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4장>
황제가 대관식을 올린 이후 블라디모로가 열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 때문에 온 수도가 시끄러웠다.
요 며칠 수도에 있는 커피하우스에서 귀족이고 젠트리고 노동자고 떠든 얘기가 죄다 그것일 정도였다. 황후와의 결혼식은 제위에 오르기 전에 치렀고, 황제는 제 탄신일에도 블라디모로를 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블라디모로가 열리는 다음은 황제의 죽음뿐이겠거니 하고 모두가 생각했다.
황제의 탄신일마다 부디 블라디모로를 열라는 청이 빗발쳤지만 황제는 ‘불필요한 사치’라는 한마디로 모두 일축했다. 이는 현 황제의 치세에서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평가 중 하나였다.
블라디모로를 한 번여는 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으므로.
서대륙 귀퉁이에 있던 작은 소왕국이 제국이 된 지 어느덧 600년이 넘었다. 에델가르드가 황가와 함께 800년 전 그 작은 소왕국의 서막을 함께했다면, 블라디모로는 600년 전 제국의 시작을 상징했다. 그 드높은 위세와, 그 고고한 사치로 쌓아올린 황제만을 위한 위대한 건축물.
그 블라디모로가 생기고 6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블라디모로가 황제가 아닌 주인공을 위해 열린 일은 열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것은 불과 100년 전 폐위된 폭군의 수많은 죄목 중 하나를 차지할 정도였고, 치세가 훌륭했던 황제마저도 황태자의 결혼식에 블라디모로를 열었다는 이유로 저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황후가 어렵게 출산한 황녀의 첫 탄신일, 아끼는 황자의 결혼식, 총애하던 황비의 장례, 일찍 죽은 어린 딸의 장례…….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주인공이 황제가 아니란 것에서 이미 어떤 애틋한 명분을 들이대도 합당할 수가 없었다.
모두 사사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갖다 대자마자 부서질 그런 명분 한 조각조차 없다. 5황녀는 성년을 맞은 것도 아니고, 누구나 매해 한 번씩 돌아오는 생일조차도 아니고, 당연히 죽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황궁에 공식적으로 ‘존재’하게 됐을 뿐이다.
유폐가 그녀에게 부당했고, 모두가 감금당했던 그녀의 어린 시절을 동정한다고 해도 그뿐이다. 그녀의 유폐는 애초에 황실의 관습에 의한 것이었고, 황제의 결정이었다.
블라디모로를 5황녀를 위해 여는 것이 유폐에 대한 반대급부라며 명확한 주제로 말하는 것은 황제에게 반하는 것이고 황실의 관습을 뒤흔드는 것이라 불가능했다. 즉, 사정이야 어떻든 공식적인 명분은 비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끄러운 것이다. 장장 24년 만에, 황제의 탄신일에도 열리지 않고 불과 몇 달 전 황태자가 죽어도 감히 언급조차 될 수 없었던 블라디모로가 한낱 황녀를 위해 명분도 없이 열린다.
황궁을 둘러싼 성벽에는 익명의 투서가 연일 붙었다. 수도의 유명한 귀족들 중 일부는 가문의 인장을 찍은 반대 성명을 공식 발표했고 의식 있는 지식인이라면 신문사에 반대하는 투고를 보냈다.
그들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회 전날 아침, 결국 황제는 수도에서 발간되는 아홉 개의 신문 중 다섯 개를 강제로 폐간시키고 신문사 몇 개를 불태웠다. 현 황제로서는 그리 강한 대응이 아니었으나 그 약소한 진압 직후 거짓말처럼 수도가 잠잠해졌다.
그들은 여전히 황제의 공포를 기억했고, 그것이 또 다른 공포의 서막일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제 탄신일조차 블라디모로를 닫아 두던 황제가 명분도 없이 황녀 하나를 위해 블라디모로를 연다는 것은 그 황녀가 황제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증명했다. 반발이 그리 쉽게 가라앉은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펜으로 물어뜯기엔 이미 너무나 위험한 상대.
마치 구전동화처럼 평민들 사이에서나 허무맹랑하게 떠돌던 유폐된 백치 황녀의 이야기는 이렇게 수면 위로 거대하게 떠올랐다. 귀족을 통해, 젠트리를 통해 시끄럽게 내려간 이야기임에도 구구절절한 정치의 이해관계를 알 리 없는 평민들은 그저 그 불쌍한 황녀가 백치가 아니라는 것에 놀라고 그녀의 억울한 인생에 대한 동정심으로 대부분 황제를 지지했다.
게다가 그녀는 불과 몇 달 전 친오라비와 외숙부를 잃지 않았던가? 황제가 5황녀를 홀대하지 않아 다행이다. 5황녀는 가장 성대한 보상을 받아 마땅하다.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시녀들을 따로 태우고 저 홀로 탄 마차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비올레타는 제 앞의 비어 있는 자리를 멀거니 바라보며 밀로일라가 아침에 고했던 며칠간의 정세를 차분하게 생각했다.
시작부터 논란과 반발로 시작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다. 아니, 어쩌면 가장 최상의 시작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황제의 보상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머리 아프고 피곤하고 불편하긴 하지만. 귀족이나 젠트리에겐 제 존재감을 각인시킨 것은 둘째 치고, 평민들의 그토록 대대적이고 호의적인 여론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황제가 제게 그 민심까지 안겨 준 셈이다.
제 치세 중 몇 안 되게 선정善政이라 평가받는 것을 버리면서까지.
하지만 정말 황제가 이번 일로 잃은 것이 있긴 한가?
비올레타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신문 폐간에 건물까지 몇 개 불태워 얼마간 물밑에서 지식인들의 비판은 계속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황권은 애초에 펜대 든 자들의 지지를 업고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황권은 황권 그 자체로 이미 공고하다. 100년 전부터 격렬하게 대립하던 왕당파와 귀족파의 경계는 이미 선대 황제부터 모호해져 단어조차 잊힌 지 오래고, 대놓고 황제의 반대편에 서 있는 멍청이는 이제 없다.
이런 반발 정도야 그들의 가문에서, 혹은 그들의 지성에서 오는 의무감 정도일 것이다.
오히려 황제는 무언가를 얻었다. 비올레타는 편안하게 뒤로 기대며 어둑해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황제궁에 진입한 마차가 속도를 줄여 느릿하게 달리고 있다. 제 아래 땅이 어디인지를 인식한 것만으로도, 역한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본능적인 불편함.
황제가 얻은 것. 입안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비올레타는 손을 살짝 뻗어 자그마한 커튼을 닫았다. 저를 불편하게 흔드는 광경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머리가 조금 더 차분해졌다.
황제는 시늉만 해도 충분할 일을 결국 실행했다. 평민들은 블라디모로가 대단한 줄은 알아도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른다.
블라디모로를 열려는 시늉만 했어도 귀족들은 충분히 시끄럽게 반응하겠지만, 성사되지 못한 것만으로도 평민들은 황제의 태도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낄 것이다.
황제가 사실은 황태자를 미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은 몇 년 전부터 수도에 공공연히 떠돌던 것이었다. 그게 밉다 못해 죽게 내버려 둘 정도란 것은 몰랐지만. 황태자의 죽음 이후로 그 소문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황태자의 사후 그가 보였던 무관심한 태도만으로도 무정한 아비라는 평가를 받기에는 충분했다.
어쩌면 그 의혹을 일축시킨 건지도 모른다. 아니, 일축됐을 것이다. 황태자의 동복 여동생이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리고 충분히 ‘아버지’ 같아 보이겠지. 분명 ‘비올레타’가 얻은 것이 훨씬 더 큰데, 속이 뒤틀렸다.
그녀의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점점 천천히 달리던 마차는 이윽고 멈추었다. 마차와 함께 끝없이 물고 물리던 그녀의 생각들도 멈췄다.
곧바로 문이 열리지 않는 걸로 봐서 아직도 누군가의 입장이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주인공이니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보다 가장 늦게 입장해야 했다.
밖에서 밀로일라가 정중하게 기다리시라 고하는 소리에 비올레타가 짧게 대답했다. 그냥 도착하면 도착하는 대로 들어가면 좀 편할까. 기껏 도착해서는 시간 맞춘답시고 이리 기다리는 모양이 더 우스웠다.
지루하게 발을 까딱거리며 비올레타는 제 드레스를 점검했다.
불편하고 복잡한 속이야 어찌 됐든, 아그네스가 고고하게 맞춰놓은 표정은 보는 사람이 없어도 그대로였고, 드레스를 다듬는 손끝도 망설임 없다.
이 정도만 계속 유지한다면…….
비올레타는 제 정신을 붙잡듯 눈을 세게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때, 비올레타를 다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얄미울 정도로 매끄러운 발음으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전하.”
그녀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비올레타는 정중하게 잡아 오는 손에 이끌리듯 마차에서 내려졌다.
비올레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혼자 입장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칠흑같이 검고 짧은 머리는 평소처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길고 곧은 몸을 딱 맞게 감싸는 하얀 슈트는 오늘따라 유독 따뜻한 날씨 때문인지 베스트 차림이었다.
별다른 꾸밈없이 단정하기만 한데도 남자는 하얀색 때문인지 아니면 저 잘나 빠진 얼굴 때문인지 화려한 인상을 풍겼다. 비올레타가 이젠 무덤덤하게 감탄했다.
그래, 정말 껍데기는 근사하다.
“에스코트, 할 수 있어요?”
“내가 아니면 이 손을 누가 잡게 할까.”
라키엘이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듯 잡으며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빙글거리는 웃음이 그녀에게는 음험하게 느껴졌지만, 사정 모르는 이가 보면 그저 사랑에 눈먼 남자가 내뱉을 법한 독점욕으로 가득한 대사였다.
비올레타가 작게 코웃음을 치고는 새침하게 라키엘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어 다시 그의 손 위로 제대로 올렸다. 라키엘이 가소로운 듯 피식 웃으며 비올레타가 올려놓은 손을 세게 한 번 맞잡았다.
하여간 지는 법이 없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을 살짝 흘기고는, 시종의 안내에 따라 입구로 들어섰다.
입구로부터 이어지는 고풍스러운 복도는 오늘 연회가 있는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한산했다. 이미 모든 사람이 입장하고 난 뒤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비올레타의 시선이 낯설게 복도를 응시했다.
벽에 바짝 붙은 채 각자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시종들이 비올레타 일행이 앞을 지나갈 때마다 비올레타의 입장을 외쳤다. 높은 천장을 치고 메아리처럼 연이어 울리는 소리에 맥박이 점차 빨라진다.
점점 더, 가까워진다. 문 안쪽에서 마지막 시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올레타 드 그란토니안 모레 에델가르드 전하십니다!”
“에델가르드 공작이십니다!”
그 마지막 외침과 함께 육중한 문이 세월을 반증하듯 끼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틈에 불과했던 시야가 점점 더 넓어진다. 한참 어두운 동굴을 걷다 갑자기 입구를 발견한 것처럼, 홀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걸어온 복도가 전혀 어둡지 않았음에도.
비올레타는 제 손 아래를 단단하게 받친 라키엘의 손을, 무의식적으로 의지하듯 잡았다. 기대 오듯 제 손을 누르는 그 가벼운 무게에 라키엘이 낮게 소리 내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이 구렁텅이 속에 밀어 넣은 게 누군데, 정작 제가 유일하게 의지할 게 이 능구렁이 같은 작자의 손뿐이라니.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힘주어 맞잡아 주는 손에 비올레타는 비로소 안정을 느꼈다. 이제,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비올레타는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리고.
비올레타가 빛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너무 밝아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빛 속으로.
그란토니아에서 연회의 시작을 선언하는 첫 축배는 오로지 주인공만의 것이었다. 이 점이 특별할 수 있는 이유는 그란토니아를 제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첫 축배가 오로지 가장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에는 황실마저도 예외가 없었다.
이런 관습은 그란토니아가 예로부터 부인과 자녀를 비교적 존중하는 풍토라 가능한 일이었는데, 주인공이 황제의 정비든 직계 황족이든 제아무리 황제라도 그때는 연회의 참석자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나마 황제의 가장 고귀한 지위를 확인시키는 최소한의 것은 그보다 더 늦게 문을 통과하는 자가 없다는 것. 그것은 누군가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인식하기도 전에 당연히 암묵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비올레타가 들어섰을 때 느낀 어딘가 이질적인 고요함은 그저 고귀한 주인공을 위해 지켜 주는 침묵과는 조금 달랐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그 고요한 물밑 아래의 혼란을 인식한 찰나였다. 화려한 카펫이 정교하게 깔린 긴 계단을 따라 내려간 시선 속에 보인 것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천장에 웅장하게 매달린 샹들리에의 수많은 크리스탈 조각들 사이로, 찬란한 빛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그 헤아릴 수 없는 빛의 단편들만큼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맹수가 조용히 웃고 있었다. 마치, 아직 배가 불러 사냥감을 그저 방관하고 있는 것 같은 포식자의 나른한 미소로.
이쯤 되면 보상을 하겠다는 건지 괴롭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비올레타가 입안으로 허탈한 웃음을 삼켰다.
열여덟이나 먹고 나타난 황녀 하나에 가장 존귀한 자를 위한 규칙이 깨졌다. 가장 마지막에 문을 통과해야 할 황제가 황녀를 기다리고, 황녀가 가장 마지막에 등장했다.
그것도 블라디모로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애써 우아한 척 분주하게 저와 황제 사이를 떠돈다. 황제의 기행 때문인지, 처음 보는 황녀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 라키엘이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마치 정신 차리라는 것처럼. 비올레타가 그에 대답하듯 맞잡은 손에 한 번 꽉 힘을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문이 육중한 소음을 내며 닫혔다.
이제, 돌아 나갈 수 없다. 사람들은 이미 좌우로 갈라져 서서 길을 터놓았고 자신이 할 일은 그 길을 그저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계단 위로 잘 훈련된 우아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윽고 마지막 계단을 밟자 라키엘이 정중히 손을 놓았다.
그 길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잔잔한 파도처럼 사람들이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황제가 천천히 마주 걸어온다. 그리고 손이 붙잡혔다.
아비의 탈을 쓴 괴물의 손. 맥박이 불쾌하게 뛰기 시작했다.
“어서 오너라, 내 딸.”
차갑고 진득한 눈이 더없이 다정하게 휘어졌다. 비올레타가 입매를 부드럽게 끌어 올려 마주 웃었다. 제 모든 진심을 끌어모아서, 최대한 진짜 같은 웃음으로. 점점 더 맥박이 빨라졌다. 상관없었다.
저 역시 황제의 딸의 탈을 쓰고, 황제의 피를 영원히 끊어 놓을 반역자의 공범이니까.
“폐하.”
비올레타가 공손하게 부르며 예를 취하고 고개를 들자 황제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 손등에 건조하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은 부분 위로 솜털이 이는 것처럼 미약한 소름이 돋았다. 황제가 비올레타를 천천히 이끌었다. 600여 년간 황제가 황제의 관을 이어받아 온, 블라디모로의 가장 고귀한 곳으로.
황족들에게도 고개 한번 깊게 숙이는 법이 없는 황제의 시종장이 종종걸음으로 기듯이 단으로 올라와 황제에게 술과 금으로 된 잔 두 개가 놓인 화려한 쟁반을 내밀었다. 황제는 친히 잔을 제 딸의 손에 쥐여 주고, 병을 들어 그 잔에 먼저 샴페인을 채웠다.
귀족들에게 제각기 샴페인 글라스가 쥐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그런 황제의 모습에 고요한 소란이 일었다. 그는 제 잔을 마저 채우고, 부드럽지만 위압적인 목소리로 청중에게 명했다.
“모두 잔을 들라.”
화려한 잔 속에서 찰랑거리는 액체를 지나, 일제히 투명한 잔을 가슴께 위로 올린 귀족들에 비올레타의 시선이 멎었다. 샹들리에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빛들이 그들의 잔 속에서 산란하게 부서졌다. 그 눈부신 광경을 잠시간 숨마저 멈춘 채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이내 제 잔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며 선창했다.
“제국의 찬란한 영광을 위해!”
일개 황녀가 고작 저를 위한 파티에서 내뱉기엔 우스워 보일 정도로 지나치게 범국가적이고 장대한 축배사였으나, 블라디모로에서 황제가 아닌 개인이 감히 축배―그것도 처음의―를 들며 하기에는 그나마 적절한 편에 속했다.
“제국의 찬란한 영광을 위해!”
귀족들이 일제히 복창하며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비올레타는 제 입가로 잔을 가져가 한 번에 쭉 들이켰다.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임에도 제법 우아하게 들이켜니 일부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흥미로운 시선들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황제가 시종장에게 손짓하자 곧 블라디모로에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자신이 지나왔던 그 길이 사람들이 뒤섞이면서 이내 사라진다.
“첫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과분할 정도입니다, 폐하.”
정말이지 지나치게 과분해서 외줄을 타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첫 공식 석상인데. 비올레타는 그런 제 속이야 어떻든 일단 수줍게 웃으며 감사의 의미로 황제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 네 속마음 정도야 뻔히 알겠다는 듯 황제가 얕게 웃고는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잔을 비웠다. 그 시선을 비올레타의 시선이 천천히 따르고, 이내 비올레타가 순진하게 입을 열었다.
“모후께서도 감동하실 겁니다. 폐하께서 친히 제게 보여 주신 이 과분한 정성에.”
감정 한 점 없이 서늘한 시선이 파사칼리아에게서 거둬져 비올레타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네 어미는 내가 죽어야 감동할 것이다.”
황제가 빙그레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에 비올레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황제가 이렇게 말한 것만으로도, 파사칼리아에게 반역혐의가 씌워질 수 있었다. 비올레타가 무어라 황망하게 아뢰려는 것을 막듯이 황제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타이르듯 나직하게 말했다.
“블라디모로에서 축배를 든 것에 무게 두지 마라.”
“아직도 제가 주제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폐하.”
“어차피 진짜 연회는 내가 없어져야 시작되니, 결국 진짜 축배도 내가 든 것이지. 그렇지 않느냐?”
블라디모로에 완벽한 예외는 있을 수 없지. 황제가 그렇게 덧붙이고 단 아래로 유유히 걸어 내려갔다. 인파가 좌우로 갈리며 길이 생겨났다가, 또다시 인파에 묻혀 사라지는 일련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비올레타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밀로일라였다.
밀로일라는 감히 비올레타가 서 있는 곳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몇 칸 아래의 계단에 서서 겨우 드레스 자락을 당겼다. 비올레타가 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첫 음악은 왈츠라고 해요.”
“그래?”
“에델가르드 공과 추실 거죠?”
어쩐지 저렇게 당연하게 물어보면 왠지 그 예상을 깨트리고 싶어진다. 비올레타는 계단 중간에 멈춰서 파사칼리아와 함께 있는 라키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다는 게…….
“에델가르드 공이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아, 아니.”
비올레타는 못마땅한 눈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는 일로벨라 너머, 다정하게 웃고 있는 빌키어스와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이 시점에서 눈을 마주친 게 영 찝찝해 비올레타는 곧바로 고개를 홱 돌리며 마침 제 쪽을 바라보고 있던 라키엘에게 이쪽으로 오라 눈짓했다.
아직 남의 발이나 신 나게 밟아 대는 수준이니―재능이 없다고는 생각 안 한다.― 라키엘이 아닌 누군가를 희생시킬 순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첫 춤 뒤에는 인사만 받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테니까, 단 한 번만 춘다면 라키엘과 하는 것이 대외적으로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 어느새 제 앞에 도착한 라키엘이 서서히 바뀌는 음악을 들으며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빙글빙글 돌며 또 신 나게 밟힐 생각하니까 새삼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었다. 라키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포기한 듯 내뱉었다.
“……어차피 네가 네 발을 신경 쓴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었지.”
“며칠 전에 그래서 세 번이나…… 평소보다 덜 밟았잖아요.”
“세 번을 덜 밟아서 열네 번을 밟아? 차라리 그냥 그 세 번 더 밟고 편하게 해. 겉으로 그럴듯해 보이기라도 하게.”
본인이 굳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 꼭 그러도록 해야겠다. 비올레타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자 라키엘의 입가에 걸려 있던 대외용 미소가 살짝 비틀렸다.
이윽고 음악은 몰펜바흐의 우아한 왈츠곡의 전주로 바뀌었고, 라키엘에 이끌려 걸어간 홀 중앙은 마치 일부러 원을 만든 것처럼, 사람들과 제법 떨어진 채 둥글게 둘러싸여 있었다. 비올레타는 그 부담스러운 환경 대신 라키엘에게만 집중하려 애써 노력했다.
저 얼굴이 결코 그리 쉽고 편안한 얼굴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탄하던 새 라키엘이 멀어졌다.
라키엘이 손을 놓고 뒤로 몇 걸음 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비올레타가 조금 새침한 얼굴로 살짝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마냥 수줍어하면 촌스러워 보일 테고, 마냥 도도해도 좀 재수 없어 보일 것 같아 어찌하다 보니 애매해져 버렸지만, 멀찍이 보이는 아그네스의 흐뭇한 얼굴을 보니 이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았다.
라키엘이 다가와 한쪽 손을 잡고 나머지 손으로 등을 단단하게 받치자 마치 맞춘 듯 바이올린의 멜로디가 주를 이루던 낭만적인 서주가 끝났다. 이어서 모든 악기가 만나는 웅장한 곡의 시작과 함께 몸이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작과 함께, 라키엘의 발이 콱 짓밟혔다.
“오늘따라 잘하는군.”
안 어울리는 가식적인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라키엘이 꽉 다문 잇새로 내뱉었다.
“스승이 훌륭하니까요.”
비올레타가 생긋 웃으며 라키엘을 추켜세우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라키엘의 발이 또 한 번 짓밟혔다. 라키엘의 입가가 비올레타에게나 보일 만큼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그놈의 스승을 찾아내서 밟아 버리고 싶은 표정이었다.
어쩌겠어, 그게 자긴데.
“마음 놓고 춤추라고 했지 온 마음을 다해 내 발을 밟으라고 한 적은 없는데.”
“제 온 마음을 걸고 맹세하는데 전 라키엘의 발을 일부러 밟은 적이 없답니다.”
답지 않게 이름까지 들먹이는 사근사근한 말투는 오히려 라키엘의 짜증을 배가시켰다.
“네 그 무거운 구두에 내가 금을 얼마나 들이부었는지 알아?”
“모르겠네요. 전 지금 지극히 발이 가벼워서.”
맹세컨대 절대 고의는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편안해서 그런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겁먹고 멈칫했을 그녀였지만, 적어도 지금의 그녀는 거침없었다. 왈츠곡의 절정과 함께 파트너끼리 떨어지는 순간 라키엘이 손만 그대로 잡은 채 화풀이하듯 그녀를 내던지듯 밀어 버렸지만, 그녀는 얄미울 정도로 우아하게 빙그르르 돌아 라키엘의 품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비올레타는 순간 스스로에게 감격했다.
마음 놓고 발을 놀려 댄 덕에 몸은 가볍고 발은 사뿐했지만 누군가는 이제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올레타는 그가 그러든 말든 음악이 끝나는 것과 함께 유려한 동작으로 라키엘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마무리로 한 번 더 밟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사실 그녀도 좀 미안하긴 했다. 구두는 제가 여태 신은 것 중에 제일 무거웠고 몸은 역대 합을 맞춘 것 중 가장 제어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따라서 그의 발에 가해진 고통은……. 살짝 제 장난 아닌 장난질에 미안해지려는데, 문득 천장을 아득하게 울리는 박수 소리에 마치 졸다가 고개를 살짝 놓친 듯 정신이 들었다.
다시 라키엘의 뒤로 자신들을 둘러싼 군중이 보였다. 비올레타가 제 눈에 막을 덧씌우듯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저를 향한 수백 개의 시선에는 호의와 악의와 질시와 무관심이 한데 뒤섞여 있어, 결국엔 아무것도 여기까지 와 닿지 않았다.
그래, 아무것도.
라키엘이 아무렇지 않은 걸음으로 저에게 다가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제게 뻗어오는 손을 천천히 잡았다.
중앙에서 파티의 주인인 비올레타가 물러나자, 홀에는 조금 더 경쾌해진 음악이 흘렀다. 어린 영윤들과 영애들이 어느새 짝을 지은 건지 하나둘씩 중앙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중앙의 분위기는 들뜨기 시작했지만, 반대로 그 주위는 조금 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라키엘이 어딘가로 바쁘게 사라지고 시녀들과 함께 남은 비올레타는 지나가는 시종을 세워 샴페인을 한 잔 더 들이켰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네요.”
홀을 가는 눈으로 살펴보던 밀로일라가 중얼거렸다. 다가올 듯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의 기운이 어색하게 감돌았다. 귀족들은 추밀원의 의원들을 바라보고 있고, 의원들은 아직 탐색하듯 제 자리에서 딴청을 부렸다.
처음이야, 누구나 피하고 싶겠지. 이 수백 개의 시선 앞에서 처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 향후 노선이 제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어떻게 재단되어 버릴지 알 수가 없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얄궂네.”
비올레타가 나직하게 내뱉고는 곁에 선 루이즈를 바라보았다. 사실, 첫 타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것에는 라키엘도 이미 동의했다. 마침 고맙게도 루이즈가 누군가를 향해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달려가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비올레타가 다정하게 물었다.
“가족 때문에 그러니?”
네 부모님에게 가도 되고, 네 언니에게 가면 더 좋고. 비올레타는 누가 되었든 친절한 고용주의 자세로 따라가 줄 생각이었다. 루이즈에게서 재빠르게 대답이 돌아왔다.
“전하, 저기 연한 하늘색 드레스 입은 예쁜 여자 보이세요?”
루이즈가 가리킨 곳에 있는 젊은 여자는 정말 예뻤다. 루이즈가 귀엽고 앙증맞게 생긴 반면, 그녀는 루이즈와 묘하게 닮았으면서도 아름답고, 차분한 기품이 느껴졌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내심 놀란 비올레타가 내색 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실은 너무 급하게 입궁하면서 언니를 못 만나고 왔거든요. 벌써 언니를 못 만난 지 석 달은 됐을지도 몰라요. 아, 저희 언니는 결혼했거든요.”
이미 알고 있었다. 루이즈의 언니가 클레이런스 후의 장자와 결혼한 것은. 사실 루이즈란 이름은 몰랐어도 몬드리올가의 장녀 이름은 세간에서도 유명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클레이언스 후의 장자 그레이스가 몬드리올 백의 장녀 그레이스와 결혼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평생을 조용히 품위 있게 살아온 것과는 별개로 그들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레이스와 그레이스. 그들은 동명이인이었다.
남녀 동명이인도 흔하지 않은데, 그 동명이인이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니, 잘 팔릴 만한 러브스토리지. 비올레타는 여자 그레이스에게서, 제복을 입은 제법 준수한 남자―아마 남자 그레이스일―로, 그리고 그 남자에게서 그들 곁의 반백발의 군인으로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바로 앞에 있는데, 보고 싶으면 봐야지.”
“정말요? 저 잠깐 갔다 와도 될까요, 전하?”
“아니, 나도 네 언니 만나 보고 싶은데. 괜찮지?
루이즈가 정말 기쁘다는 듯 고개를 격하게 위아래로 끄덕여 제 속에 반쯤 남아 있는 양심이 따가웠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어린애 이용하시면 못씁니다. 신 나서 앞으로 걸어가는 루이즈를 같이 따르며 디아나가 뒤에서 나무라듯 작게 속삭였다. 그거야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비올레타도 할 말은 있었다. 비올레타가 씩 웃으며 밀로일라에게 물었다.
“네이튼 자작이 어디 계시지? 디아나의 가족부터 만나 보는 건 어떨까?”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주시죠.”
“자작께선 저기 계십니다, 전하.”
“밀로일라, 그 손 내려.”
디아나의 아버지는 정말 궁에 쳐들어오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 디아나의 가족 상봉은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는 걸로 시작해도 사정을 다 안다면 아무도 자작을 욕하지 않을 것이다.
제 스스로도 잘못한 걸 알기는 하는지, 디아나는 밀로일라가 씩 웃으며 제 부모님을 가리킨 것만으로 사색이 되어 밀로일라의 손을 서둘러 내렸다. 그러나 이젠 소용없었다. 이미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뒤에서 그녀들이 무어라 떠들든 들떠서 앞서나가던 루이즈는 제 언니와 점점 더 가까워지자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안겼다. 물론 그 직후 비올레타를 발견한 그레이스에 의해 바로 떼어졌지만. 바로 앞에 있던 그레이스와 그레이스가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 그를 이어 뒤쪽에 비껴서 있던 후작이 약식으로 예를 취했다.
충분히 정중하지만 선을 긋는 듯한 그 인사에 비올레타가 나긋하게 웃었다.
“처음 뵙는군요.”
“5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클레이런스, 므노비스령의 총독으로 제국의 남서부 해역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5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대위, 클레이런스 가의 장자 그레이스 드 클레이런스입니다.”
“5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레이스 클레이런스입니다.”
부부를 부드럽게 한번 번갈아 본 비올레타가 후작을 바라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군인의 눈에 옅은 귀찮음이 떠올랐다.
클레이런스의 잠룡, 크로팔가의 영웅, 제국 해군의 살아 있는 전설…….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고도 많지만, 사실 그를 봤을 때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전대 황제의 황태자, 즉 지금의 황제에게는 형이 되고, 또 마땅히 황제가 되었어야 할 카드리어의 사촌 형이었다는 것.
클레이런스는 선대 황제 시절, 차기 황제의 모계 집안으로서 마땅히 제가 누려야 할 권세를 누렸다. 선대 후작은 재상으로 에델가르드 다음 가는 4후작 중 최고의 권력을 누렸으며, 현 후작은 당시 작위를 승계받기도 전인 젊은 나이에 수도 사령부의 사령관을 역임할 만큼 출세 가도를 달렸다.
물론, 현 황제가 제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
현 황제가 황위에 오르면서 재상이라는 단어는 사라졌고, 선대 후작은 추락 끝에 제 여동생인 황후와 조카인 황자, 황녀들이 끝내 모두 처참하게 죽는 꼴을 목도한 뒤 저택에 돌아와 음독자살했다. 그렇게 가문이 그대로 사라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몰락을 겪으면서 현 후작은 20년 전 유배처럼 해적 떼가 득실거리는 크로팔가 해역의 제독으로 쫓겨났는데, 정작 그는 크로팔가 해전에서 보란 듯이 대승하며 황제가 죽으라 보낸 곳에서 죽이지 못할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가문도 당연히 반쯤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그가 본래 당연히 누렸을 영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는 평생 모든 것을 고사하고 스스로 변방을 전전해야 했으며,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므노비스령의 총독을 자처해 아직도 변방에서 열흘이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산다.
그리고 그 모든 뒤틀림의 시초에는, 현 황제를 황제로 만든 에델가르드가 있었다. 물론 황제의 지나친 숙청에 에델가르드조차 곧바로 등을 돌렸다 해도 그 시작이 에델가르드임은 변하지 않았다.
그 에델가르드를 제 이름에 새긴 황녀가 클레이런스의 가주에게 걸어갈 때부터 설마 하고 있던 시선들은 온통 경악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정작 본인의 눈은 약간의 귀찮음을 제하면 담담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제가 의아해졌다.
“몬드리올 영애가 5황녀 전하의 시녀가 됐을 줄은 몰랐군요.”
골치 아픈 듯 루이즈를 힐끗 바라본 후작이 이내 점잖게 웃으며 비올레타를 응시했다.
“제가 황녀 전하께 첫인사를 드린 것 아십니까?”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제가 원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아시겠군요.”
점잖게 웃는 얼굴과 달리 날카로운 시선과 무례할 정도로 직설적인 말이 비올레타에게 꽂혔다. 초면에 인사하기 싫다는 말을 대놓고 들을 줄이야. 비올레타가 난처한 속을 가까스로 삼키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제가 원했다는 건 아시겠네요.”
“제 의지는 무시하셔도 좋은 것입니까?”
“결코 무시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제 의지가 클레이런스 후의 의지에 우선한다는 것은 여기 참석한 모든 이가 찬성하리라 생각합니다. 아, 오해는 말고 들으세요.”
“초면에 이리 사람 시선 끌어모아 저를 곤란하게 하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후작은 거의 모든 말을 웃으며 대놓고 했다. 비올레타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보시다시피 제 시녀가 클레이런스 후의 아드님의 부인의 동생이 되어.”
내 시녀가 댁 며느리 동생이지 않느냐는 말을 비올레타가 굳이 따박따박 풀어서 말하고 있는 것은 괜한 저항감이 들어서였다. 본래는 순진하게 인사나 살짝 하고 시선이나 모은 뒤 사라질 생각이었는데, 이젠 다 글러먹었다. 후작의 날선 눈이 헛웃음으로 잠시 흐트러졌다.
“일개 시녀가 제 가족 보는 데 황녀 전하께서 고귀한 걸음 함께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거야 제 맘이지. 비올레타가 애써 웃으며 입을 열려는데 아까 사라졌던 라키엘이 언제 온 건지 불쑥 끼어들었다.
“스승님, 그쯤 해 두시죠. 연회가 생전 처음인 아입니다.”
“아, 각하.”
“차마 보기 거북한 그 인사 좀 안 하시면 아니 됩니까? 일부러 하시는 거 다 압니다.”
“너야말로 그 시건방진 언사부터 어떻게 해라.”
“제 위치가 워낙 시건방진 자리라, 어쩔 수가 없네요.”
“건방진 놈.”
비올레타가 멍한 눈으로 둘을 훑어보았다. 스승은 뭐고, 이 묘하게 친근한 인사는…….
“네가 졸라대 책 한 권 가르친 것도 지긋지긋했다. 혹여 네 사촌까지 내게 들이밀 생각 마라.”
비올레타는 그제야 아까 그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비올레타의 경직된 시선이 후작과 라키엘을 번갈아 훑었다. 라키엘이 피식 웃었다.
“가르치면 진득하게 잘 배우니 가르칠 맛 나실 겁니다.”
진득하다는 말은 대체 누가 했는데? 비올레타가 눈빛으로 라키엘에게 있는 힘껏 항변했지만 라키엘은 아무것도 못 본 양 고개를 홱 돌렸다.
“네가 못 배워 내가 싫어했느냐?”
“내심 저 좋아하시는 거 다 아니,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 마시죠.”
“어찌 그리 성정이 뻔뻔하냐. 네 아비 반만 닮지.”
“스승이 훌륭하니, 오죽하겠습니까.”
비올레타를 흘끗 보며 하는 말에 비올레타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리며 그레이스 부부 쪽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라키엘이 그 자연스럽게 내빼는 도망을 보고 우스운 듯 피식 웃었다.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얄팍한 수로 무슨 생각하는지는 잘 알겠다만…….”
“정말 잘 아시겠습니까?”
“……알고 싶지도 않다. 불쌍하게 갇혀 살던 계집아이 기껏 꺼내서 밀어 넣는다는 게 고작 여기냐?”
“블라디모로, 세상에 이곳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잘 데리고 있다가, 시집이나 잘 보내라. 아직은 결혼이나 잘하면 행복한 게 여자 인생 아니냐. 로드리고 후도 아직 미혼이고, 추밀원에 괜찮은 영윤들도 있다. 불쌍한 아이 꼬여내 괜히 인생 망쳐 놓지 말란 얘기다. 영 맹랑한 것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불쌍한 모양이 아니긴 하다만.”
“제일 괜찮은 것이 스승님 아드님인데, 아쉽게도 이미 임자가 있고. 그 외에는 제 눈에 안 찹니다.”
“라키엘, 순리대로 살면 안 되겠느냐?”
후작이 지친 듯 얼굴을 쓸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라키엘의 얼굴에서 거짓말처럼 장난기가 사라졌다.
“순리는 이미 뒤틀렸습니다, 스승님.”
“내가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저는 감히 스승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뒤틀린 순리를 스승님께서는 뼈저리게 겪지 않으셨습니까.”
“라키엘.”
“스승님, 그게 순리가 맞긴 합니까?”
라키엘이 잇새로 씹어뱉듯 나직하게 내뱉는 말에 후작의 찌푸려진 미간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결코 스승님이 순순히 엎드려 사신 것만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느냐? 그럼 내가 여전히 네 죽은 조부의 유령이라도 잡아 그 목을 조르고 싶은 것도 알고 있느냐?”
“정말 목을 조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지 않으십니까?”
“지금 내가 네 목을 조르면 그 입을 좀 닥칠 테냐?”
서늘한 눈으로 제 스승의 눈을 마주하던 라키엘이 후작의 위협 어린 말에 씩 웃었다.
“스승님은 저를 외면하지 못하십니다. 언제쯤 인정하시겠습니까?”
“못하겠다. 죽을 때까지. 너는 어찌 나를 이리 피곤하게 하느냐.”
후작이 매몰차게 내뱉고는 성가신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에도 라키엘이 빙그레 웃으며 가만히 서 있자, 더 말하기도 귀찮은지 홱 뒤돌아 만찬석 쪽을 향해 사라졌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을 구실로 클레이런스 후 앞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그레이스 부부에게 밀로일라와 디아나를 소개하고 있던 루이즈가 비올레타를 보고 반색했다.
“인사 다 나누셨어요, 전하?”
“어……. 아마도?”
“후작 각하 진짜 무섭게 생겼죠! 말씀하시는 것도 뭔가 무섭고, 저도 언니 약혼할 때 처음 뵙고 엄청, 아…….”
비올레타도 물론 동감했지만 문제는 바로 옆에 지금 그 사람 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비올레타가 눈짓하자 문득 생각난 듯 남자 그레이스를 흘끗 본 루이즈가 흠칫하며 말을 멈췄다. 남자 그레이스가 사람 좋게 웃으며 비올레타에게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무서운 분이십니다.”
비올레타가 그 말에 부러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클레이런스의 하나밖에 없는 후계였다.
지극히 중요한 사람들 중 하나였고, 따라서 그에게 비칠 첫인상 역시 중요했다. 친절하고 예의 바르면서도, 친근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격의 없고 편안한 모습도 필요하다.
보통 영애가 초면인 사이에 고작 말 두 마디 만에 소리 내 웃는 법은 없으니 이 정도까지가 적당한 선이리라. 비올레타가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다시 인사했다.
“인사를 제대로 못 나눴죠. 반가워요, 클레이런스 경. 클레이런스 후를 닮아 미남이네요.”
“영광입니다, 전하.”
“전하처럼 아름다우신 분이 남편을 칭찬하니 괜히 불안하네요. 이 이가 정말 착각할지도 모른답니다.”
“어머나, 부군께선 정말로 준수한데요. 그러니까 부인도 이리 아름답죠.”
비올레타가 클레이런스의 젊은 부부와 듣기 좋은 인사치레를 몇 번 주고받는 새, 주변을 조용히 살피던 밀로일라가 급히 비올레타의 귓가에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열 시 방향, 몬드리올 백작 부처가 와요.”
무례해 보이지 않기 위해 비올레타는 계속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대화가 잠시 멎은 순간 일부러 대화를 끝맺지 않은 채 밀로일라가 말했던 방향으로 자연스레 몸을 약간 틀었다. 그리고 마치 몬드리올 백작 부부를 우연히 발견한 듯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대화의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곁에 있던 디아나가 눈치 좋게 부부에게 말을 걸며 루이즈를 끌어들였다.
밀로일라가 덧붙이듯 빠르게 속삭였다.
“몬드리올 백작부인은 로드리고 후작의 사촌 누이에요. 로드리고 후를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소개받으세요.”
비올레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몬드리올 백, 그리고 몬드리올 백작부인? 반가워요. 루이즈에게 많이 전해 들었어요.”
비올레타가 아는 체하자 중후한 중년의 신사와 밝은 인상의 귀부인이 정중하게 인사해 왔다. 비올레타의 시선이 몬드리올 백작의 강직한 얼굴을 지나 백작부인에 닿았다. 추밀원 11가문 중 하나, 수도 방위 사령부의 사령관, 그리고 수도에서 가장 격조 높은 살롱을 가진 여주인.
지금의 몬드리올이야말로 진짜 알짜배기지. 라키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비올레타는 백작부인의 손을 잡으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진심 어린 고마운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아까 그 후작에겐 순진한 태도 유지에 실패했지만, 이번만큼은 안 되었다. 몬드리올이 몇 대에 걸쳐 고결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켜 온 가문인 만큼, 자신에게는 어느 정도 방심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루이즈를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단 인사 드리고 싶었답니다. 쉬운 결정이 아니셨을 텐데…….”
“전하께 오히려 민폐 덩어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딸아이를 보낸 이후 늘 걱정하고 있습니다.”
비올레타의 뒤쪽에서 해맑게 손을 흔들고 있는 루이즈를 본 백작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집에서야 오죽했겠느냐 싶어 어쩐지 그를 진심으로 동정하게 된 비올레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폐라뇨. 오히려 제가 부족해 루이즈에게 미안해요. 귀한 몬드리올의 영애를, 몬드리올 백도 알다시피 제가 아직 바깥이 낯설다 보니…….”
비올레타는 살짝 처연하게 말을 흐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에 옅게 연민이 어렸다. 클레이런스 후나 몬드리올 백이나 같은 군인인데, 느낌은 천지 차이였다. 하긴, 딸들이 있으니 더할 테지.
“……제대로 못 해 주는 것이 많을 것 같네요. 루이즈가 절 많이 도와주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지만 저 아이가 누굴 도와줄 수 있는 아이는 아닌데…….”
백작이 말끝을 흐렸다. 부모답지 않게 객관적이고, 정말 진심 어린 확신이었다.
어쩐지 이러다가 루이즈의 쓸모에 대해서나 계속 논하게 될까 봐 걱정되는 찰나, 마침 급하게 달려온 시종의 메모를 받아든 몬드리올 백이 양해를 구하며 사라졌다. 꽤 괜찮은 방법이다 싶어 비올레타는 그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나중에 저런 종이나 몇 장 구해 시녀들에게 쥐여 줘 놓으면 딱일 것이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들이 편히 얘기할 수가 없죠. 마침 제 남편이 잘 사라져 줬네요.”
몬드리올 백작부인의 장난스러운 말에 비올레타가 재밌는 듯 웃자, 백작부인이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물어 왔다.
“연회는 즐거우신가요?”
“아직은. 즐겁다고 해야겠죠?”
당신이니 그나마 솔직히 말한다는 듯, 비올레타가 은근한 투로 작게 되물었다. 제법 친근하게 되돌아온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백작부인이 생긋 웃고는 비올레타가 한 것처럼 은근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 목걸이가 소문의 목걸인가요?”
“아…….”
“그 목걸이,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한 달 전 공작 각하께서 5황녀 전하의 궁을 개조 공사할 때도 꽤 화제였어요. 그땐 드워프를 여덟이나 불러왔다면서요? 모두가 사촌에 대한 애정이 참 각별하다 여겼답니다.”
먼 지방에서 온 기술자가 여덟인지 여섯인지 비올레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그저 웃으며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각별하게 신경을 써 주고 있는 건 사실이라며 대강 긍정해 주었다. 청구 금액은 죄다 황실에 뒤집어씌웠는데 도무지 소문이 어떻게 퍼져 나갔기에 사람들이 그리 유난이란 건지 모르겠다.
비올레타는 어느새 멀어진 라키엘을 살짝 눈으로 흘겼다.
“게다가 몇 주 전에는 로드리고 영지에서 극소량으로 채취되는 옐로 다이아몬드를 다 사들이고, 제국 내에 남은 드워프 보석장인을 대대적으로 수소문하더니 목걸이에, 귀걸이에, 팔찌에……. 지금 입으신 그 드레스는 아마 브란젤의 왕실에서 공수했다는 드레스일 테고요. 소문이 이제 꽤 대단해졌죠. 여태 흔한 스캔들 한 번 없던 공작께서 황녀 전하께 보석을 바치느니 드레스를 바치느니 엄청난돈을 쏟아붓고 있으니, 사람들이 안 떠들 수가 있나요. 사실 의견도 아주 분분하답니다.”
그 지극정성이 사촌 동생을 향한 건지, 여자를 향한 건지에 관해서요. 백작부인이 속삭이듯 작게 덧붙였다.
비올레타는 애매한 태도로 살짝 부담스러운 듯 입가를 약간 어색하게 끌어 올려 웃었다. 애초에 이러라고 계획된 일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후의 계획이 어찌 됐든 확실하게 내뱉기엔 아직은 지나치게 위험했고, 저런 실체 없는 풍문 정도로나 계속 남겨두는 것이 좋을 터였다.
라키엘 역시 미래를 이야기했지, 당장이라는 말은 않았으니까. 그런 비올레타를 잠깐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작부인이 상냥한 얼굴로 말을 돌렸다.
“아마 제가 방금 드린 말씀은 오늘 서른 번은 족히 들으실 테니, 각오는 해 두시는 게 좋을 거랍니다. 부인들이며 영애들이며, 지금 죄다 전하의 목만 보고 있거든요. 물론 그 예쁜 전하의 드레스도.”
백작부인의 말에 문득 비올레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저 당연한 주목이라 생각하기에는,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었다.
“……정말이네요.”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저 역시 이런 큰 옐로 다이아몬드가 세공된 건 처음 보거든요. 색도 아주 깊네요.”
“전 오히려 부인의 목걸이가 더 탐나는데요.”
“이 자그마한 감람석을 탐내시다니, 소박하기도 하셔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백작부인은 비올레타의 말에 내심 흐뭇한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제 목에 걸린 것과는 물론 비교할 수도 없지만, 백작부인의 목걸이에 박힌 그 감람석은 보석을 잘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고급 중의 고급인 아주 투명한 올리브색의 페리도트였다.
물론 그녀의 말처럼 그리 작지도 않았다. 비올레타가 그녀의 목걸이를 적당히 띄워 준 후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몬드리올에서 질 좋은 감람석이 많이 난다고 들었어요. 다음에 부인을 통해 직접 주문해도 될까요? 부인의 목걸이를 보니 저도 하나 만들고 싶네요. 드레스에 작은 조각들을 장식해도 예쁠 것 같고…….”
“당연히 가장 좋은 것들로 선별해 드리죠. 아! 로드리고의 제 사촌을 소개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의 영지에서는 갖가지 희귀한 보석들이 나니, 전하께서 언제든 필요하신 게 생기시면 그를 곧바로 통하시면 되실 거예요.”
그녀의 말에 비올레타가 반가운 듯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하기도 전에 스스로 나서서 해 준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로드리고의 젊은 후작은 황제의 조카이기도 했으니 비올레타에게도 사촌이 되었지만, 비올레타는 굳이 그것을 지적해 시간을 지체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윽고 그를 찾아낸 백작부인이 비올레타를 그쪽으로 이끌었다.
이걸로, 일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다. 아직은 순조로웠다.
그렇게 발걸음도 가볍게 부인의 뒤를 따라가던 비올레타가 주위를 둘러보려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마자, 비올레타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과 정확히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남자였다.
도서관에서 저를 도와줬던 그 남자가, 여기에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게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비올레타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던 것 같은 남자마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 비올레타는 자신을 세뇌하듯 되뇌었다. 자신이 누군지 보고도 함부로 발설하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다. 아닐 것이다. 아닐 것 같은데.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아…….
비올레타가 속으로 망연하게 중얼거리며, 뻣뻣하게 고개를 원위치로 돌렸다. 어쩐지 뭔가 순조롭다 했다. 어떻게 하지. 아니, 일단 지금은 저 사람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 나중에 기회를 봐서.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비올레타는 거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놀란 속이야 어찌 됐든, 그녀의 발은 부지런히 걸어 어느덧 비올레타는 로드리고의 젊은 후작과 마주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라키엘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제 사촌의 뒤로 비올레타가 나타나자마자 귀찮음이 역력한 눈으로 적당히 입매만 끌어 올려 웃고는, 백작부인의 소개에 맞춰 의례적으로 인사했다. 귀찮게 엮이기 싫은 듯했지만 이런 반응이야 처음부터 이미 대놓고도 당했었다.
비올레타는 그것을 부러 모른 척 무시하며 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황제가 제 형제자매를 다 잡아 죽이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녀의 아들이었다.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황제의 유일한 조카였고, 몇 해 전 아비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제는 드넓은 로드리고의 주인이었다.
갖은 보석과 황금과 은의 땅, 드넓은 포도밭과 방직 공장들이 공존하는 기묘한 부유함. 그리고 몬드리올과 함께 대대로 고결한 중립을 지켜 온 가문.
“이제야 뵙네요, 로드리고 후. 제게도 사촌 오라버니가 되시죠.”
백작부인이 그제야 떠오른 듯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르네비어 고모님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셨나 봐요.”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모든 게 죄 권태로워 보이는 젊은 후작은 대답도 짧고 명료했다. 안 그래도 저쪽에 자꾸만 신경이 쓰여 죽겠는데, 대화까지 뚝뚝 끊어지니 슬그머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어머나, 그러셨군요. 빨리 쾌차하셔야 할 텐데. 그럼 다음에 고모님을 한 번 방문해도 될까요?”
“그러십시오.”
말을 두 마디 연속으로 하는 법은 비싼 아카데미 다니면서 못 배운 걸까? 이럴 거면 차라리 아까 클레이런스 후의 시비조가 나았다. 적어도 그는 계속 시비 거느라 묻기라도 해 줬으니까. 비올레타는 이제 이 사람을 더 붙잡아 두고 자연스러움을 조장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바로 본론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후면 로드리고령에서 박람회가 열린다던데…….”
“어머, 혹시 박람회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전하?”
“그럼요. 동국에서 온 온갖 진기한 물건까지 볼 수 있다면서요?”
“물론입니다. 로드리고의 박람회는 대륙에서도 손꼽힐 만큼 훌륭하지요. 전하께서 로드리고에 와 주신다면 박람회의 명예도 드높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칼?”
젊은 사촌 동생이 불친절한 덕분인지, 그 반대급부로 그녀는 이제 제게 명백히 호의적이었다. 비올레타를 재어 보듯 묘한 눈길로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후작이 제 사촌 누이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누님. 로드리고의 영광이지요. 그러나 여자아이들이 소풍 가는 기분으로 오실 만한 곳은 못 됩니다.”
그리 재미는 없어서요. 그렇게 덧붙이며 그가 친절한 웃음을 지었다. 기껏 처음 길게 내뱉는다는 게 어디 계집들이 동국 비단이나 구경하러 소풍 오는 곳인 줄 아냐 이거지. 비올레타가 속으로 빈정거리며 마주 웃었다. 백작부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제 사촌에게 눈치를 주듯 일렀다.
“전하께 감히. 무례하구나, 칼.”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너무 가볍게 말씀드려 로드리고 후에게 무례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로드리고 후의 증조부로부터 시작된 선구적 산업 유치는 책에서도 많이 접했던지라, 예전부터 호기심을 갖고 있었어요.”
“어머나.”
“그래서 박람회가 열린다는 소리를 듣고 많이 기대했답니다. 책으로나 접했던 기계들이 궁금해서요. 로드리고의 우수한 와인을 보면 결코 방직공장을 떠올릴 수가 없을 만큼 깊은 맛이 나는데, 로드리고의 질 좋은 직물을 보면 로드리고에 포도밭이 있다고 상상할 수 없다고들 하죠. 그렇게 산업과 농업을 양립해 온 비결도 궁금하고요.”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작부인이 반가운 듯 말했다.
“잘 아시는군요. 그 관심을 증조부께서도 들으셨으면 영광이라 하실 겁니다. 책을 즐겨 읽으시나 봐요.”
“늘 혼자 있으니 친구라고는 책뿐이었답니다.”
비록 알게 된 지는 한 달밖에 안 된 친구지만. 비올레타가 부러 슬픈 눈으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듯 밝게 웃으며 대꾸하자, 백작부인의 눈이 잠깐 안쓰럽게 흐려졌다. 그녀는 이내 활짝 웃으며 비올레타에게 말했다.
“몇몇 귀부인들과 약소하게 독서 모임을 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모시고 싶어요. 부인네들이라 그리 수준 높지는 않아 전하께 모자랄지도 모르지만, 다들 책을 좋아한답니다.”
등을 급히 쿡쿡 찌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밀로일라의 신호였다.
아마 저 약소하다는 독서 모임이, 밀로일라가 어제 말했던 살롱에서도 핵심 인물만 모였다는 비공식 모임 같았다. 몬드리올의 살롱은 격조 높기로 유명해서 살롱부터 이미 대단한 이름들만 모여 있었다. 그러니 그 살롱에 초대를 받기만 해도 성공이나 다름없었을 텐데, 비공식 모임이라니 아주 뜻밖의 수확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남편이 없고, 그녀를 괜히 미안하게 만드는 사촌이 있어서 더 그런 듯했다.
불친절하게 굴어 줘 고맙다고 속으로 후작에게 감사를 표한 비올레타가, 입매가 지나치게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수줍게 웃었다.
“홀로 그저 있는 책이나 본 게 다라, 오히려 부인들에게 민폐를 끼칠까 걱정이 되네요. 초대해 주시니 감사히 기다리고 있죠.”
“그리 겸양까지. 아, 그리고 내달 그 박람회는 저와 함께 가시면 어떨까요? 칼은 일정이 바빠 수도와 영지를 자주 오간답니다. 그리하면 전하께서는 로드리고령까지 쭉 홀로 가셔야 할테니 무료하실 수도 있지요. 어차피 저도 가는 길이니, 제 안내를 받으며 함께 가시면 어떨까 싶어서요. 그리고 르네비어 전하도 뵙고요.”
“부인께서 그리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요.”
잘 되어 가고 있다. 정말로. 여전히 재수 없는 눈길로 저를 바라보는 후작을 향해 환히 미소 지으며, 비올레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백작부인의 말대로 비올레타는 서른 번을 꼬박 채워 가는 중이었다.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드레스, 구두, 라키엘까지. 언급될 때마다 속으로 세어 보던 비올레타는 어느덧 스무 번을 바라보게 되자 더 이상 셈을 포기했다.
저를 심심하면 노려보기에 시비라도 걸 줄 알았던 일로벨라는 몇몇 영애들과 함께 만찬석에 있었고, 한 번은 찝쩍거릴 것 같던 빌키어스도 정확히 딱 한 번만 요란하게 인사한 뒤에는 멀리서 사람들에 휩싸여 바쁘게 돌아다녔다. 황제가 퇴장하며 파사칼리아와 황비들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씩 조용히 사라졌고, 4황자도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장 마주칠 것을 우려했던 카디링거 후작은 정작 오지도 않았고.
“이런 큰 옐로 다이아몬드는 태어나서 처음 봐요. 어머나, 그러고 보니 팔찌까지!”
스무 번 가까이 하다 보니 어느 새 입에 익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영애의 가넷이야말로 훌륭해 보이네요. 영애의 드레스는 어느 장인이 만들었나요? 지겹게 대답하며 비올레타가 조금 멀리 떨어져 서 있던 디아나에게 눈짓하자, 디아나가 재빨리 다가와서 속삭였다. 물론 상대에게 들릴 만큼 그리 작지는 않게.
“전하, 에델가르드 공께서 급히…….”
디아나가 말끝을 흐리며 백지 메모를 비올레타에게 내밀자, 비올레타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그리고 황급한 일이 생긴 듯 급하게 말을 남겼다.
“아, 영애, 잠시 급한 일이 생겨, 실례할게요.”
상대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디아나에게 끌리듯 비올레타가 사람들 속으로 멀어져 갔다. 비올레타가 중앙에서 춤추고 있는 루이즈와 밀로일라를 흘끗 바라보고, 피식 웃으며 디아나에게 말했다.
“이 방법 정말 유용한 것 같아.”
“전하는 무슨 벌써부터 이렇게 꼼수나 쓰시고.”
“어허, 꼼수라니.”
“어허, 한다고 없던 위엄이 생기십니까?”
“……디아나, 쏜튼 경 알아?”
“에델가르드 공의 수석 보좌관이시잖아요. 그분은 왜요?”
“너네 결혼시키게. 둘 다 기어오르는 게 아주 잘 어울려.”
황당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디아나를 그대로 둔 채, 비올레타는 테라스로 유유히 향했다. 아까 그 영애가 지켜볼지도 모르니, 잠시 사라져 있다 올 필요가 있었다.
마침 라키엘도 안 보이니 잘된 일이었다. 혼자 좀 쉬기나 해 볼 요량으로 비올레타는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테라스를 찾았다.
파티가 무르익어 서서히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어 감에도 몇몇이 아직도 저를 주시하는 게 느껴져 비올레타는 조용히 커튼 사이로 들어갔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창에 안심하며, 비올레타는 테라스 문을 천천히 열었다. 어느새 밖은 어두운 밤이었다.
테라스로 발을 내딛자마자 몸을 감싸는 서늘한 공기에 비올레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른쪽을 흘깃 보니 테라스 간에는 벽으로 막혀 있어 때문에 누군가에게 보일 염려도 없었다. 천천히 난간 앞까지 다가선 비올레타가 제 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발도 아파 죽겠는데 잠시 벗고 있을까.”
중얼거리고도 몇 초간 더 바라보고 있던 비올레타가 이내 결심한 듯 드레스를 걷어 올리고 구두를 한 짝씩 벗었다. 발바닥에 싸늘한 대리석이 닿는 느낌에 잠시 소름이 끼쳤지만 평지에 닿는 기쁨이 더 컸다.
키 때문에 그리 높지 않게 제작했음에도 무게 때문인지 고작 몇 시간 만에 발이 엄청나게 피로했다. 고작 발에 신는 구두에 무슨 금을 그리 많이 넣고 보석을 붙여 댄 건지. 물론 발이 제일 아픈 사람은 따로 있겠지만. 고소한 듯 입매를 삐뚜름하게 끌어 올린 비올레타가 몇 번 제자리에서 걸으며 제 발의 편안함을 확인했다.
“그리 서 계시면 차지 않으십니까?”
“아니, 시원한데……. 어?”
세상의 부모들이 길을 건널 때 반드시 오른쪽, 왼쪽 잘 보라고 가르치신 건 괜한 말이 아니다. 왼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라 돌아본 비올레타가 그대로 굳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어른들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다. 테라스 창으로 보이는 게 테라스의 다는 아니었다.
테라스는 제 생각보다도 더 길었다. 벽에 기대 있던 남자가 비올레타의 딱딱하게 굳은 모습에 씩 웃었다.
남자의 눈꼬리가 그때처럼 해사하게 휘어졌다.
“그날 『레이디 드봐리』는 재밌게 잘 보셨습니까, 전하?”
맙소사, 사라지고 싶다.
봤느냐는 물음이 저도 모르게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을 겨우 삼켰다. 이 시점에선 이미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비올레타가 애써 웃으며 부정했다.
“아뇨.”
웃는 입가가 살짝 떨리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 것이다. 하고 많은 테라스를 두고 대체 왜 여길 와서는…….
“아니라면?”
“안 봤어요. 알고 보니 제가 찾던 책이 아니더군요. 사소한 착오였습니다. 그때의 친절은 감사했어요. 그럼 안녕히.”
해명은 이만하면 됐다. 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처럼 폭풍같이 빠르게 줄줄 읊어낸 비올레타가 허리를 굽혀 주섬주섬 구두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남자에게서 돌아서 그의 반대편으로 몇 걸음 더 걸어 멀어지고는, 그에게 발이 보이지 않도록 드레스 자락을 살짝 걷었다. 그때였다.
“……책을 찾으실 때 분명히 ‘어, 저기 『레이디 드봐리』’라고 중얼거리시는 걸 들었는데.”
그럴 리가. 남자가 마치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에 비올레타가 구두를 신으려다 말고 멈칫한 상태로 굳었다.
그랬을 리가 없다. 제가 입 밖으로 내뱉었을 리가 없다.
저건 거짓말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넘어가선 안 된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제 머리의 지극히 당연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허리를 세워 고개를 돌렸다. 혹여나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던 것도 같다.
제 입을 때려 주고 싶은 기분을 애써 누르고 비올레타는 생각했다.
저 입. 저 입을 막아 놔야 해.
“그대, 내가 누군지 알죠?”
“압니다.”
“그럼 그 책은 이 자리에서 잊어요. 그리고 평생 함구하세요.”
“구태여 저를 함구시키실 필요가 없을 텐데……. 정말 착오가 아니셨나 보군요.”
“무슨…….”
“전하께선 그런 말씀하신 적이 없고, 저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까요.”
남자의 눈매가 얄미울 정도로 예쁘게 휘어졌다. 확신범이다. 비올레타의 미간의 골이 깊어졌다.
“……내게 거짓을 고한 건가요?”
“전하도 제게 한 번 거짓말하셨으니 서로 없던 것으로 하시면 됩니다.”
“그대와 내가 같나요?”
“전하께서 자신에게만 관대하신 분인 줄은 몰랐군요.”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말에 비올레타가 짧고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남자의 실망한 척하는 얼굴과는 달리 청록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비올레타가 살짝 찡그린 눈으로 그런 남자의 눈을 응시하다,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샐쭉하니 대꾸했다.
“……그래요. 서로 비겼다고 쳐요. 그리고 다시 확실히 말해 두는데, 나 진짜로 안 읽었어요.”
“저도 그렇다고 쳐 드리겠습니다.”
“진짜 안 읽었다니까?”
“그렇다고 해 두겠습니다.”
끝까지 사람을 찝찝하게 만드는 대답에 비올레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이미 저 사람 안에선 끝난 결론이다.
구질구질하게 덧붙여도 소용없는 것이다. 이미 남자의 눈에 저는 100년 만의 문제작이라는 금서를 찾아 까치발까지 해 가며 애타게 보고 싶어 한 사람이며, 받아 들고는 이 책을 어떻게든 보고야 말겠다는 듯이 소중하게 껴안고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여 줬을 것이다.
이렇게 근사한 남자가 저를 밝히는 여자로 보게 된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제 어쩔 수 없었다. 대신 다시는 이 남자와 안 엮이면 된다. 그렇게 모든 걸 놓으니 비로소 마음이 편했다.
한결 개운한 얼굴로 비올레타는 다시 뒤돌았다. 나가기 전 다짐만 제대로 받아 두자. 그렇게 그녀가 속으로 되뇌며 구두를 신으려 허리를 숙이려는 찰나였다.
고작 예닐곱 걸음 만에 남자가 그녀의 앞에 와 섰다. 그 급작스러움에 놀란 비올레타가 무어라 미처 말도 하기 전에, 남자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뭐 하는 건가요?”
남자는 묻는 말에도 대꾸 없이 제 프록코트를 벗어 비올레타의 발치에 놓았다. 그리고 비올레타를 바라보며 마치 자리를 권하듯 고개를 비스듬하게 까딱했다.
“당신 코트를 왜…….”
“이카르트 드 베론.”
제 이름을 유려한 발음으로 읊어낸 남자가 우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이름에 누군가를 떠올린 비올레타의 눈이 아주 잠시 놀란 듯 커졌다가, 곧바로 아무렇지 않게 돌아왔다.
그 누구도 제 부모의 결함만으로 인해 껄끄러운 존재라 단정 당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베론가의 사람과 조금이라도 가까이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 이름입니다. 기다려도 물어봐 주시지 않아 결국 직접 먼저 말씀드리는 무례는 용서하십시오.”
웃으며 정중하게 아뢰는 모양치고는 내용이 다소 저돌적이었다. 비올레타가 짧게 헛웃음을 내뱉고는, 대답하듯 그의 이름을 짧게 발음했다.
“베론 경.”
“이카르트라 편히 부르셔도 됩니다.”
“아뇨. 베론 경으로 하죠.”
비올레타가 옅게 미소 지으며 거리를 두듯 우회적으로 거절했다. 이카르트가 픽 웃었다.
“바닥의 제 코트마저도 거절하시겠습니까?”
“우선, 경의 코트를 버리기 싫어요. 둘째,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도 겨우 베스트 차림으로 야외에 있기엔 제법 쌀쌀한 날씨죠. 마지막으로, 애초에 나는 돌아가려던 참이고요. 그러니 어서 주…….”
또박또박 말을 이어 가던 비올레타의 숨이 순간멈췄다. 이카르트의 손이 무례할 정도로 금세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그 완력에 비올레타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이끌려 갔다. 그러자 발 아래로 시리고 딱딱한 대리석 바닥이 아닌, 부드러운 모직 촉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의도가 어찌 되었든 이제 막 통성명한 남자가 제 손목을 잡아당긴 건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무어라 화라도 내려 비올레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놓아주고 예의 바르게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완급 조절이 기가 막혔다. 이카르트가 웃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그제야 대꾸했다.
“코트는 이미 버렸습니다.”
“……돌아가려던 참이라니까?”
이카르트가 몸을 숙이더니 발치에 있던 비올레타의 구두를 들어 테라스 구석으로 대충 던졌다. 비올레타의 얼굴이 황당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발이 아파 벌써 돌아가시게 둘 수는 없어서요.”
며칠 전에는 웃는 게 그렇게 예뻐 보이더니, 지금은 그렇게 짜증 날 수가 없었다.
“……아까 발 아파 죽겠다고 한 건 그냥 하는 말이잖아요.”
“돌아가시게 둘 수 없다는 말도 그냥 하는 말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잠깐, 뭐, 그럼 경은 내가 앞에서 죽어 가기라도 하면 그냥 잘 죽게 내버려 둘 거란 말이에요?”
비올레타가 황당한 듯 중얼거리는 말에 이카르트가 우스운 듯 낮게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 이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저 잠시 쉬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잠깐을 같이 있자고 하는 거죠.”
“네?”
“저와.”
남자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가느다랗게 접혔다.
비올레타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미심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경, 지금 혹시 나한테 집적대고 있는 건가요?”
자신들이 서 있는 유리문 안쪽의 수많은 보통의 영애들 중, 상대방에게 이런 말을 이렇게 대놓고 내뱉을 영애는 없을 것이다. 황녀의 고귀한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직접적인 단어 선택에 이카르트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굳이 저 귀한 신분이 아니라도 여자들이 쫓아다녔으면 쫓아다녔지 제가 여자들에게 부러 집적대고 다닐 종자는 아닌 것 같고, 설령 저 매끈한 껍데기로 집적거린다고 한들 열에 아홉이 황홀해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저도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리라. 황당하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비올레타는 그 열 중 하나였다.
이 남자가 레이디 드봐리만 몰랐어도 저 역시 두근거렸을지 모르지만.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어린 시절부터 자그마한 궁 안에 갇혀 세상모르고 자랐을 황녀니 고작 저런 사소한 말이라도 이카르트가 물어볼 만했다. 그러나 저와 이 사람의 시작부터가 제 창피함의 끝이었기에, 비올레타는 이제 와 애써 꾸며 낸 우아함을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비올레타가 샐쭉한 얼굴로 대꾸했다.
“나도 시녀가 있었어요.”
유폐되어 있다고 해서 시중도 없이 저 홀로 살았던 줄 아냐는 듯 비올레타가 부러 넌지시 말을 던지자 이카르트가 곧바로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
“제 질문이 혹시 무례하다 느끼셨다면 부디 용서하시길.”
“그 사과는 아까 받아야 했을 것 같네요. 어쨌든 받아 두죠.”
지금 내 발이 당신 코트 때문에 편한 것도 사실이니까. 비올레타가 새침한 얼굴로 그렇게 덧붙이자 이카르트가 짧게 소리 내 웃었다. 귓전을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비올레타는 그것에 설레는 대신 가늘어진 눈으로 이카르트에게 물었다.
“우스워요?”
“생각해 보니 제가 전하께 집적대고 있는 게 맞습니다.”
이카르트는 명료한 발음으로 그 수준 낮은 단어를 인정했다. 그러나 제 입으로 제가 집적대고 있다는 남자치고는 여전히 예의 바른 거리와 단정한 태도다. 비올레타가 어이없는 듯 되물었다.
“그리 쉽게 인정해도 돼요?”
“예.”
“멀쩡하게 생겨서 대체 왜?”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경의 용모를 칭찬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저도 여성에게 이리 집적거리는 게 처음이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말하는 이가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니 오히려 제가 부끄러워졌다. 비올레타가 얕게 한숨을 뱉었다.
“기사의 명예에 한참 목숨 걸 나이 아닌가?”
“목숨 걸 명예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전 애초에 기사도 아니라.”
키도 제법 크고 골격도 좋아 보이긴 했지만 확실히 제대로 훈련받은 몸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비올레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문을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
“에델가르드 공께서 조금만이라도 전하께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면, 제 가문의 평판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카르트의 담담한 대꾸에 생각지도 못하게 불편해진 것은 비올레타였다. 비올레타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이카르트가 재차 덧붙였다.
“그래서 웬만한 추문으로는 제 가문의 명예에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자랑인가요?”
“포기라고 하겠습니다.”
사정은 알만했다. 그만큼 베론의 현 가주는 요란했으니까. 더 얘기해 봤자 저런 말에 오히려 불편한 것은 저였으므로 비올레타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제 아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자였다. 비올레타는 그의 기저에 깔린 어쩔 수 없는 자괴감을 미약하게나마 감지했다. 그래서 더 곤란했다.
더 이상 엮이고 싶지도 않은데.
“제게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십니까?”
“없어요.”
“그럼 제가 전하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그러지 말아요.”
비올레타의 단호한 거절에 그가 매끄럽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어찌 경계하십니까?”
“어찌 믿으란 말이에요?”
“이리 경계 받을 행동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제가 이미 저 안에서부터 충분히 경계 대상이었다는 걸 남자는 꿈에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비올레타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는 찰나였다.
이카르트가 비올레타를 다급하게 잡아당겼다. 아까 전과는 달리 제 힘이 계산되지 않은 강한 힘이어서 비올레타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듯 그의 가슴에 부딪혀 안겼다.
비올레타가 그대로 석상처럼 굳었다. 이번에야말로 화를 내야 했다.
비올레타는 일단 뻣뻣하게 굳은 몸부터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강한 힘이 어깨를 다시 잡아 눌렀다.
“당……!”
“쉿.”
이카르트가 조용히 덧붙이듯 입 모양으로 말했다.
곤란해지기 싫으시면 가만히……? 그의 입 모양을 천천히 읽던 비올레타가 그제야 무언가를 느낀 듯 움찔했다.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였다.
비올레타가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안 그래도 5황녀가 요란하게 데뷔해 온 수도가 시끄러웠는데 첫 연회에서 남자와 밀회를 즐겼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얼마나 오래 입방아를 찍어 댈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맥박이 점점 더 빨라졌다. 다행히도 이런 경우를 미리 염두에 뒀던 건지 아까 자리를 옮겨 왔던 이카르트는 문가에서는 보이지 않을 쪽에 서 있었고, 비올레타 역시 드레스 아랫자락의 실루엣이나 겨우 드러나는 정도였다.
사람이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 정도는 될 수 있을.
다행히도 문이 끽하고 아주 조금 열리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문은 곧바로 다시 닫혔다. 비올레타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에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아직도 잔여물처럼 남은 맥박이 이상한 높낮이로 뛰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비올레타는 애써 그 기분을 모른 척하며,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불현듯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 사람이 있으면 들어오지 않을 텐데, 베론 경만 그쪽으로 숨었으면 됐잖아요.”
“거기 계속 서 계셨으면 혹시라도 보지 못하고 문을 열었을 때 곧바로 전하의 얼굴을 확인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잠시라도 여지를 둔 거죠.”
“그런가? 아니, 어차피 내 드레스를 보면 나인 거 알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여기에 들어온 걸 본 사람도 있을 텐데.”
“아.”
무언가 다른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카르트는 그러고 보니 그러네, 라는 듯이 나직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순순히 비올레타의 말에 수긍했다. 비올레타가 허탈하게 실소를 터트렸다. 이젠 됐다. 일단 여기서 무조건 빨리 벗어나야 했다.
“어쨌든 난 가야겠어요. 역시 여기에 계속 있는 게 아니었는데, 아까 만약 사람이 들어왔다면…….”
불안한 듯 말끝을 흐리며 비올레타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다른 말이 남은 느낌에 이카르트가 웃는 그대로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비올레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베론 경, 설마 내가 나가고 바로 나올 생각은 아니죠?”
“물론 아닙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시간을 두고 나가도록 하죠. 전하께서 나가시고 난 뒤에…….”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
“……예?”
“내가 나가고 나서 경이 얼마나 시간을 두고 나올지, 어떻게 믿고 안심하겠어요?”
대체 어떤 대답을 바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물음에 이카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이내 말했다.
“그럼 제가 먼저 나가는 모습을 보여 드리면 됩니까?”
“방금 그 사람이 내 드레스를 봤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어떡해요? 둘이 같이 있었노라고 사방천지 알릴 일 있어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제 퇴장을 반드시 지켜봐야 하시는 것 같은데.”
“맞아요.”
“하지만 결국 제가 전하보다 먼저 나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나갈 수는 없지만 벗어날 수는 있어요.”
이카르트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비올레타가 친절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여기서 뛰어내리란 말씀입니까?”
“할 수 있죠?”
“제가 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해야죠.”
남자의 시종일관 여유롭던 얼굴이 산산이 조각났다. 여기는 블라디모로의 2층이었다.
“경이 내게 집적댄 대가예요.”
“가혹하다는 생각은 혹시…….”
“전혀요.”
비올레타가 그의 말을 자르듯 대꾸하며 생긋 웃었다. 테라스 바깥을 흘끗 바라본 이카르트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멋대로 여자의 명예를 위태롭게 만들고도 나 몰라라 할 위인은 아니리라 믿어요. 그것도 경 같은 근사한 분이.”
“……듣기 좋은 말로 아주 쐐기를 박으시는군요.”
이카르트가 고개를 돌려 난간 가까이로 다가섰다. 그에게서 나직하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쩐지 절벽에서 사람 등 떠미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리라. 여기는 겨우 2층이었다.
물론 그가 진짜로 여기서 뛰어내릴 바보일 거라는 생각은 비올레타도 하지 않았다. 블라디모로의 2층은 결코 평범한 2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보다 덤덤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려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담보가 필요합니다.”
“……담보?”
비올레타가 찝찝한 얼굴로 되물었다.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카르트가 이내 웃으며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애초에 여기에 먼저 들어와 있던 건 접니다. 나중에 들어오신 객은 전하시고.”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건 제가 전하를 성가시게 해 드린 사실이 아니라, 전하께서 제가 있는 이곳에 발을 들이신 행동 그 자체죠. 그리고 그 문제가 전하를 곤란하게 만들 거고요. 굳이 그 수습을 제가 여기서 뛰어내리면서까지 해 드릴 이유는 없습니다.”
지극히 맞는 말이긴 했지만 제가 원했던 방향은 아니었다. 비올레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래서…….”
“그러나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담보가 있다면…….”
문득 이카르트의 손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지극히 조심스럽고, 사소한 접촉이었다.
비올레타가 그것을 인식하고 미처 손을 빼려 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긴 공단 장갑의 끝만 잡고 매끄럽게 빼냈다. 마치 손끝조차 닿은 적 없었던 것처럼 제게서 깔끔하게 떨어지는 기다란 손과, 그의 손끝에 매달린 제 장갑을 비올레타가 멀거니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기꺼이 전하를 위해 뛰어내려 드리죠.”
이카르트가 장갑을 제 베스트 속에 집어넣고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입가를 매끄럽게 끌어 올려 웃었다. 기다란 눈매가 덩달아 휘어졌다.
‘기꺼이’라는 단어와 같이, 그가 자신의 말의 실행하는 데에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카르트가 곧바로 난간을 짚고 가볍게 뛰어넘었다.
놀란 비올레타가 미처 탄성을 내뱉기도 전에 그가 떨어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순식간에 사람이 제 눈앞에서 사라졌다.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번쩍 정신을 차린 비올레타가 급히 몸을 돌려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맙소사…….”
그나마 돌바닥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밤의 어둠이 진득하게 내려앉은 녹색의 땅을 내려다보며, 비올레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작 잔디 위로 떨어졌다고 해서 이 높이가 결코 안전했을 것 같진 않았지만. 남자는 제법 요령 좋게 떨어졌는지―혹은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건지― 신음 소리 하나 없이 일어나 제 옷에 묻은 풀을 털어 내며 곧바로 건물 쪽으로 사라졌다. 바보답게 손이라도 해맑게 흔들 줄 알았더니. 비올레타는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일단 그가 다치지 않은 것에 안심하고 픽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려 제 발 아래에 있었던 프록코트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두고 갔잖아.”
발끝으로 이카르트의 코트를 툭툭 차던 비올레타가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두운 공기 속 하얀 숨이 찰나처럼 흩어졌다.
제 숨이 사라지고 없는 허공을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이내 고개를 내리며 장갑이 없는 빈손으로 나머지 장갑을 마저 벗겨 냈다. 그리고 구석에 던져져 있던 구두를 찾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날 정도로 화려한 구두에 목이 깔깔해졌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비올레타는 차가운 구두 속에 제 발을 하나씩 묻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코트를 주워들어 곱게 반으로 접어 난간에 걸쳐 놓고, 뒤돌아 문으로 향했다. 저도 모르는 새 철저히 학습된 우아함으로.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보인 사람은 제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휴식은 끝인가?”
“라키엘?”
어쩐지 지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반가운 듯 이름을 불렀다가, 비올레타가 멈칫했다. 혹시 아까 문을 열었던 이가 라키엘인가? 그녀의 눈이 반사적인 불안함으로 한번 깜빡였다. 물론 그가 설령 문을 활짝 열어 그와 서 있는 저를 봤다고 해도, 그는 그리 시시한 오해나 할 인사가 못 되었다. 그러니 제가 굳이 불안해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닫혔던 문이지 않나. 비올레타는 이내 안심하고 싱긋 웃었다.
라키엘이 테라스의 커튼을 한 손으로 대충 걷은 채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시녀들이 전하께서 여기서 쉬고 계신다더군.”
비올레타는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저기 구석에서 멀끔하게 생긴 영윤과 수줍고 가증스러운 얼굴로 대화하고 있는 루이즈 하나, 중앙에서 어느 잘생긴 영윤과 여태까지 봤던 중 가장 행복한 얼굴로 춤추고 있는 밀로일라 둘, 네이튼 남작 부처―부부는 매우 험악한 표정이었다.
―에게 결국 잡혀 있는 디아나까지 셋……. 누구 하나 부르기 꺼림칙했다. 물론 디아나는 지금 제가 불러 주면 생명의 은인이라도 되는 듯 달려오겠지만, 그래서 비올레타는 그녀가 제일 부르기 싫었다.
그녀는 부모님께 좀 혼날 필요가 있었다. 밀로일라야 오늘 제일 고생했으니 저렇게 행복한 순간을 깨기는 그렇고, 루이즈는……. 그냥 방치하는 게 좋았다.
귀엽게 웃고 있는 루이즈에게서 다정하게 시선이 멈췄던 비올레타가 다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금방 여기로 온 기색이었다.
시녀들에게 들었다면, 아마 아까 문을 잠시 연 것도 시녀였으리라. 제 드레스 자락 정도는 보였을 테니 제가 여기 있으리란 걸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도 저 혼자 있었던 줄 알 테였다.
라키엘이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손을 내려 보았다.
“장갑은?”
라키엘의 시선을 따라 제 손을 슬쩍 바라본 비올레타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닌데, 구구절절 처음부터 설명할 이유도 없었다.
“답답해서 잠깐 벗었었는데 하나를 실수로 정원에 떨어트려 버렸어요. 그래서 나머지도 그냥 벗…….”
“너는 장갑 하나도 제대로 못 들고 있나?”
“장갑 하나도 간수 못 하는 칠푼이라 미안하게 됐네요.”
문간에 서 있을지언정 블라디모로는 블라디모로라, 비올레타가 밝게 웃으며 쏘아붙이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라키엘이 낮게 혀를 차며 그녀에게서 장갑을 가져갔다.
“내 장갑……!”
“계속 그리 한쪽만 들고 있으려고? 장갑 잃어버렸다고 돌아다니며 광고할 일 있나.”
삐뚜름하게 대꾸한 라키엘이 제 베스트 주머니에 장갑을 대충 집어넣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정한 척이지. 비올레타가 그에 못지않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당신은 도와주면서도 어쩜 말을 그리 밉게 해요? 신기하기도 하지.”
“네가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당연하지.”
라키엘의 말에 입을 삐쭉 내민 비올레타가 라키엘의 뒤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는지 싱긋 웃으며 눈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라키엘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세상에, 지금 메이어 백작부인에, 알레노브 백작부인에, 몬드리올 백작부인까지 같이 있잖아요!”
저런 덴 빨리 끼고 봐야 상책이었다. 라키엘이 대꾸할 새도 없이 비올레타는 그렇게 내뱉기 무섭게 그를 지나쳐 홀로 향했다.
그녀는 처음의 급했던 모양새와는 다르게 제법 여유로운 몸짓으로 총총 걸어갔다. 라키엘이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내 그녀가 꽃봉오리같이 늘어선 귀부인들의 화려한 드레스 사이로 사라졌다.
라키엘은 테라스 쪽으로 다시 몸을 돌리며 문이 열린 테라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커튼을 놓고 팔을 뒤로 뻗어 문을 닫은 라키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난간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는 난간 위에 걸린 주인 없는 코트 앞에서 멈춰 섰다. 반듯하게 반으로 접혀 난간에 걸린 프록코트는, 젊은 남성을 위해 만들어졌을 법한 남청색의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코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키엘의 눈이 새까맣게 가라앉았다.
“베론이라…….”
라키엘이 손을 들어 코트를 잡았다. 코트를 잡은 손이 느릿하게 허공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코트가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