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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7장 (8/21)

<1막-7장>

비올레타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로드리고령은 반나절이면 충분할 정도로 수도와 가까운 편이었지만, 고상한 속도로 달려야 하는 황녀의 마차로서는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였다. 마차는 편안했으나 이렇게 장시간의 이동은 오랜만이라 어쩔 수 없이 피곤했다. 여름이라 길어진 해마저 어느새 지고 어둑해진 바깥을 비올레타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름, 비올레타는 입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어느덧 여름이었다.

“전하?”

잠시 덜컹하는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뜬 루이즈가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얼굴로 비올레타를 불렀다.

“다 와 가는 것 같네. 이제 슬슬 일어나.”

“으으, 벌써 해가 졌네요.”

루이즈가 졸린 눈을 비비며 창가 쪽으로 다가왔다.

마차는 어느덧 어두운 숲을 지났다. 멀리로 마을의 불빛이 아득하게 보였다. 비올레타는 그 빛의 위치를 가늠하듯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이렇게 쳐다본다고 제가 알 턱이 없었다. 비올레타는 곧바로 추측을 포기하고 루이즈에게 물었다. 루이즈는 로드리고 후작가 출신인 제 어미 덕분에, 로드리고령에 몇 번 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여기가 어디쯤이야? 아니, 그러니까 저기 불빛보이는 곳 말이야.”

“음, 제 기억으로는 아마…….”

루이즈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모르지? 너 모르지?”

“알아요! 이래 봬도 어머니랑 로드리고령에 한두 번 와 본 게 아니란 말예요!”

“그래, 모르네. 역시.”

“전하는 만날 저만 무시하세요!”

“어머, 내가 언제?”

“나중에 내리면 어머니한테 다 말씀드릴 거예요! 오늘은 바로 뒷마차에 어머니가 계시다구요.”

얘가 감히 백작부인으로 날 위협해?

가소로운 듯 루이즈의 반항을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고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그리 안쓰러운 널 집으로 다시 데려가는 게 소원이지? 집에서 늙은 거버니스governess, 여자 가정교사랑 하루 종일 수업하는 게 소원인 거지? 그 무섭다는 네 친척 말이야. 그렇지?”

“……어머니께 말씀드리는 건 일단 취소할게요.”

아이를 풀죽게 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비올레타는 루이즈의 항복에 의기양양하게 웃다가 루이즈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점잖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의기양양한 얼굴을 놓치지 않은 루이즈가 볼을 부풀린 채 씩씩거렸다. 비올레타가 모른 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여긴 대체 어디야?”

“저는 몰라요. 전하가 저는 역시 모른다고 하셨으니, 제가 알 턱이 있겠어요?”

“말은 똑바로 해, 루이즈. 넌 원래 몰랐어.”

“전하!”

둘의 의미 없는 대화를 비웃든 어느새 로드리고의 고성古城은 가까워졌다. 고성을 지나자 로드리고의 저택에 도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멈춰 선 마차 안에서 루이즈가 면경面鏡을 꺼내어 분주하게 제 머리며 드레스를 정돈하는 것을 바라보며 비올레타가 피식 웃었다. 저야 벽에 머리 한 번 누인 적도 없으니 손댈 것도 없어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이내 몬드리올 백작부인의 나직한 부름과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문가를 향해 몸을 일으킨 비올레타가 문밖의 사람을 발견하고 조금 놀란 듯 크게 떴다. 적어도 제 마차 바로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서 있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의외의 인물이었다.

“로드리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5황녀 전하.”

로드리고의 젊은 후작이 마차 속으로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잡힌 손이라도 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보는 눈이 많아 그럴 수도 없었다. 몬드리올 백작부인의 기품 어린 웃음소리, 그 곁에 루이즈의 재잘거림, 시종들의 분주한 소음, 그 모든 것을 지나 남는 것은 후작과 저의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교차하는 걸음사이로 어색한 적막이 떠돌았다. 엄밀히 말하면, 어색한 것은 자신뿐인 듯했지만. 말 한마디 없이 저택 안까지 들어오게 되자 어색한 기운은 극에 달했다.

비올레타가 결국 그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작게 입을 달싹거렸다.

“로드리고 후.”

“말씀하십시오.”

“로드리고 후께서는 원래 그렇게 말이 없, 아니 과묵한 편이신가요?”

“아닙니다.”

“…….”

아닌 사람이 저한텐 이러나? 남자는 블라디모로에서 그리 좋지 않았던 제 첫인상에 충실하려는 듯 짤막하게 대꾸했다. 애초에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보이려고 한 의도를 제외한다면 몬드리올 백작부인과 제대로 된 친분을 쌓고, 르네비어 황녀를 만나는 것이 이번 박람회에 온 목적의 전부였다. 그러니 ‘시녀 하나면 족하다’고 대답하고서는, 몬드리올 백작 영애인 루이즈만 달랑 데려온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몬드리올 백작부인에게 딸과 보내는 휴가만 한 선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다 보니 로드리고령에서 비올레타의 모든 일정은 몬드리올 백작부인과 맞춰져 있었고, 그동안 이 바쁜 남자와는 몇 번 마주할 일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제 방까지 얌전히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곤란했다. 그는 추밀원의 일원이었고, 황제의 하나 남은 여동생이 낳은 유일한 조카였으며, 언젠가는 ‘비올레타’에게 표를 던질 수도, 던지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라키엘은 아직 이 남자의 필요성을 말해 준 적이 없었지만, 언젠가는 이 남자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조금 집적대 놔야 했다. 비올레타의 눈이 순간 음흉하게 반짝였다. 본 영지에 위치한 후작의 저택답게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는 홀을 비올레타가 감탄하며 둘러보다 다시 제 곁의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계단을 조심하라는 듯 남자가 몸에 밴 의례적인 손짓으로 비올레타의 손을 살짝 당겼다. 완전 가망이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비올레타는 한 걸음씩 남자를 따라 계단을 올라서며 남자에게 물었다.

“제가 저택에 내리고 후작께서 몇 마디나 하셨는지 아시나요?”

“모르겠습니다.”

비올레타는 남자의 매력적인 얼굴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잘난 얼굴을 다 죽이는 재수 없는 행태를 보라.

“환영, 말씀, 아님, 모름.”

비올레타의 앞뒤 잘라먹은 말에 남자가 조금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딱 네 마디 하셨네요. 그리고 드디어 저를 보셨고 말이죠.”

“황녀께서 심심하지 않으시도록 시끄럽게 떠들어 줄 이가 필요하다 하시면, 트루바도르troubadour, 음유시인라도 불러 드리겠습니다.”

“후작께서 제게 해 주신 두 번째로 긴 말이 이런 호의라니 감동스러워요.”

첫 번째는 박람회가 어디 계집들 소풍 오는 곳인 줄 아느냐며 웃는 낯으로 빈정대던 말이었지. 비올레타는 그의 의도를 모른 척 순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트루바도르가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수백 년 전 사람들이라는 건 무지한 저도 알아요.”

남자의 청회색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리고 제게 필요한 건 저 혼자 자문자답할 이야기꾼이 아닌, 저와 말을 주고받을 사촌 오라버니죠. 당신과, 몬드리올 백작부인처럼 말이에요.”

“전하, 오늘은 제 딸아이를 데리고 자도 될까요? 로드리고령에는 오랜만에 온 것이라.”

마침 뒤에서 들려오는 몬드리올 백작부인의 목소리에 비올레타가 제 말을 끊고 뒤돌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사했다. 시종의 안내를 받고 2층으로 모녀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비올레타가 다시 남자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알 수 없는 얼굴로 피식 웃으며 물었다.

“명령이십니까?”

“보통 사촌끼리 명령을 하나요?”

남자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뒤따르던 시종을 물렀다. 계단이 끝나고, 복도로 들어서자 단둘이 남았다. 비올레타는 미련 없이 제게서 떨어진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를 따랐다.

“고모님께서 이쪽에 계시나요?”

“어머니께서는 후원 별관에 계십니다.”

“고모님을 가장 먼저 뵙는 게 도리일 텐데.”

“환자를 귀찮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닙니다.”

“아, 하긴 야심한 시각이죠. 편찮으시다는 얘긴 들었어요. 정확히 어디가 안 좋으신 거죠? 내일 고모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어머니께 불필요한 관심은 거둬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5황녀 전하.”

그저 성가신 듯 무관심하게 비올레타에게 대꾸하던 남자의 마지막 말에 이상하게도 어느새 날이 서 있었다. 비올레타는 그 가시 돋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반문했다.

“무슨……?”

“그리고 저 또한.”

남자는 문을 열며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미소 짓는 눈매 사이로 청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일렁거렸다. 열린 문 사이로 서서히 새어 나오는 가느다란 빛에,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던 남자의 백금발이 비현실적으로 빛이 났다. 비올레타가 순간 그것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천천히 남자의 눈을 마주했다.

비올레타의 당황한 기색은 찰나였다. 그녀가 순식간에 제 얼굴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을 발견한 남자가 피식댔다.

“그리 순진한 척, 모르는 척.”

“…….”

“네가 정말로 그랬으면, 지금 여기 있지도 않겠지.”

남자의 말투는 어느새 편안하게 잘려 있었다. 비올레타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의 조카였다. 남자가 나른한 한숨을 뱉으며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기어이 여길 와서. 이것도 에델가르드의 네 사촌 오라비 짓인가?”

비올레타는 그녀를 자극하려는 듯 부러 라키엘을 겨냥한 말에 뾰족하게 대꾸하는 대신, 미간만 살짝 찌푸렸다.

“어찌 제게 날을 세우십니까?”

비올레타가 마치 그의 하대에 장단을 맞춰 주듯 공손하게 물었다. 남자는 오히려 그 말투가 거슬리는지 짜증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비올레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고모님과 만나는 것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명령을 하지 그랬나. 기꺼이 대답해 드렸을 텐데.”

“후작과 제 사이엔 명령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럼 내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 게 좋아. 대답 같은 건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내 사촌누이와 조용히 박람회나 즐기고 돌아가는 거야.”

남자의 조각 같은 얼굴 위로 상쾌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문을 조금 더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고개를 모로 까딱했다. 비올레타는 순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일곱 시가 되면 하녀들이 시중들러 올 것이고, 혹시 밤사이에 하녀를 호출할 일이 있으면 침대맡의 종을 치십시오.”

비올레타가 방 안에 들어서서 그를 다시 돌아보자, 그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그녀에게 공대했다. 비올레타는 애매한 얼굴로 끄덕였다. 남자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천천히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비올레타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달칵, 문이 닫혔다.

비올레타는 사용인이 저를 깨우러 오기도 전에 불쾌한 얼굴로 눈을 떴다.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인간이 아니꼬워 그런지 잠자리도 사나웠다. 왠지 누가 금지하면 무작정 그 반대로 하고 싶은 제 본능에 충실하자면, 어제 그 새파랗게 어린 후작이―제가 그보다 적어도 대여섯 살쯤 어린 것은 고의적으로 무시했다.― 말한 건 죄다 반대로 당장 실행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실 그 도자기 같은 얼굴이 어떻게든 일그러지는 것, 그거 하나가 보고 싶어 비올레타는 자기 전까지만 해도 해가 뜨는 즉시 당장 그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 침입을 감행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제가 그런 본능에 충실했다면 제 인생이 ‘누가’ 시키는 대로 이렇게 잘 만들어지지도 않았겠지. 비올레타는 본능에 그리 충실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싸가지는 그런 제 얌전한 본능까지도 건드리는 고차원의 것이었다.

어쩌지.

비올레타는 누운 채로 눈을 깜빡였다. 일단은 조금 탐색할 시간이 필요했다. 박람회가 열리는 5일 뒤까진 그저 몬드리올 백작부인과 로드리고령에서 유람이나 다니는 것이 제 일정의 전부였다. 물론 제가 어제 이 방에 들어오기도 전에 제 거대한 짐들과 함께 방에 들어왔을, 저 징그러운 책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테이블 위에 쌓인 책들의 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얕은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시간은 그리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황녀 전하,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들어와요.”

메이드 둘이 들어와 공손하게 한번 읍하고는 침대로 다가왔다. 일개 지방의 메이드가 황실의 예를 알 리 없으니 그런 간소한 인사는 당연했다. 그런 자질구레한 예를 몰라도 적당히 예의 바른 인사는 메이드들의 인상을 제법 좋아 보이게 했다. 비올레타가 손을 내밀자 메이드가 공손하게 그 손을 잡아 반쯤 일어나 있던 비올레타를 마저 일으켰다. 실상은 일으키는 시늉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란토니아의 귀족 여성이 시중 없이 제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은 보통의 일상 속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릴 때도 그렇게 자라지 않아 처음엔 참 피곤한 일이라 생각했는데도 익숙해지니 별일도 아니었다.

익숙해진다는 건 무섭다. 이제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도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당연하게 손을 내밀며 시중을 받는 제가 순간 우스워 비올레타는 피식 웃었다. 메이드가 놀라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비올레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심한 듯 다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단아한 인상의 메이드는 제법 노련하게 비올레타의 시중을 들었다. 세안까지 끝내고 어느새 드레스가 입혀지더니 머리가 매만져졌다. 눈을 딱히 둘 데가 없어 무릎을 꿇고 제 치마폭을 점검하는 메이드의 단정하게 묶인 머리며 정수리 따위를 내려 보던 비올레타가 문득 말했다.

“머리칼이 나랑 비슷하네요.”

드레스의 주름과 한창 씨름하던 메이드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입을 몇 번 달싹거리던 메이드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겠는지 그대로 다물었다. 비올레타가 부드럽게 웃었다.

“햇빛을 받으니 머리가 약간 붉기에. 이름이 뭐예요?”

“……리, 리타입니다, 황녀 전하.”

리타, 비올레타가 입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흔하디흔한 그 이름 위로 이카르트의 미성이 겹친다. 에누마 엘라시 전야제의 밤, 단 하루를 들었던 제 가짜 이름이었다. 어쩐지 그녀가 더욱 눈에 들었다. 사람은 보다 익숙한 것에 약하다.

“리타. 이름이 예쁘네요.”

“감, 아니, 황송합니다.”

메이드의 입에서 어색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비올레타가 설핏 웃었다. 하녀장이 억지로 당부시킨 말이겠지. 비올레타는 뒤에 서 있던 메이드에게도 예의상 이름을 물어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리타라는 이름의 메이드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메이드의 눈에 떠오른 호감과 경외를 비올레타는 싱긋 웃으며 마주했다.

너로 정했다.

늙으니 놀러 다니는 것도 힘들다. 비올레타는 발걸음도 가볍게 앞서 걸어가는 루이즈를 보며 한숨을 푹 쉬고는, 수십 년은 족히 이른 생각을 했다. 그 많은 일은 다 어떻게 하고 살았던 건지 모르겠다. 몸 편하게 산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신세 좋은 한탄이 흘러나온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였다.

비올레타의 한숨 소리에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비올레타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로드리고령에서 이제 겨우 사흘이 지났는데, 벌써 힘드신가요? 아직 박람회는 시작되지도 않았는걸요.”

“그냥, 여독을 제대로 풀지 못했나 봐요. 조금 피곤하네요.”

비올레타의 나직한 대꾸에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비올레타의 안색을 살폈다.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의 관심에 비올레타가 조금 당황하는 새, 백작부인의 부드러운 손이 비올레타의 이마를 짚었다. 비올레타가 당황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그렇다고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약관弱冠도 되지 않으신 전하께서 이 몸보다 고단해 하셔야 되나요? 아, 역시 미열이 조금 있군요.”

그제야 비올레타는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슥 만졌다. 그러고 보니 이마가 약간 미지근하긴 했다. 으레 이런 말을 들으면 그렇듯, 의식하고 나면 안 아프던 머리가 지끈거리고, 미지근한 느낌은 조금 뜨거운 듯한 착각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어느새 비올레타는 제가 정말 아프다고 단정 내렸다. 오랜만에 합법적인 핑계를 대고 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오전이 지난 시간이었다. 벌써 몬드리올 백작부인과의 시간을 포기하고 돌아가자니 주어진 시간이 아까웠다. 애초에 박람회 전까지는 그녀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목표였다.

제가 냉큼 쉬기는커녕 이런 생각까지 스스로 하게 된 것을 보면 저도 퍽 부지런한 편이었다. 라키엘 그가 이 부지런함을 좀 봤어야 하는데. 비올레타가 속으로 뾰족하게 투덜거렸다. 그 미친 수업량을 소화하고 사는데도 그 인간은 저를 항상 게을러터진 돼지 보듯이―이건 순전히 그녀의 기분 탓일 수도 있다.― 보았다. 그녀는 돌아가서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은 유혹과 며칠간 제가 목표했던 것 사이에서 얼마간 더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을 비웃듯 몬드리올 백작부인의 부드러운 손길이 비올레타를 뒤로 밀었다.

“들어가시지요.”

“아, 이제 막 나왔는걸요.”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다시 들어가면 되지요.”

백작부인이 너무 간단하게 대꾸하는 바람에 비올레타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앞에서 신 나게 걸어가는 루이즈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나들이 드레스를 입은 열여섯의 루이즈는 아직도 여자라기보다는 아이 같았다. 비올레타가 빙그레 웃고는 덧붙였다.

“지금 들어가면 루이즈가 실망할 거예요.”

“전하.”

몬드리올 백작부인의 문득 엄격해진 목소리에 비올레타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

“루이즈는 저와 제 남편의 딸이지만, 저 아이는 이제 전하의 신臣이고 전하는 저 아이의 주군이십니다.”

“아…….”

“아직 어리고, 부족한 아이를 보낸 저로서는 이리 작은 것까지도 저 아이를 배려하는 전하의 마음 씀씀이가 감사하나, 전하께서는 좀 더 자신을 생각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백작부인의 말이 종래의 말보다 좀 더 격식 있기까지 한 투라 딱히 루이즈를 배려한 적이 없는 비올레타로서는 양심에 찔렸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곧 그 민망함을 이겨 냈다. 이렇게 벌써 좋게 오해받을 줄 알았으면 진짜 잘해 주는 척했어야 했는데. 비올레타가 그렇게 아쉬워하면서도, 백작부인의 엄격한 표정에 어울릴 만한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중심은 전하이십니다. 그란토니아의 최고 황족으로서 부디 그 존엄을 누리세요.”

“부인의 말, 새겨듣도록 할게요. 고마워요.”

“그리고 전하.”

다시 비올레타를 부른 소리는 전과 같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어조였다. 비올레타가 스르르 굳은 얼굴을 풀며 웃자 우스운 듯 백작부인이 피식 웃고는 뒤따르던 하녀에게 루이즈를 눈짓해 챙길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비올레타를 이끌고 뒤돌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게 더 이상 그리 공들이실 필요 없으세요.”

“네……, 아니, 네?”

“제 입으로 잘난 체하고자 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꽤 쓸모 있는 사람이랍니다.”

비올레타는 어떤 반응을 곧바로 보이는 대신 그녀의 의도를 가늠하듯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쓸모 있다 뿐이겠나? 그녀의 남편은 추밀원의 일원으로 유서 깊은 몬드리올가家의 주인이자 수도 방위 사령부를 호령하는 사령관이었고, 그녀는 선대 로드리고 후작의 조카이자 현 로드리고 후작의 사촌 누이로 그란토니아의 대귀족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혈통을 자랑했다. 또한 수도에서 가장 격조 높은 살롱을 가진 여주인이기도 했다. 고작 쓸모 있다는 짧은 말로는 그녀의 가치를 설명하기에 한참 부족했다.

“그리고 제 남편도 마찬가지지요.”

“…….”

“저를, 혹은 제 남편을, 혹은 저희 부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많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저를 필요로 하시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그녀의 말은 자신만만했으나, 밝고 상냥한 어투 덕에 오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비올레타는 좀 더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니 이용한다는 생각에 불편해 하시거나, 이용할 수 있기까지 충분히 공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어째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가요?”

“몬드리올 역시 전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백작부인의 꼿꼿한 시선이 와 닿았다. 비올레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비올레타’의 데뷔가 성공적이었다고는 해도 그것과는 별개로 공식적으로 5황녀의 계승권은 단 한 번도 거론된 적 없었고, 그렇기에 차기 황위를 논함에 있어서도 5황녀는 논외였다. 황태자가 죽고 없는 현재, 제국법상 유일한 적통으로서 ‘비올레타’의 계승권이 가장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임에도 그러했다. 황녀이기 때문이었다.

수백 년 전의 여제들은 잊힌 지 오래였고, 황녀에게 황자의 차선책으로나마 계승권이 있음을 명시해 둔 제국법 조항은 사문화死文化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카디링거를 등에 업은 1황자나, 최근 궁내부 장관으로 득세한 베론 후가 비호하는 4황자가 있는 이상, 누가 봐도 비올레타는 때깔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이다. 제 오라비가 죽고 차기 황제의 패권과 가장 멀리 있는 황녀에게 남은 것이란 고귀한 제 어미와 외족뿐이었으므로.

그러니 의아했다. 몬드리올 백작부인의 말은, 현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쪽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몬드리올은 로드리고와 함께 몇 대에 걸쳐 고귀한 중립을 지켜 온 가문이었다.

“필요와 필요가 만났으니, 성가신 절차는 필요 없지요.”

필요와 필요……. 백작부인의 말을 입안으로 작게 되뇐 비올레타가 그녀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몬드리올가의 고결한 중립을 알고 있습니다. 황제가 되지 않은 이는 누구도 섬기지 않고, 황제가 되는 이는 누구라도 섬기는 것.”

“물론 그러했습니다.”

“그러했다…….”

비올레타가 말끝을 흐리며 멈춰 섰다. 백작부인이 한 걸음 앞에서 비올레타를 향해 뒤돌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 고결함은 뒤집으면 비겁한 것이 되지요.”

“……가주家主의 생각이 변하였습니까? 비겁하지 않은 쪽으로.”

“좋게 포장하면 그렇겠죠. 사람은 때때로 좀 더 많은 걸 가져보고 싶어 하는 법이거든요.”

백작부인이 싱긋 웃었다.

무언가 그녀의 말이 석연찮은 것을 탁 짚지 못해 비올레타가 이맛살을 설핏 찌푸리다 입안으로 아, 하고 탄성이 나오는 것을 삼켰다. 제가 그녀에게 바란 것은 하나一 정도의 호응인데, 그녀가 열十은 미리 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부터가 어쩐지 이상했다.

백작부인은 애초에 제가 계승권자 중 하나인 것을 전제로 두고 있다. 그러나 라키엘에게 들은 바가 없는 비올레타로서는 그녀의 호응이 반갑다기보다는 그저 의심스러웠다. 비올레타가 모른 체 그녀를 떠보듯 말했다.

“그러나 내가 황자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부인도 아실 겁니다. 황제가 되실 오라비가 누군지는 모르나 만일 그대가 내 곁에 있으면 훗날의 몬드리올이 지금처럼 수도의 군권을 잡고 있진 못하겠죠.”

“훗날의 그 황제는 전하의 오라버님이 아니라, 전하이실 수도 있지 않나요?”

백작부인이 대수롭지 않게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올레타가 헛웃음을 흘리는 듯 입매를 조금 휘었다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백작부인을 응시했다. 곧잘 웃던 황녀의 눈매에 사람을 위압하는 권위가 서렸다. 백작부인은 그것이 퍽 흡족한 듯 웃었다.

“그대는 지금, 그대가 어디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어디까지 아느냐는 말이 아닌, 지금 네가 아는 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여지를 둔 질문이었다. 백작부인이 우아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부디 주제넘은 언사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계속하세요.”

“황녀 전하께서 몬드리올과 저를 생각하게 된 것은 블라디모로의 연회 즈음이겠지요. 그러나 제가 전하에 대해 생각한 건 그보다 조금 더 되었습니다.”

“…….”

“황후 폐하께서 절 부르셨죠.”

“어마마마께서 부인을?”

“황후 폐하께는 제 처녀 적에 큰 신세를 한 번진 적이 있지요.”

비올레타의 시선이 그제야 조금 느슨해졌다.

“황녀 전하께서 화재에서 구출되신 직후였을 겁니다. 황후 폐하께서 딸을 부탁한다 하셨고, 저는 사실 그때 대답한 바가 없습니다.”

황녀 전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전하의 위치는 좀 애매하지요. 백작부인이 조금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비올레타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황후께서 말씀하시길 ‘내 아이가 황제가 된다 해도?’라고 하셨지요. 황후께선 황자들이 몬드리올에 끊임없이 접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고, 황태자 전하를 따르려던 제 남편이 황태자 전하의 사후 죄 많은 카디링거나 멍청한 베론을 꺼리고 있는 것 역시 알고 계셨습니다. 아, 참고로 아까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몬드리올의 고결한 중립은 이미 황태자 전하를 따르기로 한 순간부터 흐려진 지 오래였지요.”

“아.”

“그러나 기꺼이 황후께 그러겠노라 말씀드리기엔 황녀 전하도…….”

“나도 그리 좋은 고려대상은 아니었겠죠.”

“그랬죠. 그러나 루이즈가 전하께 가겠노라 떼를 쓰고 난동을 부렸을 때, 이게 운명인가 했답니다.”

아니, 운명이라기보단 편지 한 장이 아니었을까.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말에 비올레타는 조금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이제는 꽤 멀어진 루이즈를 바라보았다. 썩 닮은 구석을 찾지 못했던 모녀에게서 이제야 조금 닮은 구석이 보였다. 모녀는 운명론자였다.

“운명이라.”

“기실 3황녀께서도 루이즈를 원하신 적이 있답니다.”

“정말요?”

“혹여나 루이즈가 보면 원할까 싶어 받자마자 기함한 것을 루이즈가 그 자리에서 거절했지요. 그래서 전하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했는데…….”

그러나 우리에겐 편지가 있었지. 바로 그 차이였다. 그러고 보니 1황자가 친필 편지라도 써 줬으면 그쪽에 날름 달려가고도 남았을 아이였다. 1황자의 반질반질 잘난 외모야 국경도 초월하는 것이니 그럴 법했다.

얘 좀 봐라. 수도에 돌아가자마자 정밀한 세뇌교육이 필요할 것 같았다. 비올레타는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듣지 못할 만큼 혀를 낮게 찼다.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 남편이 돌아가신 황태자 전하를 따르려 했던 것도, 황후 폐하와 저의 인연도, 그리고 루이즈의 마음을 전하께서 이리 가지신 것도 모두. 돌아보면 다 운명이 아니었나 싶어…….”

그 운명의 마지막 부분이 좀 걸리긴 하지만, 비올레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부인이 그리 흔들리던 마음을 정한 지점이 다름 아닌 루이즈였다니, 진짜 잘해 줬어야 했다. 사실 몬드리올 부처夫妻로서는 이리저리 수지타산을 맞춰 본 뒤, 저를 지켜볼 만큼 지켜본 끝에 정한 것을 이렇게 잘포장한 데 가까울 것이다. 루이즈가 타이밍 좋게 철없는 짓을 한 것이 한몫한 건 사실이지만, 사실 루이즈가 시녀가 된 지도 제법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돌아온 확답이다. 제가 그들의 눈에 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올레타는 이제 그런 생각을 스스로 함에 거리낌이 없었다.

백작부인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 부드러운 얼굴과 단단한 눈빛이 이질적이었다.

“수도에 돌아가면 황후 폐하를 찾아뵙고, 그때 미처 드리지 못했던 답을 드릴 생각입니다.”

“…….”

“몬드리올이, 이제 전하의 뒤에 함께하겠노라고.”

처음은 언제나 위대한 법이다. 몬드리올, 그 흔히 말해 온 발음에 얕은 소름이 끼쳤다. 비올레타는 조금 벅찬 기분으로 백작부인을 향해 마주 웃었다.

이제야 ‘비올레타’의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드리고의 하녀장은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인 듯했다. 비올레타는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리타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침실 메이드인 리타가 바깥에서 황녀를 맨 앞에서 수행하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사용인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면서도 리타를 힐끔힐끔 훑어보며 지나갔다. 리타는 제가 루이즈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에 주제를 착각할 만큼 결코 멍청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선에 으쓱해 할 정도로는 순수했다.

비올레타는 그 모양이 귀여워 웃다가 넌지시 물었다.

“리타.”

“네!”

“후작부인께서 계신 별관이, 여기서 얼마나 머니?”

미혼인 후작의 로드리고령에서 후작부인이란 그의 어머니인 황녀 르네비어뿐이었다.

“우측 정원만 건너면 있는 걸요……. 아니, 있습니다.”

“그래? 생각보다 가깝네.”

작게 중얼거리며 비올레타가 끄덕이자 리타가 조금 곤란한 얼굴로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비올레타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캐물었다.

“리타, 할 말이 있니?”

“아니 감히 제가 어찌.”

하녀장이 입력해 준 ‘곤란할 때 쓰는 단어’인 듯 리타는 황망하게 입을 움직여 말을 순식간에 뱉어냈다. 비올레타가 안심하라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사람들이 멀리 있으니 안심하고 말해 줘. 네가 무엇이든 말해 주는 것이 내게 도움이 돼.”

“전하께서는, 별관에 가실 수 없습니다.”

“어째서? 아, 하긴 투병 중이시라 문병을 모두…….”

“아뇨, 그게 실은…….”

후작 각하께서, 전하께만……. 리타가 힘겹게 뱉어 내는 말을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비올레타가 손을 들어 막았다. 여태 아프던 머리가 갑자기 멀쩡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천천히 돌아가려 했는데 안 되겠다.

“전하, 가셔도, 문이…….”

리타의 도움 없이도 정원까지는 수월하게 올 수 있었다. 덕분에 리타는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작게 만류하는 목소리로 제게 주어진 역할을 다했을 뿐이었다. 전하, 전하, 전하. 나중에는 아예 그렇게만 부르다, 언제부터인가 지쳤는지 그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수월한 행보는 정원의 끝에서 보란 듯이 끝났다.

“전하.”

비올레타가 문득 제 앞을 막아선 기사들에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제가 올 것을 알고 기다린 양 그들의 등장은 작위적이었다.

“비켜요.”

“로드리고의 황녀 전하께서 외부인의 방문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5황녀 전하.”

중앙에 있던 기사가 그 직분을 힘주어 말했다.

후작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비올레타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기사가 한 말은 비올레타가 반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엄연히 자신의 고모였기 때문이다.

“……5황녀?”

정작 후원에 있던 본인이 눈앞에 나타나면서 그 어떤 것도 소용없어졌지만. 기사들의 당황한 표정으로 보아 그들은 르네비어가 후원에 나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정도로 별관을 호위하는 것과는 상관없어 보였다. 오로지 르네비어를 만날지도 모를 저를 막기 위해 후작이 두었을 사람들이다.

황녀의 뜻으로 위장까지 시켜? 비올레타는 이쯤 되니 그에게 짜증이 나기보다는 이렇게까지 하는 저의가 궁금했다.

어쨌든 비올레타는 정말 운이 좋았다. 리타가 르네비어의 얼굴을 처음 봤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그녀가 있는 이 별관에서 자주 나오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기사들에게 그렇게 쉽게 제 어미의 뜻이 그렇다고 말해 둘 수 있었겠지. 본인에게는 언질조차 주지 않고도 말이다. 일단 그를 이렇게 완벽하게 거스른 것만으로도 비올레타는 기분이 좋았다.

비올레타는 말없이 저를 안내하는 르네비어의 뒤를 따라 별관의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그녀의 우아한 걸음에는 바닥에 부딪히며 일어나는 최소한의 소음조차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제 발소리만 복도를 울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비올레타는 좀 더 조심히 걸었다.

“들어오렴.”

르네비어의 목소리는 딱히 자신의 아들처럼 쌀쌀맞지도, 보통의 조카를 대하듯 다정하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창백한 인상처럼 조금 무미건조했다. 비올레타는 순순히 그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부유한 로드리고의 유일한 안주인, 그리고 황제가 유일하게 살려 둔 제 동기. 그런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수수하고 검소한 방이었다. 비올레타는 르네비어가 가리킨 곳에 가 서 있다가 르네비어가 그 앞에 앉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예의 바르게 앉았다. 그 모양새를 지켜보던 르네비어가 짧게 웃었다.

“유궁幽宮에 갇혀 평생을 자랐다더니 영 그런 것 같지도 않구나.”

그곳에 갇혀 평생을 산 게 제가 아니니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의 우아를 떨며 산 것 역시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금 제 모습이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결과는 아니리라. 비올레타는 제 불편한 속을 그렇게나마 억누르며 웃었다.

“황제 폐하를 많이 닮았구나. 그 머리, 그 눈. 가만 보니 눈매는 미하일과도 닮은 것 같고.”

몇 번이고 들어 익숙해진 말이라도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진짜 비올레타는 사실 저보다 조금 연한 녹색의 눈에, 머리칼도 좀 더 밝았다. 단지 아무도 그런 그녀를 모를 뿐이다.

진짜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진짜 같지 않다. 으레 억울한 이가 외치는 진실보다 사기꾼의 거짓말 몇 마디가 더 정확하고 논리적인 것처럼, 제가 진짜 비올레타보다 오히려 황제의 색에 가까운 것은 제가 그 거짓말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제가 가짜이리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그래서 당연하게도 제각기 익숙한 것을 제게 투영한다. 지금의 르네비어처럼. 비올레타는 조금 쓰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를 뵌 적은 없지만, 정말로 닮았다면 기쁠 것 같아요.”

비올레타의 말에 르네비어가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한숨처럼 말을 돌렸다.

“칼의 무례는 용서하렴.”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마도 고모님…….”

“괜찮다. 그리 편히 부르렴.”

“고모님의 건강에 많이 예민해져 있을 거라고.”

“딱히 그런 것도 아니란다.”

“생각했지만, 역시 아니었던 거지요?”

“그 아이는 귀찮은 것을 싫어해.”

알 수 없는 말에 비올레타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그녀가 귀찮게 하면 얼마나 귀찮게 한다고? 마땅히 후작이 해야 할 수행도, 이런저런 핑계로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대신 도맡아 하고 있지 않나. 물론 그게 피차 좋은 결과이긴 했다. 어쨌든 그는 제게 따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없었다. 그의 시간을 빼앗은 것도 없고, 그를 만나겠다고 귀찮게 굴었던 것도 아니고.

“로드리고 후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것과 제가 고모님을 만나는 데 무슨 상관이라도.”

“그 아이는 골치 아픈 수도의 일들에 관련되는것을 싫어해. 그리고…….”

“저는 그 골치 아픈 일들 중 하나고 말인가요?”

“그 아이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더구나.”

비올레타는 실소했다. 사실 그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로드리고는 몬드리올과 함께 대대로 고결한 중립을 지켜 온 것으로 유명했고, 1황자가 차기 황제로 유력시되는 상황에서 정확히 그 반대편에 있는 제가 이렇게 깔짝대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성가신 일임에는 분명했다. 그것이 고모와 조카 사이의 당연한 만남이라 하더라도, 수도에서 어떻게 부풀려질지는 모를 일이니까.

“이해하죠. 하지만.”

“그래.”

“제가 고모님을 만나는 걸 막는 건…….”

“나도 한 번쯤은 네가 보고 싶었단다. 그러니 칼에게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렴.”

르네비어가 조금 따스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비올레타는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람회가 끝나면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더 찾아와 주렴.”

“한 번 만요? 여러 번 찾아오면 안 되나요?”

비올레타의 넉살 좋은 물음에 르네비어가 창백한 낯으로 작게 웃었다. 비올레타가 걱정스럽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웃고 있으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 주면 좋고.”

“아까 조금 무리하신 것 같던데, 아무래도 이만 쉬셔야 할 것 같네요.”

“그래, 그래야 할 것 같구나.”

“제가 귀찮게 한 것 같아 죄송해요, 고모님.”

르네비어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직하게 말했다.

“미하일은 참 좋은 아이였다.”

“……네?”

“하지만 그 아이처럼은 되지 말거라, 비올레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비올레타는 조금 굳어 있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창이 몇 없는 복도는 그 반대로 지고 있는 햇빛을 받지 못해 어두웠다. 조용히 문을 닫고, 비올레타는 르네비어의 발걸음처럼 제 걸음 소리를 죽였다. 그렇게 얼마를 걸어 이내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불필요한 관심은, 제발 꺼 두라고 했을 텐데.”

남자는 마지막으로 본 모습처럼 싸늘한 시선으로 비올레타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하마터면 환자가 요양하는 곳에서 대차게 비명을 지를 뻔한 제 입을 가까스로 막은 채 얼마간 굳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갑자기 말을 하니 당연히 놀람도 두 배였다. 비올레타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노, 노, 놀랐잖…….”

남자는 제가 처음으로 목격하는 비올레타의 당혹이 그나마 마음에 드는 듯 삐뚜름하게 웃었다. 남자의 조각 같은 얼굴에 서린 희미한 짓궂음을 깨닫고 비올레타는 곧바로 정색했다. 저 남자에게만큼은 조금이라도 모자란 모습 보이기 싫었는데. 남자는 비올레타가 잘 추스른 얼굴에도 바로 전의 그 아연실색했던 표정을 덧씌우듯 묘한 눈으로 비올레타를 응시했다. 비올레타가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정색한 채 남자를 지나쳐 걸었다. 남자가 비올레타의 뒤를 천천히 따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시종일관 제 앞에 유령이 나타나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뻔뻔함이더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럴 땐 누구라도 놀라요.”

“멋대로 움직인 게 누군데, 네가 놀라?”

“일단 여기서 나가죠.”

남자는 비올레타의 말에 순순히 따르듯 성큼성큼 걸어 비올레타를 앞질렀다. 그리고 직접 문을 열고 비올레타를 기다렸다. 친절 한 톨 스며들지 못한 쌀쌀맞은 태도에도 마치 그 기다림은 당연히 생각하는 게 느껴져서, 비올레타는 순간 눈앞의 사람이 제가 아침에 전의를 불태우던 그 남자가 맞는지 조금 헷갈렸다. 비올레타가 문을 나서자 남자는 부드럽게 문을 닫았다. 믿을 수 없게도 남자에게는 몸에 밴 듯한 행동이었다.

비올레타는 로드리고령에 도착한 첫날, 남자가 저를 에스코트하던 손길만큼은 꽤 친절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라키엘이 최소한의 필요에 의해 가장假裝하는 친절과는 다른, 좀 더 본능적인 종류의 행동이었다. 비올레타가 생각하기에, 라키엘은 결코 여자에 대한 저런 사소한 배려조차 당연하게 생각할 수 없는 종자였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러니 그 앞에서 밥을 조금만 천천히 먹어도 계집들의 팔자 좋은 시간 낭비라면서 잔소리를 있는 대로 쏟아내는 것이다. 비올레타는 문득 떠오른 공저에서의 안 좋은 추억에 조금 몸서리쳤다.

어쨌든 라키엘이 여자를 대하는 배려가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여도, 그것이 라키엘이 잘 꾸며 낸 연기가 버릇이 된 정도라는 걸 비올레타는 일찌감치 알았다. 라키엘은 여자에게 단 5초라도 헛되이 쓰기 싫어한다. 비올레타가 라키엘에게 겉으로 보이는 배려를 받은 시작점은 당연하게도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이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신도 느낄 만큼 진심일지언정, 그게 제가 여자여서는 아니었으니까. 그건 차라리 그녀라서 그런 것에 가까웠다.

비올레타는 순간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민망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이 남자는 달랐다. 저는 그에게 특별하지 않고, 지금 제게 아무것도 가장하지 않고 있으면서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 있는데도 그는 자신을 배려했다. 그만큼 몸에 배일 정도의 성품이면 실상 제게 이러는 게…….

“뭐 하나?”

적어도 본래 성품은 아닐 수도 있다는 소리다. 사실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조금 멀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생각이 이 정도쯤 닿자 비올레타는 기분이 좀 더 나빠졌다. 원래 저놈은 저렇다, 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남들한테 멀쩡한 놈이 저한테만 칼을 물고 달려든다는 게 더 기분 나빴다.

남자가 짜증스레 물었다.

“고작 사흘도 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로드리고 후?”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모른 체 공손하게 묻는 비올레타의 말에 남자가 얕게 코웃음을 쳤다. 남자의 비웃는 낯에 비올레타가 마치 가면을 벗듯 곧바로 미소를 지우며 무표정하게 그를 마주했다.

그래, 이 남자랑 나는 이미 텄다. 비올레타는 더 이상 이 남자에게 웃어 보이기 위해 쓰는 제 안면 근육이 아까웠다. 라키엘에겐 미안했지만, 자신은 이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것 같았다. 애초에 제가 로드리고령으로 오기 전 라키엘이 몬드리올 백작부인 외에 별 언급이 없었던 것은, 라키엘 역시도 애초에 이 남자와 자신의 사이를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뭐,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겠지. 그렇다고 이 남자와 뒤틀리고 오라는 소리는 아니었겠지만, 비올레타는 그렇게 라키엘의 의도를 재해석해 자신을 위로했다. 그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기분 나쁘게 미소를 띠었다. 어쩌면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내 어머니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몬드리올 백작부인과 즐거이 유람이나 돌아다니다 가시라고, 그게.”

“…….”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비올레타는 이 남자가 예상한 제 태도가 뭐든 모두 다 부숴 줄 생각이었다. 비올레타가 까칠한 목소리로 비꼬듯 대꾸했다.

“글쎄, 제 생각은 좀 다른데요. 일단 그딴 걸 사람들이 보통 부탁이라고 부르지는 않죠.”

비올레타의 전에 없던 뾰족한 대꾸에 남자의 날카로운 인상이 묘하게 흐트러졌다. 비올레타가 짐짓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전 지극히 공손하게 물었던 자신은 없는 양, 편안한 말투였다.

“둘째, 르네비어 님과 만나는 건 르네비어 님이 거부하지 않는 이상, 온전히 제 재량이고요.”

“재량?”

남자가 조금 기가 찬 듯 되물었다. 비올레타는 그에 아랑곳 않고 고개를 비스듬히 가누며 최대한 시건방져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와 제 사이가 성립되기 이전에 르네비어 님은 제 고모님이세요. 마치 ‘그대’가 이미 폐하의 조카였던 것처럼 말이에요.”

비올레타가 아랫사람 대하듯 그대, 하고 부러 힘주어 건방진 투로 말하자 남자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비올레타는 남자를 따라 하듯 피식댔다.

“설마 네 고모이기 전에 우리 엄만데, 하고 일곱 살 짜리마냥 말하고 싶은 건 아니죠? 그거, 그대가 하기에 족히 이십 년은 늦었잖아요.”

“…….”

“저는 로드리고 후가 폐하를 만나신대도 막지 않는데, 로드리고 후께선 어찌 제가 고모님을 만나는 것을 막으셨나요? 불공평하지 않나요? 자, 그럼 이제 로드리고 후의 의사를 존중해, 공평하게 말해 볼까요?”

“하.”

“제가 그 부탁 같지도 않은 부탁 들어 드리면, 로드리고 후께서도 폐하를 뵙지 못하셔야겠죠? 매년 보고하실 것부터가 한두 가지가 아니실 테지만……. 공평하려면 어쩔 수가 없네요. 그렇죠? 그란토니아인의 삼 대 덕목, 로드리고 후께선 똑똑하시니 한 다섯 살 때쯤 배우셨을 거예요.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제 권리는 철저히 지키고, 남의 권리에는 제 권리에 했듯 공평하라. 비록 오래되셨겠지만 기억나시죠? 추밀원의 영예로운 일원인 로드리고 후께서, 절대로 어기실 수 없는 그것 말이에요.”

“너.”

“저야 평생을 무지하게 갇혀 살아 최근까지도 몰랐는데, 모든 영지는 해마다 재무부의 회계감사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연간 수입이 5,000만 란트 이상일 시 폐하를 직접 뵙고 감사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고요. 어머, 그럼 어떡하면 좋죠? 단 하루만 늦어도 손발 묶여서 수도로 호송되는 세상이지만 어쩔 수 없네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로드리고 후와 제 권리를 공평하게 뒀을 때 그럴 수밖에 없으니 말이에요.”

남자는 비올레타가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줄줄 뱉어낸 도발에도 불구하고 발끈하며 반박하는 대신, 그저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야 속을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뒤집어 버리고 싶었지만, 이쯤 되니 남자의 반응도 별로 상관없다고 느껴졌다. 뒤집는다고 저 인간이 뒤집어질 인간도 아니고. 자신은 그냥 하고 싶은 말 다 쏟아붓고 난 뒤 후련하게 꺼지는 것으로도 족했다. 비올레타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셋째, 아까 ‘로드리고의 황녀 전하께서 외부인의 방문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5황녀 전하’라고 말했던 그 기사. 아, 로드리고 후께선 그때 계시지 않아서 이렇게 말해도 누군지 모르시겠네요. 로드리고 후께서 나중에 함께 살펴봐 주시죠.”

“…….”

“감히 황녀의 뜻을 한낱 가문에 소속된 기사가 사칭한 것, 황족관리국에 그 증인으로서 직접 회부하도록 하겠어요. 물론 진짜 사칭한 이는 따로 있겠지만, 그 불쌍한 사람은 어쩔 수 없죠. 까라고 해서 깠을 뿐인 걸 다들 알아도, 결국 귀하신 진짜가 아닌 그가 죽어야 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죠? 그래도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죠. 그리고…….”

“넷째도 있나?”

남자가 차마 더 듣기 지겨운지 한숨처럼 물었다. 비올레타가 상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여섯째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남자는 결국 그저 자신과 마주치지만 않으면 족하겠다고, 지금도 충분히 네 덕분에 귀찮아졌으니 너도 이제 그만 만족하는 게 좋겠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비올레타도 더는 말하지 않고 그 결론에 기꺼이 찬성했다. 그야말로 비올레타가 원하는 바였다.

사실 정말로, 이제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 비올레타는 고기를 입에 넣음과 동시에 몬드리올 백작부인의 한마디에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전하?”

“아, 그러니까…….”

“예.”

“그러니까, 부인 말씀은…….”

더듬더듬 말을 잇지 못하는 비올레타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이내 걱정스러운 듯 비올레타를 불렀다.

“……전하?”

“지금, 그 인간이랑, 나랑…….”

“예, 벌써 수도에서 염문설이 돌고 있다고 하네요, 호호. 사람들도 참 빠르죠?”

“나랑, 그…….”

비올레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루이즈가 해맑게 케이크를 한 입 삼키고는 비올레타에게 상기시켜주듯 재차 말했다.

“5황녀가 로드리고의 젊은 후작과 열애 중인 것으로, 5황녀가 바쁜 일정 중에도 로드리고의 박람회에 참여한 까닭이 바로 그것이라고, 첫 만남은 블라디모로의 연회에서…….”

비올레타는 그 말을 들으며 멍하니 고기 조각을 입에 문 채로 순간 사람이 정말 억울하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 그대로였다. 비올레타는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았다. 블라디모로에서 십 분은 마주했나? 게다가 로드리고령에 온 지는 벌써 나흘이 지났는데도, 그놈의 후작과 제가 마주한 건 겨우 두 번이었다. 그 두 번은 심지어 남들이 기본으로 상상할 법한, 평온하고 온전한 두 번도 아니었다. 어제는 아예 대놓고 미친 척 달려들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런데 뭐가 어째? 염문? 비올레타는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혀 한탄하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말이 얼마나 부풀려져야 그렇게 되는 건지, 아니 지금처럼 애초에 부풀려질 말조차 없을 때엔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블라디모로에서의 첫 만남은 남이 보기에도 전혀 특별한 점이 없었다. 제가 말을 섞은, 백에 가까운 사람과 그는 결코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그 로드리고라는 것 빼고는. 차라리 클레이런스의, 오래전에 상처喪妻했다던 그 후작과 스캔들이 났다면 모양새가 더러울지언정―그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며느리가 있는 사람이다.― 최소한 이보다는 납득이 가능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제가 정말로 공들이려 했던 사람은 그 사람이었으니까. 비올레타의 억울함은 그 정도였다. 심지어 그 대상이 이카르트라고 한다면 비올레타는 아예 억울해 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루이즈, 넌 내가 여기서 어떻게 지내는 것 같아?”

“음…….”

루이즈는 말을 고르느라 고심했다. 비올레타는 지금 누가 봐도 그리 즐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딱히 못 지냈다 하기에도 민망하게 잘 먹고 잘 돌아다녔다.

비올레타는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부인 앞에서 말하기 다소 면구하나, 로드리고 후는 황실의 객을 맞이하여 사흘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객의 일정을 공식적으로 수행한 적이 없습니다.”

“로드리고의 사람으로서 그것으로 면구한 것은 저입니다, 전하.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나는 지금 부인 들으라고, 로드리고 후를 탓하려고 부러 하는 말이 아니에요. 로드리고 전체가 가장 분주한 시기에 찾아온 것만으로 민폐라 생각해 가주의 귀한 시간을 빼앗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로드리고 후의 수행을 거절했고요. 물론 부인이나 루이즈와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지내고 싶었던 내 사사로운 욕심도 물론 한몫했지요.”

“전하…….”

루이즈가 감동받은 목소리로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러라고 한 말이니 당연했다. 비올레타는 조금 우울해진 얼굴로 포크를 놓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황실의 객으로서 합당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다고, 혹시나 그런 로드리고 후가 그런 오해를 받을까 봐 걱정도 했었는데, 그런데 어찌…….”

그러니까 한마디로 제가 그 인간에게 손님 대접은커녕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그 인간과 저를 엮을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루이즈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걱정 말라는 듯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전하. 로드리고 후께서 스캔들이 날까 염려하여, 일부러 사촌누이인 몬드리올 백작부인을 함께 초청했다더라, 라고들 한답니다!”

“…….”

“공식 수행 한 번 하지 않는 건 오히려 더 이상하다며, 미리 염문이 날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 한 것이라고들 한다고 하네요.”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건데?

비올레타는 입안에 남은 고기를 힘없이 씹었다. 부드럽게 씹히던 고기가 이상하게도 딱딱하고 썼다. 가까스로 삼키자마자 고기는 목구멍에 턱 하니 걸렸다. 비올레타를 귀엽게 바라보고 있던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작게 웃고는 타이르듯 말했다.

“전하, 잘되신 겁니다.”

“대체 뭐가요? 어깨 한 번 안 스치고 염문의 주인공이 된 게요?”

“결코 전하께 나쁘지 않습니다.”

충분히 나쁘다. 비올레타는 눈으로 그렇게 열심히 말했다.

“칼에게는 나쁠 수 있으나, 아니, 아마도 많이 나쁘겠지만 전하께는 아닙니다.”

어제 제 뒤에 서겠다고 할 땐 언제고, 사촌이랍시고 아무리 봐도 저보단 사촌이 아까운가? 비올레타는 배신감에 글썽이는 눈빛으로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치졸하고 유치한 물음을 전했다. 백작부인이 그 시선을 바로 읽은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소위 이름값이라고들 하는 거지요.”

“…….”

“전하께선 아직 그란토니아의 가식적인 귀족 사회를 잘 모르시지요. 그들은 결벽한 척, 눈에 곧바로 보이는 질척질척한 스캔들은 지극히 혐오합니다. 하지만, 뜬구름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근사한 스캔들은 오히려 동경하는 편이지요. 그 주인공이 뜬구름처럼 높고, 아득할수록 말이죠.”

“뜬구름처럼…….”

“그리고 요즘 젊은 귀족들의 대부분이 자유연애를 공공연히 숭상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니 이 염문설은 고작해야 전하께서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증명이 될 뿐이에요.”

백작부인의 설탕 발린 정리 한마디에, 목구멍에 틀어 막혀 있던 고기가 설탕이 녹듯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비올레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칼은,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귀찮은 것을 몹시 싫어하여…….”

아주 잘 알다마다. 비올레타는 속으로 시큰둥하게 비꼬았다.

“칼은 어릴 때도 제가 커서 아들을 낳으면 아들이 여덟 살이 되자마자 작위 승계시키고 저는 평생 여자랑 놀고 유람하며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하던 아이였답니다.”

“그것참 어린 시절부터 어지간히도 사는 게 귀찮았나 보네요.”

“호호, 그런 거 보면 참 귀엽지요?”

귀엽긴 개뿔이 귀여웠다. 사촌 누나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녀와 후작은 나이 차도 제법 나서 그렇게 귀엽게 느낄 법도 했다. 귀엽게, 귀엽게……. 비올레타는 그 단어와 그 남자를 동시에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아들 낳기 전에는 금고 유지나 그럭저럭 하고 사는 게 제 삶의 목표라고 했지요. 현상 유지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게으르게 살고 싶다면서요.”

말만 들어도 무기력하기 그지없었다. 비올레타는 그 남자의 인상이 점점 이상하게 더해져 종잡을 수 없이 꼬여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랬던 아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평생을 수도에서 살아 놓고선, 작위를 승계하자마자 로드리고령에서 여태 채 열 번도 나오지 않았답니다. 선대 후작께서 돌아가신 지가 벌써 삼 년인데 말이에요.”

비올레타는 그제야 남자가 결벽증적으로 제 존재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던 것을 이해했다. 3년간이나 이어 온 노력이었다면, 그럴 만했다. 군소 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이 영지에 본성을 두고도 수도에 따로 저택을 지어 최소한 한 해의 절반 이상을 수도에서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수도에서 평생을 살아왔다면, 영지에 그렇게 스스로 갇혀 살아온 3년이 쉬웠을 리 없다.

비올레타는 제가 억울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던 이 염문설에서 갑자기 완벽한 가해자로 돌변한 느낌에 속이 다시 불편해졌다. 사실 제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도. 그녀가 로드리고령에 와 한 일이라곤 그와 마주치지 않고 열심히 돌아다닌 것뿐이었다.

라키엘이 언젠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1황자나 4황자에게 있어 로드리고는 완벽히 득도 실도 되지 않는 중간지대였다. 바로 그걸 제 존재가 흔든 것이다. 로드리고 가의 중립은 생각보다도 훨씬 무거운 이념이었을지도 모른다. 비올레타가 진중하게 물었다.

“로드리고의 중립을 위해서, 말인가요?”

“정확히는 그 아이의 게으르게 살고 싶은 꿈과 그쪽이 합치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

“딱히 가문의 기치旗幟를 위해 제 인생까지 희생해 노력할 만큼 의욕적인 아이는 아니라서요.”

귀엽다고 팔불출처럼 실없게 웃을 땐 언제고, 백작부인은 냉정하게 딱 잘라 비올레타의 말을 부정했다. 비올레타가 오히려 무안해져 말을 돌렸다.

“……어쨌든 그렇게 로드리고 후가 노력한 몇 년을 이번의 염문설 한 번이 흔들었고요.”

“사실 그거야 숙부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결혼하라 이르고 일러도 결혼 안 하고 버텼던 제 탓이지요.”

“…….”

“시키는 대로 진작 결혼했음 이 사달도 안 났습니다. 따지고 보면 다 제 업보죠. 누가 그러게 저더러 여태 결혼하지 말라고 했나요.”

몬드리올 백작부인은 생각보다 냉정한 사람이었다. 가족도 이러는 마당에 더 이상 제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비올레타는 점점 다시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음, 위로가 되네요.”

“맞아요, 맞아요. 그러니까 후작 각하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전하.”

칼, 그 남자의 안타까운 사정 따윈 깃털처럼 가볍게 취급하는 루이즈의 말에 비올레타는 방긋 웃었다.

응. 전혀 신경 안 써.

후작 각하 ‘같은 건’ 신경 쓰지 말라, 는 루이즈의 깔끔한 정리에 힘입어 비올레타는 꽤 편안한 마음으로 점심을 마저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쭉 그러리라 생각했다. 르네비어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어머니 선까지는 네 맘껏 싸돌아다니게―남자는 정말 비올레타의 거동을 두고 싸돌아다닌다고 표현했다.― 두지. 남자가 어제 비올레타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혹시나 했던 르네비어는 아무것도 달라진 기색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비올레타의 마음이 아까의 충격으로 슬그머니 다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일 것이다. 제 앞의 르네비어가 그 남자의 어머니라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그럴 수가, 하고 생각이 도돌이표처럼 되돌아간다. 물론 그 혼란스럽고도 소모적인 감정 속에 남자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없었다.

비올레타는 마음속으로 잠시 진짜 비올레타에게 사과했다. 그런 놈팡이랑 엮이게 해서 정말 열과 성의를 다해 미안하다.

르네비어는 그 터무니없는 염문설을 아직 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비올레타는 제가 괜히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굴었다. 멍청하게도 그녀의 앞에서 빨리 일어나지 못해 안달이 나는 지경이 된 비올레타는 결국 목표했던 30분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일어났다.

드디어 내일이 박람회의 시작이었다. 일주일만. 일주일만 더 버티면 된다.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영지도 끝이고, 그 만사 귀찮아하는 놈팡이에게 귀찮은 짐 덩어리 취급당하는 것도 끝이고, 수도로 돌아가면……. 비올레타는 제가 단 몇 초나마 라키엘을 개선된 미래와 함께 떠올렸다는 것에 작게 몸서리쳤다.

그렇게 떠도는 풍문에서 추려 낼 수 있는 사실이란 채 1할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사태는 터무니없었다. 그놈의 염문설은 나머지 9할이 그 1할의 사실에 대한 과잉 해석으로 이루어진, 말 그대로 뜬구름 같은 낭설이었다. 사실 라키엘은 이번의 스캔들이 그럴싸했다 쳐도, 시시콜콜한 오해나 할 위인도 못 되긴 했다. 그러니 애초에 제가 처신을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 염문설 속에도 그런 내용은 없으니 딱히 곤란할 것도 없는데도,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왜 이리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건지.

지난 이틀간 밀려 버린 책들을 떠올리며 비올레타는 잡다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지웠다. 빨리 방으로 가야겠다.

“저기, 전하.”

“응?”

“아무래도 산책을 조금 하시다 가는 것이 어떠실까 하여, 그러니까 그게…….”

“음, 리타, 그렇게 말하기엔 이미…….”

“…….”

“우리, 방문 앞이지 않니?”

비올레타가 의아한 듯 묻자 리타가 마치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고 그게 제 눈치를 본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기사들도 멀찍이 서 있는 판에 단둘이 서서 리타가 저도 아닌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게 수상했다.

리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천천히 방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리타가 말리기도 전에 비올레타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올 게 왔다. 비올레타는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이지 후작께선 사람 놀라게 하시는 데 일가견이 있으시네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비올레타는 고갯짓으로 리타를 물린 뒤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저 서로 마주치지만 않으면 족하겠다고 한 게 뉘셨던지.”

“나지.”

“…….”

“그리고 그렇게 말한 지 채 하루도 안 됐고. 됐지?”

남자는 비올레타가 허무할 정도로 담백하게 인정하고는 비올레타의 속을 뒤집듯 되물었다. 비올레타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잘 아시네요.”

“너도 잘 알겠지. 얼마나 대단한 소설이 탄생했는지 말이야.”

“그래서 그거 따지겠다고 이리 쪼르르 달려오신 거네요?”

쪼르르, 라는 단어에서 남자의 매끈한 입매가 미세하게 비틀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비올레타가 피식 웃자,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제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테이블 위로 던지듯 아무렇게나 놓았다. 비올레타의 눈이 불쾌하게 가늘어졌다.

“로드리고 후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도 꽤 억울한 입장이라 말이에요.”

“억울해?”

“그리고 선대 후작 계실 때 시키는 결혼 제때 하셨으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지 않겠어요?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건 이쪽 문제라기보다는 여태 성혼하지 않으신 그쪽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제 업보라고 못 박긴 했으나 로드리고 후작의 나이는 고작 스물넷이었다. 이대로 몇 년이 더 지나 버린다면 모를까 요즘 세상에 아직 그의 결혼이 늦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선대 후작이 원했던 시기에서 한참이 지났을 뿐이다. 비올레타도 그것을 알아 조금 기막힌 듯 바라보는 남자의 눈을 슬며시 외면하며 말을 돌렸다.

“어쨌든, 박람회가 끝나는 즉시 저는 얌전히…….”

“그만. 너랑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나 하러 온 것 아니다. 네가 로드리고령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남의 얘기나 떠들기 좋아하는 한가한 치들이 멍청하게 짝짓기나 해 댈 것을 모르진 않았겠지.”

진짜 몰랐는데.

남자는 비올레타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로, 대수롭지 않게 그 일을 거론했다. 마치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당연한 결과라는 듯이. 비올레타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으로 깊어졌다.

“굉장히 별일 아닌 듯 말씀하시는데, 혹시 지금 이보다 큰일이 있나요?”

“읽어 봐.”

남자가 눈짓으로 가리킨 것은 비올레타가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던 테이블 위였다. 아까 남자가 놓아뒀던 봉투. 비올레타가 테이블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건.”

황실의 봉투였다. 아무렇게나 뜯어진 인장의 흔적을 비올레타의 손끝이 스쳤다. 그리고 이내 비올레타의 손이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비올레타가 단 몇 줄 만에 편지에서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삐딱하게 웃으며 물었다.

“소감은?”

“어. 음…….”

비올레타가 말을 고르듯 망설이다 남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축하드려요?”

비올레타의 조심스러운 한마디에 도자기처럼 잘 빚어진 남자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저런 꼴을 한 번은 보고 싶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비올레타가 움찔하며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남자가 싸늘하게 물었다.

“……축하해?”

“아니 그게, 그럴 만한, 일이니까……?”

몇 초 후 비올레타의 목을 잡아 졸라도 비올레타가 갑작스럽다 놀라지 않을 만큼 남자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그럴 만했다.

비올레타의 손에 들린 것은, 1황비가 로드리고 후작에게 보내는 3황녀 일로벨라와의 혼담이었으니까. 남자가 한 발짝 걸어왔다. 비올레타가 두 발짝 물러났다. 남자가 피식 웃는 것이 살벌했다.

“너같이 영악한 계집이 상황 파악이 안 될 리는 없고.”

“영악하다니 과찬이시군요.”

“네 덕분에 진짜 파리가 꼬여 버렸는데. 이를 어쩌지?”

남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싸늘했다. 3황녀에게 혼담을 받은 이상, 3황녀가 로드리고 후작을 비참한 모양새로 내동댕이치고 다른 남자를 고르기 전까지 로드리고 후작은 스스로 혼담을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고작해야 대답이나 미루는 게 황녀의 혼담을 받은 남자가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물론 남자의 대답이 돌아오는 게 길어지면 여자 측의 자존심상 혼담을 거두게 되었으므로 남자에게도 그런 식으로나마 소극적으로 거부할 권리는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보통 황녀의 혼인 관례는 특정 가문의 발을 묶거나, 특정 가문들의 화합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누가 봐도 비올레타의 손에 들린 1황비로부터의 친사親事, 혼담는 바로 그런 경우였다.

비올레타와 로드리고가家, 그리고 르네비어 황녀의 접점을 아예 틀어막기 위해.

로드리고 후작은 아마도 일로벨라와의 결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황자의 정반대 편에 서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서 발을 빼야 했다. 비올레타는 애써 선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로드리고 후, 진정하시고 차근차근 생각해 보시면 그게 오로지 저 때문만은 아닐…….”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라 남자가 비올레타의 앞까지 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비올레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생각해도 지금 네가 내게 끼친 민폐가 만만치 않지. 그렇지?”

남자가 3년간 공들여 온 게으른 이상향을 제가 본의 아니게 정반대로 틀어 버린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비올레타는 고개를 도리도리 치려다, 위아래로 얕게 끄덕였다. 남자가 서늘하게 잇새로 내뱉듯 말했다.

“그럼 너도 대가를 치러야지.”

“전하, 전하!”

비올레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쫓기듯 꿈에서 깨어났다. 로드리고령에 온 뒤 비올레타의 꿈자리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그게 유독 심했다. 망할, 비올레타는 불쾌하게 중얼거렸다. 리타가 비올레타 곁의 이불을 정리하던 손길을 흠칫 멈추었다. 비올레타가 안심하라는 듯 친절하게 웃었다.

“네가 날 깨운 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오늘 늦잠을 잤니?”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리타가 문 쪽을 힐끔 보고는 비올레타에게 말했다.

“몬드리올 백작부인께서 아까 급히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아까? 아까 들은 소식에 이제 와 저를 이렇게 깨운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비올레타는 부드럽게 물었다.

“뭐라고?”

“새벽부터 급작스러운 고열로 몸을 가누시기 조금 힘들 정도로 편찮다 하시는지라, 오늘의 박람회 수행은…….”

“그건 문제가 아니지. 많이 아프시니?”

“심각하신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가벼운 몸살이 나신 것 같다 하십니다.”

“아, 다행이구나. 그럼 오늘은 루이즈와…….”

“저, 그것보다도.”

엉킨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리던 비올레타가, 리타가 제 말을 막듯 급하게 말을 잇는 것을 거슬리는 기색 없이 그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십 분 전부터 후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대수롭지 않게 리타의 말에 응수하고 넘어간 비올레타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뭐?”

“후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왜?”

“몬드리올 백작부인께서 편찮으시니, 마땅히 수행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마땅한 일이 다 얼어 죽었다니? 제가 왜?”

“그런데 삼십 분이 지나도록 전하께서 일어나시지 않으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 직접 깨우겠다고 하셔서, 전하의 본래 기침 시간을 말씀드려도 계속……. 그래서 전하의 기침 시간은 아직 되지 않았지만 불가피하게도 제가 감히…….”

리타가 겁에 질린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원래 다정한 분이라 들었는데, 어찌 그리 무섭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다고 리타가 중얼거리는 것을 비올레타는 듣지도 않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럼 너도 대가를 치러야지.

남자의 서늘한 말이 비올레타의 귓가를 불길하게 맴돌았다. 비올레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대강 머리를 마저 빗어 내리고, 네글리제 차림 위로 붉은 가운을 대충 걸치며 문가로 걸어갔다.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지. 비올레타의 걸음이 설마 문 쪽을 향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듯, 리타가 기겁하며 차마 비올레타를 붙잡지는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황녀 전하, 이렇게 나가시면 곧바로 응접실에 후작 각하께서 계시온데 어찌 그런 내실內室 차림으로……. 아니 되십니다!”

“이렇게 속살 하나 안 비치는 차림이 뭐가 문제겠니. 후작께서 재촉하시니 어쩔 수 없지.”

리타가 더 따라오지 못하게 손짓으로 막고서 비올레타는 빠르게 걸어가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이 열리자 남자가 응접실 소파에 앉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오후의 정해진 약속을 기다리는 것처럼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남자는 비올레타와 시선이 마주치자 조금 삐뚜름하게 웃고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비올레타의 발끝까지 한번 쓱 훑어내렸다. 그리고 이내 일말의 동요도 없는 시선이 거두어졌다. 남자는 제 손에 들린 책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한 시간 드리죠.”

“…….”

비올레타는 기가 막혀 잠시 입을 다물고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비올레타의 시선을 느낀 듯 책장을 넘기며 입을 달싹였다.

“거기 가만히 서서 뭐 하십니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매력적인 저음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있는 눈을―그래 봤자 리타 하나였지만― 고려한 듯 사뭇 달라진 목소리였다. 비올레타는 제 앞의 남자가 제가 아는 그 남자가 아니고, 내용이 저따위만 아니라면 그대로 홀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잘난 껍데기 하며 저런 근사한 차림새, 그럴듯한 목소리 정도로는 도무지 회복이 안 되는 사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 비올레타는 말없이 그대로 문을 닫고 뒤돌아섰다.

“리타?”

“네.”

“한 시간이야.”

“네?”

“한 시간 안에 준비해야 해.”

“네에?”

리타의 경악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비올레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콘솔 앞에 앉았다. 어찌 평소도 아니고 박람회 첫날에 그럴 수가 있느냐며 울상을 짓던 것이 무색하게 리타는 금세 메이드들을 불러와 드레스를 대령하고, 머리를 만져 댔다. 애초에 박람회에서 입을 드레스는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비올레타는 으레 중요한 날이면 늘 겪어야 했던 선택이란 고역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드들의 울 것 같은 표정을 보면 시간은 비올레타가 미안할 정도로 모자란 듯했다.

메이드들의 다급한 손길이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고, 드레스를 거의 다 입히고 나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급하게 해 놓은 것이 괜히 걱정되는지, 비올레타의 눈에는 더 이상 고칠 것이 없음에도 메이드들의 손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간은 얼추 다 되어 가는데 도무지 끝이 없을 것 같은 손길들에 결국 비올레타가 한숨처럼 물었다.

“몇 시니?”

“오 분. 아니, 사 분 남았습니다!”

“이를 어째! 전하, 오른쪽 치맛자락이 조금 구겨져 있는데…….”

“전하, 잠시만 고개를 숙여 주시면 아니 되시나요? 머리카락 하나가…….”

“됐어. 보자.”

비올레타는 부산스러운 메이드들의 손길 사이로 전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점검했다. 복잡한 금사가 수놓인 백색의 브란젤풍 드레스는 브란젤풍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우아함이 가미된 드레스였다. 쇄골 언저리를 가로지르듯 시원하게 트인 어깨선 아래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짧은 소매, 그리고 단 한 겹의 얇은 페티코트로 조금 부풀린 치마 라인이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단순한 디자인인데다 흰색의 단조로운 색상으로 자칫 밋밋해 보일 수도 있었을 드레스는 드레스 전체를 수놓은 금사로, 차분하면서도 조금은 화려한 인상이 느껴지게 만들었다.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시모어 부인이 가장 먼저 비올레타의 궁에 자신만만하게 가져다 놓은 드레스였던 만큼, 비올레타가 제 드레스 자락을 죄 밟고 다니거나 수풀에 구르지 않는 이상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비올레타는 이내 거울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메이드들이 마지막까지 애쓰는 것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이렇게 제게 공들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치마 밑을 조금 찢어 놓는다든지 제가 나중에 망신당할 거리를 만들어 놓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면 저 밖의 후작이 아주 좋아할 테니까. 제가 가고 나면 포상이라도 내릴지 누가 알겠나.

비올레타는 속으로 남자를 겨냥해 한마디 비꼬고, 얕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메이드들은 설마 후작께서 정말로 한 시간 안에 될 거라고 믿으셨을까, 하고 저희들끼리 종알거리며 제법 여유로워진 기색이었으나 비올레타는 천천히 문을 향해 뒤돌았다.

그리고 걸음을 내딛는 찰나, 문이 열렸다.

“보아하니 다 됐나 보군요.”

남자의 시간은 정확했다. 단 한마디 물음도 없이 열린 문에 메이드들은 경악한 얼굴로 비올레타와 남자를 번갈아 보다 퍼뜩 정신이 든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열린 문은 황녀의 침실 문이었고, 심지어 황녀는 단장 중이었다. 남자의 행동이 만약 수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대단한 무례였으나, 정작 남자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비올레타는 남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시선으로 남자를 흘낏 바라보고는 눈을 우아하게 내리깔았다.

비올레타는 남은 5일을 최대한 남자에게 얌전히 굴다 사라질 작정이었다. 아무리 제게 으르렁대던 남자라도 뒤틀려 버린 그 인생 계획은 조금 불쌍했고, 일이 여기서 더 이상 꼬여 버리는 것은 이제 비올레타 쪽에서 먼저 사양하고 싶었다. 어떻게 일이 꼬여도 이렇게까지 꼬일 수가 있나. 애초에 로드리고와 깊게 엮여야 할 이유도 없었고, 비올레타는 오직 몬드리올 백작부인이 원하는 대로 그녀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박람회에 외국인들이 많은 만큼 제 정보를 자연스럽게 주변국에 흘릴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그것은 지금의 비올레타에게 있어 아직 절실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비올레타는 최소한의 따질 문제는 따져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얌전히 군다는 것은 후작이 원하는 대외적인 행보에 한해서였고, 그렇게라도 문제를 최대한 축소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딱히 남자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기분 맞춰 준다고 제가 작정한 화풀이를 조금이라도 줄일 위인도 못 되었고. 비올레타는 남자의 에스코트 속에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섰다. 그녀가 남자에게나 겨우 들릴 법한 목소리로 뾰족하게 물었다.

“문을 열면서 혹시나 제가 벌거벗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정말 조금도 안 하셨던 거지요?”

“한 시간이나 드렸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는 거, 아시면서요.”

남자가 내리깐 눈으로 흘낏 비올레타를 바라보고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충분했던 걸로 보이십니다.”

“드레스가 미리 정해져 있었고, 구두도 정해져있었고, 귀걸이도 정해져 있었고, 목걸이도 정해져 있었고, 머리는 고작 이렇게밖에 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메이드 셋이면 충분할 것을 일곱이나 붙어서 고생했으니까요. 시간이 충분했던 게 아니라, 당신의 메이드들이 그만큼 고생했던 거예요. 그러니 충분했다고는 할 수 없죠.”

비올레타는 남자의 옆모습에 질린 표정이 비칠 때까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제 말의 길이가 일정 이상을 넘어가면 남자가 제법 괴로워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는 이내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비올레타에게 대꾸했다.

“그럼 앞으로도 일곱을 쓰지 그래. 셋을 쓰고 여태 시간을 허비해 온 거라면 애초에 전혀 충분한 게 아니지. 하녀장에게는 말해 놓겠다.”

아, 그래, 여긴 방 안이 아니었지. 비올레타가 떫게 웃으며 거절했다.

“……아뇨. 됐어요. 말을 말죠.”

비올레타는 남자가 마차에 먼저 올라탄 뒤, 저를 마차로 끌어 올리는 부드러운 손길을 받으며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남자만 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자마자 그런 것이었다. 남자가 피식 웃으며 비올레타의 뒤로 손을 뻗어 문을 탁 닫았다. 완벽히 둘만 남자, 분위기는 한층 더 삭막해졌다. 비올레타가 남자의 맞은편에 앉아 마차의 내부 따위를 둘러보며 침묵을 깼다.

“어제의 그, 당신에게 발생한 곤란한 그 문제는, 생각해 봤는데 말이에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단호하게 떨어진 말에 비올레타가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 잘난 머리 굴려 네 밥그릇 챙기느라 내 평온했던 밥그릇이 이렇게 된 거니까.”

“배운 사람이 밥그릇이 뭐예요?”

“그야 네 앞에서 교양이나 떨려고 그렇게 배운 게 아니거든.”

아까부터 계속 속이 왜 불편한가 했더니, 원인이 바로 앞에 있었다. 비올레타가 짜증스레 입술을 잘근 씹고는 고개를 돌리며 빈정대듯 말했다.

“아, 물론 그러시겠지요.”

“그러니 조용히 그 입 닫고―.”

“―생식력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하는 건 어때요?”

“……뭐?”

남자의 되묻는 목소리가 마치 못 들을 소리를 들은 듯, 겨우 짜낸 것처럼 희미했다.

“생각해 봤는데, 744년 밀니로-캐롤링 왕국간의 국혼 무효 사건에서 캐롤링의 비제레트 공이 자신의 성 불능을 주장하여 밀니로의 엘리뷔에 공주와 결혼을 무효화시킨 적 있었잖아요?”

“너 지금.”

“물론 당연히 그렇게까지 하자는 건 아니고 아주 조금이요. 1황비께서 마음을 돌리실 정도로만, 은밀하게. 아, 오해는 말고 들으세…….”

“그러니까 나더러…….”

“아니, 오해는 말고.”

“내가 고자라고, 내 입으로, 세상에 말하란 거지, 지금?”

아니,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남자가 다문 잇새로 씹어 뱉듯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남자의 청회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비올레타는 본능적으로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불행히도 자신은 이미 달리는 마차 위에 있었다.

비올레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이 어찌 그렇게 되나요?”

“그리된다.”

“엄밀히 말해서 캐롤링의 비제레트 공은 실제로 성 불능이 아니었어요. 아시잖아요.”

“그래. 하지만 744년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가 고잔 줄 알았지.”

또다시 서슴없이 튀어나오는 직접적인 단어에 비올레타가 남자를 바라보던 눈만 몇 번 깜빡거렸다. 일말의 호의도 없는―정확히 말해 저쪽은 호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악의에 가까웠지만― 그런 사이의, 그것도 이제껏 고작 다섯 번째로 마주한 미혼 남녀 간에 쓰일 수 있는 단어는 결코 아니었다. 이 점은 그들의 고귀한 신분을 생각하더라도 그러했다.

“그 단어 좀 어떻게. 자꾸만 대화가 부적절해지네요.”

“성 불능, 하고 또박또박 뱉어 낸 게 누구였지.”

비올레타는 남자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조금 민망한 양 수줍게 말을 돌렸다. 조금 늦은 감은 있었지만 별수 없었다.

“그리고 로드리고 후께서는 제가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순수하고 연약한 신분임을 감안하시어 제게 적절한 어휘 구사 및 존중…….”

“그런 말을 제 입으로 먼저 알아주십사 말하는 계집도 있구나. 처음 알았다.”

남자가 순수하게 감탄하는 어조로 가차 없이 비올레타의 말허리를 잘랐다. 같잖다는 듯 조금 내리깐 청회색 눈동자가 비올레타를 무성의하게 한 차례 훑어 내렸다. 비올레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보통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감안해야 마땅하지만, 어쩌겠어요. 대화는 상대방의 수준에 맞춰야 이루어지죠.”

“아, 그러셨군. 황녀 전하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기꺼이. 후작께도 융숭한 대접에 제가 감격해 있노라 전해 주세요.”

짐짓 우아한 어조로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치한 언사가 그들의 사이로 몇 번 오고 갔다.

그렇게 몇 번의 무의미하고 유치한 ‘전해 달라’가 다 지나갔을 즈음, 그들이 탄 마차가 로드리고의 박람회장에 멈춰 섰다. 비올레타는 천천히 열리는 마차 문 사이로 드러나는 박람회장의 거대한 위용에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남자가 내려 저를 돌아보기 전에 재빠르게 놀란 기색을 지웠다. 남자가 곧바로 뒤돌며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비올레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고작 몇 분 전까지 비올레타와 유치한 언쟁을 하던 남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지만 그리 생경한 느낌은 아니었다. 제가 더했으면 더할 테니까.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고 땅으로 내려서자, 마차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박람회장 중앙에 솟은 거대한 돔이 시야에 들어왔다. 크리스탈로 이루어진 돔의 천장부가 내리비치는 햇빛을 받고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 아래로 회백색의 거대한 석조물이 길게 늘어서 있다. 현 로드리고 후작의 조부가 스무 해에 걸쳐 완공했다는 로드리고의 박람회장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화려함의 극치로 유명했다.

로드리고의 마르지 않는 부를 과시하듯, 박람회장의 내부는 군소 귀족의 성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거대했다. 비올레타는 천장에서 부서져 내리는 빛무리 사이로, 아득히 보이는 끝을 가늘어진 눈으로 응시했다. 한눈에 바로 띈, 그림으로만 봤던 코끼리라는 커다랗고 진기한 동물이 갇힌 화려한 우리를 지나, 각종 총기가 길게 정렬되어 있고, 그 건너편으로 여자들이 잔뜩 에워싼 동국의 비단 무더기에, 방직기들, 펠로베르 제국풍의 화려한 침대…….

비올레타는 그 이상 가늠하길 포기했다. 너무나 많았다. 대강 눈으로 짐작할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물건들과, 그 물건들 사이로 보이는 의미심장한 시선들에 비올레타가 조금 질린 눈으로 곁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헛소문이 있었더랬다. 그것도 고작 며칠 전에 말이다.

“그리 대단한 것들도 아니니 지레 질릴 필요 없어. 잠시만 있다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갈 테니까.”

남자가 비올레타의 시선을 느꼈는지 미소 띤 얼굴 그대로 비올레타에게 낮게 속삭였다. 전에도 느꼈었지만 비올레타 외의 사람이 있는 곳에서의 남자는 꽤 잘 웃고, 매끈하고 낮은 어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것이 훨씬 자연스러웠고, 지극히 당연해 보여서 기묘할 정도였다.

비올레타는 남자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라키엘의 솜씨 좋은 가장과는 확실히 다른 부류라고 비올레타는 새삼 확신했다. 문제는 그래서 더 불쾌하다는 거였지만.

어쨌든 남자의 말은 지금 상황에서 비올레타가 이 불편한 장소에서 제법 매력적으로 느낄 법한 일정이었지만, 비올레타는 남자의 말에 따라서는 안 됐다. 밀로일라에게도 미리 언질을 받았던 것이 있었다. 그녀는 ‘박람회의 첫날이 가장 중요하니 최소한 그날의 반나절은 반드시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었다. 타국까지 영향이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끝나고도 수도에서 사흘은 족히 떠드는 게 로드리고의 박람회였으니 그것은 당연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비올레타를 봐야 했다.

지금처럼 예상과는 조금 다른 시선 속에 갇힌 상황이라도, 그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올레타는 제가 어떻게 해도, 제 곁에 있는 사람이 이 남자가 아닌 몬드리올 백작부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뜬소문에 이리저리 잘 끼워 맞춰지고 말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와 사람들 앞에서 조금 더 긴 시간을 함께 노출되든, 지금 곧바로 돌아가든 그 역시 차이는 없으리란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갖다 붙이면 붙일수록 더 그럴듯해지는 게 소문이라는 걸 비올레타는 요 며칠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에도 밀로일라의 답안이 가장 옳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가 없다. 비올레타는 문득 그 찝찝한 기분의 끝에 익숙한 얼굴이 계속 맴돌고 있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라키엘.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혀끝으로 소리없이 이름을 되뇌고, 실수로 소리 내 발음하기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황급히 삼켰다. 그리고 남자가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바람에 멍하니 곁에 서 있던 저도 함께 지나칠 뻔했던, 펠로베르 풍의 아름다운 침대를 뒤돌아보았다. 남자가 침대를 보고 멈춰선 비올레타를 잠시 바라보다 짤막하게 설명했다.

“잉거스트 공주의 침대야.”

“네?”

“얼마 전에 전사한, 잉거스트 대공의 딸.”

설마, 하고 바라본 시선에 남자는 차분하게 덧붙였다. 비올레타는 아무 생각 없이 제가 바라본 침대가 불과 수십 일 전에 멸망한 나라의 마지막 공주가 쓰던 침대라는 것에 기함했다. 그 여자가 어떻게 됐더라. 비올레타는 봄의 끄트머리 즈음, 공주가 결국 자살했다고 알려 주던 디아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밀니로에 패전한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최후 심문에서 아비의 명예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성벽에서 뛰어내렸다던가.

공주가 그렇게 죽은 것은 고작 수십 일 전에 잉거스트가 멸망한 것보다도 최근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여름의 초입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호사가들이 떠들어 대던 비극 소설의 한 장면이기도 했다.

그녀의 침대가 국경을 몇 개나 넘어와, 이렇게 여기에서 구경거리가 되어 있다. 바다를 건너온 신기한 동물들과, 먼 나라의 오래된 왕관과, 진귀한 보석들과, 총기들과, 온갖 기계들의 틈바구니에서. 비올레타는 문득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을 그녀의 물건들을, 그리고 그 흩어진 물건들처럼 수많은 이의 혀끝에서 산산이 부서졌을 그녀의 생을 생각했다. 입안이 조금 썼다. 비올레타가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면서요?”

“이 침대가 대단한가?”

남자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오필리어 빌도프 에버렛 잉거스티.”

“…….”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긴 이름을 외울 정도의 여자예요.”

“고작 펠로베르인들의 요란한 나무 조각이야. 그란토니아보다 화려하고, 밀니로보다 아름답고, 그뿐이지.”

“…….”

“의미 부여는 적당히 할수록 좋고, 적게 하면 더 좋은 법이거든.”

고작 나무 조각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남자의 말과는 달리, 남자의 목소리는 냉기 한 점 없이 여전히 낮고 안정적이었으며, 부드러웠다. 마치 아무 가치도 없고, 전혀 쓸모도 없는 것을 대하듯, 그러했다.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비올레타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스쳐 지나간 죽은 공주의 침대와 한참을 멀어지고도 그것을 떠올렸다. 그 쓸쓸한 화려함과 허무한 우아함을 떠올렸다.

속이 꽉 죄듯 서늘해졌다. 그렇게 공포가 엄습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주어지는 예고도 없고, 자신은 예상할 수도 없다. 전시당한 진짜 공주의 침대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그녀의 생은 모두 허물어졌고, 주인 없이 남겨진 신분을 뒤집어쓴 가짜인 저는 이미 죽은 채로, 평생 진짜인 것 한 점 쥐지 못한 채, 그러다 결국 저렇게, 제 뒤로 남을 것은 아무것도 제 것이 아닌 채로, 사실 저는 이미 저렇게 되어…….

아니, 아니다.

비올레타가 마른 입안으로 얕게 숨을 한번 몰아쉬었다. 목구멍을 넘어가지 못한 숨이 입안에서 맴돌다 사그라졌다. 비올레타는 다시 숨을 세게 삼키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녀의 등이 잠깐 움츠러들었다가 이내 당당하게 펴졌다.

제 모든 의미는 이미 하나에 부여된 채 시작되었다. 절대로 적당할 수 없었다. 비올레타는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로드리고 후는 작정이라도 한 듯 비올레타를 데리고 로드리고령 곳곳을 쏘다녔다. 스캔들 이후 그런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굳이 비올레타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더군다나 일로벨라 황녀에게서 혼담이 들어오고 고작 며칠이 지나는 동안이었으니 말 다했지. 매년 열리는 박람회에서 로드리고 후가 첫날 이후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것은 최초고, 그게 바로 비올레타 때문이라며 불어난 소문은 덤이었다.

사실 그 해석과 현실의 방향이 천지 차이라는 것만 빼면, 그게 비올레타 때문이라는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로드리고 후가 5황녀에게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라는 둥―정신이 나간다 치면 이쪽이 먼저겠지.― 5황녀가 수도로 돌아오면 성격 까칠한 3황녀한테 5황녀가 일주일 안으로 한 대는 꼭 맞을 거라는 둥―이건 완전히 아니라고는 장담 못하겠다.― 루이즈가 비올레타에게 전해 오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가관이었다.

그리하여 어느새 세 남녀는 훌륭한 치정극의 주연이었다. 가장 유력하게 사실처럼 떠도는 것은, 아니, 수도에서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고 전해지는 것은 블라디모로에서부터 3황녀와 5황녀가 로드리고 후를 두고 쭉 신경전을 벌여 왔다는 것이었다. 비올레타가 블라디모로에서 로드리고 후를 마주했던 시간은 고작 5분도 되지 않고, 일로벨라는 로드리고 후와 마주하긴커녕, 가까운 거리에 존재조차 한 적 없었다.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도 사냥터로 떠나는 마차에 멍하니 몸을 싣게 된 비올레타에게 그나마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것은, 이제 로드리고령에서 남은 시간이 이틀뿐이라는 것이다.

어제 루밀스의 포도밭에 끌려갔다가 저장 창고에서 이 술통 저 술통 열어 한 잔씩 마셨던 술이 아직도 깨지 않았는지 속이 울렁거렸다. 그 전날엔 북北로드리고의 공장 지대를, 그 전전날엔 베르텐 지하 광산을 갔다 왔더랬다. 마차로 우아하게 다닐 수 있는 곳들이 못 되니, 당연히 지긋지긋할 정도로 걸었다. 예쁘장하고, 예쁘장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편한 구두를 신고서 말이다.

로드리고의 그 좋은 유람지와 박람회를 다 두고, 비올레타는 박람회 내내 어둡고, 춥고, 공기는 매캐하거나 탁한 곳들만 골라 다녔다. 최악의 일정이었다. 정말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왕 하는 거, 제 몸까지 골병들게 하기로.

그럼에도 비올레타는 얌전히 로드리고 후의 말에 따라 주고 있는 중이었다. 제가 봐도 이제 반쯤은 오기로 버티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남자가 제 방에 데려다 줄 때마다 어서 항복하라는 듯 은근하게 내려 보던 것을 비올레타는 알고 있었다.

힘들다. 따르기 싫다. 남자는 아침 식사를 하며 그날의 일정을 쭉 읊고는 마치 제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저를 빤히 바라보곤 했다.

당연히 비올레타는 그 일정이 더없이 마음에 든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지금 제 다리는 이렇게 아픈 것이고, 이 마차는 지금 사냥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비올레타는 가늘어진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다, 제 앞에서 팔자 좋게 독서나 즐기고 있는 남자를 한 번 바라보고, 남자의 손에 들린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모든 나태한 죄악에 관하여』

그에게 퍽 어울리는 제목이긴 하지만, 저 책이 순수 문학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와는 조금 안 어울렸다. 비올레타는 저번에 남자가 읽고 있던 책도 꽤 유명한 문학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라키엘이라면 절대 읽지 않을.

라키엘의 손에 책이 들린 걸 상상해 보면 『전략의 기술』이라든가, 『돈의 역사』, 『동서 무역론』……. 그래, 그런 게 어울린다. 그리고 실제로 보통 9할은 그런 실용서였다. 언젠가 제가 보고 있던 소설책 한 권에 라키엘이 잔소리하던 것이 떠올랐다. 기본적으로 지식이 없는 책은 세상에 필요 없고, 남이 제 생각 하나에 도취해 써 내려간 활자에 시간을 쓰는 것만큼 비생산적인 일은 없다고. 참 그다운 말이었다.

비올레타는 갑자기 제 생각이 이상한 곳에 다다른 것을 깨닫고 스스로에게 정신 차리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왜 사사건건 심심하면 라키엘이 속에서 튀어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작 열흘 그 잔소리 좀 안 듣고 살았다고 벌써 정신이 해이해졌나? 시간 좀 지났다고 그때가 살 만했던 것 같아?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문득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어느새 책에서 시선을 들어 의아한 듯 비올레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올레타가 몇 번 눈을 깜빡이다, 조금 어색하게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마치 입 밖에도 낸 적 없는 제 속을 남자에게 그대로 들킨 기분이 들어 무안했다. 비올레타가 이상하게 구는 것을 딱히 눈여겨본 적 없던 남자는 비올레타가 시선을 어색하게 돌리자 그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다 와 간다고 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산속으로 들어섰다. 듬성듬성 나무가 솟아 있는 숲 사이로 들어섰을 즈음 아버지를 따라갔던 자작령의 작은 사냥터가 문득 떠올랐다가, 이내 남자의 말에 사라졌다.

“……하니까, 그렇게 알고.”

“네?”

“곰이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네?”

“곰.”

“…….”

“곰 몰라?”

남자가 재차 친절하게 일러 주는 말에 비올레타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할 말을 잃은 듯 비올레타의 입술이 몇 번 달싹이다 조금 벌어진 채 멈추었다. 남자가 얄궂은 얼굴로 웃었다.

“무슨 사냥터에, 곰이.”

“무슨 문제 있나?”

“사냥, 그러니까 지금 사냥을 가고 있었잖아요. 근데 왜 곰이.”

“어항에 예쁜 물고기나 채워 놓듯 쉬운 거 골라 놓고 잡는 건 사냥이 아니지. 너무 인위적이야.”

“제가 알던 사냥이랑, 후작께서 아시는 사냥이랑 좀 다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지금…….”

“네가 말하는 사냥이 토끼나 잡아 놓고 용맹 떠는 우아한 머저리들을 말하는 거라면, 틀렸어.”

“……그래서 곰을 잡는다고요?”

“아니. 그냥 있다는 거지. 알아 두라고.”

“…….”

“보이면, 뭐.”

“…….”

“잡을 수도 있는 거고.”

“곰……. 우리 곰 무섭다는 얘기는 다섯 살만 되면 다들 배우잖아요? 그렇잖아요? 설마 아직 못 배운 건 아니죠? 르네비어 님께서 가르쳐 주셨죠?”

비올레타의 황당한 목소리에 남자가 피식 웃고는 제 뒤에 있던 장총을 꺼내 들며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로드리고가 남자들은 대대로 사냥을 잘하거든.”

“…….”

“죽게 놔두진 않을 테니 걱정 마.”

그럼 뭐 해, 내리는 곳에 곰이 있는데.

비올레타는 처연한 얼굴로 제 오른쪽 허벅지 부근을 짚었다. 오늘 커튼식 드레스를 입고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시모어 부인이 비올레타를 위해 특별히 설계한 드레스는 허벅지 부근의 숨겨진 끈을 잡아당기면, 총이 매달린 위치까지 갈라진 커튼처럼 드레스가 작은 틈을 드러내며 올라가는 구조였다.

드레스 아래로 묵직한 총의 느낌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될 리가 없다. 남자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저렇게 어울리지 않게 신 나 하는 게 과연 사냥 때문인가, 저를 곰이 있는 곳에 데려왔다는 것 때문인가. 보나 마나 후자가 확실했다.

설마 놀리는 건가 싶어 비올레타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가디언을 붙잡고 다짜고짜 정말 곰이 있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현재 동남쪽 지역에 두세 마리 정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여기는 서쪽 끝이라 안심하…….”

“됐어. 거기까지.”

가디언이 비올레타를 안심시키려 말을 조금 더 덧붙이자마자 냉랭하게 남자는 말을 잘랐다. 그러나 이미 비올레타는 가디언의 ‘파악된다’는 말에서 사고가 멈춘 채였으므로, 애초에 더 듣지도 못했기에 무용했다.

“……맙소사.”

망연하게 중얼거리는 비올레타의 뒤에서 남자가 태연하게 가디언들에게 지시했다.

“너희 넷은 남고, 둘만 따라와.”

비올레타가 화들짝 놀라 남자가 있는 뒤로 홱 몸을 돌렸다.

“둘만? 여섯 다 데려가는 거 아니었어요?”

“출중한 자들이다.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곰이 있잖아요…….”

불안감에 말끝이 늘어졌다. 남자는 그대로 비올레타를 끌고 가 번쩍 들어 말 위에 올리고, 그 옆에 있던 말에 올라탔다. 비올레타는 순간 떨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자세를 잡았다. 남자가 묘한 눈으로 웃었다.

“말은 탈 줄 아나 보군.”

“아뇨! 못 타는데! 그러니까 사냥은 못 하겠네요.”

“그리 자세를 잡고서?”

망할 내 재능…….

괜히 승마 선생이 재능 있으시다, 말과 한 몸 같으시다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비올레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제 재능을 저주했다.

그러나 제 불안과는 다르게 사냥은 그 뒤로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의아할 정도로.

탕!

폭음이 또다시 숲 속을 울렸다. 남자의 긴 총 끝으로 뿌연 연기가 여름의 청량한 공기 속에 흩날렸다. 가디언 하나가 잽싸게 달려가더니, 멀리서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또다. 또 명중한 것이다.

이제 좀 놓치지. 비올레타는 시큰둥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박수는 왜 쳐?”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상황이라.”

“착실하군. 계속 그렇게만 해.”

남자가 비올레타를 힐끗 바라보며 놀리듯 대꾸했다. 비올레타는 남자에게 보이지 않을 만큼 입술을 삐죽대고는 좀 더 앞쪽으로 이동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비올레타는 덩그러니 남자의 곁에 서서 남자가 사냥하는 것만 지루하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처음에야 남자가 든 장총의 잘 빠진 총신 하며, 경이적인 사거리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봤지만 이젠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인 것을 알아 더 지켜보기도 재미없었다.

비올레타는 슬슬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위로 쪼르르 뛰어다니는 다람쥐며 작은 새집 따위를 바라보던 비올레타는 문득 그동안 본 사냥감이 생각보다 별거 없는 평범한 것들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남자가 잡아들인 사냥감이라고는 사슴처럼 평범한 짐승 몇 마리와, 새 두 마리가 전부였다.

어딜 둘러봐도 도무지 곰이 산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평화로운 숲이다. 비올레타가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곰이란 단어에 기겁하던 저를 즐거운 듯 실실 웃으며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 때문이었다.

오직 그 목적, 저를 골려먹기 위한 그 목적 하나 말이지.

비올레타는 제 가까이에 서 있던 가디언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곰 없는 거 맞죠?”

“있습니다.”

“후작께서 시킨 거 다 알아요.”

“……아뇨. 정말 있습니다.”

비올레타가 미심쩍은 얼굴로 가디언을 살폈다. 가디언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저러는지는 몰라도 일단 거짓말하게 생긴 상은 아니었다. 꼭 인상 따라 그러리란 법은 없지만, 어쨌든 직감적으로 가디언의 말 자체는 사실인 듯했다.

비올레타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후작의 뒷모습을 힐끔 눈치 보듯 살핀 가디언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허나 여기는 곰이 나오는 동남쪽 지역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라, 실질적으로는 없다 보셔도 됩니다. 이 근방이 엘 드레고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니, 안심하십시오.”

“…….”

“황녀 전하?”

“그럴 줄 알았어. 저 비겁한 인간!”

“…….”

“그럼 가까운 주위는 좀 걸어 다녀도 되겠죠? 숲에는 오……. 아니, 처음 와 보는 거라, 좀 걸어 보고 싶어요. 신기하군요.”

“물론입니다, 황녀 전하. 황녀 전하께서 당도하시기 전, 저희가 이 일대를 모두 안전하게 정비해 놓았습니다.”

후작이 다른 가디언에게 눈치 주던 것 따윈 잊었는지, 가디언은 비올레타에게 자랑스레 장담했다. 비올레타가 싱긋 웃었다.

“멀리 가진 않을게요.”

“엄호하겠습니다.”

“혼자 조금 걷고 싶은데…….”

후작과 비올레타를 번갈아 눈치 보던 가디언이 이내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레타는 나무가 듬성듬성 솟아 있던 곳에서 나무가 우거진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흔적을 나타내듯, 수풀 사이로 풀이 나지 않은 단단한 길이 나 있었다. 비올레타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숲의 맑은 공기가 폐부까지 시원하게 닿았다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에비, 사슴이 도망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환청처럼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딜로아 자작령의 사냥터는 아주 작았고, ‘에비가일’의 할아버지는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거의 버려져 있다시피 한 사냥터를 가꾼 것은 아버지와 하인 몇 명이었다.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는 정도면 족했던 숲을 아버지가 가꾸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걸음마를 걷기 시작했던 무렵인데, 여섯 살쯤 처음 갔던 사냥터에 이미 근사한 오솔길이 나 있었던 것을 그녀는 기억했다. 아버지의 단단한 손이 어린 저를 번쩍 올려 말에 태우고, 아버지가 그 뒤에 탄 뒤 ‘이랴!’ 하고 외치고 나면 세상이 달라진 기분이었다. 평범한 시야가 그렇게 빠르게 지나고 나면, 아늑한 숲 속에는 오로지 아버지와 저밖에 없었으니까.

비올레타는 제 드레스를 사락사락 스치는 크고 작은 풀들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보다 훨씬 더 낮은 시선이 숲을 우러러봐야 했던 시절, 길에 풀이 자라나 있으면 아버지는 몇 걸음 먼저 가 직접 풀을 뽑아내 주곤 했다.

‘엄마가 기껏 신겨 준 예쁜 신발이 풀물에 더러워지면 안 되잖니.’

아버지가 몸을 엎드려 성에서 보던 하인처럼 풀이나 뽑는 게 싫어 어린 에비가일은 그러지 말라 칭얼거렸다. 아버지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내가 몸 한 번 엎드리는 것이 네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것보다 낫단다. 아버지란 그런 거란다. 아버지가 평생 앞으로도 이렇게 지켜 줄 거야. 아무것도 에비가일을, 조금도 해하지 못하게, 아버지가 평생 너를 이렇게…….

우스운 얘기다. ‘에비가일’의 아버지는 자신조차 지킬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불쌍한 사람. 미련한 사람. 배신을 당해도 배신할 수는 없었던 사람. 결국 혼자 모든 것을 안고 죽어 버렸던 사람. 아직도 원망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지금도 사랑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란 것 안다. 그래, 알고 있다. 나쁜 것은 사람들이었고,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올레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어 비올레타는 뒤를 돌아보았다. 숲에 들어온 길목도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제법 걸어온 것 같은데, 가디언이 쫓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말 안전하긴 한 모양이었다. 비올레타는 몸을 돌렸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야 하는데.

“크르릉…….”

비올레타는 숲 속에서 번뜩 비치는 눈 한 쌍에, 망연히 눈을 깜빡거렸다. 뒤돌아 내딛던 발이 어색하게 땅 위에 내려앉았다. 숲 속으로 뻣뻣하게 정지된 고개가 좌우로 제가 선 길 앞뒤를 한 번 살피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느, 느, 늑, 늑대다.

“아무도……, 아무도 없어요?”

비올레타가 늑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늑대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소심하게 물었다.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늑대 몰래 낸 소리를 들은 것은 정작 늑대였다. 비올레타의 작은 소리를 예민하게 잡아낸 늑대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안전하다며, 안전하니까 안심하라며! 빌어먹을, 나도 감상에 좀 젖어 있으면 어때서, 사람이 없으니까 짐승이 날 방해해!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억울함에 차오른 눈물을 거칠게 닦아 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주문을 외듯 속으로 빠르게 외웠지만 전혀 도움은 안 됐다. 비올레타가 무너지는 정신 속 유일하게 기억한 것은, 어릴 적 아버지가 동화책을 읽어 주며 알려 준 말이었다.

‘네가 그 눈을 무섭다고 피하고, 도망가려고 등을 돌리는 순간 늑대는 순식간에 네 뒤를 덮쳐 버리고 말 거야.’

‘그럼,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안 죽어?’

‘그런 건 아니지.’

‘에이, 뭐야!’

‘하지만 그렇게 에비가일이 꾹 참고 있으면, 늑대가 에비가일을 죽이는 것보다 빨리 아빠가 에비가일을 구하러 갈 거야. 이렇게.’

아버지의 큰 손가락이 허공에 총처럼 올라가더니 빵, 하는 소리와 함께 상상 속 늑대를 죽여 버렸다. 어린 에비가일은 그 옆에서 꺄르륵 웃기만 하면 됐었지만 지금의 비올레타는 혼자였다. 무섭다고 피하고, 도망가려 등을 돌리면 늑대는 순식간에 저를 찾아올 것이다.

비올레타는 늑대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손을 옮겨 총 위를 더듬거렸다. 떨리는 손이 드레스 속 숨겨진 끈을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찾아냈다. 아버지가 없어도 여태 살아남았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없어도 살 수 있어, 지금도.

이제 난, 살 수 있어.

비올레타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며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촤륵, 드레스가 올라가는 그 작은 소리에 늑대의 귀가 쫑긋했다. 손끝에 차가운 쇠 느낌이 닿았다. 왼손으로 총을 뽑아내며 오른손으로 해머를 당기자 총신이 찰칵, 하고 회전했다.

늑대가 한 걸음 걸어왔다.

여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약실은 네 개, 그리하여 기회도 네 번이었지만 그 네 번을 늑대가 기다려 줄 리가 없다.

가디언이 든 장총이라도 뺏어 왔어야 했다. 라키엘이 구한 비올레타의 리볼버가 세상에 널린 권총 중 가장 좋다고 해도 권총은 어디까지나 권총이었다. 조준 거리는 형편없이 짧았다. 그러니 기회는 한 번뿐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 한 번이라면, 할 수 있는 최대한 가까이…….

“황녀 전하!”

돌연 멀리서 들리는 외침에 늑대가 이를 드러내더니, 비올레타에게로 달려왔다. 애써 침착하게 돌아가던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공포가 순식간에 뇌리를 잠식했다. 천천히 위로 향하고 있던 총이 빠르게 늑대를 향해 겨눠졌다. 직선으로 뻗은 오른손이 쥔 권총 너머로, 제게 달려오는 늑대가 보인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왼손이 권총을 쥔 오른손을 마주 잡았다.

좀 더, 좀 더 가까이.

비올레타가 꽉 깨문 입가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새어 나왔다. 방아쇠에 닿은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자꾸만 방아쇠를 당기려 움직이는 것을 비올레타는 이를 더 세게 악물며 가까스로 억눌렀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늑대가 점점 가까워진다. 빠르게, 혹은 느리게 영상이 흩어졌다. 그렇게 고작 늑대와 자신의 사이가 여섯 걸음 정도가 남았을 때, 아래 시야로 그 거리를 재던 비올레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야를 좁혔다. 늑대의 눈 사이, 미간에 정확히 총구를 놓는다.

그리고 네 걸음,

비올레타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눈앞이 번쩍했다. 비올레타는 총격의 반동에 뒤로 한 걸음 밀려났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비올레타가 휘청거리다 옆의 나무를 가까스로 짚었다. 빠르게 덮쳐 오던 짐승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수 초 뒤 연기가 사라지자 비올레타의 앞에 보인 것은 겨우 네 걸음 정도의 거리 앞에서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늑대였다. 늑대는 그대로 즉사한 듯 축 늘어진 채였다. 제가 총격에 한 걸음 물러섰으니, 고작 세 걸음 앞에서 죽인 것이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비올레타는 믿을 수 없는 듯 화약에 그을어 거뭇하게 변한 제 손과 늑대를 번갈아 보았다.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

헐레벌떡 달려온 가디언이 저를 한 번 바라보고는 늑대를 아연실색해 바라보았다.

“이 늑대를 저, 전하께서 잡으신 겁니까?”

가디언이 황망한 소리로 묻는 것에 비올레타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어느새 말을 달려 온 남자가 험악한 얼굴로 말에서 뛰어내리듯 내려섰다. 문득 정신이 들어 비올레타는 서둘러 제 드레스 자락을 정돈했다.

“미쳤나? 총은 어디서 나서 위험하게 함부로…….”

퍽 화가 났는지 가디언이 지켜보는데도 비올레타에게 반말로 사납게 따져 묻던 남자가 문득 늑대 사체를 발견하고 딱딱하게 굳었다. 남자가 가디언의 멱살을 잡아챘다.

“확실히 정비한 사냥터에, 늑대가 내려와?”

“그만해요.”

“확실히 했다, 안전하다, 네 입으로 분명 그리 말했는데.”

아랫사람에게 늘 너그러운 편이었던 남자가 싸늘하게 비꼬는 음성에 놀란 듯, 가디언이 겨우 목소리를 짜낸 것처럼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부, 분명 그리했으나…….”

“됐어요.”

“네가 죽을 뻔했어!”

“살았잖아요.”

남자가 싸늘한 얼굴로 비올레타를 향해 몸을 돌리며 잇새로 씹어뱉듯 나직하게 말했다.

“위험하다고 했으면, 떨어지지 말았어야지.”

“당신이 나 제일 안전한 곳에 데려온 거 알아요. 곰은커녕 제일 안전한 구역이라는 거요. 그러니까 제가 늑대를 만난 건 당신 잘못 아니고, 열심히 정비했던 가디언들의 잘못도 아니고, 안전한 곳에서 움직인 제 잘못도 아니고, 하물며 이 불쌍하게 죽은 늑대 잘못도 아니죠. 이 늑대가 뭘 알았겠어요. 이 일은 우리만 아는 일로 끝내요. 그러면 당신 귀찮을 일도…….”

“말 못 알아들어? 너 죽을 뻔했다고.”

비올레타에게로 가까이 다가선 남자의 청회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일렁거렸다.

“그러니 죽었으면 당신이 많이 곤란하고, 또 귀찮았겠죠. 걱정 말아요.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비올레타의 말에 남자가 기가 막힌 듯 찌푸린 눈으로 비올레타를 노려보다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총은 어디서 났어?”

“늘 가지고 있던 거예요.”

“원래 사격할 줄 알았나?”

“네. 조금?”

“계집한테 사격까지 가르치다니, 퍽이나 네 주변이 불안한 모양이다, 그 사내는.”

그 사내, 라는 말에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잠시 얼굴을 붉혔다. 남자는 별수 없다는 듯 발끝으로 늑대의 사체를 뒤집었다. 위로 드러난 늑대의 이마 정중앙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양을 조금 놀란 듯 바라보던 남자가 이내 경악한 눈으로 비올레타를 돌아보았다.

“……고작 이 거리에서 그런 총을 들고 이렇게 쐈다고? 늑대가 여기까지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서?”

“이런 총이니 기다려야지 어떡해요.”

“…….”

“그리고 알아요. 저 대단한 거.”

자신도 모르게 칭찬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대상이 먼저 으쓱하자, 남자는 김이 샌 것처럼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한 게 아니라, 대담한 거겠지.”

비올레타가 무어라 대꾸하려다 남자가 제 앞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에 멈췄다. 남자의 손끝이 천천히 비올레타의 입가로 다가왔다. 비올레타가 흠칫, 하고 뒤로 물러서려는 것을 남자의 다른 손이 어깨를 잡아 막았다.

“이 지경까지 잘도 참았군.”

남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이내 엄지손가락 끝으로 비올레타의 턱을 문질렀다. 화들짝 놀란 비올레타가 남자의 손을 홱 뿌리치자 남자가 억울한 듯 제 손끝을 보여 주었다.

“어…….”

피가 묻어 있다. 비올레타는 의아한 얼굴로 제 턱을 문질렀다. 아, 아까 너무 세게 깨물어서……. 그러고 보니 손이 그을었는데 얼굴도 그을었을까. 비올레타가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손에 묻은 그을음에 얼굴이 더 거뭇거뭇해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그녀가 열심히 제 얼굴을 닦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비올레타가 수상한 듯 남자를 노려보았다.

“왜 웃어요?”

남자가 대답 대신 손수건을 꺼내 비올레타의 손에 쥐여 주려다 손마저도 그을어 있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 왜 웃어요. 제가 웃는 게 그쪽에게 기분 나쁜 것처럼, 그쪽이 그렇게 웃는 것도 저한테 기분 나빠요!”

“그래, 미안하다.”

답지 않게 순순히 사과하며 고개를 든 남자가 비올레타의 얼굴을 보고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냐니까?”

“몰라도 된다.”

남자가 피식피식 웃으며 손수건을 들어 비올레타의 얼굴을 닦았다. 비올레타는 엉망이 된 제 얼굴은 상상하지도 못한 채 툴툴거렸다.

“왜 웃어요? 설마 얼굴 조금 더러워진 거 가지고? 그쪽 웃는 거 진짜 기분 나쁘다니까.”

조금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남자는 굳이 그 오류를 고쳐주지 않았다. 비올레타의 얼굴을 나름대로 깨끗해 보일 때까지 닦아 낸 남자가 툭 던지듯 비올레타에게 말했다.

“칼이야.”

“네?”

“그쪽이 아니라.”

“…….”

“그러니까 칼이라고 불러.”

아직도 웃음기 어린 청회색 눈동자가 매력적으로 반짝였다. 비올레타는 무표정하게 칼의 손을 치워 냈다.

“왜 내게 갑자기 이름을 허락하는 거죠?”

“네 말대로, 우린 사촌이니.”

“이렇게나 갑자기 말입니까?”

비올레타의 말이 거리를 두듯 깍듯해졌다. 칼은 개의치 않고 상큼하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미 성가시게 된 마당이니, 이제 나도 줄을 서야지.”

라키엘은 피곤한 얼굴로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필 비올레타가 수도로 돌아오는 날에 컨디션이 이 모양이다. 사흘째 잠들지 못한 신경은 누가 조금 건드리기라도 하면 터질 것처럼 팽팽했다. 예정대로라면 비올레타가 도착하는 저녁에 황후궁에서 파사칼리아와 함께 석찬을 해야 했지만 지금 같은 상태로는 기껏 오랜만에 본 얼굴에 좋은 소리 할 것 같지도 않다.

제 얄궂은 성정에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로드리고령에서 속속들이 올라오는 보고는 온통 라키엘의 속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돌아오면 혼이야 좀 내 줄 작정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기껏 열흘 만에 보는 얼굴에다 대고 할 생각은 아니었다. 라키엘은 파사칼리아에게 내일 아침에 찾아가겠다는 급사를 보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공작 각하.”

마침 카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라키엘은 제 대답을 잠깐 기다리지도 못한 수하의 성급하고도 감히 그 주제와 분수를 잊은 자세에 무어라 쏘아붙이려다가 그 다급한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라키엘이 의아한 듯 카일을 바라보았다.

“전하, 황후 폐하께서 급히 파발을 보내시어…….”

그렇게 다급하게 말하면서도 이상하게도 까닭은 전혀 모르는 눈치다. 라키엘은 천천히 손을 뻗어 카일의 손에 들린 봉투를 뺏어 들었다. 유사시에만 사용하는, 본인 외에는 볼 수 없는 황후의 봉인까지 된 봉투 위로 어쩐지 까닭 모를 불길한 예감이 떠돌았다.

라키엘의 긴 손가락이 차분하게 봉인을 뜯었다. 열린 봉투 사이로 서서히 파사칼리아의 유려한 글씨가 드러났다.

그리고 잠시 후.

라키엘의 손이 봉투째 종이를 꽉 움켜쥐었다. 딱딱하게 다물린 턱이 삐걱대며 움직였다. 이 새끼가…….

“각하, 무슨……?”

“황후궁으로 지금 간다고 파발, 아니, 필요 없다.”

“예?”

“입궁 준비해.”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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