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4장>
808년, 여름의 12일 아침.
파사칼리아가 죽었다. 일 리베로 정양靜養을 떠나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그날 정오 수도에 있는 황제에게로 파사칼리아의 죽음을 알리는 급보가 전해졌고, 밀렌 광장에서 저녁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기 전 황후의 서거가 공포되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일 리베에서 죽은 그녀는 그날 밤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시신으로.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 모두가 독살이라고 생각하는 죽음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돌아오는 것보다 조금 더 빨리 황립 재판소의 지하 심문실로 끌려 들어갔다. 어느덧 길어진 여름 해가 채 저물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궁정 사람들은 제 생각에 독살자나 적어도 독살자의 공모자로 생각되는, 혹은 독살자로 꾸며 이참에 없앨 수 있을 만한 자들을 앞다투어 고발했다. 수사관들은 그들을 가리지 않고 일단 모두 잡아들였다. 상부의 재촉에 최소한의 시시비비조차 가려내지 못한 채 체포부터 하고 봐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황후궁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부터 황후의 뒤에 고고히 서 있던 시녀들까지 용의 선상에 올랐으며 황비들이 부리던 시종, 그들의 약제사, 재봉사까지 고발의 대상이 되었다. 릴리 프레네는 그렇게 무작위로 순식간에 고발된 이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3황비 궁에서 일한 지 이제 갓 3개월이 된 하녀로, 늙은 시계 기술자의 딸이었다.
“엿새 전, 폴퇴르 거리에 사는 약제사를 찾았다지?”
릴리 프레네는 수사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로 사방이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벽만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세상과 철저히 유리시킨 방이었다. 기실 지금은 밤이었고,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가려놓은 것은 별 효용이 없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온 사방이 바깥과 차단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릴리 프레네는 공포를 느꼈다.
“릴리 프레네.”
릴리 프레네는 수사관의 부름에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촛불 하나의 어스름한 불빛을 받아 남자의 얼굴에 음영이 짙게 졌다. 릴리 프레네는 침을 꿀꺽 삼키고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못, 들었어요. 다시 말씀해 주시면…….”
“엿새 전에, 폴퇴르 거리에 사는 약제사를 찾았다면서.”
“……그런 일이 없는걸요.”
“그게 네가 고발당한 이유다. 그런 적이 없다고?”
“네. 없어요. 없어요, 그런 적은…….”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가 보군.”
“네?”
“그 노인은 널 기억하던데 말이야.”
수사관이 가볍게 던진 거짓말에 릴리 프레네가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숨기는 법을 조금도 몰랐다. 한껏 부자연스럽게 굴어놓고서, 릴리 프레네는 겨우 마음을 잡고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기억이 잘, 기억이 잘 나지 않았었어요.”
“이제야 기억이 났어? 그래. 그래야지.”
“사실은, 숨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 피임약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은밀히 여자들에게 소문을 듣고 폴퇴르에 사는 그 노인에게…….”
반은 숫제 울며 하는 말이라 수사관이 싱거운 얼굴로 혀를 쯧 찼다.
“됐다.”
“네?”
그는 릴리 프레네에게 대꾸하지 않은 채 뒤에 서 있던 병사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곧 그대로 끌려 나가 자그마한 독방에 갇혔다.
릴리 프레네는 그제야 처음으로 편안한 숨을 뱉었다. 저 말고도 끌려온 사람들이 스치듯 본 것만 해도 벌써 여럿이었으므로, 그녀가 조용히 벗어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릴리 프레네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다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까무룩 잠이 들었을 무렵이었다. 조용히 문이 열렸다. 릴리 프레네는 남자들이 제 바로 앞까지 걸어오는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다가, 문득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그녀는 양팔이 우악스레 잡힌 채로 일으켜졌다.
“무, 무슨…….”
“페르멘테가 증언했다.”
“네?”
“폴퇴르의 약제사 말이다.”
릴리 프레네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두꺼운 오동나무 관이 천천히 열렸다.
루드비히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관 안쪽으로 두툼하게 몇 겹으로 덧대어진 검붉은 벨벳쿠션 위로 검은 머리칼이 몇 가닥 흐트러진 채 늘어져 있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얇은 회백색의 여름 드레스가 창백했다. 루드비히의 시선이 죽은 이가 단정하게 모아 쥔 하얀 두 손에서 좀 더 움직여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루드비히는 얼마간 관과 멀리 떨어진 채 더 다가서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차마 더 가까이 걸어가지는 못했다. 루드비히는 목구멍 끝으로 얕게 숨을 몰아쉬다가 훅 꺼지듯 침잠하는 숨을 잡았다. 죽은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신은 일견 생전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 파리한 얼굴이 그저 잠든 것처럼 평온했다. 루드비히의 딱딱하게 경직된 손이 제 얼굴을 덮었다. 목이라도 졸린 듯. 루드비히가 핏발 선 눈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시의侍醫를 비롯해 부검에 입회할 믿을 만한 황궁 밖 의사들과 독물학자를 모두 불러 두었습니다. 부검은 날이 밝기 전 최대한 빨리 하는 것이…….”
루드비히는 제 뒤에서 조심스레 고하는 시종장 프란츠의 목소리에 느릿하게 손을 내렸다. 그가 파사칼리아를 잠시 멀리서 눈에 담았다가, 이내 몸을 돌려 프란츠를 바라보았다.
“부검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독살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부검을 말라 하시면, 그 배후로 모두가 폐하를…….”
“애초에 참인지 아닌지를 가려내 떠드는 입들도 아닌데, 신경 쓸 가치도 없지.”
“폐하, 허나…….”
형형하게 타오르던 눈이 문득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곱게 죽었다. 굳이 칼을 대 해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마치 꿈속에라도 있는 것처럼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죽은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여자가 제 뒤에 있었다. 그는 사람이 죽는 것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봐왔으나, 저렇게 평온한 죽음은 알지 못했다. 사실은 죽은 것 같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파사칼리아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제 눈앞에 보이는 죽음이 아니라 들은 말 몇 마디를 기억하는 일말의 이성이었다.
“빌센 남작부인.”
“예?”
“황후의 측근 시녀 중 하나지. 그 계집이 새벽에 황후를 부액했다지 않았나?”
“예, 최초 목격자이기도 하고요. 마침 그녀 또한 조사 중입니다.”
“데려와. 길데 백작부인과 함께.”
“직접 심문하시겠습니까?”
“그들을 참고로 해 부검을 대신해. 시의와 함께 듣지.”
심문이 아닌 참고라는 말에 프란츠는 난색을 표하면서도 그의 말을 따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의 시녀들이 근위대에 빽빽이 둘러싸인 채로 방 안에 들어섰다. 루드비히는 시녀장 길데 백작부인의 익숙한 얼굴을 지나, 잔뜩 위축되어 있는 젊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루드비히와 눈이 곧장 마주친 여자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빌센 남작부인으로, 파사칼리아의 죽음을 최초로 목격한 이이자, 파사칼리아가 죽은 새벽 그녀의 시중을 들었던 여자였다. 프란츠가 고개를 까딱하며 근위대를 모두 내보냈다. 관이 놓인 황량한 방 안에, 비로소 최소한의 필요한 이들만이 남았다.
“빌센 남작부인.”
프란츠의 부름에 빌센 남작부인이 제대로 대꾸하지도 못하고 루드비히를 향해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그것이 프란츠의 목소리인지 황제의 목소리인지조차 그녀는 구분할 수 없는 듯했다. 그녀의 곁에 서 있던 길데 백작부인이 정면을 향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나직하게 힘주어 말했다.
“남작부인, 조사 때와 같이 부인이 기억하는 대로 상세히 진술하세요.”
“……그러니까, 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 갈 무렵, 일 리베에 도착해 짐을 풀었습니다. 황후께서 직접 확인하시길 바라시는 것들을 보여드리고, 그 뒤로는 곧바로 목욕을 원하시어 준비해 드렸고요.”
“저녁은?”
황제의 시의가 문득 뒤에서 물었다. 빌센 남작부인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태도는 의심을 사기엔 충분했으나, 곱게 자란 귀족 여성이 큰일에 충격을 받고 불안에 떠는 것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아침에는 죽음을 목격했고, 저녁에는 심문실에 갇혀 있었으니 태연하게 있는 편이 더 이상하리라.
“저녁은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속이 좋지 않으니 먹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일찍 잠들고 싶다고도 말씀하셨고요. 황후께서는 아주 피곤해 보이셨습니다. 항시 손 씻을 물을 떠 두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하녀 아이를 불렀는데 방 바깥에 서 있던 아이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아이를 찾으러 잠시 나갔다가 돌아왔더니 소파에 앉아 졸고 계셨습니다.”
가까스로 쉬지 않고 길게 말을 잇던 남작부인이 문득 루드비히의 뒤로 멀리 보이는 파사칼리아의 관을 발견하고 숨을 멈추었다.
“남작부인.”
“……바깥이 아주 어두워서, 밤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커튼을 모두 치고 황후를 침대로 모셔드렸습니다. 아마 그때가 아홉 시 즈음이지 않았었나 생각합니다.”
“곧장, 어느 것도 드시지 않고 주무셨습니까?”
“분명 그랬습니다. 물을 드릴까 황후께 여쭈었지만,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방을 떠나기 전, 그대로 잠에 드셨습니다.”
시중이라고 거창하게는 말해도, 궁정의 시녀들은 밤새도록 깨어 있으며 제 주인을 모시는 일이 없었다. 그들 역시 시중을 받아야 하는 귀한 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빌센 남작부인이 새벽에 시중을 들었다는 것은 황후의 침실 옆 협실에서 잠이 들었다는 의미였다. 프란츠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모두 제게 보고된 내용이었다. 그녀는 파사칼리아의 최후에 가장 가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단순한 참고인으로서는 그리 적합지 못했다. 애초에 부검이 없다면 어떤 증명도 불가능했다.
남작부인이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는.
“새벽 네 시 경…….”
희미하게 새어 나온 말은 한마디도 채 되지 못하고 끊겼다. 루드비히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 보라.”
“황후께서 짧게 종을 울리시어, 바로 일어나 황후께로 갔습니다. 안색이 유난히 좋지 않으신 것 같아 조심스레 여쭈니 그저 안 좋은 꿈을 꾸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정말 악몽이라도 꾸신 듯 이마위로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보였습니다. 도무지 잠에 들 수 없으니 브랜디를 한 잔만 가져와 줄 수 있겠느냐고 하시기에, 곧바로 저는 하녀들이 묵는 방을 찾아갔습니다. 그중 한 아이가 지하 창고에 내려가 브랜디를 가지고 침실까지 왔고, 저는 그것을 받아…….”
“그것을 어찌 지금 말합니까.”
프란츠의 싸늘한 음성에 남작부인이 다시 입을 다물자 루드비히가 프란츠에게 그녀를 추궁하지 말라는 듯 손짓했다. 사정이야 구구절절 듣지 않아도 뻔할 것이었다. 제 앞에 벌어진 일이 너무 무섭고, 더 깊이 연루되어 혐의를 받는 것이 두려웠노라고. 루드비히의 손짓에 그나마 조금 안도한 남작부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황후께 드렸습니다. 두고 가시길 원하셨기에 드시는 걸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곧 주무실 것 같지 않았습니다. 황후께서는 늘 여섯 시에 깨시는데, 오늘따라 삼십 분이 지나도록 부르시질 않으시기에 문밖에서 아침이 되었노라 고했으나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로부터 삼십 분을 더 기다렸고,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하녀와 함께 문을 열자 황후께서…….”
“이제 되었다.”
루드비히는 서늘하게 시선을 돌려, 남작부인의 곁에 선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백작부인.”
“폐하.”
루드비히의 부름에 백작부인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루드비히는 기억을 더듬듯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를 잠시 응시하다 물었다.
“아그네스라고 했나.”
“…….”
“파사가 늘 그대를 그렇게 불렀지.”
파사칼리아가 루드비히 앞에서 아그네스를 소리 내 부른 것은 다섯 손가락 안으로도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도 모두 십수 년 전의 일이었다. 아그네스는 그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그를 조금 놀란 듯 망연하게 바라보다, 이내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루드비히는 그것을 별로 거슬려 하지도 않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대가 지켜본 바로, 일 리베로 가기 전 황후가 어떠했는가?”
“겨울을 지나시며 찬 공기 탓에 호흡기가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지난해 겨울이 끝나기 전 에델가르드 공저의 주치의를 불러 진료를 한 번 받으셨는데, 그 후 그 부분은 조금 호전을 보이셨습니다. 허나 신년 연회가 지난 후 본디 오랜 지병이셨던 위병 증세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시다, 황녀 전하께서 베르됭으로 떠나시고 보름 정도가 더 흘렀을 때 정도가 눈에 띄게 심해지셨습니다.”
아그네스는 천천히 기억을 차례로 더듬으며 말을 골랐다.
“머리가 띵하니 불쾌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위병을 앓으실 땐 늘 두통을 함께 겪으셨던 터라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으셨습니다. 식욕이 점점 없어져 하루에 한 끼를 드시는 것도 꺼리시는 날이 많아지셨습니다. 자주 구토를 하셨고, 무기력하셨으며, 가끔 권태감이 심각해 보이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흉부에 통증을 느끼시게 되었는데, 진료를 극히 꺼리시어 제가 대신 직접 주치의에게 증상을 상세히 말하고 약을 바꾸었습니다.”
“그가 뭐라고 했지?”
“위에 천공이 생겼을 수도 있고, 무언가 폐에 염증을 일으킨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몇 해 전 보이신 적 있는 증상이라 특별히 달리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직접 진료해 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단언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렇기에 강력한 처방을 할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진료를 받으실 수 없는 동안, 그간 먹는 약이 혹여나 잘못된 확신으로 처방되어 귀한 몸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되니, 단순히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처방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진료하길 바랐습니다.”
“그게 언제인가.”
“황녀 전하께서 엔트위프를 지나셨다는 소식이 들린 날이었습니다.”
비올레타가 엔트위프를 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일은 족히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날이었다. 루드비히는 잠깐 숨조차 쉬지 않고 미세하게 떨리는 턱을 이를 악물어 멈췄다. 그리고 기묘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들의 뒤에 서 있던 제 시의에게 물었다.
“가르티에, 이것으로 되겠는가?”
황후의 최후를 목격한 남작부인에게서는 죽음당시의 징후를, 황후의 최측근인 백작부인에게서는 평상시의 병태를 알아낸 것으로 부검을 대신하겠다는 뜻이었다. 시의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몇 가지 의심되는 것이 있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독단으로 확답을 드리기가 힘이 듭니다. 백작부인께서 진술하신 것은 모두 받아 적어 두었으니, 이미 대기 중인 독물학자들과 철저히 따져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루드비히는 얕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 빌센 남작부인의 진술은 신뢰할 만한 것인가.”
“황후께서 정양을 떠나시며 가장 먼저 지목하신측근 시녀입니다. 그렇기에 저도 그녀를 신뢰합니다.”
“그대가 남작부인을 신뢰한다니, 문제는 짐이 그대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뿐이겠군.”
마치 지금까지 그녀의 모든 진술을 신뢰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묻던 것과는 달리 서느런 칼날 같은 말이었다. 아그네스가 시선을 조금 들었다가 이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루드비히는 건조한 눈으로 아그네스를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마치 제 주인 같은 계집이었다. 고고하게 허리를 세우고, 우아하게 몸을 낮춘다.
“그대와, 이 빌센 가의 계집을 심문실에서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것은 오로지 그대들의 주인이 그대들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이 모든 것이 기만의 결과라면…….”
루드비히는 조용히 말끝을 흐리며 그녀들의 뒤를 바라보았다. 문을 여닫는 소리도 없이 시종이 급하게 들어와 문가에 섰다. 알 수 없는 침묵 속에서 빌센 남작부인은 불안한 얼굴로 제 뒤에 무엇이 나타났는지 돌아보지도 못한 채 몸을 떨었다. 프란츠가 그녀들을 지나쳐 시종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시종이 프란츠의 귀에 무어라 짧게 속삭이고는 곧바로 조용히 방을 나갔다. 프란츠가 묘한 얼굴로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프란츠.”
“3황비궁의 하녀가, 엿새 전 폴퇴르의 한 약제사에게서 안티몬, 청산, 아편, 스트리키니네 등의 약물을 여덟, 혹은 아홉 가지가량 구매했다고 합니다.”
아그네스가 눈을 크게 뜨며 뒤돌았다. 프란츠는 저를 놀라 돌아보는 아그네스 너머로, 황제의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르티에, 부검을 계속하고 상의는 좀 더 뒤로 미루지.”
“…….”
“대신 배를 갈라 볼 계집이 있으니.”
비올레타는 홀린 듯 파사칼리아의 궁을 향해 걸었다. 마차를 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마차를 기다리지 못했다. 그것을 만류하던 밀로일라는 결국 말없이 비올레타의 뒤를 따르는 중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맑은 여름밤이었으나 유난히 공기가 서늘했다. 밀로일라는 팔에 걸치고 있던 비올레타의 로브가 저도 모르게 바닥에 끌리는 것을 보고 다시 들었다. 궁을 나서기 전 디아나가 겨우 아무것이나 잡아 챙겨준 것이었다. 비올레타는 밀로일라와 기사들이 제 뒤를 따르고 있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비올레타가 걸어가다 벌써 두 번이나 넘어졌으므로, 밀로일라는 이젠 그저 그녀가 더는 넘어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 높지 않은 구두를 신고도 걸음걸이가 불안했다. 파사칼리아의 시신은 정작 황제궁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는데도 비올레타는 주인도 없는 궁을 향해 걷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파사칼리아를 당장 보고 싶어 했으나, 독살이 의심되므로 절차상 부검을 앞두고 있기에 당장 시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보고 싶어 한 것은 살아 있는 제 모후였지, 부검을 앞둔 시신이 아니었으므로.
불과 이틀 전, 모든 창문이 훤히 빛나고 있었던 것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파사칼리아의 궁은 드문드문 불이 켜진 몇 개의 창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어두웠다.
비올레타는 취한 것처럼 그제를 떠올렸다. 파사칼리아가 좋아하는 뉘르텔 산 대구 요리와, 칼이 선물한 로드리고 산 백포도주가 올라온 식탁. 그리고 웃는 사람들. 느긋한 밤이었다. 라키엘과 장난으로 시작한 트럼프에 파사칼리아가 아그네스를 끌고 와 휘스트―4명이 플레이하는 카드게임.―를 하고 있으면, 황후의 귀부인들과 그녀의 남편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기분 좋은 소음을 냈다. 모두 친근한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의 그 아득한 말소리가 귓전을 몽롱하게 울렸다.
파사칼리아는 그 속에서 몇 번이나 웃었다. 비올레타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내리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침통한 얼굴로 간간이 어두운 복도에 서 있던 하녀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앞서 가 불을 밝혔다. 비올레타는 그들을 보지도 못한 것처럼 빠르게 층계참으로 걸었다. 그녀는 파사칼리아가 사실은 아직 일 리베로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화랑처럼 커다란 액자들이 길게 늘어선 복도 위로 그녀의 구두 소리만 차갑게 울렸다. 바깥에선 마치 처음 걸어 보는 사람처럼 서툴게 걸었던 비올레타는 점차 파사칼리아의 방과 가까워질수록 우아하게 걸었다. 그녀가 이윽고 액자들의 끝에 새로이 걸린 제 초상화를 지나 파사칼리아의 침실 앞에 섰다. 문에 양각으로 세밀하게 조각된 장미넝쿨 위로 파리하게 질린 두 손이 올라와, 이내 힘없이 미끄러지듯 문고리로 다시 내려갔다. 문이 열렸다. 방은 어두웠다. 비올레타는 방 안에 현실감 없이 들어섰다. 문이 제 뒤로 닫히고도 그녀는 조금 더 걸었다.
문가에서는 보이지 않던 내실의 끝이 어둠 속에서 멀리 보였다. 비올레타는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 시린 눈을 깜빡였다. 라키엘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비올레타는 잠시 망연하게 서 있다가,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듯 라키엘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그에게 걸어가는 그 일련의 과정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녀가 제게로 위태롭게 걸어오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라키엘은 그녀가 막상 제 발치에 주저앉는 것은 보지 않았다. 그는 벽면에 붙은 콘솔의 뭉툭한 모서리만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지나치게 고요해서 오히려 간헐적으로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라키엘.”
제 입안에서 움직이는 혀가 마치 차가운 돌덩이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가까스로 힘주어 발음했다. 라키엘. 라키엘.
라키엘은 형벌이라도 받듯 비올레타가 계속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을 조용히 들었다.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라키엘. 비올레타의 발음이 울음에 뭉개졌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턱을 악물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파사칼리아는 이제 이곳에 없다. 그리고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시간이 많을 거라곤, 애초에 생각도 안 했어. 기대 같은 건 배워 본 적도 없으니까.”
“…….”
“내 얄팍한 애정이 누군가를 살게 할 리가 없어.”
비올레타는 그가 누구보다도 빨리 파사칼리아의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이 방에 들어서기 전까지, 파사칼리아가 아직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자신과는 달리. 그의 말에서는 이미 익숙한 절망이 묻어났다. 그리 가슴 저미지도, 생이 거꾸로 쏟아지는 양 절절하지도 않은 담담한 체념.
“그게 가능했다면 이렇게 혼자 남겨질 일도 없었겠지. 결국엔 에델가르드가 다 죽어 버렸고, 그래. 나도 알고는 있었어.”
결국은 머지않아 이런 꼴이 될 것도. 에델가르드. 이 빌어먹을 에델가르드. 라키엘은 공허한 어조로 욕지기를 내뱉듯 중얼거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성마르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만 그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지금은 아니다? 그렇게 얼빠진 소리가 어디 있나. 멍청한 새끼.”
“라키엘.”
“에델가르드에 때가 와서 죽은 인간이라곤 없어. 내 조부모도, 내 어미와 아비도, 미하일도. 알고 있었어.”
“라키엘.”
“알아? 난, 알고 있었어. 얼마 전에는 그녀가 어쩌면 죽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까지 했지. 그러고는 그저 의무라도 되는 양 몇 번 권하고, 고모님이 그것을 싫다고 말하게 뒀어. 그래, 그럴 리가 없다고 속으로 정신 나간 소리나 되풀이하면서.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지.”
“어마마마가 얼마나 그것에 완고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마음 편히 치료받을 수 있는 일 리베로…….”
“아, 그래. 일 리베. 그곳으로 밀어 넣은 건 심지어 나였지.”
비올레타는 고개를 들어 라키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는 그의 이목구비만 겨우 어렴풋이 보였으나 비올레타는 그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울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올레타의 얼굴을 발견한 그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내가 보냈어.”
“……그녀가, 스스로 갔어요.”
“죽었어.”
“…….”
“죽어 버렸어.”
비올레타에게 말하는지, 혹은 제 스스로에게 말하는지 모를 말이었다. 라키엘은 그렇게 담담하게 단언했다.
물기 없이 메마른 목소리에서 비올레타는 그가 조금도 울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올레타는 그것이 못내 서러웠다. 라키엘은 제 무릎이 비올레타의 눈물에 젖어 가는 것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손에 힘이 뻣뻣하게 들어갔다.
울지 마.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낮게 짓눌린 소리가 겨우 목구멍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서늘한 손이 비올레타의 젖은 뺨을 낯설게 쓸었다. 비올레타는 그 손길을 막막한 얼굴로 받아냈다. 지금의 그가 자신을 살피고 걱정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마치, 아프거나, 슬프거나, 혹은 절망할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저 스스로가 그럴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비올레타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고 제게로 당겼다. 라키엘의 손이 그녀의 뺨에서 허공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허공을 맴돌던 손이 이내 비올레타의 허리를 천천히 감쌌다.
“……이제 우리 둘뿐이에요.”
라키엘은 말없이 제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깊게 안았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어깨 위로 섧게 쏟아내던 제 눈물을 그치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오로지, 당신과 나, 우리 둘만 남았어요.”
“그래.”
“오직 우리만…….”
“그래. 너와, 나만이.”
절망과 일말의 안도감, 그리고 다른 절박감이 기묘하게 뒤섞인 목소리로 라키엘은 대꾸했다. 비올레타는 제 입술이 맞닿아 있던 그의 귀 아래로 핏대 선 목에 가만히 입 맞추고, 나지막이 말했다.
“난 이제, 준비된 것 같아요.”
고여 있던 눈물이 가늘게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라키엘은 일그러진 눈매를 겨우 휘어 웃었다. 허리를 끌어안은 커다란 손이 등을 타고 올라가 이내 목 뒤를 단단하게 감쌌다. 마치 그녀가 제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비올레타는 제 어깨 위로 툭 떨어지는 물기에 다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겨우 삼켰다. 그녀는 커튼에 가려진 창가를 바라보며 덜덜 떨리는 턱을 가까스로 힘주어 다물었다. 그리고 입술을 피가 나도록 세게 깨물다가 가까스로 웃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입을 열었다.
“우리 어머니를 만나러 가요.”
열여덟 살짜리 하녀가 입을 열자, 황제의 시의인 가르티에는 황후의 배를 직접 갈라 알아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 릴리 프레네가 3황비의 명에 따라 사들인 것은 아편, 청산, 안티몬, 스트리키니네, 두꺼비독 등을 비롯한 여덟 가지의 약물이었는데, 그중 파사칼리아의 평온한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일 살레르노.
쾨미티 인과 같은 원주민들이 볼람 나무에서 채취해 화살촉에 바르고 사냥에 쓰던 것을 밀니로의 개척자들이 들여 온 것으로, 서대륙에는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독극물이었다. 일 살레르노는 체내에 침입할 때 전혀 고통을 주지 않고, 그리 눈에 띄는 현상을 동반하지 않고도 동물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오로지 대상의 숨을 끊어 놓는 것만이 목적인 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깐의 고통이 지나가고 죽음이 찾아온 뒤에는 마치 잠든 것처럼 온전한 모습을 하게 된다.
쾨미티 인들이 이런 일 살레르노를 즐겨 쓰는 것은 그들이 죽음에 갖는 일말의 예의나, 혹은 평화적인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기실 대륙을 넘어온 일 살레르노는 그 용도가 달랐다. 체내에 침입 시 고통이 없다는 것은, 독에 당한 이가 저 스스로 곧 죽게 될 것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적어도 죽음을 목전에 두기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아주 조용하고, 세련되며, 편리한 일이었다. 눈에 띄는 현상도 없이, 주위의 시선에조차 걸리지 않고 순식간에 죽음과 가까워진 사람은 아주 잠시 몸을 가누지 못한다. 마치 중독된 사냥감이 도망치다 어느 순간 다리에 힘을 잃고, 그대로 머리부터 고꾸라지는 것처럼. 고통은 그리 길지 않다. 발끝부터 시작된 마비는 흉부로 타고 올라가 호흡을 멎게 한다. 파사칼리아는 얼마간 그렇게 숨을 쉬지 못하고,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홀로 침실에서 죽어 갔을 것이다.
파사칼리아가 이전에 어떤 이상 증상을 보였든, 일 살레르노가 파사칼리아를 결정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추측은 곧 분명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 리베의 별궁과 3황비 간 연락책이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연락책으로부터 엄지손톱만 한 루비 두 알을 받은 일 리베의 하녀는 기회를 엿보던 중 빌센 남작부인이 브랜디를 찾자 몰래 갖고 있던 독약을 모두 넣었다. 그녀는 제가 들고 있던 독이 어떤 이름을 갖고 있는지 따위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고발한 연락책은 알고 있었다. 연락책은 최소한의 면피를 위해 외워 두었던 또 다른 공모자들의 이름도 고발했다. 이미 황립 재판소의 지하에 갇혀 있던 3황녀의 시녀들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 모른 척 입을 닫고 있던 것에서 하나라도 더 털어놓기 위해 열심히 떠드는 것으로 태도를 곧장 바꾸었다. 자신이 3황비에게 결코 충성을 바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녀들의 말은 하나같이 절박했다.
그녀들의 진술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중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이 모든 것은 하나도 걸 러지지 않고 황제에게로 보고되었다. 이미 결정적인 죽음의 원인이 밝혀진 상태에서 그녀들의 진술이 중대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또 다른 독살 시도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 덕분이었다. 그녀들은 루비 두 알이 만들어 낸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파사칼리아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수도로 돌아오신 뒤로는 처음 뵙는 것이었는데, 어쩐지 전과 같지 않아 보였어요. 정신이 어딘가 이상해지신 것만 같았죠. 본디 성정이 불같으셨지만, 화를 내시는 일이 이전에 비해도 지나치게 잦고, 내실에 두시는 하녀 아이들에게 손찌검하시는 일이 많아졌어요. 사소한 실수에도 불안해 하거나 분노를 참을 수 없어 하셨죠. 술에 취하면 종종 황후 폐하의 존함을 부르셨어요. 입에 담기에는 차마 황망한 말과 함께요. 전하께선 베론 후와 수상하게 이야기를 나누실 때가 많았어요. 마치 무언가 숨기고, 자신들만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무슨 모의라도 꾸미고 있는 것 같았죠…….’
시녀들의 말은 이 사건보다는 필연적으로 3황비가 음모를 꾸밀 만한 인물이었다는 것부터 증명하려는 것에 가까웠다. 그 구렁텅이에서 발을 조금이라도 빼기 위한 절박함에서 비롯된 과장이 다소 느껴졌으나, 다른 궁인들과도 대부분의 진술이 일치할 정도로 정확했다.
그녀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든, 멀리서 지켜봤든 그들은 모두 비슷하게 말했다. 그녀는 궁으로 돌아온 뒤 늘 불안해 보였고, 쉽게 분노를 터트렸으며 궁인들에게 자주 손찌검을 했다.
시녀들은 심문 분위기가 우호적으로 기울자 좀 더 나아가 자신들이 의심해 마지않았던 것을 털어놓았다.
‘엘 로 틸라. 브란젤의 미백 화장수 말이에요. 하루는 아주 값비싼 것이라고 하시면서 한 병씩 하사해 주셨죠. 크리스티나, 에르몬티 부인이요. 크리스티나가 신 난 얼굴로 그것을 곧바로 바르는데 전하께서 그걸 보며 웃으시고는, ‘아무런 냄새도, 맛도 나지 않지. 그걸 매주 한 방울씩 마시면 이 년 후에는 죽는단다. 이 년까지 기다리기도 전에 어떤 병이든 걸리면, 그게 설령 감기 같은 것이라도 생명을 잃을 수 있다던데.’ 크리스티나가 화장수를 바르다 말고 그대로 굳으니 전하께서 소리 내 웃으셨죠. 남편이 하녀에게 아랫도리를 헤프게 놀리거든 그것을 그가 먹을 음식에 쏟아 버리는 건 어떻겠느냐고. 그것이 그저 장난인 줄 알았지만, 어쩐지 계속 소름이 끼쳤어요. 그 이후로 황후궁의 동태를 집착에 가깝게 살피셨죠. 우리끼리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였어요…….’
‘……그날은 하루 종일 넋이 나간 듯 있다가도 우리가 가까이 가면 예민하게 날을 세우셨어요. 마치 교수형을 앞둔 사람처럼 처연하기도 하고,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죠. 그날, 맞아요. 그 프레네라는 계집이 폴퇴르의 약제사에게 약을 사러 갔던 그날이요. 그날 밤, 전하께서, 그 아이를 잡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을 모두 사 오라고 다이아 한 알을 쥐여 줬죠. 그 불쌍한 계집아이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어요. 왜 말리지 않았느냐고요? 경, 제발 저를 믿어 주시길, 저는 그 미친 짓이 전하의 머릿속에서 끝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치밀한 구석이라고는 없었고……. 전하는 전혀 준비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그러니까, 이를테면 누군가를 죽이더라도, 자기가 그 후 살아남을 것을 생각하는, 그런 것 말이에요.’
고하는 말 한마디 없이 황비의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카트린느는 별달리 놀란 기색도 없이 제 침실에 들이닥친 황제의 근위병들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앉아 무장한 사내들을 바라보는 눈이 태연했다.
이윽고 루드비히가 방으로 들어섰다. 카트린느는 그제야 우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근위병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오롯이 루드비히만 응시하는 시선이 집요했다. 루드비히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카트린느를 마주했다.
“폐하.”
“마지막 기회였다.”
기회, 카트린느는 환멸감 속에 그 말을 곱씹었다. 루드비히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너는 짐의 모든 기회를 끌어 썼다.”
“살아도 죽은 듯이 살라,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아니.”
루드비히가 천천히 카트린느의 앞으로 걸어왔다. 웃는 것도 같고, 조금 찡그린 것도 같은 기묘한 표정으로 그는 입을 열었다.
“왜 아직도 죽지 않았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나지막한 음성이 시퍼런 칼날처럼 뱃가죽을 뚫고 들어왔다. 카트린느는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덜덜 떨리는 턱에 악을 쓰듯 힘을 꽉 주었다.
“이렇게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시간을 주었는데.”
“……제게, 물으실 것이 없으십니까?”
“물을 것이 없다.”
“제 궁 문틀을 닦던 하녀까지 데려가 물으셨습니다. 헌데 제게는 물으실 것이 없습니까?”
“네 혓바닥이 지껄이는 것을 듣느니 네 발밑 먼지에 대고 묻지.”
“폐하.”
“짐이 물으면.”
“억울하니, 부디 진상을 밝혀 달라. 제가 폐하께 그리 답을 드리면 폐하께서 들어 주시겠습니까?”
카트린느는 목 졸린 소리로 겨우 물었다. 루드비히가 입매를 비틀었다.
“입을 열지 않은 것은 이제 너뿐이다. 굳이 더 헤집자면 네 뱃속밖에 없지.”
카트린느는 말없이 낮게 웃었다. 루드비히가 카트린느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언제부터였나?”
비정상적으로 차분한 어조였다. 카트린느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황후께서는 엘 로 틸라를 봄 내내 드시었습니다. 매일 한 방울씩 와인에 떨어트리도록 했고요.”
백일은 족히 되었다는 뜻이었다. 루드비히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누구에게.”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모두 제게로 귀결되는 것인데.”
카트린느의 날선 대꾸에 루드비히가 입매만 끌어 올려 웃었다.
“그래. 어차피 모두 죽을 테니 상관은 없지.”
“제가 바라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킬리안만은 이 모든 사달과 상관없다는 것을, 폐하께서 기억하시기를…….”
“아들을 그리 생각하는 줄은 몰랐군. 평생 아들이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왔지. 아닌가?”
“……어미를 잘못 만났으나 폐하의 아들입니다.”
“내 아들이라.”
루드비히는 불현듯 깨달은 것처럼 짧게 읊조렸다.
“그렇지. 네가, 내 아들을 낳았더랬지.”
거짓말처럼 온화해진 목소리로 루드비히가 말했다. 카트린느의 얼굴에 희미하게 희망이 어렸다. 루드비히는 천천히 카트린느의 목과 뺨으로 손을 뻗었다. 이제는 까마득한, 달콤했던 그 짧은 한때를 떠올리게 하는 손길에 카트린느가 뻣뻣하게 굳었다. 마디가 굵은 엄지가 카트린느의 턱 끝을 느릿하게 쓸었다.
“사실은, 네가 내 아들을 낳았을 때부터 널 죽이고 싶었다.”
루드비히는 카트린느의 파리한 얼굴 위로 환각처럼 떠오르는 제 어미를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천박하고,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여자. 어린 나이에 제게 시집온 여자는 이제 제 어미가 죽었던 무렵을 조금 넘어선 나이였다. 루드비히는 손을 허공으로 떨어트리며 천천히 웃었다.
이제야, 널 죽일 수 있을 것 같구나.
여자의 인생은 그림을 모사한 것처럼 제 어미와 닮아 갔다. 그것이 끔찍해 죽이고 싶다가도, 닮은 것을 보면 도저히 죽일 수가 없었다. 루드비히는 파사칼리아가 누운 싸늘한 관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된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제가 평생에 걸쳐 죽인 여자.
그리고 제 어미와 똑같은 여자가 죽인, 여자.
무엇을 위해서였나. 루드비히는 어느새 근위병들의 손에 끌려온 킬리안을 응시했다. 원망과 증오, 그리고 미련한 염려가 뒤섞인 시선이 카트린느를 향해 있었다.
그 모든 일을 저지르면서 자신은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을 제 어미를 향해. 이윽고 루드비히와 시선이 마주치자 킬리안의 얼굴 위로 공포가 떠올랐다. 루드비히는 제 넷째 아들을 생경한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묵은 기억이 불쑥 머리를 비집고 올라왔다. 제 손으로 죽였던 형과, 제 스무 살. 그리고 제 열아홉.
네가 왜 그리도 증오스러웠는지 알겠다. 네가, 나였구나.
빈손으로 높은 곳만 바라보며 절망하고, 원망하고, 꼴사나운 열등감과 추악한 증오로 가득 찬. 그것은, 어린 자신이 힘이 없어 나타낼 수조차 없었던 제 모든 것이었다.
“이제야…….”
“…….”
“너도, 네 아들도 죽일 수 있겠구나.”
“불편한 것은?”
“없습니다. 겨우 이틀도 안 되었고……. 방도 이만하면 호화롭고요.”
아그네스는 라키엘에게 엷게 웃어 보였다.
라키엘은 건조한 눈으로 백작부인의 뒤로 빛바랜 벽지를 응시했다. 황제가 유일하게 배려하고 있다는 말이 헛소문은 아니었던 듯, 그녀가 갇힌 방은 황립 재판소의 음침한 지하실 중 그나마 밝은 빛이 도는 곳이었다. 그를 잔잔한 눈으로 살피던 아그네스가 조용히 물었다.
“비올레타 전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괜찮습니다.”
“공은…….”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저를 염려하는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라키엘은 그것을 회피하듯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아그네스는 라키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그가 고작 예닐곱 살 먹은 작은 아이였다.
작은 머리가 제 허리춤에나 겨우 닿을까 싶었던. 아그네스는 문득 새삼스럽게 그 아득한 시간을 세었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아이는 어느새 다 자라 피로한 얼굴로 제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가 어쩔 수 없이 안쓰러웠다.
“폐하께서 백작부인을 기소 대상에서 제하라 따로 하명하셨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곧 이 방에서도 나올 수 있을 테고요.”
“감사할, 일이군요.”
황제라는 말에 조금 날선 목소리로 대꾸한 아그네스가 이내 다시 누그러진 눈으로 라키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빌센 남작부인은?”
“아마 그 계집이 제일 먼저 죽을 겁니다.”
“…….”
“이번 일과 무관하다는 게 사실이든 아니든, 이제 그리 중요한 사안은 아니죠. 꽤 오랫동안 3황비의 사주를 받아 왔더군요.”
“……역시 그랬군요.”
황제 앞에서 직접 빌센 남작부인을 변호해 주기까지 했다던 아그네스는, 라키엘의 말을 듣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라키엘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백작부인.”
“말씀하세요, 에델가르드 공.”
“진짜로 몰랐습니까?”
“무엇을요.”
“고모님이, 독에 서서히 죽어 가고 계셨던 것.”
달리 질책하지도 않는 어조로 라키엘이 조용히 물었다. 아그네스는 그 물음에서 라키엘이 사실은 저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는 쓰게 한숨을 삼켰다.
아그네스는 파사칼리아가 제 자매와 같다고 공언하던 유일한 여자였다. 라키엘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어떤 일에도 하지 않는 주의였으나, 아그네스의 경우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경우에 속했다. 그러니 아예 논외에 두는 것이다. 아그네스가 라키엘을 빤히 응시한 채로 천천히 말을 골랐다.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러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라키엘은 눈가를 설핏 일그러뜨렸으나 이내 곧 무표정하게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아그네스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황후 폐하의 상태와 더불어, 심지어 빌센 남작부인에 관해서도. 그러나 그 이상은 하지 못했습니다.”
“왜.”
“……황후께서 원치 않으셨습니다.”
라키엘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원치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지 말고 그저 조용히 홀로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빌센 남작부인을 독서 시간마다 불러 책을 읽게 하시고, 밤에는 침대를 준비하게 하셨죠.”
“…….”
“마치 그녀에게 최대한 기회를 주려는 것처럼.”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라키엘은 핏발 선 눈으로 잇새를 악물었다.
“황후께서…….”
라키엘이 다문 잇새로 씹어뱉듯 천천히 말했다.
“스스로, 죽고 있었다고 했습니까?”
“……각하.”
“고모가, 제 스스로, 독을 바치는 계집을 옆에 두고 있었다고 했습니까?”
“…….”
“죽기를, 스스로 원했다고?”
목 아래 뜨겁게 들끓는 것을 어쩌지도 못하는 얼굴로 라키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그네스가 떨리는 눈꺼풀을 꾹 감았다 세게 떴다. 눈물이 한 방울 툭 흘러내렸지만 여자의 얼굴은 의연했다.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습니까?”
“…….”
“그걸 아는 잘난 당신은 뭘 했는데!”
“제가 아는 전부는, 모두 황후 폐하께서 원하고 바라신 것입니다.”
라키엘이 서늘하게 눈을 들어 아그네스를 응시했다. 아그네스는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그 눈을 마주했다.
“위험은 이미 있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남은 생명을 재어 보시는 날이 많았어요. 지난가을부터요.”
3황비가 그 얕고 점진적인 독살을 꾸미기 시작한 것은 해가 바뀌고 나서였다. 라키엘은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그네스, 나는 내 죽음이 에델가르드를 서서히 기울게 하는 것이 아닌, 가장 좋은 기회 같은 것이길 원해. 누군가가, 내가 죽었기 때문에 에델가르드를 놓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었기 때문에 에델가르드에 매달리길 원해. 내 죽음만큼은 그런 것이길, 원해.’
‘그리고 이 모든 걸, 라키엘과 에비가일이 모르길 원해.’
아그네스는 제가 절반이나 실패한 것을 알고 있었다. 라키엘에게 결국 제가 입을 열고 만 것처럼, 파사칼리아 역시 그녀가 바란 때에는 죽지 못했다.
그녀가 바라고 아그네스가 돕기로 한 대로라면, 파사칼리아는 계절이 바뀌는 것을 몇 번은 더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 아그네스는 파사칼리아의 뜻에 따르기로 수십 일 전에 결심하고서도, 못내 그 이른 죽음이 사무쳤다.
죽기 전까지 제가 죽는지도 몰랐을 그 죽음에 속이 문드러졌다.
아그네스가 시린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놓아 버리듯 한숨을 뱉었다. 그녀의 손이 허리의 두터운 리본을 살짝 풀어 작게 접힌 편지를 찾아냈다. 그리고 라키엘에게 내밀었다.
“단지 여러 손을 타고, 여러 눈에 담기는 것이 싫어 빼돌렸습니다. 비올레타 전하께 전해 주세요. 황후께서 그날 새벽 전하께 쓰신 것입니다.”
라키엘은 바로 앞에서 전해 달라 말한 것이 무색하게도, 대꾸 없이 편지를 펴냈다. 아그네스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견 성의 없어 보이는 손길에 종이가 아무렇게나 펴졌다. 라키엘이 종이 위로 정갈한 파사칼리아의 글씨가 길게 늘어선 것을 발견하고는 손을 멈췄다.
비올레타에게.
잠자리가 바뀌었다고 오늘 밤은 계속 몇 번이나 깼구나. 잠은 계속 오지 않고, 어둠 속에서 무엇을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종이를 보고 널 떠올렸다.
나는 일 리베에 잘 도착했단다.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일 리베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아느냐고? 사실은 미하일을 가졌을 때도 이곳에서 여름을 보냈었단다. 그게 벌써 24년도 더 지난 일이구나.
여긴 별로 변한 것이 없어. 쓸모없는 옛날 생각만 떠올리게 하지. 별궁은 숲에 둘러싸여 있는데, 네 궁처럼 하얀 모래를 뿌려 놓은 것 같은 작은 저택이란다.
네가 보면 아주 좋아할 것 같아. 밤에 창문을 열어 놓으면 나무 냄새가 시원하게 들어오거든. 너도 이곳에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 지긋지긋한 마차를 또 타게 되는 건 힘들겠지만, 너도 여기에 온다면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여기게 될 거야. 아직도 네 건강이 좋지 못한 것 같아 걱정이다. 내가 널 늘 염려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렴.
벌써부터 네가 보고 싶다, 내 아가.정말로 조만간, 여름이 다 지나기 전에 이곳에 오렴. 그러고 보니 오늘은…….
황후를 시해한 배후로 지목되었던 카트린느가 죽었다. 그녀는 아침이 밝기 무섭게 빌트렌스의 광장으로 끌려 나와 목이 잘렸다. 비참한 최후였다.
빌트렌스의 광장에서 200년간 벌어졌던 수많은 사형과는 달리, 카트린느의 죽음은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만이 지켜보았다. 일반 시민들의 출입이 일제히 통제된 널찍한 광장에는 베론 후를 제외한 아홉 명의 추밀원 의원들과 몇 명의 황족, 황후의 시녀장이었던 길데 백작부인이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들 중 가장 앞에 서서 카트린느의 최후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 자리한 몇 명의 황족 중에는 카트린느의 아들인 킬리안도 있었고, 킬리안의 옆에는 1황자 빌키어스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기묘했던 광경을 하루 온종일 곱씹었다. 카트린느가 죽은 자리에서는 곧이어 카트린느의 시녀들과 하녀들, 일 리베의 별궁 하녀들, 늙은 약제사, 중간 연락책들, 그리고 빌센 남작부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열다섯 명에 이르는 사람의 이름이 불렸다.
그 모든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 데는 두 시간도 채 필요하지 않았다.
4황자는 광장에 끌려오고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제 어미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고 혼절해 다시 북의 탑으로 끌려갔다. 황후의 시해에 관해 공모 혐의를 받고 있는 그에 대한 재판도, 하루 뒤면 열릴 것이었다.
사람들은 4황자가 제 어미의 사형을 지켜본 것이 그에게 일어난 가장 최악의 일이리라 생각했고, 재판은 그 일부에 불과하리라 믿었다. 재판이 그저 그의 인생을 공식적으로 영영 계승권과 떨어트려 놓을 뿐이라고 믿고 있는 이들에게는 황자의 재판보다는 열흘 뒤 있을 베론 후의 재판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 속에서 빌키어스만이 움직였다.
“살려 주십시오, 폐하.”
빌키어스는 잠긴 목을 열어 겨우 소리를 내듯 말했다. 그만이 황제를 알았다. 킬리안은 죽을 것이다. 루드비히는 알현실 중앙에 무릎 꿇은 제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빌키어스는 따가운 침묵 속에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 루드비히가 천천히 발을 내디뎌 빌키어스에게로 다가왔다.
“살려 달라.”
“킬리안은 살려 주십시오.”
“살려 두면, 어차피 네가 죽일 것이 아니냐.”
루드비히의 말은 흡사 조롱에 가까웠다. 루드비히가 빌키어스 앞에 멈춰 섰다. 빌키어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러냐?”
빌키어스는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나머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꽉 그러쥐었다. 바닥이란 게 쥘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결국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빌키어스가 매끈한 입매를 비스듬히 끌어 올리며 이죽거리듯 말했다.
“제 수고라도 덜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너라도 행복하겠지. 네가 짐의 장자가 아니냐.”
빌키어스는 벌건 눈을 내렸다. 루드비히의 손이 빌키어스의 턱 끝을 잡아 제게로 다시 올렸다.
“모른 척 가만히 기다리면 네게 모든 것이 돌아갈 터.”
“실상 제게 어떤 것도 쥐여 주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쥐여 주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루드비히가 낮게 웃으며 빌키어스를 밀어내듯 거칠게 놓았다. 빌키어스는 날이 선 눈을 감추듯 내리깔았다.
“킬리안을 살려 주십시오. 그 아이가 무고한 것을 폐하께서도 아십니다. 부디 사실을 살피십시오.”
“킬리안이 네 이 눈물겨운 수고를 알 것 같으냐.”
“킬리안이 몰라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는 폐하의 아들입니다. 그것만으로 폐하께서 살려 두실 가치가 있습니다.”
빌키어스는 제가 지껄이고 있는 말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저를, 미하일을, 킬리안을 시험했다.
마치 그러다 죽어 버리거나, 망가져 버려도 상관없는 것처럼 그렇게 대했다. 한 아들을 떨어트리기 위해 다른 아들을 이용하고, 그 다른 아들이 어떤 꿈도 꾸지 못하도록 또 다른 아들을 데려와 올렸다.
그것은 아이가 장난감을 이리저리 바꿔 놓는 것과 다름없었다. 루드비히의 손에서 그의 아들들은 딱 그만큼 가볍고, 그만큼 가치가 없었다.
“미하일이 죽기 전날에도…….”
“…….”
“네가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었지. 기억하느냐?”
루드비히는 아주 오래전 기억을 더듬듯 그날을 말했다. 그날도 이 방에서 한참을 엎드려 있던 빌키어스는, 울면서 네 발로 기어가 루드비히에게 빌었다.
내 어미, 내 외조부, 내 외숙부, 그 모든 사람이 미하일을 죽이려고 해도 당신께서 손짓 한 번 하시면 모두 멈출 것이라고. 그러니 제발 아들에 살릴 한마디만 해 달라고 빌키어스는 빌었다. 죽여도 차라리 제 손으로 죽일 테니, 그리 가치 없게 미하일을 죽이지만 말아 달라고 빌었다.
아비에게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미하일은 그다음 날 죽었다.
빌키어스는 천천히 입매를 달싹였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는 미하일을 살려 달라고 그리 개처럼 빌었는데, 미하일은 너 때문에 죽었지.”
“…….”
“참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게 네 태생이란 것이지.”
루드비히는 달리 비아냥거리지도 않고, 그저 평온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미하일은 결국 죽을 때까지 너를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4황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빌키어스는 어렴풋이 미하일의 얼굴을 떠올렸다.
말갛고 단정한 인상의 황태자, 제 동생.
차라리 미하일이 루드비히의 말처럼 죽을 때까지 저를 몰랐더라면, 빌키어스는 하루라도 제대로 잠에 들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빌키어스는 미하일이 죽고 단 하루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미하일은 빌키어스를 너무 잘 알았다. 빌키어스가 미하일을 잘 알고 있었듯.
“부질없는 일에 손대고 입대지 마라. 어떤 것도 네게 감사하지 않는다.”
“…….”
“너는 이래서 안 되는 것이다.”
루드비히의 고요한 시선이 빌키어스의 화려한 금발 위로 내려앉았다. 빌키어스는 그 말에도 잠자코 고개를 조아린 채 있다가 나직하게 물었다.
“미하일의 죽음은 그렇게 제 손으로 넘기셨으나, 킬리안의 죽음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빌키어스가 바닥을 노려보던 눈을 루드비히를 향해 들었다.
“이번의 죄도 제게 씌우시겠습니까.”
“그리해 줄 테냐?”
루드비히가 조금 웃음기마저 어린 목소리로 빌키어스에게 물었다. 도무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얼굴이 빌키어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빌키어스는 제가 어떤 말을 해도, 이 미쳐 가는 상황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겪어 온 그 수많은 일과 같이. 제 앞의 살인자는 킬리안을 죽일것이다.
“네게 결과적으로 도움은 되겠으나, 네 이름을 들먹일 필요는 없는 일이지.”
“돌이키실 수 없을 겁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너고, 돌이키지 않는 것이 짐이다.”
“이번에는 세상에 아들을 죽이심을 공표하시는 겁니다.”
“그럴 가치가 있다.”
“제 목은 언제 치시겠습니까.”
빌키어스의 날카로운 물음에 루드비히는 가만히 빌키어스를 내려다보았다. 빌키어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말로, 우리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하십니까.”
빌키어스의 이마 위로 목이라도 졸린 듯 핏대가 돋아났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터져 나온 말이 습했다. 그는 어릴 때도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우리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냐고.
루드비히는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사람들의 모든 예상을 뒤엎고, 4황자는 제 어미가 죽은 다음 날, 부황의 입으로부터 직접 사형을 언도받았다. 황자가 사형을 선고받고 실제로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채 사흘의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킬리안은 제 이름을 시끄럽게 떠드는 세상 속에서 조용히 스스로 독을 먹고 죽었다. 세상에 비쳐 온 그의 행적은 그리 깨끗하지만은 않아서, 그의 죽음 역시 그리 동정을 받지는 못하였다.
루드비히는 지하실에 들어서서 멍하니 중앙에 안치된 관을 바라보았다. 여름 같지 않은 한기가 손끝을 파고들었다. 이미 방부처리가 끝난 시신은 관 안에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루드비히는 가까스로 파사칼리아의 관으로 걸어갔다. 굳게 닫힌 관이 그의 손에 천천히 밀리며 열렸다. 몇 날 며칠을 관 주위만 맴돌며 살았음에도 그가 그녀의 시신을 제대로 바라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사칼리아가 생전에 즐겨 쓰던 라벤더 기름 향기가 코끝으로 훅 끼쳐 왔다. 그녀는 검붉은 벨벳 쿠션 사이로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누워 있었다. 며칠 전 피를 모두 뽑아낸 시신은 결코 살아 있을 때와 같지 않았으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루드비히는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다가, 허공에서 멈추고 이내 다시 거두었다.
‘우리는, 정말 만나서는 안 됐어요. 그 시절의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말했듯.’
루드비히는 뼈가 불거진 손으로 관의 모서리를 꽉 쥐었다.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단 하나였다.
파사칼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