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2장>
빠르게 지나쳐 가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디아나가 퀭한 얼굴로 비올레타를 돌아보았다.
“대체 우리는 언제쯤 내릴 수 있을까요.”
“밤에?”
비올레타는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로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디아나가 헛웃음을 쳤다.
“아니, 이 마차에서 영영 내리는 것 말이에요, 전하.”
비올레타가 그제야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힐끗 창밖을 쳐다보니 해는 아직도 하늘 한가운데 걸려 있었다. 이제 곧 저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조차 아직 몇 시간은 남았다. 비올레타가 피고용자의 고충을 이해하는 친절한 고용주의 자세로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일정에 관해 더 들은 바가 없잖니. 그러고 보니 넌 멀미 탓에 책도 못 보니 심심했겠다. 그럼 같이 얘기나 하자.”
그리고 마차에 침묵이 흘렀다. 비올레타와 디아나는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다 이내 똑같이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할 말이 없다. 마차를 타고 이동한 지 벌써 보름이 지난 탓이었다.
사흘까진 좋았다. 디아나는 외국에서 저명한 아카데미를 수료한 수재였고, 그만큼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상한 사람들이 존재하는지 잘 알았다. 비올레타는 사흘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디아나가 아는 수많은 이상한 남자들과, 정신이 나간 여자들과, 디아나가 한 이상한 연애들에 관하여 들었다. 비올레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디아나가 그간 미처 듣지 못했던 살롱에서 들은 가십거리를 낱낱이 읊어냈다.
그렇게 떠드느라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갔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시골 풍경은 낭만적이었으며, 때마다 행렬을 멈추고 먹는 끼니는 새로웠다. 그래, 분명 괜찮았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지고, 풍경이 지겨워지고, 지친 나머지 입맛도 모두 사라지기 전까지는.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자 힘들어진 것은 디아나였다. 그나마 가끔 책을 들여다볼 수 있는 비올레타의 처지는 나은 편이었다. 멀미를 심하게 겪은 디아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멀미로 보내거나, 혹은 멀미를 할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무료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비올레타까지 간혹 멀미를 하면 마차 안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지겨운 정적이 찾아오곤 했다.
다행인 것은 그들이 마차에서 보내는 하루는 그리 길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행인 것은 그렇게 하루가 길지 않은 만큼 베르됭으로 가는 여정이 길어졌다는 것이었다. 클레이런스 후가 이끄는 사절단은 늑장 부리는 인상이 느껴지지 않는 미묘한 한도 내에서 아주 천천히 이동했다. 후작은 해가 뜨고도 황녀의 귀한 몸을 핑계 삼아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이동을 시작했으며 끼니는 한 번도 거르는 법이 없었고, 날이 조금 어두워졌다 싶으면 곧장 행렬을 멈추었다. 겨울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해가 빨리 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른 감이 적잖아 있는 시간이었다.
그것이 의아해 비올레타가 묻는 말에 클레이런스 후는 간단히 대꾸했다. 그럼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먼저 가 앉아서 제발 여기 도장 좀 찍어 주십사 기다려야겠느냐고. 우리는 급할 거 하나 없다는 양 뻐기는 것이 유치하다 싶었지만, 비올레타는 진지하게 배움의 하나인 듯 끄덕거렸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끄덕이지나 말걸. 비올레타는 턱을 괸 채로 심드렁하게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사절단은 다음 날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덜컹대는 마차 속에서 열흘가량을 더 보내고 난 후, 그들은 밀니로를 가로질러 옛 잉거스트의 베르됭에 도착했다.
베르됭은 마치 늦은 밤처럼 조용했다. 비올레타가 묵을 곳은 베르됭 시가지 한복판에 위치한 오래된 여관이었다. 그러나 으레 사람 사는 곳이라면 벽을 타고 들릴 법한, 저녁 무렵의 소란함이 전혀 없어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곧 회담이 열릴 옛 잉거스트의 작은 도시는 아직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입을 틀어막고, 발끝으로 걸어 다니는 것만 같은 날 선 긴장감이 흘렀다.
비올레타는 멍하니 앉아 있다 문득 그 선득한 공기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조금 틀자 낡은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디아나가 보였다. 비올레타는 안쓰러운 눈으로 디아나의 부쩍 초췌한 안색을 살폈다. 이제 한 달이 지났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일은 막상 닥쳐 보니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그 일이 아직 시작조차 않은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비올레타는 신문의 작은 그림으로나 보던 펠로베르 병사들이 마차 밖으로 지나다니던 것을 떠올렸다.
“디아나.”
“……네?”
디아나가 어렴풋이 눈을 뜨며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비올레타가 픽 웃었다.
“그냥 네 방에 가서 푹 자.”
“네? 아직 식전인걸요. 조금 있으면 전하 침구도 방에 들어올 텐데, 오면 정리한 다음에 밤에 돌봐야 하고…….”
“어차피 네가 하는 것도 아니잖아. 넌 하녀 아이가 하는 거 감시하고 서 있는 게 다면서.”
“그 시간까지 제가 시녀로서 전하를 보좌하는 데 의미가 있죠!”
“너 거기 앉혀 놓는 게 더 불편해. 가서 그냥 자.”
“하지만…….”
디아나는 곤란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비올레타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네 직업적 사명감보다 내 불편함이 더 커. 이제 기껏해야 내가 필요한 거라곤 물이나 떠다 줄 허드렛일뿐이야. 하녀 아이가 문밖에 바로 서 있는데, 애초에 네가 할 일이라곤 나랑 노닥대는 거밖에 더 있어?”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죠. 전하께서 식사도 않으셨는데 어떻게 이런 시간에…….”
“바로 옆방이니, 어차피 너 필요하면 바로 깨울 거야. 알지? 그러니까 언제 호출할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서 좀 쉬어.”
비올레타가 싱긋 웃으며 문을 열고 디아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마냥 상냥하다기엔 애매모호한 내용에 디아나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방 밖으로 밀려났다. 문이 열린 채로 잠시 이어지던 실랑이는, 그들을 지나쳐 비올레타의 방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클레이런스 후를 비올레타가 인식하면서 끝이 났다. 비올레타는 디아나를 옆방에 마저 밀어 넣고는 제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베르됭에 도착한 첫날인데,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작은 방을 대충 한번 훑고 시선을 곧바로 거둔 후작이 무성의한 투로 물었다. 비올레타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마음에 들죠.”
황녀가 만족하기엔 그녀의 방은 깨끗하다는 게 유일한 장점인 초라한 방이었다. 후작이 미심쩍은 듯 바라보자 비올레타가 덧붙였다.
“어떤 방이든 어차피 제가 가장 좋은 처우를 받고 있을 텐데요. 당연히 마음에 들어야겠죠.”
“아시니 다행입니다. 부관의 말로는, 우리 측 지역이 구시가지 쪽인 탓에 이전처럼 좋은 숙소가 없다고 하더군요. 사실 대부분이 문을 닫았으니, 문을 연 여관이 몇 개 없었고요.”
“그러리라 생각했어요. 어차피 오는 도중에도 작은 숙소에서 종종 묵었잖아요. 새삼스럽게 문제될 게 없죠. 후께선 제가 방으로 투정이라도 할까 걱정이셨나 봐요?”
후작이 피식 웃었다.
“다른 때처럼 하룻밤만 묵고 떠날 방도 아니니, 지나가던 하녀도 전하의 방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더군요. 대체 어느 정돈가 했습니다.”
“착한 아이네요. 하지만 잊으신 건 아니겠죠. 제가 십삼 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
“클레이런스 후, 저는 제 발로 드나들 수 있는 방이 제게 주어진 것만으로도, 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비올레타는 후작의 묘하게 일그러진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 내며 웃었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비올레타’의 치부를 드러냈다. 그것이 마치 제 생에도 길게 남겨진 비참한 흉터처럼.
‘내가 당신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에 화려한 수사나 어떤 특별한 순간 같은건 필요 없다. 말하기 껄끄러운 것을 전혀 껄끄럽지 않게 말하고, 보기 흉한 흉터를 대수롭지 않게 내보일 때가 가끔 필요할 뿐이다. 그것은 그녀가 사람을 하나둘 제 곁에 두면서 자연스레 깨달은 것이었다. 목구멍으로 까끌까끌한 숨이 넘어갔다. 때때로 이렇게 으레, 대단치도 않게 계산된 말 한마디를 아무렇지 않게 말할 때면 말끝이 씁쓸했다.
그것이 제게, 단 한 번도 있어 본 적 없는 과거를 팔아먹는 것일수록 더더욱.
비올레타를 응시하는 후작의 눈에 안타까움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 시선이 닿은 것은 아마도 그녀가 아닌, 그의 허상 속에 존재하는 불쌍한 소녀일 것이다. 비올레타는 빙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회담의 정확한 시일은 정해졌나요?”
“이틀 후에 열리게 될 겁니다.”
“그렇게나 빨리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 측에서 시간을 끌어 놓았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이틀 후도 ‘그렇게나 빨리’가 아닙니다. 밀니로 측에서도 하루빨리 협상을 시작하길 원하고요.”
“밀니로가 말인가요? 그들은 애초에 협상 자체를 그리 긍정적으로 검토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마지못해 응한 것 아니었나요?”
“정확히 말하면, 사절단 대표의 의사입니다.”
비올레타가 순간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클레이런스 후가 입을 열었다.
“황제께서 유능한 외교관들을 두고 제게 이 회담을 맡기신 건, 대외적으로 펠로베르와 협상할 의지가 확고하신 것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폐하께서 밀니로 측에 반발할 여지를 주지 않으시려고 그러신 건 알고 있어요. 후께서 워낙 유명하시니까요.”
클레이런스 후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고개를 점잖게 끄덕였다. 비올레타가 눈가를 찡그렸다.
“그런데 그게, 밀니로 측 대표 의사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도 앞서 나가고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이죠?”
“폐하의 의지에 따라, 밀니로에서는 회담에 관해 우리에게 모두 일임하겠다는 표시로 형식적인 사절단을 꾸려 보냈습니다. 밀니로 국왕이 아끼는 셋째 아들을 필두로 해서.”
“…….”
“그리고 그가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비올레타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비올레타의 어이없는 표정에도 후작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는 이제 갓 열여섯이 됐고요.”
“그들에게 최악의 결론이라면 펠로베르 측의 제안이 현실이 되는 건데, 어차피 펠로베르 측에서 제안해 온 것이 그들에게 그리 손해 보는 결말은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자존심에 그 제안대로 끝낼 리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죠. 그들은 이미 협상이 어떤 형태로든 체결된다는 것에 우리에게 미리 동의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죠, 그럼?”
“그렇겠군요.”
“그러니 어차피 결론은 이미 난 것, 아직 어려서 가진 것 없는 셋째 아들에게 종전 회담 공적이나 몰아주고 인지도 높여 볼 요량인 거네요?”
“밀니로의 왕족은 이름값이 방패나 다름없으니까요. 일정한 인기가 평생을 보장하죠.”
“둘째 왕자가 잉거스트를 멸망시킨 전공으로 태자위에 오른 걸 보면 무기이기도 하던데.”
“뭐, 그런 셈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싸우죠.”
어차피 공적을 거저먹는 건 비슷한 상황이라, 딱히 밀니로의 사절단이 부실하다 욕할 처지가 못 되는 비올레타는 입을 그만 다물었다. 가만히 비올레타의 얼굴을 바라보던 후작이 몸을 일으키려는 듯 조금 움직이다 문득 멈추며 물었다.
“아마 당일 전에는 뵐 겨를이 없을 겁니다. 그 전에 제게 말씀하실 것이 있습니까?”
“후와 좀 더 이야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렇겠네요.”
“회담 직전이라 전하를 수행하는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전하의 어떤 필요에도 그들 차원에서는 즉각적인 조치가 불가능하니, 지금 제게 말씀해 두시면 그나마 빠를 겁니다.”
“어차피 저는 후를 수행하는 입장이에요. 편의상 더 바랄 건 없어요. 다만 궁금한 게 있어요.”
“무얼 말씀하십니까?”
“회담에 관해, 제가 알아 두어야 하는 거요.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들어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전하께서는 이미 상식선에서, 전황에 관해 잘 알고 계십니다.”
“물론 제가 신문이나 보려면 그것으로 충분하겠죠.”
“그 대단한 자리에서 제 옆에 예쁘게 차려입고 앉아 계시는 것에도,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비올레타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후작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자존심 상하십니까?”
“후께서 그러길 바라고 말씀하신 건 알겠어요.”
“구질구질한 대답은 잘 피해 가시는군요.”
“제자가 자존심 헐값에 팔면 스승님께서 슬퍼하실까 봐요.”
후작이 짧게 소리 내 웃었다. 흔치 않은 웃음소리에 비올레타는 일단 화를 누그러트리며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여전히 입가에 웃음기를 띤 채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스스로 바라시는 것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전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한 무시라고 느꼈는데, 제가 과민했나요?”
“과민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지금의 전하를 무시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도에서 쌓아올리신 그 입지조차 없는, 이곳에서의 전하를요. 수도에서의 그 화려한 황녀 전하를 데려와도 별로 달라질 건 없습니다. 전하는 이제 갓 스무 살을 넘은, 대외적으로 이력 하나 없이 혈통만 귀한 계집에 불과합니다. 사내가 아니죠.”
“…….”
“기실 저들의 눈엔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전하께서 사내가 아니란 것. 때문에 전하께서 바라는 것과는 별개로, 전하의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게 테이블 위의 꽃이고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전하가 깨달으셔야 할 본인의 주제고요.”
어느덧 웃음기 한 점 없이 서늘해진 후작의 얼굴은 바깥과 다를 바 없이 삭막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비올레타의 눈을 찌르듯 응시했다. 마치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종용하는 듯한 그 시선에 비올레타가 눈을 다시 떴다. 멍하니 서 있다 갑자기 한 대 맞은 것처럼 굳어 있던 머리가 비로소 냉정을 찾았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웃었다.
“후께선 역시 친절하시네요.”
뜬금없이 활짝 웃으며 던지는 말에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결국 대답해 주신 거잖아요. 회담에 관해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거기서의 제 위치뿐이라고.”
“……제 의도보다 몇 배는 선량한 해석이군요. 지금 전하께서 하실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부끄러워하시긴. 늘 명심할게요.”
“늘 명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회담이 끝나면 바로 갖다 버리세요.”
“네?”
“회담이 끝나면, 어차피 달라질 위치니까.”
클레이런스 후는 몸을 느긋하게 일으켰다.
“사람이 주제 파악을 왜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지 않기 위해서요?”
“타고난 주제와 욕심이 멀면 멀수록 사람은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하 같은 사람들은, 때때로 다른 필요에 의해 주제 파악을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
“앞으로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할지, 정확히 재어 보기 위해서요.”
비올레타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후작이 비식 웃었다.
“이번 회담에서 전하가 고작 다섯 마디 말씀하신다면, 다음에는 백 마디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베르됭 시의 회관은 100년 전 베르됭이 본디 밀니로의 영토였을 시절, 당시 베르됭을 지배하던 포르트레 가의 고성 속 건물 중 하나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시가지와는 꽤 거리가 멀었다. 마차는 나지막한 비탈길을 한참이나 달리다, 이윽고 평탄한 길에 들어서자 얼마 더 달리지 않고 멈추었다.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밖에서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곧바로 열렸다. 비올레타는 별생각 없이 문밖으로 손을 내밀었다가, 제 손을 잡아온 손이 마치 여자 손 같아 눈을 조금 들었다.
“황녀 전하.”
앳된 목소리가 유려한 공용어로 비올레타를 불렀다. 자질구레한 에스코트를 떠맡던 라키엘 휘하의 기사 대신, 화사하게 웃는 소년의 얼굴이 시야를 채웠다. 비올레타가 조금 당황해 굳었다가 습관적으로 마주 웃었다.
“밀니로의 세 번째 왕자, 클로디어스 님이십니다.”
소년의 곁에 서 있던 시종이 허공을 바라본 채로 기계처럼 말했다. 그 뻣뻣한 흐름에 비올레타가 아, 하고 흐린 감탄사를 내뱉었다. 클로디어스가 해맑게 말을 이었다.
“왠지 내가 이런 사람이다, 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게 더 멋있더라고요.”
“…….”
“제가 바로 밀니로의 왕자, 클로디어스입니다. 아,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아. 역시 전하께서도 전자가 낫죠? 아무래도 말할 때마다 좀 부끄러운 기분도 들고……. 사실 요즘 제가 좀 고민이어서요. 여성들 앞에서 좀 더 근사해 보이고 싶은데, 여성분이신 황녀 전하가 보시기엔 어떤가요? 둘 중 어느 쪽이 모양새가 좋을까요? 아무래도 역시 전자가 멋있겠죠?”
“이미 답은 왕자께서 정해 놓으셨네요. 전자가 낫다고.”
역시 전자가 더 낫지 않느냐고 두 번이나 덧붙이는 것이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는 듯했다. 처음 얼굴을 맞대자마자 뜬금없이 쏟아지는 말에 비올레타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하고는 앞으로 걸었다.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잰걸음으로 몇 걸음 앞서 나간 클로디어스가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탄성을 내뱉었다. 무엇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는지는 몰라도, 비올레타는 제 키보다 조금 작을―그는 자신의 키를 보완하려는 듯 조금 높은 구두를 신었다.― 남자아이가 조금 귀여웠다.
“어차피 왕자가 왕자를 소개할 일은 별로 없잖아요. 밀니로의 여성들이 왕자를 모를 리 없는데요.”
“사실 부왕께서 엄하신지라, 사교계에 데뷔한 지 아직 얼마 안 되어서……. 처음 보는 사람이 많으니 제 소개를 할 일도 많아요.”
“그들은 왕자를 당연히 알아야 해요. 또 알고 있을 거고요. 일일이 왕자께서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다만 가끔 저 같은 외국인을 대하실 땐, 왕자를 모르니 지금처럼 그렇게 하세요.”
“괜찮았나요?”
“멋있었어요. 단 그 시종은 좀 더 자연스럽게 외치도록 훈련시키시고요.”
클로디어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문이 가까워지자, 문 옆에 시립해 있는 기사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비올레타를 안으로 안내했다. 소년 특유의 아주 부자연스러운 호의였으나 비올레타는 모른 척 미소 지으며 들어섰다. 8명 남짓 마주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 주위로 서 있는 눈에 익은 사람들이 비올레타를 맞이했다. 그레빌 남작을 비롯해 수도에서부터 함께 온 사절단 일행이었다. 이미 테이블 한쪽에 앉아 있던 두 명의 남자가 일어나 인사하는 것을 우아하게 받은 비올레타는 제게로 다가오는 그레빌 남작을 바라보았다.
“그레빌 경.”
“전하, 앞에 보이는 연단을 기준으로 좌측이 저희 쪽입니다. 중앙 두 자리는 양국의 대표이신 클레이런스 후와 밀니로의 왕자께서 앉으실 것이고, 전하께선 클레이런스 후의 좌측에 자리하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클로디어스가 밀니로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비올레타와 조금 멀어지자 그레빌 남작이 그녀를 자리로 천천히 이끌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들 중 우리 기준으로 우측에 앉은 자가 세비네 자작, 좌측에 앉은 자가 펠로베르 측 대표인 랑부이에 백작입니다. 본디 대표로 우리 측에 알려 온 것이 조프랭 백작이라, 전하께서도 그리 알고 계셨겠지만 갑자기 바뀌었죠. 그자는 군인이었는데, 저자는 외무대신 휘하의 서기관 출신으로…….”
문가에서 테이블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 때문에 비올레타는 그레빌 남작의 말을 그리 오래 듣지 못했다. 그녀가 테이블에 가까워지자 그레빌 남작이 말을 흐리며 그녀를 조용히 자리까지 인도했다. 비올레타는 대수롭지 않은 대화가 끝난 듯 자연스럽게 웃으며 제게 지정된 끝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주위로 숨죽인 목소리들이 가늘게 뒤엉켰다. 그란토니아어와 제네트어, 펠로베르어가 작은 소리로 동시에 들리니 제대로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비올레타는 이내 자그마한 소음에 집중하는 것을 포기하고 시선을 들었다.
테이블은 한쪽에 네 명씩, 각각 거리를 조금 띄운 채 앉을 수 있을 만큼 길쭉했다. 펠로베르 측 대표라는 랑부이에는 비올레타와 정확히 대각선 위치에 앉아 있었는데, 테이블의 폭이 넓어 고개를 티 나게 돌리지 않아도 그를 볼 수 있었다. 펠로베르인의 흔한 갈색 머리가 아닌, 아주 연한 금갈색 머리를 짧게 뒤로 묶은 남자는 이제 겨우 마흔을 넘긴 것 같았다. 비올레타는 그레빌 남작이 미처 다 하지 못했던 말을 떠올렸다. 서기관 출신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그에게선 관료적인 인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깃펜을 쥔 것보다는 비밀 살롱에 나태하게 누워서 브랜디나 홀짝거리는 것이 더 어울릴 만한 얼굴이었다. 비올레타는 얼마간 그의 얼굴을 뜯으며 이런저런 감상을 속으로 내뱉다가 클레이런스 후가 여유롭게 방으로 들어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누가 성패 여부를 쥐었는지 과시라도 하는 양, 그는 회담장에 가장 늦게 느긋한 태도로 들어왔다. 이윽고 클레이런스 후가 비올레타 옆 자신의 자리에 서자, 맞은편의 랑부이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악수를 가볍게 하는 것으로 회담은 시작되었다.
“늙으니 시간관념이 예전 같지가 않아……. 부디 무례해 보이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저희 마음이 급했을 뿐입니다. 보아하니 후께서 신경 쓸 일이 비단 이 협상뿐만은 아닌 것 같아, 이해도 되고요.”
랑부이에의 시선이 느릿하게 클레이런스 후의 왼편에서 오른편을 가로질렀다. 비올레타에게서 클로디어스로 향하는 눈이 반짝 빛이 났다가 이내 흥미를 곧장 잃고 사라졌다.
“이제 전장에서 제 한 몸 건사하시기도 벅차실 텐데요. 게다가 군식구까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어린 계집 매달고 보모 노릇에 공적까지 갖다 바치는 불쌍한 신세, 라고 비꼬는 말은 기실 누군가 하기도 전에 후작 스스로 대놓고 중얼거리던 것이었다. 랑부이에의 말은 그녀가 들어 온 말에 비하면 한없이 고상하게 빈정대는 것이었으므로 비올레타는 언짢은 기색 없이 후작을 힐끗 보며 픽 웃었다. 그리고 군식구로 지칭된 클로디어스는 제가 군식구로 지칭된 줄도 모르고 해맑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주제넘은 배려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랑부이에 백. 이제 각설하고, 본문으로 넘어가죠.”
후작의 무성의한 말에 랑부이에가 입매의 끝만 살짝 끌어 올려 웃었다.
“후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곧장 넘어가 보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국 내부가, 바깥의 성가 신 분쟁을 더 이끌어 나갈 상황이 되지 않습니다.”
랑부이에가 마치 엄살 부리듯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그란토니아의 황제께서, 그리고 밀니로의 국왕께서 종전을 원하시듯…….”
“저희 폐하께선 펠로베르의 제안을 고려하신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종전을 절실히 원하기라도 한 양 말씀하시는군요. 명확히 밝혀 두십시오. 우리는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부디 끝나게 해 달라 요구하신 건 당신들의 황제십니다.”
“결과적으로 명백히 같은 의지를 표명하시지 않았습니까?”
“말장난이 과하군요.”
“후작, 어차피 우리의 목표는 같습니다. 달리 두지 말고, 서로를 한 번 배려해 보죠.”
랑부이에가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에 말려져 있던 지도를 쫙 펼쳐놓았다. 옛 잉거스트 공국의 영토와, 그 주위를 둘러싼 밀니로와 펠로베르의 영토가 보였다.
“우리의 조건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 부르농빌.”
랑부이에의 손가락 끝이 밀니로 영토 위의 부르농빌을 가리켰다.
“옛 잉거스트 땅을 통하지 않아도, 부르농빌은 제국의 국경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본디 기반이 탄탄하고 군사적 요충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지역이니, 좀 공을 들여 밀니로 영토 속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주변의자질구레한 땅은 모두 청소하고요. 부르농빌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밀니로의 남쪽 국경을 통과하면, 그란토니아에 진입할 수 있게 되겠죠. 길을 닦아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꽤 성급한 판단이시군요. 밀니로의 국경을 통과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란토니아의 국경 방어를 뚫어 버릴 수 있다고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협상에 임하면서, 협박은 접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심지어 그 협박이, 아무것도 협박할 수 없을 때는 더더욱요.”
클레이런스 후가 싸늘하게 경고하자 랑부이에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저러나 상관없다는 듯이 말씀하셔도 곤란하신 것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국 내부 상황까지 전해 드렸는데, 후께서도 진솔하게 대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내부 상황? 펠로베르 국경 밖에 사는 개도 알 그 뻔한 사정 말입니까? 펠로베르 황제께선 오늘내일하시고, 황태자께선 불안한 계승 절차에 여기저기 눈치 보시며 잉거스트의 막을 내리지 못해 몸이 달아 계시노라고요?”
“후께서 그리 제국의 사정을 잘 아시니 더 토로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러나 아무리 급해도 거저 갖다 바칠 수는 없는 일이고, 합당한 교환을 원합니다. 사실 합당한 교환도 아닌, 저희 측의 손해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부르농빌을 밀니로의 국왕께 돌려 드림으로써 밀니로에는 본토 속 위험을, 그란토니아에는 위협을 제거해 드리죠. 그 대가로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곤, 고작 드네프르고요. 지금의 잉거스트 지역 내 경계선에, 드네프르를 덧붙여 국경을 확정하는 것으로…….”
“고작 그 드네프르도 아예 펠로베르에 내어 드리지 않고 전쟁을 이어 가는 것도 저희에겐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합당한 거래라고 생각할 수 없군요.”
비올레타는 그 이후로도 랑부이에가 말하는 족족 부정과 불필요로 일관하는 제 스승을 존경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대화가 점점 가열되자 언제 모조리 파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가 흘렀다. 어차피 협상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으리라고 후작이 미리 언질을 줬던 만큼, 명쾌하게 흘러가진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실제는 상상보다 더 거셌다. 얼마지나지 않아 후작이 서늘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주위로 조금씩 웅성대는 소리를 들으며 비올레타는 서기들의 빨라진 펜대 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뒤에 서 있던 그레빌 남작이 비올레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다가왔다. 비올레타가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의자가 부드럽게 뒤로 밀렸다. 그리고 비올레타가 남작을 따라 발걸음을 막 내디뎠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인사 한마디 건네 드리지 못했군요. 제 무례를 부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황녀 전하.”
비올레타는 반쯤 돌렸던 몸을 도로 돌리며 랑부이에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협상에 실패한 협상가로는 보이지 않을 멀쩡한 얼굴이었다.
“참 아름다우십니다. 이 말을 꼭 해 드리고 싶었고요.”
부끄러울 정도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랑부이에가 직설적으로 칭찬해 왔다. 펠로베르인 특유의 깊은 눈매가 천천히 휘어졌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정성스러운 인사치레에 부끄러워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웃었다. 회담 내내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았는데도, 한창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입매가 조금 어색하게 올라갔다.
“고마워요.”
“전하께서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펠로베르인은 꽃이 없는 집을 견디지 못하기로 유명하죠.”
“그 얘기라면 몇 번 들어 본 적 있어요. 펠로베르인들이 꽃을 아주 좋아한다고요.”
“처음 이 방에 들어서며 화병 하나 없는 것을 보니, 방이 참 삭막했습니다. 전하께서 계시니 다행이었죠. 다음 협상이 정확히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때도 이렇게 아름답게 계셔 주시면 좋을 겁니다.”
비올레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몸을 돌려 문가를 향해 걸어갔다. 곧 방을 나선 그녀의 뒤로 문이 닫혔다. 그 소리와 함께 비올레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때문에 전하께서 바라는 것과는 별개로, 전하의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게 테이블 위의 꽃이고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전하가 깨달으셔야 할 본인의 주제고요.’
본국에서 어떤 대단한 말로 포장하든, 결국 그녀가 지금 들을 수 있는 말은 ‘화병 대신 네가 있어 다행이다’ 수준의 말이었다. 비올레타는 문득 제가 그 테이블에서 다섯 마디는커녕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장식품과 다를 바 없었다. 처음이었고, 너무 모든 것이 빨리 흘러갔다는 핑계를 덧붙여도 사실 제가 장식품이라는 것을 부정해 주진 못했다. 말을 하고, 하지 않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조용히 입 다물고 앉아 있던 밀니로의 왕자를, 그 누가 장식품 따위로 생각할까.
비올레타는 차분하게 그것을 인정했다. 지금 진짜로 깨달아야 할 제 주제는 그것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기어 올라가야 할지 알기 위해서.
비올레타는 손 안에서 커프스 버튼cuffs button, 셔츠 소매를 여미는 장식용 단추를 굴리다 엄지손가락으로 단추 표면의 문양을 쓸었다. 에델가르드의 문장인 독수리가 세밀하게 조각된 순금 커프스 버튼은, 비올레타가 성년이 되는 날 라키엘의 소매에서 빼낸 것이었다. ‘여자가 성년이 되는 날 가장 가까운 남자의 커프스 버튼을 갖고 있으면, 앞으로 닥칠지 모를 나쁜 일을 막아준다’는, 여자들만 믿는 퍽 시시한 풍습이 생각났었다.
결국 제가 달고 있던 단추 같은 건 아무 도움도 안 됐던 거라고, 자존심 상한 얼굴로 커프스 버튼을 들여 보던 라키엘이 떠올라 비올레타는 조금 웃었다. 어차피 미신이라고 말했던 주제에…….
하긴 라키엘이 보기에 썩 마음 편안한 물건은 아니었으리라. 가장 값싼 동전 한 닢보다도 작은 이 커프스 버튼은 그녀에게도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나쁜 일은 결국 생겨났고, 네 미신 속 내 커프스 버튼이 막지 못한 것처럼, 나도 막지 못했고.
라키엘이 이것에 관해 내뱉은 감상은 이 한마디가 유일했다. 한마디 짧게 더 덧붙이긴 했다. 그러니 녹여 버리라고. 그러나 라키엘의 부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비올레타는 그날 이걸 갖고 있었던 것이 자신이 살아남는 데 어떤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살아났고, 제가 먹은 것이 칼랑코에일 수도 있었지만 결국 피나투라였다. 그날의 일은 그리 최악의 일이 아니었다. 비올레타는 커프스 버튼을 꽉 쥐었다가, 소매 속에 넣어두고 시선을 들었다. 마음이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벌써 세 번이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오늘로 꼬박 베르됭에 들어선 지 열흘을 넘어섰다. 협상은 이전의 사례와 비슷한 행태로 흘러갔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펠로베르 측에서 꽤 직접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고, 더불어 아직도 변함없는 것이 있다면 후작은 여전히 그 핵심을 일부러 비켜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달라진 점이 있을지언정 협상은 진척이 없었다. 이번으로 비올레타가 네 번째 지켜보게 된 협상 테이블은 그렇게 진척이 없는 만큼 이전과는 달리 살벌한 기운이 돌았다. 회담의 윤곽은 그녀가 지켜볼수록 그녀의 머릿속에서 세밀해져 갔지만, 그녀가 의미를 좀 더 넓게 깨달아 갈수록 불편해졌다. 그리고 이제, 한계가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비올레타는 랑부이에 백작의 번지르르한 목소리 위로 떠오른 희미한 절박감을 어렴풋이 느꼈다. 반대쪽은 여유를 잃어 가고 있다. 실상 전황은 이렇게 어느 한쪽에 결정권이 쏠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의 종전은 양 진영 모두에게 좋은 것이었다. 그의 태도는 클레이런스 후작과 같아야 했으나 달랐다. 비올레타는 그가 마치 이 협상으로 제가 따로 얻어 낼 수 있는 수많은 것이 있거나, 혹은 잃어버릴 것이 많은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려 제 곁의 스승을 힐끗 보았다.
“……랑부이에 백의 지겨운 주장대로 드네프르를 지금의 경계선에 덧붙여 국경을 다시 그려 보죠.”
깃펜을 잉크에 대강 적시고 든 클레이런스 후가 지도 위로 가상의 경계선을 그렸다. 성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이었으나 선은 꽤 정확했다.
“펠로베르에 돌아갈 잉거스트의 땅은 고작 잉거스트의 사분의 일이군요. 애초에 잉거스트의 땅을 모두 수복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고작 사분의 일로 만족하겠다?”
“혹시 저희가 회담의 신성한 결의를 깨고, 그대들의 뒤를 치기라도 하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터무니없이 불만족스럽고 아주 보잘것없는 수확이라, 저라면 가는 돌아가는 길목도 막아설 것 같아 말입니다. 경들과 같은 상황에, 그깟 종이 몇 장으로 적들이 총 내려놓고 등 보이며 걸어가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죠.”
경들과 같은, 에 힘을 줘 조롱한 후작이 피식 웃었다. 시종일관 웃고 있던 랑부이에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그러다 웃음이 사라지고 서늘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도, 아무것도 꾸며 내지 않은 본래대로의 그 얼굴. 그는 조금 지쳐 보였고, 잔뜩 날이 서 있었으며, 모든 것이 성가셔 보이기도 했다.
“사분의 일. 아주 터무니없이 불만족스럽고, 보잘것없는 수확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후의 은사께서도 한 번쯤은 이런 말을 해 주셨겠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믿게 합니다. 그란토니아인들이 모신 에누마 엘라시를 위해 축제를 열듯.”
“…….”
“그러나, 한계를 인정하고 사는 인간으로서는 움켜쥘 것은 최대한으로, 잃을 것을 최소한으로, 그 둘 사이의 접점을 찾을 필요가 있죠. 다만 손안에 움켜쥔 것이 불만족스러울 때는, 대신 가능성을 틀어쥐면 됩니다. 사분의 일을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절반이 되고, 절반을 들고 있으면 언젠가 하나는 가질 수 있게 되겠죠.”
“마치 투기꾼 같군요. 드네프르가 그 가능성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십니까? 그 가능성을 가장 틀어막고 싶은 게 저희라는 걸 아시면서도?”
“어차피 왕자께서 계시지 않으니 하는 이야깁니다.”
랑부이에는 심각한 몸살에 걸렸으니 올 수 없노라 통보한 왕자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견 똑같이 진행된 회담을 세 번이나 참아 낸 것만으로도 그 순진한 소년에겐 벅찬 일이었으리라. 그는 이 자리에서 제 필요성이 얼마나 낮게 부여되어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 안에서 어린아이답게 자유를 찾았다.
“그 가능성은 귀하의 제국과는 상관없습니다.
저 빈 의자와는 관련이 있을지 모르나.”
“지금 랑부이에 백께서는 밀니로를 지원한 우리에게, 밀니로를 위협할 가능성이 상관없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저희가 협상 결과를 신실하게 이행하지 않으리라는 후작의 불신에 관해, 정직히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그 사소한 가능성은 결코 우리의 협상을 배반하지 않을 겁니다. 후, 어차피 먼 훗날의 일입니다. 굳이 복잡하게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골치 아픈 건 우리의 먼 후손들이 할 일이지, 우리가 알 바는 아니죠.”
“우리의 목표는 당장 보기 좋은 평화이고?”
“그렇습니다.”
“랑부이에 백.”
“말씀 하십시오.”
“국가의 인장을 어떤 종이에 찍을 땐 말입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이 약속이 영원하리라 믿어야 합니다. 물론, 상호 긍정적인 방향으로요.”
담담한 어조로 말을 끝낸 후작이 몸을 일으켰다. 랑부이에가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후작, 더 이상의 지연은 불가합니다.”
“떠밀리듯 합의하는 것 역시 불가합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오래 억눌러 온 것을 터트리듯 랑부이에가 물었다. 클레이런스 후의 입매가 묘하게 휘었다.
“양방 모두에게 합당한 협상입니다.”
“후작께 합당한 그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겁니다.”
후작은 입안으로 고상한 비웃음을 굴렸다.
“그대들이 드네프르를 갖고, 밀니로가 부르농빌을 되찾고, 더불어 우리가 누벨 지역을 관리한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욕심이 과하시군요.”
하나를 줄 테니, 하나에 절반을 더 얹어 달라는 뻔뻔한 요구였다. 후작의 말에 랑부이에가 코웃음을 쳤다.
“누벨은 어차피 별 볼 일 없는 소도시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부르농빌로 드네프르를 얻어 내려 하신 것부터가 욕심이지 않겠습니까?”
“별 볼 일 없는 그 골짜기에, 잉거스트에 단 두개 있는 광산이 있어도 욕심이 아니겠습니까?”
“랑부이에 백께서 저희의 요구가 합당하지 않다 생각하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이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랑부이에는 말이 없었다. 설득할 생각도 없었다는 듯 후작은 미련 없이 몸을 돌리며 비올레타에게 눈짓했다. 비올레타가 그를 따르며 랑부이에를 흘끗 바라보았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싸늘하게 굳은 얼굴이 있었다. 묘한 기운이 속을 선득하게 스쳤다. 비올레타는 애써 그것을 떨쳐냈다.
“영원을 말하는 로맨티스트이실 줄은 몰랐어요.”
“누가 그딴 종이쪼가리에 영원을 걸겠습니까?”
“후께서요.”
“저기서 제가 한 말장난은 진지하게 새겨들으실필요가 없습니다.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말이 됐고, 새겨들을 만하다고 생각됐는데요.”
“아직 판단할 주제는 아니십니다.”
후작이 핀잔하는 소리에 비올레타가 입을 삐죽댔다.
“그나저나 이렇게 계속 튕겨 내셔도 되나요?”
“더 이상은 안 될 겁니다. 사실 진작 성사시켰어야 했고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계속 결렬시키신 거죠?”
“그야 그쪽에서 처음 볼 때부터 몸이 달은 티가 너무 났으니까.”
“……랑부이에가요?”
비올레타는 처음 봤을 때 그 느긋한 얼굴을 떠올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
“팔자 좋은 한량같이 보였는데.”
후작이 낮게 웃었다.
“어쨌든 악취미를 가지셨네요.”
“같잖게 여유 있는 척하고 내미는 걸 굳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으니까. 숨통을 쥐고 듣는 대답처럼 만족스러운 건 없죠.”
“에델가르드 공이 누구에게 배워서 그 꼴이 됐는지 이제 좀 명확해지네요.”
“내 장담하는데, 그 자식 뱃속이 열 배는 시꺼먼 진창일 겁니다.”
“……갑자기 랑부이에 그 사람이 불쌍해져요.”
“걸려 있는 것이 많았을 겁니다. 주군이 절박하면, 아래 기어 다니는 개미는 배로 절박해지는 법이라.”
베르됭 회관을 나서자, 멀리서 익숙한 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하얗게 칠한 사륜 쌍두마차는 그 화사함이 고성 속 메마른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아 금방 눈에 띄었다. 회담장을 지키는 각국의 병사들은 여전히 오래된 길 좌우로 석상처럼 기다랗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비올레타는 주위를 둘러보다 이미 앞에 서 있는 후작의 마차를 보고 눈짓했지만, 그는 그녀를 기다리겠다는 듯 가만히 섰다. 비올레타가 픽 웃으며 다시 제 마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득 위화감이 든 것은 그때였다. 비올레타가 다시 고개를 반쯤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비올레타는 본능적으로 제 위화감에 관해 말하기 위해 클레이런스 후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그가 제 앞을 막아섰다.
그가 느리게 움직였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비올레타는 곧바로 이어진 커다란 총성에 눈을 크게 떴다. 제 앞을 비스듬히 막아선 너른 등이 앞으로 고꾸라지듯 무너졌다. 후작이 총격을 당했고, 그것이 제 대신 맞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비올레타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겨우 들었다. 비올레타의 시선이 제 앞에 쓰러진 남자에게서 천천히 위로 움직였다.
그녀는 포위되어 있었다.
“황녀 전하.”
비올레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회담장에서 몇 번이나 마주했던 낯익은 얼굴이었다. 펠로베르의 세비니 자작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간신히 그녀의 곁을 지킨 호위기사 둘이 그녀를 막아섰다.
“……세비니 경.”
“사실 두 번은 각오했는데, 한 번에 되어 다행입니다. 불경하게도, 처음엔 전하의 드레스 자락이나 스치게 할 작정이었는데. 물론 두 번째 진짜 목표는, 전하 발치의 그분이셨고요.”
“…….”
“전하께서 소란 속에 무사하시니 기쁩니다.”
발포한 측에서 말하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진심 어린 염려였다. 비올레타는 혼란 속에서 불안하게 내리깐 눈으로 후작을 내려 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비니가 비올레타를 포위한 원 가운데로 느리게 걸어 들어왔다.
“후작께서는 무사하실 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협상을 전면백지화 하길 원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그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눈길이 당혹감에 물든 황녀의 얼굴을 만족스러운 듯 훑었다.
“전하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다시 발걸음을 돌리시는 겁니다. 우리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그 회담장으로.”
“…….”
“그리고 협상을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겁니다. 그란토니아의 대표께서 불행한 오발 사고로 회담에 임하실 수 없는 상태가 되셨으니, 마땅히 자격 있는 자가 협상을 이어 갈 수 있겠지요.”
사고라는 말에 비올레타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마치 클레이런스 후가 저 혼자 어디서 구르기라도 한 양 전혀 상관없다는 듯 평온한 말투였다.
“마땅히 자격 있는 자?”
“국가의 인장을 다룰 자격이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밀니로의 왕자께서도 오실 겁니다.”
“…….”
“두 분께서는 좀 더 좋은 생각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비올레타는 세비니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우실 터,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세비니는 그녀가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너그러운 얼굴로 기다렸다. 마치 그녀의 혼란스러움이나 당혹, 공포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는 아직 어렸고, 여자였다. 그 점을 충분히 주지한 듯 그의 태도는 나무랄 데 없이 신사적이었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만 없었다면 비올레타가 그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할 만큼 말이다.
비올레타는 세비니의 뒤쪽 원 밖으로, 여차하면 이쪽으로 달려들 태세인 그란토니아의 병사들과, 그들과 대치 중인 펠로베르 군을 바라보았다. 전에 겪은 적 없는 공포가 목 뒤를 싸하게 타고 올랐다. 발포 후에도 그란토니아 군이 적극적인 대처를 할 수 없는 것은 원 안에 갇힌 자신이 바로 그들의 발목을 잡는 인질이기 때문이었다. 온몸의 맥박이 제각기 불쾌하게 뛰었다. 비올레타는 입안을 초조하게 짓씹었다.
일단 그녀가 인질인 이상 그녀에게 올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란 없다. 펠로베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수는 이것이 마지막이리라. 목격자들의 진술이 어떻든 간에 오발 사고로 무마할 수 있을 만한, 큰 피해가 없는 사고. 어차피 지금의 행태도 저를 위해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정신적으로 압박감에 짓눌리게 만드는 것이다.
비올레타는 애써 끓어오르는 속을 억누르며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후작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가 총격을 당한 것은 다리였고, 세비니가 무사하리라 장담하는 것을 보아 치명상을 입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가 정말로 위험해지면 펠로베르도 곤란했다. 그러니까 제발 비껴 갔기를. 제발 그가 무사하기를. 믿지도 않는 신에게 절실하게 기도한 비올레타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그란토니아의 대표가 회담에 임할 수 없는 이상, 협상 테이블에는 어차피 밀니로 측 대표인 왕자가 반드시 앉아야 했다.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비니는 제게 여유를 주는 것이다. 비올레타는 초조하게 생각을 이어 갔다. 이대로 들어가서자신과 클로디어스가 앉으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 순진한 왕자는 랑부이에의 말에 말려 들어갈 것이 뻔했고, 그녀는 그 상황을 저지할 수 있을 만큼 사안을 잘 알지 못했다. 혹은 그녀도 랑부이에에게 함께 말려들거나. 비올레타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랑부이에는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능숙한 사람이었다.
회담을 지켜보며 대강의 윤곽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게 됐다고는 해도, 이제 말을 좀 알아듣기 시작한 것과 제가 어떤 말을 내뱉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제야 회담에서 그란토니아가 바라는 본안本案을 내민 터다. 그녀는 그 사항에 관해 전혀 몰랐다. 알지도 못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생각이 막다른 길에 몰릴수록 숨이 막혔다. 비올레타가 지금으로서 확신할 수 있는 건, 이대로 제가 그 방에 다시 앉아선 안 된다는 것뿐이다. 더불어 무도회에 막 드나들기 시작한 어린 클로디어스와는 더더욱.
순간 클로디어스가 오늘 참석하지 않은 것이 떠올라 밀니로에 대한 의심이 들었으나 그녀는 곧 접었다. 밀니로가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내통할 이유가 없고, 내통함으로써 얻을 이득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그란토니아에 대한 입장상으로도, 이해관계상으로도 그러했다. 다만 밀니로의 입장과는 별개로 개인은 알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클로디어스의 측근 중 하나가 매수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측근을 통해 예쁘장한 계집 하나 붙여 주고 왕자의 혼을 빼놓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난 적 없다고 하더라도 클로디어스가 어떤 강제적 설득에 넘어갔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비올레타는 저를 둘러싼 병사들을 바라보며 확신했다. 클로디어스에게 닥친 일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별다를 바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전쟁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던 겁 많은 소년이었다. 그에게 겁을 주고 압박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그 소년이 시키는 대로 내뱉는 것 또한, 역시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든 이 일이 벌어진 후의 그를 믿을 수 없었다. 불행하게도 자신 역시도 믿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남은 것은 장식품이나 다름없는 계집과, 이제갓 열여섯 된 순진해 빠진 사내아이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라도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협상까지 이대로 가선 안 되었다. 어떻게든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무엇이든 더 알아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비올레타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겁에 질린 표정을 만들어 내고, 그럼에도 애써 평정을 찾으려는 양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생각은 멈추지도 않고, 결론도 나지 않았다. 벗어나야 한다. 벗어나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불안하게 떠돌던 비올레타의 시선이 문득 세비니 자작에 멈춰 섰다.
‘……배에서 조타수를 제거하면 모든 선원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 전쟁에서의 군대도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당신이 지략에서 적의 지휘관을 앞서거나 기동으로 압도하면…….’
귓전에 울리는 것은 제 목소리였다. 클레이런스 후가 소리 내어 읽게 한 수많은 구 중 하나였다.
‘적 부대의 의지는 고스란히 당신의 수중으로 떨어질 것이다.’
지금 제 앞에서 벌어진 일은 저 오래된 금언처럼 엄청난 기동력이나 지략이 필요한,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평화를 깬 한 번의 총격이 필요했을 뿐이다. 회담 경호에 동원된 양 진영의 병사 수는 비슷했다. 어떤 전력 차이도 없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총격과 직후 이어진 포위로 세비니 자작은 그란토니아 병사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의 우두머리를, 그들보다 더 가까이에서 위협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자신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이 작은 원 안의 우두머리를 잡아, 원을 깨트린다면.
비올레타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세비니와 제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제 앞을 막아선 두 기사와 쓰러진 클레이런스 후가 있어 그녀가 제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는 이상 빠른 행동은 불가능했다. 물론 그녀가 박차고 나가는 순간 바로 제지될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제게로 와야 했다. 그녀는 그가 지금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있든, 몇 번의 인사를 통해 본래는 신사적인 사람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유독 티가 나는 부류였다. 그녀가 비단 황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에 배려하고 있는 부분 역시 느꼈다.
그렇다면 제가, 그가 생각하는 ‘여자’ 같은 얼굴을 하면 된다. 지켜 줘야 하고, 도와줘야 할 것만 같은.
비올레타는 곤란한 일이라도 생긴 척 가련한 얼굴로 제 옆에 있던 기사를 끌어당겼다. 라키엘이 보낸 자였으니 믿을 만할 터였다. 그녀는 가까워진 기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껏해야 무섭다는 말이나 어찌해야 하느냐고 황녀가 제 기사에게 묻는 것일게 뻔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곧 어떤 일이 생길 거예요.”
기사가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면 당신이 반드시 클레이런스 후의 부관과 함께 후를 모시고 여관까지 와요.”
말을 끝낸 비올레타가 기사에게서 어떤 대답이라도 들은 양 애써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세비니를 향해 말했다.
“세비니 경.”
“예, 전하.”
“경에게 조심스럽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가까이 와 주실래요? 경만 들었으면 해요.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라.”
곤란한 눈으로 병사들을 훑어보며 비올레타가 소심하게 말을 꺼냈다. 세비니가 별다른 토도 달지 않고 정중하게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우측에 있던 다른 기사가 반사적으로 그녀의 앞을 더 막아서려 했으나, 비올레타는 괜찮다는 듯 그를 옆으로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까지 두 걸음 정도가 남았을 때, 비올레타는 왼손을 조금 움직였다. 마치 서 있을 힘이 없어 좌측의 기사의 팔을 반사적으로 붙잡는 것처럼 보였다. 비올레타의 손이 기사의 팔을 지나쳐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을 뽑았다. 세비니가 눈치채지 못한 채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압도 적인 긴장감에 맥박이 점점 세게 뛰었다. 비올레타가 오른손을 밑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그녀를 세비니가 아무것도 모른 채 가려 주고 있었다. 이윽고 세비니가 한 걸음 더 내디뎠을 때, 그녀의 오른손이 해머를 당겼다.
찰칵.
총신이 회전하는 이질적인 소리가 침묵을 깼다. 몇몇 병사가 그 움직임을 발견하고 달려들려 했으나 그보다 비올레타가 세비니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는 것이 더 빨랐다. 그녀를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던 병사들이 그대로 멈췄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바로 발포될 수 있도록 총은 장전되어 있었고, 황녀의 움직임이 단순한 충동적 저항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겁에 질린 얼굴로 주위를 응시하던 계집은 온데간데없었다. 비올레타가 방아쇠 위로 검지를 깊게 넣어 잡으며 서늘하게 말했다.
“내 지시 없이 단 한 걸음이라도 옮기는 자가 있으면, 세비니 자작은 즉시 사살한다.”
“전하.”
“내 팔을 쳐 이 총을 떨어트리거나, 내 팔을 잡아 저지하거나, 내 드레스 자락에 손 하나 까딱하는 자는 황족에게 명백한 위해를 끼친 것으로 간주하겠다. ‘오발 사고’를 일으킨 자는 군인이고, 그로 인해 지금 내 발밑에 쓰러진 자도 귀족이기 이전에 군인이지. 그러나 이곳은 비무장지대고, 나는 저항할 수단이 없는 황족이다. 그것을 기억하라.”
사람 머리에 총을 대놓고 저항할 수단이 없다고 매끄럽게 말하는 계집을 병사들이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 손에 들린 것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병사들이 곧바로 제압할 수 있는 기사에게 지시하는 대신, 황녀가 일부러 직접 인질을 잡았다는 것을 깨달은 세비니의 얼굴에 낭패가 어렸다.
“장소, 조건,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대들을 지켜줄 수 없다. 그대들의 제국은 그대들을 지키고 내게 미안하다고 비느니, 충성스러운 그대들을 죽여 내게 보일 것이다.”
“전하, 우선 진정하시고…….”
“이 말은 경에게도 동일하다. 입 다물고, 움직이지 말고, 저항도 말라.”
그녀는 기사들로 하여금 제 뒤에 서게 하며 병사들 중 가장 높은 이를 찾았다. 일반병과는 다른 상의 길이와 가슴과 배를 모두 가리는 흉갑, 그리고 화려한 술이 달린 견장이 눈에 띄는 남자가 있었다. 비올레타가 세비니 너머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하 랑부이에 백에게 전언. 지금으로부터 다섯 시간 후로 협상을 연기한다.”
시간을 오래 요구하면 후작이 회복할 가능성이 생기니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나중에 미룰지언정, 그들이 굳이 자신을 무력으로 저지할 필요성까지 느껴지지 않는 요구가 적당했다. 만약 조금만 더 미뤄서 후작이 일어날 가망까지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세비니 경은 그때 나와 같이 무사 귀환할 것이고, 도중 펠로베르 군의 어떤 방해가 있다고 판단하면 즉시 사살하겠다. 여기까지 전해.”
“그러나…….”
“나는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는 것이다. 그리 대단한 요구도 아니니, 순간의 충성심으로 부디 일생에 후회될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 그렇지 않은가?”
아무도 그녀의 말에 대답하진 않았으나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늘였다. 이윽고 그녀의 지시에 따라 그녀를 둘러싼 병사들이 흩어졌다. 그녀는 클레이런스 후와 그의 부관이 무사히 마차에 타는 것까지 확인한 후, 그란토니아 군의 경호를 받으며 세비니를 제 마차에 밀어 넣고 탔다. 그리고 그녀의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여관에 들어서는 비올레타를 발견한 디아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달려왔다.
“전하, 옷에 피……!”
“괜찮아. 내 피 아냐.”
그 말에 안심한 디아나가 뒤로 실려 오는 클레이런스 후를 발견하고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를 발견하고 나니, 비올레타 옆에서 묶인 채로 질질 끌려오듯 걸어오고 있는 말끔한 신사까지 눈에 들어온다. 디아나는 완전히 뻣뻣하게 굳은 채로 비올레타를 따르며 물었다.
“……맙소사, 대체 이게 다 무슨 사달이에요?”
“보이는 게 다야. 의사는 불렀어?”
“아까 전하의 전언을 받자마자 직접 주인에게 말해 놓았어요. 재촉했으니 삼십 분 안에는…….”
“그땐 늦어. 경, 베르됭을 잘 아는 병사들을 보내 그를 말에 태워 와요. 내 말들 중 하나를 보내도 상관없어요. 십 분 안에 의사가 여기 도착하게 해요.”
비올레타의 지시를 받은 기사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달려 나갔다.
“후작은 내 방에 모시고, 세비니 경은 내 맞은편 방, 비어 있죠? 거기에 두고 안팎으로 감시해요.”
“알겠습니다.”
세비니 자작이 기사들에게 휩싸인 채 먼저 앞으로 끌려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아나가 비올레타를 이리저리 살폈다.
“전하, 일단 드레스부터 갈아입으셔야겠어요. 갈아입으실 걸 준비하게 할게요. 행색이 말이 아니세요.”
“괜찮아. 옷은 천천히 갈아입어도 돼. 그냥 나중에 가기 전에…….”
무언가 떠오른 듯 말끝을 흐린 비올레타가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 갈아입을 필요 없어.”
“하지만 드레스가 완전히 엉망이에요.”
“다시 갔을 때, 무슨 일을 당했는지 보여 줘야지. 안 그래?”
평온한 어조로 말하는 것과는 달리 웃는 얼굴이 묘하게 살벌했다. 비올레타는 제 방에 들어서서 후작이 눕혀지는 것을 보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점점 힘이 빠져 희미하게 떨리는 손끝을 애써 꽉 말아 쥔 비올레타가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오는 마차 안에서 부관이 제 옷을 찢어 급히 처치해 둔 듯 후작의 다리는 꽉 매여져 있었다. 그마저도 오는 동안 빈 곳 없이 검붉게 젖어 버린 꼴이었다.
“이제 각하께서도 연세가 있으시니, 예전 같지는 않으시군요.”
비올레타는 제 곁의 부관이 중얼거리는 말을 멍하니 듣다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괜찮을까요? 이렇게 계속 의식까지 없으시니 무서워서…….”
“사실 이렇게 각하께서 의식을 잃으신 것은 처음 뵈어 저도 처음엔 놀랐습니다만, 총격을 당한 이들은 종종 몸이 충격을 견디지 못해 의식을 잃기도 합니다. 살펴보니 깊은 중상은 아니신 듯하고, 각하께서 마차에서 언뜻 정신을 차리시기도 했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각하는 곧 깨어나실 겁니다. 워낙 강인한 분이시니.”
“후께서 나 때문에…….”
“이것이 전하 탓이라면, 국가는 도둑이 아니라 도둑 든 집을 벌해야 할 겁니다. 전하께서 무사하신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각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실 테고요.”
“힐라이 경.”
“예.”
“내가, 제대로 된 길로 온 게 맞나요?”
힐라이는 조용히 물어 오는 목소리에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일말의 주저도 느껴지지 않았던 그 모든 행동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말에는 그리 강한 확신이 없었다. 힐라이는 마치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고 그에 대한 수를 모두 생각해 둔 사람처럼 행동하던 아까 전의 그녀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 총성이 울린 순간부터 그녀는 계속 불안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지휘관이 아닌 이제 갓 스물이 된 여자였고, 평생을 황족답게 군림하듯 살아오지도 못했다. 힐라이는 그제야 그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모두가 홀린 듯 따르고,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는 것도.
고작 스무 살짜리가, 저 두려움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해낸 것이다. 그녀는 제 바로 앞에 있던 타국의 노련한 정치가를 속이고 자신들조차 속였다. 힐라이의 입안에서 낮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경?”
“저는…….”
힐라이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자 비올레타의 얼굴이 흐려졌다.
“당시는 세비니를 인질로 되잡는 게 무리한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내 선에서 판단 내린 게 완벽하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어요. 내가 아직어리고, 아는 것이 절대로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결정은 나만이 내릴 수 있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더 큰, 더 위험한 결정에 몰리기 전에 그것을 피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어요. 그게 그때의 내 판단이에요. 힐라이 경은 훌륭한 군사軍師이고, 오랜 경험이 있으니, 만약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경이었다면…….”
“전하.”
“말씀하세요, 힐라이 경.”
“저는 스무 살을 지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죠. 그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곤경에 빠진 적도 많습니다. 고비도 많이 넘겼고요. 저분을 따른다는 건 그런 일이라.”
“…….”
“그러나 저는 스무 살이 아닌, 지금도 전하처럼은 할 수 없습니다.”
힐라이가 비올레타에게 한번 웃어 주고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스무 해를 모셨으니 저분의 마음을 이제 반절半折은 알 것 같다고, 그렇게 감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각하께서 전하를 자랑스러워하실 것 같군요.”
그는 어떤 거창한 찬사도 늘어놓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비올레타가 그제야 조금 웃었다.
“어떤 말보다 전하께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각하께서 전하께 감사드려야겠지요.”
그때 복도 쪽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리며 의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거의 질질 끌려왔는지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게 안쓰러웠으나 비올레타는 싸늘한 얼굴로 재촉하듯 고개를 모로 까딱했다. 의사가 비올레타의 눈치를 힐끔 보며 침대 위에 제 낡은 가죽 가방을 펼쳐 놓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길이 출혈을 막고 있던 옷을 풀어내고, 바지를 잘라냈다. 총상을 입은 것은 무릎에서 조금 위쪽이었다. 생각보다 보기 참담한 광경에 비올레타가 침음을 삼켰다.
“더운물을 준비해 주십시오.”
의사의 말에 문가에 시립해 있던 기사가 눈치 좋게 바깥으로 바삐 나갔다. 비올레타는 치료에 방해가 될까 싶어 힐라이와 뒤로 좀 더 물러나 있었다.
더운물로 피를 닦아내고, 알콜을 위로 붓는 손길이 분주했다.
“상태가 어떤가?”
“나쁘지 않습니다.”
힐라이의 물음에 의사는 간단히 대답하고 핀셋을 들었다. 탄알이 스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박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드러난 환부를 본 힐라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생각보다 후작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도 마차 속에서 제대로 총상을 살피지 못해 짐작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탄알을 뽑아내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동안 비올레타는 힐라이에 의해 억지로 앉혀진 채로 불편한 한숨을 쉬었다. 모든 치료가 끝나고 하얀 붕대가 겹겹이 후작의 다리에 매였을 즈음엔 이미 회담이 연기된 지 두 시간이 흐른 뒤였다. 비올레타는 초조하게 감긴 눈을 바라보았다.
“일단 기본적인 처치는 이제 다 되었는데…….”
“언제쯤 깨어나실 것 같나요?”
“예? 아, 그건 장담할 수는 없으나 곧 깨어나실 겁니다.”
비올레타가 의사의 말에 안도한 듯 막힌 숨을 한꺼번에 내쉬었다.
“그가 앞으로 다리를 사용하는 데 있어, 혹시 불편한 점이 생기지는 않겠죠?”
“치명상은 아니나 상처가 깊고 환자의 나이가 있어 회복 기간이 꽤 오래 필요합니다. 그 외에는 그리 영구적인 결함이…….”
“달리 장애가 생기진 않으리란 거군요.”
“일단 최소 두 달은 침대에 누워 지내셔야 하겠지만, 회복만 잘한다면 그럴 겁니다.”
비올레타가 멈칫하며 후작에게서 의사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세 시간 후 일어나야 해요. 다시 앉아야 하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만약, 그를 다른 이들이 그를 부액扶腋해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앉아 있다면―.”
“―이분이 오늘 움직이고 평생 다리를 안 쓰실 거라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비올레타가 얼어붙은 채로 입을 다물었다.
“비록 높으신 분들의 일을 잘은 모르나 그 일이 몇 분이면 끝날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상태가 제법 위중한데 오늘 곧장 덜컹대는 마차에 태우고, 환부가 바로 무릎 위인데 무릎을 굽히고 의자에 앉은 채로 한참을 있는다? 제발 이 다리 좀 영영 못 쓰게 해 달라 비는 것이나 다름없을 겁니다.”
비올레타의 말을 단칼에 자른 의사가 깊게 고개를 숙이고, 바깥에 있는 제 조수를 부르기 위해 방을 급히 나갔다. 비올레타가 힐라이의 곤란한 얼굴을 잠시 마주 보다 제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내렸다. 이제는 정말로 더 좋은 답이 없었다.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비올레타는 차분하게 제 얼굴을 갈무리했다.
“힐라이 경.”
“예, 전하.”
“한 시간 안에 후작이 원래 달성했어야 하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 알고 있어야 하는 모든 것을 내게 말해요.”
“세비니 경.”
문가를 등진 채로 의자에 묶여 있던 세비니 자작이 고개를 돌렸다. 비올레타가 가볍게 고갯짓을 하자 그녀를 따라 들어선 기사가 그를 풀어 주었다. 비올레타가 부드럽게 웃으며 기사에게 말했다.
“미첼 경은 잠시 나가 있어요.”
미첼이라 불린 기사가 잠시 세비니를 보다, 고개를 까딱하곤 방을 나섰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 좁은 방 안에는 비올레타와 세비니만이 남아 있었다. 세비니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비올레타가 그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경.”
“시간을 끌어도 소용없으실 겁니다.”
“후와 함께 돌아가도?”
비올레타가 세비니의 맞은편에 여유롭게 앉으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세비니가 그녀를 노려보다 이내 픽 웃었다.
“후작께서 돌아가실 수 있긴 합니까? 이제 약속된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알고 있어요. 이제 고작 두 시간 정도 남았죠.”
“시간을 더 끌 생각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펠로베르에서 강력한 수를 둔 것에는, 오로지 후작을 협상에서 배제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냥 후작께서 다시 걸어 돌아오시길 기다릴 거라면 애초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도 않았겠죠.”
“그것 역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시간을 더 끌 생각도 없고요.”
“그럼…….”
“회담엔 내가 가요, 세비니 경.”
“그러실 거라면 그때 제 에스코트 받으시며 우아하게 들어가셨어도 충분하셨을 텐데요. 너무 돌아가시는 것 같군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경과 이렇게 대화해 볼 기회는 얻지 못했을 것 같은데.”
비올레타가 해사하게 눈매를 접었다. 세비니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경계하듯 그녀를 응시했다.
“제게서 얻어 내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회담을 총괄하는 것은…….”
“우리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재밌는 이야기를 한번 해 보죠.”
“지금, 한가로이 농담이나 할 때가…….”
“나는, 여기에 십 분은 있을 거예요.”
뜬금없는 말에 세비니의 눈매가 좀 더 가늘어졌다.
“우리는 단둘이 있어요. 경은 사내고, 난 계집이죠.”
비올레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걸어왔다. 세비니의 얼굴이 파삭파삭 굳었다.
“십 분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엔 충분한 시간이죠. 아, 내가 경을 과소평가했다면 미안해요. 경은 좀 더 오래 하시는 편인가요?”
“……이게, 무슨.”
세비니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제 크라바트를 풀어내는 비올레타의 손을 떨쳐냈다. 비올레타가 순순히 밀려나며 무표정하게 물었다.
“아무 일이 없어도, 어떤 문제를 던지고 믿음을 주기엔 충분한 시간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전하는 제 딸 또래십니다. 진심으로 충고컨대, 부디 황족으로서의 위엄을 지키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를 더 모욕하지도 마시고요.”
“경은 좋은 사람이에요. 분명 본국에서 훌륭한 평판을 받고 계시겠죠. 경 같은 건실한 사람에게 겁탈이라는 단어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을 텐데.”
“증거가 없는 헛소리를 누가 믿습니까!”
“증거는 없앨 수 있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리고 그 헛소리를 하는 게 뒷골목을 떠도는 집시가 아니라 황녀라면 더더욱. 증거? 만들어 볼 수도 있겠죠. 이 작은 건물에 그란토니아인이 가득 차 있는 건 알고 있나요? 그중 경은 단 하나의 펠로베르인이죠. 당장 이 문만 나서도 내 시녀가 있어요. 그녀는 연기를 아주 잘해요. 재판에서 눈물을 쏟으며 증언할 수도 있겠죠. 최초 목격자로서. ‘전하께서 갑자기 비명을 지르셨고, 방 안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요.”
“…….”
“경은 아마도 그런 일이 결코 없었노라고 해명하는 데 평생을 쓰시게 될 거예요. 혹은 그 거짓 혐의의 대가를 치르느라,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헛소리는 제 인생만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전하의 인생도 망가뜨릴 겁니다. 지금 제정신으로 말씀하시는 게 확실합니까?”
당연히 제정신이었다. 세비니가 제게 손끝 하나대지 않을 거면서 병사들로 자신을 포위해 협박한 것처럼, 비올레타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로 그를 가둘 작정이었다.
자신이 계집이기 때문에 당연히 대화 선상에 올려 두지조차 않았다면, 그녀는 저들이 말하는 그 ‘계집’으로서 쓸 수 있는 가장 더러운 수를 던지는 것이다. 그 판단에 맞추어, 마치 조롱하듯.
“내 걱정까지. 친절하기도 하셔라. 하지만 이미 내게 발목 잡힌 사내가 하나 있으니 내 혼사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 혼사를 걱정하기보다는 경 스스로의 처지를 좀 더 염려하는 것이 좋겠네요. 내가 그저 황제의 딸이라, 마냥 팔자 좋게 여기까지 마실 나온 계집으로 보이나요?”
비올레타가 느릿하게 몸을 숙여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난 그가 가장 아끼는 딸이에요, 경.”
“…….”
“강간 미수든, 진실로 겁탈을 했든, 이 둘 중 내가 뭐라고 지껄이면서 우기든 상관없어요. 경은 황태자의 사람이죠. 그렇게 당신들의 주군이 급하게 성사시키고 싶었던 종전 협상은 그대로 무너질 테고, 밀니로와의 종전은커녕 그란토니아와 직접적인 개전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경이 만들어 볼 수도 있겠죠. 펠로베르 황제께서 곧 승하하시고, 황태자께서 황위를 계승하시게 될 터,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펠로베르 본토를 치는 건 우리로서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에요. 오히려 경제적이죠.”
“대체 제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저를 협박해 얻어 내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협상을 좌우하는 것은 랑부이에 백이지, 제가 아니고요.”
“경이 두 번째 의자에 앉아 있었듯, 나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우리는 모두 ‘마땅히 자격 있는’ 자들이죠.”
세비니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비올레타가 입매를 부드럽게 늘였다가 이내 웃음기를 지워 내며 허리를 폈다. 무표정인 황녀의 얼굴은 조금 서늘했다. 내리깐 시선이 위에서 냉랭하게 세비니를 내리눌렀다.
“세비니 경도 랑부이에 백을 도와 좀 더 좋은 생각을 하고, 제가 듣기 좋은 말을 몇 마디쯤 해 주실 수는 있을 거예요. 그렇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게는 회담을 좌우할 권한이 없습니다.”
“본인의 처지를 돌아보실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나중에 그런 건 필요 없으실 테니까.”
“…….”
“그저 생각하세요. 사방이 그란토니아인인 곳에서 경이 감히 황녀를 건드린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죠. 하지만 어떤 혈통 좋은 미친년이 제 고귀한 인생을 통째로 말아먹으려고 당하지도 않은 강간을 당했다고 하겠어요?”
우아한 말투로 여과 없이 노골적으로 내뱉는 말에 세비니가 황망하게 입을 벌렸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런 미친 계집이 여기 있어요. 바로 경 앞에요. 바로 그게 경이 아닌 날 이기게 해요.”
“……이 모든 게,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겁니다.”
“글쎄요. 그건 지나 봐야 알 일이죠. 다만 나는, 경께서 좀 더 깊이 생각하시면 이후 경이 ‘좋은 생각’을 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빨리 가면 랑부이에 백께서 좋아하실 것 같은데.”
오늘은 유난히 해가 빨리 지는 날이다. 날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비올레타는 마차에서 내리며 산등성이에 걸려 있는 해를 힐끗 보고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려 회관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 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복도에는 촛불이 벌써 간간이 켜져 있었다.
회담장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비올레타 일행이 이르게 출발한다는 전언을 들은 듯, 회담장은 이전과 같이 모두 준비된 상태였다. 비올레타는 세비니 자작을 먼저 들여보내고 회담장에 들어섰다. 복도보다 환한 방을 보자 그리 밝지 않음에도 눈가가 시렸다. 비올레타는 입구에 잠시 멈춰 섰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대리석 위로 비올레타의 구두가 또각또각 분명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방 안에는 이미 랑부이에 백과 클로디어스가 와 있었다. 그녀는 묘한 눈으로 그 둘을 바라보다, 테이블까지 일정 거리를 남기고 제자리에 멈춰 선 제 호위기사 미첼에게 계속 걸으라는 듯 눈짓했다. 호위 기사를 일정 범위 안까지 대동하는 것은 제 안위에 유난스러운 귀족들도 흔히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리 이상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란토니아 측에 주어진 자리를 지나 테이블을 돌았다. 방 안의 모든 시선이 의아한 듯 그녀에게 꽂혔다.
그녀가 멈춘 것은 랑부이에 곁이었다.
“……전하?”
“랑부이에 백, 잠깐만 일어나 주시겠어요?”
의도를 알 수 없는 요청에 랑부이에가 의아한 듯 그녀를 올려다보다, 이내 순순히 일어섰다. 그러자 비올레타가 한 걸음 물러서 제 뒤에 있던 미첼 옆에 섰다. 그녀는 미첼의 허리춤에서 총을 빼내 침착한 얼굴로 해머를 당겼다. 찰칵, 하고 소리를 내며 총신이 회전했다. 그녀가 아까 어떤 짓을 했는지 모를 리가 없는 랑부이에가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황녀, 이 무슨!”
비올레타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총을 미첼에게 쥐여 주었다. 랑부이에가 소리친 것이 무안할 정도로 저와는 아무 관계없다는 듯 제 손에서 곧장 떼어 낸 것이 기가 막혔다. 랑부이에가 헛웃음을 뱉으며 물었다.
“전하,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큰 자리에서 가볍게 구는 것은 저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요.”
“근데 대체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하시는 겁니까?”
비올레타는 그 말에 묘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곧바로 미첼이 어정쩡하게 총을 잡고 있는 것을 앞으로 당겼다. 미첼의 팔이 곧게 직선을 그리며 뻗었다. 그녀의 손이 빠르게 미첼의 손을 살짝 밀어 어딘가를 겨냥했다. 벽에 붙어선 기사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본 비올레타가 차분하게 방아쇠 사이로 손가락을 들이밀어 미첼의 손가락을 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커다란 총성이 높은 천장을 타고 방 안을 울렸다. 사람들이 잠시 멍하니 멈춰 선 채로 비올레타와 랑부이에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침착한 황녀의 얼굴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정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랑부이에가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소리와 함께 회담장은 순식간에 대치 상태로 변했다. 기사들이 칼을 뽑는 날카로운 소음이 이어졌다. 그녀의 앞에서는 펠로베르의 기사가, 그녀의 뒤에서는 그녀의 기사들이 서서 그녀를 둘러쌌다.
“황녀!”
랑부이에가 까무룩 흐려진 의식을 겨우 붙잡고 잇새로 씹어뱉듯 외쳤다. 비올레타는 태연한 얼굴로 웃었다.
“그쪽에서 그란토니아 대표의 다리를 하나 가져갔으니, 저는 펠로베르 대표의 다리를 하나 가져가는 겁니다. 이래야 협상이 공평하게 진행되지 않겠습니까?”
“…….”
“사격이 서툰 편이라, 제 선량한 의도와는 달리 중상을 입으셨을 수도 있으니 랑부이에 백을 빨리 의사에게 보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비올레타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미첼의 칼을 손으로 살짝 밀어내며 다시 뒤돌아 제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클로디어스의 곁, 본래 클레이런스 후가 앉았을 자리에 앉았다.
경악 속에 랑부이에가 결국 정신을 잃자 그를 옮기는 이들로 일순 소란이 일었다. 세비니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비올레타를 응시했다. 비올레타가 그 아비규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세비니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본인의 처지를 돌아보실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나중에 그런 건 필요 없으실 테니까.’
세비니가 이를 악물었다. 랑부이에가 멀쩡하게 앉아 있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었을 그 협박이 천천히 살아났다. 결국 처음부터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첫 번째 자리에 앉은 이를 똑같이 테이블에서 밀어내고, 그 대신 앉을 자를 시작도 전부터 휘두르기 위해서. 랑부이에를 상대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으리라. 말간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다 닳은 수를 쓴 것이 새삼 기가 막혔다.
비올레타가 기사의 손에 총을 쥐여 주고, 그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애초에 조롱에 가까운 일이었다. 설령 그녀가 직접 제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고 한들, 이 미친 짓에 무슨 후환이 있겠는가? 나는 ‘너희와 똑같이’ 했다고 앵무새처럼 말하면 그만일 일이었다. 세비니는 이를 갈며 그 마녀 같은 입술이 다시 달싹이는 것을 노려보았다.
“펠로베르의 대표께서 그란토니아 측 군인의 ‘불행한 오발 사고’로 인해 회담에 임하실 수 없는 상태가 되셨으니, 우리는 우리대로 협상을 이어 가 보죠.”
“…….”
“이번에는 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