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2막-1장>
비올레타는 황후궁 앞에 멈춰 선 마차 속에서 손에 쥐고 있던 공단 주머니를 들어보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파사칼리아에게 줄 목걸이였다. 칼이 데려간 로드리고의 거대한 금고에서 직접 골라낸, 블루 다이아몬드가 아름다운 목걸이.
그동안 미안했다며 하나 골라 보라는 칼의 말에 비올레타는 이 인간이 뭐 잘못 먹었나 싶어 한참을 바라봤었더랬다. 곧 이 정도야 그 남자에게 아무것도 아니겠다 싶어 시키는 대로 골랐지만. 여차저차 비올레타는 부담 없이 파사칼리아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비올레타로서는 처음 하는 여행이었으니, 기념품 정도는 드리고 싶었다.
그 황제의 목걸이가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황제를 떠올리자 꺼림칙해지는 기분에 비올레타는 주머니를 꽉 쥐었다. 애써 생각을 돌렸다.
그나저나 내리라는 말이 왜 이리 한참 없지. 비올레타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비올레타는 문이 열리자마자 마주친 얼굴에 잠시 말을 잃었다. 무심코 올라갔던 입매가 어색하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화났나?
제가 상상했던 얼굴은 이게 아닌데 싶어 비올레타는 의아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아 보였던 라키엘은 잠시 말없이 비올레타를 노려보듯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이내 한숨처럼 짧게 내뱉었다.
“내려.”
비올레타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주섬주섬 주머니를 손목에 걸고는 라키엘이 뻗은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땅 위로 비올레타를 내려놓자마자 더 볼일 없다는 듯 놓아 버리는 손이 쌀쌀맞다. 비올레타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화났어요?”
“…….”
“화났네요.”
비올레타는 확실히 결론 내렸다. 라키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왜 화난 거예요?”
“닥치고 예쁘게 걷기나 해.”
그 침묵 끝에 들은 말이 고작 이것이다. 나직하게 내려앉는 날카로운 말에 비올레타가 울컥해 걸음을 멈췄다. 피곤한 듯 돌아보는 얼굴이 마치 제가 더 화났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두 배로 울컥했다.
“왜 화가 났냐고 물었잖아요. 기껏 오랜만에 보면서.”
“왜 화가 났냐고?”
라키엘이 낮게 이죽거렸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비올레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몰라서 물어?”
그렇게 물어봐도 답답한 건 이쪽이었다. 비올레타는 정말로 아는 게 없었다.
“몰라요. 다짜고짜 얼굴 보자마자 나 화났다,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아요?”
“넌……. 됐다. 일단 들어가.”
비올레타가 입을 꾹 다문 채 제 팔을 잡아오는 라키엘의 손을 뿌리쳤다. 라키엘의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비올레타도 지지 않고 인상을 썼다. 그런 비올레타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손목을 다시 꽉 움켜쥐었다. 비올레타는 당연히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뿌리치려 해도 도무지 뿌리쳐지지 않는 강한 힘이 손목을 옥죈다. 비올레타는 그 몇 번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싸늘해진 얼굴로 말했다.
“라키엘, 이거 놔 줘요.”
“들어가지.”
“……이러는 거 싫어요. 놓으면, 혼자 걸어갈 테니까.”
라키엘이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비올레타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시녀들이 점점 웅성대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런 꼴로 황후궁 앞에서 더 서 있을 순 없었다. 비올레타는 얕게 한숨을 뱉으며 제 고집을 곧바로 꺾었다.
“들어가요.”
비올레타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라키엘은 비올레타의 얼굴만 물끄러미 내려 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라키엘.”
비올레타가 이젠 달래듯 이름을 불렀다. 라키엘, 하고 한 번 더 부드럽게 부르는 소리에 라키엘이 말없이 비올레타를 바라보다 천천히 잡은 팔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주변 일대가 죄 경악으로 물드는데도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기행에 더 놀라 그런 것엔 미처 신경도 쓰지 못했다. 세게 잡힌 팔 그대로 비올레타의 허리가 단단하게 감겼다.
“라키엘!”
늘 그랬듯 관중들 앞에서 열흘만의 반가운 해후를 연출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마냥 맞춰 주기엔 어딘가 꺼림칙했다. 비올레타는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 조심스레 몸을 꼼지락댔다. 지켜보는 눈이 한둘도 아닌데 보란 듯이 떨쳐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올레타의 그런 노력을 비웃듯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점점 더 깊게 감겼다. 답지 않게 힘이 꽉 들어간 손이 넝쿨처럼 허리며 팔을 죄어 왔다. 라키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낮게 귓전을 울렸다.
“가만있는 게 좋을 거야.”
“무슨 입을 자꾸 닫으래.”
“지금 참고 있으니까.”
제법 협박하는 것 마냥 사납게 들려오는 어조였다. 비올레타는 입을 꾹 닫은 채 라키엘이 저를 놓아주길 기다렸다. 그렇게 얌전해진 비올레타가 마음에 들었는지 라키엘은 허리를 껴안았던 손을 들어 비올레타의 뒤통수를 툭툭 두드렸다.
마치 어린애 취급당한 것 같은 기분에 비올레타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라키엘의 손을 제 머리에서 떼어 내며 부루퉁하게 라키엘에게서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일단 기분이 풀렸나 싶은 안도가 드는 자신이 우스운데 어쩔 수 없다.
비올레타의 부루퉁한 얼굴을 힐끗 내려 본 라키엘이 피식 웃었다. 라키엘이 잡은 비올레타의 팔은 그대로 이어져 있었으나, 비올레타는 안겨 있다 풀려난 것만으로 이제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그 팔을 가만히 두었다.
“얌전히 가만있었으니, 이제 말해 줘요.”
다시 바라본 라키엘의 새까만 눈동자는 처음에 보았던 화난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차분했다. 그래서 비올레타는 당연히 그 입에서 나올 말도 대수롭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로드리고 후가 청혼했어.”
“3황녀한테요? 그거 잘됐네요.”
“너에게.”
“그랬구나.”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던 비올레타가 돌연 무언가에 맞은 듯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누가, 누구한테, 뭐요?”
“로드리고 후가 5황녀에게 청혼하겠다고 황후 폐하께 서한을 보냈다. 공식 서한은 내일 다시 보내겠다고 하던…….”
“이 미친 작자가!”
비올레타의 입에서 비명처럼 터져 나온 본능적인 외침에 라키엘이 만족스레 웃었다.
“그 사람은 진짜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래, 잘 알고 있지.”
라키엘이 깊이 공감한다는 듯 맞장구쳤다. 순간 둘의 관계에 관해 잠시 생각한 비올레타가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을 이었다. 그 미친놈에게는 속에 쌓인 화가 많았다. 뭐? 청혼?
“말도 안 돼. 진짜 처음엔 막 여기까지 와서 자기 귀찮게 한다고 날 구박하는 거예요. 르네비어 님도 르네비어 님의 뜻이라면서 중간에서 기사들한테 거짓말하게 해서 못 만나게 하고, 사람들 안 보는 데만 가면 막 갑자기 반말하고 나 괴롭히고! 그래 놓고는 사람들 보는 데서만 잘해 줬단 말이에요. 가증스럽게!”
“그랬단 말이지.”
라키엘이 알겠다는 듯 비올레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속셈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가 위험하게 일렁였다. 비올레타가 그동안 쌓인 서러움을 토로하듯 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흡사 밖에서 싸우고 돌아와 제 부모에게 이르는 어린아이 마냥,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로드리고에서 그동안 홀로 참았던 것을 라키엘에게 하나하나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그 인간은 거들떠도 안 봤단 말이에요, 날! 그래서 일정도 대부분 몬드리올 백작부인과 소화했죠.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려고 했어요. 몬드리올 백작부인에게 들어 보니까 게으르게 살려고 꽤 노력했던 인간이기에! 근데 그러더니 3황녀에게 혼담을 받자마자 너도 당해 봐라, 이러고는 갑자기 날 여기저기 죄다 끌고 다니잖아요. 내가 3황녀더러 혼담 넣으라 시킨 것도 아닌데.”
“그랬군.”
“정 끌고 다녀야겠다, 그럼 박람회에나 처박혀있을 것이지, 첫날에는 얌전히 박람회 잘 가더니 갑자기 그다음 날부터 베르텐 지하 광산을 가자고 하질 않나, 북로드리고의 공장 지대로 끌고 가질 않나, 그 넓은 루밀스 포도밭의 저장 창고를 죄다 다녔단 말이에요. 아직도 발바닥이 터질 것 같아요. 그래, 이미 당신은 잘 알고 있겠죠. 모르는 게 없으시니까. 그래도 말해야겠어요. 사냥터에 간 게 진짜 최악이야. 아무 말도 안 하고 데려가 놓고는 다 와서 막 ‘사실은 여기에 곰이 있다’ 이러면서 실실 웃으면서 겁을 주질 않나! 내가 거기서 얼마나…….”
“그래.”
라키엘이 진정시키듯 비올레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런데 뭐? 제가 나한테 청혼을 해? 그거 완전 정신병자 아냐…….”
“완전히 정신병자지.”
라키엘의 차분한 목소리가 지극히 당연한 말이라는 듯 비올레타의 말을 긍정했다. 흔치 않게 돌아오는 라키엘의 추임새에 비올레타의 서러움은 극에 달했다. 그래, 비올레타에겐 이런 순간이 필요했다. 그자에게 당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이.
“그러고는 갑자기 자기보고 이름을 부르래요. 그건 무슨 조울증 환자도 아니고……. 언제는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죽여 버릴 것 같이 굴어 놓고서. 그러고 보니 3황녀에게 혼담 받은 주제에 청혼은 어찌한 거야?”
“……이름?”
라키엘이 딱딱하게 중얼거렸으나 비올레타는 듣지 못한 채로 남은 울분을 쏟아 냈다.
“진짜 이상하다니까요. 완전히 이상해요.”
“그래. 이상하군.”
라키엘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비올레타를 다시 안았다. 경황이 없는 비올레타는 제가 안긴 것도 모르고 계속 중얼거렸다. 비올레타의 시야에서 라키엘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라키엘의 인상이 서서히 구겨졌다. 라키엘이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으로 비올레타를 좀 더 깊이 안았다. 비올레타의 중얼거림이 라키엘의 가슴에 막혀 웅얼거리는 소리로, 그러다 이내 답답해 놓아 달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그는 여전히 어두운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사람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보라색 꽃다발을 든 사람이 들어왔다. 비올레타가 기막힌 듯 그 꽃다발을 노려보다 그 뒤로 이어지는 행렬에 짧게 코웃음을 쳤다. 하나일 줄 알았던 사람들은 둘을 지나 셋, 넷이 되더니 열에 이르렀다. 비올레타는 삐딱하게 앉아 제 앞에 수북이 쌓이고 있는 스타치스 꽃들을 바라보았다. 스타치스 꽃은 그란토니아인들이 여름에 청혼할 때 으레 쓰는 여름꽃이었다.
꽃이 모두 놓이자, 마지막으로 로드리고 후의 부관이 다가와 꽃 위로 봉투를 정중하게 놓고 나갔다.
“전하, 이렇게 싱싱한 스타치스 꽃들이 많은 건 처음 봐요!”
루이즈가 스타치스의 작은 꽃잎들을 어루만지며 탄성을 질렀다. 꽃다발이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짐짓 도도한 태도로 지켜보던 밀로일라와 디아나 역시 상기된 기색으로 꽃다발 옆으로 다가왔다.
“전하, 정말 로드리고 후와 아무 일도 없으셨던 것 맞아요?”
밀로일라가 미심쩍은 듯 비올레타에게 물었다. 소파에서 몸을 조금 일으켜 짜증스레 봉투를 집어 들던 비올레타가 밀로일라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뭐가 어째?”
이제 익숙해졌는지 노려보는 시선 따위에는 끄덕도 없다. 밀로일라가 비올레타를 놀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덧붙였다.
“어제까지야 전하 말씀 철썩 같이 믿었지만……, 오늘은 사태가 보시다시피 이러니 말이에요.”
비올레타가 순간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봉투에서 봉인을 떼어 냈다. 꽃을 뒤적이던 디아나가 무심결에 말했다.
“어제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보다 이 꽃다발이 더 그럴듯하네요.”
“디아나, 넌 이 과장되고 거짓된 행태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후작께서 정말 반하셨다면…….”
“시끄러워,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마.”
비올레타가 디아나의 말을 일갈하고는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이내 비올레타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비올레타가 못 볼 걸 봤다는 듯 편지를 봉투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말은 기껏 정중하게 물어 놓고선 밀로일라가 눈을 반짝이며 비올레타가 봉투를 놓기 무섭게 가로챘다.
“어머어머, 엘 로이니의 청혼시請婚詩네요!”
밀로일라의 말에 호기심이 동한 디아나가 밀로일라의 뒤로 가 편지를 쓱 훑고는 탄성을 질렀다.
“로드리고 후작께서도 참, 로맨틱하시네요. 엘 로이니라니. 그란토니아에선 그리 유명하지 않을텐데. 브란젤 시가 아름답긴 하죠.”
“…….”
“맙소사, 후작께서 엘 로이니요?”
루이즈가 쪼르르 달려가 그들에게 달라붙었다. 아주 가관이다. 비올레타는 더 듣기 싫어 편지를 뺏기 위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새 편지를 다 훑은 루이즈가 비올레타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그러고 보면 후작께서 성가신 거 싫어하시긴 해도 전하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무례하신 분은 아니거든요. 로드리고 후작 각하는 어릴 때부터 봐 온 제가 잘 알아요.”
아니, 그건 착각이야. 넌 아직 그 인간을 잘 몰라.
“로드리고 후와 친척 사이인 루이즈가 저렇게 말하는 데야…….”
“하긴 작위 승계 받기 전 수도에서 한창 계실 때만 해도, 매너 좋기로 유명하셨죠.”
복장 터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었을 것이다. 밤새 침대에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욕하던 사람들이 대체 어디 사는 누구지?
“밤새 얘기한 건 대체 어디로 들었기에 이래? 응? 대체 왜 이러는데?”
“그야, 너무 로맨틱하잖아요.”
“전하.”
밀로일라가 문득 진지하게 부르는 소리에 비올레타가 편지를 빼앗아 들며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왜.”
“그 정도 얼굴, 흔히 있는 게 아니에요.”
“…….”
“그러니 일단 있을 때 즐기셔요, 전하.”
저걸 말이라고 한다. 비올레타는 편지를 꽃 속에 내팽개쳤다.
“구경할 만큼 다 했으면, 이제 나가 봐.”
저들끼리 하하 호호 웃고 떠들며 나가는 모습에 황당한 심정이 두 배로 불어났다. 속이 확 뒤집힌다.
비올레타는 문이 닫힌 방 안에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꽃 주변을 서성거렸다. 일단 이 꽃들을 치워야 하는데, 그래야 할 텐데. 그래야 이 뒤집힌 속이 가라앉을 것 같은데. 수북이 쌓인 꽃 위로 남자의 얄밉게 웃는 얼굴이 환각처럼 떠올랐다.
받는 쪽에서 달가운 보통의 청혼이었다면 꽃이 여자의 집 곳곳에 장식되어야 마땅하겠지만, 당연히 전혀 그렇지 않았으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가차 없이 이 많은 꽃을 곧바로 내다 버리면 지금도 한창 꼬일 대로 꼬인 소문이 어떤 처절한 마무리를 짓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다른 방에 처박아 두는 것 역시 소문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고의 가치도 없이 거절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내다 버리진 못하고, 짧든 길든 당분간 이 꽃을 이 방에 그대로 둔 채 안고 살아야 한다. 비올레타는 창가로 걸어가 로드리고 가의 마차가 제 궁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잘 지내보자는 게 이거였나? 이 아무 데도 쓸데없는 꽃 무더기? 삼각 스캔들에 얌전히 휘말려 준 걸로도 모자라서? 비올레타의 눈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노려보듯 가늘어졌다.
“무슨 생각 해.”
비올레타는 바로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놀란 기색도 없이 몸을 돌렸다. 비올레타의 옆으로 다가선 라키엘이 비올레타가 바라보던 창밖으로 이제는 점이 된 로드리고의 마차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당분간은 궁에만 있어.”
“이틀 뒤면 클레이런스 가의 파티가 있어요.”
“지금은 득보다 실이 많아.”
짧게 대꾸한 라키엘이 몸을 돌려 스타치스 꽃들이 쌓여 있는 테이블 가로 다가갔다. 기다란 손가락이 꽃 무더기에 반쯤 파묻힌 편지를 꺼냈다. 무심한 시선이 편지를 읽어 내렸다. 비올레타가 창가에 기댄 채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재밌군.”
전혀 재밌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라키엘이 건조하게 내뱉었다. 비올레타가 피식 웃었다.
“결혼을 피하겠다고 스캔들로 이용해 먹는 걸로도 모자라서 그 질척한 혼담 관계에 날 끌어들인 게?”
“그에 대한 대가 정도는 준비할 자야. 나쁜 상황은 아니지.”
대가. 비올레타가 혀끝으로 소리 없이 뇌까렸다. 돌연 입안이 썼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해요?”
“뭘 말이지?”
묘한 눈으로 라키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이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라키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널 이용하는 것 같아?”
“당연한 일이라는 거 알아요.”
“맞아. 이용하는 거.”
라키엘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들리는 것처럼 깔끔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제 속이 왜이렇게 불편한지 알 수 없다.
비올레타 역시 알고 있었다. 청혼에 대해 들은 순간부터,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그러니 라키엘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다른 남자의 청혼을 당장 거절하라고 제게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저 스타치스를 당장 내버리라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구질구질하게 길어지는 생각을 잘라냈다.
결국 저 혼자 잠시 다른 생각을 했던 것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착각한 것이다. 제 허리를 끌어안던 팔, 제 이마에 닿았던 입술, 저 남자에 대한 생각들, 제 속을 간질이던 무언가. 저도 모르는 새, 저 얼굴을 보지 못하는 열흘 동안, 저는 대체 머릿속에서 무엇을 키웠을까. 저 남자와 연애 놀음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마치 제가 ‘진짜’가 된 양.
갑자기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정말로, 제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들을 깨달았다. 그녀는 제 것도 아닌 청혼에 진심으로 불쾌해 했다. 남자가 질투로 그것을 당장 잘라내지 않고, 저울 위에 올리는 것에 실망했다. 언제나 제 주제를 잊지 않고 있는 척하면서, 결국은 제가 처음부터 황녀였던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저를 체스 말처럼 둔 것도 멍청하게 잊고, 그렇게 저 혼자서 들떠 있었던 것이다. 남자가 거절하지 말라고 말한 청혼이, 진짜 제 것인 것처럼.
저는 그래서 그에게 실망한 것이다.
결론은 수치스러웠다. 갑자기 저도 몰랐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자기혐오가 속에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가, 실망이라니.
“알고 있어요.”
“당연한 것 아니야.”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 작게 달싹이던 비올레타의 입술이 그대로 닫혔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내린 시야로 또각또각, 라키엘의 우아한 걸음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이 싫다고 말해도 뭐라 안 해. 싫으면 싫다고 해. 네 일이야.”
“…….”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어.”
넌 ‘진짜’니까.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소리는 옛날이야기 속 악마처럼 달콤했다. 목 끝까지 차오른 자기혐오가 넘실거렸다. 마치 조롱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녀는 라키엘이 아니라, 제가 싫어졌다.
애초에 비올레타는 제가 설사 계속 착각하고 있었다 해도, 결코 이 상황에 대해 싫다 말하지 않을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 설령 저 로드리고 후가 어떤 작정을 하고 이랬건 간에 적어도 1황자와 로드리고의 결합을 막을 수 있는 기회였다.
설령 제가 진짜였다고 한들, 저부터가 놓칠 리 없다. 그런 주제에 도대체 라키엘에게 뭘 바랐을까. 속이 이렇듯 뒤엉킨 것은 결국 제가 가짜이기 때문이었다.
진짜였다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들.
“싫지 않아요. 가짜 청혼이 뭐가 대수겠어요.”
비올레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라키엘의 내리깔린 눈과 마주친다.
“내가 가짜인데.”
라키엘 외엔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였다. 마치 저항처럼 돌아온 비올레타의 나직한 목소리에 라키엘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라키엘의 음성이 사납게 가라앉았다.
“화내고 싶으면 화내.”
“당분간 이대로 있으면 되겠죠. 답신 없이, 대외활동 없이. 어마마마께도 그렇게 전할게요.”
비올레타가 빙긋 웃었다. 라키엘의 새까만 눈동자가 비올레타의 속을 읽어 내듯 천천히 움직였다.
“그럼 이만 가 봐요. 쏜튼 경한테 들었어요, 요즘 많이 바쁘다고.”
비올레타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하고는 라키엘을 비껴 지나쳤다.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참아.”
“참고 있어요.”
“잠깐이야.”
“알아요.”
“그 잠깐이 지나면, 네 마음이 어떻든 간에 이 편지는 찢고.”
“…….”
“저 꽃들은 다 불태워 버릴 거니까.”
살벌한 내용과는 달리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러나 그 차분한 음성에 소유욕이 희미하게 스며 있어 기묘했다. 속이 진창처럼 뒤엉켰다. 비올레타가 얕게 한숨을 뱉었다.
비올레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키엘을 돌아보았다. 겨우 다시 마주친 암녹색 눈에 라키엘은 인상을 찡그렸다. 라키엘이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고르지 못한 채 그저 목 끝에 차오른 말을 삼켰다.
그런 얼굴로 괜찮다는 게, 싫었다.
수도 에델가르드 공저.
칼은 소파에 길게 기대앉아 시큰둥한 눈길로 고풍스러운 벽지 따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이 방에 들어온 지는 두 시간, 돌려 말하는 거절이라고 봐도 좋을 대기 시간이 지났다. 정작 본인은 별생각이 없었지만, 곁에 선 시종은 그렇지가 않은지 시종일관 안절부절못한다. 시종이 문을 살며시 열어 고개를 내밀고 밖을 내다봤다 다시 들어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후작 각하, 공작 각하께서 접견실에 계십니다.”
장장 두 시간 만에 들은 말에도 칼은 여유로운 작태로 일어났다. 시종의 빠른 발걸음에 따라 곧장 안내된 칼이 성가신 듯 시종을 물리며 손수 문을 닫았다.
라키엘이 소파에서 우아하게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에델가르드 공.”
깍듯한 인사가 오고 갔다. 썩 부드러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매끄러운 순서로 칼은 라키엘의 맞은편에 앉았다. 라키엘이 짤막하게 물었다.
“차는?”
“필요 없습니다.”
“삼 년 만이군요. 승계 전에 본 것이 마지막이니.”
“벌써 그렇게나. 아, 선대 에델가르드 공의 일은 유감입니다.”
그들의 격조한 사이를 방증하듯 족히 반년은 지난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태연하게, 대수롭지 않게 튀어나왔다. 라키엘의 입매가 미세하게 비틀렸다가, 이내 부드럽게 휘었다.
애초에 이렇게 예의 갖춘 척 말이 오갈 사이도 아니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나서 바라보아도 서로가 싫었던 소년들은 그대로였다. 라키엘의 의례적이고도 짧은 답변에 예의상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칼이 대뜸 물었다.
“예물은 잘 전달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예물?”
까닭모를 물음에 라키엘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칼이 씩 웃었다.
“그 블루 다이아. 황녀 전하께 하나 쥐여 보냈을 텐데요.”
라키엘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이내 설마, 하는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비올레타가 기념품이랍시고 파사칼리아의 목에 둘러 주던 블루 다이아 목걸이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웃던 모습도. 라키엘이 칼의 눈에 보이지 않게 빠득 이를 갈았다.
“5황녀 전하께서 보는 눈이 있으시더군요. 금고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값비싼 것을 고르시던데.”
“그 목걸이라면, 비올레타는 황후 폐하께 로드리고의 ‘기념품’이라고 하며 드렸습니다. 무언가 오해가 있어 잘못 전달된 것 같군요.”
“뭐, 신부 어머니에게 먼저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신부에게는 결혼식까지 제일 좋은 걸로 다시 준비하죠.”
“…….”
“로드리고령에 남아도는 게 보석이라.”
칼이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라키엘은 그 말에 기막혀 하는 대신 칼의 속내를 재어 보듯 가늘어진 눈으로 칼을 응시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물론, 하문하십시오.”
하문이라고 굳이 스스로 낮춰 말하는 것에는 은근히 놀리는 기색이 다분했다. 라키엘이 그것을 비웃듯 신경질적으로 피식 웃고는 흡사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세상사 초연한 듯 굴더니 도무지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제가 그랬습니까?”
“아닙니까?”
“공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것일 겁니다. 심경의 변화라…….”
“영지에서 열 번도 채 안 나오던 분이, 지금은 수도를 떠들썩하게 하는 쇼를 하고 계시니 그 품으신 속내가 의아할 수밖에.”
“쇼라니, 공께서는 제가 황녀께 보내 드린 스타치스 꽃도 보지 못하셨습니까?”
라키엘이 정중한 목소리로 비꼬자, 마치 제 없는 연심이라도 모독 받은 양 억울한 얼굴로 칼이 잡아뗐다. 라키엘이 코웃음을 쳤다.
“아뇨. 그뿐만 아니라 엘 로이니의 쓰레기 같은 청혼시도 봤습니다.”
“요즘 브란젤에서 유행한다고 하기에요. 쓰레기라기엔 근사했다고 생각하는데.”
“낯간지러운 짓 잘하시더군요.”
“원체 부끄러움을 잘 모르는 편이라.”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작금의 작태를 보자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너희 황녀 전하 덕분에 내가 3황녀와 꼬이게 된 건 잘 알 테고.”
겉모양만 정중하던 대화를 먼저 깬 것은 칼이었다. 칼의 달라진 목소리에 라키엘의 입매가 설핏 휘며 올라갔다. 칼의 인내심은 본래 짧은 편이었고, 그 대상이 싫어하거나 성가신 존재일 경우 더욱 짧은 편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게 어찌 내 사촌 여동생 때문이지? 영문을 잘 모르겠는데.”
라키엘이 뻔뻔해 보일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되물었다. 칼이 조금 기막힌 듯 짧게 실소했다.
“1황자가 감히 날 욕심내게 된 게 누구 덕분인데?”
칼의 되물음에서 오만함이 그득 묻어났다. 칼은 황제가 유일하게 살려 둔 여동생의 유일한 아들이었고, 겨우 약관을 넘어서자마자 로드리고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사내였다. 세상사 상관없이 편안하게 살고 싶다 해도 결국은, 저도 저런 세상사 때문에 오만할 수밖에 없는 종자인 것이다. 라키엘이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이제라도 뒤늦게 줄 좀 서 볼까 싶었다면, 그 청혼이나 덥석 받고, 그 싹수없는 계집이랑 백년해로하면 되지 않겠어? 제일 깔끔할 텐데. 제법 잘 어울리기도 하고.”
“그 깔끔한 거, 너나 해라. 어울리는 것 역시 네가 낫다. 내 기꺼이 공께 양보하지.”
“왜? 허울만 좋고 제 뒤 돌봐줄 황자 오라비도 없는 계집보다는 나을 텐데. 알다시피 5황녀는 황제가 될 오라비가 없다.”
“상관없지 않나? 본인이 여제가 될 텐데.”
깔끔하게 떨어진 반문에 라키엘의 입매가 일자로 단단하게 굳었다. 칼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내 사촌누이인 거 잊었어? 내가 모르리라 기대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공께서 흘리셨으면 흘렸지.”
라키엘은 대답 없이 싸늘한 안색으로 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덧붙였다.
“뭐, 어찌 됐든 황녀가 내 사촌누이의 마음을 샀더군. 그 복잡한 양반 속내를 말이야.”
“설마 로드리고 후께서 열두 살배기 소공자마냥 누님 따라 쪼르르 따라온 건 아닐 테고.”
“나는 그 누님과 별로 상관없다. 애초에 그녀는 이미 몬드리올가 사람이야.”
칼이 퍽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라키엘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날 좀 그만 세워. 그리 티를 내는데 그 황녀가 네 것인 줄도 모를까 봐? 나 지금 전혀 진지하지 않다.”
“황녀에게 혼담을 받은 자가 다른 이에게 청혼을 했어. 명색이 황족으로 태어난 작자가 황실의 관습을 그리 짓밟나? 너 때문에 5황녀가 3황녀와 어떤 추문에 휘말린 줄 알기나 해? 3황녀의 혼담을 받은 후작이 5황녀에게 청혼? 후작께서 세기의 추문을 만들기로 작정한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지.”
라키엘이 신경질적으로 칼에게 따져 물었다. 칼이 진정하라는 듯 씩 웃었다.
“황실의 관습에 의하면 분명 황녀에게 청혼을 받은 자는 청혼이 거두어지기 전까진 제 의사대로 일반 여자와 결혼할 수도 없는 처지가 돼. 하지만…….”
“…….”
“그 대상이 다른 황녀라면? 황녀가 귀하여 황녀를 거부하고 일반 여자랑 결혼할 수 없다면, 다른 황녀는 어떨까, 이거지.”
라키엘이 못마땅한 듯 입매를 비틀었다.
“그딴 장난질에 감히 5황녀를 이용해?”
“장난질이라니. 인생이 걸렸는데.”
“3황녀 망신 줘서 쫓아내겠다는 게 장난질이 아니면 뭐기에.”
“네 눈치가 조금만 없었어도 이리 재수가 없진 않았을 텐데.”
“칭찬 고맙군.”
라키엘이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칼은 매끄럽게 입매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내가 필요한 건 그 3황녀가, 혹은 1황비가 망신살에 떨어질 때까지 비올레타 황녀가 날 거부하지 않는 거야.”
라키엘이 말없이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칼이 가늘어진 눈으로 라키엘을 재어 보듯 응시하다 이내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보아하니 다 알고 있었다는 표정인데.”
“딱히.”
“어째 그 정색하며, 흥분하는 게 가증스럽더라니.”
라키엘은 칼의 말에 대강 입매를 삐딱하게 올려 웃고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 대가가, 세상에 네가 5황녀의 사람이라 알리는 것이라도 상관없나?”
“뭐?”
“3황녀를 떨어트리는 대가로 말이야. 딱히 좋은 계산은 아닌 거 같은데.”
“안 될 이유도 없지. 이미 성가시게 엉킬 대로 엉킨 처지에. 그리 열심히 만들어 낸 염문설 정도로는 3황녀를 피할 가망도 없었고, 그나마 이쪽이 덜 귀찮아.”
칼은 대수롭지 않게 그리 말했다. 라키엘의 우아한 손길이 천천히 찻잔을 내렸다. 찻잔이 사라지고 드러난 얼굴에는 여태까지 대화를 나눈 상대방에 대한 한 치의 신뢰감도 스며 있지 않았다.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네 마음을 도무지 돌릴 수 없다고 전한 게 고작 황녀가 수도로 돌아오기 이틀 전이다. 무슨 속셈이지?”
“내가 속셈을 여럿씩이나 둘 정도로 부지런해 보이나?”
“로드리고 후께서 게을러빠진 작자라는 건 잘 알지. 하지만 네 누님에게까지 숨길 이유가 없어.”
“숨긴 적 없어.”
“숨긴 적 없으면?”
“바뀐 거겠지.”
“고작 그사이에?”
“글쎄, 여자가 늑대를 기다릴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아서?”
“무슨 소리야.”
“황녀가 말 안 했나?”
“뭘.”
“황녀가 사냥터에서 늑대를 잡았어.”
라키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칼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짧은 권총으로, 코앞까지 다가오길 기다려서 정확히 머리를 쐈더군.”
라키엘의 딱딱하게 굳어 버렸던 인상이 칼의 다음 말에 그대로 일그러졌다. 칼은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계속했다.
“그 정도 배짱이면 뺀질뺀질한 황자새끼보단 믿을 만하겠지. 그뿐이야.”
라키엘은 더 이상 칼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라키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이 의아한 듯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라키엘이 짤막하게 높낮이 없는 어조로 내뱉었다.
“가.”
“뭐?”
“안 가면, 먼저 이만 실례하지.”
말도 안 되는 인사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방의 주인이 객 앞에서 사라졌다.
“의지는 육체의 ‘자기 긍정’을 나란히 있는 무수한 개체 속에 나타내면서 모든 개체가 지닌 고유한 이기심으로 자칫 어떤 개체에서는 이 긍정을 넘어서 다른 개체에 나타나 있는 동일한 의지에 대한 ‘부정’에 이른다.”
“잘 읽으셨습니다. 시펜하우드는 이런 경우 먼저 언급된 개체의 의지가 나중에 언급된 다른 개체의 의지에 대한 긍정의 한계에 침입하는 것이노라고 표현했…….”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린 문소리에 얄타 뫼르겐이 하던 말을 멈추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얄타 뫼르겐이 그러거나 말거나 비올레타는 문소리를 듣지 못한 채 그대로 책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얄타 뫼르겐은 기력이 딸려 가끔 이렇게 말을 멈추고 호흡을 충전하곤 했으니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이 인간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다 보면 남한테 피해 끼칠 수도 있다’는 말을 더럽게 어렵게도 써 놨네. 저자에게 그렇게 속으로 시비나 걸며 얌전히 기다리는 데도 얄타 뫼르겐은 더 말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얄타 뫼르겐은 온데간데없고, 제 곁에 와 서 있는 라키엘의 모습에 비올레타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이내 다시 돌아왔다. 인상 한 번 살벌하다. 비올레타는 별로 놀란 기색 없이 물었다.
“스승님은요. 당신이 쫓아낸 거예요?”
“…….”
“사람 좀 놀라게 하지 말고, 정상적으로 예고 좀 하고 나타나면 어디 덧나요?”
반쯤 장난기를 실어 재차 건넨 말에도 라키엘은 말없이 한동안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그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비올레타가 무섭기보다는 민망하다 생각할 무렵, 라키엘이 입을 열었다.
“네가 늑대를 왜 잡아?”
질문이 뜬금없이 느껴지는 만큼 라키엘의 어조는 차가웠다. 비올레타는 잠시나마 상황 파악을 해 보려 했으나, 무심결에 대꾸했다.
“……늑대가 나왔고, 죽을 순 없으니까?”
“늑대가 나오는 델 네가 대체 왜 가.”
“로드리고 후 때문에 사냥터에 갔다는 말, 내가 했지 않아요? 로드리고의 엘 드레고요.”
“엘 드레고가 늑대가 나오는 곳이라곤 안 했지.”
“원래대로라면 곰이 나와야 했어요. 늑대니 운 좋았던 거죠.”
“뭐?”
라키엘은 제가 말했던 그 곰이라는 게 로드리고 후의 허풍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비올레타가 아차, 하고는 고쳐 말했다.
“아, 오해는 하지 말아요. 그 지역이 로드리고령 사냥터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었대요. 가디언들이 미리 정비도 다 해 놓고, 분명 안전하다 해서, 그래서 산책을 좀 하다가…….”
“가디언이 미리 안전하게 정비한 곳에 늑대가 나와? 그치들이 말하는 안전하다는 기준은 대체 뭐기에?”
말끝에 서늘하게 날이 서 있었다. 비올레타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러니 본래는 안 나왔어야 맞겠죠. 늑대는 아마도 잘못…….”
“애초에 사냥터 같은 델 네가 왜 따라가.”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말을 냉랭하게 잘랐다.
비올레타가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곳인 줄 몰랐어요. 내릴 때 다 돼서야 곰 나오니 조심하라는데 어째요? 물론 알고 보니 끝과 끝 지역이었지만. 아니, 그냥 애초에 전부 별일 아니었어요. 괜찮아요.”
“괜찮아?”
기막힌 듯 되묻는 음성에서 희미한 노기가 묻어났다. 비올레타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내가 살았잖아요.”
“죽었으면?”
“그럴 리가―.”
“죽을 수도 있었어, 너.”
“라키엘.”
“죽을 수도, 있었다고.”
라키엘이 마치 비올레타에게 글자를 새겨 주듯 천천히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했다. 비올레타는 미세하게 시선을 옮겨 라키엘의 싸늘한 눈을 마주했다. 그 싸늘한 시선 뒤에 숨겨진 얕은 불안. 굳이 그 시선을 헤집고 뭐가 있는지 찾아내지 않아도 이제 볼 수 있었다. 황제를 처음 알현하고 나온 저를 잡아채던 그 손끝의 떨림을 비올레타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선대 에델가르드 공과 황태자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던 그때와 같은 동요는 아니었으나 조금 비슷했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손을 뻗어 라키엘의 손끝을 잡았다. 그때는 잡을 수 없었던 손을, 이번에는 잡았다.
손끝끼리 겨우 엮일 정도의 약한 손길이었으나 라키엘은 조금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제 손끝에 닿은 비올레타의 손가락을 내려 보았다. 비올레타가 조금 더 힘주어 라키엘의 손마디를 잡고, 나직하게 말했다.
“라키엘, 나 살아 있어요.”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손끝에서 얼굴로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이 비올레타의 시선을 잡아당기듯 끌었다. 얼마간의 침묵 후, 라키엘이 낮게 물었다.
“왜 말 안 했어.”
“그건.”
“죽을 뻔했다고, 그런데도 살았다고, 늑대도 잡았다고. 보자마자 자랑하고도 남았을 주제에.”
그러고 보니 그렇긴 했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이 말한 제 유치한 천성을 문득 깨닫고 속으로 웃었다.
“그게 뭐 좋은 일이라고 동네방네 얘기해요.”
“얘기해.”
“쓸데없이 이미 지나간 일로 걱정하게 되는 것도 싫고.”
“난 쓸데없는 짓 안 해. 쓸데없는 걱정도 안 해.”
일순 긴장이 풀린 비올레타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련하시겠어요.”
“그러니까, 얘기해.”
“…….”
“난 네가 걱정하는 그딴 쓸데없는 짓 안 하는 인간이니까.”
차갑게 덧붙이는 말에는 기묘하게도 온기가 스며 있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라키엘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네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을 뻔했는데, 네가 위험했는데.”
“…….”
“그게 쓸데없어?”
“…….”
“그 쓸데없는 걸, 내가 로드리고 후에게 들어야 해?”
“미안해요.”
“네 목숨은.”
“내 게 아니라는 거 알아요. 조심했어야 했는데, 내가 부주의했어요.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
“그런데 정말 별일 아니었어요.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하…….”
아마도 왜 이렇게 가깝지, 라고 문득 속으로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미처 눈이 서로 마주치기도 전에 라키엘의 눈꺼풀이 내리깔리고, 비올레타가 그런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비올레타의 입술 위로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으며 말끝을 집어삼켰다.
비올레타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화인을 찍듯 입술이 잠시간 맞물렸다가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지만 비올레타는 여전히 할 말을 잃은 채였다. 몸을 천천히 드는 라키엘에게 끌려가듯 비올레타의 시선이 올라갔다. 날 지금 놀리고 있나, 비올레타의 눈이 라키엘의 의중을 재어 보듯 또르르 움직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웃음기 하나 없이 잔잔하게 가라앉은 시선뿐이었다. 비올레타의 표정이 한층 더 난감해졌다.
그리고 이내, 라키엘이 다시 부드럽게 입을 맞춰 왔다. 입술이 살짝 떼어졌다 다시 붙으며 따스한 숨이 조금 벌려진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아랫입술을 혀로 쓸어 올리다, 이내 고개를 조금 비틀어 제 입술로 집어삼켰다. 방금 전보다 조금 거칠어졌지만, 기본적으로는 본래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법한 입맞춤이었다. 이전에 그랬듯,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지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차마 밀어내지도, 그대로 두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들고 있던 팔을 힘없이 떨어트리며 저도 모르게 서서히 눈을 감았다. 누구의 숨결인지도 모르게 호흡이 뒤섞였다. 비올레타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목을 감싸 제게로 깊게 당겼다. 키스가 깊어진 것은 순간이었다. 비올레타의 호흡이 가빠질 즈음, 라키엘은 천천히 비올레타에게서 고개를 들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라키엘의 손이 가볍게 쓰다듬고 그대로 뺨을 감쌌다. 맞닿은 이마가 서서히 떨어졌다. 그제야 번뜩 현실감이 들었다. 비올레타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는 것을, 라키엘이 약하게 맞닿아 있던 손을 꽉 되잡아 막았다. 라키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 목숨은 네 거야.”
“…….”
“그래서 중요한 거지.”
비올레타가 망연한 얼굴로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이내 고개를 얕게 주억거렸다.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네가 하기 싫은 건 안 해도 돼.”
“…….”
“싫은 사람이랑 억지로 같이 있을 필요 없어.”
“…….”
“위험한 곳은 가지 마. 위험하면 도망이나 가. 참지 마.”
“어떻게, 내가…….”
“이건 네 인생이니까.”
비올레타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라키엘이 손끝으로 비올레타의 입술을 가볍게 문지르며 속삭였다.
“진짜라면 그렇게 할 거야.”
“진짜…….”
“그리고 세상에 ‘비올레타’는 너뿐이야.”
라키엘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비올레타는 그의 눈을 더 바라보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남자가 제 맞은편에 앉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다,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탁자 위로 무성의하게 툭 던졌다. 탁자의 대리석 상판 위로 단단한 보석들이 떨어지며 짧게 마찰하는 소리를 냈다. 밀로일라에 의하면 그 대단하다는 로드리고령에서도 총 연간 수입과 맞먹을 만큼 고귀하다는, 그 잘나 빠지신 블루 다이아 목걸이였다. 칼은 아무렇게나 던져진 제 값비싼 선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비올레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예물이 맘에 안 드셨습니까?”
“예물?”
비올레타가 기가 찬 듯 되물었다. 칼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네. 신부께 드린 예물 말입니다. 마음에 차지 않으시면 다른 걸로 다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마음에 차실 때까지.”
“……로드리고 후, 후께서 뭐라고 하시면서 제게 이 목걸이를 주셨는지는 기억하시나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어찌 뚫린 입이라고 그리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비올레타가 딱딱한 투로 빈정거렸다. 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을 하고, 남자가 여자에게 보석을 선물했습니다. 보통 그것을 예물이라 하던데. 틀립니까? 여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로드리고 후와 제가 그 보통의 경우가 아니라는 것부터, 후께 우선 주지시켜 드려야겠군요.”
칼은 별다른 대꾸를 하는 대신 느물대며 웃고는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달칵, 하고 밀로일라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서는 소리가 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칼이 찻잔을 탁자에 조용히 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받아 둬. 이미 황후 폐하께 드렸던 것 아닌가?”
남자가 여태 그리 정중하게 지껄인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 잘려 나오는 칼의 편안한 말투에 비올레타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처음에야 사촌이란 생각에, 그다음에는 장단 맞춰 주기 바빠 가만히 당하고 있었지만 허울 좋은 사촌 사이를 처음부터 망가뜨린 건 저쪽이니, 수도에 돌아와서까지 더 이상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이 사달이 난 것에는 제가 만만해 보인 점도 한몫 했으리라. 비올레타가 입매를 조금 비틀어 올리며 짐짓 예의바른 투로 비꼬았다.
“메이어 영애가 나가기 무섭게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신경 쓰이긴 하십니까?”
“새삼 뭘.”
“그리 만사 귀찮으신 분이, 어찌 남 시선은 의식하고 사시는지 모르겠어요.”
“적당히 선 그어 두고, 의식 좀 해 두는 게 결과적으로는 덜 귀찮거든.”
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렇게 평판은 평판대로 챙기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나한테는 편하게 제 뒤틀린 심사 다 드러내셔야 하겠다, 이거지. 비올레타는 속으로 이죽거리며 우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탁자 위에 두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마치 부러 거리를 두듯 지나치게 예의 바른 경어였다.
“불가피하게 엮여, 싫어도 몇 번은 더 직접 마주해야 할 사이 아니겠습니까.”
“별로 싫진 않은데.”
“그러니 앞으로 최소한의 지킬 것은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기어오르지 말라는 말을 예의 바르게도 하시는군.”
“설마요.”
“그게 아니고서야.”
“시건방 그만 떠시란 말입니다.”
비올레타가 쌀쌀맞게 칼의 말을 가로막았다. 짐짓 도도하게 내리깔린 속눈썹 아래로 맑은 암녹색 눈동자가 돌연 냉랭해졌다. 마치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듯 권위 어린 시선, 그리고 일부러 자존심을 건드리려 내뱉은 자극적인 단어에도 칼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칼이 여유롭게 꼰 다리 위로 팔꿈치를 대며 느릿하게 턱을 괴었다.
그렇게 수 초간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비올레타는 이 침묵이 싸늘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저 잘난 남자가 어딜 가서 이런 취급을 당해 봤겠나.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남자의 얼굴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적어도 비올레타에게는 그래 보였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질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그 시선을 꼿꼿하게 마주했다. 칼이 턱을 괸 그대로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이러는 거 보니 좀 귀여운 것도 같고.”
“…….”
비올레타가 차마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양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니었는데.
비올레타는 제가 말만 좀 길게 해도 지긋지긋함에 파르르 떨던 잘생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분명 그랬었는데 제 말이 하나도 안 먹힌 걸로도 모자라, 징그러운 소리까지 돌아왔다. 이럴 수가.
칼이 턱을 괴고 있던 팔을 풀며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앉았다.
“이대로 혼담을 진지하게 진행시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비올레타의 말에 순순히 따르듯 짐짓 정중한 물음이었으나 결국 놀리고 있는 것임을 비올레타는 모르지 않았다. 비올레타가 실소했다.
칼이 씩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잘 생각해 봐. ‘그’ 에델가르드 공이랑 평생 어찌 살래? 피곤해서.”
영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인간과 도란도란 라키엘의 뒷담이나 하고 앉아 있을 생각은 결코 없었다. 비올레타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로드리고 후는 저랑 평생 어찌 사시게요? 팔자가 피곤해서.”
“딱히. 넌 내가 가만있어도 혼자서, 열심히, 아주 잘 해낼 것 같아.”
“참 내.”
비올레타가 기막힌 듯 코웃음을 쳤다. 칼이 픽 웃었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그렇더군. 1황자가 황태자가 되느니, 마니 하는 상황에 3황녀를 거부한 내게 누가 딸을 주겠나? 거기다 네 사람이라고 세상 만방이 알려진 처지. 카디링거랑 아예 등지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내 혼사는 완전히 막혔다.”
과장도 이런 과장이 없다. 누가 보면 여태 결혼하지 못해 환장했던 사람인 줄 알 것이다. 비올레타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러게 누가 여태 결혼하지 말래요? 아, 로드리고 후의 결혼은 어떻게든 책임질 테니 징그러운 소리는 이제 그만해요. 가짜 청혼에 후와 엮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징그럽다니, 말이 심하군.”
“말이 심한 건 후예요. 그리고 장난은 가짜 청혼으로도 충분해요.”
“어째서 청혼이 진짜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건데?”
이번에는 칼이 제법 진지하게 물어 왔다. 비올레타는 순간 조금 당황했다가 묘한 기분에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모른 척 말을 돌렸다.
“귀찮은 것 싫다고 하셨죠? 저도 싫어요. 그 목걸이 들고 어서 일어나기나 해요. 그러라고 불렀으니까.”
“아까 말했잖아. 그냥 받아 두라고. 황후께 이미 드린 것인데.”
“덥석 받았다가 나중에 무슨 뒷감당을 하라고?”
“에델가르드 공한테 안 좋은 것만 배워선, 생각하는 게 팍팍하군. 사람이 주면 순수하게 받는 법 좀 배우는 게 어때.”
“로드리고 후야말로 사람에게 순수하게 주는 법 좀 배워 오시지 그래요! 이제 잘 지내보자고 줘 놓고, 뭐? 예물? 더러운 꿍꿍이하곤!”
결국 비올레타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내뱉었다. 더 열 받는 건 제가 그렇게 신경질을 내자, 남자가 아까 비올레타더러 그 ‘귀엽다’는 망발을 지껄일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올레타는 그제야 떠올렸다. 제가 당황해 하거나 흥분해 화를 낼 때마다 은근히 즐거워하던 그 악질적인 얼굴을. 비올레타는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신경질적으로 그 시선을 피했다. 반쯤 내리깔린 비올레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확히 말하면 예물이 된 셈이지. 난 정말 순수하게 줬어.”
“세상에 순수가 다 얼어 죽었나 봐요.”
비올레타의 비꼬는 소리에도 칼은 개의치 않고 능청스레 덧붙였다.
“네 건 로드리고령에서 하나 더 올라오고 있는 중이야.”
“다시 내려가라 하세요.”
“사례라고 생각해.”
“지나쳐요. 우리가 주고받는 건 표면적으로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뇌물이라 생각하든지.”
“…….”
“미래의 주군이신데.”
“……진심인가요?”
“네가 보기에도 지금 내가 이런 장난 칠 처지는 아니지 않나?”
주군. 비올레타는 물끄러미 칼을 바라보았다. 라키엘에게 대강의 이야기는 들은 상태라 딱히 놀랄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익숙하고, 당연한 상황은 아니었다.
몬드리올, 그리고 로드리고.
그 이름들이 하늘처럼 높아 보였던 때가 있었다. 추밀원. 황제를 만드는 가문들이다. 지금 제가 이렇게 귀한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그렇게 우러러보던 이름들이 금방 대단치 않게 느껴지게 되지는 않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만, 금방 변하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문득문득, 현실감이 아득해질 때가 있었다. 제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 그리고 제가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저 목걸이. 그는 이리 마주 앉기는커녕 제가 뒤에 서 있을 일조차 없었던 사람이고, 자신은 평생 일해도 저 목걸이에 달린 작은 보석 한 알조차 가질 수 없었을 사람이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런 제가, 그의 주군이 된다.
네 인생이야.
세상에, ‘비올레타’는 너뿐이야.
약았다. 그런 말이나 해 주고. 자기기만인 줄 알면서도 믿고 싶게 만든다. 그 말에 기대 편해지고 싶게 만든다. 비올레타는 천천히 손을 뻗어, 제가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뇌물, 잘 받았어요.”
칼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거절해 줘.”
난데없는 등장에 난데없는 말이었다. 문이 닫히고 시녀를 물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일로벨라는 그렇게 말했다.
“네가 거절해.”
비올레타가 다시 들은 말은 좀 더 짧고 강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명령으로 들리기엔 어조가 조금 절박했다. 비올레타가 모르는 척 의아한 듯 반문했다.
“무엇을 말인가요?”
비올레타는 그렇게 묻고도 여전히 모르는 척 여유롭게 웃으며 소파로 가 앉았다. 비올레타는 알고 있었고, 비올레타가 알고 있다는 것을 일로벨라 역시 알고 있으며, 그런 일로벨라를 비올레타는 결코모르지 않았다.
건방진 년. 일로벨라의 미간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러나 비올레타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그것은 잠깐이었다. 일로벨라가 평온한 얼굴로 비올레타의 맞은편에 걸어와 앉았다. 그리고 마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네 마음이 그에게 없는 것 다 알아. 그렇지 않니?”
“그가 대체 누구건대.”
짧게 되물은 비올레타가 작게 으쓱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비어 있는 일로벨라의 앞을 보며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 차라도 하시겠어요?”
기껏 떠올린 양 말하는 게 로드리고 후 얘기가 아닌 아무래도 좋을 차 얘기였다. 일로벨라가 조금 비뚤어진 입매 사이로 기막힌 듯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됐다.”
“그럼 하던 말씀, 계속하시죠.”
“네게 들어온 그 청혼.”
청혼, 까지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일로벨라가 잇새를 조금 악물었다. 그녀의 자존심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는 그리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밑바닥이 지금 얼마나 처참할지도. 애초에 비올레타가 원했던 혼담도 아니었고, 비올레타도 이렇게까지 그녀와 꼬이고 싶지는 않았었다. 비올레타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 혼담 말이죠.”
“그래, 그 혼담.”
“거절하라고 하셨나요?”
일로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레타가 웃음기 없는 눈으로 픽 웃었다.
“제게 들어온 청혼입니다. 3황녀님께서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몰라? 네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두 분 폐하의 소관입니다.”
“고작 네가 입궁한 걸로도 블라디모로를 여신 황제께서 네가 싫다는 사내를 억지로 붙여 줄까? 그리고 네 어마마마께선 오죽하시고?”
“그럼 제 소관이 되겠군요. 제 소관입니다, 3황녀님. 더군다나 저는 그가 그리 싫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네게…….”
일로벨라는 말을 고르듯 조금 망설였다. 그러나 그 말을 고를 수 있는 범위는 그렇게 넓지 않을 것이다. 비올레타는 여유롭게 기다렸다.
“부탁하러 온 거야.”
부탁, 일로벨라의 도도한 입술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그 단어를 내뱉었다. 전혀 부탁하는 사람 같지 않다는 게 문제였지만, 저렇게 타고난 고귀함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비올레타는 놀란 기색 없이 그저 조금 의아한 듯 일로벨라를 바라보았다.
일로벨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넌 로드리고 후를 사랑하지도 않고, 로드리고 후도 결코 널 사랑할 사람이 아니야. 너도 알잖아.”
그야 당연한 말이었으나, 비올레타는 조금 실소했다. 저 입에서 이런 치정 소설에서나 볼 법한 대사가 나올 줄은 몰랐지. 비올레타가 순진하게 대꾸했다.
“어찌 알겠어요? 제가 그를 사랑하게 될지.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
뚫린 입이라고 술술 나오는 제 말이 스스로도 우습다. 코웃음 칠 줄 알았던 일로벨라는 조금의 비웃는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좋은 사람? 제대로 속고 있구나. 그리고 그 남자, 어린 네가 순진하게 마음 줘 봤자 돌아오는 거 하나 없을 사람이야.”
“쉽게 단정하시는군요. 3황녀께선 그분의 마음을 어떻게 아시고?”
“그러는 넌 정말 몰라서 묻는 거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언제까지 네 순진한 척에 장단 맞춰 줄까?”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듯 일로벨라가 냉랭하게 물었다. 비올레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반문했다.
“결혼을 사랑으로 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이 황실에.”
“너한텐 그가 필요 없어.”
마음이니 사랑이니, 좋게 포장되어 있던 단어가 적나라하게 벗겨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애초에 팔자 좋게 치정극이나 벌일 수가 없는 사이였다. 비올레타는 슬쩍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란토니아에서 그더러 필요하지 않다, 마다할 이도 있나요?”
“나한텐 그가 필요해.”
“저 역시도 그런데.”
“네 그,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필요와는 차원이 달라.”
“로드리고 후를 어찌 겨우 그 정도라 하겠습니까.”
“로드리고 후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널 이용하고 있는 거야.”
일로벨라답지 않게 간곡히 설득하는 투는 비올레타를 조금 헷갈리게 만들었다. 비올레타는 밀로일라에게 들었던 그들의 사이를 되짚었다.
칼 드 로드리고, 그리고 3황녀 일로벨라.
특별히 나쁜 말이 돌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사이가 좋지도 않았던 무미건조한 사촌 관계. 혹시나 거기에 남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나. 비올레타가 느릿하게 입을 달싹였다.
“정말 3황녀께서는 로드리고 후를 사랑하기라도 하십니까?”
“사랑해.”
사실 비올레타의 말은 의례적인 물음에 가까웠지만, 예상 밖으로 돌아오는 대답은 명료했다. 붉은 입술 사이로 깨끗하게 떨어져 나온 그 말에는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비올레타는 약간 당황했다.
“사랑?”
“그가 아니면 안 될 만큼.”
비올레타의 눈매가 석연찮은 듯 가늘어졌다.
“로드리고 후가 아니면 안 된다, 라.”
“너는 그 남자가 아니라도 괜찮겠지만, 나는 그 남자여야만 해.”
일로벨라의 고고한 태도와는 달리 마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간절한 어조를 듣고 도리어 비올레타는 확신했다. 혹여나 일로벨라가 평범한 여자처럼 로드리고 후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을 품었더라면, 오히려 절대 제게 이런 아쉬운 기색은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사교계에서 여왕처럼 군림해 온 그녀의 자존심에 고작 남자를 위해 제삼자, 그것도 비올레타에게 자신의 바닥을 보일 리가 없다.
그리고 그 이유가 로드리고 후도 아닌 그녀의 고귀한 자존심 단 하나뿐이라면, 더더욱 이럴 수가 없는 여자였다. 고작 세간에 보일 자존심을 위해 제일 굽히기 싫을 비올레타에게 이럴 리가 없었다. 일로벨라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짐작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으면서, 비올레타는 어쩐지 기분이 복잡했다.
비올레타를 응시하는 미세하게 떨리는 벽안에 굴욕감이 옅게 스며들었다. 타고난 자존심은 높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자존심을 버려둘 수도 없는 주제에, 다른 이도 아닌 비올레타 앞에서 그녀가 고개를 먼저 숙일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오라비, 1황자 빌키어스.
“혹시 로드리고가 필요한 건 아닌가요?”
“그래, 필요해.”
일로벨라가 그렇게 순순히 인정하고는 덧붙였다.
“네 사촌 오라비를 알아. 에델가르드 공이 널 데려갈 것을 의심하는 이는 이 황궁에 아무도 없을 정도니까. 그러니 장난은 이제 그만해. 난 그를 진짜로 원해.”
그렇다면 이쪽에선 더더욱 들어줄 수 없었다. 애초에 전혀 타협할 거리도 아니었지만. 비올레타는 모른 체 여유롭게 대답했다.
“에델가르드 공께서는 그저 공께 얼마 남지 않은 혈육인, 저를 아낄 뿐입니다.”
그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에 박힌 가시를 모를 일로벨라가 아니었다. 비올레타는 에델가르드의 황녀였고, 그녀는 카디링거의 황녀였다. 비올레타의 시선이 일견 싸늘해진 것을 잡아낸 일로벨라의 표정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네 눈에 내가 미워 보이리란 건 알아. 나도 네가 그랬으니까.”
“당신이 미워서 제가 원하지도 않는 남자를 거절하지 않는 것 같나요?”
“그래.”
복잡한 속사정이야 어찌 됐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일로벨라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비올레타는 싱긋 웃었다. 비웃는 기색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순수한 웃음이었으나, 그래서 더욱 아니꼬워 보일 법했다. 일로벨라의 고운 아미가 설핏 일그러졌다. 비올레타가 유유히 입술을 달싹였다.
“틀리셨어요. 로드리고 후는 제게도 지금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남자 중 가장 좋은 남자거든요. 그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제 선택이고…….”
“…….”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선택입니다. 3황녀께서는 아무래도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
“여자에게 매몰찬 사람은 아니니, 제게 했듯 그리 고운 태도로 부탁하시면 차라리 로드리고 후도 당신을 재고해 보실지 모르겠네요. 그쪽이 3황녀께는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서 더 조롱처럼 느껴질 말이었다. 비올레타는 태연한 얼굴로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비올레타의 말이 모욕적인 듯 일로벨라가 이를 악물었다. 일순 일로벨라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일로벨라는 거짓말처럼 여유를 되찾은 얼굴로 화려한 금발을 쓸어 올리며 웃었다. 황녀의 뒤로 졸졸 따라다니던 영애들이 순간 이해될 정도로 그녀의 미소에는 태생적 고귀함이 있었다. 불과 수 초 전에 가장 싫은 상대에게 굽히고, 가차 없이 거절당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일로벨라의 미려한 입술이 달싹였다.
“충고 고마워.”
비올레타가 싱긋 마주 웃으며 답했다.
“별말씀을.”
일로벨라는 제 허리에 감긴 기다란 팔을 조심스레 떼어 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방 안은 아스라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깜깜한 시야를 얼마간 응시하던 푸른 눈동자가 문득 떠오른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일로벨라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는 듯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황제를 꼭 닮은 적갈색 머리칼, 그리고 짙게 내려앉은 녹안. 그 이복 여동생에게는 서로가 얽힌 태생적 악연이 아니더라도 일로벨라를 본능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일로벨라가 황제를 마주하고 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에누마 엘라시의 제단 위, 초헌의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던 이복여동생의 뒷모습. 십수 년간 그 자리를 계속 지켜 온 것은 저인데도, 마치 평생 그 자리에 서 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서던 그 뒷모습.
일로벨라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에누마 엘라시를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초헌의 자리에 올라서 있던 비올레타의 모습만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그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언제나 까마득한 시선으로 우러러봐야 했던 제 부황父皇을 떠올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부황에 대한 반감이 고스란히 전이된 듯 본능적인 거북함이 치밀어 오르곤 했으니까.
불과 반나절 전의 수모는 일로벨라의 뇌리를 떠나지도 않고 끊임없이 떠올랐다. 몇 달 전까지 그 존재조차 잊고 살았던 계집이다. 감히. 제가 감히. 일로벨라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다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도피하듯 이곳에 찾아와, 또다시 이러고 있는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오랜만에 안긴 연인의 품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런 제 모습에 환멸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젠 연인도 아니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일로벨라는 계절이 바뀌면서 남자를 이미 버렸었다. 일방적이었고, 조금은 처참한 결말이었다. 그런 주제에 코너에 조금 몰렸다고 그를 찾고, 그는 그런 저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 주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일로벨라는 곁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야 했다. 이것으로 마지막이어야 했다.
“……벌써 가십니까?”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느릿하게 눈을 뜬 남자가 옅은 밀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일로벨라는 시선을 부러 외면한 채 냉랭하게 대꾸했다.
“늦었어.”
“오랜만인데.”
남자의 단단한 팔이 일로벨라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싸늘하게 식은 피부 위로 남자 특유의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일로벨라는 그 손을 차마 바로 떼어 내지 못하고 잠시 망연히 내려 보았다. 그렇게 잠깐 주저하던 일로벨라의 하얀 손이 이내 쌀쌀맞을 정도로 차갑게 남자의 손을 자신의 몸에서 떼어 냈다. 남자는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일로벨라의 등을 바라보았다.
“답지 않게 바로 떼어 내지도 못하시다니, 기대하게 만드시는군요.”
일로벨라는 말없이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새하얀 나신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저를 버리신 것이 로드리고 후를 얻기 위해서였다는 말. 거짓인 것 알고 있습니다.”
“단언하지 마, 헤일레트.”
헤일레트 다이크. 혹자는 다이크를 일컬어 카디링거가의 개들이라 낮잡아 조롱하기도 하지만, 다이크 백작가는 엄연히 추밀원을 구성하는 그란토니아의 최고 가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다이크 백의 차남인 헤일레트는 지나치게 방탕하기로 유명한 제 형 덕분에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다이크 백의 후계로 손꼽히고 있는 인물이었다. 실상 그는 일로벨라에게 객관적으로 아주 괜찮은 상대였다. 헤일레트와 일로벨라가 연인 관계인 줄 모르는 빌키어스가 ‘이번 겨울이 지나기 전에 너희를 결혼시키겠다’ 하고 몇 번이고 심심찮게 일로벨라더러 말해 두었을 정도로.
결혼으로써 공고해질 카디링거와 다이크의 유대가 아니더라도 빌키어스는 헤일레트 자체를 꽤 맘에 들어 했었다. 단정하고 준수한 생김새, 제법 명석한 두뇌, 기사로 단련된 튼튼한 몸, 제 아비를 닮은 정치적 직감, 그리고 타고난 성실함과 충성심. 그 성실함과 충성심은 빌키어스가 헤일레트에게서 가장 높게 사는 것이었다.
일로벨라는 제 오라비가 굳이 소리 내어 하지 않은 말을 알고 있었다. 부리기에 좋은 놈이다.
그래서 이 남자는 안 되는 것이다. 혼인이 없어도 다이크가 카디링거에 등을 돌릴 일은 없고, 헤일레트는 일로벨라를 가지지 않아도 타고난 충심으로 빌키어스에게 충성할 것이었다. 일로벨라는 아무것도 새로이 얻을 것이 없는 헤일레트와의 혼인보다는 빌키어스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원했다.
제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언가. 그것이 로드리고가 됐든, 시데른이 됐든, 캐롤링이 되었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해, 제 마음 역시도 상관없었다.
“전하께선 그저 스스로 빌키어스 님의 장기말이 되기 위해 준비하셨을 뿐이죠.”
“…….”
“어디에나 쓸 수 있도록.”
일로벨라는 네글리제를 입고, 천천히 헤일레트를 돌아보았다. 헤일레트는 어느새 단정하게 옷을 추스른 상태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빌키어스 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알아.”
“빌키어스 님이 당신을 아낀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그렇기에 빌키어스 님이 당신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전하.”
그것 역시 알고 있으나, 일로벨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신을 스스로 장기말 취급하는 것이 빌키어스 님을 슬프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아십니까.”
“……그러는 경과의 결혼은 무엇이 다르기에?”
너와 결혼하는 것이 정략결혼과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었다. 헤일레트는 몇 년간의 연애가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에 잠시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카디링거와 다이크의 결합일 뿐이야.”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저를 사랑합니다.”
헤일레트는 곧바로 부정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단정했다. 그러나 일로벨라는 헤일레트의 예상처럼 그 말을 부정하는 대신, 잠자코 헤일레트를 응시했다. 헤일레트가 일로벨라를 망연한 얼굴로 마주 보다 힘겹게 물었다.
“그것으로는, 부족합니까.”
“결혼을 사랑으로 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
“5황녀가 그러더군.”
“전하.”
“경이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되고, 날 전하라 떠받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알았어야지.”
“…….”
“내 인생이 어떤 인생일지.”
“저는 왜 안 됩니까.”
“…….”
“어째서입니까.”
나직하게 묻는 헤일레트의 목소리가 고통으로 낮게 갈라졌다. 일로벨라가 느릿하게 헤일레트에게로 다가섰다. 가녀린 손가락이 헤일레트의 머리칼을 정돈하듯 약하게 쓰다듬었다.
“……네가 아니라, 내가 안 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린 이제 그만…….”
“넌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해, 헤일레트.”
일로벨라가 고개를 숙이자 헤일레트의 밀색 머리칼 위로 화려한 금발이 뒤섞였다. 눈물이 날 정도로 짧은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일로벨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어디 갔다 오니.”
짐짓 상냥하게 물어 오는 음성에 일로벨라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1황비, 베티스는 일로벨라의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몇 시간이나 일로벨라를 기다린 듯, 그녀가 앉아 있던 침대의 끝자리가 깊게 패여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베티스가 일로벨라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밤바람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일로벨라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헤일레트를 만나고 온 게로구나.”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시선과는 다르게 일로벨라에게 묻는 것은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였다. 일로벨라는 대답하지 않은 채 베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답해 보렴.”
“…….”
“일로벨라.”
“……그 후로, 단 한 번이었어요. 다시는, 그를 만나는 일 없을 거예요.”
“네가 그렇게 경계하면 내 마음이 아프단다. 어미한테 어찌 그리 말하는 게야. 이 어미가 이제 와 다이크 가 영윤을 해코지하기라도 할까 봐 그러느냐?”
“여태까지도 지켜봐 주셨으니, 그에게 그러지 않으시리라 믿어요. 그는 오라버니에게 가장 쓸모 있을 사람이니, 그러니…….”
“일로벨라.”
베티스가 일로벨라를 달래듯 부르며 일로벨라의 말을 잘라냈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그녀의 손을 이끌어 잡았다.
“어미가 몇 번이고 말했지만, 너는 날 참 많이 닮았단다.”
“…….”
“그러니 너도 그런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을 걸 알아.”
사소한 것. 일로벨라는 조금 쓰게 그 말을 되뇌었다.
몇 년을 이어온 마음이었으나, 애초에 제 어미가 정해 준 마지막이 있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해서, 한때는 그와 같은 미래를 꿈꿨다고 해서, 구질구질하게 그를 부여잡고서 놓아주지도 못하던 스스로를 용서할 수는 없다. 오늘의 자신 역시도.
여전히 그는, 자신을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니 일로벨라는 제 사랑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가치하게 치부 당해도 싫은 티조차 낼 수 없고, 스스로도 아무렇지 않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늘, 잊지 말거라. 그럼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랑스러운 내 딸아.”
“알아요.”
“너는, 우리는, 네 오라비를 위해 존재하는 거야.”
단 하나를 위해 존재하니까.
“그러니 조금 더 노력해 보렴, 일로벨라. 빌키어스를 위해.”
“…….”
“로드리고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선 안 돼.”
언젠가, 오래전에는 어미의 얼굴이 오롯이 사랑으로 빛나던 시절도 있었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작은 저를 껴안고, 사랑스러운 내 일로벨라, 하고 속삭여 주곤 했던 어미였다. 그러나 아름답게 웃고 있는 베티스의 얼굴은 그때보다 조금 더 늙었고, 시선은 좀 더 멀어졌으며, 정략가의 형상만이 서느렇게 남아 있다. 그리고 일로벨라는 제가 어미를 지나치게 닮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 자신의 얼굴도 저렇게 변해 있으리라. 그리고 헤일레트가 본 자신, 역시도.
차라리 오라버니에게 아무 희망도 없었더라면 우리는 행복했을까.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일로벨라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황자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쉽게 죽일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 처음부터 이것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할 거예요. 기다려 주세요, 어마마마.”
변해야 했다. 그리고 변해야 한다. 멀찍이 앉아 다른 이들의 손에서 제 인생이 흥정 당하는 것을 보느니, 스스로 제 인생을 저울질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일로벨라는 기꺼이 그럴 수 있을 만큼 빌키어스를 사랑했고, 빌키어스는 분명 그럴 가치가 있었다. 그것을 희생이라 부르든, 무엇이라 부르든 일로벨라는 그래야만 했다.
“폐하께서 이틀 후, 브나리오 백작령 트로베룬트 사냥행차에 5황녀 전하께서 동행하길 원하십니다.”
비올레타는 시종장을 마주 선 그대로 잠시 굳어 있다가, 가까스로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시종장을 보냈다. 사냥이란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데다, 여태까지 비올레타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황제였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 숨이 다시 갑갑해지는 것을 비올레타는 애써 차분하게 억눌렀다.
독대도 아닌데 굳이 부담가질 필요도 없다. 사냥 행차에는 황제가 여태까지 늘 그래 왔듯 1황자를 동행시킬 것이었다. 황제의 사냥 행차에 참여하는 그 많은 인원 중 하나가 되는 것에, 별 의미를 둘 이유가 없었다. 그저 예쁘장하게 차려입고 가서, 시원한 그늘 아래 자리 잡고 부채질이나 하고 있으면 될 것이다.
그렇게 예상대로 됐으면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로부터 이틀 후, 비올레타는 황제와 단둘이 있었다.
탕!
짧은 총성이 또다시 고요한 숲 속을 울렸다. 자욱한 연기 속으로 하늘에서 그대로 거꾸러지는 새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어깨를 느슨하게 풀며 비올레타를 돌아보았다. 아무 의미 없는 건조한 시선에도 사람을 위압하는 기운이 가득했다. 비올레타는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시선에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만 것을 애써 갈무리했다.
“너도 한번 잡아 보겠느냐?”
“……저는 매우 서툴러 아직 제 작은 권총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찌 폐하의 존귀한 무구武具를 감히 손대어…….”
“로드리고 후가 극찬을 하더군. 네 사격 솜씨가 출중하다고.”
루드비히가 비올레타의 다소곳한 말을 잘랐다. 그 귀찮은 병에 걸린 환자가 이번엔 아주 작정한 모양이다. 황제와의 독대에서 그렇게 언급할 줄이야. 비올레타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순식간에 감추며 겸손한 투로 대꾸했다.
“로드리고 후께서 저를 좋게 봐 주시고 적잖이 과장해 주신 듯합니다.”
“과시하지 않는 태도는 훌륭하나, 때로는 제가 가진 것을 내보일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라이플 소총의 기다란 총신이 우아하게 호를 그리며 허공에 거꾸로 세워졌다. 루드비히가 소총을 거꾸로 든 채 총구를 털어내며 저 멀리로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가디언 하나가 달려와 루드비히의 총을 받아 총을 깨끗이 손질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그들 사이로 까마득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화약이며 탄까지 모두 총구에 끼운 뒤 능숙하게 꽂을대총포에 화약을 재거나 총열 안을 청소할 때 쓰는 쇠꼬챙이로 깊숙이 쑤셔 넣은 가디언이, 비올레타에게 장전된 라이플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어쩔 수 없이 비올레타는 총을 받아 들었다. 내보일 것도 없고, 자신도 없지만 쥐여 주는 이상에야 별수 없다.
받아들자마자 묵직한 무게가 두 팔을 짓누르듯덮쳐 왔다. 널리 보급된 머스킷 소총보다 총신은 짧지만, 무게는 결코 그보다 가볍지 않았다. 사거리와 정확도는 훨씬 우수하나 머스킷에 뒤떨어지는 장전 속도 때문에 기동력이 부족해 군대에서는 외면당하고, 저격병이나 사냥꾼들이 주로 쓰는 것이었다.
비올레타는 천천히 총을 들어 올렸다. 마음 한편을 진득하게 타고 오르는 긴장감은 애써 무시했다. 제 옆에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조차도. 실패해도 괜찮고, 엘 드레고의 늑대처럼 죽이지 않으면 제가 죽는 것도 아니다. 비올레타는 제가 성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언가 대신, 실패해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상기시켰다. 기대를 버리자 메스껍게 일렁이던 속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기다란 총구가 느릿하게 하늘을 향했다. 몇 초 후 휘익, 멀리서 가디언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 이내 가디언이 날려 보낸 새가 푸득거리며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레타는 날아오른 새의 궤적을 좇는 대신 정면을 본 그대로 눈을 가늘게 뜨며 제 시야에 새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무거운 총을 받치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장총을 몇 번 다뤄 본 적도 없는 제 느린 손이 하늘을 나는 새를 쫓아다닐 순 없을 테니, 그리고 제 서툰 방아쇠가 그 새를 잡을 수도 없을 테니,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가늘어진 시야 속 펼쳐진 푸른 하늘 위로, 검은 새가 나타났다. 조금만 더, 조금만……. 비올레타가 새의 진로에 맞추어 총구를 조금 내리자, 검은 새가 총구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비올레타의 손가락이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귓전을 낮게 울리는 폭음과 함께 비올레타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끝에서 어깨까지 강하게 가해진 충격이 잘게 남아 총을 든 두 팔을 진동시켰다. 긴 총구가 뱉어낸 하얀 연기가 시야를 뿌옇게 가려 비올레타는 새가 그대로 날아갔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명중했습니다!”
숲을 가로질러 들려오는 가디언의 외침에 비올레타가 스스로도 놀란 듯 눈만 멍하니 깜빡거렸다.
희미해진 연기 사이로 붉은 깃발이 보인다.
맙소사, 이 미친 재능.
“잘했다.”
루드비히의 손이 비올레타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비올레타는 제 어깨 위에 내려앉은 비현실적인 손길에 조금 망연한 얼굴로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네가 새를 잡기 위해 어찌했느냐?”
“……아직 제가 서투르기에, 기다렸습니다.”
“그래. 네가 겨눈 총구 끝에 새가 오길 기다렸지. 빠르게 나는 새를 쫓아 무거운 총구를 어설프게 움직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 그렇게 기다린다는 것은 새가 날아가는 뒤꽁무니를 쫓는 게 아니라, 새가 날아갈 곳을 네가 미리 알고 겨누고 있었다는 뜻이다.”
비올레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가 비올레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사냥 놀음이나 하는 고상한 자는 뛰어가는 사슴을 쫓지만, 정말로 사슴이 필요한 자는 사슴이 갈 곳에 미리 덫을 놓아 잡지. 귀족들은 덫을 짐승으로 벌어먹고 사는 자들이나 쓰는 천박한 잔꾀라 한다. 그러나 네가 정말 사슴을 가지고 싶다면, 그리해야 한다.”
“…….”
“무언가를 원하고, 가진다는 건 그렇게나 천박한 것이다.”
비올레타는 그렇게 말하는 루드비히의 저의가 쉽게 파악되지 않아 조용히 루드비히의 안색을 살폈다.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내려 보던 루드비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로벨라가 찾아왔더구나.”
이렇게 황제와 독대하는 이상 어떻게든 나오리라 생각했던 화제였으나, 갑자기 듣기엔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본래 사정이 어찌 되었든, 비올레타는 제 이복언니가 혼담을 넣은 남자에게서 청혼을 받고, 거절하지 않은 입장이었으므로.
애초에 이 추문에서 자유로운 평판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 일로벨라는 제 이복 여동생과 염문설이 돌던 남자에게 혼담을 넣었고, 로드리고 후는 혼담을 받은 여자의 동생에게 청혼했고, 비올레타는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우습지도 않은 삼각관계에서 가장 대외적으로 망가진 것은 일로벨라였다. 그 반대급부로 황제가 이제라도 나서서 그녀를 구해 주려고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폐하의 두 딸이 희대의 추문의 주인공이 되었고, 이젠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셔야 한다…….”
“…….”
“……고 말이다. 그 아이는 퍽 간절하다.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모든 것은 폐하께서 뜻하신 대로 될 것입니다.”
“짐이 답을 방금 가르쳐 줬는데도 너는 여전히 재미없는 대답을 하는구나.”
비올레타가 바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달싹이는 새 루드비히가 문득 물었다.
“칼이 탐나느냐.”
부드럽게 묻는 투에 서늘한 냉기가 돌았다. 비올레타는 대답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청혼이 필요한 것은 한시적인 일이었다. 로드리고 후와 진짜 결혼하지도 않을 거면서 얼마 후면 들켜 버릴 속내를 둔 채 함부로 섣불리 대답했다간 황제를 기만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루드비히가 비올레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칼이 좋으냐.”
“아직, 모르겠습니다.”
비올레타는 정확한 부정 대신, 루드비히에게 적당히 솔직하게 보일 법할 대답을 꺼냈다. 루드비히가 다시 물었다.
“칼을, 갖고 싶으냐.”
“그것 역시, 아직 모르겠습니다.”
루드비히의 암녹색 눈동자가 흥미로운 듯 가늘어졌다. 루드비히가 한 번 더 고쳐 물었다.
“로드리고가 네게 필요하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예, 필요합니다.”
깔끔한 인정이었다. 루드비히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렌시아에서 혼담이 왔다.”
잠깐의 시간조차 두지 않고 루드비히의 말이 일로벨라의 머리 위로 무심하게 떨어졌다.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일로벨라가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이전의 대화와 전혀 이어지지 않는 지나치게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루드비히가 그렇게 말하는 의도를 모를 일로벨라는 아니었다. 일로벨라가 루드비히에게 보이지 않게 입술을 짓씹고,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그리고 모른 척 물었다.
“……오라버니께 말씀입니까?”
“황자의 혼사야 1황비가 알아 할 일이지. 짐이 여기서 너와 논해 무엇하겠느냐.”
“그렇다면―.”
“황녀에게 들어온 것이다.”
“…….”
“황태자 오스티아 공으로부터.”
이렌시아의 황태자라면 이제 쉰이 다 되어 가는 자였다. 심지어 일로벨라의 앞에 서 있는 황제보다도 나이가 많은 자다. 몇 주 전에 이렌시아의 황태자비가 독살당해 황태자가 상처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벌써 재취를 찾나? 일로벨라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나 곧바로 생각할 법한 객관적인 반응을 한 것은 아주 순간이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일로벨라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충격으로 커졌던 눈에 서서히 독기가 서리고, 이내 고운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분명 처음부터 자신이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오스티아 공이 일로벨라를 원했던 게 아닐 것이다. 그는 단지 그란토니아의 황족을 원할 뿐이다.
일로벨라는 루드비히의 말을 천천히 되씹었다. ‘황녀에게 황태자 오스티아 공으로부터’. 일로벨라가 모욕감에 뻣뻣하게 굳은 몸짓으로 루드비히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저 홀로 그란토니아의 황녀가 아닌 이상, 자신을 선택한 것은 황제였다.
“이것이 폐하의 답입니까.”
왜 하필 그 아이가 아닌 자신이냐는 어리석은 물음은 처음부터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용당하는 것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 황태자가 제 아비보다 늙었다는 것도, 자신의 앞에 떨어진 혼처가 고작 재취 자리라는 것도,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부탁했다. 처음으로 당신에게 애원했다.
“제 단 한 번의 애원에 대한.”
그런데 당신은 애초에 모든 것을 정해 놓은 것이다. 그 아이는 원하는 것을 가지고,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이용하기로.
차라리 그 애원하는 꼴에 대고 직접 일축했더라면, 그 아이가 원하니 너에겐 줄 수 없다고 말했더라면 이렇게 비참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 말을 마치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것처럼,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이렇게…….
루드비히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결정은 네가 하는 것이다. 짐은 네게 강요하지 않아.”
“5황녀에게도 저와 같은 선택지를 주셨나이까.”
“사람이 다른데 어찌 같은 선택지를 주겠느냐.”
일로벨라가 텅 빈 소리로 짧게 웃었다.
“다이크 백작의 영윤은 어떠냐. 그가 널 사모하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하던데.”
그녀와 헤일레트와의 사이를 모르는 이는 많았으나, 적어도 황제는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흠을 잡으려는 의도로 생각한 일로벨라가 모른 체 잡아뗐다.
“모르는 일입니다. 저와는 관계없습니다.”
“이제 알면 되었지. 제법 쓸 만한 놈이다.”
“싫습니다.”
“거만한 제 아비보다야 훨씬 나은 놈이 아닌가.”
“로드리고 후가 아니면 저는 싫습니다.”
“네가 로드리고 후를 가지면 그가 순순히 네 오라비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냐. 그럴 놈이 못 된다.”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이크만큼 카디링거에 쓸모 있는 자들이 있는가?”
일로벨라는 그제야 루드비히가 자신에게 진지하게 권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선택권을 주듯, 그러나 여전히 제 의사는 모두 피한 채로.
“상관없습니다.”
“넌 그저 비올레타가 칼을 가지는 게 싫은 것이냐?”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니면 이 모든 게 네 어미가 시킨 것이라?”
“폐하!”
“되었다. 이제 선택하라.”
“저는 로드리고 후를 원합니다.”
“그리고 로드리고 후는 비올레타를 원하지. 짐은 그를 무시할 수 없노라.”
“제가 먼저였습니다!”
비명처럼 터져 나온 소리에도 루드비히의 얼굴은 평온했다. 묘하게 비틀어진 입이 담담하게 소리 내 말했다.
“너도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할 줄 아는구나.”
담담한 말 한마디에 실린 가벼운 냉소가 일로벨라의 목을 졸라 왔다. 더 이상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평생 황제의 앞에서 선을 넘기는커녕, 그 선 가까이조차 가 본 적 없는 일로벨라는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숨겨진 경고를 찾아냈다.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의외라 흥미롭다만, 이 사안은 차마 더 이야기하기엔 지나치게 재미없구나. 이만 결론을 말하마.”
허무맹랑하다. 재미없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그렇기에 모든 것이 의미 없는 대화였다. 일로벨라는 비로소 제 아비가 얼마나 우스운 무게로 제 인생을 재단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놀라울 것 하나 없이 새삼스러웠지만, 스스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엔 조금 비참한 일이었다.
일로벨라가 우아한 몸짓으로 천천히 고개를 조아렸다. 눈가가 시큰거렸으나, 일로벨라는 그대로 눈을 부릅뜬 채 백색의 화려한 대리석 위로 보석들이 고아하게 펼쳐 낸 황제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이보다 훨씬 어릴 적에도, 이 거대한 지도 위에 서 있는 제가 하찮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크면 괜찮아지리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틀리면, 또다시 그렇게 생각하길 반복했다. 언젠간 이 위에 서 있어도 허리를 빳빳이 세울 날이 오리라고.
그러나 언제나 그 생각은 틀렸고, 아직도 변한 건 없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내리깐 눈으로 무심하게 일로벨라의 정수리를 응시하던 루드비히가 부드럽게 말했다.
“짐이 네게도 기회를 줬음을 명심하라. 너 역시 짐의 딸임을 잊지 않아.”
“……명심하겠습니다.”
“이렌시아와의 국혼은 잉거스트전戰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다줄 중사이긴 하나, 짐은 네게 거창한 국운 따위를 운운하며 갑작스러운 희생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
“어떤 것이든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라면, 소녀는 기꺼이…….”
일로벨라의 순종적인 대꾸에 루드비히가 피식 웃었다. 비웃는 기색이라고는 없는 가벼운 웃음이었으나 일로벨라는 굳은 얼굴로 좀 더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조금이라도 어긋나선 안 된다. 오라비를 위한 차선次善이라도 잡아야 했다.
“황실에 귀한 계집이 짐의 딸들뿐이겠느냐. 어차피 나이 지긋한 황태자의 재취, 핑계 대고 보낼 계집은 많다. 그게 반드시 너일 필요는 없지.”
“허나.”
“다만 널 보낸다면 내 면이 조금 더 설 것이다. 그리고 이렌시아에 더 많은 걸 요구할 수 있겠지.”
“…….”
“허나 고작 이런 이유로 너에게 국혼을 강요한다면 네게 불공평하지 않겠느냐. 네 동생에게 혼사를 ‘양보’하기까지 한 네게는 말이다.”
일로벨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루드비히의 서늘한 시선이 그대로 내리꽂혔다. 일로벨라는 간헐적으로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눈을 똑바로 떠 그 비수 같은 시선을 마주했다. 루드비히가 짐짓 부드러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러니 적어도 네가 그리도 원하던 로드리고의 허울뿐인 이름만 네 오라비에게 안겨 주는 것보다는 나아야겠지.”
일로벨라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루드비히가 매끄럽게 입매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네가 바라는 네 인생의 가치를, 좀 더 나은 곳에서 쓸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으냐?”
가치라는 단어에 얕게 깔린 조롱을 일로벨라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좋은 차선을 잡을 기회였다. 일로벨라는 깨끗한 어조로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네가 이렌시아와의 국혼을 승낙하면, 네 오라비에게 잉거스트 출정의 총사 권한을 주마.”
일로벨라가 낮게 숨을 들이켰다.
“네 오라비의 계승권을 공고히 해 주는 것에는 그보다 완벽한 장치가 없으리라.”
“…….”
“여기까지가 내가 네게 주는 선택지다. 이렌시아와의 국혼, 그리고 다이크 백의 차남. 어느 것이라도 네가 본디 원하던 허울뿐인 로드리고보다 낫지 않느냐. 네 사랑스러운 ‘연인’과 결혼하면, 다이크는 통째로 네 오라비 것이 될 것이고. 아마 너도 행복할 것이고.”
대수롭지 않게 스치듯 들린 연인이란 말에 일로벨라가 깊게 깨문 입술이 점점 파랗게 질려 갔다. 루드비히의 여유로운 시선이 일로벨라의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싸늘하게 훑었다.
“그리고 오스티아 공과의 국혼이 성립된다면, 빌키어스는 아마 전쟁 영웅이 될 수도 있겠지.”
“…….”
“자, 어찌하겠느냐? 선택은 네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