렇게 말하고 콘솔로 천천히 걸어가 크리스탈 잔을 들었다. 이미 반쯤 채워져 있던 위스키가 잔 안에서 투명하게 찰랑거렸다.
“이제 곧 추수제지.”
“그렇습니다.”
“준비는 어찌 되어 가고 있고?”
“1황비께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렇군.”
루드비히가 잔을 입가로 기울였다. 비올레타가 루드비히의 옆모습을 멀거니 응시하다, 문득 물었다.
“추수제 사냥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마치 루드비히가 다른 모든 책무를 정상적으로 해 온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물음이었다. 루드비히는 잔을 입가에 댄 채로 비식 웃었다.
“귀엽게도 묻는구나.”
“그리 말씀하실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에델가르드 공이 묻게 하던가.”
“논의 드릴 것이 있으나 도무지 폐하께서 접견을 허하지 않으시니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비올레타는 루드비히의 물음에 담백하게 인정했다. 루드비히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비올레타는 말간 눈으로 그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밟고 선 카펫이 왜 또 바뀌었는지, 제가 선 자리에서 불과 몇 시간 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런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녀는 서 있었다. 루드비히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잔에 남은 위스키를 느긋하게 마셨다.
“올해는 흉작이 든 곳이 많으니 국민들에겐 위로가 필요할 겁니다. 추수제 사냥은 폐하께서 본디 매년 친히 주관해 오셨으니 마땅히 기대하는 바도 있고요. 빌키어스 오라버니께서는 아마도 추수제 전에 돌아오지 못하실 테니 폐하를 대신해 주관할 어떤 이도 없습니다.”
비올레타는 모범적인 답안을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어차피 그가 아무것도 돌보지 않을 것을 알면서 바로 앞에서 종용하는 것은 의례적인 행위에 가까웠다.
루드비히는 비올레타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잔을 콘솔 위에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네가 하는 것은?”
비올레타가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난처한 듯 웃었다.
“계집이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계집 주제에 황위도 탐내지 않느냐.”
루드비히가 가볍게 대꾸하며 창가로 걸어갔다.
“제겐 더없는 영광이나 폐하께는 누가 될 것입니다.”
“너는 아직도 내게 사그라질 빛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
“그 점이 어여쁘긴 하다마는.”
북쪽으로 난 창은 햇빛 한 점도 방 안에 들여놓지 못했다. 창밖을 말끄러미 응시하던 루드비히가 서늘한 얼굴로 커튼을 쳤다.
“이레를 굶은 비렁뱅이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준 것처럼 그란토니아의 아들들은 그렇게 아비의 것을 물려받아.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할지도 모르고, 배가 부르면 그만 먹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세상이 어설픈 저를 비웃는 것도 모르지.”
“…….”
“아비란 것들은 죽는 순간까지 탐욕스럽거든. 짐을 비롯해서.”
루드비히가 뒤돌았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멎어 있던 숨을 삼켰다.
“하나씩, 그렇게 훔쳐 놓아라.”
“…….”
“종래에는, 그 모든 게 처음부터 네 것이었던 것처럼 보이도록.”
드 포네의 사냥터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꽤 황량한 모양새였다. 아주 야트막하게 솟은 산 위로 빛바랜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누런 흙바닥과 잿빛 돌들이 멀리서도 훤하게 드러났다. 비올레타는 쌀쌀해진 가을 공기를 얕게 들이마시며 칼의 백마를 따라 말을 천천히 몰았다.
그녀의 뒤로 황제의 시종들과 가디언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추수제 사냥은 건국제 카드리어가 매년 추수에 감사하며 친히 제물을 사냥해 제단에 올리던 것이 그 시초였는데, 지금에야 제사 같은 것은 올리지 않지만 황제들은 이 의식만큼은 무던히도 지켰다. 시조로부터 지금까지 온전히 내려온, 거의 유일한 유산인 탓이었다.
건국제가 물려준 이 보잘것없는 드 포네의 사냥터를 포함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그란토니아에서 중요한 의미로 다루어져 온 것과는 별개로 추수제 사냥은 꽤 간소한 의식에 속했다. 루드비히는 제 부황이 그러했고 그 선대들이 그러했듯이 추수제가 되면 열 명 남짓한 수행원만을 대동하고 드 포네로 왔다.
그중 황제의 바로 곁에서 수행할 주요 인사라곤 한 명 내지 두 명을 넘어서지 못했는데, 그렇게 드 포네에 발을 디딘 것은 루드비히의 평생 단 세 명이었다. 죽은 카디링거, 브나리오, 그리고 로드리고.
추수제 사냥은 그리 정치적이지 않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정치와 가까웠다. 죽은 황태자가 제 부황을 수행할 수 없었고, 라키엘의 아버지가 평생 이곳에 오지 못했으며, 라키엘이 지금 제 곁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황제가 없는 곳에서 황제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것들이 필요했다. 황제의 사람들과, 황제의 조카, 그리고 황녀. 구구절절 이어붙인 것이라도 상관은 없었다.
이번의 일은 대외적으로 황제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었는지를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란토니아의 역사를 통틀어 추수제 사냥에서 황제를 대행한 것은 모두 황태자였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바로 여기는?”
“이 주위에는 지금 없어.”
칼이 그렇게 말하며 비올레타를 힐끗 뒤돌아보았다. 비올레타가 느긋하게 속도를 올려 칼의 옆으로 제 말을 몰았다.
“칼.”
칼은 대꾸 대신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비올레타가 마치 통보하듯 말했다.
“나 이제 힘들어요.”
“……뭐?”
말과는 달리 그리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칼은 미간을 찌푸렸다.
“라키엘도 힘들어하네요. 돌이 너무 많아, 그렇지?”
비올레타가 검은 갈기를 부드럽게 쓸며 고개를 숙여 라키엘이라 이름 지은 제 말에게 물었다. 칼은 그것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술 취했나? 날 누구로 착각하고 투정이야.”
“투정이 아니라 알리는 거예요. 알아 둬요.”
“네 시중들러 온 내 주제는 알지만 네 비위까지 맞출 인내심이 오늘은 없어. 다른 날 해. 그러면 예쁘게 봐줄 테니까.”
“다른 날은 내가 싫어요. 이 주위에 있다, 그렇게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 나 아까 저쪽에 토끼 있는 것 봤는데.”
“토끼? 좋지. 역시 계집이라 어쩔 수 없다는 소리나 듣고 싶다면.”
“토끼가 있으니 여우도 있겠죠. 내 목표는 딱 그 중간인데.”
“네 뒤에 사냥개만 여덟 마리가 묶여 있어. 물어뜯을 살점은 있는 놈이어야지. 적어도 내 이름 엮인 일은 그럴듯하게 해내.”
칼이 차마 더 성가신 일은 사양하고 싶은 것처럼 대꾸했다.
드 포네의 추수제 사냥은 개사냥이었으므로 애초에 비올레타가 모든 걸 세세하게 주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주로 고상하게 해 왔던 사냥들과는 아예 궤가 달랐으며, 충분히 겪어 보지도 못한 방식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빈틈은 사냥에 정통한 칼이 수행 명목으로 모두 채우게 되었다. 그리고 칼은 그 귀찮은 기분에 벌써 염증이 난 상태였다. 추수제 사냥은 사냥을 좋아하는 그도 재미를 느낄 수 없는 부류였다.
“사실, 그냥 빨리 끝나 버렸으면 좋겠어서 그래요.”
비올레타가 칼의 허리춤에 비스듬히 매달린 단도를 말끄러미 보며 조용히 말했다. 칼이 비올레타의 시선을 따라 단도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추수제 사냥은 아주 고전적이면서도 단순하게 형식적이었다. 개들이 몰아넣은 사냥감을 우두머리 개가 물고, 옛날 방식에 따라 총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황제가 칼로 직접 사냥감의 목숨을 끊는다. 그 일련의 과정이 끝나면 사냥도 끝난다.
그리고 이번의 경우엔, 비올레타의 손에 그가 쥐여 줘야 했다.
“새삼?”
칼이 피식 웃으며 놀리듯 짧게 물었다. 심드렁하던 눈이 짓궂게 변했다. 그녀가 무언가 꺼리는 것을 보는 게 아주 오랜만인 탓이었다.
“네가 그간 죽인 짐승이 몇인데.”
주위를 잠시 둘러보던 비올레타가 설핏 웃으며 칼을 돌아보았다.
“정신 나간 것처럼 들리겠지만 죽였다는 느낌이 손에 남는 게 싫어요.”
“우스갯소리군. 총도 무언가를 죽여.”
“얄궂은 건 나도 알아요. 그래도 총을 놓으면 착각할 수는 있죠. 그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비올레타가 담백하게 대꾸하며 눈매를 가늘게 떴다. 그리고 이내 말을 멈추었다. 칼이 말을 그 옆으로 멈춰 세우며 수행원들이 볼 수 있게 손을 들었다.
“무언가 봤나?”
“로드리고요.”
비올레타가 가볍게 대꾸했다. 로드리고의 문장이 사슴의 머리인 것에 빗댄 말이었다. 칼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이윽고 기다란 목의 그레이하운드들이 부챗살 모양으로 좌우로 퍼져 사슴을 쫓기 시작했다. 가늘고 곧은 다리들이 완만한 비탈 위를 힘 있게 뛰어올랐다. 비올레타와 칼이 그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저기 있네요.”
황제의 개들은 순식간에 사방에서 사슴을 포위해 갔다. 칼이 손을 들어 중앙의 검은 그레이하운드를 가리켰다.
“저기 검은 것, 저놈이 우두머리야.”
사슴이 곧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을 깨달은 듯 주춤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비올레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개들을 감탄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혀를 낮게 찼다.
사슴의 커다란 뿔이 두리번거리는 제 머리를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사슴이 틈을 잡아 움직이자 검은 그레이하운드가 빠르게 달려들어 물었다.
사슴의 뒤에 있던 연한 담갈색 그레이하운드가 사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덩달아 뒷다리를 물었다. 사슴이 덧없이 버둥거렸다.
“가지.”
비올레타는 칼을 따라 빠르게 말을 달렸다. 그녀의 뒤로 수행원들이 덩달아 빠르게 이끄는 말발굽 소리가 조용한 사냥터를 시끄럽게 울렸다.
근처에 먼저 내린 칼이 비올레타의 허리를 잡고 내려 주었다. 손 하나에 의지해 내리기엔 땅이 꽤 험준했다.
그들이 다가오자 사냥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근처의 개들이 온순하게 비켜섰다. 비올레타는 제 곁에 우아하게 고개를 숙인 개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칼에게서 단도를 받아들었다.
“저기, 목 바로 아래를 찔러.”
“바로 죽을까요?”
“네 힘으로는 찌르는 것부터가 가당찮지. 다만 피가 많이 흘러야 해.”
개를 떨쳐내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기다란 목을 비올레타가 곤란한 듯 바라보았다.
“당신이 말한 대로 바로 찔러지지 않을 것 같아요.”
“내가 잡고 있을 거야.”
칼은 퍽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비올레타는 단도를 든 채로 잠시 망설였다. 사슴의 순한 눈망울이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저런 눈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도 방아쇠를 당겼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망설이는 것은 꽤 우스운 꼴일지도 몰랐다.
사슴이 죽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고작 제 손에 남을 찝찝한 흔적이 꺼려지는 것일 테니까.
비올레타가 천천히 걸어갔다. 칼이 옆으로 먼저 걸어가 사슴의 뿔을 잡아 목이 드러나도록 고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부터 몇 번이고 찔러 힘을 빼야 했다.
비올레타가 조금 차갑게 식은 손으로 단도를 다시 세게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래로 내리 찔렀다. 뜨거운 피가 비올레타의 얼굴과 드레스 위로 튀었다.
손잡이 아래 칼날이 짐승의 팽팽한 가죽을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 생경했다. 비올레타가 점점 꺼져 가는 사슴의 눈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단도를 놓았다.
사슴의 앞다리가 비척비척 바닥을 헛짚다 비올레타의 드레스를 스치며 무너졌다. 칼이 무심한 얼굴로 단도를 잡고 힘주어 깊게 쑤신 후 옆으로 그었다.
벌겋게 드러난 살점 속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끝났어. 잘했고.”
칼이 손수건을 꺼내 제 손을 닦으며 비올레타의 뒤에 서 있던 가디언에게 눈짓했다. 비올레타가 설핏 웃으며 제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칼이 손수건의 깨끗한 면으로 비올레타의 손등을 대충 닦아 주고는 다시 말로 인도했다. 비올레타가 사슴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 위에 다시 올라탔다.
돌아가는 길은 들어올 때보다 빠르게 줄어들었으나 좀 더 거칠었다. 말은 거친 비탈을 내려가며 솜씨 좋게 사뿐사뿐 걸었지만 가끔 돌부리를 차 흔들리기도 했다. 비올레타는 왠지 모를 불쾌한 기분에 말을 좀 더 빨리 내달렸다.
문득 숲이 어두웠다. 해가 사라졌다. 갑작스레하늘을 검게 덮은 먹구름에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은데.”
“하필…….”
“의식은 무사히 끝났으니 다행이지. 곧바로 황궁으로 가.”
“알겠어요.”
비올레타가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다시 시선을 내렸다.
“시종장은 네가 만나고.”
“그게 그리 귀찮아요?”
“어차피 네 공과 쌓는 일에 동원됐으니 그 정도는 네 선에서 잘라.”
비올레타가 피식 웃었다. 칼이 그녀의 앞으로 말을 달려 나갔다. 비올레타가 칼의 뒤를 따라 빠르게 말을 몰았다. 말발굽 소리가 서로 엇갈리며 땅을 울렸다.
그때였다.
드 포네의 입구 가까이에서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비올레타가 굳은 얼굴로 말을 멈춰 세웠다. 조금 앞서 있던 칼이 말 머리를 급히 돌리는 순간, 다시.
탕!
더 가까운 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비올레타의 말이 비명처럼 울부짖으며 허리를 높게 들어 올렸다. 비올레타가 말 아래로 떨어졌다. 칼의 고함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비올레타는 희미하게 꺼져 가는 시야 속에서 라키엘이 천천히 바닥에 고꾸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른 저녁.
황녀의 궁 앞에 로드리고의 마차가 급히 멈추었다. 마부가 문을 열기 위해 젖은 땅 위로 발을 채 다 내딛기도 전에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바짝 날이 선 주인의 얼굴에 마부가 멈칫 물러났다.
칼은 신경질적으로 내렸던 것과 달리 비올레타를 조심스럽게 마차 밖으로 꺼내 안아 들었다. 그녀는 아직도 의식이 없었다. 머리가 힘없이 칼의 팔 바깥으로 툭 늘어졌다. 기다란 목이 창백하게 드러났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드레스는 금방 젖어들었다. 칼은 표정 없이 그녀를 고쳐 들고 빠르게 걸었다.
아침에 멀쩡히 걸어 나갔던 주인이 혼절한 채로 후작에게 안겨 돌아오자 그녀의 궁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좀 더 시끄러워졌다. 드 포네에서 총격이 있었다는 사실이 궁에 전해진 것은 비올레타가 돌아오고 나서도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칼은 침실 바깥 소파에 앉아 비올레타의 치료가 끝나길 기다리다, 어느덧 열 명 가까이 불어난 제 곁의 시녀들을 둘러보았다. 총격이란 말에 놀란 영애들이 평소 같았더라면 넋 놓고 구경했을 젊은 후작도 마다한 채 침실 문 앞을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말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칼은 소란 속에 피곤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면서도 제게 조심스레 물어 오는 몇몇 물음에 종종 친절하게 대꾸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주치의가 방을 나왔다. 칼이 웃고 있던 얼굴을 싸늘하게 가라앉히며 몸을 일으켰다.
“황녀는?”
“깨어 계시니 직접 여쭈셔도 될 겁니다. 다행히 경과도 양호하고요.”
칼이 나직하게 한숨을 뱉고는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칼을 본 밀로일라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칼.”
“다리는? 정강이 쪽이 조금 부어 있던데.”
“부러지진 않았어요.”
비올레타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칼이 그 태연한 목소리에 조금 기가 막힌 듯 웃었다. 다시 누우려는 듯 뒤로 몸을 조금 젖히던 비올레타가 무언가 불편한지 조금 인상을 썼다. 칼이 그녀에게로 다가와 천천히 몸을 뉘어 주었다. 비올레타가 칼의 가까워진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다 그제야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내 다리는 언제 봤는데?”
“마차에서 좀 들춰 봤지.”
“제정신이에요?”
“더러운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으니 걱정 마. 난 네가 거의 시첸 줄 알았으니까.”
칼의 뻔뻔한 태도에 비올레타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가 이내 포기한 듯 인상을 다시 폈다. 칼이 그런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조용히 물었다.
“괜찮아?”
“온몸이 아프긴 해요. 메스껍고, 어지럽고.”
“운도 좋군.”
“좋은 김에 조금 더 좋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아쉬운 것처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비올레타는 정작 제 사고 자체에 별다른 감흥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칼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리고 문득 말했다.
“이상하다, 너.”
“대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비올레타가 어느새 저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칼의 시선이 차가웠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 네 몸뚱이랑.”
“…….”
“네 시간 만에 깨어났어. 그리고 넌 한마디도 물은 바가 없지. 감히 저를 위해하려 한 것이 누구인지, 대체 이 모든 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로드리고, 내가 화를 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요. 이미 난…….”
“넌 오늘 죽을 수도 있었어.”
“알고 있어요.”
“네 말이 아니라, 네가.”
“……라키엘이, 죽었어요?”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다는 게 고작 말에 관한 것이라는 것에 칼은 황당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조금 동요한 얼굴로 가만히 칼을 바라보다가 제 얼굴을 쓸었다.
“죽었군요.”
“그래. 그리고 그건 아마도 널 겨냥하다 실패한 것일 테고.”
비올레타는 우울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칼이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다 이내 한숨과 함께 옆에 있던 의자에 풀썩 앉았다.
“계속 그렇게 살 건가?”
“‘그렇게’를 내가 어떻게 해석하면 될까요.”
“말 그대로야. 지금 네 그 사나운 팔자 그대로.”
비올레타는 가라앉은 얼굴 그대로 피식 웃었다.
“당신이 구제라도 해 줄 건가요?”
“그렇다면.”
“농이라도 감사히 받죠.”
“넌 내 청혼도 그렇게 넘겼지.”
불현듯 낮아진 목소리가 썼다. 비올레타는 칼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조각 같은 얼굴 위로 여태 보인 적 없는 희미한 상실감이 떠올랐다. 비올레타는 입매를 옅게 끌어 올렸다.
“당신이 조금만 더 성실한 얼굴이었다면 그때도 믿었을 거예요. 원망은 당신의 잘난 얼굴에 대고 해요.”
“결혼해.”
“아직은 생각 없어요. 지금도 충분히…….”
“여태 네 앞에 나타나지도 않는 그자 말고.”
“…….”
“나.”
비올레타의 평정이 조금 흐트러졌다. 내내 태연하던 얼굴이 당황한 듯 흐려지자 칼은 삐뚜름하게 웃었다. 비올레타가 한숨처럼 말했다.
“편하게 살아. 너 그럴 수 있잖아.”
“성가신 건 질색이라더니, 당신이야말로 멀쩡한 당신 팔자 훼방 놓지 말아요.”
“네가 먼저였어.”
“…….”
“내 인생에 끼어든 건 네가 먼저였다.”
잡히지도 않을 거면서. 칼이 조용히 말했다.
“치정극이라면 질릴 정도로 팔렸어요, 우리 이름. 새삼스레…….”
“진짜로 겪어 보기는 했어? 내가 그 삼류 소설처럼 너한테 정신이 나가면 어떤 짓까지 할지.”
“다행이라는 생각은 드네요. 당신이 삼류가 아니어서.”
비올레타가 평온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칼이 픽 웃었다.
“나도 내가 그런 줄 알았지. 네가 떨어지기 전까진.”
비올레타가 소리 없이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이내 다물었다. 칼이 몸을 일으켰다.
“가요?”
“자. 그자 올 때까진 지킬게.”
“그만 가서 쉬어요. 난 괜찮으니까.”
“너 위한다고 있겠다는 거 아냐. 그놈 심사 뒤틀리라고 그런 거지.”
칼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창가로 걸어갔다. 비올레타가 힘없이 눈꺼풀을 내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칼이 반쯤 열려 있던 커튼을 쳤다. 방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넌 평생 그렇게 살 거지.”
“…….”
“보기 싫다, 너.”
“그 말은 좀 충격적이네요.”
“넌 평생 이렇게 살 거고, 나더러는 그걸 보고 있으라 할 테고.”
“난 당신이 필요해요.”
금세 수마에 뒤덮여 반쯤 웅얼거리던 목소리와는 달리 비올레타의 마지막 말은 발음이 명료했다. 칼은 말없이 그녀의 곁에 다시 앉았다.
그녀는 곧 잠들었다.
“빨리 오는군.”
어슴푸레한 작은 불빛뿐인 어둠 속에서 칼이 조용히 이죽거렸다. 라키엘은 그 소리를 듣지도 못한 것처럼 침대 쪽으로 곧장 걸어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침착한 걸음걸이에 결국 심사가 꼬인 칼이 몸을 일으켰다. 침대맡에 서서 제 연인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늦게 온 만큼…….”
“방금은 빨리 왔다면서.”
라키엘이 그렇게 말하며 삐딱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칼이 신경질적으로 마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소득도 있겠지.”
“뭐, 그렇지.”
“누구였나? 물어볼 필요 없는 사항인가?”
“불행히도 뻔한 대답은 아냐.”
“그럼.”
“롬바르디안급진적 공화주의자.”
“뭐?”
“그리고 황제의 사냥터에 기어 들어간 것은 고작 스무 살짜리 롬바르디안 세 명이야.”
발텐에서 모이기 시작한 공화주의자들을 바르디안이라고 부르는 것과 더불어 그 안에는 이렌시아의 철학자인 롬 트메라를 추종하는 젊은이들, 즉 롬바르디안이 있었다. 그들은 사실 공화주의자라기보다는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웠다.
모든 지배를 증오하는. 롬 트메라의 공화주의는 변질된 지 이미 오래였다. 공화주의자인 바르디안들이 황제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 한다면, 그 변종들은 국가를 부정하고 싶어 했다.
그다지 명분도 없는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면서. 칼은 여전히 조금 의아한 얼굴로 답답한 듯 제 목을 쓸었다. 기실 그란토니아에는 바르디안조차 제대로 무리를 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란토니아에 그런 게 있기는 했나?”
“현상現狀을 보면 이제 와 생기는 게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아, 하고 칼이 짧게 긍정했다. 황제가 미쳐 간다고 세상이 떠드는 판에 외국에서 흘러들어 온 공화주의가 이상한 형태로 유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걱정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늙은 황제보다는 계승권에 가까워진 어린 계집이었을 터였다.
“지배를 부정한다, 그 하잘것없이 거창한 마음 이해 못 할 바도 아니고.”
“황제의 조카 앞에서 꽤 위험한 말을 하는군. 내가 돌아가는 길에 어찌할 줄 알고.”
“못 하지.”
라키엘이 칼을 보며 쓱 웃었다. 칼이 서늘한 얼굴로 입매를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난 누가 그리 단언하면, 꼭 배신하고 싶어지더라.”
“전하께서 슬퍼하실 텐데.”
“세상에 널린 것이 계집인데, 내가 가지지도 못할 네 계집 때문에 네 불충까지 감싸 안을까.”
“세상에 널린 계집이 아니니까. 그러니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거겠지.”
단정한 음성 위로 금세 질척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제야 살벌한 얼굴이 드러났다. 칼은 가늘게 뜬 눈으로 라키엘을 응시하다 이내 물었다.
“그 새끼들 처리는 어찌할 건데.”
“죽였어. 이미.”
“다?”
“전부. 이 손으로.”
사람을 셋이나 죽이고 돌아온 남자치고는 퍽 평온한 태도였다. 칼이 라키엘을 빤히 바라보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침대를 힐끗 보았다.
“진짜 사랑받고 있었네.”
라키엘은 아무 말 없이 비올레타의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칼이 툭 내뱉듯 빈정거렸다.
“그것도 꽤 끔찍한 종류로.”
비올레타는 파랗게 날이 샐 무렵 잠에서 깨어났다. 조금 걷힌 커튼 틈새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들어와 기다란 선을 그리며 카펫 위로 스며들었다.
비올레타의 시선이 가장 밝은 곳을 멍하니 쫓았다. 아침부터 금식해 텅 비어 있는 속이 아렸다.
그녀의 손이 관자놀이를 몇 번 주무르고 이내 침대를 짚어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머리가 통 어지러웠다.
“좀 더 누워 있어.”
“왔어요?”
비올레타가 제 눈이 라키엘을 찾기도 전에 옅게 웃으며 허공에 물었다. 창가와 먼 테이블에 앉아 있던 라키엘이 침대로 천천히 걸어왔다.
“언제 왔어요.”
“밤에. 늦게 왔어.”
비올레타의 옆에 조용히 앉은 라키엘이 그녀의 이마위로 가볍게 키스했다.
“뭐가 그렇게 바빴는데?”
투정이나 원망이 아닌, 정말로 그의 일과가 궁금했던 듯 비올레타가 부드럽게 물었다. 라키엘이 피식 웃으며 비올레타의 귓불 아래에 잘게 키스했다. 비올레타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얕은 웃음소리를 냈다. 라키엘이 입술을 댄 채로 낮게 대꾸했다.
“항상 그렇듯이, 여러 가지.”
“나 이거 알아요.”
“뭘.”
“당신은 뭔가 그냥 넘어가고 싶을 때, 이렇게 나한테 환장한 척하거든요.”
비올레타의 말에 라키엘이 그녀의 목 위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얇은 피부 위로 느껴지는 뜨거운 숨에 비올레타가 멈칫 굳었다가 이내 양손으로 라키엘의 턱을 감싸 올려 눈높이를 맞추었다. 라키엘이 순순히 제 얼굴을 내준 채로 비올레타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입매를 길게 휘었다.
“이제 진짠데.”
라키엘은 꽤 진지하게 대꾸했으나 비올레타는 눈매를 좀 더 가늘게 좁혔다. 라키엘이 픽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뗐다. 비올레타의 손에서 라키엘의 얼굴도 멀어졌다. 비올레타의 손이 허공에서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어차피 너 건드리지도 못해.”
비올레타의 손등을 길게 가로지르는 생채기를 손끝으로 슬며시 쓸어 본 라키엘이 조금 탁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다리는.”
“멀쩡해요. 가벼운 타박상이고.”
“멀쩡하진 않던데.”
“괜찮아요. 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도 않고.”
마치 제가 잘못 손대면 깨지기라도 할까 두려운 듯, 라키엘의 손끝이 비올레타의 상처 위를 조심스레 쓸었다. 비올레타의 시선이 그의 손을 느릿하게 쫓아가다가 문득 그의 얼굴 위로 움직였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내리깐 눈매가 차가웠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불안한 정적이 흘렀다.
“너는, 내가 어떻게 해야, 죽지 않고…….”
“…….”
“계속 내 옆에서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