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막-2장 (10/21)

<2막-2장>

“일로벨라가 갔단 말이지…….”

쉰 목소리가 짧은 말 한마디를 채 다 뱉어내기도 전에, 노쇠한 후작의 입에서 메마른 기침이 새어 나왔다. 빌키어스가 제 외조부의 어깨에 손을 대 살짝 밀었다.

“누워 계십시오.”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쓰이니, 좀 누워 계시면 안 됩니까.”

“네 어미는 결국,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아이를 네 외숙보다 늙은이에게 보낸 게로구나.”

“…….”

“너는 만족스러우냐.”

그렇게 묻는 말에는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지만 빌키어스는 카디링거 후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병마에 시달린 탓에 이제 곧 사그라질 듯 얕은 숨을 내뱉고 있는 후작은, 그럼에도 눈빛이 형형했다. 빛바랜 눈동자에 어린 희미한 총기에 빌키어스는 다문 입을 천천히 움직였다.

“아니요. 일로벨라는, 조금 더 행복했어야 했습니다.”

“일로벨라가 황제의 앞에서 제멋대로 단언하고, 황비께서 곧바로 궁내부에 승인해 내리신 일을 황자께서 달리 어찌하겠는가.”

“…….”

“그러나 너는 그것을 당연하다 생각지 않길 바란다.”

“……물론입니다.”

빌키어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겨우 대꾸했다. 카디링거 후가 천천히 손을 들어 빌키어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잘 보내 줬겠지.”

“예, 무사히.”

그렇게 대답한 빌키어스는 정작 그렇게나 아끼던 제 여동생이 영영 떠나는 모습을 차마 반도 지켜보지 못했었다. 베티스가 일로벨라에게 직접 입혀 줬던 새하얀 드레스가 못내 눈앞을 떠돌다 사라졌다. 빌키어스가 유려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로벨라는 빌키어스가 한 번도 손 쓸 도리 없이 모든 것을 결정해 나타났다. 빌키어스는 사태를 되돌리기 위해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절망했으나, 일로벨라는 후련한 얼굴로 그게 제가 선택한 삶이라 말했다.

그게 내 인생이고, 내가 바라는 바고, 내가 원하는 것이고, 내 행복이야.

우리가 끝까지 살아남는 것만이 내 행복이야. 그렇게 말하는 일로벨라는 정말 후련해 보였지만, 빌키어스는 제가 평생토록 그 일만은 결코 후련해 할 수 없으리란 것을 그때 깨달았다.

“기실 황제께서 잉거스트 출정 총사 권한을 네게 주겠다, 일로벨라에게 그리 말씀하시기 전부터 이미 총사는 네 것이었으리라. 일로벨라를 이렌시아에 황태자비로 보내는 것 역시 이미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일개 황녀에게 그리 무게를 걸 수 있는 분이더냐?”

“……알고 있습니다.”

“조건과 조건이 거래된 것 같은 것은 황자의 착각이다. 선택하라? 그것이 어찌 선택일 수 있느냐.”

빌키어스는 대답 없이 뒤돌아 테이블 위의 위스키를 들고 잔에 따랐다. 카디링거 후가 잠시 부정확하게 숨을 고른 뒤,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일로벨라에게 선택지를 주되,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조국과 남자, 전쟁과 일개 가문 하나. 동일 선상에 있기엔 가혹한 선택지였다.

“일로벨라를 시험한 게지.”

빌키어스가 입안에 머금은 한 모금을 삼키며 유리잔 위로 피식 비웃었다.

“그리고 이제 저를 시험하실 차례고 말입니다.”

“그래.”

황제에게 시험이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빌키어스는 그것이 장난감을 이리저리 바꿔 놓는 어린아이와 별다를 바 없는 조악한 속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하일이 그렇게 하잘것없이 취급되는 것을 거부해 결국 아비에게 죽게 된 것 역시도.

그렇게 황태자의 자리는 공석空席이 되었지만, 빌키어스는 수없이 그 시험에서 살아남고도 여전히 황제의 칼날 위에 선 꼭두각시였다. 기회랍시고 그럴싸하게 제 앞에 포장되어 온 것이란 실상 부황이 제 목을 조르려고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정말 죽일 생각도 아닌 것이 문제였다. 차라리 그랬다면,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용이라도 써 봤으리라. 황제는 사실 그저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어찌 죽어 가는지, 어찌 살아남는지 구경이나 할 심산이었다. 이미 죽어 버린 미하일에게도 그러했고, 자신에게도 평생을 그리했다.

악취미지. 자신은 또다시 그 악취미를 위해 적당히 죽을 것처럼 바르작거리며 살아나야 한다. 천운으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면―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것도 곤란하다.

빌키어스가 무표정하게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카디링거 후가 빌키어스의 너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잇새로 씹어뱉듯 말했다.

“반드시, 반드시여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황태자가 세상에서 잊히는 것, 그리고 네 존재가 지극히 당연해지는 것.”

“…….”

“그 모든 것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기회, 그래. 제 앞에 놓인 것이 칼인 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회라 불리기에 마땅했다.

모든 것을 공고히 할 기회.

“그러나 빌키어스. 그럴수록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두 배로 빠른 길을 갈 때는 네 배로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모든 것이 확실할 때, 적어도 그러리란 확신이 있을 때 움직여야한다. 더 빨리 가겠다고, 성급히 없는 길을 내서는 안 돼.”

“…….”

“천천히, 그리고 늘 신중하게 결정하여라. 특히 사람의 목숨.”

“명심하겠습니다.”

“네 부황父皇을 보아 알겠으나, 불필요하게 흘린 피는 결국 언젠간 돌아올 것이다. 죽음이 가까워지니 이 할아비가 별 실없는 생각까지 다 하게 됐다만…….”

“……또 약한 말씀 하십니다.”

“이것만은 진실인 것 같구나. 모든 것은 돌아와.”

카디링거 후는 평온한 얼굴로 그렇게 읊조렸다.

빌키어스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지 모를 말이었다. 고작 반년 만에 급격히 쇠약해진 외조부의 얼굴에는 이제 머지않은 죽음을 암시하듯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빌키어스는 불길한 징조를 눈에 하나씩 아로새기며, 카디링거 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갈로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황자 전하를 모실 시종이 도착했습니다.”

“……그럼 근 시일 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빌키어스가 인사하자, 카디링거 후가 잔기침과 함께 고개를 가볍게 까딱했다. 빌키어스는 잠시 가라앉은 눈으로 카디링거 후를 응시하다 천천히 뒤돌아 방을 나섰다.

“전하.”

“외숙.”

갈로이스가 내리깐 눈으로 공손히 읍했다. 빌키어스의 메마른 시선이 갈로이스의 정수리를 설핏 스쳤다. 그리고 이내 갈로이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며, 시선이 마주쳤다. 저보다 반 뼘은 더 커 버린 조카를 바라보는 갈로이스의 눈은 그저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흡족해 보였다. 빌키어스는 그것이 못내 껄끄러웠다.

“경사스러운 날이지요.”

그늘에 가려진 빌키어스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은 채로 조금 삐딱하게 비틀렸다. 그러나 빌키어스는 내색하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러셨습니까.”

“무엇을?”

“황비 전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전하께서 온종일…….”

“수도 한 번 벗어난 적 없는 아이를 먼 타국으로 보내게 되니, 실없는 생각이 자꾸 들었던 거지요. 달리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전하.”

문득 나직한 부름에 빌키어스가 내리깔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제 황비 전하께는, 오직 황자뿐이십니다.”

지나치게 진심 어린 어조라 더 모순투성이인 말이었다. 그러나 빌키어스는 굳이 그 모순을 꼬집어 내지 않은 채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생에, 믿는 분이라고는 황자 전하 단 한 분뿐이시지 않습니까.”

“알아요.”

“이제야 시작입니다. 더 이상 사소한 것에 인정을 두지 마십시오. 인정은 군주가 된 뒤에 가지셔도 늦지 않습니다.”

“…….”

“지금은 군주부터 되셔야지요.”

또다시 하얀 드레스 자락이 환각처럼 일렁였다. 빌키어스는 이를 악물다 천천히 웃었다.

“저는 기꺼이 그럴 생각입니다, 외숙.”

갈로이스가 평온한 얼굴로 웃었다. 오래전 카디링거 후가 작디작았던 빌키어스를 안아 줄 때와 같은 나이에 접어든 그의 아들은, 이제 미소 짓는 얼굴마저 똑같았다.

“좋습니다. 아, 폐하께서 며칠 내로 공식 서한을 내려 잉거스트 출정을 명문화明文化하실 듯합니다.”

“이제 머지않았군요.”

“카디링거는 전하께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드릴 겁니다. 최대한 빠르게, 황자 전하께서 도달하실 수 있도록.”

그러나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아버지와 같지 않았다.

“부디 ‘후작 각하’의 말씀은 잊으십시오, 전하.”

후작 각하, 하고 제 아비를 딱딱하게 발음한 갈로이스가 서늘하게 웃었다.

“이젠 너무나 노쇠하셨고, 바깥에서 직접 보고 듣지 못하게 되시니 생각만 많아지시어, 쓸모없는 걱정 또한 많으신 분입니다. 판단 역시 흐려지셨지요. 그리 치부하십시오.”

제 아비를 무시한다기보다는 그저 정치가가 지나간 퇴물을 평가하는 투였다. 빌키어스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후작은 아직 건재하십니다, 외숙. 성급한 판단은 삼가세요.”

“세상에서는……, 물론, 예. 그렇지요.”

갈로이스가 선뜻 긍정하며 빙그레 웃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고, 빌키어스도 그걸 알았다.

카디링거 후에게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이미 카디링거의 8할은 물밑에서 갈로이스의 권한 아래로 넘어갔고, 카디링거 후의 국무부 수장 자리 역시 그러했다. 이젠 그것이 언제 세상에 알려지느냐가 문제였다.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고, 이 위태로운 평화는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불필요하다, 필요하다. 장애를 제거하고, 제거할 것을 재단하는 데 있어 그렇게 어리숙한 기준도 없을 겁니다. 어찌 필요를 재단할 수 있습니까? 희생 없이 군주가 되는 자는 없습니다.”

갈로이스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어조 위로 서슬 퍼런 야욕이 넘실거렸다. 빌키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 외숙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돌아온다고 하셨습니까? 틀렸습니다. 아무것도 돌려보낼 수 없도록 죽이고, 그 뿌리까지 죽이면 됩니다. 부모를 죽이고 그 아이는 살려 준다면, 전하는 십 년 뒤 전하를 죽일 이를 살려 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그 아이마저 죽인다면,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외숙은 제가 어찌할 것 같습니까?”

“결국 아이를 살려 주시겠지요.”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제가 그 아이를 죽여야겠지요.”

“…….”

“그것이 바로 이 외숙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갈로이스에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빌키어스가 갈로이스를 말없이 응시했다. 갈로이스가 천천히 웃었다.

“5황녀의 탄일誕日이 머지않았습니다.”

“…….”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난 계절 미처 끝내지 못했던 일을, 마저 해야지요.”

에비가일, 하고 천진한 입매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래로 처박힌 시선을 가까스로 좀 더 올리자비올레타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자그마한 비올레타가 빙그레 웃었다. 에비가일보다 옅은 녹안이 조금 섬뜩하게 반짝였다. 저도 모르게 소름 끼친다 느낀 에비가일이, 힘겹게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렇게 다시 뜬 눈으로 바라본 비올레타는 거짓말처럼 사랑스러운 눈으로 웃고 있었다. 에비가일은 조금 안심한 듯 본능적으로 비올레타의 몸을 살폈다. 비올레타의 연분홍빛 드레스는 조금 낡았지만 제가 곱게 차려 입혀 준 그대로 단정했다.

마치, 그녀가 죽기 전처럼.

“이제 아프지 않으세요?”

에비가일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묻고는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비올레타가 말간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며 한 걸음 물러섰다. 에비가일이 망연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네가 미워.”

부루퉁하게 말하며 비올레타가 볼을 부풀렸다. 에비가일이 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새 비올레타가 말을 이었다.

“예쁜 옷을 입었네.”

“…….”

“예쁘다, 에비가일.”

그렇게 말하는 비올레타는 조금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조금 심통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에비가일은 제가 입은 드레스를 문득 내려 보았다. 고급스러운 동국의 비단으로 재단한 상아색 드레스는 파사칼리아가 선물한 것이었다. 에비가일이 고개를 들어 다시 비올레타의 낡은 드레스 자락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기억났다. 저 낡고 해져 형편없는 드레스는, 비올레타가 가진 몇 안 되는 드레스 중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해어지고 닳은 공단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다 내 건데, 다, 내, 건데, 그건 다 내 거잖아…….”

아이의 입안을 가득 채운 서러운 울음 새로 겨우 단어가 하나씩 새어 나왔다.

“에비가일……, 나는 왜 죽은 거야?”

“…….”

“왜, 너는 죽지 않고…….”

“…….”

“나만 죽은 거야…….”

목이라도 졸린 듯 숨이 꽉 틀어막혔다. 이 착한 아이는, 이 멍청한 아이는, 죽어서까지 멍청해서 이제야 겨우 원망하는 것이다. 가증스러운 계집이 제 행세를 하며 호의호식하게 된 것을, 이제야, 이렇게 겨우, 이렇게 희미한 소리로…….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에비가일은 울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에비가일이 겨우 입을 뗐다.

나도 이렇게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나도 이러기 싫었어. 근데 이럴 수밖에 없었어.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나도…….

뱉어 낼 변명은 많았으나 한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에 뿌리 깊은 죄책감이 뒤엉켰다. 벌어진 입이 침묵하자 비올레타가 일그러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비올레타의 돌아선 작은 등을 얼마간 바라보다, 에비가일이 가라앉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이 드레스는 네 거야, 비올레타.”

에비가일의 말에 비올레타가 말없이 몸을 조금 틀어 에비가일을 바라보았다. 비올레타, 에비가일이 처음으로 불러보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에비가일이 천천히 비올레타에게로 다가서며 손을 들어 보였다.

“이 예쁜 장갑 보이니?”

비올레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리 위의 이 근사한 티아라도 보여?”

“응. 예뻐.”

“이 귀걸이, 이 목걸이…….”

“응.”

“이 구두, 다 비올레타 네 거야.”

비올레타가 시선을 들어 물끄러미 에비가일을 바라보았다. 에비가일이 잘게 떨리는 손을 들어 비올레타의 손을 잡았다. 온기 한 점 없이 차갑게 식은 손이 비올레타의 손길을 따라 힘없이 들렸다.

“그리고 네 손을 잡은 이 손, 이 몸뚱이까지.”

“…….”

“내……, 인생까지, 다 네 거야.”

에비가일의 감은 눈가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미안해.”

문득 시린 손끝이 닿았다. 조심스레 볼에 닿은 작은 손이 천천히 움직여 볼을 덮었다. 코끝으로 죽은 이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왜, 왜…….”

“미안해, 에비가일.”

“왜 당신이 미안해…….”

“네 이름을 뺏어 버려서 미안해.”

“…….”

“아무것도 몰라서, 내가 바보로 태어나서, 그렇게 태어나서…….”

“…….”

“내가 죽어서 미안해.”

멍청한 소리.

에비가일이 울며 기막힌 듯 비올레타에게 이죽거렸다. 이죽대는 말에도 비올레타가 맑은 얼굴로 웃었다. 눈물이 차오른 시야 속 비올레타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진다.

아니라고,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마치 불빛이 점멸하듯 희미하게 일렁이던 시야가 이내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다시 비올레타였다.

금사가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수놓인 실크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비올레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하, 기침하셨어요?”

디아나의 다정한 물음이 마침 멀리서 들리는 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려 왔다. 겨우 말을 알아들은 비올레타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전하! 일어나셨어요?”

“루이즈, 전하의 침실에선 제발 그렇게 뛰지 마.”

“생일 축하드려요, 전하!”

“루이즈, 탄일을 경하드립니다, 라고 해야지.”

“그게 그거잖아요. 괜히 어렵게.”

멍하니 앉아 시녀들의 말을 듣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비올레타의 표정이 변했다. 비올레타가 시선을 천천히 왼쪽으로 돌려 방 한쪽에 걸린 화려한 드레스를 응시했다. 비올레타의 성년식을 위해 파사칼리아가 직접 선물한 상아색 드레스였다.

오늘은 ‘비올레타’의 생일이었다.

저 멀리 정신없이 분주하게 쏘다니는 메이드들을 바라보다, 비올레타는 어느새 거의 구색이 갖춰진 제 차림을 내려 보았다. 여름의 막바지에 다다랐으니 날씨는 제법 시원했지만, 동국의 비단을 드레스로 껴입기엔 아직 좋지 않은 시기였다. 가을 전이면 으레 찾아오는 우기가 가까워졌으니 더더욱.

그러나 파사칼리아가 여름도 되기 전에 비올레타의 성년식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드레스니 별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아름답기도 했다. 이 정도의 불편함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게다가 이 정도의 불편함은 약소할 정도로 겹겹이 껴입고 나타나는 여자들이야 흔하니 위로는 될 것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도 하고.

비올레타는 식은땀으로 조금 축축해진 손을 폈다. 더운 것 같기도 하고, 몸이 조금 좋지 않은 것도 같았다. 비올레타는 불편한 시선으로 드레스의 주름이며 반질반질한 표면 따위를 응시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질구레하게 숨겨진 사정은 어찌 되었든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제법 근사했다. 아찔할 정도로 깊게 파인 가슴선 아래로 잘록하게 조여진 허리, 그리고 장장 세 겹의 페티코트로 아주 풍성하게 부풀린 드레스 라인은 흔한 자수 하나 없는 단순한 상아색 드레스가 화려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비올레타는 그 화려한 자태를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다, 귓가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머리칼이 힘없이 빠져나갔다.

“전하.”

드레스의 뒤태를 매만지고 있던 밀로일라가 문득 비올레타를 불렀다. 문득 정신이 든 것처럼 비올레타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거짓말처럼 화사한 표정이 덧대어졌다.

“응?”

“오늘 왜 이리 힘이 없으신 거예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팔팔하셨으면서요.”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오늘은 한순간도 딴청 피우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전하는 엄청 예쁜 것도 아니니까 대신 늘 웃어야 한다고 아그네스 님께서도 그러셨잖아요.”

“……그 말 좀 그만 우려먹어. 진짜 지긋지긋하다.”

“그러니까 웃으세요. 오늘 제일 예쁘지 않으시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이상한 엄포에 비올레타가 어이없는 듯 피식 웃었다.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거면 벌써 팔자 고쳤게.”

“전하께서 무슨 팔자를 고치십니까. 이보다 잘난 팔자가 어디 있어서요?”

마침 비올레타 쪽으로 걸어오고 있던 디아나가 얄밉지 않게 핀잔했다. 비올레타는 별다른 대꾸 없이 조금 멋쩍은 듯 웃었다.

“에델가르드 공께서 주문하신 목걸이가 오늘 아침에 도착했어요. 아직 못 보셨죠?”

“응.”

“여기요.”

디아나의 손에 들린 보석함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난 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의 목걸이였다.

“……이거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비올레타의 의아한 목소리에 밀로일라와 디아나의 시선이 활짝 열린 보석함 안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몇 초 후, 이내 다시 들린 시선에는 웃음기로 가득했다.

“어머, 에델가르드 공도 참.”

“그분이 이렇게 귀여우실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지 뭐예요.”

“전하는 차암 좋으시겠어요.”

“제발 그렇게 징그러운 소리 내지 말고 제대로 꺼내기나 해. 너희 이럴 때마다 너무 싫다.”

비올레타의 정색에도 밀로일라는 비올레타를 놀리듯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잘게 커팅된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체인의 끝에, 작은 다이아로 촘촘히 둘러싸인 투명한 블루 다이아몬드 메달이 늘어져 반짝였다. 칼 드 로드리고의 화려한 예물과는 달리 작은 장식조차 없는 단순한 디자인이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보석 그 자체를 과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구 보라는 양 말이지.

비올레타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걸 귀엽다고? 귀엽다고 말하기엔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보석이 지나치게 컸다. 손가락 두 마디는 족히 될 것 같았다. 고작 이 반밖에 안 되던 로드리고 후의 예물도, 과장 좀 보태면 로드리고의 총 연간 수입과 맞먹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라키엘이 무슨 행사를 치르든 좀 더 질 좋은 가십거리를 위해서라도 비올레타에게 마음에도 없는 거창한 준비를 해 주는 편인 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평생에 한 번이라는 성년식이니 그 거창하고 요란한 정도가 더하리란 것도.

그러나 이번엔 뭔가, 그것보다는…….

비올레타가 가늘게 뜬 눈으로 허공에서 흔들리는 푸른 보석을 바라보았다.

“후작 각하께서 일전에 전하를 통해 황후께 드리신 예물은 이제 비교도 안 되겠네요. 이렇게 크게 세공된 블루 다이아는 아마 캐롤링 왕국에도 없을 거예요.”

“아침에 도착했으니, 지금쯤이면 소문도 한 바퀴 돌았을 테고. 오늘은 부인들이 전하 목만 바라보겠군요. 에델가르드 공께서 나름 조용히 준비하신 것 같았는데.”

조용히 준비하는 척 다 흘렸겠지. 비올레타는 속으로 그렇게 삐딱하게 중얼거리곤 시녀들의 들뜬 목소리 속에서 제 목 위에 목걸이가 채워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머리를 틀어 올려 하얗게 드러난 긴 목을 화려한 보석이 에워쌌다. 이내 묵직한 무게가 쇄골 위를 짓누른다. 문득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꿈속에서 닿았던 죽은 이의 손끝에 목이라도 죄인 양 목울대가 시렸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몸을 조금 틀어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소리가 소음처럼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눈부신 보석, 호화로운 드레스, 공단구두. 이제는 아무것도 낯설지 않은 여자가 거울 속에 서 있었다.

비올레타는 문이 열리자마자 마주친 라키엘의 눈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일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보자마자 저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물론 비올레타가 아니면 아무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아주 미세한 찡그림이었기에, 비올레타는 라키엘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첫째는 저 남자야 제 얼굴 다루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으니 주변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저 남자가 원래 참 불만이 많은 종자이기 때문이다. 그 잘난 불만을 일일이 신경 쓰면 같이 늙어 버리고 말 것이다.

“뭐 해요? 에스코트 안 하고?”

“전하가 아름다우셔서 에델가르드 공께서 넋을 잃으셨나 봐요.”

루이즈가 뒤에서 순진한 소리를 하자 차마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양 비올레타와 라키엘의 미간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죽고 무덤에 누워서도 넋을 못 놓을 위인인데 무슨.

그러나 시녀들을 등진 위치라 표현이 자유로운 비올레타와는 달리 시녀들에게 표정이 그대로 노출된 라키엘은 곧바로 웃으며 루이즈의 말을 긍정했다. 눈빛으로 잔뜩 일그러진 비올레타의 표정을 혼내는 것은 잊지 않으면서.

“물론입니다, 몬드리올 영애. 오늘 아주, 아름답구나, 비올레타.”

‘아주’와 ‘아름답구나’ 사이의 거리가 조금 거슬렸으나 비올레타는 그런대로 웃으며 받아들였다.

“공도 꽤 근사하네요.”

짙은 남색의 매끈한 수트를 한눈에 훑으며 비올레타가 거만한 투로 물건을 품평하듯 말했다. 그러자 라키엘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양 오만하게 실소했다. 물론 비올레타의 뒤에서 보기엔 그저 다정하고 보기 좋은 모습이었으나, 적어도 비올레타의 눈에는 그랬다.

비올레타가 우아하게 손을 들어 보이자 라키엘이 자연스럽게 비올레타의 손을 받았다. 차갑게 식은 비올레타의 손에 옅은 온기가 닿았다. 라키엘의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굳었다.

“뭐 해요? 가지 않고.”

비올레타의 말에도 움직이지 않은 채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내려 보던 라키엘이 이내 비올레타를 밖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조금 걸은 지 얼마나 됐을까. 메스꺼운 기운이 가슴 언저리를 파고드는 것을 비올레타는 애써 억눌렀다. 결국 비올레타는 마차에 앉고 문이 닫히기 무섭게 자리에 힘없이 늘어졌다.

“이렇게 안 좋을 때까지 대체 뭐한 거야. 제 몸 하나 건사 못해?”

기껏 냉랭한 어조로 뱉어 놓고선, 라키엘은 조금 심란해 보였다. 비올레타는 그게 조금 우스워 작게 웃었다. 라키엘은 그녀의 웃음에 비올레타를 약간 노려보며 비올레타 곁으로 옮겨 앉았다. 이윽고 라키엘의 긴 손이 비올레타의 손목을 살짝 쥐고 맥을 짚었다.

맥박이 지나치게 빨랐다. 라키엘의 미간에 팬 골이 좀 더 깊어졌다.

“잠깐 황궁의를 봐야겠군.”

“……답지 않게 왜 그래요? 성년식에 사람들 다 모아 놓고 5황녀가 이렇게 부실하다 광고할 일 있어요?”

“그럼 티올리를 부르든지.”

“공저의 주치의를 부르면 결과가 뭐가 달라요.”

“그럼 넌 지금 이 상태로 버티겠다고?”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고작 저녁만 버티면 되는 건데. 티올리는 밤에 불러 줘요. 연회 때문에 무리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라키엘이 대꾸 없이 짜증스레 비올레타의 손목을 놓았다. 비올레타가 라키엘을 모로 바라본 채 편안하게 머리를 뒤로 살짝 기댔다. 달리는 마차 위라 속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었지만, 어쩐지 모를 불안함에 복잡하던 머리는 조금씩 맑아졌다. 자신이 제일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이 결국 이 남자 앞이라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다. 비올레타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아깐 왜 그랬어요?”

“뭐가.”

“사람 보자마자 기분 나쁘게 인상 쓰는 거 다 봤어요.”

라키엘은 마치 비올레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창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물론 비올레타에게 그렇게 돌아오지 않는 대답 정도는 익숙했다. 딱히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았던 비올레타는 다른 화제를 찾았다.

“어마마마께서 좋은 말을 구하셨대요. 얼마 전에 당신이랑 어마마마랑 석찬 먹으면서, 내가 검은색 말 갖고 싶다고 한 적 있었잖아요?”

“…….”

“그걸 어마마마께서 기억하신 거 있죠. 사실 잘 타지도 못하니까 그냥 색만 맞으면 되는데, 어미가 에른스트 엘링턴 컵에서 우승했던 말이라고 해서 놀랐어요. 음, 이름은 계속 고민했는데 뭐로 정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같이 고민해 줘요.”

“…….”

“이틀 전에 밀로일라가 보고 왔는데 굉장히 예쁘게 생긴 아이래요. 궁에는 내일쯤 도착한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내일 펠로베르어 수업은 빼 주면 안 돼요? 저번에 보내 준 그 교수, 인간적으로 너무 수업을 빡빡하게 해요. 내일은 그 아이 길도 들일 겸…….”

“넌 승마할 생각이 들어? 상태가 그런 주제에.”

“아마 수업하면 더 아플 거예요. 그리고 수업보단 그 아이를 만나는 게 내 건강에 더 도움될 거고요.”

라키엘이 조금 기가 찬 듯 실소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라키엘의 단호한 일갈에 비올레타가 그럼 그렇지, 라는 듯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올레타가 입을 그대로 닫자 정적 속에 마차가 달리고 있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라키엘이 천천히 고개를 틀어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길게 이어지는 목선을 가로지르는 목걸이를 지나 귓불에 단조롭게 매달린 보석에 라키엘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라키엘의 입이 몇 번 소리 없이 달싹이다가, 결국 참지 못한 듯 말했다.

“대체 그 싸구려는 뭐야.”

비올레타가 라키엘의 말이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려 라키엘을 마주했다. 라키엘은 그렇게 결국 말하고 만 것이 싫은지 인상을 설핏 찡그렸다. 비올레타가 반문했다.

“무슨 소리예요?”

“이틀 전에 귀걸이는 보냈잖아.”

“아…….”

아아, 하고 비올레타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건 어제저녁에 로드리고 후가 보내 온 거예요.”

그리고 절대 싸구려는 아닐 거 같아요. 비올레타가 그렇게 단호하게 덧붙이자 귀걸이에 못 박힌 라키엘의 시선이 좀 더 위협적으로 변했다.

“그걸 내가 모를까 봐.”

“물론 그러시겠죠. 에델가르드 공은 모르는 게 없으시니까.”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데.”

“네?”

“로드리고가 선물한 게 내가 준 걸 하지 않은 것과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야.”

“그럼 선물을 무시해요?”

“이미 무시했어.”

“……당신한테는 아니죠.”

“차별해, 지금?”

비올레타가 할 말을 잃은 듯 기막힌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일단은 그 사람과 혼담 진행 중이고, 무시하기에는 지나치게 떠들썩하게 줬어요. 오늘 하지 않으면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 입장이 뭐가 되겠어요?”

“그자 입장을 네가 왜 생각해?”

“그야…….”

라키엘은 이제 됐다는 양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제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게 스스로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지, 이내 라키엘의 입에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런 라키엘의 옆모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문득 물었다.

“설마 아까 보자마자 인상이 더러워졌던 게 이거 때문은 아니겠죠?”

라키엘은 대답이 없었다. 라키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올레타의 입매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라키엘.”

“입이 그리 산 걸 보니 오늘 밤 티올리는 필요 없겠군.”

“라키엘.”

라키엘은 다시 묵묵부답이었다. 기대있던 몸을 조금 일으킨 비올레타가 돌연 라키엘의 오른쪽 손목을 두 손으로 잡았다. 갑작스럽게 잡아온 손에 라키엘이 반사적으로 비올레타를 돌아봤으나 비올레타의 시선은 손목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비올레타가 느릿하게 라키엘의 팔을 들어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뒤집었다. 가늘어진 눈으로 비올레타의 행동을 잠자코 바라보던 라키엘은 비올레타의 손가락이 자신의 커프스 버튼cuffs button, 셔츠 소매를 여미는 장식용 단추에 닿고 나서야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에델가르드의 문장인 독수리가 세밀하게 조각된 순금 커프스 버튼 위를 비올레타의 손끝이 가볍게 쓸었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풀어냈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큰 커프스 버튼이 손바닥 위를 한 바퀴 굴렀다. 비올레타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와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비올레타가 싱긋 웃었다.

“알고 있었어요? 여자가 성년이 되는 날에 가장 가까운 남자의 커프스 버튼을 갖고 있으면, 앞으로 나쁜 일을 막아 준대요.”

비올레타의 말에 라키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입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런 미신을 믿어?”

“미신이라기보단 풍습이잖아요. 뭐, 미신이라도 믿는다고 손해 볼 것도 없고.”

커프스 버튼을 꼭 쥐고 씩 웃어 보인 비올레타가 어디에 둘지 고민하는 듯 제 드레스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심한 눈으로 비올레타를 바라보던 라키엘이 타박했다.

“그거 봐. 가지고 있을 수도 없으면서 왜…….”

그러나 라키엘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하고 끊겨 버렸다. 방금 전까지 제 셔츠 소매에 붙어 있던 커프스 버튼이 비올레타의 가슴 속으로 사라진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커프스 버튼을 딱히 달 데가 없기에…….”

“…….”

“날 왜 그렇게 보는 건데요?”

라키엘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돌아간 고개 뒤로 보이는 귀가 조금 붉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라키엘을 바라보던 비올레타의 순진한 얼굴 위로 거짓말처럼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메이어 백의 성년 축사는 몹시도 길었다. 그리하여 비올레타는 점점 지루해져 가는 파티장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체감 중이었다. 문득 제 아버지에게 축사를 맡기겠다고 하자 인상부터 찌푸리던 밀로일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올레타 뒤에 얌전히 기립해 있던 밀로일라가 입을 꾹 닫은 채 복화술이라도 하는 양 비올레타에게 속삭였다.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저희 아버지는 말이 정말 많단 말이에요.”

“나는 아직도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해. 메이어 백은 잘하고 계셔.”

“이게 절반도 안 온 거라고 해도 말씀이죠?”

“……그럼 얘기가 좀 달라지는데.”

그 뒤로도 비올레타와 밀로일라 사이로 의미 없는 대화가 계속 오고 갔다. 결국 잡담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잠자코 비올레타의 곁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파사칼리아가 비올레타 쪽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밀로일라를 올려보며 말했다.

“네 아버지는 참 훌륭하신 분이란다, 밀로일라. 네 아버지가 비올레타의 성년 축사를 맡아 주셔서 기뻐. 내가 고마워하고 있다, 그리 따로 전해 주렴.”

파사칼리아가 저를 바라볼 줄 몰랐던 밀로일라의 눈이 커졌다. 그대로 멈칫했던 밀로일라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차리고는, 마치 잡담 같은 건 한 적 없다는 듯 입을 꾹 닫은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 경직된 모습을 귀엽다는 듯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파사칼리아가 비올레타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눈이 마주치자 왠지 수줍은 기분이 들어 비올레타는 옅게 웃었다. 마치 그 모습을 눈에 새기 듯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파사칼리아가 비올레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런 날이 올 수 있다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파사칼리아의 미약한 음성 위로, 꿈속에서 들었던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겹쳐 들었다. 비올레타는 순간 쓴 숨을 삼켰다. 맥박은 여전히, 조금 불쾌할 정도로 빨리 뛰고 있다.

비올레타를 바라보는 파사칼리아의 시선은 진한 애정으로 가득했지만, 반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공허하기도 했다. 비올레타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제 뺨에 닿은 파사칼리아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마른 손등 위 불거진 뼈마디가 가슴 아팠다.

“……손이 왜 이리 차니. 몸이 안 좋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문득 파사칼리아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무렇지도 않기는, 그러고 보니 얼굴도 안 좋구나. 진작 말을 하지 않고, 어찌 여태.”

“정말 괜찮아요.”

파사칼리아가 다른 손을 들어 비올레타의 이마를 덮었다. 그 손길에 순간 울컥 뜨거운 숨이 치밀어 올랐다. 내색하지 않으려 미세하게 일그러뜨린 얼굴을 아픔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파사칼리아의 얼굴이 좀 더 심각해졌다.

“열은 없구나.”

“보세요. 괜찮죠?”

“궁으로 돌아가자. 열이 나지 않으니 더 불안하구나. 어미가 너 아픈 것도 모르고, 어쩌면 좋니. 미안하다, 비올레타.”

미안해. 또다시 꿈속의 목소리와 겹친다. 비올레타는 애써 웃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어마마마.”

비올레타가 재차 하는 말에도 파사칼리아의 얼굴은 이미 조금 질려 있었다.

“어서 황궁의를 봐야겠어.”

“어마마마.”

“너마저 아프면, 내가 어찌하겠니. 응? 비올레타. 그러니…….”

지나친 불안이었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그녀를 이해했다. 그녀가 잃어 온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안타까운 눈으로 파사칼리아를 바라보다,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사칼리아와 비올레타의 자리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었고, 곁에 대동한 이라고는 파사칼리아의 심복인 아그네스와 밀로일라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사람들의 주의에서 벗어나 있다. 밀로일라의 아버지가 말이 많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지체해도 무언가 이상한 것을 알아채기 시작할지도 몰랐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파사칼리아의 손을 내려 무릎 위에 두고, 다시 세게 잡았다.

“이제 시작이에요, 어마마마.”

“비올레타.”

“망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괜찮을 거고, 아프지도 않고…….”

“…….”

“죽지도 않을 거예요. 약속할게요. 어마마마가 또, 잃게 하지 않을게요. 죽지 않을게요.”

그렇게 말하며 비올레타가 빙긋 웃었지만, 파사칼리아는 깊은 한숨을 삼켰다. 복잡하게 엉킨 시선이 비올레타의 얼굴 위를 배회하다, 이윽고 가라앉았다. 비올레타가 파사칼리아를 조금 더 장난스러워진 어조로 보챘다.

“그러니까 이제 웃어 주세요, 어마마마. 네?”

파사칼리아는 말이 없었다. 파사칼리아의 손을 꼭 잡은 비올레타의 손등 위를, 다시 파사칼리아의 손이 부드럽게 덮었다. 모든 온기가 그 손 하나에 쏟아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파사칼리아의 물기 어린 눈이 천천히, 조금 서글프게 웃었다.

“……이제 다 컸구나, 내 아기가.”

5황녀 전하의 일생에 찬란하고 아름다운 날만이 가득하기를, 모두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메이어 백의 축사가, 이어지는 박수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파사칼리아가 비올레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너무 달아서, 눈물이 날 것 같은 목소리였다.

“어른이 된 것을 축하한다, 비올레타.”

“오늘 정말 아름다우셔요, 황녀 전하. 오늘은 진정 황녀 전하의 날입니다.”

“과분한 말이네요. 영애도 아름다워요.”

“황녀 전하, 성년을 맞이하신 것을 경하드려요! 혹시 저희 트레비안 가에서 보낸 선물은 잘 받으셨나요?”

“물론이에요. 아주 훌륭하더군요.”

“황녀 전하께서 만족하신다면, 저희 트레비안도 기쁠 거예요. 부디 잘 써 주시길.”

“고마워요.”

비올레타는 사실 그게 뭔지도 몰랐다. 그러나 수도 귀족 영애의 세련된 처세답게 그녀는 그렇게 받은 선물이 뭔지―정확히 비올레타가 그것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는 예의는 갖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용기 내어 물은 질문에 비올레타가 싱긋 웃으며 답하자 그것만으로 족하다는 듯 트레비안 영애는 곁의 영애를 힐끗 바라보며 수줍게 웃었다.

“소문대로 목걸이가 굉장히 아름다워요.”

“정말, 직접 보고 싶어 혼났답니다. 역시 소문대로예요.”

“소문이라니……. 벌써 소문이 났나요?”

비올레타는 뻔뻔할 정도로 모른 체 물었다. 이미 똑같은 말만 스무 번은 족히 넘도록 들은 상태였으나, 비올레타의 얼굴은 누가 봐도 처음 들은 것처럼 놀라 보였다.

“벌써라니요! 며칠 전부터 수도에 소문이 파다했는걸요!”

“에델가르드 공은 정말이지 대단하세요. 공께서 캐롤링의 왕가에서 직접 공수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블루 다이아가 거트루드 왕비의 사라진 보석이라면서요?”

“어머, 저는 몇 해 전 에른스트에서 발견된 것이라 들었는데. 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윈스터의 블루 다이아 말이에요.”

영애들이 눈을 빛내며 쏟아 내는 블루 다이아의 유래는 정작 비올레타도 모르는 이야기들투성이였다. 비올레타는 저 멀리 보이는 디아나의 뒤통수를 흘끗 바라보고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쥐뿔도 모르면서 마치 비밀이라는 듯 말없이 미소 짓는 스스로가 조금 가증스러웠으나, 영애들은 그 미소만으로도 뭔가 스스로 해답을 찾은 양 작게 탄성을 질렀다.

비올레타는 좀 더 웃어 주었다. 트레비안을 비롯해 그들의 가문은 죽은 황태자 미하일을 지지하던 가문이었고, 미하일의 사후에도 1황자나 4황자 보란 듯이 대놓고 에델가르드의 뒤에 서 있는, 몇 안 되는 수도의 대귀족이기도 했다. 후계 구도와는 상관없으나 황후와 에델가르드를 업은 황녀는 계륵 같은 존재였다. 황제의 하나뿐인 조카와 혼담까지 진행 중인 유일한 적통 황녀. 한마디로 비올레타는 모른 체하기엔 지나치게 대단했고, 열렬히 아는 체하기엔 조금 심란한 존재였다. 황녀가 황태자인 오라비를 잃고, 어떤 황자도 지지하지 않은 지금으로선 더더욱.

그러니 그런 가문의 딸들에게서 이런 순수한 호감을 받고, 그 호감을 유지시키는 것은 비올레타에게 퍽 중요했다. 그녀들의 입은 제 아비들의 귀로 이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런 사정과는 별개로 비올레타는 점점 피곤해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디아나가 때깔 좋은 메모―별다른 내용은 없는―를 들고 나타나 줄 때도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디아나는 제가 그렇게도 싫은 척하던 헤센 가의 영윤과 웃고 떠들고 마시고 즐기느라 비올레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비올레타는 잠시 디아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고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마침 날아온 다른 질문에 대답하려 하던 차였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영애들.”

비올레타는 순식간에 영애들과 자신의 사이로 자연스레 끼어든 칼을 조금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머, 로드리고 후작 각하!”

“트레비안 영애. 루도비카 영애. 일롯 영애.”

하나, 하나 다정한 발음으로 인사하며 영애들의 손등에 키스한 칼이 마지막으로 비올레타의 손을 낚아채듯 가져가 입을 맞췄다. 작위 승계 전 수도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몸에 밴 듯 우아한 동작이었다. 비올레타는 태연한 얼굴로 다른 영애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짜증스러운 시선을 칼의 정수리에 던졌다. 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그대로 맞부딪쳤다.

“그리고, 전하.”

다 안다는 듯 빙글빙글 웃는 청회색 눈동자가 밉상스러웠다. 비올레타가 당황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낼 때면 으레 칼은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조각처럼 잘 빚어진 얼굴 뒤에 가려진 짓궂고, 삐뚜름하게 웃는 악질적인 저 표정. 칼의 입매가 매끄럽게 휘어졌다.

“로드리고 후.”

“성년을 맞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선물은……, 보아하니 잘 받으신 것 같군요.”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드러난 귀에 매달린 커다란 보석은 단출하지만 그 자체로 화려했다. 남자의 만족스러운 시선이 귀에서 목 언저리를 가볍게 스쳤다. 이 인간, 분명히 일부러 흘린 것이다. 영애들의 눈이 새삼스레 특종이라도 잡은 양 반짝거렸다. 하긴 소문처럼 떠도는 말과 눈앞에서 본인들이 확언하는 것은 다르니까.

“잘 어울리셔서 기쁩니다. 아름다우시군요.”

“로드리고 후의 선물은 감사히 잘 받았어요. 언젠가 답례하죠.”

“답례는 한 곡의 춤이면 충분합니다. 물론…….”

칼이 말끝을 흐리며 점점 이쪽과 가까워지고 있는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비올레타의 시선이 덩달아 칼을 따라갔다.

“저, 에델가르드 공 다음에 말이죠. 감히 전하의 첫 곡을 탐낼 수는 없으니.”

라키엘은 마치 비올레타 곁의 칼을 보지도 못한 것처럼 비올레타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졸지에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서도 칼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피식 웃었다. 비올레타가 칼에게 몸을 조금 기울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왜 자꾸 웃어요?”

비올레타가 대뜸 삐딱하게 시비조로 물어 오자 칼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웃는 것도 내 맘대로 못 하나?”

일견 듣기에는 순수한 의문 같았지만, 그 편안해진 말투 기저에 깔린 웃음기를 감출 수는 없었다. 비올레타는 새초롬하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웃으면 불길하니까 그렇죠.”

“그렇게 너무 과민 반응할 것까지야. 안심해. 이미 말 끝났잖아. 난 네 편이라고.”

칼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이며 비올레타의 귓가에 속삭였다. 한 뼘은 족히 떨어진 거리였음에도 남자의 숨결이 귓가에 희미하게 와 닿았다. 비올레타가 어디서 수작 부리느냐는 듯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떨어지기나 해요, 내 옆에서.”

“나한테 먼저 붙은 건 너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올레타가 더러운 것이라도 닿은 양 홱 떨어졌다. 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였다. 라키엘은 제 앞을 수줍게 가로막을지도 모르는 영애들에게 선수 치듯 눈으로 대강 인사하고 비올레타의 맞은편에 섰다.

“이리 와.”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비올레타는 그 짧은 말 안에 가득한 가시를 느끼고 순순히 라키엘에게로 다가섰다. 그 가시를 느낀 건 비올레타뿐만이 아닌 듯, 칼이 묘한 눈으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비올레타의 목을 휘감은 휘황찬란한 보석에 시선을 옮긴 칼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정도였습니까?”

인사도 없이 대뜸 튀어나온 말은 놀리는 기가 다분했다. 라키엘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칼의 말을 그대로 무시하고는, 비올레타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을 재어 보려는 듯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칼의 눈에 어떻게 곡해되어 보일지는 뻔했다. 칼의 은근한 시선이 비올레타와 라키엘을 번갈아 오가자, 비올레타는 갑자기 낯부끄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비올레타가 칼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라키엘에게 잡힌 손을 살짝 빼내려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라키엘의 단단한 손끝이 비올레타의 손목을 휘감았다.

“가만있어.”

비올레타에게만 들리는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부드럽게 울렸다. 박동을 세고 있는지 라키엘은 그 뒤로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비올레타만 그럴지도 모르는. 그렇게 수십 초를 어정쩡하게 제 치맛자락 따위나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들자, 그대로 칼과 눈이 마주쳤다.

“……둘이 뭐 하나, 지금?”

차마 보기 아니꼬운 꼴이었다는 듯 칼이 빈정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라키엘은 그 말을 듣지도 못한 듯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이내 비올레타의 손목을 놓아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까보단 조금 낫군.”

비올레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얌전히 고개나 끄덕이고 있는 모습에 칼이 조금 기가 막힌 듯 실소했다. 라키엘이 그제야 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이제야 처음 칼을 발견한 것처럼 깍듯한 어조로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아직도 거기 계셨습니까?”

그 곁에 선 비올레타는 결코 보지 못할 싸늘한 시선이 칼을 응시한다. 칼이 코웃음 치며 되물었다.

“아직도?”

“자리를 떠나신 줄 알아 미처 인사하지 못했군요, 로드리고 후. 비올레타의 성년 연회에 귀한 걸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능청스러운 무시에 이어, 이번에는 마치 객을 맞이한 주인처럼 말하는 것이 우스웠다. 칼이 빙그레 웃으며 빈정거렸다.

“비단 공께서만 황녀의 사촌 오라비이신 건 아니실 텐데,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진작 로드리고 후께서 제 가여운 사촌에게 신경 써 주셨더라면, 로드리고 후는 제게 그런 말을 하실 필요도 없으셨을 겁니다.”

로드리고 박람회 이전까지의 무관심을 에둘러 꼬집는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데야 할 말이 없어 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라키엘이 그렇게 말하고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오케스트라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지휘자가 바뀌었고, 열다섯 남짓이던 연주자들은 배로 늘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올린의 조율 음이 들리자 라키엘은 자연스레 비올레타의 손을 끌어당겼다.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고, 여자가 그 손을 잡기를 기다리는 형식 같은 건 필요 없는 사이라는 듯이.

“이만 실례하죠. 미뉴에트minuet가 곧 시작될 거 같아서.”

실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일방적인 통보였다. 라키엘은 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비올레타를 댄스 플로어로 이끌었다. 인사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비올레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비올레타에게 있어 칼은 그런 사실이 썩 아쉽지 않은 상대라, 비올레타는 순순히 라키엘을 따라갔다.

제게는 단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던 여자였다. 속마음을 모르니 그저 순종적으로 보이는 비올레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칼이 조금 어이없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내 칼은 멀찍이서 바라보던 영애들에게 휩싸였다.

라키엘과 비올레타는 사람들이 만들어 준 좁은 길을 따라 이윽고 플로어의 중앙에 섰다. 그러자 길게 이어지던 오케스트라의 조율음이 마치 맞춘 것처럼 뚝 끊어진다. 곧 시작될 미뉴에트를 기다리듯 홀 안을 울리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란토니아인들은―물론 성년 연회를 치를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성년식의 첫 춤으로 미뉴에트를 선택하는 것이 관례였다. 미뉴에트가 성년 연회의 대명사가 되었을 정도로. 미뉴에트는 꼬박 백수십 년을 넘은 해묵은 고전이었고, 미뉴에트의 대단했던 유행은 지난 지 이미 오래였지만 관례로 남은 것만큼은 여전했다.

그 때문인지 근래의 젊은 황족들과 귀족들은 튀고 싶거나, 또는 그저 전통에 반항하고 싶은 마음으로 미뉴에트 대신 외국에서 갓 유행하기 시작한 춤이나 농민들의 춤을 선택하는 일도 유행처럼 종종 있었다. 그러나 비올레타에게는 반짝 떠오를 가십보다는 세상에 알려진 불안한 유년시절을 보완할 만한 안정적인 인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관례를 존중하는 것이란, 그녀를 따라다니는 잘난 적통이란 말에 썩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젊은 귀족들에게 고리타분한 인상을 남기는 것도 곤란했으므로, 비올레타는 백 년 전 수상음악에 수록된 미뉴에트를 그대로 쓰는 대신 캐롤링의 음악가가 좀 더 세련되고 화려하게 편곡한 미뉴에트를 선택했다.

관례는 충실히 따르되, 적당한 파격으로. 라키엘이 직접 고용한 캐롤링 출신의 젊은 음악가가 곧 지휘봉을 들어 올렸다. 비올레타가 장난스레 라키엘에게 속삭였다.

“오늘은 당신 발 밟힐 일 없어 좋겠네요.”

“행복하게도.”

피식 웃으며 대꾸한 라키엘이 비올레타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호른의 단조롭지만 웅장한 서주가 홀을 울렸다. 서로에게 가볍게 인사한 그들이 뒤돌아 그들을 둘러싼 관중들에게도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서로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마주하고, 작고 우아한 스텝으로 서로 비껴 섰다. 호른의 소리 위로 다른 악기들의 소리가 하나둘씩 겹쳐졌다.

이윽고 조금은 느릿한 3박자의, 화려한 선율이 시작되었다. 이제 사람들의 소음은 완전히 묻혔다.

약간 먹먹해진 귓가로 점점 음악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비올레타는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억누르며, 라키엘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하려 노력했다.

두 박 걷고, 한 박 무릎 굽히고, 또다시 그렇게 걷다가 오른손을 뻗어 서로의 손끝을 잡고 돌고, 다시 멀어졌다가, 당기듯 빨리 한 걸음…….

미뉴에트는 춤에 큰 재능이 없는 비올레타가 가장 그럴듯해 보이게 해낼 수 있는 춤이었으나, 속으로는 가장 부담스러운 춤이었다. 왈츠라면 파트너에게 몸이 반이나 가려진 상태로 파트너의 리드만 잘 따라가도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일 수 있지만, 미뉴에트는 제 앞을 가려 줄 것이 없었다. 게다가 눈에 띄게 화려한 동작이 없는 춤이었기에, 오히려 단순히 손을 뻗는 순서나 회전 방향을 잠시만 멈칫해도 눈에 여실히 띄고 마는 것이다. 더불어 사뿐사뿐 가벼워 보이는 주제에 지독하게 복잡한 스텝까지.

그러나 지금의 비올레타는 가히 완벽하다고 말할 만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라키엘과 서른 번은 족히 춘 구성이었다.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지.

비올레타는 새삼 그가 지독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로 시키니 이렇게까지 몸에 완전히 익은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다른 춤을 출 때와는 달리 제 발 밟힐 일도 없으니 마음껏 독하게 군 것이 틀림없었다.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서로를 비껴갔다가 길게 뻗은 손끝이 스치고, 기품 있는 걸음으로 다시 마주 본다. 그 일련의 반복 끝에 이윽고 1부가 끝났다. 간소하지만 좀 더 세련된 2부가 시작되고, 플로어로 젊은 남녀가 쌍쌍이 나타났다. 미뉴에트의 좋은 점은 짧고, 주인공이 이렇게 자연스레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연스레 관중 속에 섞여들었다. 사람들 사이로 나란히 걸으면서 비올레타가 라키엘에게 소곤소곤 일러바치듯 말했다.

“저기 저 감색 드레스 입은 영애 있잖아요.”

“알레노브가 여식 말인가?”

“아, 맞아요. 그 알레노브. 알레노브 백작 영애.”

“왜?”

“지금 곁에 있는 게 약혼자라 들었는데, 사실 저기 세르니 백작 영애랑 춤추는 잘생긴 영윤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서요?”

“……그딴 쓰잘머리 없는 가십은 대체 어디서 자꾸 배워 와?”

“아까 저 세르니 영애가 말해 주던걸요. 알레노브 영애는 엉덩이가 가벼운 여자라고 열변을 토하면서 말이에요. 아, 설마 저렇게 사각 관계라도 되는 건가?”

“그런 시시한 얘긴 좀 한 귀로 듣고 흘려.”

“라키엘, 당신이 뭘 모르나 본데 이런 사소한 가십도 여자들 세계에서 얼마나 유용한 정보력이 되는지…….”

문득 저 멀리 마주치는 시선에 비올레타가 말을 멈추고, 걸음도 멈췄다. 춤추는 남녀들 사이로 작게 보이는 빌키어스는 으레 눈이 마주칠 때면 다정하게 웃어 주던 것과 달리 무표정했다. 그것은 순간이었다. 춤의 대형이 일제히 회전으로 바뀌고, 빌키어스가 가려졌다. 비올레타가 왠지 모를 위화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라키엘이 반걸음 앞에서 멈춰 선 채 비올레타를 돌아보며 물었다.

“말을 왜 하다 말아.”

“아…….”

핀잔처럼 내뱉은 것과는 달리 라키엘의 시선이 조금 염려스러운 듯 비올레타의 안색을 살핀다. 몸이 더 안 좋아진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비올레타가 태연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라키엘은 비올레타의 말이 그리 미덥지 않은지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비올레타가 재차 미소 지었다. 그제야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라키엘이 비올레타를 이끈 곳은 의외로 칼이 있는 곳이었다. 여자들에게 사방으로 휩싸여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 광경이다. 칼에게서 여섯 발자국쯤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비올레타가 라키엘에게 뾰족하게 물었다.

“뭐예요?”

“뭐가. 그 선물, 로드리고 후에게 답례해야 할 것 아닌가?”

라키엘의 말엔 조금 날이 서 있었다. 그 빈정거림에 비올레타가 조금 기가 막힌 듯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마차에서 본 것과 같은 표정이다. 어쩐지 조금 놀리고 싶은 표정. 비올레타는 모른 척하고 다른 것을 물었다.

“그 말은 어떻게 들었어요? 그렇게 멀리 있었는데.”

“무슨.”

“답례는 한 곡의 춤이면 충분하다는 말.”

“저 뻔지르르한 작자가 한창 계집들한테 하고 다니던 말이지. 꼭 들어야 알 수 있는 말은 아냐.”

비올레타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라키엘이 제 말을 믿지 못하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이내 됐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비올레타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라키엘의 어깨를 잡고 제 쪽으로 당겼다. 라키엘이 저도 모르게 비올레타의 손길을 따라 어깨를 조금 기울여 주자, 그의 귀가 가까워졌다. 비올레타가 목을 조금 빼고 라키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왈츠 어떻게 추는지 알죠?”

“……뭐?”

“저 발, 잘근잘근 밟아 주고 올게요. 그럼 만족할 거죠?”

라키엘의 어깨를 몇 번 거만하게 두드린 비올레타가 라키엘의 손을 매정할 정도로 놓아 버리고, 칼에게로 걸어갔다. 라키엘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비올레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 미뉴에트가 끝나가고 있었다. 고고하게 여자들의 사이로 걸어간 비올레타가 이내 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플로어로 총총 사라진다.

그리고 얼마 후, 칼은 조금 파리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이국적인 음악이 경쾌하게 홀 안을 울렸다. 연회는 무르익을 만큼 무르익었고, 들뜬 분위기가 홀 중앙의 댄스 플로어를 가득 채운 한편, 그 주위는 늘 그랬듯이 딱딱하거나 혹은 순수하게 허황된 이야기로 가득했다.

비올레타는 상대방에게 지루한 기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지루하다기보다는 몸이 점점 버티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느 쪽이든 내비쳐선 안 됐다. 조금만 무성의한 인상을 줘도 그 황녀가 얼마나 거만했는지에 관해, 어디까지 부풀려질지 모를 일이었다.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소개해 준 부인들과 기나긴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무더기에 가까운 어린 영애들의 무리에 곧바로 붙잡힌 비올레타는 그 발랄함에 동조해 주기 위해 애썼다. 수십 번에 걸쳐 들어온 목걸이는 이제 그 첫 글자만 들어도 지긋지긋했지만, 그들의 최대 관심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올레타는 어느새 제 입에 붙은 짤막한 말을 기계적으로 읊으면서도 그들에게 최대한의 성의 있는, 혹은 그렇게 보이는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잊지 않았다. 그렇게 목걸이에 관한 이야기며, 제 귀에 달린 귀걸이까지 마무리가 되어 갈 즈음, 중간에 있던 영애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사실은, 오늘 연회에서 새로운 소문이 돌고 있는 것 아시나요?”

“무슨 소문 말씀이죠?”

“에델가르드 공과 로드리고 후가 황녀 전하를 두고 아까 꽤 심각하게 신경전을 벌이셨다던데…….”

그 은근한 미소에 비올레타는 칵테일을 고상하게 들이켜다 그대로 뱉을 뻔했다. 영애들이 이미 소진된 주제에 왜 그리 공을 들이는가 했더니, 목적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잘 훈련된 우아함이 그 황당함을 잠깐 멈칫하는 정도로 마무리했지만, 비올레타는 본능적으로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정말로 말이 안 되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그 말도 안 되는 삼자대면을 할 당시, 가까이에 이야기를 나누다 만 영애들이 있었다. 칼은 고맙게도 그들과의 대화를 적절한 시기에 끊어 줬지만, 그 소소한 고마움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커다란 먹이를 그들에게 던져 주었다. 역시 발을 좀 더 열심히 밟아 줬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비올레타가 보이지도 않는 칼을 향해 악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비올레타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웃어야 했다.

“……그것참 재밌는 농담이네요.”

“농담이라기보단 목격담에 가까웠죠.”

비올레타가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것을 한 영애가 곧바로 가로막았다. 비올레타는 그 얼굴을 머리에 새기듯 지그시 응시하며 조금 이를 갈았다. 다른 영애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황녀 전하께선 정말 삼각관계를 몰고 다니시는 것 같아요.”

“정말,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저번에도 그랬고, 오늘 연회에선……!”

좋게 해석하면 능력 좋다는 말이었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까졌다거나 헤프다고 비꼬는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요조숙녀인 영애들의 초롱초롱한 눈에는 선망 외에는 딱히 달리 보이는 것이 없었으므로 비올레타는 일단 안심했다. 반응이 이렇다면 상황은 딱히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이용해 볼 수도 있겠고. 비올레타는 노선을 좀 달리해 보기로 했다.

“에델가르드 공과 로드리고 후라니……. 소설 속에나 그런 남자들이 나오겠죠? 정말이지, 완벽의 극치잖아요.”

“아마 소설 속에도 없을 걸요.”

“맞아요.”

그래, 소설 속이었다면 좀 더 제대로 된 멀쩡한 남자들을 붙여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속으로 가볍게 빈정거린 비올레타가 딱히 부정하지 않은 채로 의미가 불분명해 보일―그랬으면 좋겠는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몇 명이 탄성을 뱉었다.

3황녀의 혼담과 로드리고 후의 청혼이 동시에 엮여 있을 땐,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었다. 물론 그 관계에서 가장 타격을 입었던 것은 3황녀였지만, 비올레타는 칼의 청혼을 받고 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 치정극의 훌륭한 주연이 될 수 있었다.

황제의 딸들, 이복자매가 한 남자를 두고 벌인 진흙탕 싸움. 비올레타는 물론 그 추문 같은 관계에서도 고고한 승리자였고, 그것이 어린 영애들에게 어떤 인상으로 비쳤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올레타에게 있어 결코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추문으로 엮이면서 많은 와전이 있었지만, 5황녀에게 청혼한 것이 로드리고 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에델가르드 공, 추밀원의 수장, 황후 파사칼리아의 조카, 황녀와 마지막 재상의 손자……. 라키엘 드 에델가르드에게 따라오는 수많은 수식어, 그리고 칼 드 로드리고를 대신하는 화려한 대명사들. 그 대단한 남자들이 한 여자를 동시에 마음에 둔 것도 추문이 될 것인가? 이 관계에서 정점에 있는 비올레타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

사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얘기일지언정,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고 근사한 독신 남성들이 매달린 여자로 회자되는 것은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인상에 꽤 훌륭한 효과를 선사할 것이었다. 계산을 끝낸 비올레타가 제법 개운하게 미소 지었다. 물밑에서 신빙성 없이 오가던 허구적 상상들은 스캔들이 될 것이다.

사실, 둘을 좀 골려 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고 말이다. 연애소설에나 나올 법한 떠들썩한 삼각관계의 주인공들이 된 소감이 어떤지는 직접 물어볼 작정이었다.

“저희에게만 살짝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로드리고 후의 청혼 말이에요.”

“절대 새어 나가는 일 없을 거예요. 저희를 믿으시고…….”

정말 믿음이 안 가는 말이었다. 단언컨대 이 연회장에서 제일 믿음이 안 가는 얼굴들이었다. 전형적인 가십을 쫓아다니는 영애들이었기에, 그만큼 밖으로 물고 나르는 것도 많아 더 친절하게 대해 준 것이었지만.

비올레타는 조금 곤란한 듯 웃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혼사는 모후母后께서 결정해 주실 중대한 사안이에요. 나는 따를 뿐이고요.”

“그래도 전하의 마음이 기우신 쪽은…….”

비올레타는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듯 조금 딱딱하게 웃었다. 개중 눈치 있는 영애 하나가 화제를 자연스레 전환시켰다. 수도에서 카사노바로 꽤 유명한 영윤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어떤 부인을 임신시켰다는 둥, 어떤 젠트리 계급 여자는 그 영윤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다는 둥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집중하지 못한 채 연회장을 곁눈질로 조금 훑던 비올레타에게 갑자기 다른 이야기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3황비 전하께서 오셨어요!”

“세상에, 지금 오신 건가요? 연회가 시작된 지가, 벌써 몇 시간이나 흘렀는데…….”

비올레타는 홀의 입구를 느릿하게 통과하고 있는 3황비, 카트린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곁에 남자까지도. 늘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던 남자의 근사한 얼굴이 웃음기 하나 없이 무표정했다.

비올레타는 제 고모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던 이카르트의 말을 문득 떠올렸다. 그러나 그 싫은 고모를 억지로 에스코트하게 됐다고 심통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귀여운 고모와 조카 관계가 아니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그러했다. 문득 머리가 지끈거렸다. 카트린느는 애초에 참석하지 않겠노라 고지까지 해 둔 상태였다.

파티 중반쯤 지나 파티의 주인공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입고 나타나는 것은 카트린느의 유명한 악취미 중 하나였다. 물론 그 주인공은 그녀가 일정 이상의 악의를 품은 대상이다. 새삼스레 놀라울 것은 없었다. 카트린느는 비올레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비올레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악취미가 다른 연회도 아닌 제 성년 연회에서 일어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무례였다.

마치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듯 카트린느는 비올레타에게로 좁게 트인 길을 따라 느리고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카트린느의 고혹적인 새빨간 드레스와 그녀의 지위, 그리고 그녀가 대동한 그녀의 근사한 조카는 홀의 모든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비올레타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트린느를 바라보다가 그 곁의 제 음악 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주치면 으레 웃어 주던 눈에는 어쩐지 조금 날이 서 있었다. 어쩐지 뭔가 이상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레슨해 주던 사람과는 다른 얼굴이다.

“3황비 전하께서 베론 경을 대동한 건 처음 아닌가요? 늘 4황자를 대동하셨잖아요. 확실히 그 소문이…….”

옆에서 재잘거리던 영애가 문득 비올레타의 눈치를 보듯 말을 멈추었다. 소문이란 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카트린느의 악취미를 말하는 것일 테다. 카트린느가 점점 가까워지자 비올레타를 둘러싸고 있는 영애들이 조금씩 물러났다.

“5황녀.”

“3황비님.”

비올레타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우아하게 인사하자, 카트린느가 빳빳하게 허리를 펴며 오만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주 내 궁에 찾아오라니까, 왜 오지 않아요.”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심지어 비올레타는 그녀와 대화하는 것조차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트린 느는 마치 비올레타가 제 호의를 거절하고 거리를 둔 것처럼, 다른 이들 들으라는 양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뻔뻔한 걸로 치면 이쪽도 지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당황한 기색 없이 생긋 웃으며 그 말을 공손하게 받아쳤다.

“제 편의대로 3황비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가는 게 3황비님께 폐가 될까 그랬습니다. 용서하세요.”

비올레타가 뻔뻔하게 받아치는 말에 카트린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카트린느는 이내 빙그레 웃었다.

“5황녀가 찾아오는 건 언제나 기쁠 겁니다. 앞으로는, 자주 오세요.”

비올레타가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끄덕였다. 카트린느의 뜨거운 손끝이 비올레타의 어깨를 한 번 세게 쥐었다 놨다. 별다를 것 없는 대화에 이쪽에 집중되었던 시선의 절반은 그대로 흩어졌다. 맥박이 불쾌하게 뛰기 시작했다. 붉은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성년을 축하해요, 5황녀.”

그렇게 말하며 카트린느가 비올레타를 당겨 다정하게 안았다. 그리고 스산하게 속삭였다.

“앞으로도 이렇게, 조용히, 살아 줘요.”

“…….”

“네 오라비처럼 병신같이 죽지 말고.”

천천히 몸이 떨어졌다. 기분이 진창으로 처박혔다. 낮게 내리깔린 시야로 카트린느의 새빨간 입술이 아찔하게 다물리는 모습이 보였다. 비올레타는 목을 꼿꼿이 세우며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을 힘주어 바로 떴다. 눈이 마주쳤다. 기억하고 있었던 대로, 적당한 악의였다.

생각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분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정을 잃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쥐고 흔들려고 한 말에 흔들리지 않는 것만큼 짜증스러운 반응도 없을 테니까. 비올레타는 웃었다. 계속 웃어 온 것처럼 극도로 태연한 얼굴이었다. 카트린느의 요염한 눈매가 잠시 가늘어졌다.

“성년을 축복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3황비님의 고매한 조언은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하겠습니다.”

동요 한 점 없이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공손한 인사에 카트린느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결코 마음에 드는 반응은 아닐 것이다. 비올레타는 그대로 카트린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무관심한 태도였다. 카트린느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베론 경.”

비올레타의 인사에 이카르트가 무표정하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비올레타는 어쩐지 석연찮은 느낌에 이카르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새삼스레 그가 참 잘 웃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카르트는 그저 웃고 있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 딱딱한 얼굴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비올레타는 심기 불편한 카트린느가 이카르트를 이끌고 사라지는 것을 두고 보았다.

어차피 그는 제 음악선생이었고, 물어볼 시간은 많았다. 사실 사람이 웃고 있지 않다는 게 대수로운 문제가 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비올레타는 카트린느가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무겁게 집중되어 있던 관심이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느낌에 피식 웃었다. 꽤 흥미로운 조합이었을 것이다. 최초였으니까.

성년 연회에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중도 입장이라니, 씹어 대기 딱 좋은 소재였지만 본인에게 곧장 달려와 조잘대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직 연회장에는 카트린느가 존재했다. 그 악명 높은 3황비의 눈에 일부러 거슬리고 싶은 여자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그란토니아의 사교계에서 가장 귀하신 몸이었다. 황후 파사칼리아는 비올레타가 유폐된 후 사교계에 관심이 전무하다시피 했고, 1황비 베티스는 표면적으로 가끔 체면치레 정도나 우아하게 하는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관습상 품위 유지를 위해 황제의 아내들은 그렇게 하도록 권장 받았고, 대신 제가 시녀로 둔 귀족 부인이나 영애들을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3황비는 사교계에 직접 뛰어든 유일한 황제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시녀들을 이용해 권위와 영향력만 앞세우기보다는 대체로 제 코앞에서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걸 좋아했다. 세간에서는 품위 없는 짓이라 비난하고, 황후나 1황비에 비해 조금 허전한 권력을 그렇게나마 체감하면서 채우고 싶은 것은 아닌가, 하고 비아냥거리는 이도 제법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별개로 그녀의 그런 행동은 사교계 여성들에게 실제로 꽤 위협적이었다. 비올레타의 성년 연회를 망쳐 놓은 것은, 그녀로서는 꽤 얌전한 축에 속할 정도로.

“악취미지.”

“…….”

문득 귓전을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비올레타가 고개를 조금 틀었다.

“네가 이해해라. 3황비님은 원래 저런 분이니까. 3황비님은 싫어하는 사람이 꽤 많으시거든.”

빌키어스가 부드럽게 말하며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여전히 낮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일로벨라의 성년 연회에도 저러셨지. 그땐 상복을 입으셨어.”

“그런가요.”

비올레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빌키어스가 짧게 웃고는 몸을 틀어 비올레타의 앞에 비스듬히 섰다. 마주친 얼굴은 으레 그렇듯이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조금 복잡해 보였다. 빌키어스는 비올레타를 그렇게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비올레타는 더 참지 못하고 조금 짜증스레 물었다. 의도 한 점 파악할 수 없는 눈을 오래 상대하는 건 꽤 지치는 일이었다. 빌키어스가 그제야 피식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정말이지, 그 눈이 미하일을 많이 닮은 것 같아서.”

대상이 빌키어스라는 걸 생각하면 미하일이란주제는 지금 딱히 좋은 주제가 아니었다. 초상화 외에 본 적도 없는 황태자를 닮았다는 말이 주는 불편함 역시도 달갑지 않았다. 사람은 익숙한 것과 비슷한 것부터 찾아내는 법이었고, 혹은 정말로 닮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본질적인 불편함은 어쩔 수가 없다. 얼어 버린 호수에 금이 가듯, 꽤 완벽해진 현실이 결국엔 모두 거짓임을 일깨워 줄 뿐이었으므로.

“미하일이 지금의 널 봤다면 기뻐했을 거다.”

“…….”

“네 얘길 많이 했었지. 널 많이 그리워했다.”

미하일이 살아서 그녀를 보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한다면 빌키어스의 말은 꽤 해괴한 소리였다. 빌키어스는 그렇게 말하는 제 모순을 알아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굳이 그 모순을 끄집어내지 않았다. 문득 죽은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을 스친다. 결국 미하일이 그렇게 그리워한 이도, 그렇게 그리워했다는 미하일도 이미 세상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키어스는 그저 말해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 눈이 진심일수록, 그가 어쩌면 미하일을 진심으로 아끼던 시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수록 비올레타는 빌키어스가 싫어졌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그를 비웃는 대신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빌키어스의 눈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할 말이 더 남은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 망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간 그들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비올레타는 잠자코 그를 기다리다, 이내 더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 빌키어스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표정이 조금 변한 빌키어스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게 팔을 뻗어 비올레타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이게, 무슨…….”

“비올레타.”

비올레타는 말문을 막는 제 이름에 입을 다물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빌키어스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과 같은 미적거리는 기색은 조금도 찾을 수 없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다. 잘 만들어진 표정과 동요 없는 완벽한 부드러움. 빌키어스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내리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오늘은 붉은 것을 조심해.”

비올레타가 그의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빌키어스는 미련 없이 비올레타의 손을 놓았다.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한다, 비올레타.”

그 말을 끝으로 빌키어스는 사라졌다.

비올레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멀찍이 서 있는 카트린느를 바라보았다. 드넓은 홀에 단 하나 존재하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여자의 싸늘한 눈빛이 비올레타와 마주치자 신경질적으로 돌려졌다.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리자 그 곁에 선 이카르트의 상이 불분명하게 일렁였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웠다. 기묘한 불안감에 비올레타는 잠시 머리를 짚었다가 빌키어스의 말을 되새기며 구석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경고였나.

비올레타의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불안하게 배회하며 붉은색을 찾았다. 늦여름이라 의복이 얇은 탓에 하나같이 채도가 낮은 옷들뿐이다. 잇새가 느릿하게 꽉 다물렸다. 비올레타는 가까스로 입매를 끌어올리며 마주치는 시선마다 웃어 주었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비올레타는 돌연 앞에서 튀어나온 무언가와 부딪쳤다. 그녀는 제 허리께를 붙잡은 작은 손을 바라보았다. 이제 고작 아홉 살은 됐을까.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옆으로 넘어지기 직전 겨우 드레스 자락을 잡은 손이 조심스레 떼어졌다. 비올레타가 누군지 아는 모양인지 아이는 잔뜩 겁을 먹은 채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딱 동생 밀리에나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매를 보자 문득 혼탁했던 주위가 환기되는 것 같았다. 비올레타가 몸을 낮춰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미안해…… 요.”

아이가 우물쭈물 겨우 뱉어낸 사과에 비올레타가 생긋 웃었다.

“괜찮아. 혹시 부모님을 잃었니?”

아이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디 계시는데?”

자그마한 손이 주춤주춤 자신 없게 사람들 속을 가리켰다. 그다지 확신은 없어 보였다. 이리저리 조금씩 흐트러진 행색하며, 뛰어오다 자신과 부딪친 걸 생각하면 꽤 말괄량이인 모양이다. 다른 아이들과 장난치다 부모님을 잃어버렸겠지. 밀리에나가 자꾸만 겹쳐 보였다.

문득 입안이 썼다. 비올레타가 애써 떨쳐내듯 웃으며 물었다.

“언니가 찾아줄게. 이름이 뭐야?”

“이벨린이에요, 전하. 이벨린 블란치!”

아이는 그새 비올레타가 편해졌는지 제법 또랑또랑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블란치라면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제법 뼈대 있는 중급 관료 가문이었다. 비올레타가 손을 들어 헝클어진 머리칼을 다듬어 주었다. 비올레타의 손길을 얌전히 받고 있던 아이가 종알거렸다.

“황녀 전하는 진짜 예뻐요.”

“네가 더 예뻐.”

“예쁜 황녀 전하가 머리 만져 줬다고 자랑할 거예요! 자랑해도 되나요?”

“물론이지. 내가 예쁘다고 말해 준 것도 자랑하렴, 이벨린. 누구한테 자랑할 거니?”

“음, 에스틴이랑, 로즈웨더랑, 미케일라랑…….”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 자랑할 친구 목록을 읊던 아이가 문득 떠오른 듯 소리쳤다.

“전하, 생일 축하해요!”

“고마워.”

뜬금없이 터져 나온 축하 인사가 우스워, 비올레타가 픽 웃었다. 아이가 제 팔에 끼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선물이에요.”

고사리 같은 손바닥 위로 작은 조각 사탕 하나가 올려져 있다. 요즘 유행하는 손톱만 한 조각 사탕이었지만, 귀족 아이의 간식거리답게 고급스러운 하얀색 포장지가 샹들리에 빛을 받고 반질거렸다. 비올레타가 빙그레 웃으며 사탕을 받아 들고, 깨끗하게 포장을 까서 입으로 가져갔다. 코끝에 맴돌던 달콤한 사과 향이 입안으로 퍼진다. 아이가 기쁜 듯 손뼉을 쳤다.

“맛있어요?”

“아주 맛있어. 선물 고마워.”

“이것도 자랑할래요! 황녀 전하한테 선물 준 거!”

“그래. 그러렴.”

비올레타가 아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 주위를 살폈다.

“이벨린, 부모님은 아직 안 보이니?”

“네.”

비올레타의 물음에 아이의 얼굴이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언니가 같이 찾아줄게.”

비올레타가 걱정 말라는 듯 아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킨 것처럼 조금 어지러웠다. 빈혈인가, 하는 생각이 대수롭지 않게 머릿속을 스쳐 갔다. 오늘은 애초부터 그다지 몸이 좋은 상태도 아니었고, 그런 상태에 가벼운 어지럼증이라면 딱히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어지러움은 순식간에 심해졌다. 비올레타는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바로 섰다. 돌연 귀가 턱 막히고, 이명耳鳴이 귓속을 가득 채웠다. 지금 제가 밟고 선 땅이 마치 땅이 아닌 듯, 불안정하게 발끝이 떠오르는 느낌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비올레타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맥박이 지나치게 빨라졌다. 문득 아이가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부탁은 해 두어야 한다. 비올레타는 겨우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아이가 사라졌다.

비올레타는 황망한 얼굴로 제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이가 없다. 비올레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라진 아이를 찾으며 아이의 특징을 하나씩 떠올렸다. 옅은 금발의 곱슬머리, 하얀색 리넨 원피스, 하얀 레이스 머리띠…….

구두는 어떤 색을 신었더라. 드레스와 슈트 사이로 문득 여자아이의 옅은 금발이 설핏 보이고 사라졌다. 목구멍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 비올레타는 극심한 어지러움 속에서 가까스로 걸음을 뗐다. 구두는, 아마도 검은색…….

그때, 교차하는 사람들 사이로 아이가 다시 보였다. 아이의 경쾌한 몸짓에 따라 나풀나풀 나부끼는 하얀 원피스 자락 위로 허리를 동여맨 붉은 공단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귓전에서 이명처럼 빌키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제히 커지는 온몸의 맥박 소리와 함께, 땅이 눈앞으로 기울었다. 어쩌면 쏟아지는 것도 같았다. 시야가 기이하게 늘어졌다. 순서도 없이 몇 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비올레타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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