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막-3장 (4/21)

<1막-3장>

화려한 금색의 곱슬머리가 허공에서 흩날렸다. 그 머리만큼이나 화려한 생김새의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빠르게 복도를 걸어와 그 복도에서 가장 거대한 문을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열어젖혔다. 그 무례함에 여자의 주변에서 전하, 하고 작게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여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일로벨라!”

그 무례한 등장에 거대한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가볍게 책망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대충 예를 취한 일로벨라가 제 어미에게 다가가 곁에 풀썩 앉았다.

“어마마마!”

“어미의 궁이라 해서, 그리 격 없이 다녀서는 안 된다. 이 어미가 몇 번을 말했니?”

“어마마마도 참!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기본적인 것은 언제나 중요하단다, 내 아가.”

“품행에 관해서는 언제나 몰린 부인에게 미치도록 지겹게 듣고 있으니, 어마마마라도 제발 저를 그냥 두세요. 저에게마저 1황비전하처럼 구실 건가요?”

일로벨라가 밉지 않게 볼을 부풀리며 투정하는 말에 베티스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부푼 볼을 한 번 쓰다듬었다.

“정말,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무엇이 말이냐?”

“그 파사칼리아의 다섯 살배기 딸이 오늘 온다면서요. 방금 알았어요! 왜 그리 빨리…….”

“네 동생이야. 열여덟 살이고.”

소파 뒤에서 들려오는 중저음의 다정한 목소리가 일로벨라의 말을 정정했다. 그 목소리에 일로벨라가 뒤쪽으로 살짝 고개를 틀자, 그녀의 정수리에 청년이 허리를 숙여 살짝 입 맞추고 떨어졌다. 일로벨라와 같은 화려한 색의 짧은 금발이 마치 그녀의 머리와 하나인 것처럼 섞였다가 다시 멀어졌다.

“오라버닌 와 있었으면서 왜……. 난 그녀의 정신연령을 말하고 있는 거야.”

“애초에 백치가 아니라고 하잖아?”

“‘그’ 라키엘의 말을 어떻게 믿어? 말을 외우게 하고, 훈련만 어떻게 한다면 백치가 아닌 것처럼, 그 정도는.”

“아무리 라키엘이라도 백치를 두고 어떻게 백치가 아니라고 하겠어?”

“말이 안 돼. 그럼 5황녀가 왜 순순히 십삼 년을 갇혀 있었단 말이야? 제 궁에 불이 날 때까지!”

“황궁의 유폐가 어떤지 너도 알잖아.”

“하지만……!”

남매의 공방을 느긋한 얼굴로 지켜보던 베티스가 일로벨라를 엄중하게 타일렀다.

“일로벨라, 거기에 관해선 어딜 가서도 떠들지 마라. 우리는 황녀와 관련된 논점 가까이에 있어선 안 돼. 그 공작이 제 아비의 죽음도 묻어 두고, 뻔히 황녀에게 닥친 살수들을 보았을 텐데도 궁에 불까지 질러 사건을 묻었다. 반응이 계속 예상을 벗어나고 있어. 그러니 당분간은 자중해야 한다.”

그 가벼운 꾸짖음에 일로벨라가 얌전히 입을 다물자 소파의 뒤편에 기대 있던 청년이 피식 웃으며 일로벨라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베티스가 부채를 펴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며 타이르듯 말했다.

“황녀의 유폐 기간엔 한 점의 오류도 없었다. 그 황녀를 구하고 죽었다는 시녀의 흔적까지 샅샅이 추적했지만, 흔적을 지운 기색조차 없어. ‘황녀는 안타깝게도 유폐 뒤 정상임이 밝혀졌고, 십삼 년간의 억울한 유폐를 당했다’……. 그저 그 사실 하나만 남아 있지.”

“하지만 어마마마, 저라면 그 십삼 년간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빠져나왔을 텐데요.”

“비올레타는 너무 어렸을 때 갇혔어.”

“오라버닌 언제 그 아일 봤다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우리 동생이잖아.”

“그 동생이 들으면 경기나 안 일으키면 다행이겠네.”

“왜?”

“빌키어스.”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되묻는 빌키어스에게 베티스가 경고하듯 내뱉고 살짝 눈을 흘겼다. 그리 뻔뻔하게 좀 굴지 말라는 핀잔이었다. 일로벨라가 기가 막힌 듯 내뱉었다.

“할아버지가 그 백치 계집 하나 죽이겠다고 살수를 몇이나 보냈는데? 그런데 오라버니가 뻔뻔하게 동생이라니, 그 아이가 들으면 얼마나 소름 끼쳐?”

“애초에 난 반대했잖아.”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빌키어스를 일로벨라가 홱 뒤돌아 노려봤다.

“할아버지가 하시는 모든 건 오라버니를 위해서야!”

“난 카디링거에 그런 것까지 바란 적 없다.”

“그렇게 오라버니가 바라는 대로 그 아이가 살아서 결국 황궁으로 오네. 아주 잘됐구나?”

“그것 역시 달리 바란 적 없다. 그건 그저 그 아이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뿐이지.”

“이렇게 혼자 깨끗한 척할 거야?”

“이 오라비의 말 어디가 깨끗하냐? 미하일까지 죽였으면, 그만하면 됐어.”

빌키어스는 웃음기를 지우고 낮게 말했다. 일로벨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하일 얘긴 왜 꺼내!”

일로벨라가 베티스의 눈치를 보며 빌키어스에게 쏘아붙였다. 베티스는 여전히 나른하게 내리깔린 눈으로 살랑살랑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

“일로벨라, 난 폐하처럼은 살기 싫다.”

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한마디에 일로벨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들의 아버지, 즉 황제는 제 동기同氣 9명을 죽이고 황제가 됐다.

저와 배가 같은 친형은 아예 제 손으로 직접 칼을 들어그 목을 베었다. 마치 세상에 보란 듯이. 황제의 하나뿐인 친여동생이며, 지금은 로드리고 후작부인이 된 황녀 르네비어를 제외한 모든 황자와 황녀가, 그렇게 몰살당하다시피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제 형제와 누나들의 목을 치고 제위를 차지한 황제는, 살아남기 위한 복종이나, 사람들이 저마다 목구멍에 칼을 숨기고 엎드리는 복종 밖에는 얻지 못했다.

그것은 제 자식들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이 방의 누구도 그를 진정한 남편으로나, 아버지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안달 난 3황비나 황제가 근래 제법 총애했던 4황비라면 모를까, 황후도, 죽은 미하일도 이것만큼은 자신들과 같았다.

“……오라버닌 진짜 성군이 될 거야. 폐하완 달라.”

“그러기 위해선 금황今皇과는 다른 식이어야 해.”

“내 아들이니, 어련하겠니.”

베티스가 부채를 탁 접으며 진하게 웃었다.

“하지만 빌키어스, 애초에 2황자의 죽음은 폐하의 뜻이야. 너도 알잖니? 우리 후작께선 그 뜻에 따르신 것뿐이고.”

정확히 말해 미하일이 죽을 당시의 신분은 황태자였지만 이 방 안에서 그것을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빌키어스가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안타깝게도, 그렇죠.”

“카디링거가家는 폐하의 충신일 뿐이다. 그리고 폐하는 2황자가 아닌 널 택하셨지. 드디어 장자인 네 제자리가 돌아온 것뿐이란다.”

“하지만 폐하는 그 이후 어떤 언질도 없으시죠.”

“2황자가 죽고 없는데, 너 말고 달리 답이 어디 있느냐?”

“킬리안은요.”

“검도 못 드는 그 유약한 4황자가 널 어찌 이겨? 그보다도 애초에 제 골빈 어미나 영혼도 팔아넘긴 제 외삼촌 때문에, 그 아이는 출생부터가 글러 먹었다. 외족이 죄 그 모양이니. 선대 베론 후에게서 어찌 그런 자식들이 났는지.”

쯧, 혀를 차는 소리는 베티스가 보내는 지금은 죽고 없는 선대 베론 후작에 대한 진심 어린 동정이었다. 그녀는 정적이라도 훌륭한 사람은 존중할 줄 알았고, 그의 불행에 안타까워할 줄 알았으며, 빌키어스는 제 어머니의 바로 그런 점을 존경했다.

물론 미하일과 선대 에델가르드 공의 죽음은 그런 그녀에게도 예외였지만. 빌키어스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아, 비올레타도 있군요.”

“오라버니는 지금 농담이 하고 싶어?”

“농담이겠느냐?”

“십삼 년을 갇혀 있던 계집아이가 뭘 알고, 어찌 황위를 노려.”

“황후가 낳은 황녀다. 그 정통 계승권을 무시할 순 없어.”

일로벨라가 기가 막힌 듯 코웃음을 쳤다.

“여황제?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빌키어스의 말이 틀리지 않다. 네 할아버지가 그저 백치라 알았던 5황녀를 굳이 제거하려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새파랗게 어린 공작이 아쉬운 대로 백치를 데리고라도 계승권을 잡고 억지 부리며 늘어질 것이 뻔했으니.”

“오라버니에, 킬리안까지 있는데, 어떻게 5황녀가.”

“황실엔 여제들의 선례가 있다.”

“그보다 수십, 수백 배는 많은 선례에서, 적통 황녀는 황자에게 모두 양보했어요! 도대체 몇 백 년 전 일들을…….”

“지금의 공작이라면 천 년이 지난 일이라도 끌어내고도 남아. 제 아비와는 완전히 다른 놈이야. 게 다가 알고 보니 백치가 아니다? 기회가 왔다 싶겠지. 그러나 그뿐이다.”

베티스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2황자와 선대 에델가르드 공을 쳐 낸 것이 진정 누구인지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녕 널 선택한 것이었다.

폐하가 카디링거의 손을 잡으신 거다. 하물며 그 미하일을 쳐 내고, 폐하가 5황녀를? 제 오라비에, 외삼촌이 황제에게 죽고, 제 어머니와 사촌 오라비는 황제라면 이를 간다. 게다가 십삼 년간이나 저를 억울하게 유폐시킨 게 바로 누구였지? 그런 5황녀를 폐하가 어찌 택하느냐? 그 뱃속에 어떤 칼을 감췄을지도 모르는 딸이다.”

“…….”

“빌키어스, 오직 너뿐이다.”

황실에서 보낸 마차는 더없이 편안했지만, 비올레타는 마치 낡은 짐마차를 타고 산비탈이라도 오르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꽉 조인 허리가 숨통까지 조이는 거 같다.

온 신경이 그저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는 데 가 있었다. 손이 드레스 자락을 너무 세게 움켜쥔 나머지 미세하게 떨렸지만, 비올레타는 제 손이 그리 떨리는지도 몰랐다.

그 질린 손아래 구겨진 부분을 바라보던 라키엘이 작게 혀를 찼다.

“드레스 다 구겨져.”

“……뭐라고 했어요?”

“네 손.”

라키엘의 말에 물끄러미 제 손을 내려다본 비올레타가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보고 놀라 퍼뜩 제 손을 드레스에서 떼어 냈다. 손으로 그 부분을 탈탈 치며 털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구겨진 자국이 마치 저 같다. 여태 스스로를 긴장시켰던 게 무색해졌다.

쉽게 포기한 비올레타가 좌석에 기대며 축 늘어졌다. 그 품위 없는 모양새에 라키엘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비올레타가 한숨처럼 말했다.

“뭐요.”

“십오 분이면 도착한다. 그렇게 누워서 아예 잠이라도 자겠다 이거야?”

“이게 어딜 봐서 누운 거예요? 나 지금이라도 힘 좀 풀게요. 죽겠으니까.”

“남자 앞에서 그리 경박하게 가슴 내보이며 눕는 거 아니다.”

“어딜 봐요!”

당황한 비올레타가 벌떡 일어나며 제 가슴팍을 손으로 가린 채 바라보았다. 가슴은커녕 정확히 쇄골 바로 아래에서 시작되는, 단정하기 그지없는 드레스만 보였다. 고개를 홱 들어 라키엘을 보니, 밉상스럽게도 그 모양을 비웃고 있었다.

저, 저 비열한 얼굴!

“볼 게 어디 있다고…….”

“내가 볼 게 왜 없어요!”

“그래? 보여 주게?”

“아니, 이게 아닌데…….”

“언제든 네 몸을 긴장시켜. 지금처럼 그렇게. 몸이 해이해지면 정신도 무너지니까.”

어느새 무표정하게 돌아온 얼굴로, 심드렁하니 설교하는 태도에 당황해 있던 저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는 사람을 자주 그렇게 만들었다.

정작 저렇게 말하는 자기는 삐딱하게 앉아서 다리나 꼬고 앉아 있으면서. 비올레타가 입을 삐죽이고는 그에 대한 반항처럼 빳빳하게 서 있던 허리에 힘을 풀어 다시 의자에 몸을 편안히 묻었다. 그에 라키엘의 눈썹이 방금 전처럼 삐딱하게 올라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

“좀 봐줘요. 이래 봬도 내 정신만큼은 지금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단 말이에요. 라키엘도 그랬잖아요. 우리, 하나뿐인 사촌이라고.”

“…….”

“하나 있는 사촌 앞에서마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오늘은 좀 봐주라. 하나 있는 사촌 앞에서까지, 이러긴 싫다고.”

환청처럼 따라 들리는 밝은 목소리에 라키엘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미하일의 장난스럽지만 선한 얼굴이 앞의 여자와 겹쳐 보이는 듯한, 그 착각에 라키엘은 이를 악물었다. 둘이 닮은 거라곤 오로지 저 짙은 녹색 눈동자뿐인데, 때때로 저도 모르게 이렇게 미하일이 겹쳐 보이는 것이 힘겨웠다.

순간이나마 저 눈동자가 미하일을 생각나게 하고, 미하일이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고, 그들은 그들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라키엘이 자조하며 웃었다.

정말이지 자신이 만든 황녀는 최고였다. 잠시라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게 만든다.

가볍게 내뱉은 말인데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이미 침묵이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제 말이 물음으로 끝났었기에 조금 머쓱해진 비올레타는 커튼이며 창밖의 풍경 따윌 바라보다, 멍하니 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말했다.

“이 목걸이 말이에요. 어마마마 거래요.”

“그래?”

그게 뭐 어쨌다고, 라는 식의 심드렁한 대꾸였지만 이미 저런 반응에 익숙해진 비올레타는 굳이 신경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비올레타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가 연인이었던 어마마마를 위해 드워프에게 직접 주문하고 선물하신 거라고 하던데요.”

“……황제가?”

“굉장히 중요한 물건일 것 같은데, 아그네스의 말로는 그저 내가 이걸 황제 폐하 앞에서 끼는 것에 의미가 있대요.”

“중요하긴.”

코웃음을 치며 입술을 비틀어 올린 라키엘이 피식 웃었다.

“고모님이 드디어 칼을 가시는군.”

“정확히, 무슨 의미예요?”

“말 그대로야. 고모님이야 그 역겨운 목걸이를 가루로 만들어도 시원찮겠지만, 그 ‘의미’의 크기는 무시할 수 없지.”

“의미요?”

“그 목걸이를 건 것은 황후가 아닌 한때 당신의 연인이었던 파사칼리아의 딸이라는 것을 부디 기억해 달라. 황제가 좋아하는 색의 드레스를 입은 건 오직 당신의 딸이라는 것을, 제발 기억해 달라. 그 고고한 황후 폐하의 평생 이런 아첨은 처음일 거다.”

라키엘이 유쾌하게 소리 내어 웃었지만, 비올레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던 드레스에 온몸이 꽁꽁 묶인 듯 갑갑했다.

“고모님은 여느 어머니가 그렇듯 미하일을 지독히도 사랑했어. 그러나 그 미하일을 위해서도 결코 황제에게 자신을 낮춘 적이 없었지. 오직 그 고고함과 그 올곧음으로.”

웃는 상으로 툭툭 내뱉는 말이 어쩐지…….

“……당신, 꼭 어마마마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네요.”

“원망? 미하일이 원망하지 않는 제 어미를 내가 무슨 수로 원망해.”

“원망스럽군요.”

“……미하일이 황제에게 살아남는 것에는 고모님이 무릎을 꿇을 필요도,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었어. 그저 조금 비굴하다면 비굴한, 편리한 말 몇 마디가 필요한 순간들이 제법 있었지.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었던 황자를 황제로 만든 것이 에델가르드야. 딸이 사랑하는 남자가 ‘황제가 되지 못한 황자’라는 불안한 신분 아래 위태롭게 사는 것을, 내 조부가 두고 볼 수 없었던 게 비극의 시작이지.”

라키엘은 창에 비친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황위와 가장 먼 곳에 있던 황자인 저를 황제로 만든 에델가르드는, 황제가 된 다음엔 오히려 가장 불안한 존재였을 것이다. 제 곁엔 아무도 없었고, 황위와는 가장 멀었는데, 그런 자신이 오로지 에델가르드에 의해 황제가 됐지. 그리고 그런 에델가르드의 피가 섞인 제 아들이 태어났어. 그 미치광이가 뭐라고 생각했을까?”

“……에델가르드가 만들, 또 다른 황제?”

“그래. 아버지가 지금의 황제가 황위에 오른 이후, 몇 년간을 제외하고 평생 공작령에서 은거하다시피 산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의심이 싫어서. 그 의심이 여동생을 해칠까 봐. 그 의심이 조카를 죽일까 봐.”

“…….”

“미하일이 황제에게 그런 존재인 걸 알면서 그 의심과 불안을 조금이라도 억누를, 입에 발린 말 한마디 하지 않은 것이 바로 고모님이시지. 제 아들을 수도 없이 의심하고, 시험하는데도. 카디링거가 자신들의 1황자를 위해 황제의 비호를 얻어 내고, 그 비호 아래 아들과 오라비를 죽일 때까지 말이야.”

비올레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새벽의 처연한 눈물이 떠올랐다.

“어릴 적엔 그 흔들림 없는 긍지를 무척이나 존경했어. 미하일처럼. 물론 지금도 완벽히 이해하고, 존중하지.”

“그래서…….”

“하지만 입에 발린 말, 듣기 좋은 말, 그게 뭐라고. 결국 네가 입은 그 드레스처럼, 그 목걸이처럼 쉬운 거지.”

라키엘은 씁쓸하게 웃었다. 황후를 조금 원망하는 것도 같았고, 시늉일 뿐이지만 평생의 고고함마저 버리고 황제에게 결국 고개를 숙이는 황후가 안타까운 것도 같았다. 그가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 고고한 올곧음도, 아들과 오라비에, 십수 년을 생이별해 있던 딸마저 비명횡사시킨 자들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겠지.”

“…….”

“어쨌든 내 입장에선 네 차림이 반가워. 그 역겨운 목걸이는 특히.”

라키엘이 손을 뻗어 그 목걸이를 잡아끊을 듯 꽉 쥐었다가 놓았다. 목을 스친 손이 서늘해 비올레타는 흠칫 몸을 떨었다.

“네가 그랬지. 나와 고모님이 다르다고. 네 말이 맞아. 난 고모님과는 완전히 달라.”

“그건.”

“나는 정말 필요하다면 황제의 발을 핥을 수도 있고, 카디링거 의 발등에 키스할 수도 있고, 빌키어스의 발치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어. 물론 그 치들에게 죽어도 이럴 일은 없겠지만 시늉이라면 못할 게 없지. 그저 마지막에 남는 게 그들이 아닌 나이고, 너이고, 고모님이고, 에델가르드면 된다.”

“…….”

“내 긍지는 바로 그 결말에 있지.”

그의 입매가 매혹적인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긍지……. 비올레타는 그 단어를 작게 되뇌며 약간 홀린 듯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번뜩 정신이 들어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따라 천천히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라키엘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이제 황궁이군.”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낯설었으나, 어디인지 알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입을 꾹 다문 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느덧 긴장과 불안을 넘어선 초연함으로 비올레타가 낮게 대꾸했다.

“황궁이네요.”

저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면 그릇이 작은 것이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건방진 것이다. 비굴함을 경멸하고 무식을 증오하지만, 당당함은 무례하다 여기고 제 것이 아닌 유식은 경계한다. 비올레타는 라키엘과 나란히 시종의 뒤를 따라 걸으며, 황제에 대한 말들을 속으로 찬찬히 되뇌었다.

라키엘이나 아그네스는 황제에 대한 사전 정보를 풍족하게 주지 않았다. 사실은 부족했다. 그들은 아는 게 넘치면 오히려 많은 걸 의식하게 되고, 결국 부자연스럽게 굴게 된다고 생각했다. 만들어진 티가 나선 안 된다.

1할의 가장 중요한 뼈대만 지키고, 나머지 9할은 네가 부딪치며 얻어라. 라키엘은 그렇게 말했다. 자신과 언약했던 것처럼, 라키엘은 이제 정말 자신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퉁이를 돌며 비올레타는 한 번 더 되뇌었다.

그래, 중도. 중요한 것은 중도를 지키는 거다.

사실 어느 정도의 범위 내 행동이라면 생전 처음 황제를 알현하는, 10년도 넘게 유폐되어 있던 황녀가 보이는 태도로 무엇이든 이상해 보일 것은 없었다. 애초에 세상은 여태 비올레타를 몰랐다.

그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더 가라앉았다. 이상할 정도의 차분함이었다.

속 깊이 가라앉은 냉정이 아닌, 어딘가 붕 떠 있는 듯한 비정상적인 냉정.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제 눈앞에 놓인 거대한 문을 비올레타가 올려다보았다. 그 문이 나타남과 동시에 여기까지 자신들을 안내했던 시종들은 사라졌고, 자신을 황제의 시종장이라 소개한 중년 남자만이 남았다. 그는 문 앞을 지키듯 서서 비올레타 뒤를 따라온 라키엘에게 딱딱하게 말했다.

“각하께서는 우측의 협실夾室로.”

“그러지.”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그 내치는 말에도 빙그레 웃으며 순순히 수긍한 라키엘은, 자연스럽게 손을 움직여 비올레타의 허리를 껴안아 제 쪽으로 당기고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이마에 입술이 닿는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끼쳤지만, 마치 오라비가 작별인사라도 하는 듯 다정한 그 태도에 비올레타는 애써 마주 웃어야 했다. 시종장의 두 눈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비올레타, 기다리고 있을게.”

제 볼을 다정히 어루만지는 이 가식적인 손길과, 이 징그러운 말투에, 이 가증스러운 얼굴……. 비올레타가 파르르 떨리는 시선으로 라키엘을 올려다보았다. 굳이 이럴 것까진 없지 않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는 것을 그녀는 애써 삼켰다.

비올레타는 가까스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꽉 마주 잡아 내렸다.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제 손을 곧장 끌어내리는 모양에 라키엘이 우스운 듯 피식 웃으며 비올레타를 지나 협실로 향했다.

냉랭한 얼굴로 라키엘이 가기를 기다리던 시종장은, 그가 사라지자 바로 뒤돌아섰다. 거대한 문은 의외로 시종장 혼자서 가볍게 미는 동작에 천천히 매끄럽게 열렸다. 비올레타가 숨을 들이켰다.

황제의 접견실은 그 자체로 거대한 홀이었다. 아득할 정도로 높은 천장과 넓고 기다란 방은, 공간만으로도 사람을 얼마나 주눅 들게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순순히 주눅 드는 대신 제 눈을 힘주어 다시 뜨고, 허리를 좀 더 꼿꼿이 세워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안으로 열 걸음 정도 걸어 들어오자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계속 안내해 주리라 생각했던 시종장은 문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리하여 이 거대한 홀에는 오직 저 혼자였다. 끝도 없이 막막해졌다.

그녀는 생각을 분산시키기 위해 저 멀리 보이는 의자나 샹들리에, 천장의 무늬 따위를 보며 바닥에 얼어붙은 것만 같은 발걸음을 애써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녀는 제 발치를 바라보았다.

언뜻 멀리서 봤을 땐 그저 바닥의 무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비올레타의 눈이 커졌다.

다이아몬드라도 뿌려 놓았는지 번쩍거리는 백색의 대리석 바닥 위로, 세계 지도가 웅장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렌시아 아래 에른스트, 그 옆의 브란젤, 브란젤과 밀니로 아래 펠로베르……. 지도를 더듬어 따라가던 비올레타의 시선이 멈췄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옐로 다이아몬드 조각들이 커다란 그란토니아의 영토에 빼곡히 박혀 있었다.

그 세밀함이 조금 놀라워, 비올레타는 조금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누군가가 저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도 모른 채.

아마 저기쯤이, 딜로아의 핀스치일 텐데…….

“지리를 잘 아느냐?”

“폐하.”

매끄럽고 우아하며, 낮은 발음이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에서 그녀가 받은 인상은 그게 다였다. 단 한 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황제가 황녀를 본 것은 단 한 번. 그마저도 황녀가 걸음마를 떼기 전이었다. 황제는 지금 자신이 13년 동안 억울하게 가둬 놓았던 딸을, 장성한 뒤 처음 보는 것이다.

정말, 저게 다인가?

하지만 비올레타에게는 황제에 대해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중요한 건 자신이었다.

비올레타는 그대로 고개 숙여 황제에게 예를 취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들을 재빨리 상기시켜 제 태도를 가다듬었다. 13년간의 억울한 유폐, 어릴 때 헤어졌던 오라버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마찬가지로 외숙부인 공작의 갑작스러운 죽음……. 완전히 순종적이거나, 아첨할 수 없고, 두렵지만 무서워할 수 없고, 그렇다고 가지는 게 당연할 원망이 겉으로 드러나서도 안 된다.

그저 그 모든 게 제 속에 있다는 것을……. 고개를 듦과 동시에 생각이 툭 끊어졌다.

거대한 창으로 쏟아져 내리는 빛 속에 황제가 서 있었다. 찬란한 빛 아래 붉게 타오르는 적갈색의 머리칼 아래로, 마치 유리로 세공한 듯 서늘한 암녹색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나이가 보이지 않는, 맹수 같은 남자였다. 적지 않은 나이 때문인지 보기 좋게 조금 주름진 눈매에도 불구하고 인상은 결코 누그러지지 않았다.

고작 시선 하나가 온몸을 내리눌렀다.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비올레타는 티 나지 않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머리 위로 서늘한 목소리가 내렸다.

“짐이 하문한 것은?”

“그저 지도가 아름다워 잠시 시선을 빼앗겼을 뿐, 소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네가 밟고 선 땅이 어딘지 아느냐?”

잘 모른다는 제 대답과는 상관없이 다시 돌아온 질문에 비올레타가 곤란한 눈으로 다시 고개를 살짝 내렸다. 그녀는 두어 번 뒷걸음쳐 제가 서 있던 곳을 살폈다.

애초에 각 나라의 이름만 겨우 새겨져 있는 불친절한 지도였다. 지역 간의 경계라고는 각 나라 간의 국경선이 다였다.

심지어 제가 밟고 서 있던 땅은 그란토니아도 아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지만 비올레타는 애써 자신을 타일렀다.

천천히, 제발 천천히.

카일과 함께 약 이틀간 주요 세계 지도를 미친 듯이 외웠었지만 그중 절반은 남았는지 스스로도 미심쩍을 정도였다. 일단 이 국가는 캐롤링, 그란토니아의 서쪽이고, 그럼 란세트 지방인가? 아냐, 그건 이것보다 조금 더 위쪽이었다. 이곳과 가까운 그란토니아는 비르테츠 지방인데…….

아! 무언가 번뜩 떠오른 비올레타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삼켰다. 비르테츠 지방의 거부巨富, 질몬테 자작가가 인접한 캐롤링 국경의 사람들을 헐값에 대거 노동자로 데려와 공장에 처넣었다가 화재로 85명이 몰살한 대참사. 바로 그 국경 지방이었다.

진짜 천재인가? 비올레타는 심각하게 제 잠재력에 감탄했다.

그렇게 몇 초간의 전쟁 같은 고려 후, 제 처지를 까맣게 잊고 어려운 문제를 풀어낸 학생처럼 신 나게 대답할 뻔한 비올레타가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했다.

“아룁니다. 왕국 캐롤링의 시르베 지방입니다.”

정답을 입 밖으로 말하는 순간 비올레타는 새삼 안도했다. 지도를 기껏 외워 놓고도 지리를 알아서 맞춘 게 아니라 역사책에 있던 몇 줄의 내용과 삽화 쪼가리가 은인이라니 카일이 알면 통탄할 일이었다.

“그렇군.”

제 질문 하나로 상대가 지옥에 다녀온 것에 비해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공손하게 눈을 내리깔고 서 있는 비올레타의 얼굴을 그저 그대로 무심하게 뜯어보던 그가 시선을 조금 내렸다. 문득 무언가 발견한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내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 나지막한 소리에 비올레타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다, 그 시선이 제 목에 꽂혀 있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레 시선을 더 내렸다.

“너, 올해로 몇 살이지?”

“열여덟입니다. 폐하.”

“……눈을 들어 보라.”

명령에 비올레타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눈을 들라고 명한 것은 황제였음에도, 그는 여전히 목걸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목에 꽂힌 그 시선으로 박제된 나비처럼 몸이 뻣뻣해졌다.

“파사칼리아가 이리 재롱을 부리는 날이 다 오는군.”

일국의 황후에게 재롱이란 말처럼 어울리지 않는 말도 없겠지만, 신랄하게 비꼬는 말과는 달리 그의 입매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황제의 알 수 없는 심중을 헤아리듯 비올레타가 눈을 가늘게 떠 그를 살피자마자 그가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쳐 왔다.

약간 놀란 기색으로 비올레타가 애써 제 표정을 갈무리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루드비히는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한 듯 고요한 얼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파사칼리아…….”

비올레타를 보고 있되, 보고 있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복잡한 울림이었다. 사람의 것 같지 않던, 그녀와 똑같은 색의 눈이 천천히 일렁거렸다. 그 눈에 보이는 감정이 너무 많아 오히려 하나도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 같기도 했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한.

“……폐하?”

뚜벅뚜벅 가까워지는 걸음에 비올레타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코앞에서 멈춘 루드비히가 망연하게 비올레타를 내려 보다, 별안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들어 목걸이를 잡아 쥐었다.

그대로 끊어 버릴 듯 힘이 꽉 들어간 커다란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끊어질 것처럼 당겨진 목걸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제가 위협받는 느낌에 비올레타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목걸이로 그녀의 떨림을 느낀 루드비히가 목걸이를 힘없이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이내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그의 눈빛이 변했다. 예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그 서늘한 유리 같은 눈으로.

“네 어미가 뭐라면서 그 목걸이를 씌워 주더냐?”

씹어뱉듯 묻는 말에 비올레타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저는 단지, 전해 받았을 뿐입…….”

“내가 네 나이 적에 어느 바보 같고 하찮은, 아홉 번째 황자가 내게 주겠다고 만들어 온 목걸이다. 이걸 걸고, 그 황자가 그 목걸이를 걸어 줄 적 내가 입었던 드레스를 입어라. 그러면 그 멍청한 황제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던 루드비히가 이를 악물며 제 나머지 말을 삼켰다. 그 위압에 저도 모르게 잘게 떨리는 손을 다른 떨리는 손으로 겨우 부여잡은 비올레타가 그를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끔찍하다. 네가 닮은 것이 끔찍하다.”

“…….”

“네 어미에게 전해라. 절반은 성공했다고. 네 십삼 년은 어떤 형태로든 보상하지.”

루드비히가 냉랭하게 뒤돌아 다른 문으로 사라질 때까지, 비올레타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렇게 위압하던 황제가 사라지자 무언가에 홀렸던 것처럼 복잡하게 엉킨 생각들이 이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저를 보자마자 한 첫말이란 게 고작, 제가 지도 위에 서 있었단 이유 하나로 물어본 ‘지리’에 관한 것이었고, 그 질문에 정답이 아닌 제국 수도 이름을 댔어도 ‘아, 그러냐’ 하고 넘어갔을 무심함이었다.

그 지독한 무관심. 제가 그에게 ‘비올레타’로서 처음으로 대접받은 건 그것이 전부였다. 비올레타는 텅 빈 접견실에 멀거니 서 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몸을 휙 틀어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제가 오늘 받을 대접은 자신이 아닌 ‘비올레타’가 받을 대접이었다. 13년이나 아버지에 의해 억울하게 유폐되었던 ‘비올레타’. 애초에 그 비올레타가 제정신이었든, 제정신이 아니었든 간에 그녀를 가둔 이유는 어떻게 해도 정당하지 않지만, 그들―그 망할 악습이든, 황제든―의 논리를 갖다 대도 결국에는 틀렸지 않은가? 결국 그들의 앞에 나타난 ‘비올레타’는 정상이다.

사실 비올레타는 제가 황제에게 뭘 원했던 건지 저조차 알지 못했다. 황제가 제 딸을 안아 주기라도 바랐나? 가식적인 사과라도 바랐던가? 아니면 가여워 하기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들을 카디링거가 죽이게 놔둔 게 애초에 누구인데.

도대체, 당신이 어떻게 보상해 줄 건데. 이미 그녀는 세상에 없는데.

“왜 그리 발이 급해?”

“황후궁으로 가요, 당장.”

“안 그래도 그래야 해.”

답지 않게 유하게 대꾸하며, 빠르게 걷는 그녀를 따라잡은 라키엘의 눈빛이 이내 서늘하게 굳었다.

“너.”

“빨리 가야……!”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라키엘이 앞서 가는 그녀의 팔을 낚아채 세웠다. 비올레타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작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그가 네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비올레타가 라키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싸늘하게 일렁이는 시선이 그녀의 목에 못 박힌 듯 꽂혀 있었다.

목걸이가 잡아당겨 지며 살갗이 세게 쓸린 모양이었다. 그제야 차가운 보석에 닿은 목이 따갑고 화끈거렸다.

비올레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키엘의 반응은 황제궁을 아직 채 벗어나지 못한 자신들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조금 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답지 않게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조금 비정상적인 과민반응은 그럴 만한 것이었다.

여기는 안전한 공저가 아니고, 그는 이미 황제에게 몇 번이고 잃었으므로. 비올레타가 차분하게 말했다.

“황후궁에 가서 말할게요. 걱정 말아요. 별거 아니에요.”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목에 손을 뻗어 벌겋게 쓸린 자국을 살짝 스치듯 쓰다듬으며 이를 악물었다. 비올레타는 제 목에 있는 흔적 하나에 그가 어떤 광경을 떠올렸을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전 에델가르드 공과 황태자가 죽어 널브러져 있으리라. 저도 모르게 안타까워 제 목에 닿은 그 손을 잡아 주려던 찰나, 비올레타는 멀리서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무의식적으로 그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라키엘의 손이 자연히 툭 떨어지고, 라키엘은 거짓말처럼 차분해진 얼굴로 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라키엘이 그들을 바라본 채, 비올레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시험 하나 해 보지.”

“네?”

“저기 오는 남자 둘 중 제대로 된 놈을 하나 골라 봐.”

저 멀리로 한눈에 보기에도 중년에 접어든 남자 둘이 보였다. 거의 아버지뻘은 되어 보이는 둘 중 누구도 ‘놈’이라는 무례한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비올레타는 그에게 답하듯 그저 웃고는 잠시나마 제법 고심했다.

오른쪽은 부드럽고 유들유들해 보이는 웃음을 얼굴 가득 짓고 있었고, 왼쪽은 척 보기에도 깐깐하고 신경질적으로 생겼다. 단순히 어느 쪽 인상이 좋으냐고 하면 당연히 오른쪽이었다. 그러나 왠지 웃는 얼굴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음, 그나마 왼쪽? 오른쪽은 왠지 그냥 웃는 게 좀 꺼림칙하네요.”

“보는 눈은 있군.”

“누군데요?”

“오른쪽은 제 교활함을 머리가 다 못 따라가는 멍청한 뱀이고, 왼쪽은 야심찬 ‘작은’ 실력자지. 왼쪽이 제대로 됐다는 건 아니고, 오른쪽이 워낙 최악이라.”

동문서답하듯 애매한 말에 비올레타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새 그들과의 거리는 가까워져있었다.

라키엘이 단 한마디로 혹평했던 오른쪽 남자가 과하게 반색하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섰다. 가까이서 다시 보자, 오른쪽 남자가 사십 대 초반쯤으로 보인다면 왼쪽 남자는 사십 대 후반 정도로, 오른쪽 남자가 조금 더 젊어 보였다.

“황제 폐하를 쏙 빼닮은 이 아름다운 머리칼을 보니 분명 비올레타 전하시겠군요!”

반가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는 것치고는 대단한 무례였다. 예조차 취하지 않고, 감히 초면인 황제의 직계 황족이 저에게 하문하기도 전에 그 이름까지 편하게 말한 것이다. 비올레타가 짐짓 못마땅한 듯 그에게 애매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자신이야 상관없었지만, 비올레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그대를 언제 보았던가요?”

아, 하고 나직하게 탄성을 내뱉은 남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허리를 숙였다. 이런 걸 꼭 받아야겠느냐는 식의 약간 거만한 비꼼이었다. 안 받느니 못한 예를 받자 기분은 더욱더 나빠졌다.

“전하께 미천한 제 소개를 하지요. 궁내부 장관 베론입니다.”

제 이름도 밝히지 않고, 과시하듯 제 관직명에 성만 딸랑 붙인 오만한 소개였다. 궁내부 장관이라면, 3황비의 오라비이자 4황자의 외숙부인 베론 후작이었다.

그 거만함의 출처를 알자 비올레타가 냉랭한 얼굴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그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베론 후작과는 상반된 태도로 제차례를 차분히 기다리는 다른 중년 남자에게 비올레타가 상냥하게 물었다.

“그대는?”

“5황녀 전하를 뵙게 된 영광에 감사를. 재무부 차관, 그리고 카디링거의 장자, 갈로이스 드 카디링거입니다.”

서늘한 눈으로 예의 바르게 미소 지으며 고하는 말에 비올레타가 얼굴을 잠시 굳혔다가 갈로이스가 고개를 듦과 동시에 활짝 웃었다. 카디링거 후작의 장자이자, 1황비의 오라비, 그리고 1황자와 3황녀의 외숙부. 라키엘이 왜 갈로이스를 굳이 ‘작은’ 실력자라 칭했는지, 비올레타는 그제야 알았다.

그의 아버지를 빗대 그가 아들임을, 그리고 카디링거가의 두 번째 실력자임을 말한 것이다.

“나야말로 그대를 만나 영광이에요.”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선대 에델가르드 공과 황태자를 죽이고, ‘비올레타’를 죽인 사람. 그녀는 암살자들이 들이닥치고, 그들이 비올레타를 죽이던 순간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저와 하루 종일 함께 살던 사람이 제 앞에서 죽었고, 자신 역시도 죽을 뻔했다.

몸에 각인된 그 공포와, 얕게 깔린 증오가 손끝으로 퍼져 나가 미세하게 떨렸다. 태생적으로 조금 뻔뻔한 게 다행이었다.

그 외에는 모든 게 괜찮았다. 그동안 훈련된 태연한 얼굴도, 제가 입에 띄운 미소도, 떨리지 않는 제법 우아한 발음도.

당신은 괜찮을까.

문득 든 생각을 비올레타는 그를 보지도 않고 곧바로 지웠다. 어차피 그들을 보자마자 태연하게 품평이나 해 대던 라키엘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입매를 부드럽게 휘어 웃으며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어쩐 일로 베론 후와 카디링거 경이 함께입니까? 이런 진기한 광경은 처음입니다.”

“우연히도 황제궁에 마차가 나란히 섰습니다. 둘 다 폐하께 정기 보고차 들어온 것이지요. 공이야말로 어찌 궁정에서 이리 뵙기가 힘드십니까?”

갈로이스가 웃으며 예의 바르게 안부를 묻듯 응수하자 곁에 있던 베론 후작이 우스운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야, 이제 겨우 두 달은 되었습니까? 각하께서 공작위를 이으신 것이. 이제 겨우 약관을 넘기셨으니 공작위 승계 전 카디링거 경처럼 수십 년을 충직하게 관료 생활만 허투루 해 오신 것도 아니고, 공작위를 이으신 지는 고작 두 달에, 선대 에델가르드 공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관료 생활에는 더더욱 뜻이 없으시니 궁정에서 뵙기가 힘든 것이 당연하지요.”

라키엘에게는 그가 아직 어린 애송이에 불과함과 재상이었던 할아버지와 달리 그의 아버지가 황제의 의심 속에 공작령에 내내 칩거했던 것을, 갈로이스에게는 저 어린 것도 공작인데 아버지가 일흔이 넘도록 멀쩡한 바람에 쉰이 다 된 나이에 아직도 후계자에 불과한 것을 동시에 비웃는 말이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비슷한 정도로 대강 알아들은 비올레타가 괜히 기분이 상해 라키엘을 힐끔 바라봤다. 기분이 나쁠 법한 말에도 라키엘은 그저 삐딱하게 웃으며 베론 후작을 조금 한심한 듯 내리깔아 보고 있었다. 베론 후작이 되레 조금 발끈한 얼굴인 것이 어쩐지 재밌어져 비올레타가 순진한 얼굴을 가장하며 말했다.

“어머, 카디링거 경께서 수십 년을 관직 생활만 해 오신 것은, 축복이 아닌가요? 베론 후는 어찌 그것을 허투루 했다 말씀하시죠?”

“어찌 그리 생각하시지요?”

베론 후작이 아닌 갈로이스가 평온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만큼 그대의 아버지 후작께서 오래도록 건재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니, 자식에게는 축복이 아니겠어요? 부모의 장수와 건강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나요?”

“물론입니다.”

“아시다시피 여기 있는 저의 사촌 오라버니는 제 외숙부를 얼마 전에 여의었죠. 가엽게도. 카디링거 경은 카디링거 후께서 아직 건재하신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워할 만한 분이랍니다. 제 사촌도 그렇게 생각할 거고요. 혹시 베론 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건가요?”

어쩜 그럴 수가 있느냐는 듯 비올레타가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묻자 그제야 아차 싶은 얼굴로 후작이 애써 웃으며 수습했다. 어째 저 순진한 황녀가 그 혼자 아비의 작위가 탐나 아비의 죽음만 오매불망 바랐던 것처럼, 그를 인간 이하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물론 실제로 그랬기도 했다.

“저 역시 삼 년 전 제 아비를 여의었지요.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카디링거 경이 정말 부럽기 그지없고…….”

이미 수습하기엔 늦지 않겠는가. 비올레타는 후작의 말을 대강 경청하는 척하다 라키엘의 팔짱을 끼고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제법이던데. 순진하게 갈로이스를 추켜세우는 척하며 티 안 나게 베론을 몰아세우고.”

라키엘이 마차에 비올레타를 올려주고 뒤따라 타며 그렇게 말했다. 라키엘치고는 아주 귀한 칭찬이라 비올레타는 뻔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제 아비가 죽었을 때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췄을 거예요.”

“춤만 췄을까.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수도 저택이며 후작령의 성이며 죄 리모델링했지. 옆의 저택을 사들여서 허물고, 호화로운 건물들을 새로 짓고.”

“후작이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나 보죠? 그렇게 아비가 죽었다고 기뻐하게.”

“선대 베론 후는 제 자식과는 달리 꽤 훌륭한 사람이었지. 제 자식에게 어찌했는지는 모르겠고 그 집안 사정이야 알고 싶지도 않지만, 확실한 건 그냥 그가 그렇게 타고났으리란 거야. 제 여동생과 함께.”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라키엘의 성의 없는 설명에 피식 웃었다. 3황비의 성질머리는 입궁 전 수도에서도 제법 유명했던 소문이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그 교만한 멍청이는 아직도 제가 처한 상황을 몰라. 권세가 제게 모인 게 아니라 제 아비의 후광이 아직 남아 그나마 고여 있는 것이란 것도 모르고, 제 긍지라고는 없이 황제 입안의 혀처럼 굴며, 황제의 사촌 형을 쫓아내고 궁내부 장관에 앉았노라 착각하고는 기세등등하지.”

“착각이요? 그는 진짜 브나리오 백을 밀어내고 궁내부 장관이 됐잖아요.”

“그저 황제의 유희지. 베론 후는 자신이 브나리오 백을 밀어내고 궁내부를 차지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황제는 밀려난 제 사촌인 브나리오 백을 위로한답시고 감사원이라는 새 기구까지 만들어 수장에 앉혀 줬고, 심지어 궁내부를 돌아가게 하는 오 할은 아직도 브나리오 백이다.”

“……그게 가능해요?”

“사람이 그만큼 한심하면 가능하지. 그전부터도 이름만 관료였고 후작령 돌아가는 것에도 관심 없이 젊은 시절부터 매일 연회에 계집질에 술에 제 사치 부리며 놀기도 바빴던 사람이라, 그는 행정 돌아가는 것 따위 쥐뿔도 몰라. 그저 제 부관이 이렇다 저렇다 하면 ‘아, 그렇게 해라’ 하는 정도지. 지금도 여전하더군.”

궁내부 장관 베론. 그 오만한 자기소개가 이젠 조금 안타까울 정도였다. 비올레타가 한숨처럼 되물었다.

“황제는 그런 사람을 장관에 앉혀요?”

“애초에 술 마시다 춤 잘 춘다고 앉혀 준 자리니까.”

“…….”

“그때 옆에서 봤지. 황제가 한 달 전 추밀원최고 귀족 회의을 죄다 소집해 놓고, 추밀원 청사에서 술판 벌였거든.”

이건 또 무슨 개판이야?

비올레타가 어이가 없는 나머지 조금 멍해진 표정으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는, 여기서 뢴트미안추밀원의 원탁 위에 올라가 아무나 춤추면 원하는 자리 다 주겠노라 선언했지. 사백 년 전 추밀원이 생기고, 그 해 브젤란의 왕녀가 시집올 때 브젤란 왕실이 제국에 선물한, 추밀원의 사백 년 된 상징을 발로 밟을 생각을 할 귀족은 추밀원에 아무도 없어.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게 장난으로 뿌릴 위험한 자리도 싫지. 이게 정상이고.”

“그는 그렇지 않았군요.”

“그래. 그는 그 고결한 뢴트미안 위에 올라가서 춤췄고, 미친 황제는 그 미친 모양에 흡족해 했고, 그는 제가 황제의 사촌 형보다 총애를 못 받는 것이 싫었던지라 궁내부 장관을 주십사 한 거다. 제 조카를 그리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하면서 미하일도 죽은 참에, 뺏으려면 카디링거 후가 앉은 자리를 뺏었어야지. 그래 봤자 지금 같은 꼴이었겠지만. 어쨌든 역사적인 인물이야. 춤을 잘 춰서 한 부의 수장이 된 것은 그란토니아 역사상 그가 최초니.”

“미쳤네요.”

비올레타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라키엘이 우스운 듯 피식 웃었다. 제가 이런 미친 나라에서 살고 있었다니, 이젠 제국인으로서의 배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애초에 좋은 말이 돌던 황제도 아니지만 최근 큰 실정을 저지른 것도 그렇게 없었던 터라, 성격 이상하고 아들을 죽게 만들 만큼의 의심병 정도가 끝인 줄 알았다.

아니,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않나? 그것만 해도 완전 사람이 미친 게 아닌가? 이 나라는 장관 자리가, 400년 된 신성한 테이블 위에서 술주정뱅이가 춤추면 막 떨어지는 그런 나라였나?

“안심해. 사실 황제는 그리 단순하게 미치지 못한 인간이야. 황제는 애초에 제 입안의 혀처럼 구는 베론 후가 브나리오 백의 자리를 탐낼 것을 알고, 그리고 추밀원에서 유일하게 뢴트미안을 밟을 수 있는 미치광이임을 알고 그런 짓을 했던 거다.”

“처음부터 목적은 감사원을 만드는 데 있었단 말인가요?”

“그래. 그리고 그 자리에 제 사촌을 자연스럽게 앉히기 위해서. 결국 베론 후가 뢴트미안 위에 올라가 재주 부려서 득 본 것은 온전히 브나리오 백이다. 감사원장에, 궁내부의 절반은 아직도 제 것이지. 천박한 베른 후에게 돌아갈 결과는 사관史官의 평가에 맡길 일이고. 황제는 제 믿음직한 사촌에게 더 큰 힘―결국 황제의 것이 될―을 쥐여 주고, 귀족들을 대놓고 제 감시 아래 놓을 수단을 얻었지.”

“제국의 궁내부 장관 자리가 겨우 미끼라.”

미친 일이지. 라키엘이 삐딱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그 날 그 꼴을 보고서 황제가 날이 갈수록 이상해지니 정말 베론에게 정신을 놓았나 했는데……. 궁내부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전혀 아니야. ‘약속을 어길 수 없으니 대신 궁내부를 위해 이십 년을 일한 내 사촌에게는, 그 위로로 작은 기관을 하나 신설해 맡기고 싶다’는데 추밀원의 누가 반대하겠나? 멀쩡하게 일 잘하던 장관이 미치광이―황제―의 손에 멍청한 술주정뱅이―베론―에게 쫓겨나는 비극 앞에서.”

“그러나 그 작은 기관은 황제 직속의 감사監査기관이 되어 버렸고 말이죠?”

“카디링거며 다이크며, 추밀원이 그 미쳐 보이는 인사에 모두 잠잠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결국 베론가家가 황제의 장난감으로 떨어져 버렸음은 모두 알게 되었고, 허울뿐인 장관 자리에 더 기세등등해진 베론가의 멍청이가 어떻게 제 유서 깊은 가문을 말아먹는지 구경하는 것도 재밌을 테고, 궁내부는 여전히 브나리오 백이 잘 굴려 실질적으로 국정에 문제가 없는데, 굳이 나섰다가 감사원의 첫 제물로 도마 위에 올라갈 것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까.”

뭐가 이리 복잡한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대로 비올레타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키엘이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대 베론 후의 유령도 이쯤 됐으면 이제 그만 천국에 갈 때가 됐지.”

“……선대의 그 후광이라는 게, 이제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거죠?”

“그래. 점점 사그라지는 게 보이거든. 제 곁에 잠시 들러붙은 파리 떼 덕분에 진짜는 점점 사그라져간다는 걸, 본인은 눈치도 못 채. 황제가 그를 총애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 장난질과 브나리오 백에 대한 신뢰는 동일 선상에 감히 둘 수조차 없는 것이지. 황태자는 죽은 데다 제가 궁내부 장관이 된 순간부터 4황자가 차기 황태자가 될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카디링거보다 스스로가 훨씬 우세한 위치를 점한 양 행세하고 있지만 그는 모든 면에서 카디링거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가 그토록 자부하는 황제의 마음속에서조차도.”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래, 아무것도 없겠지. 차릴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가 추락하기 전에는 깨달을 거다. 그마저 없다면 무덤에 누워서도 모르겠지.”

비올레타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키엘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는 알아서 제 수족을 자르고, 3황비와 4황자를 함께 끌고 지옥으로 내려갈 거다. 결국, 쳐 내야 하는 건 스스로 망할 자가 아닌, ‘제대로 된 놈’이지.”

문득 둘 중 제대로 된 놈을 골라 보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서늘하게 눈을 빛내던,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

“갈로이스 드 카디링거…….”

“제 아비와 판박이지. 잘난 작자야. 카디링거의 그 여우 같은 늙은이가 일흔의 나이에도 아직 건재하긴 하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나이는 아니지. 결국 크게 맞닥뜨리는 것은 그가 될 확률이 높아. 제 아비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 수완에, 제 아비만큼 사람을 다룰 줄 알지. 게다가 제 아비보다 실행력이 좋고, 더 빠르지. 아버지나 미하일은 후작이 확실하지만, 굳이 유폐된 ‘너’에게 암살자를 보낸 것은, 후작보다는 아마 그자일 거다. 내가 그날에 궁을 불 지르러 갈 줄은 저도 몰랐겠지만.”

그자가. 비올레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라키엘에게 반문했다.

“하지만 후작보다 실행력이 좋고, 빠르다는 건 바꿔 말하면 그만큼 후작보다 조심성은 조금 떨어진다는 거 아닌가요?”

물론 그래 봤자 저 같은 평범한 계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철저함이겠지만. 비올레타의 반문에 라키엘이 입매를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어느새 도착했는지 마차가 섰다. 라키엘이 마차에서 먼저 내려섰다.

“그래. 그래서 후작보다 그를 조금 더 조심해야 하고, 또…….”

비올레타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우아하게 맞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후작보다 거꾸러트리기 쉬운 것이다.”

땅에 발을 딛고 앞을 바라보며 비올레타가 싱긋 웃었다.

“자신만만하네요?”

“그럴 만하니까.”

“근데 여기…….”

비올레타가 눈앞의 건물을 의아한 듯 훑어보았다.

“황후궁이 아닌 것 같은데.”

비올레타가 벙벙한 얼굴로 라키엘을 돌아보자 라키엘이 씩 웃었다.

“여기? 네 궁이지.”

“우리 황후궁으로 가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황후가 네 궁에 와 계시는데 뭐 하러. 그나저나 네 궁은 어때? 죄다 뜯어 고쳤거든.”

라키엘에게 이끌려 걸어가면서도, 흰 모래를 뿌려 놓은 듯 햇빛 아래 화사하게 반짝이는 외벽을 멀거니 바라보며 비올레타가 반문했다.

“당신이요?”

“그래.”

“당신 돈으로?”

라키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미쳤나? 황실에 다 청구해야지. 그래서 일부러 드워프까지 불렀어. 원래는 미하일의 궁을 좀 손보고 바로 들어가도 됐었는데…….”

활짝 열린 거대한 문 안쪽으로부터 빠르게 걸어 나오는 여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화려한 시녀들이 연이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저분께서는 미하일의 궁을 그대로 박제하고 싶어 하실 정도라.”

그렇게 말하며 라키엘이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기다리지 않고 계단까지 내려오는 파사칼리아의 모습에 비올레타가 라키엘의 손을 놓고, 파사칼리아에게로 반갑게 뛰어갔다. 파사칼리아의 뒤에 있던 시녀들이 그렇게 뛰시면 위험하다고 제각기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아랑곳 않고 뛰어가 그녀 앞에 서자, 파사칼리아가 비올레타를 세게 껴안았다.

“비올레타!”

‘그때는 정말, 내 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에비가일.’

제 목 뒤를 잡은 손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그 떨림에 당황한 찰나 파사칼리아가 고개를 묻은 제 어깨가 이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황후가 공식적으로 13년 만에 만난 딸을 안고 그렇게 우는 모습에, 시녀들 중 몇몇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있었다. 어쩐지 코끝이 시큰해진 비올레타가 고개를 숙였다.

“비올레타…… 내 딸…….”

따뜻한 눈물은 옷을 적시고 이내 차갑게 식었다. 그 위로 또다시 따뜻한 눈물이 떨어지고, 또다시 식기를 반복했다.

당신에게 뛰어오던 날 보고, 당신은 무엇을 봤을까. 어릴 적 비올레타가 당신에게 달려와 안기던 모습을 떠올렸을까. 혹은 당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열여덟 살의 비올레타를 본 걸까.

비올레타가 쓴 숨을 삼켰다.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울며 껴안은 자신이 비올레타가 아니어서인지, 그녀가 불쌍해서인지, ‘비올레타’가 불쌍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저에게 이리 쏟아지는 감정 중 그 어디에도 제가 없기 때문인지. 제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기묘한 통증이었다.

비올레타는 그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제 손을 들어 파사칼리아를 마주 안았다.

당신에게로 뛰어가던 나 역시 어머니를 떠올렸으니까.

다시는 안아 볼 수 없을, 내 어머니.

그래, 나도 당신과 같다. 비올레타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파사칼리아의 손에 곧바로 이끌려 접견실이며 서재며 둘러보다가 들어간 방은, 공저에서 제가 지내던 파사칼리아의 방과 분위기가 굉장히 비슷했다. 비올레타가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 방은…….”

“라키엘에게 들었다. 공저에서 쓰던 내 방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면서, 그 방 그대로 해 놓으라 하더구나. 물론 그럴 순 없지.”

하얀 대리석 위로 상아색 카펫이 폭신하게 깔려 있고, 하얀 가구들이 늘어선 벽면으로 아주 연한 분홍색의, 작은 다마스크 패턴 벽지가 드문드문 보였다. 커다랗게 확 트인 창가에는 벽지보다 훨씬 큰 다마스크 패턴으로 은사가 고급스럽게 수놓인 연하늘색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공저의 방처럼 밝지만 훨씬 더 따뜻하고 화려했다.

방 한편에 딸린 침실은 양 문이 모두 활짝 열린 채 하얀색의 하늘하늘한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다 어마…… 마마께서 하신 것입니까?”

비올레타가 조심스럽게 건넨 어마마마라는 말에 파사칼리아의 눈이 얕게 일렁거렸다. 무언가 북받치는 것을 삼키듯 잠시 멈칫한 그녀가 이내 다정하게 웃었다.

“그래. 커튼, 가구, 벽지며 네가 여기서 신을 슬리퍼 하나까지 모두 내가 다 고른 거란다. 이제 네가 지낼 방이니까.”

그 상냥한 말에 비올레타는 눈을 굴려 테이블 곁에 다소곳하게 놓인 분홍색 비단 슬리퍼를 발견했다. 어쩐지 이 방의 어떤 것보다도 그 자그마한 슬리퍼 하나가 놓인 것에 가슴이 조금 시렸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이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라키엘은 자기가 죄다 뜯어고쳤다고 하던데.”

“사내가 뭘 알겠니? 그 아이야 목재를 어디 걸로 하니, 외벽에 무엇을 바르니 그런 것이나 했지.”

“조카 없는 데서 그런 식으로 말하시깁니까?”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파사칼리아와 비올레타가 뒤돌아보자 어느새 방에 들어온 라키엘이 파사칼리아의 손등에 대충 키스했다.

“조카는 이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양, 딸만 데리고 홱 들어가 버리시고요.”

“너는 질릴 만큼 봤잖니.”

“그렇다고 아는 체 한 번을 안 하십니까? 이리 차별하실 수가.”

또다시 되돌아오는 말에 파사칼리아가 지그시 노려보는 눈을 하자 라키엘은 느긋한 얼굴로 소파로 가 풀썩 앉았다. 파사칼리아가 이번엔 진짜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라키엘, 어찌 새 방에 주인이 앉아 보기도 전에 객이…….”

새집에 주인이 가장 먼저 앉는 것은 그란토니아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풍습이었다. 당연하게도 파사칼리아의 입에서 잔소리가 쏟아져 나오려는 찰나, 라키엘이 소파 주변에 있던 비올레타의 팔을 잡아당겼다.

예고도 없이 그대로 끌려가 라키엘의 옆에 주저앉혀진 비올레타가 깜짝 놀라 파사칼리아의 눈치를 보며 작게 쏘아붙였다.

“놀랐잖아요!”

그런 비올레타는 전혀 아랑곳 않고 라키엘이 짐짓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서 계신데 저희가 감히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앉아 있으니…….”

“난 당신이 앉힌 거죠!”

“이것을 마땅히 책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당신만 혼나야죠!”

제게 풍습으로 잔소리를 하려거든 황실의 예부터 따지라는 것이었다. 풍습을 따지려면 황실의 예도 따져야 하고, 황실의 예를 따지면 제가 이미 앉혀 버린 비올레타도 문제가 되니 어디 한번 잔소리를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식이었다.

뻔뻔한 라키엘을 조금 기가 막힌 듯 바라보던 파사칼리아가, 그 곁에서 또박또박 지적하는 비올레타까지 보고는 이내 웃고 말았다. 비올레타가 파사칼리아 앞에서 라키엘에게 너무 격의 없이 굴었나 싶어 그제야 제 입을 가렸다.

파사칼리아는 비올레타에게 부드러운 얼굴로 웃어주고는 밉지 않게 라키엘에게 핀잔했다.

“넌 정말 네 아버지와 하나도 안 닮았다.”

“고모님도 할아버님과 하나도 안 닮으셨습니다.”

“내가 말을 말지. 얘는 어릴 때부터 싫은 소리 한마디라도 들으면 그렇게 싫어했단다.”

파사칼리아의 말에 비올레타가 웃었다. 공저에서도 아그네스가 그에게 무어라 잔소리를 할라치면 미간부터 찌푸려지던 게 기억나서다. 라키엘이 한쪽 눈썹을 미세하게 치켜올렸다.

“싫은 소리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기억나니? 네가 다섯 살 때도 말이…….”

“기억 안 납니다.”

비올레타가 낭랑하게 만든 목소리로 그를 지적했다.

“라키엘, 어디 버릇없이 어마마마 말을 잘라요?”

“네가 지금 나에게 버릇을 논했나?”

“내가 뭐 어때서요?”

“여태 네 버릇없음을 돌아봐라.”

그렇게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양을 보고 있던 파사칼리아의 온화한 얼굴이 돌연 딱딱하게 굳었다.

“비올레타!”

부르는 소리가 마치 작게 터져 나온 비명 같았다. 비올레타가 그 부름에 놀라 파사칼리아를 바라보자, 약간 질린 얼굴로 파사칼리아가 걸어와 비올레타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네게, 네게 손을 댔니?”

“어마마마.”

“그가, 너마저.”

“아닙니다. 별일 아니에요.”

“너마저 죽이려 해?”

나직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 공황이라, 비올레타는 뭐라 더 말을 못한 채 제 곁의 라키엘을 곤란하게 바라보았다. 라키엘 역시 가라앉은 눈으로 저를 보고 있자 비올레타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것을 본 라키엘이 한숨 쉬듯 파사칼리아를 불렀다.

“고모님.”

“어찌 이리, 어찌…….”

“황후 폐하.”

단단하게 부르는 소리에 파사칼리아의 일렁이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파사칼리아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스스로를 가라앉히고는 뒷걸음질 쳐 맞은편 소파에 우아하게 앉았다.

비올레타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황제의 접견실을 빠져나올 때만 해도 무언가 미심쩍어 파사칼리아에게 물어야 할 것 같았는데, 뭐 하나 콕 집어 말할 수 없이 애매했다.

비올레타는 얕게 한숨을 뱉고는 그저 전달이나 하기로 했다.

“딱히 황제께서 저를 겁박했다든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목은 목걸이에 쓸린 것입니다.”

“목걸이에 쓸려?”

“잡아당기셨습니다.”

“……무어라 하며?”

“황후가 무어라 하며 이 목걸이를 씌워 줬느냐고. 내가 네 나이 적에 아홉 번째 황자가 내게 준 목걸이를 걸고, 그 황자가 그 목걸이를 걸어 줄 적 내가 입었던 드레스를 입으라고 했느냐고.”

비올레타는 기계적으로 제가 들었던 말을 읊었다.

“그렇게 소리 지르셨습니다. 약간, 이성을 잃으셨던 것 같고요.”

파사칼리아가 실소했다. 잠깐 말을 고르던 비올레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전에는 저더러 나이를 묻고…… 조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어마마마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비웃듯 얕게 웃음 지은 파사칼리아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역겹게도.”

“……마지막에는 어마마마께 전하라고도 하셨습니다. 절반은 성공했고, 제 십삼 년은 어떤 형태로든 보상하겠다고.”

“그 보상이란 게, 이 종이가 시작인가?”

라키엘이 무표정하게 제 프록코트 안에서 상아색의 빳빳한 작은 종이를 꺼냈다. 황실에서 시종을 통해 간단히 메모를 전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제게 건네지는 종이를 비올레타가 받아 펼쳤다.

“나흘 뒤 5황녀를 위한 연회가…….”

“장소를 봐.”

“……블라디모로.”

단어를 매끄럽게 내뱉음과 동시에 비올레타의 입매가 뻣뻣하게 굳었다. 블라디모로는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홀이었다. 물론 그게 대단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곳이 황제의 대관식 때나 열리는 건물이라는 거지.

점점 커져만 가는 사기극의 스케일에 머리가 아팠다. 그곳이 열리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황제의 대관식, 황제의 결혼식, 황제의 탄신일, 그리고 황제의 장례식 때뿐이었다.

물론 역대 황제 중 제 자식을 아낀 나머지 간혹 블라디모로에서 황자나 황녀의 결혼식, 장례식을 치르게 한 황제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엄청난 반대를 이겨 낸 산물이었다. 폐위된 어느 황제의 죄목 중 하나가 ‘딸의 생일에 사사로이 블라디모로를 연 것’이었을 정도였다.

물론 그는 폐위될 만해서 폐위된 것이겠지만.

“……이건 또 언제 받은 거예요?”

“네가 고모님과 눈물의 상봉을 하고 있을 무렵에.”

파사칼리아가 픽 웃었다.

“며칠 시끄럽겠구나.”

“그 멍청한 치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줄수록 좋습니다. 설령 공론화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그들에겐 황제가 황녀를 위해 블라디모로까지 열려고 했다는 게 중요하니까.”

“시작부터 아주 화려하네요.”

머리가 아팠다. 비올레타가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황후궁으로 가 늦은 점심을 먹고 비올레타가 궁에 돌아오자, 어쩐지 계속 보이지 않았던 아그네스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잘 차려입은 영애 셋이 서 있었다. 아그네스가 비올레타가 궁금해 할 새도 주지 않고 바로 소개했다.

“앞으로 전하를 모실 영애들입니다. 왼쪽으로부터 메이어 백작영애, 네이튼 자작영애, 몬드리올 백작영애입니다.”

아그네스가 대수롭지 않게 읊은 그들의 성들이 죄다 엄청난 탓에 비올레타가 눈만 몇 번 깜빡이다가, 혹시나 멍청하게 놀란 티가 날까 급히 웃었다. 거기다 하나같이 작위까지 붙은 꼴을 보니 방계도 아닌 현 가주의 직계였다. 경악스러웠다.

“반가워요, 영애들. 각자 소개 좀 해 주겠어요?”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메이어 백의 장녀, 밀로일라 메이어입니다. 올해로 열여덟입니다.”

맨 왼쪽에 서 있는 밀로일라는 도도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메이어 백작가는 유서 깊은 명문가 중의 명문가로, 추밀원 11가문 중 하나일 만큼 대단했다.

특히 메이어는 제국에서 은행을 최초로 설립한 가문으로 이제는 그 메이어 은행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그리고 메이어에는 그 거대한 은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었다. 밀로일라는 바로 그 메이어의 장녀였다.

그러니까, 어째서 이런 대귀족의 딸이 제 시녀로 왔느냐는 것이다. 물론 유력한 가문의 딸이 유희 삼아, 혹은 집안의 이해관계로 인해 황궁에 시녀로 잠시 들어오는 일이야 전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유력하다’는 말은 메이어가의 권세를 설명하기엔 한참 모자랐다.

그렇다고 밀로일라 하나가 예외인 것도 아니었다. 밀로일라의 뒤를 이어 자신을 소개한 디아나 네이튼의 네이튼 자작가는 수도에서도 알아주는 대부호였다.

자그마한 무역 회사로 시작했던 네이튼은 이제 황제에게 칙허장을 받은 아홉 개의 칙허 회사 중, 두 번째로 큰 회사를 가지고 있었다. 가문 자체로는 추밀원의 일원인 메이어나 몬드리올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웬만한 백작가 두셋 합친 것보다 나을 정도다.

그녀의 짧은 소개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그런 네이튼가의 영애가 종신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마치 저처럼.

가장 오른쪽에 있던 영애는 루이즈 몬드리올로, 메이어와 같이 추밀원 11가문 중 하나인 몬드리올 백작가의 영애였다. 몬드리올 백은 현재 제국수도방위사령부의 총사령관으로, 클레이런스 후작가와 함께 유명한 군인 가문이었다.

세 명째 생각하다 보니 이제 대단하다 생각하기도 지쳤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나 동시에.

비올레타가 그렇게 대단하단 생각에 지칠 즈음, 시녀들에게 무어라 당부하던 아그네스가 비올레타에게 공손히 고해 왔다.

“내일 오전에는 전하를 환영하는 황실 조찬이 있습니다. 황실의 일원으로서 처음으로 자리하는 것이니, 각별히 준비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빨리 잠자리에 드세요. 아시겠지요?”

마치 딸에게 하듯 조목조목 다정하게 타이르는 말에 비올레타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아그네스가 사라지자, 방 안에는 초면인 사람들이 모였을 때 특유의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비올레타는 일단 셋 다 자리에 앉게 했다.

비올레타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에비가일은 제 또래의 귀족 영애들은 물론 아예 또래 여자애들과 친밀하게 모여 어울려 본 적이 없었다. 사촌들과는 나이가 맞지 않았고, 사교계에 데뷔하기도 전에 집이 폭삭 망해서 친구를 만들고 교류를 가져 볼 수도 없었다.

일을 하면서 친해진 또래 평민 여자애들은 있었지만 저나 그들이나 하루 종일 일만 하기에도 바쁜 처지라 그저 스쳐 지나가며 농 몇 마디 하는 것이 제가 또래를 겪은 전부였다. 유폐된 황녀에게 갈 시녀라 교육도 혼자서 받았다.

즉, 지금 그녀는 매우 어색했다. 잠깐 생각하던 비올레타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제일 만만한 질문을 골랐다.

“어떻게 내 시녀로 오게 된 건가요, 다들?”

특정한 대상이 없는 질문에 밀로일라와 루이즈가 동시에 자신들의 가운데에 있던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가 스무 살로 셋 중 가장 연장자여서 그런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앞장세우는 것 같았다.

하긴 딱 봐도 언니같이 차분하고 똑똑하게 생겼다. 본인도 그렇게 뭔가 먼저 하는 게 익숙한 듯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우선, 전하께선 저희에게 말을 편히 해 주세요. 그래야 저희가 편하답니다.”

뭔가 거역할 수 없는 단호함이라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곧바로 ‘아, 응’하고 조금 머쓱하게 말했다. 디아나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한 해 전 지펜 아카데미를 졸업했습니다.”

“공부를 잘하시나 봐요.”

“조금 하는 편이죠.”

디아나는 차분한 인상과는 달리 조금 뻔뻔하게 긍정했다.

“그 뒤엔 에른스트로 유학을 가서 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졸업하고 돌아오니 약혼자가 생겨 있었어요.”

어머! 곁에 있던 루이즈가 놀란 듯 추임새를 넣는다. 밀로일라가 예의 도도한 표정으로 디아나에게 슬쩍 물었다.

“잘생겼던가요?”

도도하고 품위 있게 내뱉은 말치고는 그다지 중요하게 들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디아나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못생겼어요.”

루이즈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느 가문 영윤令胤이에요?”

“보네비스 백작의 조카라더군요.”

“집안은 되게 괜찮네.”

밀로일라가 진지하게 품평했다. 루이즈가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쳤다.

“그치가 가진 거라곤 오직 그거 하나예요. 제 숙부만 믿고 스물일곱이 되도록 놀고먹는 것밖엔 할 줄 아는 게 없고, 방탕하고, 못생겼고, 말해 보니 머리에 든 것도 없고, 공용어조차 못 하고, 품위도 없고, 미래도 없고! 그러니까 그때까지 결혼을 못 했지!”

아까 그 차분했던 사람이 맞는지 조금 의심스러웠다. 디아나의 언성이 점점 높아져갔다.

“……디아나? 좀 진정해 볼래?”

“내가, 겨우 그 못생긴 멍청이랑 결혼하려고 지펜까지, 가서! 공부한 줄 아나! 그리고 전하보다 키도 작았어요!”

“그거 정말 안 될 사람이네.”

키가 비올레타보다 작다는 말에 밀로일라가 정색하며 중얼거렸다. 비올레타가 점점 이상해지는 분위기를 정리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디아나는 결혼을 피해 온 거네?”

“네. 그렇죠. 원래 독신주의자기도 했고. 아무리 반항해도 안 되는 걸 알았으니 아예 결혼 못 하는 신분으로 만들자 싶어서요.”

“도대체 아버님이 어떻게 허락하셨어? 평생 궁에서 사는 걸.”

“모르시는데요? 아, 지금쯤 아셨을지도 모르겠어요.”

“……너, 종신직이라고?”

“네.”

무슨 문제 있느냐는 듯 뿌듯한 미소에 비올레타는 할 말을 잃었다. 비올레타가 뻣뻣하게 고개를 틀어 밀로일라를 바라보았다.

“밀로일라, 너는?”

“저는 아버님이 가라고 해서요.”

“끝?”

“저희 집은 까라면 까야 해요.”

도도하고 우아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 내용이 다소 거칠어 비올레타가 잠시 흠칫했다.

“동생이랑 후계 경쟁 중이라 어쩔 수가 없어요. 아버지한테 잘 보여야 해서.”

“동생? 남동생?”

“네. 생후 이십삼 개월 된.”

“어머, 귀엽겠다! 밀로일라, 다음에 궁에 데려와요!”

루이즈가 해맑게 밀로일라의 속을 뒤집는 발언을 했다. 아마 밀로일라는 늦둥이 남동생 때문에 후계 서열에서 밀려난 모양이었다. 디아나가 손을 들어 네 맘 다 안다는 듯 밀로일라의 어깨를 토닥였다.

“십오 년을 내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네 게 아니야. 넌 그게 없잖아?’라면서 사라져 가는 기분을 알아요? 전 쭉 메이어의 후계로 살아왔어요. 헤벤의 금융론을 열여덟 번이나 읽었다고요.”

“어쩜, 그 짜증 나는 책을…….”

고운 입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말에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디아나가 그 책이 진심으로 싫은 듯 작게 진저리 치며 밀로일라에게 공감했다. 밀로일라가 제 손에 얼굴을 묻으며 짐짓 슬프게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왜 쓸데없이 아버지랑 사이가 좋아서…….

비올레타는 생각했다. 상태가 전체적으로 좀 이상한 것 같았다. 구성도 이상했다. 저까지 합쳐 놓으면 정말로 이상해질 것 같았다. 이내 비올레타가 포기한 듯 허허 웃으며 루이즈에게도 예의상 마저 물었다.

“루이즈는?”

“에델가르드 공께서 직접 저에게 편지를 보내 주셨어요!”

사실 메이어야 선조 때부터 에델가르드와 대놓고 잘 지내는 가문이고, 네이튼은 들어 보니 그냥 어쩌다―온전히 딸의 의사로― 얻어걸린 것 같았다. 하지만 몬드리올은 몇 대 전부터 황위 싸움이니 뭐니 항상 중립만 선언해 온 가문이라, 몬드리올의 딸이 시녀로 온 것이 제일 의아했었다.

“입궁의 좋은 점, 시녀가 되면 주어지는 혜택, 각종 근무상 복지, 많은 영윤들을 만나 볼 수 있는 기회 획득 등등 자세히 쓰여 있었는데 정말 너무너무너무 가고 싶더라고요! 에델가르드 공은 원래 그렇게 글을 세심하고 재밌게 잘 쓰시나요?”

그래, 의아했었는데……. 라키엘은 가문을 통하지 않고 저 철없는 백작 딸내미를 공략한 모양이었다. 바로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아마 그 재밌고 세심한 『본격 시녀 되기 안내서』는 카일이 썼을 테고. 비올레타가 떨떠름하게 웃었다.

“……아, 그래?”

“아버지께서 반대하시는 걸 겨우 설득했어요! 일주일 내내 밥 안 먹고 사령부 집무실에 눌러앉아서 종일 졸라 댔더니 아버지가 백기 드신 거 있죠. 제가 전하의 시녀가 되는 건 아마 운명 같아요!”

조작과 생떼의 산물인데 어딜 봐서 운명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랄하게 외치는 게 귀여워 비올레타가 웃고 말았다. 루이즈는 아직 열여섯이라 조금 어리고 순진한 티가 났다.

어느새 느슨하게 풀린 분위기에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편하게 웃고 있었다.

정찬실로 이어지는 회랑은 오전 특유의 쌀쌀하고 개운한 공기로 가득했다. 비올레타는 시종을 물리고 모퉁이를 돌아 기다란 회랑를 홀로 걸었다. 널따란 공간에 울리는 것은 오로지 제 발소리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느려지는 발걸음을 의식하고도, 비올레타는 부러 더 천천히 걸었다. 멀리 보이는 입구는 가까워질수록 꺼림칙했다.

마치 어릴 적 읽었던 동화에서나 나오던 지옥문처럼. 그러다 문득 제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비올레타가 저도 모르게 홱 뒤돌았다. 그 기척이 그렇게 가까워지기 전까지, 제가 전혀 느끼지 못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네가…….”

“…….”

“비올레타구나.”

낮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비올레타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이 목소리가, 이 다정함이 진짜인지를. 이 사람이 누구인지보다도, ‘어떤’ 사람인지를 가늠하고 마는 것은 아마 자신이 의심이 많아져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심은 제 처지와, 지금 제가 밟고 선 장소 때문이리라.

황제의 가족들만 사용하는 정찬실의 바로 앞 회랑를 저 혼자 이리 쏘다닐 청년은 오로지 황제의 시종과 황자뿐이었다. 비올레타가 무표정하게 남자의 화려한 금발과 벽안, 그리고 유려하게 잘생긴 얼굴을 훑어 내렸다.

그 찰나의 침착한 탐색에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자신이 반가워해야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제야 비올레타는 자신이 왜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인지 납득했다. 그는 기사이자, 군인이었다.

“미하일과 눈이 똑같네.”

작게 탄성처럼 내뱉은 말은, 황제의 색과 같다는 말이 아닌 제법 신선한 말이었다. 비올레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1황자십니까?”

“보자마자 내뱉는 말이 냉랭하구나. 빌키어스…….”

“빌키어스 드 그란토니안 모레 카디링거. 알고 있습니다, 1황자님.”

비올레타가 빌키어스의 말을 자르고는 해사하게 웃었다. 입과 같이 휘어지는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싸늘한 것을 빌키어스는 놓치지 않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미하일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미하일의 누이였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맞이했을 카디링거의 암살자까지 생각한다면.

저를 보고 진심으로 웃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신병자리라. 빌키어스가 낮게 웃었다.

“그래서, 날 계속 그리 1황자라 부를 것이냐?”

“……오라버니라 불러 드리길 바라십니까?”

“보통 여동생들은 자기 손위 형제를 그리 불러.”

그리고 보통의 형은 동생을 죽이지 않지. 그렇게 비꼬듯 속으로 뇌까린 비올레타가 그리 무례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적당한 가식으로 웃으며 차분하게 긍정했다.

“그러죠, 오라버니.”

“……너는 벌써 그렇게 웃는구나.”

‘너는’ 그렇다면, 황태자는 그렇지 않았단 말인가? 비올레타는 라키엘이 미하일을 떠올리던 표정을 기억했다. 제 아버지를 미하일이 똑같이 빼닮았다고, 착해빠진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하던 그 얼굴. 좋았던 시절을 돌아보는 사람처럼, 그의 밝음을 되짚던 사람의 얼굴.

당신이 어떻게, 그 라키엘 같은 눈으로.

“네가 살아온 세월이 그러하겠지. 하지만 비올레타.”

그의 이어지는 말에 비올레타가 웃고 있던 입매를 내려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저 안타까운 시선이 불편했다. 그게 진심이라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정반대편의 사람이었다. 그 이유만으로도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뻔히 미운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빌키어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편하게 살아라.”

“…….”

“너는, 그리해도 된다.”

딱딱하게 굳은 입매로 뭐라 말하려던 비올레타가, 그대로 입을 꾹 다물며 몸을 돌렸다. 제가 무슨 권한으로. 제가 황제가 될 테니까? 그래서 ‘이젠’ 그녀를 살려 줄 거니까?

비올레타는 그를 진심으로 비웃었다. 그것은 진심이어서 주제넘은 말이었고, 다른 이도 아닌 그가 제게 하는 것만으로도 뻔뻔한 말이었다.

그는 감히 ‘비올레타’에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됐다. 비올레타는 조금 흐트러졌던 제 마음에 제 본래 처지와, 라키엘과, 어제 제가 목도했던 파사칼리아의 깊은 공황을 떠올렸다.

그녀는 제 눈앞에 있던 사람에게 모두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가 바로 제 어머니였다.

비올레타가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그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비올레타를 따라잡은 빌키어스가 그녀의 손을 낚아채 단단하게 잡고, 그대로 그녀를 우아하게 이끌었다.

“뭐 하시는…….”

“에스코트.”

“지금 제게 무례하신 것 아십니까, 오라버니?”

“모르겠다. 오라비가 여동생을 에스코트 해 주는 게 무례한가?”

뻔뻔하게 되묻는 모양에 비올레타는 입을 다물어 시선을 앞으로 했다. 어느새 정찬실의 시종이 빌키어스와 비올레타가 당도함을 알렸고, 문이 열렸다. 그들이 방에 들어섰다. 커다란 샹들리에 아래로 아득히 길게 뻗은 거대한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서로 띄엄띄엄 떨어져 앉아 있었다.

“이제 황제 폐하만 오시면 되겠군요.”

방 안을 둘러보며 그렇게 내뱉은 빌키어스가 파사칼리아를 향해 웃으며 예를 취하고는, 비올레타의 손을 이끌어 황제의 자리 곁에 섰다.

“오랫동안 황실의 일원으로서 제 자리를 누리지 못했던 우리의 비올레타가 드디어 우리의 곁에 돌아왔습니다. 오늘처럼 기쁜 조찬이 최근 몇 년간 없었지요. 제가 감히, 가장 먼저 태어난 그녀의 동기로서 그녀에게 가족을 소개할 영광을 누려도 되겠습니까, 황후 폐하?”

“그리해 주렴.”

선선히 떨어진 허락에, 빌키어스가 말을 이었다.

“황후 폐하의 바로 곁에 계신 분이 1황비 전하.”

빌키어스의 말에 비올레타가 예를 취하자 베티스가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했다. 빌키어스와 같은 화려한 금발의, 중년에 접어든 미인이었다.

파사칼리아가 아주 우아한 미인이라면, 베티스는 화려하지만 미소 띤 얼굴이 온화해 보이는 미인이었다. 아마도 만들어진 것이리라.

비올레타는 그녀의 냉혹한 눈을 마주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곁으로 시선을 돌리자, 자리가 비어 있었다.

“1황비 전하 곁의 공석은 돌아가신 2황비 전하의 자리.”

20년 전 죽은 2황비 밀레이네즈. 알레노브가의 딸. 지금은 그녀의 동생이 백작위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 옆이 3황비 전하.”

어두운 갈색의 꼬불꼬불한 머리칼을 느슨하게 올려 묶은 여자는 파사칼리아나 베티스보다 젊어 보였다. 황제가 좋아하는 남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그 정숙한 색을 보완하듯 가슴선이 깊게 파인 드레스와 진한 화장으로 요염했다.

카트린느의 고양이 같은 눈이 비올레타를 성의 없이 훑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베론 후의 동생이다. 그녀가 저를 탐탁지 않아 하거나 말거나, 비올레타는 그저 어쩐지 둘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 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카트린느보다도 더 젊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4황비 전하.”

3황비 카트린느가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면, 그녀는 겨우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시데 른 공왕의 딸 엘로이즈 드 시데른. 그녀는 십수 년 전, 시데른 공국과의 전쟁에서 황제가 이긴 후 요구한 전리품 중 하나였다.

아직도 세간에서는 그녀를 4황비라는 말보다는 ‘시데른의 전리품’이라 부르곤 했다. 그녀의 굴욕적인 결혼은 수십 년간 제국 변경을 위협하던 시데른에 대한 압도적인 승리의 상징이었고, 시데른을 미워한 제국민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좀처럼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 결혼 외에는 세간에서 떠들 거리가 없어 소문 하나 없는 여자였다.

파사칼리아나 두 명의 황비와는 달리 그리 미인은 아니었으나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여린 모습이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엘로이즈는 제 인상처럼 순하게 웃으며 비올레타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좌측으로 우리의 남매들. 좌측의 상석은 황태자의 자리, 그 곁의 빈자리는 1황자인 내 자리. 올해로 스물셋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네 언니, 3황녀 일로벨라. 스물하나다. 미하일과 같은 나이지.”

마주 인사하고 고개 들어 본 얼굴이 제 어미와 너무나 똑같아 조금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제 어미와는 달리, 화려한 이목구비 그대로의 도도한 인상이 얼굴 위로 전부 드러나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 곁으로 3황비 전하의 4황자 킬리안. 열아홉이라 나처럼 네게 오라버니가 된다.”

제 어미처럼 대충 고개만 까딱한 4황자가 무관심하게 고개를 휙 돌렸다. 옅은 회갈색 머리칼이 따뜻해 보이는 것이 무색하게도 마치 꽁꽁 얼은 호수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네 자리를 지나, 우리 막내, 6황자 이안. 그러고 보니 벌써 네가 여덟 살이나 됐구나.”

빌키어스의 말에 이안이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귀여워 비올레타가 인사하며 풋 웃자, 빌키어스가 비올레타를 힐끔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비올레타가 저를 자리로 안내하라는 듯 잡힌 손을 살짝 당겼다.

빌키어스가 부드럽게 그녀를 킬리안과 이안의 사이로 이끌자 비올레타가 배운 대로 우아하게 앉았다. 그리고 빌키어스가 제자리로 돌아가 앉자, 파사칼리아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무례하구나, 1황자.”

순간 방 안의 모든 시선이 파사칼리아에게로 모였다가 흩어졌다. 한 치의 노여움도 보이지 않는 차분함이었다. 빌키어스 역시 그런 차분함으로 웃으며 정중하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언가 실수가 있었습니까, 황후 폐하?”

“2황자 미하일이 애초에 어찌 황제의 좌측 상석에 앉았더냐?”

“그것은―.”

“황태자였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 아들이었기 때문인가?”

“황후 폐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제 무지를 용서하십시오.”

그녀의 소생으로서 살아온 것이 여태 미하일 하나였기에 빌키어스뿐 아니라 이 방의 모두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었다. 2황자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황태자가 됐고,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는 황제의 좌측에서 가장 상석에 앉았다.

황태자가 앉아 마땅할 황제와 황후 다음의 자리. 물론 그가 황태자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자리는 달리 황태자가 없는 한 황후의 아들인 미하일의 자리였으리라.

미하일이 태어나기 전에는 제 자리였으나, 제 어머니나 그것에 이를 갈 뿐 미하일보다 고작 두 살이 많은 빌키어스는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2황자가 저보다 상석에 앉는 것이 황후의 자식이기 때문인지 황태자이기 때문인지는 애초에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문제였다. 빌키어스는 그제야 제 어머니가 정말로 무엇에 이를 갈았던 것인지를 생각했다.

제 어머니는 1황자인 제가 ‘황태자가 아니어서’ 제 동생인 황태자 다음에 앉는 것보다도 ‘황후의 아들이 아니어서’ 밀려난 것이 분했으리라. 고작 밥 먹는 자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제가 황후가 아닌 것을 절감하고, 통감했겠지.

듣는 이가 무안할 만한 지적이었으나 빌키어스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경직된 엘로이즈의 곁에서 카트린느가 즐거운 듯 생글거렸고, 카트린느의 맞은편에서 일로벨라가 이를 악물었지만, 베티스는 아무렇지 않게 부드럽게 웃으며 제 아들에게 말했다.

“일어나라, 1황자.”

빌키어스가 우아한 동작으로 일어섰다.

너와 내 아이는 타고난 출생이 다르고, 그 고귀한 자리가 다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파사칼리아의 눈이 저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음을 빌키어스가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어떤 사사로운 멸시도 담겨 있지 않은, 그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빌키어스는 그것을 담담하게 인정했다

“무례를 용서해라, 비올레타.”

비올레타는 사과와 함께 부드럽게 내밀어진 손에 불편하게 제 손을 얹었다. 손은 아까처럼 따뜻했고, 이끄는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다.

겁에 질려 있고, 비아냥거리고, 싸늘하고, 차분하고, 무관심하고, 분노한 갖가지 시선들이 제가 맞잡은 손에 한데 뒤엉켰다. 그리하여 빌키어스가 인도한 비올레타가 앉은 자리는, 본래 빌키어스가 앉았을 자리였다. 한 명씩 그 옆으로 자리를 옮기는 잠시의 소란한 소리에 비올레타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누군가는 눈에 칼을 숨긴 채 여전히 절 보며 웃고, 누군가는 무언가 트집을 잡으려 사람을 훑고, 누군가는 제 목을 조를 듯 바라본다.

이것이, 그가 소개한 ‘가족’이었다.

황제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조찬에 오지 않은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살얼음판 위에 서서 황제까지 보는 것은 저부터가 사양하고 싶었다.

시종이 알리는 말에 3황비 카트린느가 비올레타더러 들으라는 듯 생글거리며 중얼거렸다. 마치 그러면 그렇지, 라는 양.

“딸과 생전 처음 같이하는 조찬에 어찌 오지 않으실까.”

“그것은 시종이 이미 말했습니다, 3황비 전하.”

빌키어스가 마치 못된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타이르는 투로 그녀가 더 비꼬는 것을 막았다. 카트린느의 눈이 가늘어졌다.

“1황자, 내가 귀를 먹어 시종의 말을 듣지 못했겠습니까?”

“아까는 마치 듣지 못한 듯 그러시기에.”

“친절하기도 해라.”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맞받아치는 빌키어스에 불쾌해진 카트린느가 설핏 찌푸린 얼굴로 비꼬았다. 베티스가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5황녀를 위한 첫 파티가, 블라디모로에서 열린다고 들었습니다.”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그저 모두에게 한 말 같았지만, 비올레타는 자신을 향해 말한 것임을 눈치채고 겸손하게 대꾸했다.

“과분한 일입니다.”

“어찌 그것이 과분한 일이겠습니까? 5황녀가 받아 마땅할 보상이지요. 황녀는 십삼 년간 황실에 억울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다만…….”

뱀처럼 서늘한 눈동자가 비올레타를 훑는다. 비올레타가 무표정하게 시선을 받아넘기자, 서리 같은 눈이 아름답게 휘어졌다.

“황실의 높은 일을 귀족 나리들은 잘 모르지요. 그저 황실에 원칙이나 외칠 줄 알지, 황제 폐하께서 딸을 헤아리시는 마음을 이해나 할까요. 그것이 걱정이군요.”

“…….”

“보나 마나 모두가 반대할 일, 폐하께서 생각해 주신 것에 되레 5황녀가 입궁하자마자 상처를 입을까 봐, 그것이 걱정됩니다.”

“저는…….”

비올레타가 천천히 말을 고르며 파사칼리아를 흘끗 보고는 옅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그저 폐하께서 절 위해 블라디모로를 언급하신 것만으로도 넘치는 영광이라, 충분히 행복합니다.”

베티스의 태연한 얼굴 아래로 아주 잠깐 미세하게 입매가 뒤틀리는 것을 비올레타가 놓치지 않고 더욱 환하게 웃었다. 저야 그녀의 아들이 3황비에게 했듯, 일부러 답답하게 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순수하게 내뱉는 과시에 정작 얼굴을 일그러트린 것은 비올레타가 마주하고 있던 베티스가 아닌, 황제가 조찬에 오지 않았음을 비웃던 카트린느였다. 그녀는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 베티스와는 대조적인 여자였다.

비올레타는 차라리 그녀가 낫다고 생각했다. 이 딱딱한 가면들 속에 저렇게 감정을 오롯이 드러내는 건 오직 저 여자뿐이었다.

이제 제 얼굴마저도 제 것 같지 않은 기묘한 느낌 속에 비올레타가 천천히 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저를 둘러싼 가면들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다들 제 궁으로 돌아가 다시 식사할 것이다. 포크를 세 번은 쥐었을까. 말이 조찬이지 형식상 그저 모이고, 앉았다가, 다시 흩어졌을 뿐이었다.

파사칼리아가 너무 피곤해 보여 먼저 배웅한 뒤, 비올레타는 시녀들을 데리고서 한가로이 황궁을 걸었다. 그 불편했던 자리 탓에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았고, 정찬실이 있던 곳과 황궁 도서관이 가깝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궁에 들어온 지 겨우 이틀째지만 누군가 자신에게 ‘오늘의 과제’를 내주지 않는 일상이 비올레타는 이상했다. 그게 이상하다니, 비올레타는 제가 철저히 그 교육에 길들었음에 작게 몸서리쳤다. 그래도 제가 할 일을 제대로 할수록, 저도 당당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길들어 버렸다는 회의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비올레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제 옆에서 조잘대는 루이즈를 바라보았다. 루이즈가 저 멀리 지나가는 청년을 보고는 들떠 물었다.

“저기, 저기 펠론가 영윤 맞죠? 그쵸, 전하?”

“……넌 나한테 뭘 바라니?”

비올레타의 말에 루이즈가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언니도 몰라요?”

“알아도 네가 알아야지. 나는 아카데미 졸업하고 이 주일 만에 여기 온 거야.”

디아나의 차분하고도 무성의한 대꾸에 루이즈가 볼을 부풀렸다. 비올레타가 루이즈에게 대충 맞장구치듯 말해 주었다.

“그래도 잘생겼긴 하네. 밀로일라가 봤으면 좋아하겠다.”

“그쵸, 그쵸! 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시네요! 아, 여전히 잘생겼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감탄하던 루이즈가 고개를 홱 돌려 물었다.

“전하, 저 지금 이뻐요?”

“응. 이쁘…….”

‘다’까지 말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루이즈가 사라졌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금발이 바람에 마구 흩날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디아나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쟤, 저 영윤 앞에 도착하면 정말 산발이겠어요.”

“그러게. 미친 여자처럼.”

둘의 얼굴에 훈훈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녀들이 도서관을 어렵지 않게 찾아 들어섰다.

사람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돔형의 불투명한 유리 천장 아래로, 책장들이 높이 솟아 있었다. 도서관 특유의 먼지가 책장 사이로 비치는 빛 아래 뿌옇게 부유했다.

심부름 대행 길드에는 아카데미 도서관에 책 좀 반납해 달라는 둥 별 시답잖은 의뢰까지 다 들어왔었기 때문에 도서관은 몇 번 와 봤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비올레타가 조금 멍하니 서 있다 디아나를 불렀다.

“디아나?”

“네?”

“찾아와.”

어쩐지 제 말이 카일 부려 먹는 라키엘 같은 건 기분 탓이리라. 비올레타는 그 꺼림칙한 생각을 지우려 좀 더 산뜻하게 웃었다.

“어떤 걸 말씀하십니까?”

“있잖아, 뭐, 유익한 거. 동서대륙의 지방별 주요 특산품 및 지리나 영지별 산업 정책 이런 거……?”

“……그런 거 좋아하세요?”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양 차분했던 디아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공부를 제법 오래 한 디아나가 저럴 정도면 정말로 재미를 찾을 수 없는 영역이었나 보다.

물론 비올레타에게 있어서도 당연히 좋아질 영역은 아니었다.

“그냥, 공부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의도는 좋으신데 그런 책들 한번 받아 보시고 다시 생각해 보세요. 일단 제가 골라 올게요. 돌아보고 계세요.”

그녀는 이미 한 달 전부터 제가 읽을 책을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책을 읽지 않을 권리부터가 없었다. 비올레타가 그 고통을 곱씹으며 반대쪽 책장 사이로 들어섰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마른 잉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렇게 제법 깊숙이 들어왔을 즈음, 책장을 둘러보던 비올레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구석 한편, 공저에서 읽었던 문학집 『세계 명작 168선』에 실려있던 작품들의 원전이 높은 책장 가득히 꽂혀 있었다.

왠지 반가운 기분에 비올레타가 손을 들어 책들을 가볍게 쓸었다. 타지에서 고향 사람 만나면 그게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일단 반갑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 대부분의 작품이 그냥 누군가의 말에 맞장구나 겨우 칠 수 있을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지만, 몇몇 작품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특히, 특히……. 비올레타가 기억을 더듬으며 책장에 꽂힌 책들을 훑다가 점점 위로 시선을 올렸다.

그래, 저거.

『레이디 드봐리』!

그 짧은 압축에도 여자 주인공의 성적 자유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던가. 문학인가 외설인가를 두고 많은 사람의 의견이 분분했다던 그…….

비올레타가 호기심에 눈을 번뜩이며 책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여자치고는 큰 편인 키임에도 손끝만 겨우 닿을 만큼 레이디 드봐리는 너무 높은 곳에 계셨다. 책장이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높은 것은 사서가 있기 때문이었지만, 이런 책을 빼 달라고 사서를 부르기도 뭐했다.

사서가 사다리를 끌고 와서 저 책을 꺼내 주면, 무슨 낯으로 받아 보겠는가.

그러나 오늘따라 순해 보이려 낮은 구두를 신은 통에 키가 애매하게 모자랐다. 혀를 작게 찬 비올레타가 낑낑거리면서 까치발까지 해 봤지만, 책은 손에 잡힐락 말락 할 뿐이었다.

진작 꺼냈더라면 몇 장 훑어보고 다시 넣었을 책이고, 아예 닿지 않을 곳에 있었더라면 생각조차 않았을 그냥 그런 책인데 손에 닿을 듯 닿지 않으니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는 이상한 오기가 생겨났다. 그렇게 몇 번 헛손질을 하는 비올레타의 손을, 부드러운 손길이 잡아 내렸다.

“그렇게 책을 꺼내시면 위험합니다, 영애.”

기다려요. 낮고 차분한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멍하니 그 손길이 시키는 대로 제 손을 내린 비올레타가 저도 모르게 얌전히 기다리고 섰다. 그러자 비올레타의 뒤에 선 남자가 비올레타가 꺼내려고 용을 쓰던 책을 한 손으로 가볍게 잡아 빼냈다. 남자가 예의 바르게 약간 떨어져 서 있었음에도 제 옆을 스치듯 내려오는 손을 보자 마치 남자에게 뒤에서 안긴 것 같았다.

그 지나친가까움에 비올레타가 화들짝 놀라 옆으로 빠져나왔다. 남자는 조금 무안한 듯 웃었다.

남자를 돌아본 비올레타가 멍하니 그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책이, 영애께서 찾으시던 게 맞습니까?”

“…….”

“영애?”

“…….”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뇨, 그러니까……. 당신 웃는 게 예뻐서요.”

책장 사이로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이 그의 연한 갈색 머리 위로 따스하게 부서졌다. 시간이 멈춘 듯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휘어지는 눈꼬리가 정말 예뻤다.

그러나 분명 그에겐 앞뒤 없이 튀어나온 정신 나간 말일 텐…….

나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맙소사.

비올레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비올레타의 뜬금없는 대답에 난감한 듯 웃던 청년은, 공황상태에 빠진 비올레타를 보고는 소리까지 조금 내어 웃었다. 그리고 이내 옅게 미소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애가 훨씬 예뻐요.”

보다 낮아진 목소리에 맥박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그래, 맨 정신으로 듣기에는 꽤 낯 뜨거운 말이었다. 그것도 저렇게 근사한 남자가, 저렇게 진지하게 ‘너 예쁘다’고 한다면. 비올레타는 그 반사작용으로 저도 모르게 뺨을 발그레 붉힌 채 멍하니 생각했다.

한꺼번에 덮친 여러 공황의 여파가 거셌다. 얼마간 그렇게 멀거니 그를 바라보고 서 있던 비올레타가 문득 정신이 든 듯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홱 낚아챘다.

남자가 조금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딴 건 전혀 신경도 안 쓰였다.

사방에 멀쩡하고 고상한 책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하필 이딴 걸……! 무슨 책인지 봤나? 봤을까? 본 걸까? 아는 건가?

저도 모르게 점점 뒷걸음치던 비올레타는 이제 다른 어떤 생각도 다른 어떤 말도 포기했다. 일단 여기서 사라져야 했다.

“아…….”

“별말씀을요그럼저는이만!”

급하지만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몸에 배인 공중예절로, 비올레타가 작고 빠르게 소리치고는 뻣뻣하게 뒤돌았다. 그리고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그랬다.

“……놔 주시겠어요?”

“아, 제가 실례를.”

비올레타가 뻣뻣하게 고개만 돌렸다. 남자는 차분한 말투와는 달리 급했는지 드레스 자락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러나 예의 바르게 내뱉은 실례라는 말과는 별개로 남자의 단정한 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손 좀?”

“영애가 도망치지 않으시면 놓아 드리겠습니다.”

장소가 장소라,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비올레타는 그 황홀한 목소리에 두근거리는 대신, 온몸에서 끌어낸 침착함으로 고개를 앞으로 다시 돌려 제 손에 들린 책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렇게나 잡혀 뒤집어진 책은 마침 친절하게도 소개문을 보여 주고 있었다. ‘완전한 성, 황홀, 쾌감, 그리고……. 인간의 육체는 과연 조건 없이 율동하는 자연의 섭리인가? 아아, 그녀는 밤마다 남편의 친구와…….’ 비올레타가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몸을 틀었다.

아직 들키지 않았다. 그래. 아직 자신은 이 사람에게 예쁜 여자였다. 어디까지나 남자에 비해 예쁘다는 상대적이고도 형식상의 칭찬이었겠지만 비올레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비올레타가 남자 쪽으로 몸을 약간 틀었다. 그녀가 제 앞에 남으리라 생각한 남자가 드레스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지금이었다.

“영애의 이름을 알고 싶…….”

비올레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 와중에도 교육받은 대로 드레스를 예쁘게 말아 쥐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 씩씩하고도 우아한 달음박질에 남자는 당황한 나머지 제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하고 책장 사이로 흔들리며 멀어지는 드레스 자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하, 왜 이런 데 계신 거예요? 한참 찾았잖아요.”

비올레타는 지친 얼굴로 디아나에게 책을 슥 내밀었다. 디아나가 책을 들고 있지 않은 빈손으로 그 책을 받았다.

“이 책은 또 뭐……. 전하, 이런 거 벌써 좋아하시면 못씁니다.”

“안 좋아해.”

“여기 숨어서 이거 보고 계셨던 겁니까?”

구석에 숨어서 야한 소설이나 읽고 있던 여자가 됐지만 비올레타는 아니라고 펄쩍 뛸 기운도 없었다.

“……반납.”

짧게 내려진 명령에 디아나가 귀찮은 듯 다른 손에 들려 있던 책들을 비올레타에게 넘겼다.

“이번엔 여기 얌전히 있으세요. 아셨죠?”

아깐 괜히 돌아보고 있으라고 했다며 디아나가 투덜대며 사라졌다. 저 예의 없는 것 좀 보게. 비올레타가 힘없이 한탄했다.

디아나가 가고 멍하니 바닥이나 벽의 장식 따위나 바라보고 있던 비올레타가 벽에 기대며 한 손으로 제 볼을 감쌌다.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던 볼은 거짓말처럼 식어 있었고, 맥박도 평온해져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같은 기분은 정말 처음이었는데……. 그녀의 평생 여태 남자에게 가슴이 두근거린 거라고는 무서울 때랑 화났을 때랑 놀랐을 때밖에 없었다. 저번에 라키엘과 춤을 췄을 땐 당연히 놀라서 그런 것이다.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이런 게 설렌다는 건가? 아니, 그렇게 잘생긴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누구라도 두근거리지 않을까. 그 사람 이름은 뭘까. 아까 많이 꼴사나웠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되짚어 보던 비올레타가 문득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그 남자에게서 도망친 게 무엇 때문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5황녀가 돌아오자마자 그런 외설이나 봤다는 것에 부끄러운 소문이 나리라는 것은 애초부터 자신에게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제 처지도 잊고, 그저 평범한 여자애처럼 ‘진짜 자신’이 또래의 근사한 남자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싫었던 것이다. 한순간 정말로, 한심할 정도로 제 처지를 잊었었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바라보며 비올레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잊지 마. 네가 누구인지.

“전하?”

어느새 돌아온 디아나가 비올레타의 왼손에 들려 있던 책들을 가져가며 의아한 듯 그녀를 불렀다. 비올레타가 말없이 앞장섰다.

“아침에 에델가르드 공께서 급사 보내오신 거 잊지 않으셨죠? 점심 무렵에 방문하시겠다고 하셨던 거요.”

“응.”

“각하와 오찬 함께하실 거죠? 가자마자 준비시키도록 할게요.”

“응.”

“아까 몰래 『레이디 드봐리』를 보신 건 비밀로 해 드릴게요.”

“응…… 뭐?”

“전하 또래는 원래 성적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니까요. 그러니 부끄러워 마세요.”

“하아…….”

마치 사춘기를 맞이한 손아래 동생을 대하듯 친절하게 배려하는 디아나에게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비올레타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라키엘의 뒤로 무언가 줄줄이 딸려 들어오자 비올레타가 미심쩍은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라키엘은 답지 않게 화사하게 웃으며 비올레타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와서는 그녀의 손을 낚아채듯 가져가 키스했다.

무례할 정도의 행동 뒤에 이어진 인사였으나 그러는 본인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어떻게 봐도 그저 친근해 보이기만 했다. 루이즈가 철없이 황홀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와 똑같이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의 반응으로 비올레타가 대충 미소 지으며 라키엘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저게 다 뭐예요?”

공저의 시종을 여섯은 데려온 것 같았다. 그들은 다들 손에 무언가 하나씩 들고 있었다.

라키엘이 대답 대신 비올레타 곁에 편하게 앉으며 맨 앞의 시종을 손짓으로 불렀다. 시종이 가까워지자 그가 들고 있는 벨벳 쿠션 위의 자그마한 물건이 보였다.

시종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쿠션을 내밀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얇은 줄을 비올레타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옐로 다이아몬드야.”

라키엘이 쿠션 위에 놓인 팔찌를 집고, 비올레타의 팔도 제 쪽으로 당겨 와서는 직접 팔찌를 채웠다. 팔찌는 마치 미리 맞춰 본 것처럼 하얀 손목에 잘 어울리게 딱 맞았지만, 비올레타는 그것을 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시녀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밥이나 먹자더니?”

라키엘이 그녀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그다음 시종을 불렀다. 다음은 귀걸이였다.

비올레타에게 묻지도 않고 그녀의 귀에서 귀걸이를 하나씩 빼낸 라키엘이 새것으로 다시 끼웠다. 멀리서 볼 때야 이 상황이 다정해 보이겠지만, 무경험자 특유의 부주의함으로 툭 끼워지는 귀걸이는 아프기까지 했다.

그것 역시 저만 알리라. 루이즈가 헤벌쭉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밀로일라와 디아나마저 조금 발그레해진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보석 때문이거나, 제 옆의 이 껍데기 하나는 죽여주는 남자 때문이거나, 혹은 둘 다거나. 어찌 됐든 이 광경이 제법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의도했던 것처럼.

“이것도, 옐로 다이아몬드. 모두 드워프가 직접 세공한 거야.”

그 미치광이를 한번 따라 해 봤지. 비올레타에게나 들릴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이며 라키엘이 느슨하게 웃었다. 그 말에 비올레타가 피식 웃었다. 귀에 매달린 귀걸이가 제값 하듯이 꽤 무겁게 늘어졌다.

그다음은 목걸이였다. 팔찌, 귀걸이와 세트인지 역시 같은 보석이었지만, 귀걸이와 비슷한 형태로 자잘한 진주가 둘러싼 메달은 귀걸이보다 훨씬 커서 한눈에 딱 보일 만큼 튀었다. 비올레타가 그 고상하게 찬란한 목걸이에 한숨처럼 나직하게 물었다. 물론 행복하게 웃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라키엘, 한가해요?”

“한가할 것 같나?”

“아니니까 묻잖아요. 사람만 보내면 될 걸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옆으로 땋아 내린 머리와 목 사이로 라키엘의 차가운 손이 들어와 스쳤다. 이내 그 손처럼 차가운 목걸이가 그녀의 목을 둘러쌌다. 라키엘이 대수롭지 않은 손길로 목걸이를 걸어 주느라 제가 약간 흐트러트린 그녀의 머리를 정리했다.

“각별해 보일 필요가 있거든. 그리고 이런 건 나중 몇 번보다 처음에 과하게 하는 한 번이 훨씬 효과적이고.”

속삭임과 함께 머리를 살짝 매만지던 손이 턱을 살짝 스치며 떨어졌다.

“세상에 팔불출처럼 보이고 싶다 이거네요?”

“그 단어는 좀 기분 나쁘군.”

“당신 지금 하는 짓이 딱 그거예요. 지금 이게 징그럽게 뭐 하는 짓이에요?”

다음은 앙증맞은 진주가 촘촘히 박힌 작은 티아라였다. 티아라를 그녀의 머리 위로 씌우며 라키엘이 매력적인 미소와는 상반되는 무심함으로 대꾸했다.

“유난스러워 보이긴 해야 해.”

“그래요?”

“그래서 지금 네 반응이 마음에 안 들고 말이야.”

적당히 고급스럽고 적당히 예뻐야 반응을 하지. 이것들은 제가 평생 보고 자란 것들과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찬탄조차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제 팔에, 제 귀에, 제 목에, 제 머리에 걸린 모든 게 아직은 비현실적이었다.

비올레타는 제얼굴에 걸린 행복한 웃음을 어떻게 더 행복해 보이게 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렇다고 너무 과하게 기뻐하면 그건 그거대로 보석 밝히는 속물 같아 보일 것이다. 나중에 그냥 저 남자 한 번 껴안으면 될까? 비올레타가 고민하는 새 그들의 앞에 놓인 것은 짙은 녹색의 제법 화려한 드레스였다.

소매나 가슴선, 드레스 끝자락에 금사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화려한 인상을 주었지만 결코 과하진 않았다.

“이건 브란젤 왕실 장인이 만든 드레스고……. 아쉽게도 이건 내가 직접 입혀 줄 수가 없네.”

장난스러운 어조에 비올레타가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자 시녀들이 작게 웃는 소리와 함께 루이즈가 호들갑을 떨어 대는 게 들린다. 아마 라키엘이 가고 나면 루이즈는 소설 한 편을 써 낼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장인이 만든 구두.”

상아를 깎아 만든 것처럼 빛나는 구두가 고귀한 남자의 손에 의해 신겨진다. 열두 시가 지나면 끝날 동화 속 꿈처럼,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씩 웃으며 올려다보는 모습에 기분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아무리 자신이고, 아무리 이 남자라도 지금이라면 확인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비올레타가 아까의 그 두근거림을 제 스스로에게 규명하기 위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라키엘, 나 예쁘다고 해 봐요.”

“……제정신인가?”

동화는 개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라키엘이 이윽고 제 뒤로 손짓해 방 안의 사람들을 물렸다. 마지막으로 밀로일라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에, 라키엘이 입을 열었다.

“너.”

“나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에요. 그러니 그런 눈 치우시죠. 사람들 보란 듯이 무릎 꿇고 구두까지 신겨 주면서 그런 말은 안 나와요?”

“……왜 이러지?”

왜 이러느냐고 직접 묻는 것도 아니고 얘가 도대체 왜 이러지, 라는 식으로 혼자 중얼거리는 꼴이 기분 나빴다. 비올레타가 부은 얼굴로 말했다.

“됐어요. 어차피 들어 보나 마나 천지 차이겠지.”

“……내가 누구와 차이가 난다는 건데?”

“그런 게 있어요.”

미심쩍은 듯 가늘게 뜬 눈으로 비올레타를 훑어보던 라키엘이 이내 더 생각하기 귀찮은 듯 비올레타의 발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큰둥하게 빈정거렸다.

“어떤 정신 나간 치가 사탕발림이라도 했나 보지.”

라키엘을 홱 노려본 비올레타가 이내 한숨처럼 말을 돌렸다.

“그런데 시녀들까지 왜 물린……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비올레타의 몸이 뒤로 약간 넘어가 소파 등받이에 부딪히듯 닿았다. 그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문밖에 들리지 않게 작게 소리친 제 스스로가 기가 막혔다. 비올레타가 라키엘에게 잡혀 허공에 뜬 오른쪽 다리를 빼내려 버둥거렸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비올레타의 당황해 쏘아붙이는 목소리에도 라키엘은 무심한 얼굴로 대꾸도 않고 한술 더 떠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잡아 걷었다. 하얀 레이스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가 허벅지 부근까지 그대로 드러나자 비올레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당신 지금 이거 추, 추행이에요! 당신 도대체 뭐 하는……!”

“마치 내가 널 겁간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군. 유난 좀 떨지 마라.”

유난을 떨려면 아까 떨었어야지. 라키엘이 낮게 속삭였다. 남자의 입매가 오만한 호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렇게 허벅지가 거의 다 드러나 자 라키엘이 드레스에서 손을 뗐다.

비올레타가 일단 안심하며 소파에 기대 있던 제 몸을 조금 일으키려 했지만, 아직도 단단한 손이 제 다리를 잡고 있어 여의치가 않았다.

어차피 그 강압적인 손에서는 어떤 진득한 사심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올레타는 쉽게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힘없이 소파에 그대로 기대 그를 노려보았다. 비올레타가 그러든지 말든지 라키엘은 아까 구두를 신겨 줄 때처럼 그녀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무릎 위에 그녀의 다리가 잡힌 그대로 올려졌지만, 걷어진 드레스 자락에 가려 무얼 하는지 비올레타에겐 보이지도 않았다. 이내 무언가 얇은 가죽 같은 것이 허벅지를 감싸는 느낌과 함께, 묵직한 쇠붙이가 와 닿았다.

비올레타가 그 차가움에 몸을 얕게 떨며 물었다.

“으, 뭐예요?”

“진짜 선물이지.”

라키엘이 나른하게 웃으며, 비올레타를 놀리듯 서늘한 손을 움직여 허벅지를 살짝 쓸었다.

“변태……!”

비올레타가 그의 팔을 떨쳐내듯 밀어내며 조금 기우뚱하게 기울어 있던 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내 아래를 내려 본 그녀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밀니로에서 비밀리에 개발된 거다. 약실이 네 개나 되지.”

비올레타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제 허벅지에 매달려 있는 것은 그녀가 처음 보는 형태의 총이었다.

그나마 세상에 보급된 머스킷 권총들이 일직선에서 조금 휘어진 모양으로, 방아쇠를 제외하면 매끈하게 쭉 빠진 것에 비해, 이 총은 그 모양에서 약실이 넷이나 되다 보니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비올레타가 신기한 듯 검은색 가죽 홀스터에 매달린 총을 몇 번 손으로 쓸었다.

“약실이 네 개나 돼요? 그럼 네 번이나 바로 연사가 가능하단 말이에요?”

“그래. 즉 네 번의 기회가 있다는 거다.”

“맙소사, 정말 이런 게 나오긴 하잖아.”

“세상이 모를 뿐이지.”

세상에 나온 총들이라고는 죄다 단발이라, 재장전을 빨리해도 1분 안에 두 발을 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약실이 네 개나 된다니 상상도 못 했다. 결국 제 아버지는 틀리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비올레타가 설레는 얼굴로 총을 들어 손에 쥐었다.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이런 총을 뭐라고 해요?”

“리볼버. 거길 누르면 약실이 돌아가. 잠금 장치는 여기 달려 있고. 그 외엔 다른 것과 똑같다.”

라키엘이 가리키는 곳을 비올레타의 시선이 따랐다. 총만으로도 신기한데, 총 위에 금으로 세공된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들은 절로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총은 아름다웠다. 쇳덩어리만 대충 붙어 있어도 비싼 게 총이었다.

비올레타는 문득 값어치를 생각하다 이내 조용히 좋아하기로 했다. 무엇을 받든 얼마냐는 질문처럼 이 남자에게 덧없는 게 없다는 것은 이미 공저에서 충분히 배웠다.

“공저에서 배운 건 아직 잊지 않았겠지?”

“네. 루데릭이 잘 가르쳐 줬는걸요!”

어느새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비올레타가 재빠르게 대꾸했다. 눈을 빛내며 총을 이리저리 만지는 비올레타를 보며 라키엘이 헛웃음을 지었다. 보석으로 온몸을 휘감아 줘도 진심 어린 웃음 한 번 짓지 못하던 여자가.

“그리고 이건 대외용.”

라키엘이 다른 머스킷 권총을 코트 안에서 꺼내 비올레타에게 내밀고는, 리볼버를 그녀의 손에서 빼내어 홀스터에 끼웠다. 비올레타가 제 손을 떠난 총을 아쉬운 듯 바라보다 제 손에 들린 다른 총을 보며 다시 작게 탄성을 뱉었다.

역시나 여타 다른 총과는 차원이 다르게 금과 갖가지 보석으로 화려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총신이 다른 총보다 짧고 훨씬 가벼웠다.

“루데릭은 전문가는 아니야.”

“잘하던데요?”

“저 혼자 잘하는 것과 남을 잘하게 하는 것은 다르지. 곧 괜찮은 스승을 보내 줄게. 그건 그때 써.”

“고마워요. 정말 둘 다 마음에 들어요. 정말로!”

제 다리가 다 드러나 있거나 말거나 이제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비올레타는 제 손에 들린 새로운 총에만 집중했다. 남 앞에서 어쩌다 종아리만 살짝 보여도 수치스럽다며 뛰쳐나갈 영애가 태반인 게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참 희귀한 광경이었다.

라키엘은 그녀의 드러난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얀 레이스 스타킹, 그 위로 채워진 검은색 홀스터. 그는 천천히 제 입술을 혀로 축였다.

“너도 참 태평하다.”

“네?”

라키엘이 시선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덕분에 좋은 구경은 했는데, 이제 네 다리 좀 신경 쓰는 게 어때.”

비올레타가 그제야 화들짝 놀라 제 드레스를 끌어내려 정돈하며 라키엘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던 제 오른쪽 다리를 홱 빼냈다. 그리고 억울한 얼굴로 되받아쳤다.

“이 뻔뻔한 인간. 누가 이래 논 건데요!”

라키엘이 삐딱하게 웃으며 비올레타의 발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난 너더러 계속 그러고 있으라곤 안 했다.”

“아까 소리를 질렀어야 했어. 공작이 날 추행한다고! 에델가르드 공이 변태라고 소문이나 났으면 좋았을걸!”

“그럼 성가신 과정 필요 없이 바로 결혼하면 되겠군. 그러지 그랬나.”

“뭐, 뭐, 결혼, 뭐요?”

비올레타의 발끈한 얼굴에서 점점 넋이 사라지는 과정을 내려다보던 라키엘이 짧고 담백하게 말했다.

“어차피 언젠간 결혼해야 하잖아, 우리.”

“우리?”

“우리.”

“나?”

“그리고 나.”

비올레타가 뻣뻣하게 굳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표정이군. 당연하지 않나?”

“아, 당연했나요?”

비올레타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사실 이런 충격적인 기분은 그와 자신이 ‘우리’라는 약간 소름 끼치는 카테고리에 묶인 것에 앞서 결혼의 ‘ㄱ’ 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드는 것이었다.

애초에 결혼이란 건 시녀로 입궁하던 순간부터 제 미래에 존재하지 않았던 항목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당장 앞에 놓인 게 꼬일 대로 꼬여 버린 인생이라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쫓아가기에도 벅찬 나날이었다.

그러니까, 머나먼 미래로조차 상상이 되지 않았던 주제일 뿐 아니라 그전부터 아예, 그냥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아니, 그런데 정말로 당연하긴 한 것 같았다. 비올레타는 문득 재빠르게 납득했다.

제가 여제가 되는 것까지는 에델가르드가 대권을 죄다 잡고 있다 쳐도, 제가 여제가 된 후에는? 황녀 신분으로 결혼하지 않을 수도 없고, 연고 없는 이와 결혼할 리도 없으며, 제 남편이 이 남자가 아닌 이상은 결국 어떤 가문이 반드시 대권에 개입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 눈앞의 이 남자는 결코 그 꼴을 순순히 지켜볼 자선가가 아니었다.

그래, 당연한 게 맞았다. 비올레타는 제 멍청함을 자책했다. 라키엘이 가늘어진 눈으로 저를 내리깔아보는 게 느껴졌다. 비올레타가 시선을 그의 눈에서 조금 내렸다. 볼이나 코쯤으로.

“그럼 내가 누구 좋으라고 ‘널’ 살려 냈을까?”

“당신 좋으라고, 요.”

“잘 아네. 그런데 나 아닌 다른 자와 성혼할 생각이 들어?”

담백하게 묻는 것과는 달리, ‘잘 아네’에서 칭찬하듯 화사하게 웃던 얼굴이 ‘……생각이 들어?’에서 무표정해졌다. 아니, 그보다 이런 삼류 치정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가 그와 그녀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올 줄이야. 그 불편하고도 어색하면서 이상한 기분에 비올레타가 머쓱하게 대꾸했다.

“아니…… 애초에 내 인생에서 결혼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뿐이에요.”

“엉뚱한 놈이 대공위에 앉고, 엉뚱한 씨가 제위를 이어받는 꼴이나 보려고, 내가 지금 이 소름 끼치는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나?”

차분하게 이죽대는 말에 비올레타가 제 손목에 채워진 화려한 팔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전은 확실히 서로 간에 조금, 소름 끼치는 일이긴 했다. 비올레타는 그제야 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가 휘감아 놓은 유난스러움이 정답고 사이좋은 사촌 남매나 연출하고자 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씨라니 좀 소름 돋게 들리네요. 일단 내가 아직 성년식도 치루지 못한 열여덟 살짜리 여자애라는 것 좀 기억해 줄래요? 안일하게 생각했던 건 미안해요.”

라키엘은 늘 그래 왔듯 비올레타의 미약한 항변을 가볍게 무시했다.

“네가 저번에 미하일의 일, 이대로 가만있을 거냐고 물었었지.”

“그랬죠.”

“난 글자를 배우기도 전에 에델가르드의 정신부터 교육받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썼던 글자가 내 이름이 아닌 에델가르드였을 정도로. 그래서 그 ‘사고’ 후 며칠을, 미친 듯이 공작령의 군사를 죄 일으켜 황제와 그 늙은 여우 새끼를 쳐 죽일 생각만 했지만, 실패하든 성공해서 제국을 뒤집어엎든 결국 에델가르드가 반역의 오명을 뒤집어쓰는 건 똑같다는 결론에 순순히 접었지. 나는 내 고귀한 가문에 그런 흙탕물 한 방울이라도 튀는 게 싫거든. 여태까지 일어난 그 모든 일보다 말이야.”

게다가 불빛에 부나방 달려들 듯 에델가르드가 그리 자멸하는 게 바로 그들이 바라는 바라. 라키엘이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란토니아 역사의 시작이 에델가르드였으니 미래에 그란토니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에델가르드 역시 그 영광스런 자리를 지켜야지. 게다가 자멸이나 다름없는 짓에 무고한 에델가르드인들을 밀어 넣고 싶지도 않고.”

공작령이 원체 거대한 데다 건국부터 지배한 오랜 역사가 있다 보니 그 지방 사람들은 특별한 자부심으로 자신들을 ‘에델가르드인’이라고 불렀다. 영지를 다스리는 가문의 이름을 마치 지역 명칭처럼 사용할 정도로 에델가르드는 영지민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는데, 이렇게 영주 개인도 아닌 가문 자체에 대한 영지민들의 강한 지지와 단단한 결속력은 에델가르드에만 있는 것이었다.

역대 황제들이 괜히 에델가르드에 조심스러웠던 게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제하고.

비올레타는 그제야 그 원천을 알 것 같았다. 아마 라키엘은 제 뒤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진작 황제의 궁으로 쳐들어가고도 남았을 종자였다. 저 성정에 어떻게 참을까. 비올레타가 복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아무런 힘도 없다면 나았을 것이다. 저것을 오로지 견디기만 하기에.

비올레타는 어쩌면 남자가 에델가르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에델가르드가 남자를 가진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올레타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만히 당하지 않기 위해서 널 살렸다고 했지만, 단순히 1황자나 4황자의 즉위를 막고, 널 내세워 알량한 대권이나 잡는 것은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겨우 그딴 게 탐났으면 이렇게 사기극까지 벌일 필요도 없지.”

“내가, 당신의 ‘복수’인가요?”

“그래.”

라키엘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그리고 비올레타의 머리 위, 자신이 친히 꽂아 줬던 티아라를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검고 잔잔한 눈이 누군가를 향한 악의로 일렁였다.

“황제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네가 여제가 되고…….”

“…….”

“그런 네가 낳은 내 아들이 황제가 될 것이다.”

비올레타가 떨리는 눈으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그 더러운 혈통은 지금의 미치광이로 끝나고, 황계皇系는 완벽하게 에델가르드의 것이 돼. 그 어떤 오명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당신…….”

“겁먹지 마, 변하는 것은 없으니. 내 조모는 황녀셨거든.”

라키엘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씩 웃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황계 그대로, 그 안에서 황제만 사라질 뿐이야.”

“…….”

“그가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티아라를 만지던 손이 조금 더 내려와 어깨 위로 늘어진 땋은 머리를 스치며 떨어졌다.

자신은, 생각처럼 단순한 필요가 아니었다. 그저 1황자를 거꾸러트리기 위한 대항마도 아니었고, 대권을 가져다 줄 임시방편적 대용품도 아니었으며, 그를 황제나 다름없는 여제의 부군으로 만들어 줄 매개체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의 증오는, 본질적으로 조금 더 깊은 곳에 있었다.

“그 미치광이 황제는 상상도 못 한 채 죽겠지. 시체가 되어 땅속에 누워서야 지켜볼 것이다. 제가 그리 평생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던 에델가르드가 제 후손인 양 황성을 차지하고, 제 혈통이 소리 없이, 아무도 모르게 멸망하고 만 것을.”

라키엘이 낮게 웃었다.

“가진 게 계승권뿐인 백치 황녀 대신 멀쩡한 널 찾은 이후로 이보다 더 좋은 복수는 찾지 못했어. 그란토니안을 통째로 거꾸러트리는 순간에도 전쟁은커녕 작은 전투 한 번도 필요 없지.”

지금의 황실이 그렇게 실질적으로 멸망해도, 정작 그란토니아에는 그로 인해 피바람 한 번 불지 않는다. 그답게도 효율적인 형식이긴 했으나, 라키엘이 달콤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은 궁정 안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 중 최악에 속했다.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제가 구체적인 결혼이나 후사 문제를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더라도, 애초에 저를 여제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부터가 사실상 역성혁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긴급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임시방편적 선택이 아니고, 궁극적인 목적 그 자체일 줄은, 그것도 후손들까지 길이길이 이어지며…….

제가 진짜가 아닌 가짜라서 오히려 더 완벽하리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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