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막-5장 (13/21)

<2막-5장>

기나긴 추모사의 끝에 결국 관을 지키고 있던 초로의 여인이 그대로 쓰러졌다. 검은 모자를 쓴 카디링거가의 여인들이 황급히 후작부인을 부축해 곁으로 끌고 갔다. 엄숙한 침묵 속에서 간간이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후작이 죽었다.

비올레타는 검은 망사 사이로 보이는 그 조용한 해프닝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창백한 얼굴을 한 베티스는 제 어미인 후작부인이 정신을 놓고 제 옆에서 끌려가는데도 아무런 동요 없이 제 아비의 관머리를 지켰다. 사람들이 차례로 그 관 앞에서 조의를 표할 때마다 아름답게 웃기도 했다. 독한 년. 그것을 보고 뒤에서 어떤 부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비올레타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키엘이 돌아오고 있었다. 라키엘은 제 쪽으로 걸어오는 비올레타를 보고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왜.”

“잘했어요?”

라키엘의 물음에는 아랑곳 않고 비올레타가 부드럽게 물었다. 마치 첫 심부름을 다녀온 어린 아이를 대하는 어미 같은 투다. 라키엘은 차마 얼굴을 더 찌푸리지도 못한 채, 망사에 가려진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되물었다.

“뭘?”

“당신, 화나 있잖아.”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비올레타의 손이 라키엘의 크라바트를 정돈하듯 매만지다, 칼라의 주름을 펴듯 몇 번 쓸었다. 정돈해 줄래야 정돈해 줄 것이 없는 완벽한 차림이었으나 그것이 단순히 옷매무시를 고쳐 주기 위한 것이 아님을 라키엘도 알고 있었다. 네 마음 다 안다는 듯한 그 염려나 걱정, 혹은 연민. 그것은 라키엘이 평생 받아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제 아버지나, 미하일이나, 파사칼리아에게조차도. 그들은 가족이되 각자의 고고한 영역이 있었고, 아무리 가까워도 건드릴 수 없는 긍지가 있었다.

그것을 너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는다.

라키엘은 조금 복잡한 눈으로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제 앞의 사람만 바뀌어도 진작 비웃고 돌아섰을 일인데도 라키엘은 화조차 나지 않는 제 스스로가 우스웠다. 라키엘이 제게서 떨어지는 손을 보이지 않게 아래로 잡았다. 그것을 괜찮다는 대답으로 이해했는지 비올레타가 웃었다.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럼 나도 다녀올 테니까…….”

“넌 갈 필요 없어.”

“그게 무슨.”

“애초에 네가 여기 오는 것부터 싫었다.”

베티스 쪽을 힐끗 날이 선 시선으로 바라본 라키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비올레타가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 안 보여요?”

“보여.”

“보이는데 그런 소리를 해요?”

라키엘은 그제야 비올레타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제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정수리를 덮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검은색 모자는 아무리 좋게 봐도 그 어두운 색 외에는 장례식과 어울린다고 말할 수 없는 모자였다. 크고 작은 검은색 공단 장미들과 그 곁을 장식한 커다란 깃털까지는 그럭저럭 눈에 띄는 정도라고 치더라도, 모자 위에서 빛나고 있는 검은색에 가까운 블루 사파이어 조각들은 지나치게 화려했다. 그리고 탐스럽게 풀어 내린 적갈색 머리와, 모자 뒤에서 묶인 촘촘한 망사 리본이 그녀의 뒷머리 위로 길게 흘러내리는 모습까지.

분명 매력적이긴 했으나 그녀의 머리는 가장무도회와 더 잘 어울렸다. 그리고 비올레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라키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꼬락서니야, 이건?”

여태 정신이 없었기는 한 듯 지나치게 뒤늦은 물음이었으나 비올레타는 그것을 꼬집고 놀리는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턱으로 앞쪽의 관을 가리켰다.

“저기 서 있을 때, 제일 예쁜 상태이고 싶었어요.”

“…….”

“저분 속도 좀 뒤집을 겸.”

비올레타가 나직하게 속삭이고는 찡긋 웃으며 라키엘을 지나쳐 걸었다. 가라앉은 공기 속 하얀 대리석 위를 또각또각 걸어가는 소리가 높은 천장을 타고 울렸다. 그녀와 후작의 관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하나둘 그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살짝 집고 있던 손이 관과 가까워지자 안타까운 듯 관의 모서리를 잡았다. 비올레타는 얼마간 후작의 시신을 차갑게 내려 보다, 고개를 들며 전혀 다른 사람처럼 우울한 얼굴로 베티스를 응시했다.

“1황비님.”

딱 작위적이지 않을 정도로, 비올레타의 목소리는 적당히 음울했다. 베티스가 눈을 휘며 웃었다. 아비의 시신을 앞에 둔 여자 같지 않은 화사한 미소였다.

“5황녀, 와 주셨군요.”

“갑작스러워 놀랐습니다. 후작께선 언제까지고 건재하실 줄만 알았는데요.”

비올레타가 관 속에 길게 누운 노인의 얼굴을 무겁게 바라보았다. 베티스의 눈이 순간 서늘하게 빛났다.

“정말이지, 어떻게 애도를 표해야 할지…….”

“황녀가 이리 와 주신 것만으로 아버님께선 기뻐하실 겁니다. 늘, 황녀를 안쓰러워하셨거든요.”

비올레타가 베티스에게 보이지 않는 얼굴로 비식 웃었다.

“그러셨군요. 감사하게도.”

“이렇게 황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직접 보시면 기뻐하셨을 텐데.”

베티스는 비올레타의 화려한 모자를 물끄러미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보자마자 거슬렸으리라. 비올레타는 그 비아냥을 모르는 척 수줍게 웃었다.

“정말, 황녀는 어쩜 이리 날이 갈수록 예뻐지는지 모르겠군요.”

“좋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지만, 3황녀님에 비한다면 부끄러워서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할 거예요.”

비올레타는 겸손하게 대꾸하고 고개를 들어 널따란 홀을 둘러보았다. 몇 주 전과 똑같은 공간, 똑같은 사람들, 변한 것이라곤 그날의 음악도, 색채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것뿐이다. 비올레타는 답답한 듯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불과 몇 주 전에는 1황자님의 전승 파티가 있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후작께서 이렇게 누워 계시는군요.”

“…….”

“후작께서 이리되시다니. 정말 유감입니다.”

베티스가 말없이 비올레타에게로 다가왔다. 비올레타는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그녀의 얼굴이 생각보다 초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베티스가 비올레타의 손을 잡아당겼다. 비올레타는 순순히 걸음을 한 걸음 옮겨 그녀에게 붙어 섰다. 베티스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죽어서 잘됐다고 해도, 이해하마.”

“…….”

“그러니 그만 시건방 떨어. 오늘은 피곤하단다.”

“황비 전하.”

비올레타가 차분하게 그녀를 불렀다. 베티스가 몸을 떼지 않은 채 눈동자만 싸늘하게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비올레타가 그 눈을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조금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

“제가 시건방까지 떨기엔, 전하께서 그리 높지 않은 곳에 계십니다.”

순진한 미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만한 목소리였다. 베티스는 그 말에 발끈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좁혔다. 비올레타가 고개를 모로 조금 기울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것은 일종의 확인이었다.

“블란치가의 아이에게 독이 든 사탕을 쥐여 준, 진짜 배후를 알고 있어요.”

베티스가 조금 놀란 듯 몸을 굳혔다. 비올레타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대로였다. 빌키어스가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베티스는 동요 없이 평온하게 반문했다. 비올레타가 묘하게 웃었다.

“당당하시군요.”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이제 와, 알고 보니 다른 년이 날 죽이려 했더라고 네 부황에게 엎드릴 거니? 미친 계집 취급이나 면하면 다행일 것이다.”

“어차피 모자란 계집이라 십삼 년을 갇혀 살았습니다. 거리낄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렇게 혀를 잘 놀리면서 모자라다니, 네 모후에게 미안할 말은 말아 주렴. 그리고 그 일은 이미 모두 끝났단다.”

“끝났다, 라.”

“아니니?”

“제가 그때 죽었다면 끝났겠죠.”

낮게 짓씹어 뱉듯 베티스에게 속삭인 비올레타가 그녀에게서 반걸음 물러났다. 비올레타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혹은 백치 계집답게 잊었거나.”

“…….”

“멍청하게 떠들고 다닐 생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번 넘어가 드렸다는 사실은, 황비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비올레타는 친절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어려운 내용을 아이에게 가르쳐 주듯 말했다. 베티스가 낮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넘어가 줬다?”

“감사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하.”

“그저 알고 계시란 겁니다.”

베티스가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을 들었다.

“제가 당신을 알고, 기억하고, 살아 있다는 것을.”

비올레타가 베티스의 뺨에 친애의 뜻을 담아 키스하고는, 뒤돌아 백합을 들고 돌아와 후작의 시신 곁에 놓았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우아하게 예를 취했다. 황녀로서 보일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예의였다.

“편히 쉬시기를.”

그리고 최고의 조롱이기도 했다. 베티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이를 조금 악물었다가 웃었다.

비올레타는 베티스를 뒤로하고 우아하게 걸었다. 멀찍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라키엘이 그녀가 가까워지자 앞서 걸었다. 그렇게 그들의 걸음이 활짝 열린 거대한 홀의 입구에 가까워졌을 즈음이었다.

대리석 위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고상한 구두 소리와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이어지던 정적이 일순 숨이 멎은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뒤에서 걸음을 멈춘 채 그 조용한 소란의 주인공을 응시했다. 그가 천천히 비올레타에게로 다가왔다.

“비올레타.”

태양에 조금 그을린 건강하고 환한 피부와 조금 길어진 머리, 그리고 강인해진 인상은 그의 치열했던 시간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낮고 다정했다. 화려한 금발 아래 아름답게 웃는 얼굴 역시 여전했다. 비올레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라키엘의 앞으로 걸어가며 매끄럽게 웃었다.

“오라버니.”

빌키어스가 돌아왔다.

수도는 며칠째 비정상적으로 들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전장에서 갓 돌아온 황제의 첫째 아들은 대외적으로 꽤 평화로운 제국이 크로팔가 해전 이후 스무 해 만에 가지게 된 전쟁 영웅이었다. 한 해 하고도 절반이나 되는 시간을 오롯이 전장에서 보낸 황자다. 그런 그가 수도에 돌아오게 된 이유가 그와 각별하기로 유명한 외조부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은 그의 이야기를 좀 더 극적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훌륭했고, 또 얼마나 자질이 있는지를 논하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쓰인 황자의 단편적 지략들은 대단한 형태로 과장되기 시작했다.

비올레타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놓았다. 라키엘이 무심한 얼굴로 그 신문을 들었다.

“일주일 전엔, 당분간 돌아올 수 없다고 했으면서.”

“제대로 된 수행원 없이, 제대로 된 환영식 없이.”

눈에 띄는 몇 가지 문구를 다시 읽어 내려가던 라키엘이 비식 웃었다.

“승전하고 돌아오는 황자가, 푸른 깃발을 내리고 하얀 휘장을 두른 말을 타고 수도로 돌아왔다.”

라키엘은 신문을 제 옆에 놓으며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댔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의 성과를 평가하듯 느긋한 태도였다. 그리고 꽤 잘했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어찌해야 가장 빛날지 아는 놈이지.”

비올레타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원체 지나치게 빛나긴 해요. 그리고 이번에는 지나치게 성공했고요.”

“그리 남들과 다른 척 고고하게 계셔도, 황자 전하도 결국은 그렇게나 제 아비같이 따르던 외조부의 죽음도 시기 계산해 가며 흥행거리로 끼워 맞출 수 있는 놈이야. 천생 황족이지.”

라키엘의 목소리에 미세한 조롱이 스며들었다.

“비약이 없잖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가 확실히 더 극적으로 좋은 때를 골라 돌아온 건 사실이죠. 후작이 죽기도 전에 와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제 외조부 곁에 있으면서 제 대단한 이미지 소모되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확실히. 전장에서 제 자리는 최대한 지키면서요.”

“그래. 확실히 최선이야.”

묘하게 웃음기 어린 대꾸에 비올레타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라키엘이 피식 웃다가 이내 비올레타를 보며 소리 내 웃었다. 저 남자가 미쳤나. 비올레타는 라키엘을 빤히 바라보며 표정을 찡그렸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이젠 저런 1황자 앞에서 계승권의 계, 자만 꺼내도 내가 거리에서 몰매 맞게 생겼는데.”

정말 딱 그 정도로 지금의 여론은 연일 압도적이었다. 비올레타의 퉁명스러운 타박에도 라키엘의 입매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비올레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저 싸구려 종이만큼, 기억력 나쁜 것도 없거든.”

비올레타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라키엘은 나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동전 한 닢짜리 종이에 열광하는 이들도 똑같지.”

“하지만 그의 공적은 잠시 세간에서 시끄럽다 사라질 그런 정도가 아니죠. 당신도 알잖아요. 그는 사람들이 유행이 지나면 옷장 속에 처박아 두는 모자 따위가 아니에요.”

“알아. 잘 알지.”

그걸 잘 아는 사람이 그러냐고, 비올레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으로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시선에 라키엘이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위스키 병이 놓인 구석의 콘솔로 걸어갔다. 비올레타는 그 궤적을 눈으로 좇으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오늘따라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 이상했다.

비올레타는 엘데르디움의 문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책상이 거꾸로 엎어져 있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럴 만했으니까. 기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의 정상적인 대처라면 그래야 마땅했다. 에델가르드가 황녀의 계승권을 운운하기도 전에 1황자의 계승권이 확고해졌다. 그녀가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그녀가 바라보고 있기만 하던 무대 계단이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올레타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위스키를 반쯤 채운 잔을 들고 돌아선 라키엘의 모습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라키엘은 콘솔에 그대로 기대며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새 무언가 생각 중인지 미간이 미세하게 찡그려져 있다. 대체로 라키엘의 저런 표정은, 비올레타가 본능적으로 피해 가던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걸 깼다가 좋은 반응이 돌아온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비올레타는 나름대로 바쁜 시간 쪼개 친히 여기까지 행차하신 느낌에 젖어 있었고, 그렇기에 당당했다. 비올레타가 라키엘을 재촉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키엘.”

그 미세하게 짜증 어린 부름에 라키엘이 문득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빤히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비올레타를 응시했다. 라키엘이 잔을 들어 몇 모금 더 마시고는 콘솔 위에 놓았다. 그리고 의외로 개운하기까지 한 표정을 하고서는 대답했다.

“너 대신 그 몰매 맞을 놈이 하나 오니까. 괜찮다.”

기다림 끝에 돌아온 말은 그 상쾌한 목소리와는 달리 한 번에 이해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올레타는 호기심이 생긴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 대신이라뇨?”

“4황자도 돌아오거든. 베론을 업고.”

예상치 못한 결론에 라키엘에게로 다가가던 비올레타가 멈칫 멈춰 섰다. 라키엘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겨우, 이 년도 안 지났는데.”

“오래 묵혀 둔 거지. 가벼워는 보여도 이번이 3황비가 받은 최고의 벌이다. 그 계집은 그보다 더한 일을 수없이 많이 했어. 그리고 황제는 그것을 수없이 많이 넘겼고.”

“황제께서 3황비를 그만큼이나 아끼셨나요?”

“그렇게 보자면 꽤 애매해. 딱히 3황비를 총애하는 기색이 보인 적은 없어서. 다만 정황상 일부 이해가 되는 건 그렇게 황제가 3황비의 일을 넘겨줄 때마다 베론이 큼직한 걸 하나씩 황제의 발밑에 갖다 바쳤다는 점이지. 그걸 들이대도 그 정신 나간정황을 전부 이해하기는 불가능하지만.”

비올레타는 문득 카디링거 후의 관머리를 지키고 있던 베티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유리 조각처럼 섬세하고 서늘하게 음영이 진 얼굴. 꽤 허탈한 결과가 아닌가.

1황비께서 꽤 심기 불편해 하시겠군요. 그렇게 큰일을 해내고도 난 멀쩡히 살아 있고, 3황비마저 이렇게 멀쩡한 꼴로 돌아온다면.”

“3황비를 평생 지켜봤는데 그 똑똑한 여자가 그렇게 될 것도 몰랐을까. 돌아온 베론은 예전의 베론이 될 수 없어.”

“…….”

“적어도 당분간은. 3황비는 북의 탑에 일주일 가까이 갇혀 있었고, 이 년 가까이 궁에 존재하지도 못했지. 베론가 사람들 역시 단 하나도. 황제가 처음으로 그들에게 대외적인 꼬리표를 붙여 줬고, 그것이 그렇게 가벼울 수는 없다. 1황비는 그것만으로 제 계획의 절반은 달성한 셈이지. 하지만…….”

“이런 시기일 줄은 몰랐겠죠.”

“그래.”

라키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매만 끌어 올려 웃었다.

“세상에서 1황자가 황태자로 확실시되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4황자를 끌어온 황제를 어떻게 생각해? 게다가 베론 후를 다시 요직에 앉힌다면.”

비올레타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를 더 지켜보겠다 이거군요.”

제가 그 남자의 반대쪽인 건 차치하더라도 ‘아직도’ 그 빌키어스가 고작 고려 대상에 그치고 있다는 것은 비올레타에게도 꽤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얼마나 해야 황제는 제 아들에게 만족할 수 있는 걸까. 질린 목소리로 비올레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기울어진 균형을 조금이라도 맞추려고.”

“균형?”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말을 낮게 뇌까렸다. 그리고 싸늘하게 웃었다.

“그건 1황자에 대한 조롱에 가깝지. 그 면전에 균형이란 걸 들이민 자체가. 1황자가 잉거스트에서 해낸 수많은 일을 본다면.”

“…….”

“황제는 1황자를 전혀 아끼지 않아. 전쟁 영웅이 되어 제게 공을 몇 개나 안긴 제 아들을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견제할 정도로.”

비올레타는 그것을 문득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애초에 황제가 카디링거가 미하일을 죽이게 둔 것도 1황자를 너무나 총애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는 말이고.”

“…….”

“황제의 마음속에서는 1황자와 네가 아직도 동일 선상에 있다는 말이기도 해.”

비올레타가 조금 기가 찬 듯 혀를 찼다. 라키엘이 비올레타를 지나쳐 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어쩌면 너보다 더 아래일 수도 있지.”

“그럴 리가.”

“멍청하게도 선을 넘는 바람에.”

라키엘이 책상 중앙에 있던 종이를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무성의하게 몇 장 넘겼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카일이 줄 그어 놓은 부분을 읽었다.

“베론 후는 다시 궁내부 장관으로, 그의 아들은 황궁 관리국 회계 감사관으로.”

“맙소사…….”

“재주는 1황자가 부리고, 베론이 궁내부와 황궁 관리국의 재정권을 홀랑 가져가는 상황이지. 특히 그 아들은 놀라운 승진이고.”

“게다가 카디링거는 아직도 작위 승계로 불안정하고요.”

“그래.”

“……우리, 그러니까, 지금 잘되어 가고 있는 거 맞죠?”

비올레타가 점점 복잡하게 꼬여 가는 생각에 단순한 확신을 바라듯, 라키엘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라키엘이 픽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그 어느 때보다 더, 라는 말은 사실 자신들보다는 반대쪽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1황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어 돌아왔고, 4황자를 앞세운 베론은 어느 때보다 더 영화로운 임명을 받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자신들이 맨 끝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확신 어린 말 한마디에 기묘하게도 안도했다. 그는 정말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 허울뿐인 권세를 업고 베론 후는 또다시 제 주제도 파악 못 하게 될 거고, 4황자는 1황자에 비해 보잘것없다는 죄로 몰매 맞느라 바쁠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황자는 핵심에 다가설 수 없지. 그 보잘것없는 이복형제 덕분에.”

“그리고 그동안 1황자의 후광은 점점 흐려질 테고.”

“그렇게 그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가라앉을 동안, 네가 그만큼 올라서는 거야.”

“어떻게요.”

“아무도 얻지 못한 1할을 네가 가져야지. 나머지 9할을 뒤집을 수 있는 1할.”

“아무도 얻지 못한 거라니, 대체.”

“황제의 마음.”

비올레타는 멍하니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칼.”

“진짜 왔나?”

칼은 황당한 듯 묻다가, 이내 승마 바지를 입고 있는 비올레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올레타는 그 눈길을 태연하게 넘기며 칼의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비올레타가 제 물음에 들은 체도 하지 않자 칼은 그것이 익숙한 것처럼 두 번째 물음으로 넘어갔다.

“그 황당한 꼴은 뭐야.”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여자 옷 벗길 때 말고 그런 뻔뻔한 다리 한 쌍은 처음 본다. 그것도 이런 대낮에.”

“그러니까 사냥을 왜 이딴 데로 왔어요?”

비올레타는 곧바로 퉁명하게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근의 가장 낮은 수풀이 무릎까지 오는 높이니 세상의 어떤 드레스도 이곳을 무사히 통과하진 못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비올레타는 제가 이 꼴을 하고 있는 게 마치 칼 때문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칼이 어이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너 오라고 선택한 것 아니거든. 수도랑도 가깝고, 작은 놈들도 다양하게 있고…….”

“취미를 좀 취미답게 하지 못하고, 이렇게 목숨 걸고 진지하게 달려들어서야.”

“뭐?”

“이러니까 후가 여태 결혼을 못하는 거예요.”

비올레타가 칼을 위아래로 훑으며 한심하다는 양 혀를 쯧쯧 찼다. 칼이 거만한 얼굴로 삐딱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그래요. 안 하시겠죠. 내 이름 팔아 가며.”

칼이 어깨를 으쓱했다. 비올레타가 칼에게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폐하는요?”

“저기 계신다.”

칼은 대강 제 뒤쪽을 가리키며 손에 들고 있던 라이플을 어깨에 멨다. 그리고 비올레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그 손을 보지도 못한 채 쌩하니 칼을 지나쳐 그의 뒤로 걸어갔다. 칼이 별달리 민망해 하는 기색도 없이 손을 내리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화, 황녀 전하!”

칼의 뒤에 서 있던 가디언에게서 비올레타는 총을 거의 빼앗듯 잡아들며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고 거의 그녀의 허벅지 중반까지 오는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여자치고는 꽤 기다란 다리가 수풀을 헤치며 들어간다. 칼은 조금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쫓아가려는 가디언을 잡아 세웠다.

“그녀는 총을 다룰 줄 알아.”

“하지만 폐하께서 홀로 계십니다. 이미 장전까지 되어 있는 총을 위험하게 어찌, 혹 미숙하신 솜씨로 위험한 사고라도 생기면……!”

“짐승이랑 사람 구별할 정도로는 다루니, 걱정 마.”

황제의 앞에 서는데 그 정도로 충분할 리가 없지 않느냐는 듯, 가디언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있는 칼도 어쩐지 기가 막힌 얼굴이라, 가디언은 무어라 더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비올레타는 생각보다도 더 먼 거리에 혀를 내둘렀다. 비탈은 경사가 완만했으나 기다란 수풀을 헤치며 걷느라 걸음을 크게 걷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찼다. 비올레타는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총을 고쳐 메고 고개를 들었다. 그로왈드의 사냥터는 수도와 가까워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제가 지금 서 있는 지점은 기막히게 추웠다. 비올레타는 이러다 황제를 만나기도 전에 제 입술이 얼어 버릴까 두려워 좀 더 빨리 걸었다. 이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 바스러진 풀잎들이 벨벳 바지를 스치며 힘없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비올레타는 루드비히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몇 번을 마주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위압감이 속을 내리눌렀다. 비올레타는 숨을 몇 번 깊게 몰아쉬고 겨우 발걸음을 뗐다.

“곧 내려가겠다.”

비올레타를 수행원 중 하나라 생각한 루드비히가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비올레타는 마른 입술을 조금 달싹이다 이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전혀 의외의 목소리에 루드비히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놀란 기색 없이 총을 위험하지 않게 갈무리했다.

“전언도 없이 어쩐 일이냐.”

“칼에게 뒤늦게 소식을 들어, 무례를 알면서도 쫓아왔습니다.”

칼과의 친근한 사이를 드러내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부러 자연스럽게 흘리며, 비올레타는 짐짓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오랜만에 사냥 행차를 하신다 하시어. 그로왈드도 궁금했고요.”

“칼에게 들었다면 떠나기 전이 아닌가. 떠나기 전에 진작 말했더라면 황녀를 편히 수행하게 했을 텐데.”

루드비히의 시선이 풀숲을 헤치며 이슬에 얼룩덜룩해진 비올레타의 바지를 응시했다. 나무라는 기색은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행색이 거슬릴 정도의 신경조차 없기 때문이겠지만, 비올레타는 그것이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위안도 중요했다.

“그리 당당하게 행차에 함께하면 제가 지나치게 질투를 받을까 염려되어서요. 물론 그런 질투도 제겐 기쁘겠지만요.”

비올레타가 순수한 얼굴로 웃었다. 루드비히가 픽 웃으며 말했다.

“뻔뻔하게, 예쁜 말을 잘도 하는구나.”

일순 가슴이 덜컹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비올레타의 불안과는 달리 루드비히는 목소리도, 표정도 모두 담담했다. 루드비히가 느긋하게 몸을 틀어 걸었다. 비올레타가 뒤를 따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소녀의 태도가 폐하께 뻔뻔해 보인다면 조금 더 수줍게 바꾸겠습니다.”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데 무슨 소용이냐.”

루드비히가 가볍게 실소했다. 비올레타는 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 내며 말을 이었다.

“노력하고 싶습니다. 폐하께서 바라시는 모습에 걸맞도록.”

“네가 왜?”

정말로 의아한 듯한 목소리였다. 비올레타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폐하께 예쁨 받고 싶어서요.”

‘나머지’와 자신은 달라야 한다. 어떻게든. 그것이 제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라도 괜찮았다. 어차피 진짜 바닥도 아니니까. 어설프게 뻔히 보이는 요령을 부릴 바에야, 아무 요령도 부릴 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나았다.

루드비히는 말없이 비올레타를 돌아보았다. 장성한 황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처럼 지나치게 솔직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에는 어떤 부끄러움도 없었다. 루드비히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짐의 자식이 그리 많은데도 이런 멍청한 소리는 처음 듣는다.”

“폐하께서 제 아버지시니까.”

“…….”

“그리고 제가 폐하의 딸이니까. 아버지께 예쁨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인정받고 싶다, 라…….”

비올레타의 말을 낮게 뇌까리던 루드비히가 이내 웃고 있던 입매를 딱딱하게 내리며 물었다.

“어떤 종류의 인정 말이냐. 네가 내 딸이고, 황후가 낳은 내 유일한 적통 자식이며, 그란토니아의 다섯 번째 황녀라는 것? 이미 모두 인정된 것이다. 그런데 넌 마치…….”

“…….”

“그 이상이 필요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예.”

비올레타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충분하지 않더냐? 네가 지금 가진 것들이.”

“제게 필요한 것은 제가 태어나는 순간 주어지고, 그래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루드비히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올레타가 고개를 조금 더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폐하, 저는 그것들을 모두 가지고도 십삼 년을 사방이 막힌 방 속에서 살았나이다.”

그 절절한 내용과는 달리 원망 한 톨 담겨 있지 않은 담백한 목소리였다. 루드비히는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 발로 폐하께서 정하신 그 문턱 하나 넘지 않고, 십삼 년을요. 맹세컨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침대에 늘 얌전히 앉아 있던 진짜 ‘비올레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이 황제의 뜻이고, 제가 황제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평생을 폐하의 충실한 딸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충실함에는 어떤 변함도 없을 것입니다.”

“헌데?”

“이런 제 구구절절함이 멍청해 보이실 것을 압니다. 폐하께서 전에 제게 말씀해 주셨죠. 정말로 사슴이 필요한 자는 덫을 놓고 기다려야 한다고요. 그것이 천박하다 하더라도.”

“그래. 그랬었다.”

“저는 그 천박한 수를 써도 좋을 만큼 폐하의 인정을 원합니다. 제가 그 막막한 세월 속에서도 폐하의 의지에 충실해 왔던 만큼, 폐하의 인정을 원합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은 한낱 짐승의 고깃덩어리가 아닌 폐하의 의지이고, 저는 감히 꾀를 쓸 수도, 그것을 기다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리, 멍청하게 굴고 있다고?”

“그것이 제 마음입니다.”

“그 마음 끝에는 무엇이 있기에.”

비올레타는 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로 숨을 깊게 한 번 몰아쉬었다. 루드비히는 느긋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심장이 꼭 귓전에 붙은 것처럼 시끄럽게 온몸을 울렸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이제 제 계승권을 인정받길 원합니다.”

루드비히는 얼마간 말없이 비올레타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꽉 쥔 주먹 안으로 식은땀이 고였다. 비올레타는 그 위압감을 겨우 견뎌 내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명료한 발음으로 덧붙였다.

“제게도 가능성을 열어 주시길 원합니다.”

“가능성이라.”

“그 가능성이 제게는 폐하의 ‘인정’과 같을 겁니다.”

“짐이 널 사내 취급해 주길 바라느냐?”

루드비히가 흥미로운 듯 되물었다. 비올레타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최대한 당당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리해 주신다면, 더없이 기쁠 겁니다.”

“좋다.”

지나치게 흔쾌히 돌아오는 대답에 비올레타의 얼굴이 되레 흐려졌다. 당당하게 내뱉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극히 조심스러운 그 태도에 루드비히가 묘한 얼굴로 웃었다.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하지만 짐이 계집인 널 그렇게 인정하는 것에는, 네가 인정을 받을 만한 무언가를 짐에게 먼저 내밀어야지. 그것이 순리이지 않겠느냐.”

“그것이라면…….”

“칼은 꽤 다루기 어려운 놈이지. 가진 것은 많고, 욕심은 없거든.”

“…….”

“그놈을, 로드리고를 네가 쥐고 있다는 것은 꽤 찬사를 받을 만한 일이다.”

‘쥐고 있다.’ 비올레타는 황제가 이미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

“그것도 자진해서 네 뒤에 서 있는 꼴을 보면. 허나 그 결론에 일로벨라가 있었고, 짐이 있었다는 것을 너 또한 알겠지. 너는 그에게 최선이 아닌 차선이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비올레타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루드비히가 픽 웃으며 낮게 덧붙였다.

“그리고 널 보는 그 눈을 보면, 어느 정도 사사로운 이유도 있는 것 같고. 물론 그것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루드비히의 말은 마치 비올레타가 칼을 제 능력다운 능력이 아닌, 여자로서 한시적으로 붙잡고 있다는 듯 폄하하는 투였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은 채로 잠자코 루드비히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래서 아직 짐이 인정할 수 있을 만큼 네 가치가 족한지는 알 수 없구나. 그러니 사소한 증명이 필요할 것이다.”

“말씀하십시오.”

“클레이런스 후를 네 사람으로 만들어 오라.”

비올레타가 그대로 굳었다.

“그러면 네 그 가능성이든, 인정이든, 네가 원하는 것을 네게 돌려주마.”

루드비히가 서느렇게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후작께선 출타하셨습니다.”

“……지금?”

비올레타가 황당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바깥은 이미 한참 전에 밤의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클레이런스 가의 노련한 집사는 얄미울 정도로 난감한 기색 없이 대꾸했다.

“네, 그렇습니다, 전하.”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낮에 오면 낮에 없고, 밤에 오면 밤에 없고, 아침에 오면 아침에 또 없고. 그런 상황인 거죠? 일주일째?”

“공교롭게도 황녀 전하께서 찾으실 때마다 그렇군요.”

“후가 여기에 기거하긴 하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말이지 공교롭게도 황녀 전하께서 오실 때마다 후작 각하께선 출타 중이시지 않겠습니까. 저희로서도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공손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뻔뻔한 영감탱이. 비올레타는 가늘게 홉뜬 눈으로 늙은 집사를 노려보다 뒤돌아섰다. 이럴 거면 불이라도 꺼 놓든가. 당당하게 창가에 불은 환히 밝혀놓고 나 여기 없소, 라니.

비올레타는 첫 방문 이후 일주일째 아무런 소득 없이 제 궁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첫 방문 땐 10분이나 앉아 있었던가. 비올레타의 장황한 구애 및 요청에 그는 딱 한마디로 대답했었다.

싫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쭉 이래 왔다. 만나 주지도 않았다. 이쯤 되니 이쪽에도 남은 거라곤 오기뿐이었다. 사실 클레이런스 후의 며느리가 루이즈의 언니라는 관계도를 따져 봤을 때, 비올레타는 굳이 이렇게 계속 무식하게 들이대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올레타가 이 고전적인 방법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해맑게 꼼수를 들이밀기엔 에델가르드와 클레이런스의 사이가 썩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직하기라도 해야 했다. 보이는 것이 정직할수록 보이는 성의도 비례하는 법이었다.

물론 일부러 보란 듯이 소문나라고 그러는 것도 있고. 비올레타는 심드렁한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다. 일주일이나 소득 없이 이런 식으로 버티고 있는 것은 정말 제가 생각해도 쇼에 가까웠다. 그럴듯한 핑계도 있다. 그 핑계가 이미 널리 퍼져 나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군사학에 흥미가 있던 5황녀가 클레이런스 후의 저서를 접하고 깊게 감명 받아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정치적 이해관계마저 뛰어넘은 배움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있노라고.

아무리 제가 지껄이고 다닌 말이라지만 정말 갖다 붙이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다. 비올레타는 새삼스레 스스로가 뿌듯해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디아나가 떫은 표정으로 비올레타의 자가 칭찬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실 거예요?”

“뭘?”

“후작께서 계속 이런 식이시라면요.”

비올레타는 멀뚱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이쯤 되면 성의는 보인 것 같지?”

“네?”

“열흘. 이대로 열흘만 채우고 문서로 넘어간다.”

비올레타의 목소리는 마치 그러면 해결될 것처럼 단호했다.

“그렇게 넘어가면 후작께서 승낙하신다고 하십니까?”

“몰라.”

“…….”

“부인이 의심해서 집안에 분란이 생길 정도로 보내 주겠어.”

“…….”

“그래서 진작 날 만나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그러지 마세요. 진짜 영영 안 될 것 같잖아요.”

정말 남은 건 오기뿐이었다. 이젠 다 필요 없고 그 얼굴부터 봐야겠다. 비올레타는 다시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장기전이 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비올레타는 정확히 열흘째 되던 날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새벽 5시부터 개인 응접실에 쳐들어가 농성한 결과였다. 그로부터 두 시간여가 지났을 때 후작은 질린 얼굴로 나타났다.

“클레이런스 후.”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설치고 다닌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올레타는 상쾌하게 웃었다. 그 환한 미소에 클레이런스 후는 미간을 좀 더 깊게 접었다.

“드디어 집에 계시다니, 기뻐요.”

“정말 이러셔야 합니까?”

“일전에 뵈면서 제가 후의 『전략론』을 읽고 얼마나 감명을 받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후의 가르침을 받고 싶은지에 관해서는 모두 말씀드렸죠.”

“…….”

“그러니 거두절미하고 오늘은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어요. 이제 그만 저를 제자로 받아 주…….”

“싫습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비올레타는 쳇, 하고 보이지 않게 입술을 삐죽이고는 이내 싱긋 웃었다.

“그러지 말고 받아 주세요.”

“싫습니다.”

“당분간 수도에서 한가하신 것 다 압니다.”

“제 휴가는 전하 좋으라고 받은 휴가가 아닙니다.”

“제게 많은 시간 할애하실 필요 없어요. 귀찮게 엮일 일 없이, 그저 그 책 한 권만.”

“이미 열흘간 충분히 유난 떠셨고, 충분히 엮여 있습니다.”

“어머, 그러면 이왕 엮인 김에 제게 가르침을 주시면서 엮인 보람을 느끼시는 건 어떨까요!”

잘됐다는 듯이 손뼉까지 치는 꼴에 후작의 주름이 깊어졌다.

“……제정신입니까?”

비올레타가 손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설핏 찌푸렸다.

“어차피 후작은 한 번 버린 몸이에요.”

“…….”

“에델가르드 공이 이미 그 손을 거쳐 가지 않았나요?”

“그러고 보니 버린 게 맞군요.”

“그렇죠? 그렇죠?”

“그렇다고 두 번 버리고 싶진 않습니다.”

“아니, 라키엘은 가르쳐 줘 놓고 저는 왜 안 받아 줘요?”

“앞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한 번은 실수였고, 두 번은 없습니다.”

후작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일어섰다. 그리고 사납게 말했다.

“저는 전하께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후작은 조금만 더 있으면 침보다 더한 것도 불사할 기세였다. 비올레타의 앞으로 싸늘한 축객령이 내려졌다. 비올레타는 지금이 바로 치고 빠질 때임을 깨달았다. 본래 목표 역시 진지한 설득보다는 끈기 있는 열의를 표현하는 데 있었으므로 이 정도의 거절을 들은 것은 만족스러웠다. 거절이 이어질수록, 그 거절이 승낙으로 바뀌는 순간 이야기도 극적으로 변할 테니까. 이러다 진짜 거절로 끝나 버리면 그야말로 비극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생각보다는 훨씬 괜찮은 반응이었다. 비올레타는 응접실에서 버티고 있던 모습과는 딴판으로 선선히 웃으며 일어섰다.

“클레이런스 후.”

또 뭐냐는 시선이 비올레타를 향했다.

“저는 될 때까지 할 거예요.”

“…….”

“조만간 또 뵙죠.”

비올레타가 빙그레 웃었다.

“언니가 그러는데, 황궁 관리국의 루케인 경이랑 그렇게 친하다고…….”

클레이런스 후를 방문과 서면으로 설득한 지 2주차에 접어들 무렵, 비올레타는 비로소 정도正道를 벗어날 권리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어떤 수작을 부려도 정성인 것이다. 그 결과 비올레타는 위와 같은 루이즈의 신빙성 있는 정보를 참고하여 황궁 관리국으로 향했다. 클레이런스 후의 처남이자 절친한 친우라는 그를 만나기위해.

사실 비올레타는 새벽 농성이 성공했던 그 날 이후로 클레이런스 후의 머리털조차 보지 못했다. 수작이라기엔 그 귀한 얼굴 마주할 방법이 이제 이것뿐이니 좀 초라하긴 했다. 비올레타의 극적인 계획은 비극을 향해 순조로운 항해 중이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제게 그리 말씀하셔도…….”

남자는 곤란한 듯 말을 흐렸다. 비올레타가 어깨를 힘없이 늘어트리며 물었다.

“역시 경께는 힘들겠죠.”

“아, 아니, 그게 어찌 힘들기까지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전하도 아시다시피…….”

남자가 제 입으로 힘들지 않다고 말한 순간 이미 결론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올레타는 한결 더 힘 빠진 얼굴을 하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후작께서 흔쾌히 저를 받아 주실 수 없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아직도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딱 제 늦둥이 막내딸 또래의 황녀가 한껏 기죽은 얼굴로 중얼거리는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려 루케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친우를 생각한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겠지만, 그의 돌아가신 부친이 에델가르드에 몇 번 신세를 지기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저렇게 귀한 몸으로 무작정 떼를 쓰는 것도 아니고, 배움을 위해서 저보다 낮은 사람에게 간청까지 한다.

반듯한 인상에 서서히 망설임이 떠올랐다. 그리고 비올레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딱, 한 번만 더 만나서 간청 드리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건 이것뿐인데…….”

만난다는 말에서 좀 더 간절한 어조로 힘주어 말한 비올레타가 미련이 그득 묻어나는 눈으로 루케인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해 줄 일은 오직 그 만남밖에 없다고, 그건 아주 쉬운 일이라고 비올레타는 눈으로 빠르게 덧붙였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루케인은 찌푸린 얼굴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가 약속해 줄 일도, 부담해야 할 일도, 미안해야 할 일도 없다. 그저 이전의 만남과 같이 비올레타가 그 앞에 서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거절이야 제 친우가 알아서 할 테고, 이미 몇 번 면전에서 거절한 것 그냥 한 번 더 만나는 것뿐인데 그게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또 거절하면 되는 일이었다. 제가 이 황녀를 한 번 돕는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루케인은 제 책상으로 돌아가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겼다. 그리고 비올레타에게 내밀었다.

“그와 저녁을 함께하기로 약속되어 있는 시간입니다.”

“경…….”

“이 시간에 맞추어 루케인 가로 오십시오.”

“경, 내가 안아 줘도 될까요?”

“안 됩니다.”

루케인은 사색이 되어 비올레타에게서 비켜섰다. 비올레타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종이를 곱게 접었다. 그리고 숙연한 얼굴로 들어올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화사하게 웃으며 그의 집무실을 나갔다. 루케인은 조금 어리벙벙한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휘말린 것 같은 건 기분 탓이리라.

비올레타는 그렇게 발걸음도 가볍게 관리국 청사를 나섰다. 이제 남은 것은 며칠 후에 있을 접선에서 얼마나 제가 진지한지를 피력하는 것과, 이번에도 거절하면 과연 어떤 결과가 기다릴지에 관한 자세한 협박 내역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비올레타는 특히 후자에 관하여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제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익숙한 얼굴을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전하.”

비올레타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가, 제 앞에 선 사람을 알아차리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카르트가 옅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돌아왔군요.”

비올레타는 해사하게 휘어진 눈매를 멍하니 훑다 이내 똑바로 마주친 연청록색 눈동자에 조금 막힌 숨을 내쉬었다. 이카르트가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먼저 찾아뵙는 게 도리였겠지만 제 책상을 받은 것도 어제라 미처 경황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이제 막 돌아온 데다 중책까지 맡아 많이 바쁠 텐데.”

“중책이라 말씀하시니 꽤 민망합니다. 전하께선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이전과 같은 장난기는 전혀 없는 깍듯한 인사치레였다. 마치 파티에서 만난 귀부인들에게 기계적으로 똑같은 인사를 반복하는 것처럼. 비올레타는 그 의례적인 인사에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그 후로도 의례적인 말이 몇 번 오고 갔다. 본래의 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조금 쌀쌀맞게 느껴질 정도의 대화였다. 비올레타는 까슬까슬한 숨을 겨우 삼켰다.

화가 났을까. 화가 났을 것이다. 당연했다. 그가 고모인 3황비의 결백을 모를 리 없다. 더불어 비올레타가 진범을 알면서도 그 결백을 모른 체했다는것 역시 알 것이다. 비올레타는 그간 잊고 있었던 불편한 구석을 떠올렸다. 이카르트가 제 이름 뒤에 어떤 성을 달고 있었든지 간에, 비올레타에게 있어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는 일 년 반이나 강제 칩거 당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지나치려는 이카르트를 비올레타가 다급히 잡아챘다. 이카르트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그제야 비올레타가 아는, 그의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조금 안도했다.

“축하해요.”

“…….”

“회계 감사관, 이라고 했죠.”

“감사합니다.”

이카르트는 복잡한 얼굴로 웃었다. 비올레타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경이 돌아와서 기뻐요. 정말로. 걱정했거든요.”

도서관에서 얼굴을 붉히던 소녀와, 정치적 이해관계로 거짓 정황을 믿는 척하던 황녀.

그 일련의 사태에서 제 고모가 딱히 억울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카르트는 비올레타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제가 아예 몰랐을 수도 있었고. 사실 진짜 그녀를 몰랐던 것이든 그녀가 변한 것이든 제가 그녀를 예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은 잘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 눈치를 살피는 여자는 그녀에 대한 첫 기억에 가까웠다. 그녀가 피아노 뚜껑을 잘못 내렸다가 이카르트가 손을 다쳤을 때, 그녀는 거의 2주 가까이 이런 얼굴로 그를 바라봤었다. 이카르트는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혹시 제게 미안하십니까?”

이카르트의 물음에 비올레타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인적이 없는 주변을 힐끗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제 고모는 억울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전부터 이미 많은 일을 해 왔으니까요. 어쩌면 그렇게라도 돌아온 게 다행일 정도로.”

“…….”

“그러니 전하께서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전하께 화난 적도 없거든요.”

“경, 하지만.”

“이 배지 보이십니까?”

이카르트가 장난스럽게 제 칼라에 달린 배지를 가리켰다. 손톱만 한 황금색 배지는 고위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비올레타가 피식 웃었다. 이카르트가 과장된 손짓으로 제 배지를 쓸며 말했다.

“아마 지금까지 부지런히 일했어도 이런 승진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다 잘 해결된 거죠.”

“……이제 그렇게 큰일 하시는 분이니 다시는 경에게 피아노 배울 일이 없겠군요.”

“그럼요. 이제 황녀 전하의 음악 교사나 하는 한량 노릇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바쁜 몸입니다.”

이카르트는 짐짓 거만하게 입매를 끌어 올리며 비올레타를 내려 보았다. 그 모양이 우스운지 비올레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편안한 공기가 흘렀다. 그를 물끄러미 올려보던 비올레타가 나직하게 물었다.

“우리, 여전히 친구죠?”

리듬이 미세하게 어긋나듯 이카르트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카르트는 늦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매끄럽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비올레타가 다이닝룸에 들어서기 무섭게 클레이 런스 후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비올레타의 등장에 아는 체 예를 차리는 대신 고개를 돌려 제 친우를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루케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나 비올레타에게 예를 취했다. 후작이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쳤다.

비올레타는 그 싸늘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자연스럽게 루케인의 예를 받으며 클레이런스 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우아하게 시종의 시중을 받던 비올레타가 루케인을 흘끗 바라보았다. 루케인이 눈치껏 시종을 물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 뒤로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비올레타는 후작의 사나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후작이야말로 제가 이렇게까지 하게 하셔야 합니까?”

“적반하장이 따로 없으십니다. 지겹지도 않습니까?”

“아직요. 후작께선 꽤 지겨워 보이시네요.”

“…….”

“이제 그만 포기하실 때도 됐을 텐데.”

“그 말 그대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포기하십시오.”

“싫어요.”

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후작이 대강 입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비올레타가 앞을 막아서듯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루케인의 난감한 시선이 둘 사이를 처량하게 방황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죠. 저는 될 때까지 할 거라고.”

“포기를 모르는 것이 반드시 미덕은 아닙니다. 그 목적이 남에게 강요를 해야 이루어질 땐 더더욱이요.”

“누가 강요를 이리 볼썽사납게 뒤꽁무니 쫓아다니며 하나요? 후는 이제 고작 제게 얼굴 세 번 보여 준 게 답니다. 이건 간청이고 애원이죠.”

“애원하는 것치곤 퍽 당당하고 뻔뻔하십니다.”

“비굴한 계집은 후께서도 싫어하실 겁니다.”

“제가 성가신 계집을 어찌 생각하시는지도 알아두시는 게 좋겠군요. 그보다 갑절은 싫습니다.”

점점 살벌해져 가는 대화에 루케인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 다이닝룸을 나섰다. 루케인이 방을 나가고 문이 조심스레 달칵 닫히는 소리가 나자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차갑게 내리깐 시선이 그녀를 응시했다.

“5황녀.”

지독한 피로로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비올레타는 비로소 그가 제게 어느 정도 맞춰 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올레타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내 아비가 어찌 죽었는지 압니까.”

“…….”

“781년, 황녀 전하의 부황께선 내 아비를 개처럼 끌고 와 황제의 홀에 묶어 두고, 제 목숨보다 아끼던 조카 셋이 버러지처럼 죽는 걸 보게 했습니다. 그 곁에서 제 자식이 모두 죽는 걸 지켜본 고모님은 그 자리에서 자결했고, 내 아비는 그날 돌아와 음독자살했습니다. 그땐 이미 황태자께서 죽은 지도 오래되었고, 그로서 황녀가 일전에 찾아왔던 클레이런스의 그 저택에는 오로지 나만 남아 있었습니다. 클레이런스에, 오로지, 나만. 그 절망이 얼마나 끔찍한지 짐작하실 수 있습니까.”

비올레타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후작이 삐뚜름하게 입매를 들어 올렸다.

“사람이 죽어도 가문까지 죽을 수는 없으니, 너는 부디 죽은 듯이 살라. 내 아비는 그 큰 종이에 단 한 줄의 유언을 쓰고 죽었습니다.”

“…….”

“때로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 평생입니다.”

“후.”

“평생을 겪어 온 그 끔찍함의 크기만큼, 나는 황제와 에델가르드가 끔찍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산물인 황녀가 지극히 불쾌합니다.”

“그래서.”

비올레타가 무표정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그래서 후의 잘난 아드님도, 후처럼 평생을 변방만 도시게 할 작정입니까?”

비올레타의 조용한 물음에 후작이 조금 굳었다.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후의 평생이 끔찍하다고 하셨죠. 그러니 그 끔찍함은 후에게서 끝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그것을 황녀가 끝낼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시는군요.”

“그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러기 위한 것이니까.”

그녀의 말에 후작이 비웃듯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싸늘하게 비꼬았다.

“계집 주제에 거창한 말씀을 잘도 하시는군요.”

“황위 계승권을 가진 계집이죠. 그것도 유일한 적통인.”

비올레타의 태연한 대꾸에 그가 조금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와는 달리 지나치게 대수로웠다. 후작은 그녀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제게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아십니까?”

“여제가 되겠다는 말이죠. 그리고 후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건, 그러기 위해서 후를 가지고 싶다고 한 말이고요.”

말갛게 웃는 얼굴로 가볍게 내뱉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황당한 듯 그녀를 바라보던 후작이 이내 실소했다.

“내가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왜 도와야 합니까.”

“그럼 아드님도 후처럼 평생을 그리 죽은 듯이 사셔야 합니까.”

“…….”

“말도 안 되는 건 지금 아드님의 위치겠죠. 아드님의 능력은 그의 아비인 후께서 제일 잘 아실 겁니다. 그러나 그의 처지는 지금 어떤가요. 후께서는 아드님 나이에 수도의 군권까지 쥐어 보셨는데, 아드님은 지금 고작 젠트리 출신 대령의 지휘에 따르는 중간 장교죠.”

“아들은 나를 이을 것이고, 그의 영예는 클레이런스의 인장으로 충분합니다.

뿌리 깊은 긍지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 긍지가 그가 말하는 그 끔찍한 일생을 걸어서라도 지킬 가치가 있었던 것일 테다. 비올레타는 무언가 잡아냈다는 듯 그에게 보이지 않게 슬며시 웃었다.

“제가 끔찍한 이유는 후에게 있어 폐하가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폐하를 있게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시작은 에델가르드였으되 스무 해 넘게 그의 칼이 된 것은 카디링거였고, 또한 그의 더러운 개인 베론이 있습니다.”

“…….”

“후께서는 폐하께서 치세하신 만큼의 시간이 에델가르드가 숨죽여 산 세월과 같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후작은 말이 없었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테이블을 돌아 그에게로 다가갔다. 알 수 없는 시선이 부딪쳤다. 비올레타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제 외숙이 죽었고, 오라비가 죽었고, 제 십삼 년이 죽은 겁니다.”

나직한 한마디에 서린 독기를 눈치챈 후작이 기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 속에서 비올레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1황자의 카디링거, 4황자의 베론. 모두 그대가 끔찍해 하는 황제의 뒤틀린 빛 속에 살아온 자들입니다. 그러나 후께선 그 빛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왔죠. 그리고 나도, 에델가르드 공도. 우리는 모두 그 지독한 그늘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

“후, 우리는 결코 다른 선상에 있지 않습니다.”

후작의 얼굴은 여전히 하나도 읽어 낼 수 없었지만, 비올레타는 곧 그를 가지게 되리라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카디링거가 황제를 위해 한 일들이 얼마나 추악한지, 베론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후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들의 황제, 그들의 제국은 과연 후의 긍지가 견딜 수 있는 것입니까?”

“…….”

“후, 여기서 악연은 끝내요. 내가 그대와 그대 아들의 최선입니다.”

우아하게 엘데르디움에 들어선 비올레타는 제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곧바로 침실로 뛰었다. 라키엘은 마침 오수午睡 중이었다. 카일이 조금 기다리셔야 할 거라고 했지만 비올레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침대에 길게 누워 있는 인영을 발견한 비올레타의 눈이 번뜩 빛났다. 비올레타는 뛰어가던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그대로 그 위를 덮쳤다.

“라키엘! 됐어요! 됐어요!”

라키엘을 껴안은 비올레타의 목소리는 더없이 상쾌했지만 불시에 습격을 받은 라키엘은 그렇지 못했다. 흉부에 받은 커다란 충격에 라키엘의 얼굴이 설핏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내 제 위에 올라탄 여자의 머리를 확인하고 느슨하게 풀렸다. 라키엘의 손이 자연스럽게 비올레타의 허리를 쓸어내리며 엉덩이 바로 위까지 내려갔다. 비올레타는 해맑게 웃으며 그 손이 제 엉덩이를 덮기 전에 찰싹 내리쳐 뿌리쳤다. 그리고 뿌리를 뽑듯 몸을 일으켜 라키엘의 곁에 앉고는 제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라키엘은 무안한 기색도 없이 비올레타에게 내쳐진 손을 내밀어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에게는 익숙한 필체였다. 그 성정만큼 날카롭고 정갈한. 라키엘은 피식 웃고는 언제 제 저택에 오라는 일방적인 약속 한 줄만 덜렁 쓰여 있는 서신을 본래대로 단정하게 접었다.

“봤어요? 봤어요?”

봤으면 빨리 잘했다고 말하는 게 좋을 거라는 무언의 압박이 라키엘에게 쏟아졌다.

“한 줄인데 안 보려고 해도 안 볼 수가 없지.”

라키엘은 제 옆에 서신을 대충 두고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비올레타는 아직도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라키엘이 물끄러미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물었다.

“그렇게 좋아?”

“말이라고 해요? 내가 그 영감한테 공들인 거 못 봤어요?”

“봤지.”

“꼬박 스무날도 넘게 공들였어요. 그 저택 사용인들 이름까지 외울 지경으로.”

“알아. 잘했어.”

라키엘이 손을 들어 비올레타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게 문득 개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비올레타는 지금 기분이 좋았으므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라키엘은 피곤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비올레타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키스하며 침대를 벗어났다. 비올레타가 침대에 놓인 클레이런스의 서신을 가라앉은 시선으로 힐끗 보고는 라키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서신 한 장에 느끼는 성취감이랑은 별개로, 사실 뭔지 모르겠어요.”

“뭐가?”

베드 테이블 위에 풀어놓은 타이를 집으며 라키엘이 짧게 물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어요. 최대한 후와 옛날 얘기 배제하고 과거 같은 건 모른 척하면서, 황제에게 내세울 만한 최소한의 연관성만 가지면 됐었는데, 애초에 그 정도만 바랐고, 클레이런스의 그 후작은 그 정도만 내줘도 감지덕지할 정도인 사람이었고. 그런데…….”

비올레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라키엘의 능숙한 손길이 셔츠 칼라를 세우고 타이를 맸다. 비올레타는 별 의미 없는 시선을 그의 손짓에 던졌다가 이내 얕게 숨을 삼켰다.

“그가 먼저 들춰냈나? 안 된다고?”

“네. 날 떼어 내려고요. 그때 그 영감님, 거의 인내의 한계였거든요.”

“불가능한 이유랍시고 내민 걸, 넌 역으로 가능한 핑계로 밀어붙인 거고.”

“본능적으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거의 마지막 선고나 다름없었고,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놓치고 나면, 그 사람이 나한테 다시는 틈을 주지 않을 테니까.”

“그랬겠지. 스승님 성정에.”

라키엘은 타이의 끝을 단단하게 잡아당기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레타의 표정이 흐려졌다.

“실마리 하나 잡자마자 혓바닥 놀릴 수 있는 최대한 놀렸고, 그래서 잡았는데, 어느 순간, 문득, 깨달은 거예요.”

“뭘?”

“……수풀 속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처음부터 길 위에 있었다는 느낌이요.”

“그러니까, 전부 황제가 의도한 순대로 움직인 거다. 이거지.”

라키엘이 제 말을 명료하게 되짚자 비올레타는 고개를 얕게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 의도가 불안해요. 도무지 그 의도의 출처를 알 수가 없어서.”

그러나 그는 비올레타의 말에도 딱히 동요하는 기색 없이 그저 비올레타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비올레타가 그것에 위화감을 느낄 무렵 라키엘이 입을 열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황제에게 아직 ‘비올레타’는 속 다 드러낸다고 몸 사릴 처지가 못 되지. 그런 의미에서 넌 지나칠 정도로 잘했어.”

라키엘의 지나칠 정도로 잘했다는 말은 순순히 칭찬으로 알아듣기엔 모호했다. 그 불신을 알아챈 라키엘이 픽 소리 내 웃었다.

“잘했다는데 왜 그래.”

“당신 원래 잘 비꼬잖아요.”

“내가? 너한테?”

“아, 특별히 나한테 더요.”

비올레타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라키엘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라키엘의 입술이 아까 키스했던 비올레타의 관자놀이에 그대로 닿아 부러 쪽쪽 소리까지 내며 뽀뽀했다. 그는 그게 부정 대신이랍시고 한 모양이지만, 비올레타는 어쩐지 놀림 받는 기분과 더불어 정신까지 사나워져서 그를 밀어냈다. 그 생짜 치워 내는 손짓에, 라키엘이 그 사이를 파고들어 끝끝내 입술에 쪽 크게 소리 내 입 맞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비올레타는 무어라 말하려다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네가 말하는 그 길이라는 게 처음부터 길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무슨 말이에요?”

어느새 제게 집적대던 남자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 있다. 비올레타는 시야를 가늘게 좁혔다. 라키엘은 제 소매에 커프스 버튼을 단정하게 채우며 말했다.

“클레이런스 후는 그가 평생 단 한 번도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한 사람이지. 그래서 황제는 적어도 그 길 위에 널 올려두고 시작할 수 없어. 적어도, 그 클레이런스로 향하는 길 위에는.”

“그러면.”

“이리저리 살펴봤는데 딱히 다른 구덩이를 파 놓은 것 같지도 않아.”

“…….”

“널 수풀 속에 던져 놓고 네가 수풀 속에서 그 길을 찾아낼 수 있는지를 지켜본 거지.”

비올레타가 클레이런스 후에게 제시한 제 가치는, 그녀가 황제 앞에서 아양을 떨던 것과 정반대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순을 황제 역시 잘 알고 있으리라. 비올레타는 불안한 시선을 들었다.

“클레이런스와 에델가르드의 이해관계의 접점 정도는, 어차피 황제에겐 뻔한 사정이야. 네가 정말 그 무식한 간청으로 표면적인 수업 두어 시간 따왔더라도 황제는 그 뻔한 사정이 개입되지 않았으리라 생각 안 해. 중요한 건 그 뻔한 사정에 클레이런스 후가 넘어올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고, 넌 그걸로 그를 잡았다는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해 봤으니까.”

비올레타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는데?”

“이해관계 다 늘어놔 가며 아무리 설득을 해도 포섭이 전혀 안 되기에, 그냥 처음으로 되돌렸어.”

“되돌렸다니…….”

“어려서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는 척했지. 사실은 처음부터 제대로 아는 게 없었던 척. 계속.”

“…….”

“네가 스무날 동안 클레이런스 후를 귀찮게 했다면, 열두 살의 난 넉 달은 그 짓을 했지. 정말로, 고작 그 책 한 권이라도 배우고 싶어서.”

비올레타는 문득 지금보다 훨씬 작은 열두 살의 라키엘이, 그 무서운 남자 앞에서 부렸을 생떼를 생각하며 웃었다. 라키엘이 마주 웃었다.

“그럼 내가 당신보다 더 대단하네요.”

비올레타가 뻐기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라키엘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그래, 열두 살짜리 이기니 좋겠군.”

“열두 살이라도. 라키엘이잖아요.”

비올레타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위로 뻗었다. 원하던 곳까지 닿지 못하고 허공에 멈춘 손을 라키엘이 의아한 듯 바라보자 비올레타가 몸을 조금 숙여 보라는 듯 눈짓했다. 라키엘이 긴 허리를 굽혔다. 비올레타가 단정하게 잘 매인 타이를 잡아 제게로 당겼다. 비올레타는 당연한 수순으로 목을 길게 뻗어 입을 맞출 것처럼 애태우듯 천천히 움직였다. 마주한 남자의 시선이 조금 흐트러진 것을 발견한 여자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비올레타는 그의 입술을 스쳐 올라가 그의 관자놀이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그가 저를 놀리듯 했던 것과 똑같이.

“내가 이겼으니까.”

비올레타가 보란 듯이 웃고는 라키엘을 놓고 도망쳤다. 한두 번 휘말린 것이 아니었으니 혹시나 모를 역습을 대비한 날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이미 침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고, 언제나 라키엘이 그녀보다 빨랐다는 점이다. 결국 비올레타는 한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잘했다.”

클레이런스의 서신을 받아 든 루드비히는 짤막하게 말했다. 비올레타는 라키엘 앞에서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일말의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는, 비올레타가 클레이런스를 갖길 원한 것은 아닌가.

“혹시, 소녀를 안배해 주셨습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비올레타가 대놓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말없이 웃었다. 비올레타는 그 웃음에 조금 확신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기대할 것이 없었다. 순수한 호의라고 보기엔 어려웠고, 보상하겠다던 말을 기억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 황자들을 체스판 위의 말처럼 늘어놓았듯, 비올레타를 체스판 위에 올라가게 만들었을 뿐인지도 몰랐다. 비올레타는 착각하지 않겠다는 양 겸손하게 마주 웃었다.

“언제 나설 거지?”

“아직은 부족함이 많아…….”

“확실히 지금이 적절한 시기는 아니겠지. 짐의 인정이야 네가 원하는 때에 채권처럼 내밀면 되는 것이다.”

“……저를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까?”

“클레이런스 후를 네 사람으로 만들어 오면, 가능성이든 인정이든 네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리라 짐이 말했었지. 그대로다.”

“…….”

“사람들은 잊어버렸지만 황녀의 계승권은 애초에 황실이 성문으로 정해 놓은 법이다. 어려울 것도 없지.”

비올레타는 조금 망연하게 눈을 깜빡였다. 루드비히가 매끄럽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네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 네가 원하는 때에.”

비올레타가 예도 잊고 루드비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무릎을 굽혀 예를 취했다.

접견실을 나선 비올레타가 바깥의 협실에서 기다리던 밀로일라를 만나 복도를 걸었다. 접견실 복도를 처음 걷는 밀로일라가 바짝 굳어 말 한마디못 하는 사이, 비올레타는 루드비히의 말들을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정갈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는 시종들 사이로, 이질감이 느껴지는 존재를 발견했다. 비올레타의 시선이 남자의 옅은 회갈색의 머리칼에서 겨울 호수처럼 냉랭한 얼굴로 움직였다. 비올레타는 단 한 번도 그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예상한 적 없는 난감한 마주침이라 비올레타가 걸음을 멈춰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동안, 밀로일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속삭였다.

“4황자예요.”

알아.

비올레타는 낮게 대꾸했다. 제 숙부와 사촌을 앞세운 후 이제야 수도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싸늘한 시선이 비올레타의 얼굴 위에 한 번 닿았다. 비올레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킬리안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의 곁을 지나쳐 갔다. 스치는 바람이 선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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