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5장>
벌써 네 번째 사람이었다. 그 빌어먹을 놈의 보상. 비올레타가 속으로 저주하듯 되뇌며, 네 번째로 방에 들어온 스승을 향해 떨떠름하게 웃었다.
경제학, 정치학, 법학에 이어 철학을 가르친다며 등장한 교수는 과연 제 연구 분야만큼이나 심오한 생김새였다. 게르테뉴의 얄타 뫼르겐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초로의 교수는, 제 염소 같은 회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단추 구멍 같은 눈을 근엄하게 깜빡였다.
“……해서, 황제 폐하께서 황녀 전하의 스승으로 친히 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얄타 뫼르겐의 말을 대충 흘려들은 것은 앞의 세 사람이 거의 똑같은 말을 해서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폐하의 깊은 뜻을 받들어 부디 현량자고懸梁刺股의 자세로 수불석권手不釋卷하시되…….”
그리고 훨씬 더 꼬아 말하기 때문이다. 그냥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면 될 것을. 현량자고? 수불석권? 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그가 에른스트인이라 딱딱하기 그지없는 제네트어 억양으로 빠르게 공용어를 해 대는 통에, 몇몇 단어는 알아듣기도 힘든 참이었다. 비올레타는 그의 콧잔등쯤의 애매한 위치를 응시하며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여 그리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 여쭙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철학을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예?”
“철학을,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비올레타의 떨떠름한 미소가 깊어졌다. 너무 고차원적인 주제라 가혹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초면부터 대놓고 바보같이 굴어선 안 됐다. 비올레타가 태연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제가 어찌 감히 교수, 아니, 스승님 같은 석학 중의 석학 앞에서 철학을 논하겠어요. 스승님이야말로 철학의 대가라 칭송받는 분이 아니시겠어요? 그런 스승님의 고견부터 여쭙고 싶군요.”
“벌써부터 남의 답을 베끼는 못된 습관을 들이시면 안 됩니다. 아카데미에서도 하등한 놈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얄타 뫼르겐이 조그마한 눈을 매섭게 깜빡이며 쏘아붙였다. 그는 아부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졸지에 하등해진 비올레타가 그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사고하는 학문이겠죠.”
“그리고?”
“되도록 현명하게.”
“그리고?”
제발 더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입 때리고 싶으니까.
“저는 넓고 깊게 보고 싶지, 좁고 편협한 의견으로 무언가를 쉽게 정의 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자세한 건 잘 모르겠다’는 멍청한 대답을 겨우 피해 간 비올레타를, 얄타 뫼르겐이 실처럼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전하의 말씀도 물론 옳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학문은 적절한 정의精義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고대 학자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철학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 그 자체를 철학이라고도 했지요. 존재를 인식한다는 게 무엇입니까? 존재를 당연시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형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는 말은, 적어도 한 귀는 들었다는 것이다. 비올레타는 제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조차 했는지 의문이었다.
한 귀도 못 듣겠다. 저게 다 뭔 말인지, 존재가 어떻고 인식이 어떻다는 건지. 비올레타가 차마 한숨을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삼켰다.
얄타 뫼르겐의 말이 조곤조곤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카데미도 첫날에는 수업 안 할 텐데.
“……그리하여! 존재에 대한 궁극적 인식이란 존재하는 것으로 하여금 존재케 하는 원리이며, 존재의 가치와 당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존재하나? 이것은 어떻게 존재하나? 이것은 과연 존재해도 되는 것인가! 존재함으로써 어떤 가치를 가지나!”
얄타 뫼르겐의 목소리 높이가 점점 올라가더니, 그는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계속 쏟아지는 심오한 말들에 비올레타는 문득 귀를 막고 싶어졌다.
생각 같아선 그놈의 철학부터 존재가치를 따져 보고 싶었지만, 비올레타는 얄타 뫼르겐과 헤어지는 날까지 예의 바른 제자로 남아 있어야 했다. 앞으로 그가 가르칠 수많은 학생이 각국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 될지 몰랐다.
게르테뉴는 웰라운, 지펜과 더불어 서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 아카데미였고, 각국의 고위귀족들과 수재들이 모인 곳이었다.
저 노인네가 강의실에서 ‘그러고 보니 내가 가르쳤던 그란토니아의 5황녀는 참으로 싸가지가 없더라’라고 한마디만 스치듯 해도 그 강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은 그렇게 알게 될 테고, 그들은 졸업 후 각국으로 다시 돌아갈 테고, 돌아가서 그 말을 하면 각국의 귀족 및 지식인들이 그렇게 알게 될 테고, 그들이 또 다른 곳에서 말할 테고…….
비올레타가 지나치게 발전한 상상을 멈추며 짐짓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얄타 뫼르겐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역시 1황자 전하와는 다른 진중함이 보이셔서 좋습니다.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네?”
“아, 1황자 전하께서 게르테뉴 출신임을 모르시지요?”
“몰랐어요.”
“고작 열두 살 때 들어오셔서 열네 살이 되자마자 나가셨지요.”
그 행보가 천재적인 건 그렇다 치고, 기껏 여기까지 와 1황자를 칭찬하는 것에 시큰둥해진 비올레타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 어린 시절부터도 어찌나 맹랑하던지, 분명아주 총명한 학생이긴 했으나 배움의 자세는 썩 우수하지 않았습니다. 생글생글 웃는 상으로 ‘교수님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라면서 그리 지적을 하는데, 어찌나…….”
아, 칭찬이 아니네.
비올레타가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이며 턱을 괴고는, 경청하기 시작했다.
닷새째 줄기차게 면담이 이어졌다. 그 모든 사람―사람이 곧 그 학문이었다.―을 만약 하루 안에 다 봤으면 제 정신은 덧없이 허물어졌을지도 몰랐다. 정치학, 법학, 경제학, 외교학, 철학, 역사…….
제가 지난 나흘간 면담했던 학자들을 떠올리며 비올레타가 작게 몸서리쳤다. 이 시점에서 더 슬픈점은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와중에도 깨알같이 카일은 방 안에 책을 가득 쌓아 두고 갔으며, 라키엘은 이제 슬슬 펠로베르어를 시작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폭탄을 던지고 갔다.
“……오셨습니다. 전하, 이제 접견실로 가실 시간입니다.”
“말도 안 돼.”
“전하?”
디아나의 부름에 아연한 표정이 된 비올레타가, 곁에서 수를 놓고 있던 루이즈를 향해 물었다.
“루이즈, 넌 이 교육 과정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해?”
황궁의 생활은 그저 혼자서 닥치고 종일 공부만 하면 되었던 공저의 생활과는 흘러가는 일상 자체가 달랐다. 제가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랫사람들의 일, 제가 밤에 잠이 드는 것도 아랫사람들의 일, 심지어 제 몸 하나 씻는 것도 궁 전체 일정표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상조차 공적인 일이 되어 버리다 보니, 설사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배는 피곤했다. 비올레타가 떨떠름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자, 루이즈가 그녀를 부축하듯 팔짱을 끼며 해맑게 말했다.
“가능하니까 폐하께서 그렇게 많은 교수들을 보내셨겠죠? 전하는 할 수 있어요!”
“답은 정해져 있잖아. 넌 대답만 해! 내가 원한 건 불가능하다 같이 생각해 줄 사람이야.”
“불가능한 것 같아요. 폐하께서 정말이지 너무하시네요! 어쩜 이렇게 심한 일을!”
루이즈의 작위적인 외침에 비올레타의 얼굴이 한층 더 떨떠름해졌다. 앞서 걸어가던 디아나가 하녀들에게 문을 열라 지시하며 작게 웃었다. 비올레타의 나머지 빈 팔을 밀로일라가 잡으며 루이즈 대신 진지하게 동의했다.
“확실히 황자들께서도 그리 많은 내용을 동시에 소화하지는 않으세요.”
“그렇지?”
“물론 전하께서 여태 많은 배움의 기회를 잃으셨기에 뒤늦게 시작하는 학업에 어려움이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최고로 손꼽히는 교수들을 직접 초빙해 전하의 늦은 학업을 도와주신 것은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죠. 게다가 전하께서는 굉장히 총명하신 편이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처럼, 지나치게 많은 내용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총명하다’는 부분에서 아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비올레타가 밀로일라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길고 충실한 동의를 치하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처신하면 밀로일라 메이어. 흡족하다.”
“과찬이세요.”
“뭐야, 저렇게 어렵게만 말하면 되는 거예요?”
“할 수 있으면 해 봐.”
루이즈가 부루퉁한 얼굴로 하녀들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이윽고 접견실의 문이 열리고, 비올레타가 매끄럽게 입매를 끌어 올리며 들어섰다.
추밀원 청사의 상징 중 하나인, 거대한 석조로 이루어진 아치들이 정확히 스무 걸음마다 이어졌다. 지나가는 관리들의 인사를 무덤덤하게 받으며 라키엘은 몸에 밴 일정한 보폭으로 복도를 걸었다.
마치 계산된 것 같은 그 정확한 걸음 뒤로 비스듬하게 이어진 그림자가, 화려한 대리석 위로 어른거렸다. 이윽고 검과 장미가 고풍스럽게 조각된 검붉은 나무문 앞에서 라키엘의 걸음이 멈췄다.
양옆으로 시립해 있던 기사들이 문 앞을 가로지르던 창을 치우며 절도 있게 묵례했다.
“각하.”
라키엘이 대꾸 없이 고개만 까딱했다. 수백 년의 세월이 그대로 녹아든 두꺼운 문이 육중한 소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문이 완전히 열리길 기다리던 라키엘이, 천천히 뢴트미안의 방으로 들어섰다.
“의장, 에델가르드 공께서 입장하십니다.”
라키엘이 들어선 곳은 방이라는 소박한 단어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규모였다. 방 중앙에 놓인 거대한 뢴트미안에 둘러앉아 있는 열 명의 의원들 사이로 매캐한 시가cigar 연기가 떠돌았다.
그들을 무심한 눈으로 한번 쓱 훑은 라키엘이, 가장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아비가 죽고 작위를 승계한 뒤 고작 두 번째 앉는 것인데, 평생 앉아온 양 자연스러운 고고함이었다.
“제국력 806년, 봄의 88일, 추밀원 정기 소집 제 4887회…….”
“정기 아니다.”
“예?”
“됐다. 나가.”
더 말하기도 귀찮은 듯 이어지는 그의 나지막한 일갈에 개회사를 채 반마디도 읊지 못한 관리가 황망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서걱서걱, 서기가 펜대를 움직이는 소리만이 높은 천장을 미세하게 울리는 침묵. 라키엘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의원들에게도 모두 잘못 전달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추밀원 정기 소집은 나흘 후에 있습니다.”
“근시일 내인데, 굳이 더 필요합니까? 합치시는 것은.”
“그날과 오늘의 다룰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굳이 나눌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 귀찮으시면 참석하지 않으시는 것도 의장의 권한으로 다이크 백에게 허락하겠습니다.”
라키엘의 부드럽지만 날이 선 대꾸에 다이크 백작이 더 말하지 않고 언짢은 얼굴로 입에 문 시가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가 저 껍데기만 온화한 권유대로 그 정기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순간, 평범하게 열린 정기회의는 곧바로 그의 제명 여부를 따지는 회의로 바뀌고 말 것이다.
젊은 의장은 죽은 제 아비와는 달리 단 한 번의 불참이라도 ‘최고 귀족으로서 책임의 해이’라는 케케묵은 원칙까지 들먹이며 추밀원에서 제명하자고 상정시키고도 남을 인사였다.
그것은 결코 새로운 의장이 고리타분한 원칙주의자라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가 제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주제에 눈치는 있어서. 웃고 있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라키엘이 제 앞에 가지런히 놓인 기록을 펼치며 입을 열었다.
“밀니로 왕국에서 잉거스트 공국의 리에주 지방을 완전히 점령한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별일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읊는 그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제법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몇 사람이 놀란 듯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라키엘의 시선이 기록의 첫줄에서 중간쯤으로 곧바로 넘어갔다.
“그리고 잉거스트 대공이 전사한 것으로 공식 확인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이라도 발견됐습니까?”
귓전에 꽂히는 불쾌한 목소리에 라키엘이 고개를 들어 질의한 이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금발 아래 가늘어진 눈이 저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본디 미하일이 앉아 있었어야 할 황가의 대표자를 위한 자리에 앉아서.
건방진 새끼. 마치 날 때부터 제 자리였다는 양 뻔뻔하게 앉은 꼴이 역겨워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라키엘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밀니로의 사자使者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정황이 확실하니 따져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상황 위에서 가설을 세우면 됩니다. 그리고 선택합니다.”
감정 한 톨 없는 정중한 대꾸였다. 그저 무심한 시선에 희미한 경멸이 스치듯 지나간 게 전부였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들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아무리 희미해도 부러 흘린 것이었으므로. 그 시선을 냉랭하게 마주한 빌키어스가 라키엘에게서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제 맞은편의 클레이런스 후작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밀니로 왕국은 우리의 우방, 잉거스트 공국은 펠로베르의 우방…….”
“…….”
“그리고 펠로베르 제국은 현재 우리의 가장 크고, 가장 위험한 우방입니다.”
클레이런스 후작의 찌푸린 미간이 깊어졌다.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단 두 가지뿐입니다. 밀니로와 웃느냐. 혹은.”
“…….”
“펠로베르와 위태로운 줄 위에서 계속 함께하느냐.”
마치 빌키어스의 말 때문인 것처럼, 사람들에게서 한숨 대신 뿜어져 나온 뿌연 연기가 허공을 어지럽혔다. 몇몇 사람은 마른 목을 축이듯 위스키를 마시기도 했다. 브나리오 백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밀니로는 쉽게 버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공급해 온 수많은 군수물자, 무기…….”
“그거야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지 않습니까? 무기를 밀니로에서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메이어 백, 그대의 그 은행이 대단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습니다만, ‘돈’만 있으면 다 구할 수 있는 게 무긴 줄 아십니까?”
메이어 백작이 브나리오 백작에게 반문하자, 다이크 백작이 마치 보란 듯이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 메이어가 유서 깊은 명문가 중의 명문가임에도, ‘추밀원의 고귀한 귀족이 은행으로 돈놀이나 하는 장사꾼이 되었다’는 경멸을 은연중에 받아 온 것을 부러 꼬집는 말이었다. 또한 관료 생활을 하지 않았으니 결국 제 돈 돌아가는 일밖에 모르지 않느냐는 조롱이기도 했다.
메이어 백작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지자, 조용히 듣고 있던 카디링거 후작이 다이크 백작을 향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몬드리올 백작이 제 안주머니에서 시가 한 대를 꺼내 들며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펠로베르를 등질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의원들을 찬찬히 둘러보던 빌키어스가 말했다.
“펠로베르와의 우호는 불과 십오 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펠로베르의 황제는 노쇠했고, 황태자는 이제 제 아비와는 완전히 다른 노선에 서 있습니다. 그 황태자가 그대로 즉위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펠로베르와의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밀니로를 선택해 등지든, 그들을 선택해 함께하든 결과는 같습니다.”
“…….”
“과연 밀니로의 가치가 그 불안보다 못하다 하겠습니까? 펠로베르의 황제가 죽고 나서도, 그리 말씀하시겠습니까?”
빌키어스가 물음을 던지자 또다시 침묵. 펜대 움직이는 소리와 연기를 뱉는 숨소리, 뢴트미안 위로 술잔이 작게 부딪치는 소리……. 라키엘은 내리깐 눈으로 제 앞에 펼쳐진 서류들을 바라보다, 한데 모아 거꾸로 엎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빌키어스에게 동의했다.
“밀니로가 우리의 충실한 우방이라는 점에서는 1황자 전하께 동의합니다. 분명 밀니로는 펠로베르에 비할 데 없이 우수한 우방입니다. 이백여 년간 변함없이 결속해 온 그들과의 정신적 우호는 분명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은 항상 그에 걸맞은 대우를 우리에게 선사했습니다.”
의뭉스레 꽂히는 시선들에도 아랑곳 않고, 라키엘이 제 앞에 놓인 우아한 유리병을 들어 빈 잔을 채웠다. 황금빛이 도는 투명한 액체가 화려한 유리잔 속에서 찰랑거렸다. 라키엘의 잔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빌키어스가 매끄럽게 입매를 끌어 올려 웃으며 반문했다.
“그렇다면 다른 점에서는?”
“그런데 전하께서는 놓치기 아까운 밀니로의 가치보다는 다른 것을 눈여겨보신 것 같습니다.”
빌키어스의 유려하게 휘어진 눈매 속 벽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라키엘이 자로 잰 듯 우아하게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듯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정중한 어조로 전혀 정중하지 않게 덧붙였다.
“아무래도 1황자 전하께서는 펠로베르와 전쟁놀이가 하고 싶어지신 듯합니다.”
접견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남자에 비올레타가 멈칫 멈춰 섰다. 시녀들이 덩달아 멈춰 서며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비올레타는 아랑곳 않고 그대로 뒤돌았다.
“……뭐지?”
“전하?”
약간 당황한 듯한 디아나의 부름에 비올레타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음악 선생이라며?”
“네.”
“저 사람이라고?”
“네.”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슨 문제 있느냐는 듯 대답했다. 비올레타가 무어라 더 말하려 입을 달싹이다, 옅은 한숨을 뱉으며 뒤돌았다. 돌아보자마자 마주친 눈이 해사하게 휘어졌다.
“이카르트 드 베론 경이에요. 베론 후의 장자세요.”
디아나가 친절하게 덧붙였다. 남자가 예의 바르게 물어 왔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뇨.”
아마 디아나나 밀로일라에게 물은 것이겠지만 비올레타는 그 말을 자르듯 부정했다. 비올레타가 시녀들에게 나가 있으라 손짓하고 이카르트를 향해 걸었다. 이내 시녀들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비올레타는 인상을 찌푸리며 앉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말했다.
“장갑 내놔요.”
이카르트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씩 웃었다.
“받자마자 쫓아내시려고요?”
“잘 아네요. 그렇게 쫓아내려 했는데.”
“그렇게 쫓아내실 것 같아 다른 일로 왔습니다.”
“……그래서 못 쫓아내게 생겼죠.”
아까운 듯 대꾸한 비올레타가, 이카르트가 내미는 반듯하게 접힌 장갑을 받아 제 무릎 위에 놓았다.
“다리는 괜찮나요?”
“걸을 수는 있습니다.”
“저런.”
“저런, 이 굉장히 묘하게 들리네요.”
“걸을 수 있다니 아쉬워서요.”
비록 대놓고 가시 돋친 말이었으나 친절한 풀이였다. 이카르트가 피식 소리 내 웃으며 되물었다.
“혹시 계속 이렇게 선생님 대접은 해 주지 않으실 참입니까?”
“글쎄요. 선생님이 보이면, 아마도 그렇지 않겠죠.”
“지금 제 자존심 건드린 거 아십니까?”
“그대의 자존심은 참 민감하기도 하네요.”
이카르트의 입가에 걸린 장난스러운 미소가 짙어졌다. 묘한 시선이 와 닿았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 비올레타가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대로 시선이 마주친다. 비올레타가 느리게 한 번 더 눈을 깜빡였다. 이카르트가 없었다.
성큼성큼 피아노로 다가간 이카르트가 건반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쓸었다. 그리고 의자를 빼 앉았다. 앉고서도 잠시 고민하듯 건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카르트가, 이내 가볍게 건반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보기 좋게 긴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매끄럽게 흩어져 움직였다. 느릿하고 낭만적인 선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음을 마음껏 가지고 노는 듯한 여유로움. 그럼에도 제멋대로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확실히 저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이다.
어느새 비올레타는 순수한 감탄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듣는 세련된 곡이라 생각했는데, 멜로디를 몇 마디 듣고 나서 이 곡이 제 어머니도 자주 불렀던 유명한 가곡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자 감탄은 더욱더 커졌다.
남자의 내리깔린 연갈색의 속눈썹 위로, 조각난 햇빛이 어스름하게 맺혀 있었다. 시종일관 미소를 짓던 입매가 진지하다.
문득 저렇게 완전한 무표정의 그는 처음 본다는 생각에 비올레타는 조금 더 자세히 그를 바라보았다. 연갈색의 따스한 머리칼, 그리고 투명하게 비치는 청록색의 눈동자. 에비가일의 시선이 그즈음에서 멈췄다가 이내 그의 손으로 돌아갔다.
사랑의 설렘을 담은 노래가 잠시 고난을 만난 듯 휘청거리다, 곡 중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인 부분이 따스하게 흘러나왔다.
서글플 정도로 그리운, 따스함.
그리고 거짓말처럼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보다 훨씬 소박하지만 고풍스러웠던 방, 그리 크지 않은 피아노 건반 위에서 젊은 아버지의 손이 움직인다.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아버지의 곁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주위에는 부모님의 친구들이 몇 있다.
모두 다 행복하게 웃는 표정이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작았던 저는 강아지를 무릎 위에 두고 꼭 껴안은 채로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본다.
에비가일은, 아니, 비올레타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제 장갑 한 짝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릎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연분홍색의 드레스 자락 위로, 어느새 길어진 손가락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 강아지의 이름이 뭐였더라.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얀색의 부드러운 털이 솜처럼 복슬복슬했던 그 강아지는, 제가 키운 지 한 달도 안 되어 잠든 제 곁에서 죽었었다.
아홉 살의 저는 그것 때문에 3일을 꼬박 울었었는데, 열여덟 살의 저는 이제그 강아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저는, 안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하지 못했다.
기억은 이렇게나 제멋대로인데, 어째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이렇게 손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생생한 걸까. 미련한 것이다. 뿌연 먼지가 흩날리는 인쇄소 가운데 앉아서도, 저는 그랬었다.
제 시야에서 회색의 먼지들을 걷어 내고, 시커먼 벽에는 예쁜 벽지를 바르고, 험상궂은 기계 대신 아름다운 가구들을 넣고, 그리고 제 가족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 중 하나를 넣었다. 돌이킬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순간들이 어쩔 수 없이 가끔은 생각났다. 그러나 그 찰나처럼 따스한 꿈이 걷히고 나면 또다시 자신은 먼지 속에 홀로 있었다.
미련하다. 어리석다.
결국은 아무것도 닿을 수 없는데.
비올레타가 서럽고 뜨거운 한숨을 삼켰다. 죽었다. 이미 죽었다.
이미 죽었다, 너는. 고작 몇 번의 되뇜에 거짓말처럼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너무나 많이 되새겼던 사실이기에 그리 아프지도 않았다.
남자가 연주하는 노래는 비극의 순간을 넘어 다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유려하게 이어지던 선율이 끝을 향해 아득하게 높아졌다. 그리고 이내 흩어져 버리듯 멎었다.
“이제, 보이십니까?”
비올레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다른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연주는 완벽했다. 이카르트가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시는 노래였습니까?”
“……아.”
“어쩐지, 조금 그리운 눈을 하셔서요.”
“날 키워 준 유모가 즐겨 부르던 노래예요.”
그렇게 둘러대자 이카르트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 굉장히 소중한 분이셨나 봅니다.”
“……그랬어요.”
제가 얼굴조차 모르는 그 유모란 여자는 아마도 진짜 비올레타에겐 그랬을 것이다. 진정한 후에도 왠지 기분이 계속 좋지 않았다.
언제 어느 시간에 올 건지, 어떤 취향인지, 바이올린은 언제부터 할 것인지 등의 중요하지만 별 의미는 없는 대화가 오갔다. 이카르트도 그런 그녀의 기분을 배려하듯 의외로 그 외의 쓸모없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화는 그저 조용했고, 차분했다. 그러다 마치 그런 저를 구원하는 듯한 차분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노크 소리에 이어 차분한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에델가르드 공께서 오셨습니다.”
“자리를 비켜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이카르트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올레타가 그 말에 무어라 대꾸하려 입을 달싹였으나 그보다 빨리 제 뒤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그대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주인의 허락은커녕 반응조차 아직 없었음에도, 그는 마치 제 방인 양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그래서 이 방의 누구도 그것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그새를 못 참고 자기 맘대로 들어오지. 뒤쪽으로 곁눈질한 비올레타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베론 경?”
“아, 에델가르드 공.”
이카르트의 정중한 인사에 라키엘이 오만하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비올레타에게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고개가 그녀의 앞으로 비스듬하게 내려왔다.
그의 긴 손가락이 목 뒤를 살짝 스치듯 감아 제게로 당긴다. 모로 마주친 시선에 비올레타가 눈을 내리깔자, 곧장 따뜻한 숨을 뱉으며 그의 입술이 이마에 와 닿았다.
어쩐지 기분이 애매해, 평소처럼 뻔뻔하게 활짝 웃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저와 함께 남들 앞에 있으면 늘 이렇게 ‘다정한 인간이 되는 병’이 도지는 탓에, 이런 건 이미 익숙했는데도.
그래,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찰나처럼 머물던 라키엘의 입술이 떨어지며 비스듬하게 꺾여 있던 그의 고개가 들렸다.
비올레타가 아래로 향해 있던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시야를 가리던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사라지자, 맞은편에서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이 이상한 기분은 저 시선 때문이었나. 비올레타가 멍하니 그 곧은 시선을 마주하다, 문득 제 어깨를 잡는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작 라키엘은 비올레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경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경의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았노라 이전부터 공공연히 말씀하시곤 했고.”
“과찬이십니다.”
“이번에도 폐하께서 5황녀 전하의 음악 스승으로 경을 친히 지목하셨다 하던데.”
“과분하게도 그렇습니다. 베론의 영광입니다.”
그리 좋은 분위기라 할 수는 없는 삭막함이었다. 그 뒤로도 뻔한 인사치레 같은 말이 몇 번 더 오갔다. 굳이 한 번에 다 간추리자면 “잘 부탁한다.”와
“잘 알겠다.” 정도인 말이었는데, 두 남자의 말은 불필요한 길이로 이어졌다. 그리고 비올레타가 지루한 얼굴로 턱을 괼 무렵에야 끝이 났다.
비올레타가 대화가 끝난 줄도 모르는 새, 이카르트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섰다. 그리고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손을 잡아끌어 손등에 키스했다. 그 갑작스러움에 놀란 비올레타가 흠칫하며 바라보자, 이카르트가 씩 웃었다.
“근시일 내에 뵙겠습니다.”
비올레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손이 풀려났다. 그대로 우아하게 몸을 일으킨 이카르트가 라키엘에게 예를 취한 뒤, 그를 스쳐 지나갔다.
라키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비올레타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내었다. 그리고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 그녀의 맞은편에 풀썩 앉은 그는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시선에 비올레타가 의아한 듯 바라보자, 라키엘이 턱으로 그녀의 무릎께를 가리켰다.
비올레타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아. 그제야 발견한 듯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거, 블라디모로에서 잃어버렸던 거 있죠.”
제 무릎 위에 다소곳이 놓인 장갑을 집어든 비올레타가 반가운 듯 말했다.
“아까 베론 경이, 정원에서 우연히 주웠다고 하면서 갖다 줬어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거짓말에 제 스스로가 조금 가증스러워졌지만, 비올레타는 꾹 참았다. 어쩐지 장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길에 알 수 없는 약간의 가책도 느껴졌으나, 그 역시 비올레타는 꾹 참아 냈다.
생각해 보니 장갑에 제 이름을 써 논 것도 아닌데, 그것이 제 것인지 어찌 알고 가져왔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막 던진 거짓말이 영 허술했다.
이런 부분은 어서 넘어가야 했다.
“그래?”
허점이 드러나기 전에 다른 화제로 옮기려 비올레타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자 라키엘이 낮게 실소를 터트렸다. 비올레타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레 물었다.
“웬일이에요?”
“추밀원에서.”
“……말 좀 끝까지 해요. 추밀원에서 오는 길이란 거죠? 추밀원은 왜?”
“회의 때문에.”
“회의가 있으니까 갔겠죠. 아, 근데 오늘 정기 회의일 아니잖아요? 92일이라 들었는데.”
라키엘이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며 다리를 꼬았다. 여유로운 몸짓과는 다르게 미미하게 날이 선 시선에 비올레타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이틀 전 잉거스트 대공이 전사했어.”
“네?”
뜬금없이 터져 나온 말에 비올레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밀니로가 잉거스트 공국의 리에주 지방을 완전 점령했지.”
“그게 무슨…….”
리에주 지방이라면 잉거스트 공국의 절반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일어난 것조차 몰랐던 그녀로서는 그저 황당한 이야기였다.
“머지않아 잉거스트가 멸망할 거다.”
“잉거스트 대공은 펠로베르 제국의 방계 황족이잖아요. 펠로베르에서 밀니로를 두고 볼 리가…….”
“없지. 하지만 밀니로도 한계야. 곪을 대로 곪은 게 터진 거고.”
밀니로 왕국과 잉거스트 공국의 갈등은 상당히 그 뿌리가 깊었다. 불과 백 년도 안 된 신생국인 잉거스트는, 수 대 전의 펠로베르 황제가 자신이 아끼던 둘째 아들을 위해 친히 밀니로를 침공해 세운 나라였다.
그때 밀니로는 나라의 4분의 1을 펠로베르에게 순식간에 빼앗겼는데, 그 후 불과 일주일도 안 되어 자신들의 땅이었던 곳에 펠로베르의 푸른 깃발이 꽂히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잉거스트 공국령의 탄생이었다.
밀니로와 잉거스트의 갈등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다. 아직도 그때의 일주일은 잉거스트에게는 ‘건국제’ 주간으로, 밀니로에서는 ‘대재앙의 날들’로 완전히 다르게 기려지고 있었다.
밀니로와 잉거스트가 닿은 국경지대에서는 늘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잉거스트는 펠로베르를 등에 업고 곧잘 무리한 요구를 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잉거스트에 대한 밀니로의 원한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쳐도, 그들이 잉거스트를 점령한 것을 현명하다고 보기엔 힘들었다.
밀니로 왕국이 그란토니아의 가장 오래된 우방이었다면, 잉거스트 공국은 펠로베르에게 단순한 우방 이상이었다. 잉거스트의 시작은 펠로베르의 황자였으며 그 뿌리가 바로 펠로베르 황실이니 잉거스트는 그 자체로 펠로베르 황실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혈연에 끔찍한 펠로베르의 정서상 이번 일이 어떤 결과를 부르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곰곰이 생각을 되짚어 보던 비올레타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라키엘에게 되물었다.
“혹시, 밀니로가 펠로베르의 보복까지 감수할 생각은……. 아니, 설마 그 정도인 건가요?”
“그저 잉거스트에 원한풀이나 하려 했다면 어떤 시비가 붙었든 그리 대대적으로 침공하고, 그리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그리 급하게 사자를 보내올 이유가 없지.”
라키엘의 차분한 대꾸에 비올레타가 골치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잉거스트에 4분의 1을 내줬어도, 밀니로는 여전히 제네트 8왕국 중 두 번째로 큰 땅을 가진 나라였다.
펠로베르의 경계도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진 시기에 잉거스트에 거하게 분풀이 하는 것 정도야 문제도 아닐 것이고, 워낙 양국사이에 분쟁이 많았다 보니 수습할 핑계도 많을 것이다. 제아무리 펠로베르라 하더라도 그 명분마저 건드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밀니로는 이미 그럴 수 있는 지점을 지났다. 라키엘의 말대로 이미 대대적으로 침공했고, 공식적으로 점령했으며…….
“이미 중요한 건 잉거스트가 아니네요.”
“그래.”
“만약 이 모든 일이, 정말 펠로베르에 대한 선전포고에 불과한 거라면…….”
“이미 그렇게 한 것에 가깝지. 그들이 펠로베르를 상대하겠다는 게 보기에 꽤 허무맹랑해 보이는 발상이긴 하지만, 아예 가망이 없는 것도 아냐.”
“그래서, 추밀원의 결론은 뭐죠?”
그란토니아가 밀니로를 택하면 밀니로와 함께 펠로베르의 반대편에 서게 될 테고, 펠로베르를 택하면 밀니로를 잃게 될 터였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누가 봐도 펠로베르를 선택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밀니로를 선택한다고 해서 곧바로 펠로베르가 그란토니아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밀니로를 버리고 펠로베르를 선택한다고 해서 펠로베르와 영원하리란 보장도 없다.
이미 서로 믿지 못할 선례가 많았다.
비올레타가 답답한 듯 얕게 한숨을 뱉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키엘이 낮게 대꾸했다.
“육 대 오.”
“육 대 오……. 펠로베르와 밀니로 중 하나를 선택했단 거예요?”
“밀니로가 육이야.”
“의외네요.”
라키엘이 피식 웃으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1황자가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해.”
“……전쟁을요?”
“그저 두었으면 추밀원의 팔 할이 펠로베르로 쏠렸을 것을, 1황자가 아예 직접 나서서 밀니로로 선동했지.”
“당신은요?”
“애초에 밀니로였어.”
“당신도요? 펠로베르가 아니라?”
“밀니로를 버려 봤자 펠로베르는 언젠간 잃어.
하지만 밀니로를 계속 붙잡고 있어도, 펠로베르와 언젠가 거짓 우호 정도는 다시 맺을 수 있지.”
비올레타가 대강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의아한 듯 되물었다.
“하지만 1황자는 전쟁을 위해 밀니로를 지지한 게 아닌가요? 카디링거 후나 다이크 백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떻게 당신이 같이…….”
“어차피 사소한 차이는 상관없어. 큰 입장은 같으니까. 1황자가 바라는 대로 대강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다 정말 그가 원한 대로 전쟁이 일어나면요.”
그야말로 정말 나쁘지 않지. 라키엘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1황자 같은 군인에게 전쟁만큼 출세하기 좋은 기회는 없지.”
출세라는 단어에서 힘주어 빈정거린 그가, 어느덧 무표정해진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군인에게 전쟁의 공과만 돌아가는 건 아니야.”
“…….”
“전쟁의 책임도 묻지. 특히나 그 사람이 전쟁을 주창主唱한 장본인이라면 더더욱.”
“그러다 최악의 상황이 오면…….”
“모두는 하나를 생각하게 돼.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누구였나.”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도대체 이 모든 끔찍함의 원흉은 누구였나. 누구에게 이 죄를 물어야 하나.”
“…….”
“황제의 아들이라도, 거기에는 예외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