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4장>
보라색 드레스 자락이 아침 서리 맺힌 잔디 위를 스치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길 위로 바람이 한 번 낮게 불었다. 싸늘한 겨울 공기를 실은 바람이 목을 시리게 파고든다. 비올레타는 목에 두르고 있던 매끄러운 잿빛의 담비털을 좀 더 여미며 걸었다. 야윈 가지마다 어느새 눈꽃이 피었다. 희게 물든 나무 사이사이로 비치는 흐린 겨울 햇빛이 비올레타의 적갈색 머리칼 위로 드문드문 아스라이 부서져 내렸다. 사방이 하얀 풍경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이질적이었다.
그런 비올레타의 양옆으로 길쭉하니 높은 하얀 나무들이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정작 그곳에 선 비올레타는 그 나무의 아득한 끝을 바라보지조차 않았지만, 맞은편에서 비올레타에게로 다가오고 있던 칼은 퍽 감탄했다. 그 익숙한 얼굴에 조금 홀린 듯, 저도 모르게 잠시 멈춰서 그녀를 바라봤을 정도로.
해가 바뀌고 수번의 계절이 지나, 이제 열아홉의 끝에 선 황녀는 마치 평생을 고귀하게 산 여자처럼 그 손끝까지 우아했다. 칼은 그것을 문득 충격처럼 느꼈다. 외형적으로 그리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이토록 다르게 느끼는 것이 신기했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한 척 굴면서도, 때때로 얼굴 위에 그대로 드러내고 말던 영악한 성질머리를 꽤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했다. 칼은 조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도 가늘게 뜬 눈으로 자신과 점차 가까워지는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이전과 같되, 전혀 다른 여자.
이윽고 둘의 거리는 몇 걸음을 남겨놓을 만큼 가까워졌다. 눈이 정확히 마주치고, 칼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어린 총기로 반짝이던 짙은 암녹색 눈동자는 이젠 조금 무심해 보일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또래 영애들에게선 보이지 않을, 수많은 것들이 켜켜이 쌓인 묘한 눈동자.
“칼.”
듣기 좋은 울림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칼이 웃었다. 서로 대동한 수행인 하나 없는 장소였으니 잡다한 격식은 필요 없었다. 그리고 이젠 꽤 편안해진 사이이기도 했다. 비올레타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자, 칼이 그녀의 손등 위에 정중하게 키스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근한 목소리로 낮게 물었다.
“다시 청혼할까.”
여유롭게 고개를 드는 남자의 조각 같은 얼굴 위로 묘하게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비올레타를 괴롭히거나 놀릴 때 으레 짓곤 하는 악질적인 표정이었다. 비올레타가 심드렁하니 한숨처럼 대꾸하며 칼을 지나쳐 걸었다.
“로드리고, 이제 철들 때도 됐잖아요. 난 당신이랑 엮이는 거 지긋지긋해요.”
보폭을 맞춰 걸으며, 칼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난 재밌었는데. 뭐가 문제였지?”
“그 지긋지긋한 청혼 들먹이면서 나 놀리는 것도 그만둬요. 후 이제 그럴 나이도 지났잖아. 쓸데 없는 장난으로 엉뚱한 데서 청혼 남발하지 말고, 어서 결혼이나 해요.”
“그 귀찮은 짓을 왜 해.”
벽처럼 돌아오는 대답에 비올레타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가 귀찮아요. 영애들한테 괜히 나 팔아먹고 다니면서 나한테 버림받은 비련의 남자주인공 행세 좀 말고요. 무슨 비극 배우도 아니면서.”
“난 괜찮은데.”
“아니, 내가 안 괜찮다니까. 굳이 그런 행세까지 해 가며 여자를 만날 이유는 또 뭐야.”
“트레비안 영애의 말로는, 실연의 아픔에 잠겨 있는 내 모습이 자기도 몰랐던 자기 안의 모성애를 일으킨다더군.”
진짜 연극배우라도 된 마냥 부러 가식적이고 과장되게 소리 낸 목소리였다. 비올레타가 같잖은 듯 코웃음을 쳤다.
“모성애가 그렇게 그리우시면 고모님이나 자주 뵈러 가지 그래요. 자기 모친을 두고 왜 엄한 데서 모성애를 찾아요?”
“비교 불가능해. 엄연히 다른 차원이지. 사실 생각보다 동정 받는 기분도 꽤 괜찮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들이붓는 연민이라 그런가.”
최근 자신을 스쳐 갔던 수많은 여자들의 진심 어린 관심과 연민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시에 짓밟는 말이었다. 비올레타는 혀를 쯧 찼다.
5황녀가 공식적으로 로드리고 후의 청혼을 거절한 것은 불과 반년 전의 일이었다. 성년 연회에서 시작된 가볍고 유치한 스캔들은 꽤 진지한 형태로 이어졌다. 에델가르드 공과 로드리고 후가 5황녀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더라, 로 시작되었던 소문은 결투로 각색되었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5황녀가 청혼을 수락하지 않자 사람들은 스캔들의 형태를 꽤 구체적으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존재한 적도 없는 로드리고 후의 마음이 생겨나고, 그 마음이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변모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에델가르드 공과 5황녀의 관계가 연인으로 이미 정립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다 청혼을 공식적으로 거절하자…….
“무엇보다 그 허상이 편리하거든. 내가 너를 사랑했고, 그 사랑이 실패했고, 그 실패한 사랑에 아직도 내가 허우적대리란 그 기발하고도 말도 안 되는 허상.”
“…….”
“그 허상 덕분에 적당히 골라 가볍게 만나면서도, 상대 영애 측에선 결코 내가 자신을 가볍게 만나리란 상상을 못 하지. 자신이야말로, 저 남자가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신중하게 선택한 아주 어려운 시도 같거든.”
지금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비올레타는 장황하게 늘어지는 그 괴이한 편리함에 대한 예찬에 한심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질척하게 굴기 시작하면,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아무래도 난 아직도 황녀 전하를 잊지 못하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돼.”
“아, 진짜 징그러워.”
“그리고 당신은 그보다 더 좋은 남자에게, 더 나은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
더 좋은 남자에게, 비올레타를 묘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그렇게 낮게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비올레타는 칼이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자에게는 거의 늘 저런 목소리로 말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거의 본능적인 종류의 것이다. 비단 여자를 홀리는 목소리뿐 아니라, 그는 사실 여자에게 태생적으로 다정했다.
물론 그 역시도 자신에겐 아니었지만. 비올레타는 전혀 가치 없는 장난을 넘기듯 무심한 얼굴로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칼이 픽 웃었다.
“안 통하네.”
“그 홀리는 목소리는 후의 여인들에게나 실컷 써요.”
“질투 안 하나?”
“더 이상 날 징그럽게 만들면 용서 안 할래요.”
“난 네 덕분에 혼사가 막혔는데.”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칼이 혼담을 거절한 것만 해도 비올레타가 아는 것이 벌써 다섯 번이었다. 핑계는 똑같았다.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하겠다. 그 핑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닭살이 오소소 돋아, 비올레타는 팔을 쓸며 칼을 힐끗 노려보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다시 사무적인 어투로 돌아온 비올레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실은 칼, 당신이 해 줄 일이 있어요.”
칼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귀찮을 거 같군. 미리 거절하지. 싫어.”
“언제는 미래의 주군이라더니.”
“아직은 고작 내 핑곗거리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긴 한 듯 칼은 바로 옆까지 걸음을 맞춰 다가왔다.
“델 포르데의 사주社主, 알죠? 그가 선대 로드리고 후에게 크게 신세 진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편한 자는 아닌데.”
“상관없어요. 후가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래서. 말해 봐.”
“동전 한 닢에 신문 하나를 살 수 있다던데.”
“하도 헐값이니 노동자들이 좋아라 하긴 하지. 그래서 많이 팔리고.”
“델 포르데에 몇 주째 1황자에 대한 기사가 지나치게 실려요. 전후 예측도 너무 낙관적이고, 승리는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전하께선 그런 것까지 지켜보나?”
생각만 해도 성가시다는 듯 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델 포르데의 기사들을 사들인 게 틀림없어요. 다른 신문사였다면 내버려 뒀겠지만, 델 포르데는…….”
“그 신문을 읽고 있는 대상들을 생각한다면, 그만큼 효율적으로 광범위하게 죄 퍼져 나가기도 힘들지.”
“그러니까 막아야 해요. 사주가 꽤 완고해서 우리와는 협상하려 하지 않아요. 하지만 후는 다를 테니까…….”
비올레타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이 지불한 값보다 더 비싸게, 그 기사를 사 와요.”
“내가 사 오면.”
“대가는, 에델가르드 공이 알아서 지불할 거예요.”
“그다지 달갑진 않군.”
“달가울 거예요.”
“네 생각이야?”
“절반쯤은. 사실 이건 그가 당신 얼굴 보기 싫어서 나한테 떠넘긴 거지만.”
“제가 내 얼굴 보는 것보다, 네가 나랑 같이 있는 게 더 싫을 텐데. 드디어 공께서 정신 중 어딘가가 나갔나 보군.”
“아직은 멀쩡하니까 걱정 말아요. 라키엘!”
라키엘을 발견한 듯 비올레타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칼이 고개를 돌려 라키엘을 찾았다. 그러나 라키엘은 커녕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길에 의아할 찰나, 멀리서 느릿하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칼이 뻣뻣하게 입매를 굳혔다.
“……설마 저게, 그 라키엘…… 인가?”
“예쁘죠?”
점점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매끈하게 잘 빠진 흑마黑馬였다. 칼이 실소를 짓다가 이내 진지하게 물었다.
“그 대단한 자가, 자신의 이름이 말에나 붙어 있는 걸 알기는 해?”
“알아요.”
예상을 빗겨 가는 대답에 칼의 표정이 좀 더 이상하게 변했다.
“싫어하지 않나?”
“싫어해요.”
“그런데?”
“상관없죠. 말 주인은 나고, 이름을 붙인 것도 나고, 이름을 부르는 것도 난데.”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비올레타가 싱긋 웃었다. 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걸 참을 정도란 말이지.”
칼의 가늘어진 눈매가 비올레타를 천천히 훑었다. 칼은 조금 초조하게 계산을 해 보다 점차 느긋하게 생각했다. 그래, 아무리 저 여자라도 말과 동명이물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밀니로의 원군이 출정한 지도 어느덧 1년이, 그리고 계절이 한 번 더 흘러 겨울이 되었다. 잉거스트가 멸망한 지는 어느덧 2년에 가까워졌고, 잉거스트로 출정한 그란토니아의 군사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제국이 어떤 전쟁에 관련되어 있고, 때때로 어떤 곳에서 그란토니아의 남자들이 죽어 가기도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기묘한 평화였다. 수도는 지극히 평화로웠다. 가끔 전쟁터에서 날아드는 승전보는 그날 밤 축배를 들 기분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그저 그런 날 중에 하나에 불과했다. 마리굴라 전투에서 1황자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도착하기 무섭게 카디링거가의 초대장이 곳곳으로 날아들었고, 사람들은 겨울 들어 가장 큰 파티가 열리는 것에 열광했다.
승전 기념 파티라고는 해도 승리의 주인공은 여전히 전쟁터에 있는 군인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주인공이 없는 카디링거가의 파티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올레타였다. 1황자의 하나뿐인 동복 여동생은 머나먼 타국에 있었고, 3황비가 비올레타에게 독살을 시도했다는 것이 들통 난 이후로, 혹은 그렇다고 결론지어진 이후로 그녀의 소생인 4황자는 수도를 쭉 떠나 있었다. 결국 수도를 지키고 있는 황제의 자녀라고는 비올레타와 6황자뿐이었다.
그리고 6황자는 이런 자리를 버티기에는 아직 지나치게 어린 아홉 살짜리 아이였다. 비올레타는 제 곁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이의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헤집고 들어간 손가락이 이내 다정하게 아이의 머리칼을 빗어 내렸다. 이윽고 조금 단정해진 머리칼 위로 비올레타가 고개를 내려 짧게 키스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하?”
비올레타의 근처에서 영윤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던 디아나가 비올레타가 일어선 것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돌아가시게요?”
“이 정도면 성의 표시는 충분히 된 거 같아서.”
“하지만 지금 자리를 떠나기엔…….”
“차라리 지금처럼 정신없을 때 눈에 안 띄게 사라지는 게 나아.”
“전하는 어차피 어떻게 하셔도 눈에 안 띄실 수 없어요. 지금도 엄청 주목받고 계시거든요.”
디아나의 칼 같은 대꾸에 픽 웃고 만 비올레타가 고개를 돌려 이안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안이 잠들었어. 데려가야지.”
“황자 전하라니, 좋은 핑계네요. 게다가 적절하기도 하고요.”
“핑계라니.”
“이렇게 불편한 자리는 어린 황자 전하를 핑계로 일찍 벗어나면서도, 6황자 전하를 친히 챙기시는 다정한 모습도 보여 주실 수 있을 테니까.”
“뭐, 나쁘진 않지.”
사실 디아나의 말처럼 작정하고 계산한 적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도 같아 비올레타는 별다른 부정 없이 가볍게 어깨만 으쓱했다. 그리고 마치 수풀 속에서 경로를 탐색하듯 가늘어진 눈으로 사람들 사이를 응시했다. 잘 자고 있는 아이를 굳이 깨워 걷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비올레타는 아이를 안고 나갈 작정이었다. 이안은 몸이 약한 제 어미를 닮아서인지 몸집이 또래에 비해 훨씬 작은 편이었고, 비올레타도 어렵지 않게 안아 들 수 있었다.
비올레타는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에 앞서 아이를 안고 어떤 지점들을 통과하는 게 더 극적일지 재어 보았다. 이안을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다각도로 두루 잘 보이되, 성가신 이들은 없는 지점들. 비올레타는 이내 그 몇몇 곳을 잡아내고, 아이를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아이가 잠투정을 부리듯 무어라 웅얼거리며 비올레타의 품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비올레타가 옅게 웃었다.
은근히 쏟아지던 시선들이 비올레타가 홀 안을 걸어갈수록, 그녀의 뒤에서 좀 더 직접적인 무언가로 변했다. 비올레타는 그것을 모른 체하며 이안을 단단히 안고 걸었다.
사실은 그저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아이를 두기엔 끔찍한 곳이었다. 속은 여전히 메스꺼웠다. 파티를 가득 메운 화려한 색채는 비올레타의 머릿속에서 역한 모양새로 뒤엉켰다. 본능적인 공포와 불안이 손끝을 싸늘하게 타고 기어 올라온다.
‘비올레타’를 죽이려 했던 이들. 혹은, 이미 죽인.
비올레타는 갈로이스 쪽을 보고 입술을 짓씹었다. 아이를 안은 손이 반사적으로 좀 더 단단하게 아이의 몸을 감싸 안았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마치 그때의 환각처럼 비올레타의 시야 속에서 거꾸로 한 번 돌았다. 그 뒤틀린 시야 속에서, 거짓말처럼 갈로이스가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숨이 탁 차오르며 멈추었다.
비올레타는 싸늘하게 굳은 입매를 천천히 매끄럽게 끌어 올려 웃었다. 그리고 최대한 곧은 시선으로 앞을 응시하며 걸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빨라지는 걸음은 당당하고 여유로워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늦추었다. 몇몇 친근한 얼굴에 먼저 인사하고, 우아하게 인사를 받는 일련의 과정이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겨워질 즈음, 비올레타는 디아나와 함께 홀을 벗어날 수 있었다. 겨우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라, 바깥에 나와 있던 몇몇 영윤들이 조금 놀란 얼굴로 비올레타에게 다가왔다.
비올레타는 모른 척 바쁜 모양새로 그들을 지나치려다 멈칫 멈춰 섰다. 그들 중에 루이즈가 짝사랑하는 펠론 백의 영윤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즈를 도와준답시고 몇 번 말을 나눈 적도 있는 사이였기에 비올레타는 이안을 고쳐 들며 반가운 양 활짝 웃었다. 루이즈가 그를 만났을 때 그와 사소한 대화거리나마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비올레타가 자신을 알아보자 펠론이 반색했다.
진짜 이렇게 사려 깊은 상관이 대체 어디 있담. 루이즈 얘가 이런 내 값비싼 노력을 알아야 할 텐데.
비올레타가 속으로 그렇게 자화자찬을 하는 사이, 비올레타와 가까워진 펠론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자 어둠 속 어스름한 빛을 받고도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사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흐뭇할 만큼 잘생겼기도 했다. 눈요기하기에는 꽤 괜찮지.
“벌써 가십니까? 파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보시다시피, 이안이 잠들어서요.”
“전하께서 나오시는 걸 보고 걱정했습니다. 혹시 몸이 안 좋아지셨나 하고요.”
“그럴 리가요. 이안도 이렇게 안고 다니는걸요.”
비올레타의 말에 펠론이 아차, 하는 얼굴로 비올레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자 전하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어찌 이렇게 힘든 일을. 도와 드리는 영윤이 저 안에 아무도 없었습니까?”
펠론은 급기야 화를 낼 기세였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아무리 비올레타가 힘든 기색이 없어 보였다고는 해도, 황녀가 아홉 살이나 된 황자를 직접 안고 가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비올레타는 안에서 지겹도록 거절한 것을 떠올리고 얕은 한숨을 쉬었다.
“제가 모두 거절했어요. 이안을 직접 돌보고 싶어서요. 괜찮아요.”
“하지만 여기 장정만 몇인데, 어찌 그 가련한 손으로…….”
가련한 손, 이라는 말에 비올레타는 순간 말문이 막혀 흠칫했다.
“황자 전하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괜찮…….”
“제가 미덥지 않으시면 다른 건장한 영윤들도 여기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황자 전하를.”
“아니, 그대는 충분히 미더워요.”
“그렇다면 어서 제게―.”
“진짜 괜찮아요.”
“저희가 괜찮지 않습니다. 부디 저희를 위해서 황자 전하를 내려 주십시오.”
더 거절하기도 이젠 지겨웠다. 마침 펠론과 그의 친구들 외엔 지켜보는 이도 없는 것 같아 비올레타는 못 이기는 척 이안을 넘겨줄까 생각했다. 사실 파티를 벗어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기도 했고, 슬슬 이안을 안고 있는 게 힘들어지던 참이었으니까. 그렇게 비올레타가 이안을 펠론에게 넘겨주려던 찰나였다.
그들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팔이, 이안을 그들에게서 가로채듯 데려갔다. 비올레타의 시선이 이안을,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 이안을 안고 있는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남자는 말없이 펠론에게 고개만 까딱하고, 뒤돌아 걸었다. 잠깐 멍하니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영윤들에게 대충 인사하고 남자를 잔걸음으로 따라갔다.
“라키엘?”
“…….”
“라키엘, 당신이 여기 왜 있어요?”
“너 데리러.”
라키엘은 짤막하게 대꾸하고, 밑으로 자꾸만 쳐지는 이안의 엉덩이를 받쳐 올렸다.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생각보다 꽤 자연스러웠다. 비올레타가 신기한 듯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와.”
“뭐?”
“당신도 아이를 안을 줄 아네요. 신기해.”
“……대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애를 안고 있는 게 신기하지?”
비올레타가 무어라 대꾸하려는 찰나, 설핏 잠에서 깬 이안이 칭얼거렸다. 라키엘은 성가신 표정으로 이안의 뒤통수를 잡고 제게로 세게 끌어당겼다. 어린 황자의 얼굴이 라키엘의 가슴에 처박히듯 묻혔다. 비올레타가 황당한 얼굴로 황급히 이안의 등을 쓸며 말했다.
“설마 그렇게 한다고 애가 다시 잘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뭐가 문제냐는 양 무표정하게 비올레타를 바라보던 라키엘이 고개를 숙여 이안에게 정중하게 속삭였다.
“다시 주무십시오, 황자 전하.”
“…….”
“왜?”
“말을 말죠.”
도저히 다시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다행히 금세 기절하듯 잠들었다. 아이가 생각보다도 훨씬 더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곁에 붙어 걸으며 이안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라키엘이 묘한 눈으로 그 손을 바라보다가, 제 팔을 계속 스치듯 부딪치는 둥근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던 시선이 조금 더 올라가 찬 공기에 발개진 뺨을 응시했다. 비올레타는 그것을 모른 채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펠론 가 영윤과 시선 신경 안 쓰고 말 좀 나눠 볼 기회였는데.”
라키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이내 기가 찬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
“평소엔 그럴 기회가 없었거든요. 항상 곁에 사람이 많은 남자니까.”
“기회?”
평이한 어조와는 달리 라키엘의 얼굴이 조금 살벌해졌다. 그러나 오로지 이안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는 비올레타로서는 그 변화를 알 턱이 없었다. 비올레타가 이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그대로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말 안 했던가요? 루이즈가 그 영윤 좋아한다고요. 루이즈가 도와 달라고도 하고, 그래서 좀 도와주려는데 그 영윤이 인기가 많아선지, 보는 눈이 많을 땐 괜히 루이즈도 아닌 날 엮어서 오해하려 하니까…….”
라키엘은 비올레타의 뒤이은 말에 조금 맥이 풀린 듯 실소를 내뱉었다. 아마도 오해가 아닐 것이다. 실상 남자의 시선은 명백한 대상을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라키엘은 그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얼굴을 떠올렸다. 라키엘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가, 이내 멀리 보이는 남자를 발견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의 마차 앞에 다다랐다. 라키엘이 기다렸다는 양 마차 속에 이안을 욱여넣듯 아무렇게나 집어넣었다. 비올레타가 라키엘을 흘끗 노려보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 이안을 제대로 누이고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준 뒤 다시 내렸다. 그리고 황자의 유모가 마차에 타는 것을 확인하고, 마차가 떠나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라키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라키엘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아 제게로 당기며 입을 맞췄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숨이 끌어당겨 졌다가, 다시 스며들었다.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 숨을 받아마셨다. 그 자연스러운 반응에 라키엘이 입술이 맞물린 그대로 묘하게 입매를 끌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녀를 혼내려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아프게 꽉 깨물었다. 아픔으로 비올레타의 입술이 좀 더 벌어지자,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혀가 한 번 깊게 얽혔다가 곧바로 떨어졌다.
집어삼킬 듯 다가온 것과는 달리 키스는 짧고 담백했다. 속이 조금 시렸다. 파도가 속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비올레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라키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는 조금 변했다. 틈 하나 없이 차갑고 단단한 그 눈동자가, 어떤 순간에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게 된 건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그 새까만 눈동자가 어떤 순간에는 누그러지고, 어떤 순간에는 온기를 띈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이 오로지 자신을 향한 것이고, 그것이 보통 애정이라 부르는 것에 가깝다는 것. 그 눈길, 그 손길, 그리고 지금.
그러나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올레타는 복잡한 얼굴로 웃었다. 설렘은 젖은 모래로 쌓아올린 성처럼 속을 가득 채우다가도, 파도가 치면 그대로 휩쓸려 내려갔다. 여자는 더 이상 파도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저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모래밭 위에서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비올레타’로서 자신은 좀 더 완벽해졌다. 해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서 가짜는 진짜에 좀 더 가까워졌고,남자는 아마도 가짜가 진짜에 가까워진 만큼 ‘진짜’를 좋아하게 된 것이리라.
그럼에도 그 진심에 기대고, 어리석게 그 진심이 제 것이리라 착각하고 싶은 것은, 세상에 오로지 이 남자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대 뒤에 남겨진 자신을 아는 유일한 사람.
비록 그가 무대 위의 자신을 좋아한다 할지라도.
“얼마 남지 않았다던데.”
파사칼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라키엘이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시선을 들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디링거의 그 늙은 여우 말이다.”
파사칼리아가 와인을 한 모금 삼키며 잇새로 낮게 이죽거렸다. 라키엘은 표정 없는 얼굴로 의자에 깊게 기대며, 들고 있던 와인잔을 천천히 놓았다.
“모를 일입니다. 언제 숨통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네지만, 그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기 시작한 것도 벌써 몇 년은 되었고. 그 질긴 숨이 이젠 지겨워서.”
“그러니 이젠 정말 죽지 않겠니.”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속삭이듯 대꾸했다. 라키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들으셨습니까?”
“어제 새벽에도 카디링거 후의 주치의가 긴급히 불려 갔고.”
“그것은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후작을 보고 말하길, 이제 더 이상은 아무것도 손쓸 방도가 없다고 했단다. 고작 몇 주.”
“잘됐군요.”
라키엘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의자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켜 허리를 세웠다. 평온한 죽음에 속이 뒤틀렸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평온함이란, 육신의 고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딘가 고장 난, 오래된 물건처럼 그저 천천히 혼자 멈추는 것.
마치 목구멍에 커다란 얼음이 걸린 것처럼 시린 숨이 드나들었다. 실상 카디링거 후가 지금 죽어 주는 것은 라키엘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빌키어스는 수도에 없었고, 카디링거의 작위 승계가 안정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그러나 그가 자신의 아비를 죽인 것처럼, 자신이 그를 죽이지 못한 채로 그의 끝을 맞닥뜨리는 것은 그다지 상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분명 머리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가장 합리적인 결말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정적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평화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막연한 살의는 언제나 존재했다.
저 꺼져 가는 숨을, 저 입을 잠시만 틀어막으면 될 텐데. 저 무력한 목덜미에 칼만 찔러 넣으면. 내 손으로 직접 저 새끼를 죽일 수 있다면.
이런 생각들은 지나치게 당연했지만, 모순적이게도 딱 그만큼 비합리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라키엘은 그것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라키엘은 제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어떤 오점도, 결점도 없이. 에델가르드는 할 수 있는 최대한 그래야 했다.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이 뒤집힐 때, 에델가르드만은 얼룩 한 점 없이 꼿꼿이 허리를 펴고 있도록.
“그래. 잘됐지.”
파사칼리아의 말끝이 희미하게 갈라졌다. 그리고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 달싹이던 파사칼리아의 입술이 이내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라키엘은 조금 막막한 얼굴로 파사칼리아가 행복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이윽고 그녀와 가까워진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방 안을 가득 메우던 싸늘한 분위기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죽은 미하일의 궁에 멍하니 앉아 죽어 가던 여자는 이제 없었다. 그들은 이미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돌아오고 있었다. 파사칼리아도, 자신도. 라키엘은 거짓말처럼 해사해진 파사칼리아의 얼굴을 복잡한 눈으로 응시하다 이내 웃었다. 파사칼리아를 향해 있던 시선이 이윽고 라키엘에게로 떨어졌다.
라키엘과 눈이 마주친 비올레타가 빙긋 웃고는 파사칼리아의 곁에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비어 있던 식탁 위로 음식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늦었죠. 오전 수업이 조금 길어졌어요.”
“나야 금방 왔고, 라키엘은……. 뭐, 라키엘이야 얼마나 기다리든 상관없잖니.”
파사칼리아가 다정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파사칼리아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라키엘이 기가 막힌 듯 실소를 흘렸다.
“고모님, 장담하건대 여기서 제 시간이 제일 귀할 겁니다.”
“그럼 어마마마 시간은 하찮다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비약이 심하군.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귀하고 덜 귀하고의 문제지.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네 시간은 하찮아.”
“맙소사, 세상에, 어마마마 들으셨어요? 에델가르드 공께서 지금 저더러 하찮다고…….”
연극 속 배우마냥 과장된 어조로 말하며, 비올레타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파사칼리아가 맑게 웃음을 터트리며 비올레타의 앞으로 스프 접시를 끌어 주었다.
“어서 스프부터 한술 뜨렴. 날씨가 얼마나 추운데. 힘들었지?”
“제궁 바로 앞에서 마차 타고 오는 게 뭐가 힘듭니까?”
“맞아요.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그러니 저는 어마마마께서 주신 이 스프 한술 먹을 자격도 없네요.”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말에 수긍하는 척 풀죽은 얼굴로 과장해 비꼬았다. 파사칼리아가 짐짓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며 웃었다.
“라키엘?”
라키엘이 피곤하다는 듯 얕게 한숨을 쉬었다.
“고모님, 곧 스물입니다. 계속 이렇게 오냐오냐 받아 주시다가 버릇 망칩니다. 그걸 아셔야…….”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비올레타가 멀리 있는 음식으로 손을 뻗자 라키엘은 반사적으로 그 접시를 비올레타 쪽에 밀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파사칼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평상시와 같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가 정찬 속에서 이어졌다. 비올레타가 괴로워하는 고전과, 그 교수에 대한 험담이 이야기의 주를 이루었다. 비올레타는 종이 위에서 번진 잉크가 잔뜩 묻은 손날을 들어 보이며 툴툴거렸다. 얄타 뫼르겐에 의해 이루어진 강제적 필사筆寫의 흔적이었다. 비올레타의 말에 파사칼리아는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웃었고, 라키엘은 몇 번이고 그녀를 타박했다. 평온했다. 마치 처음부터 이래 왔던 것처럼, 지극히 당연하고 온화한 시간이 흘렀다.
카일의 부름에 라키엘이 방을 나선 이후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시종들이 급작스레 커다란 궤짝을 들고 방 안에 들어서기 전까지.
비올레타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사이 그들은 비올레타의 앞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사람이 드러누워도 될 만큼 길고 큰 궤짝이었다. 파사칼리아가 아직도 어리둥절해 있는 비올레타를 이끌고 궤짝 앞으로 가서 섰다. 이윽고 비올레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게, 다…….”
궤짝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머나먼 동국의 비단들이었다. 아무 재단도 되지 않은 비단을 그저 늘어놓았을 뿐인데도 색색의 선명한 빛깔은 그 자체만으로 화려했다. 비올레타는 여기서 당장 손을 뻗어 한 가지 색만 집어내도, 그 하나가 제 여름 드레스 몇 벌보다 비싸리라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바로 그런 것이 지금 제 눈앞에 수십 가지나 있었으므로.
“다 널 위한 거란다. 겨울동안 하나씩 지어 놓고, 봄에 예쁘게 입으렴.”
“하지만, 이미 옷은 충분히 많은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십 벌이나 사 주셨잖아요.”
“수백, 수천 벌을 사 줘도 네겐 아깝지가 않아. 그리고…….”
파사칼리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비올레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끝이 너무 애틋해 비올레타는 순간 멈칫했다.
“세상의 모든 귀한 옷을 네게 입혀도, 네 부족했던 세월이 그것으로 족하다 하겠니.”
파사칼리아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비올레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파사칼리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궤짝 속 비단들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옷감들 사이로 빛바랜 기억이 스쳤다. 해어지고 닳은 분홍색의, ‘비올레타’의, 파사칼리아의 다정한 손이 비올레타의 등허리를 끌어 제게로 당겼다. 멍하니 기억을 더듬으며 이어가던 생각이 뚝 끊겼다. 어미의 팔이 딸을 안았다. 비올레타는 당연한 것처럼 손을 들어 파사칼리아를 마주 안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생일 축하한다.”
비올레타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에비가일.”
제가 아닌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미처 파사칼리아의 등에 닿지 못한 손이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허공에 멈췄다. 파사칼리아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멍하니 뜬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제 부관을 보내고 가라앉은 얼굴로 방에 다시 들어서던 라키엘이 파사칼리아와 눈이 마주치며 문가에 그대로 멈춰 섰다. 그를 등지고 있던 비올레타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물기 어린 눈에 숨이 꽉 막혔다가, 이내 화사하게 웃는 얼굴에 목구멍에 막혀 있던 숨이 바위가 떨어지듯 바닥에 떨어졌다. 행복해 보이는 그 미소가 생경했다. 제게 무어라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라키엘은 대강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놓인 궤짝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파사칼리아가 들뜬 얼굴로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곧, 그 아이의 생일이니까…….
라키엘은 천천히 제 손에 들린 봉투를 프록코트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직한 숨을 뱉으며 마른세수를 한 뒤, 매끄럽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헨리에테의 글에 따르면,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러니 사랑은, 그것을 설령 잃게 되더라도 그대로 존재한다는 데서 그 의미를…….”
폴제 부인의 진지한 말이 이어졌다. 비올레타는 경청하는 척 얕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리깐 눈으로 제 손 안의 와인잔을 응시했다. 확실히 그녀에게 재밌는 주제는 아니었다. 그녀의 빈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볼루아 백작부인이 그녀에게로 다가와 우아하게 와인을 따라 주었다. 투명한 상아색 액체가 잔 속으로 떨어졌다.
“화이트와인을 좋아하시죠.”
“고마워요, 볼루아 부인.”
비올레타의 감사 인사에 볼루아 부인이 찡긋 웃으며 제 자리로 갔다. 볼루아 백작부인은 몬드리올의 비밀 살롱에서 만난 여자였다.
이제 갓 삼십 대에 접어든 귀부인은 비올레타를 유독 좋아했다. 비올레타에게 가장 순수한 호감을 보이며 다가온 이기도 했다. 그 호감을 비올레타가 깨닫게 된 것은 제가 지금 앉아 있는 살롱에 초대받았을 때였다.
볼루아 부인은 그 대단한 몬드리올의 살롱에서 만난 사람답게 그녀 역시 유명한 살롱을 둘이나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사교계에서의 입지가 대단했다. 그녀에게는 남편의 출세를 위한 대외적인 살롱이 하나 있고, 그녀의 개인적인 사교를 위한 살롱이 하나 있었는데, 비올레타가 앉아 있는 살롱은 그중 후자에 속했다. 법관, 시인, 여류작가, 외교관, 철학자, 화가가 낭만적인 철학과 금지된 책을 이야기하는 자유분방한 공간.
가문에 기치에 따라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몬드리올의 살롱과는 달리, 볼루아의 살롱은 정치적인 이야기도 곧잘 화제에 오르곤 했다. 사람들은 주제가 떠오르면 다양하고 쉽게 이야기했다. 어느 정도 정치색을 띤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격 덕분에 비올레타에겐 오히려 가장 편안한 모임이기도 했다. 비올레타에게는 지식인들의 여과되지 않은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으므로. 여기에 앉아 있으면 고상하게 멈춰진 지식들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움직이는 활자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더불어 자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세상에 퍼트리는 사람들이기도 했고. 비올레타는 폴제 부인의 말이 끝나자 자연스레 와인잔을 무릎 위로 내리며 말했다.
“그녀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아요.”
“어떤 의미인지 감히 여쭈어 봐도 괜찮을는지.”
대법관 후보에 올라 있는 법관 파라베르였다. 비올레타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그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질문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물론 살롱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긴 했지만. 비올레타는 깊게 생각하지 않은 척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가볍게 내뱉는 말에 어떤 의미가 있을수록, 사람들은 더 의미부여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녀의 서술을 보고 있으면, 사실 그녀는 어떤 집에 머물다가, 어딘가로 떠나고, 그곳에서 또 다른 집으로 옮겨 가는 방랑자처럼, 어디에도 존재하고 싶지 않아 하죠. 그리고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에게 만족하고요.”
“이건 또……. 새로운 해석이군요.”
“그녀가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은 그녀가 어디에도 가만히 멈춰 있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해요. 스스로 어딘가에 존재하길 원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소유를 할까요. 하지만 사랑만은 부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고, 그 존재에 의미 부여까지 하죠.”
죽고 나서야 비로소 유명해진 헨리에테 프로제의 책은 비올레타의 본의대로라면 절대 붙잡고 있지 않았을 책이었다. 그리고 사실 처음 세 바닥을 제외하면 전연 본 적 없는 책이기도 했다. 그것이 그녀의 본의대로였다. 비올레타는 이런 사랑의 본질이나 인생의 바닥을 논하는 책에 쥐약이었다. 비올레타가 번지르르하게 말을 이으며 속으로 밀로일라와 디아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비올레타는 지금 그녀들의 평범한 감상을 부정적으로 비꼬아 말하고 있었다.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그래야 눈에 띄니까.
“대상이 없어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지만, 결국 그녀는 실연을 당하자 죽음을 택했죠. 실연, 달리 말하면 연인을 소유하던 기간이 끝났다는 거죠. 그녀에 의하면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인데, 정작 그녀는 그 소유의 끝을 견디지 못한 거예요.”
“날카로운 지적이군요.”
“그럼 그녀의 사랑은, 그녀의 정의에 따르면 사랑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명백한 모순이니까.”
볼루아 부인이 눈을 빛내며 물어 왔다. 기실 헨리에테 프로제의 책은 요사이 가장 각광받고 있는 책들 중 하나였고, 대부분의 감상이 호평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비올레타의 비평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의견이었다.
비올레타는 말을 고르듯 우아하게 와인을 들이켰다. 여기서 더 가면 매사 부정적인 인간으로 몰릴 위험도 있으니 슬슬 조절해야 했다. 적당한 궤변으로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사실 그게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정도의 뉘앙스를 풍겨 주면 끝이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요. 모순이겠죠. 하지만 나는 그 모순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녀로선 어쩔 수 없었을 테니까. 그녀가 트레스넬 다리에서 뛰어내린 건 정말 스스로 어쩔 도리가 없어서였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
“우리는 모두 그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게 당연한 척 살아갈 권리가 있으니까요.”
비올레타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는 꽤 인상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다. 살롱의 주인인 볼루아 부인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청중의 얼굴을 훑었다. 비올레타는 해사하게 웃으며 와인을 들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이었고, 그것은 가장 근사한 형태로 전해지리라. 철학자, 시인, 작가를 통해.
정작 제가 한 궤변 중에 스스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제가 헨리에테를 물어뜯은 만큼 누군가 제 말을 앞뒤 따져 가며 다시 물어뜯어 온다고 생각하면 좀 아찔해졌다. 하지만 비올레타의 마지막 말이 편리하게 막아 줄 것이니 걱정은 없었다. 모순이란 스스로 먼저 인정하기만 하면 참 편리한 것이니까.
바로 지금처럼.
비올레타는 제 몸에 덧대어진 비단을 보며 실없이 웃었다. 디아나가 기가 찬 듯 말했다.
“대체 이 비단들을 다 언제 쓰나요?”
“봄까지는 되겠지.”
비올레타의 목소리는 태평했다. 제가 가진 드레스가 이미 많다고 걱정하던 비올레타와 지금의 비올레타는 다른 사람이었다. 여자로 태어난 이상 이것은 숙명이었다. 예쁜 게 좋고, 드레스는 예뻤다. 적어도 30벌은 나오겠다는 티모어 부인의 말에 비올레타는 이미 계산을 끝냈다. 봄용, 가을용으로 색에 따라 모두 분류했으며, 색깔별로 남는 것들은 어떻게 조합하고, 그럼에도 남는 것들은 누구에게 거하게 인심 쓰듯 선물로 보낼 것인지.
“전하는 좋겠다아.”
루이즈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단순한 부러움이 아닌 어떤 소기의 목적을 담은 목소리였다. 비올레타는 그 명백한 의도를 타박할까 하다가, 그마저도 됐다는 듯 루이즈가 가장 좋아하는 하늘색의 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한 벌만 뽑고 너 주마.”
“진짜요?”
순식간에 목소리가 밝아지더니, 루이즈가 곁에 와서 살랑댄다.
“재단만 잘하면 네 것도 한 벌 뽑겠지.”
“소녀가 하늘색 좋아하시는 건 어찌 아시고.”
“말만 한 처녀애가 소녀는 무슨.”
비올레타의 타박에도 루이즈는 이미 저 하늘색 비단이 얼마나 남을 것이고, 또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비올레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가에 서 있던 카일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웃었다.
“쏜튼 경!”
“전하.”
어쩐지 예를 취하고도 멀뚱히 서 있는 모습에 비올레타가 문득 소란한 주변을 깨닫고 카일을 협실로 이끌었다. 카일의 뒤로 두꺼운 목문이 느릿하게 닫혔다. 묵직한 문소리와 함께 비올레타가 의자에 먼저 앉으며 물었다. 카일은 앉지 않았다.
“에델가르드 공은?”
“아마도 오늘 밤 중에는 돌아오실 것 같습니다.”
“아직도 칼디미어에 있어요?”
“그쪽에서 계속 시간을 끄는 탓에.”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라키엘치고 순조롭진 않네요.”
“이제 협상도 막바지에 들어섰으니, 더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어제 희망적인 소식도 도착했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비올레타가 옅게 웃자 카일이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차마 지켜보기 난감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비올레타가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쏜튼?”
“전하, 정말이지 그 일은……, 유감입니다.”
카일의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비올레타의 앞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비올레타가 미간을 찡그렸다.
“전하께서 애써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밝게 계시는 모습에는, 정말로 찬탄밖엔…….”
“……경,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양 비올레타가 의아하기만 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제야 카일이 설마,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마치 실수를 한 사람 같기도 했다.
“경?”
“……각하께서, 정말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까?”
그 물음을 듣는데, 순간 이유도 없이 가슴이 확 죄었다. 비올레타는 그것을 애써 모른 체하며 되물었다.
“정확히 말해요.”
“어머니 일…….”
그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비올레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카일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비올레타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놀릴 여유는 없었다. 비올레타가 표정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몰랐습니다. 모르시는 줄…….”
“내가, 뭘 모르는데요.”
“어머니께서.”
카일이 더 말하지 못한 채 말을 멈췄다. 비올레타의 집요한 시선이 그를 쫓았다. 추궁의 의미는 전혀 없었으나, 카일은 그 시선이 못내 초조한 듯 제 목을 쓸다가 이내 포기한 것처럼 한숨처럼 말했다.
“딜로아 부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
“일주일, 그보다 좀 더 되었습니다.”
“…….”
“겨울의 42일이었으니까…….”
제 생일 바로 전날이었다. 비올레타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 때문에?”
“가뜩이나 몸이 약해지신 탓에, 폐렴으로…….”
카일이 말끝을 흐렸다. 그 후로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카일은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고는, 다급히 말했다.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각하께서 직접 많은 것을 주관하셨고, 또…….”
“그만.”
“…….”
“됐어요.”
비올레타는 침착하게 카일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웃었다.
“경이 그리 곤란해 하지 않아도 돼요. 나가도 좋아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양 친절한 말투였다. 비올레타는 눈물 한 방울 없이 멀쩡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카일이 망연하게 예를 취한 뒤 협실을 나섰다.
방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비올레타는 무표정한 제 얼굴을 몇 번 쓸다가, 이윽고 협실을 나서려는 듯 문으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네 걸음.
단 네 걸음이었다. 그녀가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는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수도로 돌아온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방에 들어선 것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선 시각이었다. 어둠 속에서 침대 위에 웅크린 채 누워 있는 인영을 발견한 라키엘이 시린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자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라키엘은 그렇게 생각하는 제가 낯설었다. 생전 무언가를 이토록 회피한 적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나 비올레타는 방 안에 들어온 그의 인기척을 느낀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쪽으로 다가가기 위해 라키엘이 한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비올레타에게서 나직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왜 그랬어요.”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그 목소리에 멈칫 멈춰 서 있던 라키엘이 이내 몸을 돌려 촛등이 놓인 콘솔로 다가갔다. 라키엘이 성냥을 들어 사포에 대고 탁 그었다. 차분한 손길이 성냥을 촛등으로 가져갔다. 방 안이 조금 환해졌다. 비올레타는 생각 외로 그동안 아무 말 없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라키엘이 그나마 밝아진 방 안에서 비올레타에게로 다가갔다. 동요 없이 침착한 남자의 얼굴과, 엉망으로 망가진 여자의 얼굴이 마주했다.
라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비올레타의 얼굴을 뜯어보듯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는 눈길에 비올레타의 입매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왜 그랬어요.”
“…….”
“대체 왜 그랬어요. 나한테, 대체.”
라키엘에게선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비올레타가 짧게 웃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그냥,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죽었다고 나한테 한마디 해 주는 게.”
“…….”
“대체 뭐가 어려웠어요.”
잔뜩 억눌린 목소리 끝으로 울음이 새어 나왔다. 라키엘은 그제야 깨달았다. 제가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죽을 때까지 못 볼 거라더니, 나는, 내가, 내 어미가 언제 죽는지도 모르고 살아야 해요? 내가, 당신한테 내 인생 팔면서 바란 건 단 하나였어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이내 뭉개졌다. 비올레타가 네글리제 자락을 겨우 붙잡은 채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내 가족의 삶. 내 어머니가, 죽은, 걸 당신한테 애꿎게 화풀이하는 게 아녜요.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그냥, 왜, 알려 줄 수조차 없었냐는 거야. 나는 왜 알 수조차 없었느냐는 거예요…….”
“…….”
“내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는 매일 웃었어요. 그것도 모르고, 매일요. 살롱에 드러누워 웃고, 떠들고, 알 수 없는 얘기나 지껄이면서, 맛있는 걸 먹고, 술을 마시고, 호화롭게 드레스나 지어 입었죠. 아무것도 모르고, 내 어머니는 시체가 되어 땅에 묻히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로 말을 잇던 비올레타가 서러운 숨을 삼켰다.
“내가 그걸 들으면 다 팽개치고 도망이라도 갈 줄 알았어요?”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라키엘이 낮게 부정했으나 비올레타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채로 중얼거렸다.
“내가 정신 놓고, 내가 하던 일 다 놓고, 당신한테 이제 와서 폐라도 끼칠까 봐? 당신 일 다 망쳐 버릴까 봐?”
벌겋게 핏대 선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라키엘이 숨을 겨우 들이켜며 침대로 다가갔다.
“당신은, 당신은…….”
정말 착각할 뻔했다. 그게 진심이라고. 그 눈이 제 거라고. 어느새 잊고 멍청하게 착각할 뻔했다. 제 앞에 가까워진 라키엘을 덜덜 떠는 손으로 밀어내며 비올레타가 울었다.
“당신은 대체 날 얼마나 수단으로 보고 있는 거야…….”
‘수단’이라는 말에 라키엘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충격을 받은 것도 같았다. 라키엘은 삐걱거리는 시선을 겨우 내려, 저를 밀어내려는 듯 제 가슴에 닿은 비올레타의 손을 내려 보았다. 아무 힘도 없어서 조금도 그를 밀어내지 못하는 손인데도 라키엘은 이미 제가 멀찍이 밀려난 기분이었다. 맥박이 점점 더 불쾌하게 빨라졌다.
라키엘이 느리게 손을 들어, 비올레타의 두 팔을 잡았다. 비올레타가 저항하듯 그의 손에서 팔을 빼려고 움직였으나 라키엘이 그녀를 껴안은 것이 더 빨랐다. 라키엘은 일그러진 얼굴로 비올레타를 껴안았다. 그 품 안에서 비올레타가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것을 더 세게 잡아 안으며, 라키엘이 속삭였다.
“네가, 이렇게 우는 게…….”
“…….”
“보기 싫었다. 네가, 이렇게 울까 봐 무서웠다. 멍청한 것 알아. 그래도.”
“…….”
“그래도 어려웠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고통이 스며들었다.
“미안하다.”
차마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는 이름을 입안으로 삼키며 라키엘이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올레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차라리, 그때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걸.
돌이켜보면 ‘그때’는 많았다. 사실 그녀가 죽을 수 있는 순간은 많았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말하는 ‘그때’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순간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언제나 막연한 것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오래전 목소리가 귓가를 부드럽게 속삭였다.
에비, 차라리, 엄마랑 죽을까.
딜로아의 오래된 성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에비가일이 태어나는 해에 아버지가 심었다던 아름다운 동백나무가 드리워진, 작고 아름다운 핀스치의 정원. 그곳은 제 평생의 모든 행복이 그대로 잠겨 있는 곳이었다. 보물을 가득 실은 채, 오래전 바닷속에 침몰한 배처럼.
그리고 에비가일이 열네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창가에서 권총으로 머리를 쏴 그곳에 떨어져 죽었다. 딸을 위해 심어 놓은 동백나무 앞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생전의 모습을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형체였다. 그나마 남아 있던 저택의 사용인들이 아버지의 시체를 치워 내는 것을 본 뒤, 잔디에 들러붙은 아버지의 잔해 속에서 어머니는 멍하니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우리도 죽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우습게도 그녀는, 그렇게 사랑하던 제 아버지가 머리가 다 터진 채 차가운 땅에 처박힌 꼴을 보고도 살고 싶었다. 열네 살의 에비가일은 그랬다. 일흔이 다 된 백작이 제 몸을 만지며 웃어도 에비가일은 살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살고 싶었고, 그러니 어머니가 제 곁에 살아가길 바랐고, 어머니 곁에서 동생들이 살아남길 바랐다. 그것뿐이었다.
정말로, 그것뿐이었는데…….
바닥에 억지로 가둬 놓고 묻어 둔 기억이 떠올라 느릿하게 흩어졌다.
“‘그때’ 죽었어야 하는 건 사실 나였어요. 그렇죠?”
라키엘의 얼굴이 밀랍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었다.
“당신은, 어마마마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지만 알고 있어요. 사실은, 정말로 내가 죽었어야 했어요. 진짜, 비올레타가, 당신 곁에 있었으면, 이딴 조잡한 사기극 없이도……. 어쩌면 그 불쌍한 애와 같이 죽기라도 했더라면, 아니…….”
“…….”
“당신이, 그날, 그냥 날 죽였더라면.”
비올레타는 조곤조곤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왜 살고 싶어 했을까요. 결국은, 이런 건데.”
어머니는 계속 죽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죽은 자리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죽자는 말만 반복했다.
“죽자고, 지금 죽으면 될 거라고, 밤새도록 그랬어요.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밤새도록, 어머니가, 그러다가…….”
비올레타는 평온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와는 달리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그 낮은 온도만큼, 피가 차갑게 식어 갔다. 라키엘은 불에 덴 듯 뜨겁기도 하고 시체를 안은 것처럼 차갑기도 한 제 품안의 여자를 떨리는 손으로 안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어요. 그…….”
그 늙은 백작이 날 찍어 누르고, 내 드레스 자락을 잡아 올리는 걸 보고 나서야.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으며 그를 내게서 떼어 놓고 나서야.
“그렇게 죽고 싶어 하던 사람한테 살자고, 어머니 제발 나 좀 살려 달라고.”
어머니는 살아서 내가 그 늙은이의 침실에 들어가는 걸 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평생을 귀하게 꽃처럼 산 사람이 도망자 신세가 되고, 주방 구석에 종일 서 있는 처지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아노 곁에 서서 노래를 몇 곡 부르는 것도 힘겨웠던, 본디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결국 어머니의 생을 갉아먹은 건 뭐였을까.
“어쩌면, 그때 같이 죽는 게 어머닌 행복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로, 어머니 말대로, 차라리 그때.”
“말도 안 되게, 그런 말…….”
“사실은, 아버지가 그렇게 죽었더라도, 수도만 오지 않았으면.”
라키엘은 감각이 없는 손을 겨우 들어 비올레타를 좀 더 깊게 안았다.
“내가, 그 늙은이와 결혼만 했더라면. 그래서 고향에서, 계속 편히, 그럼 어머니는 내가 죽는 꼴도 보지 않고, 이렇게 오랫동안 아프지도 않고…….”
비올레타는 더 이상 울지도 않고, 그저 그랬노라고 말했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어머니를 살릴 수도 있었어요. 내가 이기적이었던 거죠.”
“제발.”
“비올레타도, 당신도,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몰라요. 내가 지금처럼, 당신의 처지를 성가시게 하는 일도 없고.”
라키엘이 이를 악물고 비올레타를 제게서 떨어트렸다. 그의 얼굴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고통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사실은 네가, 죽었어야 했다고?”
지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힘겹게 물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기묘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처음 봤던 그날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그 물음에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줄까.”
“…….”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해.”
비올레타는 고요한 시선을 들어 라키엘의 눈을 마주했다. 라키엘은 그 죽은 시선을 그대로 응시하며, 제 끔찍한 밑바닥을 처음으로 열었다.
“네가 아니라, 그 계집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를 뿌리 깊은 죄책감이 발끝부터 타고 올라와 목을 졸랐다. 그 가시가 피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파사칼리아는 어미가 없던 제게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고, 그 계집은 그녀의 절절한 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라키엘의 새까맣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비올레타를 옭아매듯 잡았다. 비올레타의 숨이 잠시 멎었다가, 탁 떨어졌다.
“그 아이가 죽고, 네가 살아서.”
“…….”
“네가 살아서, 지금 내 곁에 있는 게 그 아이가 아닌 너라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얼마나 끔찍한지 넌 모르겠지.”
남자의 차갑게 식은 손끝이 비올레타의 턱을 스치다 그 아래를 꽉 틀어쥐었다. 라키엘이 잇새로 씹어뱉듯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그런데 너는 대체 어디까지 날 바닥으로,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도대체 어디까지 처박혀야…….”
죄책감을 들이대도 변하는 건 없었다. 너는 그 아이 대신 살았고, 나는 시간을 다시 돌려도 네가 아닌 그 아이가 죽기를 바라니까.
차라리,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자.
라키엘이 그렇게 속삭이며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를 안았다. 그 속에서 이미 자기혐오로 처참하게 짓뭉개진 고백이었다. 더 이상 드러날 것도, 남은 것도 없는, 제 속 끝까지 다 긁어낸 지독한 고백.
비올레타는 그런 종류의, 혹은 더 깊은 자기혐오를 알고 있었다. 문득 계산 없이 웃게 될 때가 그랬고, 문득 기쁘고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가 그랬고, 문득 제가 살아 있음에 다행이라고 느낄 때가 그랬다. 제자리도 아닌 곳에 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갖고서 살아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 안온한 감정의 그림자가 얼마나 끔찍한지 비올레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평생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할, 비겁한 원죄를.
라키엘은 마치 그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끊임없이 괜찮다고 속삭였다. 모두 괜찮을 거라고, 모두 괜찮아 왔다고. 내가 원하는 것은 너고, 네가 있는 지금이 우리의 최선이고 최상이라고.
그래도 만약에, 그것이 여전히 네게 지옥이라면, 내가 천국을 끌어내리겠노라고.
절절한 구원이었다. 비올레타는 꽉 막힌 숨을 토해 냈다.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이게 그의 구원이라면, 그녀는 잡아야 했다. 정말로 세상에 오로지 단둘이었다. 그 절박함이 몸속 가득 차올랐다. 비올레타가 힘없이 늘어진 손을 겨우 들어 라키엘을 마주 안았다. 처음으로 스스로 안겨 온 그녀에, 라키엘이 잠시 굳어 있다가 이내 세게 그녀를 껴안았다.
“우린 사기꾼이라 천국이 낮아도 못 가요.”
비올레타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맥이 풀린 듯 라키엘이 픽 웃었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귓가에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천국은 기대도 안 해요. 지옥이라도 괜찮아요.”
“…….”
“그냥, 같이 있어요. 그거면 돼요.”
라키엘은 입을 꾹 다문 채 찬찬히 그녀를 제게서 떨어트렸다. 잔뜩 가라앉은 시선이 비올레타의 얼굴 위를 배회한다. 그 복잡한 시선에 비올레타가 이제 정말로 괜찮다는 양 말갛게 웃었다. 그 위태로운 웃음을 아로새기듯 라키엘은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손이 느릿하게 비올레타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입술이 부드럽게 부딪쳤다. 파고들지도 않고 그저 겉만 맞닿은 채로, 마치 그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그녀의 숨을 확인하듯이.
그리고 입술이 떨어졌다. 라키엘은 입술만 떨어트린 채로 내리깐 시선을 들어 비올레타와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나직한 숨이 서로의 피부에 따스하게 닿았다. 라키엘이 눈가를 설핏 찡그리며 낮게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마지못한 듯 고개를 들었다. 제게서 멀어지는 라키엘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비올레타가 라키엘의 팔을 잡았다. 힘 하나 없는 손짓에 라키엘이 우두커니 멈췄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안아 줘요.”
라키엘은 조금 멍하니 있다가,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비올레타는 고개를 조금 돌려 그의 귓가에 정확한 발음으로 다시 말했다.
“안아 줘요.”
“…….”
“안기고 싶어요. 당신한테.”
그 나직한 목소리에 홀린 듯 열이 확 올랐다가 순식간에 식었다. 라키엘이 무표정하게 비올레타를 제게서 떼어 냈다. 가늘어진 눈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비올레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라키엘의 시선이 좀 더 날카롭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네가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알아?”
“알아요.”
“내가 널, 참고 있는 것도 아나?”
“그럴 필요 없어요.”
대꾸 없이 비올레타를 응시하고 있던 라키엘이 순간 비올레타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내고 얼굴을 파삭 굳혔다. 궁지에 몰리고 몰려 마지못해 붙잡는 동아줄 취급은 사양이었으니까. 그로서는 새삼스레 전혀 급할 것도 없었고, 더 기다리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것도 이런 꼴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 그 위태로운 얼굴에 라키엘은 부러 사납게 말했다.
“……너 때문에 멍청한 짓 이 정도까지 했으면 족하다. 사람 더 바보 만들지 말고―.”
그러나 라키엘이 말을 채 다 잇기도 전에 비올레타의 입술이 그의 입을 막았다. 라키엘은 정말 돌처럼 굳었다. 여태까지 길들여 온 게 무색할 정도로 깊이라고는 없는 단순한 접촉인데도, 멍청하게 온몸이 굳었다.
그저, 제가 다가서지 않은 처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것이 제가 기대해도 될 만한 마음인지, 아니면 그만큼 그녀가 절박한지, 혹은 둘 다인지 라키엘은 헷갈렸다. 그러나 그것을 따질 여유는 이미 그에게 없었다. 사실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벼랑 끝에서 저를 잡은 것이나 매한가지라는 것을. 도무지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를 몰라서 붙잡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마 제정신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속을 더 뒤틀리게 했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에게서 몸을 떨어트리기 무섭게 그대로 다시 그에게 끌려갔다. 라키엘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짙게 키스했다. 숨도 못 쉬게 한참을 몰아붙이던 입술이 이윽고 눈가로 올라와 눈물 자국을 핥았다.
“시작한 건 너야.”
“…….”
“후회하지 마.”
눈가에 입술을 댄 채 라키엘이 으르렁거렸다. 비올레타가 대답하듯 옅게 웃는 것을, 그 여유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지 라키엘이 귀 아래 연한 살을 아프게 씹었다. 비올레타가 조금 아픈지 인상을 찡그렸지만 라키엘은 아랑곳 않고 입술을 내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턱선을 따라 부드럽고 잘게 이어지던 키스가 쇄골에 이르자 세게 잇자국을 남겼다. 비올레타가 숨을 훅 몰아쉬었다가 이번에는 그를 살짝 노려보았다. 마치 평소처럼 돌아온 얼굴을 라키엘이 가늘게 눈을 떠 응시했다.
“아파.”
정말 아팠는지 말도 짧아졌다. 라키엘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그 옆을 깨물며 짧게 웃었다.
“아프라고 한 거야.”
감히 자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내려다본 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올려놓기만 하고 내려 볼 정신은 없었겠지만. 비올레타가 무어라 더 말하려 입을 달싹이는 것을 라키엘은 그대로 쓰러트리며 입을 막았다. 금사가 화려하게 수놓인 이불 위로 구불구불한 그녀의 머리칼이 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었다.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일렁였다. 라키엘이 제 아래에 갇힌 여자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다 느리게 고개를 내렸다. 이윽고 그의 그림자가 비올레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라키엘은 어둠 속에서 하얗게 드러난 어깨에 점점이 입을 맞추며 네글리제를 끌어내렸다. 반사적으로 막아서는 손을 잡아 그 팔부터 빼내고 침대에 잡아 누르자 비올레타의 무감각하던 얼굴에 약간의 당혹감이 떠올랐다. 라키엘이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그리고 마치 그녀가 도망가려 했다는 듯 그녀의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얽었다. 박제된 나비처럼 비올레타가 그대로 갇혔다.
말려들었다. 라키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제 속을 가득 채운 씁쓸한 충족감에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용됐든, 휩쓸렸든, 사실상 그 도피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자신이었다. 그것을 인정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본래 좋은 남자도 아니었으니까. 라키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비올레타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베게에 머리를 박다시피 엎드려 누워 있었다. 내 여자. 그렇게 생각하고 라키엘은 곧장 소름이 끼쳐 모든 생각을 멈췄다. 역시 태생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제 것이었다. 라키엘은 그 생각이 떠오르자 몇 번 반복했다. 제 머리에 새기듯.
어쨌든 편안해 보이는 자세는 아니었으므로, 자세를 고쳐 주기 위해 팔을 들려던 라키엘이 곧바로 그만두었다. 그리고 반쯤 드러난 얼굴이 제 쪽을 향한 것이 마음에 들어 라키엘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가린 머리칼도 살살 쓸어 넘겼다. 얼마나 울었는지 발간 옆얼굴이 엎어진 머리 아래로 드러났다. 어쩔 수 없는 죄책감과 함께 속이 울렁거린다. 여러 가지 의미로.
라키엘은 눈가를 찡그렸다. 라키엘의 손이 비올레타의 콧대를 타고 올라가 미간을 짚었다. 비올레타는 딱히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라키엘의 손끝이 살살 폈다. 그의 노력에 보답하듯 이내 비올레타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라키엘은 몸을 조금 세우고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멍청한 걸 치가 떨리게 싫어하긴 하지만, 이 경우에는 짐승마냥 멍청하게 생각하는 게 맞다. 라키엘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의 드러난 어깨를 훑었다. 말캉하게 안겨 오던 살결, 제 목을 휘감던 뜨겁고 가는 팔, 입술……. 그 멍청함의 이상을 생각하면 비참해질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습관처럼 그 이상을 향해 간다. 라키엘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제가 제 스스로를 진창으로 처박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겨우 계집 하나에.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깊이도, 온도도 모두 달랐다. 뚜껑을 열어 보니 제 속은 너무 깊고, 그녀의 속은 너무 얕고, 자신은 너무 뜨겁고, 그녀는 너무 차갑다. 그 차이가 처참할 정도로 눈에 보여서 라키엘은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눈앞에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을 애써 모른 척 외면하고 있는 편이 더 꼴사나웠으니까. 그렇게 그 차이를 인정하자 불안해졌다. 저 두 눈이 어쩌다 멍하니 먼 곳만 봐도 어딘가로 도망가 버릴 것처럼 불안감이 차디찬 머릿속을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 뒤에는 언제나 소유욕이 뒤따랐다. 병신도 아니고, 라키엘은 입안으로 이죽거렸다. 그 소유욕이야말로 제가 얼마나 여유가 없는지를 반증하는 것이었으므로.
자신만 미쳐 있다. 오로지 자신만. 비올레타가 뒤척이며 얼굴이 좀 더 드러났다. 라키엘의 날선 시선이 이내 누그러졌다. 라키엘은 묘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베개에 조금 눌린 얼굴은 평소에 고상한 척하고 있던 얼굴보단 못생겼지만 귀여웠다. 사실은 그것조차 예뻐 보였다. 실제로 그녀는 꽤 예쁘기도 했다. 처음 만난 그 엉망진창인 순간에도 그가 꽤 예쁘장하다고 생각했던 얼굴이다. 라키엘은 턱을 괸 채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 그림자에 머물던 시선이 콧대에서 콧날로 미끄러지듯 떨어지더니 이윽고 발간 뺨에서 붉은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삼킬 수만 있다면 다 삼켜 버리고 싶다. 목이 탔다. 이런 얼굴만 아니었으면 몇 번이고 안았을 것이다. 라키엘은 그녀의 뺨에 살짝 입 맞추며 제 속을 헤집어 놓던 그녀의 말들을 두서없이 떠올렸다. 대상 없는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하고, 달래고 얼러서 재웠으면 그만일 일이었다. 보나마나 저 눈을 뜨면 제 얼굴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겨우 그 정도의 순간적인 회피였다. 그럼에도 무식하게 그 손 맞잡고 비올레타를 더 몰아붙인건, 어쩌면 화풀이였을지도 모른다. 수단이라느니, 죽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조곤조곤 말하는 꼴에 화가 났었다. 애초에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걸 생각하면 아무런 할 말이 없을 텐데도. 낮은 한숨을 뱉으며 라키엘은 그녀의 벗은 등을 느긋하게 쓸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조금 흐트러졌으나, 이내 다시 고르게 돌아왔다. 웬만해선 깨어날 것 같지가 않았다. 겨울 해가 아무리 늦게 뜬다고는 해도 이제 곧 날이 밝을 것이다. 비올레타의 시녀들 중에는 유독 빨리 깨는 여자가 있었으니 그 여자는 포기한다고 쳐도, 나머지 시녀들에게까지 들키는 건 꽤 곤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시녀들 중 어린 영애 하나는 입이 쌌다. 물론 라키엘에게는 그렇게 되는 편이 더 좋았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두기엔 저렇게 엉망이 된 얼굴이 불쌍했다.
깨워 주겠다고 생각하고도, 라키엘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는 삐뚜름하게 웃으며 비올레타의 허리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가슴 위로 울긋불긋 새겨진 제 흔적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 순흔을 덧새기듯 라키엘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연한 살결 위로 이를 박았다. 비올레타가 그제야 잠에서 깬 듯 버둥거렸다. 아직도 잠에 취한 듯 가늘게 겨우 뜬 눈이 라키엘을 응시한다. 라키엘이 입술을 댄 채 낮게 웃었다. 피부에 그대로 닿는 숨결에 비올레타가 몸을 조금 떨었다가, 이내 정신이 들었는지 라키엘을 밀어냈다. 라키엘은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라키엘의 손이 비올레타의 허리를 떠남과 동시에 비올레타가 이불 속으로 쏙 사라졌다. 라키엘이 그녀를 놀리듯 이불에 대고 물었다.
“뭐 해?”
“가요. 가요!”
“어딜.”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어서 꺼져요!”
이불 속에서 들려오는 비올레타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라키엘이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눈뜨자마자 하는 소리가 꺼지란 소리야?”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말 따윈 상관없다는 듯 이불에서 고개를 쏙 빼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락없는 아침이었다.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맙소사……. 여태까지 안 가고 대체 뭐했어요?”
이 정도면 거의 말로 짓밟는 수준이다. 라키엘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좀 더 깊어졌다. 비올레타가 이불에서 머리만 뺀 채로 라키엘을 노려보았다.
“갔어야죠!”
“미안하군. 빨리 꺼져 주질 못해서.”
라키엘은 환하게 웃으며 비꼬고는, 그녀의 몸을 감싼 이불을 홱 빼앗았다. 비올레타가 비명을 지르려다 바깥을 의식한 듯 겨우 삼켰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작게 외쳤다.
“이불 줘요!”
“생각 좀 해 보고.”
“이불 좀 줘요…….”
한마디 전만 해도 당당하게 요구하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숫제 애원으로 바뀌었다. 라키엘이 그 목소리에 조금 고민하듯 제 손을 내려 보았다. 비올레타는 그것을 승낙이라 생각하고 안도하며 그에게서 이불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닿은 것은 이불이 아닌 그의 손이었다. 그 손길에 어, 하고 몸을 굳힌 순간 비올레타는 그대로 당겨져 천장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올레타를 덮은 것은 이불이 아닌 사람이었다. 라키엘은 그대로 비올레타의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당황한 그녀가 무어라 더 말할 새도 없이 입을 틀어막았다. 비올레타가 반항하듯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벌어진 입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어깨를 아무리 때리고 꼬집어도 상황의 변화가 없자, 비올레타의 몸이 이내 포기한 듯 축 늘어졌다. 몸이 다시 달라붙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라키엘은 제가 만족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비올레타가 짜증스럽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게 누가 숨 쉬지 말라고 했나.”
숨도 안 쉬고 부비적거려 놓고, 마치 힘든 건 너 혼자고, 그런 네가 이상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비올레타는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치고는 그를 계속 노려보았다. 그리고 냉랭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할 만큼 했으면, 정말로 나가―.”
“내가 할 만큼 했으면 넌 내일도 여길 못 나갈 텐데.”
제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돌아오는 말에 비올레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타액에 젖어 반들반들 빛나는 입술을 물끄러미 내려 보던 라키엘이 문득 말했다.
“안 되겠어.”
“뭐가.”
“억울해서 안 되겠어.”
“대체 뭐가…….”
비올레타의 목소리가 불안한 듯 흐려졌다. 라키엘이 상쾌하게 웃었다.
“어차피 늦었다고 받은 축객령이니, 정말로 늦어져야 네 말대로 꺼져 줄 맛이 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