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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6장 (14/21)

<2막-6장>

“4황자 전하는 대체 어떻게 돌아온 거래?”

묵직한 커튼은 작은 하녀의 손에서 자꾸만 떨어지려고 했다. 하녀는 겨우 커튼을 아래서 다시 받쳐 올리며 제 동료에게 되물었다.

“뭐?”

“4황자 전하 말이야.”

“그걸 우리 같은 애들이 알아 뭐해. 3황비 전하가 황녀 전하를 죽이니 마니 해도, 결국은 귀한 몸이니 돌아오셨겠지.”

“그럼 우리도 이제 처지가 좀 펴지 않겠어? 우린 아예 들어오자마자 주인도 없는 곳에서 득 하나못 보고 허드렛일만 했잖니. 어머니한테 큰소리 떵떵 치고 황궁 들어올 때만 해도, 진짜 이럴 줄은 몰랐어. 진짜 하녀처럼, 이게 무슨…….”

“있으셔도 우리가 득 볼 일이 뭐가 있어? 하녀가 하녀지. 황녀 전하 뒤에 서 계신 귀한 시녀님 신세라도 될 줄 알았니?”

하녀는 제 동료에게 타박을 놓으며 의자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동료가 그 커튼 밑자락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있는 힘껏 낑낑대며 들고 있는 것을 흘끗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깨끗이 빨아 낸 커튼이 바닥을 조금만 쓸어도 처음부터 다시 빨아야 된다고 하녀장이 엄명을 놓은 탓이다. 바닥 역시 파리도 미끄러질 만큼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본 적은 없지만 이곳의 주인인 4황자 킬리안은 결벽증이 병적인 수준이라 커튼을 칠 때 공기 중에 보이는 먼지조차 질색한다고 했다. 그 결과 수십 일마다 한 번씩 빨고 너는 행사를 거하게 치러야 했다는데, 황궁에 들어온 지 겨우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그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 짜증스러웠다. 그것도 이렇게 추운 날씨에 물에 한 시간 가까이 손을 담그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녀의 동료는 커튼 밑자락을 받치면서도 타박 받은 것이 무안하지도 않은지 종알거렸다.

“그래, 그래, 내가 멍청해서 그래. 이렇게 진짜 허드렛일만 할 줄 알았으면 엄마 말대로 그 목수 아들한테 시집이나 갈걸. 그래도 1황자께서 승전하고 돌아오시면서, 그 궁 계집애들 콧대 올라갈 대로 올라가서 유세 떠는 꼴 보면……. 케일라 님께서 말씀하시길 황제 폐하께서는 4황자님을 제일 아끼신댔어. 그럼 우리도 그 계집년들처럼 빛 좀 볼 수 있는 거 아냐. 게네들은 연애도 지네들 황자님 후광 받고 곧잘 하던걸. 귀족 도련님들도 만나고.”

“넌 그걸 곧이곧대로 들었어? 아니, 거기, 거기 잡아 봐. 그래. 어쨌든 더욱이 우린 그럴 일 없지. 우린 겨우 4황자궁에 처박혀 있는 걸.”

“얼마 전에 베론 후께서 다시 궁내부 장관이 되신 것 몰라? 그 미공자라는 아드님도 어디였지, 하여간 꽤 높은 일을 맡으셨다고 했어. 케일라 님 말씀으로는 1황자님이 공을 세우고 돌아오니 폐하께서 그렇게라도 황자 전하를 달래 주려고 하신다던데.”

“웃기는 소리. 솔직히 말이 좋아 4황자 전하지, 이제 끈 떨어진 연 아냐?”

“뭐?”

“빌키어스 황자 전하께서 돌아오신 후로 다들 그런 얘기만 한다고. 밖에선 다 그래. 황태자 전하가 돌아가신 지도 이제 꽤 오래되었고, 사람들은 그분이야말로……. 아, 이거 안 끼워져.”

하녀는 엇갈린 손에 짜증을 냈다.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탁탁 걷어 친 하녀가 말을 이었다.

“다음 황제 폐하가 되실 거라고.”

“정말 그럴까?”

“그분 말고 누가 있니? 6황자 전하는 아직 어리신 데다, 4황비 전하는 시데른 공국 출신이라 받쳐 줄 외족 하나 없잖아. 그리고 4황자께선……. 빌키어스 님에 비해 황자 전하가 어디 하나 잘난 데가 있어야지.”

하녀의 말에선 이미 빌키어스에 대한 선망이 그득 새어 나왔다. 빌키어스는 이미 1황자라는 말보다 그 이름이 더 친근하게 느껴질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긴, 1황자께서 너무 잘나셨어. 우리 전하께선 어머니가 독살사건까지 연루되신 처지신데. 1황자 전하는 어머니도 훌륭하시지.”

“그럼. 가당치도 않지. 1황자 전하께선 전쟁 영웅이시고, 4황자 전하께선…….”

갑자기 제 치맛자락을 당기는 손길에 하녀가 말을 멈추고 제 동료를 바라보았다. 위를 올려다보며 반짝반짝 빛나던 눈은 제 쪽이 아닌 정면을 바라본 채로 굳어 있었다. 무언가 싸한 기운이 하녀의 등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하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계속해 봐.”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옅은 회갈색 머리칼의 미청년은, 그녀로서는 처음 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제 눈이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하녀의 손이 놓친 커튼이 비스듬히 빠져 있는 봉을 타고 빠지며 바닥으로 요란하게 떨어졌다. 미끄러지듯 의자에서 내려온 그녀가 벌벌 떨며 제 동료 옆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들을 응시하던 킬리안이 천천히 그들의 앞까지 걸어왔다.

“꽤 달변가던데.”

“전하…….”

“어서 말해 봐. 네 입에 다음 황권이 달려 있으니.”

부드럽게 채근하는 주인의 목소리에 하녀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갑자기 벙어리 계집처럼 말을 못하는구나. 분명히 멀쩡하게 지껄이고 있는 것을 들었는데…….”

“전하, 그것, 은, 제가 아는 것도 제대로 없어…….”

킬리안은 묘하게 웃음을 띤 얼굴로 그녀가 띄엄띄엄 이어 가는 말을 경청했다. 그 앞에서 겨우 몇 마디 이어 가던 하녀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자 킬리안은 그만하면 됐다며 그녀를 다독였다. 하녀는 제주인이 듣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온화한 성격인 것에 안도하며 고개를 몇 번이나 깊게 숙였다. 그러다 갑자기 바닥에 처박혔다.

제가 어쩌다 바닥에 쓰러진 건지도 모른 채로, 하녀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황자의 발이 제 배를 밟고 있었다. 잘 벼린 칼날처럼 서늘한 시선이 그녀에게 와서 박혔다.

“내가 멍청했지. 이리 잘난 계집이 내 궁에 있는 줄 알았더라면, 부황께 잘 보일 것이 아니라 네게 잘 보였으면 됐을 텐데. 그렇지?”

4황자 궁이 통째로 뒤집혔다는 소식은 당연하게도 제 모친인 3황비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었다. 카트린느는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렇잖아도 모자가 베론 령에 칩거하는 동안, 그들의 궁에서 허드렛일 하는 것들을 모조리 카디링거가 갈아엎은 통에 지금의 하녀들은 충성심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는 것들이었다. 결국 제가 탄 마차가 4황자 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빌키어스나 비올레타는 유유자적 그것을 듣고 있을 터다.

대체 왜 그러느냐는 말은 더 하기에도 지쳤고, 미쳐 있는 얼굴 보기도 질렸다. 그러나 잡아서 손발이라도 묶어 둬야 했다. 이제 그들은 다시 황궁에 있었으니까. 카트린느는 날이 바짝 선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베론 경께서 와 계십니다.”

“이카르트가?”

이카트르가 있다는 말에 그나마 안도한 카트린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윽고 카트린느가 들어선 제 아들의 방은 그녀가 안도할 만한 광경이 아니었다. 방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부서질 만한 물건들은 이미 바닥에 그 형체를 잃은 채 부서져 있어 한 걸음도 제대로 옮기기 어려웠다. 새삼스럽게 놀라울 것은 없었다. 어차피 제 아들의 패악질이야 제가 물려준 것이었다. 그러나 시기가 문제였다.

킬리안과 이카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카트린느는 애써 치미는 욕을 가라앉히며 방 안을 살폈다. 틀어 올린 머리가 다 헝클어진 채 덜덜 떨며 앉아 있는 계집아이 하나와, 그 곁에…….

망할 놈의 새끼.

카트린느는 끝내 욕을 내뱉으며 드레스 자락을 높이 잡아 난장판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앞으로 엎어진 하녀의 어깨를 뒤로 밀어 몸을 뒤집었다. 하녀의 주변으로 카펫이 피에 젖어 있어 구두굽이 닿자 찰박거리는 소리마저 났다. 카트린느는 혀를 쯧 찼다. 가슴팍이 온통 붉게 젖어 있으니 얼마나 다쳤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 가슴이 위아래로 얕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카트린느는 신경질적으로 제 뒤에 서 있던 황자의 시종에게 물었다.

“이걸 여태 그냥 둬?”

“황자 전하께서 반드시 그대로 두라고 하시어…….”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기에?”

“침실에 계십니다. 베론 경께서 필사적으로 끌고 들어가셨습니다.”

카트린느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어서 이 아이나 옮겨.”

“하지만, 전하께서 그대로 두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셔서…….”

“데센 가의 자제였나?”

“예? 예.”

“이 계집년이 죽으면 네게 책임을 묻겠다. 옮겨. 베론의 주치의들을 부르게 하고.”

머뭇대는 시종에게 으름장을 놓은 카트린느가 그 옆에 앉아 있던 하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받은 것만으로 죽을 것같이 떠는 하녀에게 가까이 가서 선 카트린느가 물었다.

“무슨 말을 했느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전하.”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물었지 않니.”

“황자 전하께, 불민한 말을…….”

“불민하다? 정확히 말해라.”

“……1황자 전하의, 공과와 비교하며, 4황자 전하께선 황제가 되실 수 없으리라고, 이 아이가…….”

“넌 하지 않았고?”

“그, 그렇습니다.”

카트린느가 비식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하녀가 급하게 덧붙였다.

“다만 소녀가 멍청하게 그 말을 옆에서 듣고만 있어…….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셔요…….”

“살릴 목숨이 어디 있기에. 넌 잘못이 없다지 않았니. 황자께서도 널 건드린 흔적이 없는데.”

“아니, 아닙니다! 다음엔 네 차례가 될 것이라,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소녀는 너무나 두려워…….”

“안심하려무나. 네 주인보다 내 성정이 배는 더러우니까.”

“…….”

“네 주인에게 죽을 일은 없을 것이란다. 그 아이는 요령이 없어서 사람 괴롭히는 법도 모르거든.”

카트린느의 싸늘한 말에 하녀의 얼굴이 망연하게 흐려졌다. 카트린느가 몸을 홱 돌려 방을 나섰다.

“저년은 내 궁에 데려다 놔.”

“예, 전하.”

문 앞에 시립해 있던 시종을 신경질적으로 밀쳐낸 카트린느가 문을 열었다. 킬리안의 침실은 아까 그녀가 서 있었던 방과 별다를 것이 없는 상태였다. 카트린느는 제 발밑에 차이는 촛대를 발로 걷어차듯 밀어내며 혀를 찼다.

“여기도 꼴이 말이 아니구나.”

“고모님.”

별다른 대답 없이 손을 들어 이카르트를 내보내려던 카트린느가 문득 이카르트의 손을 보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카르트는 다쳐 있었다. 칼에 꽤 깊게 베인 듯, 흰 손끝으로 핏물이 빠르게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이카르트가 반대편 손으로 손을 가리며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별거 아닙니다.”

“건반 좋아하는 놈팡이가 손을 다치면 쓰니.”

카트린느는 킬리안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제 장갑을 한쪽 벗어 이카르트의 손을 둘렀다. 잔뜩 날이 선 공기가 방 안을 떠다녔다. 기다란 장갑을 몇 번 둘러 단단하게 이카르트의 손을 묶은 카트린느가 손등을 톡톡 쳤다.

“조카는 나가 보렴. 고생했다.”

이카르트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킬리안을 힐끗 돌아보고는 방을 나갔다. 카트린느가 천천히 부서진 물건들 사이로 방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킬리안의 앞에 서기 무섭게 그의 뺨을 내려쳤다.

킬리안은 표정 없이 돌아간 고개를 되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카르트는 세상에 믿을 것 없는 네 뒤를 지켜 줄 사람이다.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니.”

“함부로 대한 적 없습니다. 그가 제멋대로 끼어들어 날을 쥐었을 뿐입니다.”

“애초에 네 손이 날붙이를 꺼낸 것이 잘못이다. 언제 정신 차릴 것이냐? 1황자는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는데, 넌 하녀 아이나 죽일 테야? 겨우 수도에 붙어 있게 된 처지에! 얼마나 더 멍청한 짓을 해야겠느냐? 이 어미 낯부끄러워 죽는 꼴을 보고 싶으냐?”

“더 부끄러울 것이 있습니까? 외숙께서 강간하고 죽인 계집이 몇인데요. 전 적어도 그 계집의 순결은 지켜 준 것 같군요.”

“그 입 다물어. 네 외숙이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차마 듣기 역겨우니 너를 위해서란 말은 이제 좀 내버려 두십시오.”

킬리안은 더 대화하기도 성가신 듯 뒤돌았다. 카트린느가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일부러 이런 게지. 또 일부러 이런 것이지.

폐하 보란 듯이, 세상 보란 듯이!”

“이 아들은 타고난 것이 멍청하고 성미가 더럽습니다. 제 배로 낳으신 모친께서 가장 잘 아시겠으나. 그래서 하녀 아이가 세간에서 떠도는 이야기 좀 했다고 칼부림도 낼 수 있는 거고요.”

“킬리안!”

킬리안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카트린느가 테이블 위에 있던 잉크병을 들어 던졌다. 킬리안의 머리 옆으로 날아간 잉크병이 벽에 맞고 깨지면서 검은 잉크가 붉은 벽지 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킬리안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 병신 같은 아들 꼴이 보기 싫으시면 다음엔 이 머리에 던지세요.”

카트린느가 분노로 덜덜 떨리는 손을 허공에 몇 번 헛짚다, 제 드레스 자락을 겨우 부여잡았다. 카트린느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이내 애원하듯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킬리안, 제발 어미에게 이러지 마라. 지금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네가, 네가 이러면……. 이러다 네가 정말로 폐하 눈 밖에 나면 어찌해. 응?”

“어마마마껜 퍽 중요한 시기겠군요.”

“네게 중요한 거야! 어미는 네가 어쩜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게, 다 너를 위해서인 것을 왜 모르고!”

“당신들을 위한 거겠지.”

꽉 다문 잇새로 낮게 내뱉은 킬리안이 비식 웃었다. 카트린느가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부탁하마. 제발 일부러 폐하 눈 밖에 나려 하지만 마라. 제발 가만히만 있어라.”

“저도 부탁하죠. 제발 그렇게 아들 위하는 어미인 척하지 마세요.”

“내가, 네 어미가 아니면 무엇이관데? 네가 내 아들이 아니면 무엇인데!”

“멀쩡한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저를 가장 먼저 치워 냈을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아닙니까?”

“킬리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불행히도 당신께 아들이라곤 저 하나뿐이죠. 그러나 계승권은 폐하의 아들인 제 것이지, 외숙과 어마마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당연히 네 것이지.”

“착각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본인들이 황제가 될 수 있는 양.”

킬리안의 나직한 말에 카트린느가 이를 빠득 갈았다. 카트린느는 천천히 킬리안에게서 손을 뗐다. 아들에게 매달려 애처롭게 애원하던 여자의 눈이 퍼렇게 끓어올랐다.

“그래서. 계승권을 가지신 귀한 몸께서는 결국, 그 계승권을 이렇게 계속 내동댕이나 칠 것이고?”

“잘 아시는군요.”

킬리안이 매끄럽게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카트린느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매섭게 내려쳤다. 허공에 멈춘 손이 잘게 떨렸다. 킬리안이 고개가 돌아간 채로 킥킥 웃었다.

“정신 나간 새끼!”

“제가 가진 것을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그게 어찌 네 것이야! 네가 감히 어찌 그것을 버려! 너는 내가 낳은, 내 아들이다. 네가 내 것인데!”

“드디어 말씀하시는군요. 진작 이렇게 말씀하셨어야죠. 이게 당신이지.”

“내가 널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 네가 감히, 내 평생을 농락해!”

“제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오로지 당신들을 위해 쓰인 것을 당신이 생각하실 수만 있다면, 참을 만하실 텐데요.”

카트린느는 말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루드비히는 세상에 보란 듯이 베론가를 요란하게 데려온 것과는 달리, 카트린느를 단 한 번도 만나 주지 않았다. 카트린느는 제가 최소한의 자리조차 완전히 되찾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초조했다. 그녀에겐 이미 오래전에 뒤틀린 아들과의 관계를 돌이키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제발 입 닥치고 조용히 제 궁 안에서 살아 있어만 준다면 감사하다고 말할 정도로.

카트린느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킬리안, 되돌릴 수 있다. 폐하께서는 1황자에 대한 마음이 없어. 1황자가 제아무리 잘나도, 그놈은 황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미하일도 죽고, 폐하껜 오직 너뿐인데. 네가 지금 마음을 잡아야 해.”

“폐하께서는 아무도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습니다. 그건 폐하만 평생 바라본 어마마마께서 가장 잘 아시겠죠.”

“킬리안.”

“1황자는 황제가 될 것이고, 저는 제가 원치도 않는 것을 위해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지레 포기하지 마라. 1황자의 상황이 좋은 것 같으냐?”

“포기는 바라던 것에나 하는 겁니다.”

카트린느가 힘이 풀린 듯 그의 앞에서 천천히 주저앉았다.

“제발, 어미 말 들어라. 이 어미가 너만 바라보고 산 것을 몰라?”

“…….”

“킬리안, 제발, 부탁한다.”

“급하긴 하신 모양입니다. 어마마마께서 지금 부탁하신 것이 제가 평생 들어온 것보다 많은 것을 보면.”

부드럽게 웃으며 빈정거리던 킬리안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저도 어마마마께 이렇게 빈 적이 있었죠. 제발.”

아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던 여자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킬리안이 낮게 속삭였다.

“그 계집 하나만 살려 주시면.”

“……킬리안.”

“그 보잘것없는 계집만 제 곁에 살려 두시면, 이아들이 어마마마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꼬박 2년도 지난 일이 흘러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들의 깊은 증오가 생경했다. 카트린느가 기가 막힌 듯 날카롭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고작 그것이었냐는 듯이.

“그리고 어마마마께선 들은 체도 않고 그 아일 죽이셨고요.”

“네 침방 하녀였나. 너무 사소해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잠시 네가 정신이 나갔으리라 생각했다만…….”

“…….”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을 줄은 몰랐구나. 고작 그 계집 때문에 이럴 줄이야.”

킬리안의 차분한 얼굴에 순식간에 균열이 일었다.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그에게서 목 졸린 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카트린느가 킬리안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킬리안, 평생 내가 네게 원해 온 것은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넌 그것을 그딴 천한 계집의 목숨에 걸었다.”

“그럴듯한 핑계군요. 이 핑계가 만들어지기까지 이 년이 걸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요. 그때 제게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은 하십니까?”

“…….”

“폐하께서 요사이 침소에 다시 드시기 시작하셨는데, 행여나 폐하께서 네 병신 같은 짓을 아시면 안 된다.”

킬리안이 제 기억 속의 말을 싸늘하게 읊었다.

“제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 아이가 제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매달렸는데, 아들의 목숨을 당신이 겨우 매단 곳이 그 정신 나간 사랑이라니. 고작 그런 것이었다니.”

“……네 고귀한 목숨, 고작 그런 곳에 매달지 마라. 넌 황제의 아들이다.”

“제 목숨을 가장 하찮게 여긴 건 어마마마십니다.”

“언제까지 정신 못 차리고, 고작 그딴 것에 매여 있을 테냐?”

“고작 그것 때문이냐고 하셨죠. 그런데 아십니까? 그 아이가 죽지 않으면 어미가 죽게 된다고, 제발 그년 좀 죽여 달라 당신이 애원하셨더라면 저는 그 계집을 제 손으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

“저는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평생 어머니를 미워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원하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을 자리를 위해 죽을 듯이 노력해 온 만큼.”

“킬리안, 킬리안.”

“정신이 나간 건 그때까지 제게 어미가 있다고 믿고 살았던 그 새끼겠죠.”

킬리안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지금은 아닙니다, 황비 전하.”

라키엘은 용케 저를 발견하고 요란을 떨 준비부터 하는 루이즈에게 인상을 찌푸리려다,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조용히 모른 체 있으라고 눈치를 주었다. 라키엘의 경험상 루이즈는 그가 인상을 쓴다고 해서 순순히 겁을 먹고 없는 눈치를 만들어 내는 평범한 영애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차라리 이렇게 달콤한 의도가 있는 척하면 뭔가를 기대하고 입을 다문다. 라키엘이 한 번도 그 기대에 부응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언제나 잘 통하는 것이었다.

라키엘은 루이즈의 기대 어린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말 위에 우아한 자태로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 비올레타를 멀찍이 서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길을 돌려 화가의 분주한 손 아래 펼쳐진 거대한 화폭을 응시했다. 새까만 말 위에 올라탄,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 몇 가지 색이 대강 칠해진 세밀한 스케치 속의 그녀는 라키엘의 예상보다도 더 그럴싸했다. 여전히 그녀의 첫 초상화가 저놈의 말과 함께라는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림이 생각보다 더 그럴싸한 것만큼이나, 현실도 그만큼 열악했다.

“냄새가 너무 심해서…….”

라키엘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온 루이즈가 비록 핑계처럼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 냄새가 꽤 역했다. 말의 길게 뻗은 뒷다리 아래로 보이는 거대한 분비물은 한눈에 보기에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사건의 결과였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더니, 그 후로도 마음에 안 드는 짓만 족족 해 대는 동명이물을 라키엘은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좀 더 가까이서 보세요, 각하. 전하도 좋아하실 텐데!”

“괜찮습니다.”

“오늘 전하는 정말 아름다우시거든요. 그렇다고 다른 날엔 안 예쁘다는 게 아니고요.”

가지 않았다간 갈 때까지 비올레타가 오늘 얼마나 예쁘고, 이러한 결과가 나오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했는지 발표할 기세였으므로 라키엘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정면의 화가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비올레타가 라키엘이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시선을 고정한 그대로 인사했다.

“왔어요?”

“……말똥 위에 앉아 계시는데.”

“괜찮아요.”

“아직도 후회가 안 돼?”

“전혀. 라키엘을 봐요. 무려 두 시간 가까이 가만히 서 있었다고요. 이것 봐요. 대단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대단하죠?”

네 발로 가만히 서 있는 것으로도 위대한 업적이 되는 라키엘을, 인간 라키엘이 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뿌듯한 목소리를 무시하며 말을 돌렸다.

“허리가 아플 텐데. 이대로 몇 시간을 더 있겠다고?”

“아직 버틸 만해요. 어차피 곧 내려갈 거고요. 아우구스테 씨는 옷자락의 세밀한 묘사 같은 건 눈앞에 없어도 할 수 있대요. 애초에 생각했던 것도 말을 잡고 있기 힘들 테니 구도만 잡고 바로 내리는 거였는데, 우리 라키엘이 이렇게나 얌전하니까.”

“…….”

“어쩜 이렇게 의젓하게 잘 서 있지? 아이, 예쁘다, 라키엘.”

허리를 숙여 갈기 위로 비올레타가 몸을 기대자 그에 화답하듯 말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가늘게 목을 울렸다. 주인과 말의 자연스러운 교감이 느껴지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라키엘의 눈에는 그냥 눈꼴사나웠다. 말리는 짓을 굳이 하고 있는 것을 실황으로 보고 있는 것도 그렇고, 저 검은 짐승이 이젠 ‘라키엘’이라는 소리에 당연히 저를 부른다고 인지하고 있는 것은 더 그랬다.

“황녀께서 이제 내리셔도 되지 않나?”

“……아, 예! 물론입니다.”

그림에 열중하고 있던 화가가 라키엘의 물음이 저를 향한 것인 줄 뒤늦게 깨닫고 퍼뜩 정신이 든 듯 급히 대답했다. 그리고 비올레타에게 외쳤다.

“전하, 이제 충분합니다!”

비올레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레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마관the Master of the Horse에게 손을 들어 제지한 라키엘이 비올레타를 직접 안아 내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고 발개진 비올레타의 뺨을 물끄러미 내려 본 라키엘이 혀를 쯧 찬다. 비올레타의 몸은 벨벳 드레스 밖으로도 느껴질 만큼 이미 차가웠다. 옷감이 보통 벨벳보다 얇은 데다, 거의 홑겹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드레스가 가관이군. 지금 계절을 알긴 해?”

“오늘은 따뜻하니까 상관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비올레타는 제 입 밖으로 희미하게 흩어지는 입김을 보며 조금 무안한 듯 웃었다.

“그래도 바람은 안 불어요.”

“굳이 왜 밖을 고집해. 감기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나았으니까 이제 안 걸릴 거예요. 라키엘을 안에 데려갈 순 없잖아요.”

“그러니까 애초에 왜 계절에도 안 맞는 고집을 부려.”

“어마마마께서 일 년 가까이 알아보시고 어렵게 불러온 브란젤 화가잖아요. 처음에 이러저러하겠다, 말씀드렸을 때 어마마마께선 말만 들어도 좋다 하셨다고요. 어마마마께서 시간을 들이신 만큼 결과는 최대한 특별해야 해요. 그런데 대체 라키엘은 왜 이렇게 우리 ‘라키엘’을 싫어하는 거예요?”

비올레타의 지극히 의도적인 언어유희에 라키엘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네가 이딴 식으로 저놈을 곧잘 써먹으니까.”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손을 빤히 내려 보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아픈 허리를 손으로 주무르던 비올레타가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적어도 말린 사람 앞에선 조금의 불편함도 티 내선 안 됐다. 그 말린 사람이 잔소리쟁이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리고 나았으니까 이제 감기가 안 걸릴 거란 말은 근래 네가 한 말 중에 제일 멍청하다.”

“걔도 양심이 있으면 또 못 올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라키엘이 빈정거리며 프록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비올레타의 어깨 위에 망토처럼 둘러 준 다음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코트 안으로 욱여넣으며 억지로 버튼을 잠갔다. 비올레타가 포박이라도 당한 양 팔까지 코트 안에 갇힌 우스꽝스러운 제 꼴을 내려 보며 황당하게 중얼거렸다.

“팔이 안 나오잖아. 이게 뭐예요?”

“밤에 열이 올랐다는 둥 기침을 한다는 둥 그런 소리가 들리기만 해.”

라키엘이 쌀쌀맞게 말하며 비올레타를 이끌었다. 걱정으로 들리기는커녕 또 별것 아닌 걸로 귀찮게 만들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 살벌한 투였다. 저번 주 내내 파사칼리아에게 거창하게 간병씩이나 강요받았던 것이 꽤 귀찮았던 모양이다. 비올레타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파도 내가 아픈데, 라키엘이 무슨 상관이에요?”

비올레타는 부루퉁하게 말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진심 어린 구박까지 지속적으로 받으니 그 감기가 더 낫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다. 라키엘이 한심하다는 듯 가늘어진 눈으로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보고는, 그대로 고개를 내려 입을 맞췄다. 입술만 살짝 맞닿은 가벼운 키스였지만 가까운 주변에 누가 있으리란 아주 당연한 생각에 비올레타가 딱딱하게 굳었다. 나무라듯 비올레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입술을 뗀 라키엘이 표정 없이 이죽거렸다.

“상관있지. 아프면 이런 짓도 못하는데.”

누가 들으면 안 그런 척 아픈 상대방을 걱정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딱 좋을 것이다. 그러나 라키엘이 감기라는 아주 작은 병치레도 옮는 것을 질색하던 사람인 것을 떠올린다면, 저 말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아닌 자신에 대한 우려일 가능성이 높았다. 병 옮을까 봐, 정도의. 자신은 너무나도 바쁜 사람이라서 아플 시간이 없다는 게 라키엘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비올레타에게는 그것을 지적할 겨를도 없었다. 비올레타가 팔을 꼼지락거리며 코트 속에서 꺼내, 그의 배를 보이지 않게 때렸다.

“제정신이에요? 지금 주위에 사람이 얼마나……!”

라키엘은 태연하게 그 손을 잡아 다시 코트 속에 넣어주고, 매끈하게 웃었다.

“없어.”

라키엘의 말에 화를 내다 말고 안도한 비올레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조금 멀리 떨어져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는 이를 갈았다.

“……당신 진짜.”

멀리서도 느껴질 만큼 과하게 반짝이는 눈 한쌍. 루이즈였다. 이런 꼴을 보이기엔 가장 최악의 인물임은 확실했다. 그쪽을 돌아본 라키엘이 영혼 없이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일부러 알고 한 것이 틀림없었다. 비올레타가 지그시 노려보자 라키엘이 얄미울 정도로 근사하게 웃었다.

“수습 잘해 봐.”

좁은 협실의 벽면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길고 거대한 액자 속에는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화원과, 그 가운데 새까만 말을 타고 앉아 있는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준수하게 생긴 말 위로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 앉은 채 고개만 살짝 틀어 고고하게 그림 바깥을 응시해 왔다. 구불구불 기다랗게 물결치는 적갈색 머리칼은 한쪽 어깨로 늘어트렸고, 아래를 향하듯 내리깔린 눈은 조금 오만한 기품을 띠고 있다. 머리칼을 넘겨 하얗게 드러난 목 뒤로 곧게 세워진 등이 안장 위로 부푼 치마라인까지 완만하고 우아한 곡선을 그려 냈다.

그림 속의 여자는 딱히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았다. 귀 끝에 단정하게 매달린 작은 진주 귀걸이, 그리고 커다란 옐로 다이아몬드 메달이 매달린 진주 목걸이는 아름다웠으나 그림 속에서의 그 작은 크기만큼이나 그림을 빛내기엔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겨우 쇄골 언저리까지 드러낸 여자의 드레스는 특별한 장식이나 화려한 드레이프, 자수, 부푼 소매조차 없이 단출한 모양이다. 그러나 백색의 벨벳 드레스는 그녀가 앉아 있는 검은 말과의 대비가 아니고라도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랄 만큼 호화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브란젤 화가의 그림은 놀랍게도 그 호화스러운 질감을 살려 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화려했다.

아우구스테는 표정 없이 그림만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젊은 공작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화려한 옷이나 인테리어, 장신구 따위의 세밀한 묘사로 신흥 부자들의 과시용 초상화에 불려 다닌 것이 전부였던 브란젤의 젊은 화가는, 이국의 황녀를 그리게 된 것이 차마 영광스러우면서도 가시를 삼키고 있는 양 초조했다. 분명 황후가 입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했음에도 저 젊은 공작이 찬바람 일으키며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그는 얼어붙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그에게선 좋고 싫음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 작은 스케치를 이렇게 큰 화폭 위에 옮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고, 또 화원을 얼마나 눈에 새겨 넣은 후에야 이런 역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우구스테는 자신 있었다. 브란젤의 귀족들은 졸부의 초상화나 그리는 화가라며 그를 찾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테가 생각하기에 그만큼 여자를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화가는 적어도 당대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능력을 쏟아 낸 역작인 만큼, 그림 속의 황녀는 아주 아름다웠다. 절세미녀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정말이지 아우구스테는 이 작품 하나에 혼신의 힘을 담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일이었다. 브란젤 왕국의 한낱 졸부에서 그란토니아 제국의 황후로 그의 후견인이 격상되는 것이다. 그 변화는 격상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후견인이 되리라 언질을 준 적은 없지만, 결과가 저 정도라면 이미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공작은 황후와 의견이 다른 듯했다.

“아부성이 짙군.”

“……예?”

“내가 본 모습과는 좀 다른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냐는 듯 아우구스테의 얼굴이 망연해졌다.

“쓸데없이 트집 잡지 말거라, 라키엘. 그는 훌륭한 예술가야. 그리고 비올레타랑 똑 닮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니?”

“아니, 아니, 황녀 전하가 더 아름다우십니다! 제 실력이 미천함에 전하의 아름다움을 그림 속에 반의반도 담지 못했다는 것만이 통한의…….”

“됐다. 입 발린 소리 그쯤 해라.”

라키엘은 못마땅한 얼굴로 파사칼리아를 돌아보았다.

“예쁘기만 하다. 넌 괜히 심술 좀 부리지 마렴. 비올레타가 언제까지 네 더러운 성미 참아 줄 것 같니?”

“제발 바깥에서 열두 살짜리 소공자 대하듯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심술이 아니라, 정확한 사실 지적을 하는 겁니다. 고모님께선 다 큰 조카한테 심술이 뭡니까, 심술이?”

“네가 나잇값 못하고 심술부리는 건 사실이잖니. 비올레타가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해. 애도 아니고 어쩜 그렇게 괴롭히는지…….”

“고모님?”

라키엘이 이를 꽉 깨문 채로 환하게 웃으며 파사칼리아를 불렀다. 파사칼리아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다 비올레타가 도망가면 어떡하려고?”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여자 마음은 바다도 건널 수 있단다. 멀어지려면 한량도 없고.”

“그럼 방 안에 가둬 둬야겠군요. 제 몸 두고 대체 어디까지 가나 보게요.”

라키엘이 파사칼리아에게 반항하듯 부러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파사칼리아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정말 너 주기 싫어져. 지긋지긋한 놈. 비올레타가 아깝다.”

주지 않으셔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다, 라고 말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라키엘은 피식 웃으며 비껴 물었다.

“절 안 주면 누굴 주시게요?”

“왜, 많이 있잖니. 알레노브 백의 장남도 아직 미혼이고, 루도비카 백의 차남도 괜찮더라. 아주 훤칠하고. 사실 로드리고 후랑 짝지어 주면 딱이지 않겠니? 청혼이니 뭐니 시끄러운 일들 덕분에 소문이 아무리 부풀려졌대도, 정작 본인도 비올레타가 싫지는 않은 눈치던데.”

“말도 안 되는…….”

“오히려 그런 사이가 결혼하면 잘 산다더구나. 로드리고 후야 별달리 욕심 있는 사람도 아니고, 생긴 것 근사하고. 너도 봤겠지만 비올레타랑 둘이 서 있으면 얼마나 잘 어울리니?”

라키엘이 기도 안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파사칼리아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고작 이런 실없는 농담조차 불쾌해 할 정도로 좋아하면서, 그러고도 비올레타한테 계속 쌀쌀맞게 굴 테야?”

“……자꾸 이상한 이야기로 논지 흐리지 마세요.”

“내 보기엔 그림이나 비올레타나 똑같다. 예쁜 걸 보면 예쁘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해, 라키엘.”

라키엘은 때때로 제가 비올레타에게 꽤 콩깍지가 씌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 고모에 비할 바는 못 되는 듯했다. 분명 그림 속의 여자는 비올레타를 아주 많이 닮긴 했으나, 현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를테면 그냥 예쁜 여자가 절세 미녀로 부풀려진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 아주 아름다운 것으로 과장된 것과 비슷했다. 라키엘은 픽 웃으며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는 아름다웠다. 누구라도 그림 앞에 서 있으면 홀려 버릴 것처럼.

분명 저 고고한 시선도, 저 우아한 자태도 이젠그녀의 것이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저, 저……. 공작 각하?”

라키엘이 또다시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을 어떤 불길함으로 해석했는지 아우구스테가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실은, 하나가 더 있습니다.”

“더 있다고?”

라키엘이 대답하기도 전에 파사칼리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우구스테가 파사칼리아의 관심에 만회할 기회라 생각했는지 재빠르게 문가로 걸음을 옮겨 제 조수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 액자의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크기의 액자가 검은 천에 싸인 채 시종의 손에 들려 들어왔다. 장정 하나가 팔을 벌린 길이와 비슷했다. 천을 걷으려 손을 뻗은 아우구스테가, 천을 완전히 걷어 내기 전에 변명처럼 말했다.

“사실 제가 요사이 받아 온 의뢰인이 모두 푸짐한, 아니, 풍채가 좋은 부인들뿐이어서, 저도 모르게 과도하게 들떴던 것 같습니다……. 정말 이렇게 그릴 맛이 절로 나는, 아니, 아니 정말 기쁘게 그린 피사체가 몇 년 만인가 해서, 그래서 욕심이 나 순간적으로 기억에 남았던 장면을…….”

“서론이 지나치게 길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의뢰 받지도 않은 그림을 감히 그린 것은 그러니까 제 눈이 한 번 쥐면 놓질 않아서, 그려 내야 적성이 풀리는지라 무례하게도, 정말 이전에 보여 드린 것에 비하면 하나부터 끝까지 전부 형편없이 마음 가는 대로 그리고 놓아 버린 것인데 괜찮으실지 모르겠고…….”

라키엘은 결국 그의 두서없는 말이 끝나길 기다리는 대신 제 손으로 천을 걷어 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라키엘의 손에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질 것 같았던 천이 허공에 뜬 채로 멈췄다.

이전의 커다란 그림을 축소시켜 놓은 듯 작아진 화원과 푸른 잔디, 그리고 말 위의 여자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동백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화원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섬세하게 묘사된 이전과는 달리 조금 흐릿했다. 아우구스테의 말대로 완벽함을 추구한 것은 아닌 듯했다. 라키엘의 시선이 그림 속 비올레타의 주위에서 비올레타에게로 느리게 움직였다.

말 위에 길게 엎드린 비올레타의 등 위로 흐트러진 탐스러운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붉게 타올랐다. 하얀 손끝은 말의 검은 목 위를 다정하게 쓸고 있고, 나른하게 내리깔린 눈은 말에게 말을 걸 듯 온기를 담고 있다.

그때,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나.

라키엘은 그림 속에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비올레타를 바라보며, 제가 꼴사납다고 생각했던 그 광경을 떠올렸다. 라키엘, 하고 그 짐승을 부르던 그 맑고 살가운 음성과, 애정 어린 손길. 그 꼴사나운 광경이 그대로 그림 속에 옮겨져 있는데도 전혀 다른 감상이 드는 것이 라키엘은 신기했다. 라키엘은 화가의 필생의 역작임이 분명한 거대한 그림을 한 번 응시했다가, 다시 바로 앞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역시 본래 그린 것에 비하면 형편없으신…….”

“가격.”

“예?”

“원하는 대가를 제시해. 사겠다.”

라키엘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무심하게 말했다. 예상도 하지 못한 횡재에 일순 환해진 아우구스테의 얼굴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설마 그럼 저 거대해서 들고 돌아가기도 두렵고, 돌아가면 둘 곳도 없는 명작은 사지 않겠다는 건가. 화가가 불안한 듯 눈알을 굴렸다. 그것을 보지도 않고 알아챈 라키엘이 덧붙였다.

“본래 의뢰를 받은 것은 당연히 황후께서 약속한 값을 치르실 것이다. 그러니 이건 내게 팔아.”

“아, 이것은…….”

“뭐?”

“제멋대로 그려 낸 것이고, 결과가 차마 팔기에도 죄송할 정도라…….”

“그래서 안 팔겠다?”

라키엘의 인내심이라곤 없는 싸늘한 반문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아우구스테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기회를 놓쳐선 안 됐다.

“아니, 아니,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팔기엔 죄송하니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다만 각하께서 제 후견인이 되어 주신다면 더 없는 영예로…….”

“그러지.”

시건방지다고 된통 욕을 들어먹을 것을 각오하고 힘겹게 꺼낸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자 아우구스테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라키엘은 여전히 제 앞의 그림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협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비올레타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파사칼리아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어느덧 방 안에 드리운 노을이 초상화 위를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붉은 노을빛을 받은 그림 속 황녀의 얼굴은 해사하게 빛이 났으나, 지는 햇살을 받지 않은 어둠 속 얼굴은 싸늘하게 아래를 응시하고 있어 조금 기묘했다. 파사칼리아는 가만히 그 시선을 마주하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직 여기 계셨습니까?”

새 그림 특유의 기름기 섞인 퀴퀴한 냄새에 라키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협실에 들어섰다. 파사칼리아는 이미 바닥이 드러난 크리스탈 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그림은 곧, 비올레타의 궁으로 옮기도록 하죠.”

“……언제쯤이면 가능할 것 같으냐?”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비올레타가 전면에 나서는 것.”

라키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파사칼리아가 직접적으로 그것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일’에 관해선 언제나 한발 물러서 있던 그녀였다. 파사칼리아의 얼굴을 살피듯 라키엘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시간이 아주 조금 더 필요할 겁니다.”

“그렇겠지.”

“베론이 돌아온 것은 여러모로 잘된 일이었습니다. 4황자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고, 베론 후는 그걸 누른답시고 금화나 하릴없이 뿌리는 중이고요.”

돌아오자마자 칼부림을 내 힘없는 평민, 그것도 성년도 지나지 않은 여자를 죽인 4황자는 귀족과 젠트리, 상인과 노동자 계급을 막론하고 거센 반감을 샀다. 필시 황제가 저를 아끼니, 그것만 믿고 자중하다 못해 죽은 듯 살아야 하는 때마저도 오만하게 제멋대로 굴었으리라, 하는 것이 수도의 지배적인 여론이었다. 1황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난폭한 성정에, 인격이 바닥이라는 평과 함께.

파사칼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 하녀 아이, 정말 죽었니?”

“3황비의 궁에서 멀쩡히 걸어 다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1황비가 꽤 박하게 구는구나. 3황비가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1황비나 카디링거 후가 적절한 조정은 했겠지만, 기실 이번엔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야기는 알아서 더 재미있는 쪽으로 불어났을 테니까.”

1황자가 영웅이 되어 돌아온 통에 아무것도 한 일 없는 황자가 갑작스레 요란한 이득 받아 가며 돌아온 꼴부터가 얄미우니, 하녀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보단 이미 송장이 된 편이 재미있을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순리를 따랐다. 부정적인 것일수록 사실에 가까우리라는.

라키엘은 파사칼리아가 앉아 있는 기다란 쇼파의 끝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파사칼리아의 시선이 닿아 있는 비올레타의 초상화를 건조한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그 이야기는 황궁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황자가 하녀를 죽인 것으로 결론이 났을 겁니다. 커피하우스를 돌아다니는 밀정에 의하면, 그가 하녀를 강간한 뒤 입막음하기 위해 죽였다고 믿고 있는 사람도 많더군요.”

“돌아온 날에 칼부림을 부린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니 제가 자초한 탓이 크다. 헌데 그 탐욕스러운 계집이 자식 농사 망친 꼴이야 재미있지만, 4황자가 곤두박질치는 만큼 반대로 1황자의 무게가 무거워질 것이 걱정이야.”

“4황자 덕분에 그 잘난 1황자가 빛이 날지는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1황자에 대한 여론이 예전만 하지는 못합니다. 이젠 시간도 어느 정도 지났고, 꽤 잠잠해졌거든요.”

“그만큼 이전의 여론이 너무 열렬하기도 했지. 지금도 1황자에겐 충분히 우호적이지 않니?”

“4황자는 지금보다 더 바닥칠 수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1황자가 지금보다 더 이상 올라갈 순 없습니다. 한마디로 4황자가 보잘것없다는 이유 덕에 1황자가 얻을 수 있는 반대급부는 더 이상 없을 거란 겁니다.”

파사칼리아가 말없이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1황자가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황제는 그를 공식 석상에서 치하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1황자는 물론이고 카디링거에 돌아간 것은 아무것도 없죠. 지금의 카디링거 후는 죽은 제 아비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에도 한정이 있는 인간이죠.”

“달리 움직임이 있느냐?”

“가만히 내버려 둬도 여론이 알아서 몰아가는 4황자 대신 황제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더군요. 이틀 전 플레베르 부인의 살롱의 모임에서 후작이 황제를 가리켜 ‘아들을 경계한다’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파사칼리아가 우아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황제의 온갖 기괴한 시험과 행보에 어떻게든 느긋하게 버티고 서서 발을 맞추던 선대 카디링거 후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아들은 아비와 달랐다. 목적을 이루는 방법도, 정치적인 노선도, 그 성정도.

어쩌면 대가 바뀐 카디링거에는 그것이 걸맞은 방향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겐 ‘황제에 관하여’ 어떤 여론을 조장할 자격이 있었다. 카디링거는 황제를 만드는 추밀원의 11가문 중 하나였다. 선대 후작과 다른 그로서는 처음부터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황제에게 끌려가기 보다는, 제가 아비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카디링거가 언제까지나 당연히 황제의 편에 서 있으리란 법은 없다고, 그러니 그 뒤에 서 있을 만한 급부가 마땅히 필요하다고.

라키엘은 그의 발언이 아주 시기적절한 도발이라고 평가했다. 비록 황제와 잡음이 심하고, 선대 후작과 다른 노선으로 인해 카디링거가家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어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였지만 갈로이스는 본디 훌륭한 정치가였다. 후작위를 승계하기 전 중앙 관료 생활만 수십 년을 한 남자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안정될 것이었다.

에델가르드가 그것을 가만히 지켜봐 주기만 한다면.

라키엘은 삐뚜름하게 웃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라키엘에게 있어서도 그 ‘시기’라는 것이 호조임에 틀림없었다.

“황제와 카디링거가 스무 해 만에 삐걱대고, 카디링거 내부에는 작위 승계 직후 계속된 분열이 있고, 베론의 상황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겁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라.”

라키엘의 말을 되뇌며 파사칼리아가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라키엘이 피식 따라 웃었다.

“그러니 우리가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가장 완벽한 기회가 비올레타에게 떨어질 겁니다. 황제는 이미 그녀의 계승권을 인정했습니다.”

초상화 속 비올레타의 얼굴을 응시하던 부드러운 눈빛이 일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고모님.”

“말하렴.”

“그녀의 뒤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갖춰져 있습니다.”

문득 묘하게 바뀐 화두에 파사칼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라키엘은 시선을 초상화에 그대로 둔 채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초상화는 적어도 이백 년간 황가에 걸린 여자들의 초상 중 가장 아름다울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녀의 드레스 룸에는 계절별로 수백 가지 드레스가 걸려 있죠. 그녀는 그란토니아에서 황제 다음으로 가장 좋은 것을 먹습니다. 보석함은 언제나 가득 채워져 있고, 언제나 다른 구두를 신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고모님이 그녀를 위해 퍼부은 것들입니다.”

“라키엘.”

“딸에게 많은 것을 해 주고 싶으신 것은 이해합니다.”

“…….”

“그러나 ‘가족’을 흉내 내는 것에만 언제까지고 심취하시면 곤란합니다.”

“……라키엘, 너는 지금 명백히 선을 넘었다.”

파사칼리아의 목소리가 노기를 띠었으나 라키엘은 여전히 태연했다.

“선을 넘으신 것은 황후 폐하십니다. ‘그녀’는 당신의 딸이 아닙니다.”

치부가 그대로 훤히 드러난 기분에 파사칼리아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아이가 내 딸이라 우격다짐으로 내 앞에 들이민 것은 애초에 네놈이었다. 난 그대로 했을 뿐이고. 어디가 틀렸느냐?”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 조카는 황후 폐하께서 애초에 다시 어머니가 되십사 바라지 않았습니다. 흉내는 어디까지나 적당한 선으로 족합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관데?”

“어미로서 딸을 위해 해 주실 것은 이미 그녀에게 차고 넘치게 있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최고의 화가나 목걸이 따위가 아닙니다.”

“…….”

“황후로서, 5황녀를 위해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젠 생각하셔야 합니다.”

라키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파사칼리아를 응시했다. 그토록 친밀한 사이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늘한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모정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고요.”

미하일이 죽었다. 이제는 꽤 오래된 일이긴 했지만, 파사칼리아에게 있어 그것은 아주 먼 일 같으면서도 불과 몇 분 전에 겪은 재앙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속이 짓이겨지고, 피가 거꾸로 솟고, 발밑이 무너지는.

결국, 미하일이 죽는 걸 보셔야 했습니까. 미하일의 시체조차 보지 못한 채 그의 침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던 파사칼리아 앞에 서서 라키엘은 눈물 한 방울 없이 단 한마디를 했다.

물기 한 점 없이 건조한 목소리가 마치 방금 전에 들은 말처럼 귓가를 울렸다. 파사칼리아는 그 지극히 절제된 목소리가 라키엘이 제게 표현한 최대한의 원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심지어 미하일과 함께 죽은 제 아버지, 선대 에델가르드 공작에 관한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 이후로 라키엘은 그저 평범한 유족들이 서로 그러하듯 그녀를 끌어안고 수습했다.

그것이 파사칼리아의 짐이었다. 아비를 잃고, 형제이고 평생의 목표였던 미하일을 잃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한 조카에 대한.

파사칼리아는 겨울이 온 후 처음으로 미하일의 궁에 앉아 있었다. 정기적인 관리로 정갈하게 정돈된 침실은 금방이라도 주인이 나타날 것처럼 생동감이 넘치기도 했고,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된 곳처럼 을씨년스럽기도 했다. 파사칼리아는 미하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이마를 덮는 검은 머리칼 아래로 비올레타와 닮은 암녹색 눈동자가 따스한 빛을 냈다. 단정한 이목구비 위로 떠오른 선한 인상은 제 부모가 아닌 외숙부 클라우스를 닮은 것이었다. 그녀가 그리워할 자격도 없는 그녀의 오라비. 파사칼리아는 무릎 위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라키엘의 아버지, 클라우스가 에델가르드 공으로서 살았던 삶의 8할은 에델가르드 령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중앙에 에델가르드 공이 존재함으로써 조카가 받을 견제를 피하기 위해 정계를 멀리하고, 수도에서 멀어졌다. 클라우스는 미하일이 제 아비에게 사랑받는 아들이길 원했다. 파사칼리아의 무너져 가는 인생 속에 빛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클라우스의 노력과 바람이 무색하게도 미하일은 죽을 때까지 제 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클라우스의 나머지 2할은, 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장성한 황태자를 위한 것이었다. 1황자와 4황자의 세력 속에서 황태자가 고립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수도에 발을 붙인 클라우스는 결국 두 해를 넘지 못하고 미하일과 함께 죽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고, 제 앞에 선 루드비히를, 혹은 루드비히 앞에 선 자신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제 사랑이 진창에 처박히고 제 자식을 빼앗긴 것만 생각해서, 그래서 알면서도 몰랐던 것이었다. 외면해 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오라비가 본래 예견된 고고한 길에서 내려앉은 것마저도 제 스스로의 불행이라 믿었다. 그 개개의 인생이 뒤틀려 버렸다는 것은 오직 머리만 알았다. 제 불행에 취하고, 그속에 틀어박힌 자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여기 계셨어요?”

이제는 평생을 같이 산 것처럼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온기가 파사칼리아를 감쌌다. 파사칼리아는 불현듯 생각에서 깨어났다.

“비올레타.”

음울하게 다물려 있던 파사칼리아의 입매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 얼굴을 알 리 없는 비올레타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한참 나오지 않으신다고, 아그네스가 걱정했어요. 괜찮으세요?”

“괜찮단다. 무슨 일이니?”

“그냥요. 갑자기 어마마마가 생각났어요.”

비올레타는 짐짓 어리광부리듯 말했지만 그녀는 미하일의 기일 전후로 유난스럽지 않은 선에서 파사칼리아를 좀 더 신경 쓰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파사칼리아가 말없이 저를 뒤에서 껴안은 비올레타의 두 팔을 어루만졌다. 비올레타는 미하일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이내 시선을 내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파사칼리아는 손을 뒤로 뻗어 비올레타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만 돌아가자.”

“다…….”

“응?”

“모두 다, 잘될 거예요, 어마마마.”

파사칼리아가 뒤돌았다. 비올레타가 손을 올려 파사칼리아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전부, 되돌려 줄 수 있도록…….”

“…….”

“그러니까, 그렇게 울지 마세요, 어마마마.”

제가 장성해서 힘이 생기면, 그때는 ‘비올레타’를 꼭 제자리에 되돌려 놓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세요. 어마마마, 어마마마……. 어린 미하일의 다짐이 환청처럼 비올레타의 목소리 위로 겹쳤다. 불덩이를 삼킨 듯 뜨거운 숨이 목구멍을 힘겹게 비집고 내려간다. 파사칼리아는 그제야 제가 한참 전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사칼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숨죽여 사셨죠. 누이와 조카가 행복하기만 바라고, 그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지만 전 아버지와 다릅니다. 황제에게 갚아야만 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그래서 고모님께서 움직여 주길 원해요.

내 아버지가 미하일을 위해 희생했던 것만큼.

파사칼리아는 비올레타의 손에 손가락을 단단히 얽어 잡았다. 온몸의 신경이 오로지 한 곳에 남은 것처럼, 맞닿은 손바닥의 온기가 절박했다. 파사칼리아는 그 온기에 생각했다.

너만은, 죽어선 안 된다고.

꼬박 15년 만이었다. 파사칼리아는 시종장의 경악한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 내며 황제의 침실로 들어섰다. 온몸의 맥박이 불쾌하게 쿵쿵 뛰어올랐다. 불과 몇 분 전에 파사칼리아가 독대를 청한 것을 들었을 루드비히는 태연했다.

그녀가 머리 한 번 숙이지 않고, 굽히는 말 한 번 해 보지 않고서 평생을 고고하게 살아왔으리란 라키엘의 생각과는 달리 파사칼리아는 15년 전 이곳에서 무릎 꿇고 애원한 적이 있었다. 비올레타를, 그 불쌍한 아이를 혼자 가두지만 말아 달라고, 그 아이가 부족하게 태어난 것이 감금까지 당해야 할 이유라면 차라리 부족하게 낳은 저를 폐하시라고, 그렇게 엎드려 빌었다. 그것이 그렇게 수치스러우시면 그 아이 데리고 어디든 가서 조용히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살 테니 제발 뺏어 가지만 말아 달라고. 그러나 비올레타는 그다음 날 유폐되었다.

같이 죽어도 좋을 것 같았던 남자가 다른 계집을 들이고, 그들의 아들이 자라 제 앞에서 걸어 다녀도 파사칼리아는 고상하게 고개를 들고 웃을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상처받지 않은 척 태연하게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아들이 제가 죽은 아이를 낳은 후 저를 비웃듯 태어난 아이였음에도 그러했다. 그것이 에델가르드에서 태어나 황후가 된 제 긍지였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도 다섯 살배기 딸을 눈앞에서 빼앗긴 후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 접붙일 수도 없을 정도로 루드비히와 그녀가 틀어진 것은, 다른 어떤 순간도 아닌 바로 그날이었으리라.

그때의 파사칼리아는 그렇게 절박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절망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자신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미하일, 비올레타, 클라우스……. 지금은 없는.

‘이제 시작이에요, 어마마마. 망치지 않을 거예요. 저는 괜찮을 거고,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거예요. 약속할게요. 어마마마가 또 잃게 하지 않을게요. 죽지 않을게요. 열심히 할게요. 전부, 되돌려 줄 수 있도록…….’

파사칼리아에겐 이제 단 하나가 남아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저 발치에 엎드릴 수 있다.

오만한 시선 속에서 파사칼리아가 천천히 걸었다. 요동치던 속은 루드비히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가라앉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눈을 들고 루드비히의 발치에 앉았다. 잘 정제된 형형한 눈동자가 순간 흐트러졌다. 파사칼리아는 그가 꽤 놀라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모른 체 눈을 내리깔며 조금 처연하게 웃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을 다시 바란다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

“우리는 다신 그럴 수 없으니까. 다만 스무 해도 더 지난,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시시콜콜한 지금 사정 말고,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

“…….”

“혹은 내가 오만하고 부족해서 따를 수 없었던 시절에 관해서.”

파사칼리아의 말은 뒤틀림의 시작을 오로지 제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으며, 그녀가 평생 보여 온 증오를 통째로 뒤집는 것이었다.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루드비히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양순한 척 내뱉는 말은 시기를 생각하면 차라리 뻔뻔한 쪽에 가까웠다. 지금은 비올레타가 계승권을 발언한 이후였고, 그렇기에 그것과 상관없다고 잡아떼는 흉내조차 낼 수 없었으니까. 루드비히는 보란 듯이 훤하게 속을 내보이는 제 아내를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파사칼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여자의 손이 루드비히의 무릎을 스치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이 손을 잡고 싶습니다, 폐하.”

속이 보이는 것은 상관없었다. 의도가 드러나는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파사칼리아는 어느덧 열아홉, 그 어리석은 황자처럼 애달프게 뒤엉킨 남자의 시선을 마주하며 확신했다.

그는 그녀의 목구멍 속의 칼날을 알면서도 이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만이 그녀가 평생 역겨워 외면해 온, 남자의 검은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진심이었으므로.

Intermezzo_Ophelia

여자는 제 발밑으로 굴러온 왕의 목을 보고도 아무 미동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어디에 숨어 있었지?”

여자에게 물은 것은 방금 왕의 수급首級을 발로 찬 기사였다. 험상궂은 시선이 여자의 흐트러진 옷 사이를 탐욕스레 훑었다.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기사가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여자의 뒤에 서 있던 기사가 조용히 물었다.

“알케든의 정부인가?”

여자는 대꾸하는 대신, 천천히 몸을 숙였다. 하얗게 질린 손끝이 왕의 하얗게 센 머리 위에 닿았다. 여자의 손이 엎어진 머리를 뒤집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뒤집듯, 조심스럽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제 피로 얼룩진 늙은 왕의 얼굴을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스치듯 올라가 부릅뜬 눈가에 닿았다. 여자의 태연하던 손길이 아주 잠시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늙은 왕이 죽을 때까지 차마 감지 못했던 눈을 다정하게 쓸어 감겼다.

그뿐이었다. 여자는 그대로 미련 없이, 평생 제 몸에 배인 우아한 몸짓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은 채, 여자는 말했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 나직한 목소리였다.

“나는 알케든의 딸이다.”

의복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한낱 여자였음에도 그녀의 짧은 한마디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무장한 사내들에게 겹겹이 포위당했다. 그리고 목을 둘러싼 다섯 개의 창을 앞에 둔 채, 여자는 우악스레 잡혀 끌려갔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제 아비의 목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Lord Villeneuve.”

극진한 경례를 받으며 기사가 들어온 곳은 이 성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 가장 고귀한 포로가 있는 방이었다. 기사는 피곤한 듯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제 사브르와 무거운 머스킷 권총을 마침 바로 곁에 서 있던 스콰이어squire, 기사의 종자에게 건넸다.

이제 열다섯이나 됐을까. 자그마한 소년이 저도 군인이랍시고 제 가슴보다 큰 흉갑을 가슴에 맨 채,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숙이며 그것들을 받아 드는 모습은 제법 우스웠다. 전시戰時랍시고 이런 어린아이까지 군기가 바짝 들어서는. 곱게 자랐음이 분명한 매끈한 손이 무거운 무기들을 받아 덜덜 떨렸다. 기사는 피식 웃으며 소년의 수고를 치하하듯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제법 요란하게 기사가 들어왔음에도 여자는 기사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본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고, 여자의 흐트러진 백금발은 지는 석양빛 아래 창백했다.

기사가 그녀의 그런 뒷모습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는 그녀가 발견됐을 때 바로 그녀 뒤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 기사는 잠시간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를 부르기로 했다.

“princess Ophelia?”

고급 교육을 받은 자 특유의, 유려한 발음의 공용어였다. 오필리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차분한 호박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였다.

“제네트어로 편히 말씀하셔도 알아듣습니다, 빌뇌브 경.”

되돌아온 대답이 능숙한 제네트어라, 빌뇌브가 멋쩍게 웃었다.

“저희 말을 잘하시는군요.”

“잉거스트인의 절반이 밀니로인의 후손이니까요.”

“아.”

지금 이 상황에서, 밀니로의 기사인 그가 잉거스트의 공주에게 듣기에 썩 편안한 말은 아니었다. 빌뇌브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려 그녀의 말을 긍정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적당히 친절한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권했다.

“앉아 주시겠습니까?”

빌뇌브의 말에 오필리어가 말없이 걸어와 그 맞은편에 앉았다. 빌뇌브는 부관에게서 받아 든 서류뭉치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성의 없이 물었다.

“공주, 풀네임이?”

“오필리어 빌도프 에버렛 잉거스티.”

“작년 겨울, 밀니로 국경 지역에 불법으로 대거 침입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에 관해 잉거스트 대공이 관여한 바가 있습니까?”

“저는 알지 못합니다.”

“대공의 관여 여부조차 모릅니까?”

“모릅니다.”

“잉거스트 대공이 가을부터 급격히 잉거스트의 군비를 증강시킨 것에 관하여 공주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빌뇌브가 피곤한 얼굴로 문서에서 고개를 들었다.

“설령 모르시더라도 하나라도 더 아는 척하시는 것이 공주의 신상에 좋으실 겁니다.”

“…….”

“다시 묻겠습니다. 아는 바는 있습니까?”

“그대의 나라가 이렇게 침략해 올 것을 대비했던 것입니다.”

“…….”

“지금에야 아무 소용없어졌으나.”

오필리어가 창백한 낯빛으로 실소했다. 빌뇌브는 다시 문서로 시선을 내렸다.

“밀니로에서는 잉거스트의 움직임을 밀니로에 대한 침략 가능성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개전開戰으로서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잉거스트가, 밀니로를…….”

결국 전쟁을 일으킨 쪽은 밀니로였고, 빌뇌브의 말은 명백한 모순이었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그저 신기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되뇌었다. 빌뇌브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밀니로 침공 계획에 관하여, 공주는 아는 바가 있습니까?”

빌뇌브의 말은 이미 단정이었다. 잉거스트는 밀니로를 먼저 침공하려 했고, 밀니로는 그것을 막기 위해 개전했다. 뻔한 침략자의 명분이다. 오필리어는 말없이 빌뇌브를 바라보았다.

“시온 피몬스티, 레이노어 일모네, 제스트 블레온의 심문 결과, 모두 시인했습니다.”

“…….”

“이제 공주만 남았습니다.”

“내 대답에, 무엇이 달라집니까?”

빌뇌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기질의 호박색 눈동자가 한 점의 떨림도 없이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빌뇌브는 문서들을 옆으로 치웠다. 이제 이런 것들은 필요 없었다. 빌뇌브는 매끄럽게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공주의 나라는 앞으로 열흘 안에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당신은 살아남을 것입니다.”

“이런 치욕 속에서?”

“……그리고 밀니로는, 대공의 공주에게 시인받은 명분을 대륙에 널리 알릴 겁니다.”

“침략한 것은 당신들인데, 내 아비가 침략자라 말하라…….”

“공주께서는 비약이 심하시군요. 그저 개전의 원인이 잉거스트에 있다는 것과 개전이 저희의 정당방위라는 것을 인정하시면 됩니다. 간단한 일이죠.”

부관이 내민 시가를 받아 물며 빌뇌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날 살려서, 침략자의 딸을 살려 둔 그대들이 신사적이라 말하고 싶겠군요.”

“이해력이 좋으시군요.”

“펠로베르와 날 두고 흥정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맞습니다. 지금도 펠로베르의 황족인 공주만이라도 내어 달라, 그리 사정하고 있는 통에 저희 왕께서 아주 신 나셨습니다. 그들이 혈연에 끔찍하단 소린 익히 들었지만, 기대 이상이라.”

오필리어가 무기력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번 개전이 그저 그대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잉거스트는 본디 펠로베르가 밀니로의 땅을 뺏어 세운 나랍니다. 펠로베르의 황제가, 고작 황제가 되지 못할 제 아들에게 나라를 주겠다 하여 그대들의 땅을 뺏었습니다. 그대들이 굳이 내 죽은 아비를 침략자라 몰고, 내 거짓 시인을 받지 않아도 세상은 그대들이 잉거스트를 침공한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니.”

“공주.”

빌뇌브는 성가신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공주가 말하는 그 세간의 동정이니, 이해 같은 건 밀니로에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진짜 명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

“백 년이나 되어 낡을 만큼 낡은 그런 명분은 세상에 필요 없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밀니로의 영토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아 잉거스트를 세운 펠로베르에게는, 더더욱.”

불과 100년도 안 된 신생국인 잉거스트는 수 대 전의 펠로베르 황제가 자신이 아끼던 둘째 아들을 위해 친히 밀니로를 침공해 만든 나라였다. 그때 밀니로는 나라의 4분의 1을 펠로베르에게 순식간에 빼앗겼는데, 펠로베르가 그렇게 밀니로의 땅을 빼앗는 데에는 불과 1주일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잉거스트 공국령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갈등의 시작에 불과했다. 잔잔한 표면과는 달리 국경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지겹도록 일어났고, 잉거스트는 제국 펠로베르를 등에 업고 곧잘 무리한 요구를 하곤 했다. 그러니 밀니로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잉거스트를 점령했다고 해도, 밀니로의 침략을 비난할 이는…….

오필리어는 피식 웃었다.

“밀니로의 왕께서는…… 펠로베르를 치려 하시는군요. 그렇죠?”

“공주께선 알 바 아니십니다.”

빌뇌브가 딱딱하게 대꾸하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잉거스트는 펠로베르에 던지는 선전포고에 불과했던 것이고?”

“공주께선 필요한 말만 하시면 됩니다.”

“필요?”

“우리에게, 그리고…….”

“…….”

“공주에게.”

오필리어가 우스운 듯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빌뇌브가 문득 제 뒤로 기립해 있던 기사들을 물렀다.

“이제 편히 말씀하십시오.”

“무엇을?”

“언제까지 제가 모른 척해야 합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빌뇌브가 입에 문 시가를 한 번 깊게 빨아들였다.

“저는 제대로 된 기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

“제대로 된 공주가 아닌 당신을 이해합니다.”

오필리어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둘 사이로 빌뇌브가 뱉어 낸 매캐한 시가 연기가 떠돌았다.

“그러니 충실한 딸이었던 척은 이제 그만하시죠.”

계획은 완벽했고, 단순했다. 그저 제가 아비를 배신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유 또한 단순했다.

아비는 사랑하지 않았고, 그는 사랑했으니까.

“보고 싶었어.”

제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슬프게도, 아비는 딸을 특별히 믿지는 않았지만 경계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비를 사랑하지 않는 저마저도 조금 슬프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배신은 성공적이었다. 잉거스트 국경의 군사들, 그들이 잉거스트 대공성까지 오며 만나야 할 군사들의 규모, 성 속 병사들의 위치, 성 내부의 지도, 그리고…….

제 아비가 있는 방까지.

“잘했어. 다, 다 네 덕분이야. 모든 것이, 모두…….”

모두, 이 남자에게 알려 주었다.

오필리어는 저를 껴안은 제 연인의 등 위로 천천히 창백한 손을 올려 마주 안았다. 등 위를 그대로 미끄러지던 손이 겨우 남자의 등허리 부근 옷자락을 부여잡는다.

“네가, 네가 무사하지 못할까 봐 얼마나…….”

“괜찮아.”

“……늦게 와서 미안해, 오필리어.”

“괜찮아.”

오필리어는 기계적으로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제야 남자는 오필리어를 제 품에서 놓아 얼굴을 살폈다.

“……오필리어.”

“괜찮아.”

“아니. 조금 쉬어야겠다, 빌뇌브 경.”

“예, 전하.”

“기사들을 다 물려요.”

남자의 말에 빌뇌브가 대답 없이 고개만 짧게 까딱하고 조용히 기사들을 밖으로 다 보낸 다음,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갔다. 남자가 오필리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침대로 데려갔다.

“잉거스트 대공의 시체를…… 봤다고 들었어.”

오필리어는 말없이 남자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앉았다. 남자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멈추었다. 남자의 다정한 손이 오필리어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듯 어루만졌다.

“……네 방에 미리 기사들을 보내 놓았는데, 네가 없었다고……. 그래서 많이 걱정했어. 어디 있었어?”

남자의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오필리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좋은 소식이 있어.”

“…….”

“아바마마께서 우리의 결혼을 허락하셨어.”

“…….”

“사흘 후에 나는 밀니로로 돌아가. 그때 너도 함께 돌아가는 거야.”

“…….”

“너는 이제 밀니로의 왕자비가 되는 거야, 드디어.”

남자가 허리를 숙여 오필리어의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오필리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웃는 얼굴이었다.

“오필리어, 모든 것이, 우리가 원하던 대로 됐어.”

모두, 우리가 원하던 대로.

그 말을 곱씹듯 입안으로 되뇐 오필리어가 천천히 입매를 끌어 올려 마주 웃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밀니로군이 국경을 통과해 잉거스트의 대공성까지 진격해 오는 데는 이틀도 채 필요하지 않았다. 그 옛날 밀니로가 펠로베르에 제 땅을 빼앗겼을 때만큼이나, 금방. 오필리어는 그 진격의 끝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연인의 약속을 생각한 것은, 사실 밀니로군이 국경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이틀을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오필리어는 기억하지 못했다. 인간은 교활하기 그지없다.

성문이 열렸다.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성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말들의 발굽 소리가 진동이 되어 땅이 기묘하게 울렁거렸다. 오필리어는 시녀가 비명처럼 저를 부르짖는 소리에 처음으로 제 아비를 생각했다.

“공주님, 어디 가세요! 어서, 어서 지하로 가셔야 해요! 공주님! 공주님!”

이대로 그가 죽어선 안 되었다.

“공주님!”

누구 때문인지도 모른 채, 이 모든 것이,

“공주님!”

누구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도 모른 채로, 죽어선 안 되었다. 오필리어는 제가 연인에게, 제 손으로 직접 그려 보낸 그 방을 향해 뛰었다.

제 아비가 죽기 전에, 이 나라가 멸망하기 전에, 제가 죽어야 했다. 죽어야만 했다. 그에게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목숨이 10개고, 10번을 그에게 죽더라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제 아비가 죽기 전에 감히 그 모든 것을 말하고 용서받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제가 이렇게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 알량한 마음으로 오필리어는 아비를 찾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죽는 것이 좋을, 제 아비에게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

그 손에 편안히 죽기 위해.

“오필리어, 널 지하로 보낼 기사들을 네 처소로 보냈건만……!”

그래서 오필리어는 지금, 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이리로 왔느냐! 어서, 지금이라도, 아니지, 일롯 경이 아직 여기에 있다. 그를 따라가거라, 어서!”

제가 다친 곳은 없는지 정신없이 살피는 눈을, 제 머리를 쓰다듬는 떨리는 손길을, 오필리어는 마치 시체라도 닿은 것처럼 질린 얼굴로 받아 냈다. 십여 년 전 어미가 죽은 이후로 저와 손끝조차 닿은 적 없었던 아비였다. 오필리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 머리에 닿은 아비의 손을 떼어 냈다.

이렇게 질 나쁜 꿈은, 어서 깨어나는 편이 좋았다.

저 다정한 눈이 어서 살의로 빛나기를. 저 다정한 손이 어서 칼을 들어 저를 찌르기를.

“저예요.”

“일롯 경!”

“저 때문이에요.”

“일롯 경, 어서 공주를 데려…….”

“제가, 밀니로의 왕자에게 모든 걸 알려 줬어요.”

비로소 그녀의 말이 알케든에게 그대로 닿았다. 몇 초간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알케든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를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는지, 늙은 왕의 손이 덜덜 떨리며 제 얼굴을 덮었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그의 눈을 마주하듯, 그 손을 똑바로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네가, 햄릿에게…….”

“모든 걸, 알려 줬어요.”

“…….”

“잉거스트 국경에 군사들이 얼마나 있는지, 대공성까지 얼마나 많은 군사를 만나야 하는지…….”

“…….”

“이 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

“……아버지의 방이, 어디인지.”

알케든이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목이라도 졸린 듯, 늙은 왕이 핏발 선 눈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였구나…….”

오필리어는 알케든이 그다음에 저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10년 전 이곳에서 아비는 바로 저런 얼굴로 제 어미를 죽였었다. 그것을 원망해 본 적은 없다. 부정한 제 어미가 아비를 배신한 것은 어린 저도 알았으니까.

그러나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저를 죽이세요.”

“……네가…….”

“제 어미를 죽이신 것처럼.”

오필리어의 나직한 한마디가 넓은 방 안을 허무하게 울렸다. 그 말에 알케든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필리어를 망연하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벌겋게 충혈된 눈이 거짓말처럼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햄릿이 너를, 사랑한다더냐?”

오필리어는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을 그녀가 긍정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알케든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모양이구나.”

“…….”

“그럼 너는, 적어도 살겠구나.”

거짓말처럼 알케든이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오필리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가 잉거스트를 갖다 바쳤으니, 베르니우스도 널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점점 더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저 밖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알케든이 오필리어의 손목을 잡아 어딘가로 우악스레 끌고 갔다. 오필리어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그런 제 아비를 아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방을 몇 개나 지나 도착한 곳은 오필리어가 처음 오는 곳이었다. 알케든이 급하게 벽을 더듬어 무언가를 찾더니, 이내 자그마한 문이 열렸다.

“여기에, 여기에 있다 밖이 조용해지거든 나오너라.”

“아버지.”

“네가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너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성에서 이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다.”

“아버지.”

“햄릿 그놈이 널 모른척할 인사가 못 된다는 것은, 나도 안다.”

“저는, 아버지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오필리어의 입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겨우 소리를 내는 것처럼 절실하게 흘러나왔다.

“오필리어, 이것을 알아 두거라.”

“아버지.”

“네 탓이 아니다.”

“아, 아…….”

“잉거스트가 이리 망하는 것은, 네 탓이 아니다.”

“……아, 으…….”

“아비는, 차라리 네가 살아남을 수 있어 기쁘다.”

끝내 터져 나온 울음이, 목구멍을 겨우 비집고 나온 듯 끅끅거렸다. 흐린 시야로 다정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뜨거운 숨이 차올랐다.

“밀니로의 왕비가 되어라. 그럼 내 비싼 혼수를 치렀다 생각하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오필리어는 알케든의 긴박한 손길에 던져지듯 그 문 안으로 떨어졌다. 고작 계단이 두세 개 있는 낮은 높이였으나, 오필리어는 마치 절벽에서 떨어진 듯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제 아비가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 아비에게 용서를 받고 싶거든…….”

“…….”

“햄릿과 결혼해 널 닮은 예쁜 아이를 낳고, 밀니로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가 되어 가장 좋은 것만 누리고, 그렇게, 행복하게…….”

“…….”

“네 생 온전히 다 살고, 먼 훗날 이 아비를 만나러 오면…….”

“…….”

“그때, 용서하마…….”

문이 닫혔다. 그대로 암전이었다.

빌뇌브는 햄릿의 뒤에서 지겨운 얼굴로 서 있었다. 왕자는 여자에게 상상 이상으로 지극정성이었다. 그가 그런 좋은 남자인 건 하등 나쁠 게 없었지만, 문제는 그 때문에 제가 아직도 그녀의 심문을 끝내지 못했고, 그래서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한 채 다른 일은 일대로 하지 못하고, 저 꼴은 저 꼴대로 지켜봐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악순환이 따로 없었다.

“오필리어, 이것 좀 들어.”

어제보다 더 창백해진 낯빛의 오필리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오기 전부터 쭉 끼니를 걸렀다면서.”

“…….”

“이러다, 정말 죽으려고…….”

햄릿은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한 채 말끝을 흐리며 오필리어의 부정을 기다렸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를 한번 세게 악문 햄릿이 잇새로 씹어뱉듯 내뱉었다.

“네가 날 위해 해 준 그 모든 일을 알아.”

“…….”

“그러나 넌, 내가 널 만나기 위해 치른 대가를 알지 못해. 네가 내게, 이래선 안 돼.”

무표정한 얼굴로 햄릿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필리어가 하얗게 질린 손을 들어 햄릿의 볼을 쓰다듬었다. 행여 그 손이 곧바로 제게서 떨어질까 겁이 난 사람처럼, 햄릿이 잘게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세게 부여잡았다.

“……네가 죽으면 다 의미 없어. 알잖아.”

의미. 오필리어는 소리 없이 그 단어를 되뇌었다. 마치 그 말을 그녀에게 각인시키듯, 그녀를 잠시간 바라보던 햄릿이 이내 차분해진 얼굴로 그녀의 손을 제자리에 다정하게 갖다 놓고는 일어섰다.

“내일 다시 올게. 오늘은 이만 쉬어.”

햄릿은 허리를 숙여 오필리어의 이마에 다정하게 키스했다. 입술을 꾹 눌렀다 뗀 짧은 스킨십에도 햄릿의 애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는 빌뇌브에게 눈짓한 뒤 방을 나섰다.

그렇게 햄릿이 사라지자 문가에 계속 서 있었던 빌뇌브가 골치 아픈 얼굴로 오필리어에게 다가와 그 맞은편에 앉았다.

“저도 맡은 바가 있어 이리 늦은 밤까지 귀찮게 하는 것이니 이해하십시오.”

“그러죠.”

“이렇게 된 이상 더 피곤하게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세요.”

“잉거스트 대공은 가을부터 밀니로에 대한 침공을 계획해 왔습니다. 그렇죠?”

오필리어가 낮게 소리 내어 웃으며 되물었다.

“빌뇌브 경, 내가 경의 다음 질문을 말해 볼까요?”

“…….”

“작년 겨울, 밀니로 국경 지역에 불법으로 대거 침입한 자들은 모두 대공의 지시를 받은 자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

“여름이 시작되면 잉거스트 대공은 밀니로를 침공해 왔을 것이고, 밀니로는 그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개전했다. 그러니 침략자는 밀니로가 아닌잉거스트다. 그렇지 않은가?”

“더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 아시는군요. 그대로 대답하십시오.”

“경.”

오필리어의 창백한 낯빛이 일순 서늘해졌다. 빌뇌브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는 모릅니다.”

“공주는 밀니로의 왕족이 되실 분입니다. 어찌 이제 와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몰랐던 것이 상황이 바뀐다 하여 아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리 바꿔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공주.”

“제가 그대들에게 드린 것이,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빌뇌브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공주는 지금 가치 없는 말장난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경은 지금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공주께선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이 작은 협조조차.”

“그대들이 나에게 내가 드렸던 것 이상을 바라는 것이 옳은가요?”

“왕자께선 공주를 믿고.”

“제 아비도 배반한 계집을, 어찌 믿습니까.”

빌뇌브의 눈이 미심쩍은 듯 가늘어졌다. 그러나 이내 빌뇌브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공주께선 마치 의심을 받지 못해 안달이 나신 것 같습니다.”

오필리어는 대답 없이 말간 얼굴로 웃었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 희미한 미소였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 빌뇌브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조금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다 문득 정신을 차린 듯 탁자 한편에 있던 문서를 내밀었다. 본래대로라면 심문이 모두 끝난 뒤, 제 앞에서 그녀가 서명해야 할 문서들이었다.

“내일까지, 생각하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오필리어가 그 말에 긍정하듯, 천천히 문서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그런 오필리어를 멀거니 바라보던 빌뇌브가 몸을 일으키며 햄릿이 두고 간 접시도 그녀의 앞으로 밀었다.

“드셔 두는 게 좋습니다. 곧 먼 길을 떠나실 테니.”

힐끗 접시를 바라본 오필리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에 만족한 빌뇌브가 그제야 웃었다.

빌뇌브마저 나간 방 안은 고요했다. 포로에 불과한 그녀가 갇힌 방은 그녀가 공주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호화스러웠고, 밖에서 그녀를 지키는 이는 있어도 안에서 그녀를 감시하는 이는 없었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싸늘한 밤바람이 볼을 쓸고 지나갔다. 푸석해진 실버블론드의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바람 속에 흩어졌다. 오필리어는 얼마간 제가 서명했어야 할, 혹은 서명해야 할 문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이는 많고, 시작하는 말들은 다르되 결국은 모든 말이 제 아비가 죽은 것이 당연한 결과라 말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필리어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들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누가 누구를 원망하나. 애초에 제가 없었더라면 제 아비가 그리 허무하게 죽지도 않았을 텐데.

오필리어는 이 정도면 빌뇌브에 대한 성의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햄릿이 가져온 접시를 제 앞에 가져다 놓았다. 스프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지만, 오필리어는 개의치 않고 한술 떠먹었다.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햄릿이 기억했다는 것에 조금 서글펐다. 오필리어는 몇 술 더 떠먹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먹었다는 것이 티가 날 정도가 되자, 오필리어는 비로소 숟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펜을 잡았다.

밀니로의 어느 서기가 유려한 글씨체로 휘갈긴 제 아비의 죄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오필리어는 그 종이를 뒤집었다. 생각나는 말이 많기도 했고, 없기도 했다. 다만 그녀는 다소 겸허해진 마음으로 종이를 마주했다. 그녀는 이내 두서없이 제 말을 써내려 나갔다.

당신에게 고마워.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 사랑했어. 날 사랑해 줘서 고마워. 미안해. 당신이 나 때문에 포기한 모든 것에 미안해. 그러니까 행복해.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해. 난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이 모든 걸, 내, 

내 아버지를 죽였어.

차마 종이 위에 쓰지 못한 말을 오필리어가 중얼거렸다. 오필리어는 제대로 잇지 못한 그 문장 아래, 다시 문장을 써내려갔다.

그날 밤.

오필리어는 제 아비의 죄들을 쥐고 잉거스트의 가장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다.

주인을 잃은 방은 싸늘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왕자는 몇 번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온 방을 미친 사람처럼 뒤져 댔다.

빌뇌브는 그동안 창가에 서서 그녀의 시체가 수습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빌뇌브가 그녀의 방에서 아주 작게 보이는 그녀의 시체를 발견한 뒤 처음으로 생각한 것은 죽어 가는 그녀가 느꼈을 간밤의 추위였고, 두 번째는 그녀는 이해가 불가능하단 것이었다. 그녀는 밀니로에게는 은인이었으나, 제 나라와 제 아비를 남자 때문에 배신한 여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미 죽은 제 아비의 거짓 오점 하나에 제 목숨을 버렸을까.

빌뇌브는 무덤덤한 눈으로 제 주군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왕자의 얼굴은 마치 목을 졸려 죽은 사람처럼 파리했다.

“전하.”

“오필리어……. 오필리어!”

“전하.”

“오필리어를 지키던 기사들을 불러오라!”

“전하.”

“빌뇌브 경, 오필리어가 없다. 오필리어가, 여기 있었던 오필리어가 없다.”

“전하께서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왕자는 정신병자처럼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빌뇌브는 한숨을 차마 내뱉지도 못한 채, 창가에서 돌아섰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상아색의 문진이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그 문진 아래 펄럭이는 한 장의 종이도. 빌뇌브는 탁자로 걸어가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조금은 날카로운 글씨가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빌뇌브가 천천히 글씨를 읽었다.

당신에게 고마워.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 사랑했어. 날 사랑해 줘서 고마워. 미안해.

빌뇌브는 거기서 읽는 것을 멈추었다.

“전하.”

“오필리어가, 날, 버릴 리가, 없는데…….”

마치 목이 죄인 듯 왕자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빌뇌브는 제 손에 들린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바라보지 않았다.

“공주의 유서입니다.”

왕자가 아무것도 듣지 못함을 알아 빌뇌브는 직접 왕자의 손을 들어 그녀의 유서를 억지로 쥐여 주었다. 왕자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당신이 나 때문에 포기한 모든 것에 미안해. 그러니까 행복해.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해. 난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이 모든 걸, 내,

죽은 이의 감정이 얼룩덜룩하게 묻은 종이 위로,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그러니까, 당신은 행복해야 해.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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