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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2장 (3/21)

<1막-2장>

고급스러운 가죽 수첩과 언뜻 보기에도 드레스 다섯 개 값은 족히 나갈 것 같은 만년필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느닷없이 나타난 초면의 남자는, 우두커니 서서 에비가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에비가일이 침대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는 그 순간까지도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만 보고 서 있었다. 에비가일은 왠지 모를 승부욕에 그 시선을 지그시 맞받아치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눈에 힘을 풀었다. 초면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먼저 하문해 줘야 했다.

에비가일은 자신이 몇 년간 귀족과는 먼 삶을 살았고, 궁정에 와서도 그런 상세한 예법과 자신이 상당히 멀게 살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저 말쑥한 귀족 청년과는 차원이 다른 신분을 갖게 됐다는 것도.

그는 마치 그 신분을 그녀에게 상기시켜 주려는 듯 일부러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았다. 에비가일은 조금 난감해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정체를 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신분을 ‘행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러나 거북해도 이제부터 적응해야 했다. 에비가일은 한숨처럼 남자에게 질문을 뱉어 냈다.

“뭐죠?”

“카일 쏜튼입니다, 전하.”

아니, 네 이름 말고, 너랑 나랑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에비가일이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 눈빛을 읽은 듯 카일이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직책은 공작 제1보좌관으로, 에델가르드 공의 최측근이라 보시면 됩니다. 황후 폐하, 에델가르드 공, 길데 백작부인과 더불어 영애, 아니, 전하에 관하여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제가 주로 하는 일은 사람 뒷조사, 뒷공작, 참모, 계략, 영주들의 각종 비리 수집…….”

그가 수작을 뒤에서 부리건 앞에서 부리건 에비가일은 그의 이름은 물론 그의 직업이나 그가 하는 일 전부에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그 정도 견적은 충분히 나오는 인상이었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자기소개에 에비가일이 미간을 찌푸리자 카일의 거침없던 주절거림이 멈추었다. 초면에 너무 싫은 티를 냈나 싶어 에비가일은 애써 상냥하게 웃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경 소개는 굳이 지금 주절주절하지 않아도 차차 저절로 알게 될 것 같고, 지금 뭐 하는 거죠?”

“아, 일단 저희가 전하에 관하여 이리저리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조사?”

생글거리던 에비가일의 얼굴이 싹 굳든 말든 카일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딜로아 자작의 사후 경로는 빠짐없이 잡혔습니다만, 그 이전은 수소문조차 불가능해서요.”

그저 어린 시절일 뿐인데, 카일의 짐짓 심각한 얼굴에 에비가일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아버지가 죽기 전. 에비가일이 잠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속을 갉아내기 시작했다.

“그저 평범한 시골 귀족 영애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뿐이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이 뭐가 문제죠?”

“전하의 특기 및 취미는 무엇이십니까?”

“…….”

“네?”

“…….”

“전하?”

허탈하게 돌아온 질문에 에비가일이 순간 울컥했다가, 이내 가까스로 굳은 입매를 웃는 상으로 끌어 올렸다.

“그건 왜 물어보시죠?”

“앞으로의 교육 방향을 잡기 위해섭니다. 특기가 있으시다면 전하가 하셔야 할 일이 조금이나마 줄어드실 것이고, 취미가 있으시면 취미를 살려 드려야죠.”

“피아노를 십 년 정도 배웠지만 이제 손이 다 굳어 버려서 특기라기엔 무리가 있겠네요, 바이올린도 오 년 정도 배웠지만 마찬가지일 거고요. 그 외에 딱히 특기나 취미랄 만 한 건 없고, 다른 영애들이 하는 것만큼 기본 소양은 배웠어요.”

이 간단한 말들에 뭐 그리 적을 게 많다고 카일은 고개를 수첩에 박은 채 만년필을 열심히 움직이며 되물었다.

“기본 소양이라면?”

“그림은 배웠지만 재능이 없었어요. 서대륙 공용어는 어느 정도 할 줄 알고, 펠로베르어를 조금 배웠죠. 교양은 『그란토니아 귀족 아동의 필수 지식』과 『대륙사』 두 권을 뗀 게 다예요. 아버지는 원래 아들과 사냥을 하고 싶어 하셨는데, 동생들과 나이 차이가 꽤 나다보니 사냥을 따라갈 만큼 큰 자녀는 저뿐이었죠. 북부 변방에서 딸에게 승마를 가르치는 일은 잘 없지만, 아버지는 저와 사냥을 가기 위해 승마뿐 아니라 사격도 가르치셨어요.”

기껏 그렇게 가르쳐 놓고서는 정작 위험하다며 사냥은 몇 번 가 보지도 못했지만. 에비가일은 씁쓸하게 웃었다. 고삐를 잡은 작은 손 곁으로 큰 손이, 그리고 어린 자신을 든든하게 감싸 안고 있던 아버지의 팔이 꿈처럼 시야를 잠시 지배했다가 곧 사라졌다.

“십 년 정도 치셨다니 얼마간 다시 연습한다면 실력은 곧 돌아오겠군요. 바이올린 역시 그럴 겁니다. 하지만 황녀께서 유폐되신 궁에는 악기가 없으니…….”

“피아노 정도는 있었는데.”

“조율하지 않은 지 이십 년은 족히 됐을 겁니다. 전하.”

느닷없이 나타난 라키엘이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풀썩 앉으며 느긋한 얼굴로 대신 대답했다. 대체 언제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자의 존대와 극존칭에 속이 이상했지만 에비가일은 의식하지 않는 척 대답했다.

“물론 그래 보이긴 했죠.”

“계속해.”

“예. 악기가 없었으니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공저에서 유희로 처음 배운 것으로 하고, 알고 보니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천재라고 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신동 같은 그런 느낌으로 말입니다.”

그거 사기 아닌가? 아니 그보다도.

“이 나이에, 말인가요?”

“하긴, 신동이라기엔 우리 전하가 조금 늙으셨지.”

에비가일이 카일을 바라보던 눈을 홱 돌려 라키엘을 노려봤으나 라키엘은 무심한 얼굴로 카일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카일이 다시 수첩을 보며 말을 이었다.

“수도 영애도 악기를 한두 가지씩은 배우나 어느 정도 수준을 이루는 경우는 흔한 편이 아닙니다. 악기를 뒤늦게 배운 전하께서 악기를 두 가지나 수준급으로 연주하실 정도로 재능이 있다고 알려지면 수도 귀족들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주실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완전히 사기였다. 10년, 5년이나 배워 놓고서는…….

하긴 이 모든 게 사기였다. 에비가일은 재빨리 수긍했다.

“그리고 서대륙 공용어가 어느 정도 되신다는 것은 아주 좋은 출발입니다. 물론 황족이라면 서대륙 공용어는 모두가 수준급으로 구사하고 있으니 기본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달성하셔야 할 목표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올해 안에는 수준급으로 구사하셔야 합니다. 그토록 빠른 진전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역시 전하께서 언어적 재능을 타고난 천재로서…….”

어딜 봐서 합리적인지 모를 말에 에비가일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진도를 다 나간 후엔 그런 천재를 저더러 어떻게 감당하고 살라는 소린지 모를 일이었다.

“펠로베르어를 조금 하실 수 있다는 건 기본적인 읽기, 쓰기는 가능하시다는 말씀일 테니, 올해 안에는 가능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펠로벨르어 역시 올해 안에 통달하셔야 구색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 미친 진도가 가능하긴 한가요?”

“현재 수도에서 서대륙 공용어 하나 잘하는 정도로는 두각을 나타내기 어렵습니다. 수도의 수준 높은 귀족들 사이에서 공용어는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다 잘하진 않더라도 보통 다 중간은 합니다. 돌아가신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례적으로 제국어에 서대륙 공용어, 펠로베르어, 이렌시아어, 제네트어, 동대륙의 힐란어까지 총 육 개 국어를 모두 수준급으로 구사하셨고, 현재 후계 구도에서 유력한 1황자나 4황자께서도 힐란어 외에는 대부분 수준급으로 구사하신다고 알려져 있으십니다. 여기 각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물론 금황의 황자들이 유난히 우수한 세대인 편이고, 각하 역시 워낙 우수하신 것이니, 큰 부담은 가지지 마십시오.”

도저히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말만 줄줄 읊어낸 카일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특히 귀족 영애들이 필수인 공용어 하나라도 잘 구사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수도의 귀족 남성들도 외국어를 몇 개씩 해내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황후 폐하나 1황비 전하, 3황녀 전하께서 서대륙 공용어, 펠로베르어, 이렌시아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신다지만 이것 역시 황실 내에서도 많이 특별한 경우입니다. 귀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황녀께서는 당장 내세울 게 속도밖에 없는 겁니다.”

카일의 말에 라키엘이 덧붙이듯 말했다. 머리가 슬슬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대륙 공용어에, 펠로베르어에, 이렌시아어까지, 그것도 빨리 해야…….”

“결과적으로는 겨우 평범해지는 겁니다. 그래 봐야 황실 여성 중 제일 우수한 여성들에 속할 뿐이니. 그러나 저 속도대로면 누구도 동일 선상에 두지는 않을 겁니다.”

라키엘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에비가일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외국어를 3개나, 미친 듯이 해내야 겨우 평범해진다. 대체 잘난 사람이 되려면 얼마나 더 미쳐야 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에비가일이 충격에 빠져 있는 사이, 카일은 수첩에 열심히 무언가를 써 가며 말을 계속했다.

“이렌시아어는 서대륙 공용어를 완성하는 대로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공용어와 많이 비슷한 편이니 이렌시아어도 빠른 진전이 있을 것이고, 십삼 년을 유폐되어 있었던 황녀가 일 년 남짓한 기간에 외국어를 세 개나 구사한다면 제국민들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줄 겁니다.”

“……십삼 년을 감금되어 있다 세상에 나왔다고 하면, 제 나라 말 멀쩡하게 하는 것만으로 놀라야지.”

에비가일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카일은 그 말을 듣지도 못한 것처럼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3황녀의 십 년을 전하께서 일 년 만에 후려치시는 거죠! 공께서도 말씀하셨듯, 중요한 점은 이겁니다. 제국민들이 3황녀의 외국어 능력에 찬사를 보내지만 일 년 만에 황녀께서 똑같이 해내신다면 이제 누가 그딴 하찮은 사실을 신경 쓰겠습니까? 누가 감히 전하와 3황녀를 동일 선상에 올리겠습니까? 1황비께서 제법 속 썩으시겠습니다. 결과적으로는 1황자나 4황자에는 못 미치겠지만, 황녀께는 매우 빠른 속도라는 장점이 있으니 제국민들이 보기엔 그냥 거기서 거깁니다! 그로서 황자들과의 경쟁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거죠.”

카일은 어쩐지 점점 흥분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어조는 점점 고조되었다. 황녀의 외국어 공부 기간을 후려친다는 둥 하찮다는 둥 황자들과 거기서 거기라는 둥 제법 황족 기만적인 말도 내뱉기 시작했다. 심지어 1황비를 말하면서는 꼬시다는 듯이 이상한 소리로 웃기도 했다.

“경, 그런데 너무…… 사기 같지 않나요? 그리고 일단 불가능…….”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서대륙 공용어가 어느 정도 되신다니 몇 달이면 완벽하게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누구 맘대로…….”

“그리고 펠로베르어는 제국어와 비슷한 편이니 기본이 된 상태에서 육칠 개월 정도면 가능할 겁니다. 공용어와 펠로베르어를 동시에 병행하시면서, 공용어는 재빨리 완성하시고 난 다음에 이렌시아어를 하면 다 합쳐서 일 년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공용어 외에는 완벽할 필요도 없고, 그냥 어느 정도 하고 난 다음에 대충 잘하는 척하시면 됩니다. 티 날 일도 별로 없고 뭐……. 언젠가는 진짜 잘하겠죠.”

“그래, 공용어 빼고는 그냥 대충 하시죠. 언젠간 진짜 잘하겠지. 공용어가 좀 의심스럽긴 하니까 유모한테 글자라도 대충 배웠다고 하든지 뭐 책으로 혼자 글자 깨우쳤다고 하든지.”

에비가일은 할 말을 잃고 남자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째 점점 가면 갈수록 막가는 기분이 들었다.

“변방 귀족 영애들은 글자만 가르치는 정도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는데, 전하께서는 꽤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셨군요. 『대륙사』는 아동용이 아닌, 제국에서 출판된 완전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역사를 제법 깊이 있게 배우셨으니 기본 역사는 잘 아시겠습니다. 바로 심화 역사로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들으면 기억나겠죠, 뭐.”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에비가일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비가일이 성의 없이 한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카일은 한참을 중얼거리며 수첩에 써내려갔다. 『그란토니아 제국사』, 『그란토니아 경제사』, 『그란토니아 정치사』, 『그란토니아 문화사』, 『이렌시아 제국사』, 『펠로베르 제국사』, 『제네트 왕국 열전』, 『동대륙사』, 『서부 1차 전쟁사』, 『서부 2차 전쟁사』, 『남북전쟁사』…….

저런 미친.

에비가일의 얼굴이 점점 질려 갔다.

“『그란토니아 귀족 아동의 필수 지식』은 아동용이긴 해도 결코 얕은 내용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내용만 엄선되어 들어 있는 명서 중의 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의 내용부터는 오로지 스스로의 독서에 의해 학습된다는 건 전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어차피 철학은 입궁 후 황족 자제를 위한 우수한 스승들 중 하나가 따로 배정될 것이니 교양에서 따로 교육받으셔야 할 내용은 없습니다. 간단하죠?”

철학이란 말에서 에비가일은 드디어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하나도 간단하지 않았다.

“유폐령을 거두는 절차에 에델가르드 공작가에서 일족의 보호―황녀인 동시에 에델가르드의 작위 계승권도 갖기 때문에―를 요청하면 최소한 약 두 달 정도는 시간이 있습니다. 제왕학이나 정치학, 외교학, 경제학, 철학, 법학과 같은 황위 계승권자가 배우는 고급 학문의 경우 아카데미도 아닌 여기서 미리 배우는 게 모양새가 부자연스러우니 배우지 않겠지만 역사는 황궁의 스승과 함께 시작하기엔 『제국사』를 이미 배우셨다고 해도 사실 조금 늦습니다. 그런고로 조금 빠듯하게 진행해서 『서대륙 3제국사』그란토니아, 펠로베르, 이렌시아 3개의 제국와 『제네트 왕국 열전』제네트어를 쓰는 8왕국의 열전을 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 정도면 ‘유폐궁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쌓은 상당한 교양’으로 자연스럽고 적합한 듯한데, 어떠십니까? 펠로베르어는 화제를 위해 입궁 후 시작하기로 하고, 일단은 역사를 서대륙 공용어와 완벽하게 다져 가면서 말입니다.”

“……내가 좋다고 할 것 같나요?”

에비가일은 대체 제게 무슨 반응을 바라고 물어보는지가 더 궁금했다. 어차피 제가 거부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러니 어느 정도 체념도 하고 있는데 저렇게 물어보니 더 화가 났다.

“그리 무리한 양은 아니니 황녀 전하께서도 괜찮으실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으십니까?”

“경은 그게 어찌 무리하지 않으며, 왜 그따위로 생각하게 됐는지 그 과정과 이유를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조리 있게 말씀해 보세요. 당장.”

에비가일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가는 악의와 반감을 카일이 드디어 느꼈는지 잠시 멈칫했다.

“……이 주에 역사 하나씩 떼시면 두 달간 네 개의 역사를 충분히 여유 있고, 또한…….”

“최소한의 내용이다. 그냥 해.”

라키엘이 대화를 더 듣는 것조차 귀찮은 듯 카일의 말을 자르며 명령했다.

존대를 하려면 존대를 쭉 하고, 반말을 하려면 반말을 쭉 하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물론 라키엘은 이미 존대를 하건 반말을 틱틱 하건 어느 쪽이든 에비가일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그냥 저 사람 자체가 기분이 나쁜 것인지도 모른다.

2주에 역사 하나? 그 역사책이 800페이지씩 되는 건 알고 하는 소린가? 3,200페이지가 최소한의 내용? 진짜 상대방의 입장이라곤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에비가일이 심호흡을 후, 하고 내뱉자 수첩을 보며 말을 고르던 카일이 다른 안건으로 넘어갔다.

“전하께서 승마와 특히 사격을 배우셨다는 점은 큰 메리트가 될 것 같습니다. 승마야 그저 기본 소양이니 배워야 할 일이 줄어든 것뿐이지만 사격을 제대로 배운 영애가 제국, 아니, 대륙에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군요. 지금은 비록 몇몇 귀족들이 사냥할 때나 고상한 취미로 활 대신 총을 쓰고, 칼 든 군인들의 허리춤에 권총이 장식처럼 매달려 있지만, 머지않아 시대는 곧 바뀔 겁니다. 곧 한 번에 여러 발을 연달아 쏘고, 말 위에서도 총을 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참 좋은 기억이 떠오르네요. 아버지가 그 말과 똑같은 말을 하면서 그 ‘한 번에 여러 발을 연달아 쏘는’ 총기 개발 사업에 재산의 반을 말아먹었거든요.”

그저 웃으며 한 말일 뿐인데 카일이 조용히 입을 닥쳤다. 물론 닥치라는 의미가 더 컸다. 눈치는 좋아 가지고. 왜 이리 아까부터 꺼내는 말마다 밉상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리긴 했기 때문에 에비가일은 자신이 조금 지나쳤다고는 생각해도 그리 미안하지 않았다. 에비가일이 한숨을 얕게 내쉬고는 카일을 향해 웃으며 이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때가 일렀던 것 같고, 사업 실패와 상관없이 나도 그 의견 자체에는 동의해요. 변화는 순간일 거고, 군인들이 제자리에 얌전히 서서 머스킷 소총을 들고 일 분에 고작 두 발 쏘려고 기다리는 모습은 옛날 옛적 이야기가 될 거라는 거요. 아직은 사거리며 정확도가 형편없으니 재장전할 동안 그냥 칼 들고 뛰어가는 게 더 빠르죠? 여전히 장식이고 말이에요. 손에 잘 벼린 칼이 들려 있는데 고작 그 단 한 발에 모든 걸 걸 이유가 없죠.”

“아직은 물론 그렇습니다.”

“비라도 오면 무용지물에다…….”

에비가일은 제 아버지가 말아먹은 사업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치고는 퍽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게 그냥 말아먹은 정도가 아니라 죽음까지 이르게 한 실패라는 걸 생각하면 더 이상했다. 마치 즐거운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았으니까. 황녀의 사후 며칠 조울증에 걸린 양 상태가 오락가락했던 에비가일이 처음으로 눈을 빛내며 총에 대해 말하는 것을, 라키엘은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자가 총 자체를 이야기하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저렇게 열심히.

총이 세상에 등장한 지는 2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기사들은 비인도적인 무기라 배척하고 있었고, 군인들마저도 권총의 지급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지독한 쓸모없음을 무게가 가뿐히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총은 새로운 한 방을 노리는 투기꾼들과 돈을 주체 못 하는 갑부들, 그리고 다른 고상한 취미나 값비싼 호신용 무기를 과시하고 싶은 귀족들, 세금 쓸 곳을 찾는 정책 관리자들에 의해 가끔 회자될 뿐이었다.

거기에 총에 관해 관심을 가진 이가 더 있다면 자신이나 여자의 아버지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이들 정도겠지. 확실히 총을 논하는 여자는 특별하긴 했다.

“역시 잘 아시는군요.”

“그저 어릴 적 곁에서 조금씩 주워들었을 뿐이에요.”

“각하, ‘시대의 흐름을 이끄는 강력한 여성 지도자’라는 콘셉트, 어떻습니까?”

라키엘을 향하는 카일의 물음에 라키엘은 그저 흐응, 하고 생각하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옮겼지만 에비가일은 등 아래부터 소름이 쫙 끼치는 듯한 느낌에 몸서리쳤다.

그딴 진지한 얼굴로 그따위 진지하고 위대한 말 제 옆에 갖다 붙이지 않았으면 했다.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 부탁이라도 하고 싶었다. 도저히 오글거려 견디기가 힘들었다.

“사격이라는 게 강력한 군인 이미지도 떠오르지만, 아무래도 아직 자리를 완전히 잡진 못한 신식무기니 진보적인 인상도 떠오릅니다. 전하께서 여성이시니 1황자나 4황자에 비해서는 포용력이나 부드러운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더 부각되겠지만, 사격을 황녀 전하의 단순한 취미보다 조금 더 중요한 키워드로 만든다면 1황자나 4황자에 비해 정치나 군사상 통제력이 떨어질 것 같은 이미지를 다각적으로 보완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또한 태생적 정통성에 따르는 보수 세력은 물론이고, 여성이라는 신분에 신식 무기를 다루는 특이점이 신흥 산업자본가 계층은 물론 진보 세력까지 세력 층을 두루 포용할 수 있게 해 줄 겁니다.”

북쪽 변방 소귀족 출신이 황실의 태생적 정통성이라는 고귀한 단어로 수식될 지경에 이르자 에비가일은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정말 사실을 조금도 모르는 사람처럼 당연하고도 뻔뻔하게 그 단어를 내뱉는 카일을, 에비가일은 믿기지 않는 듯 바라보았다.

수도에 온 지 4년, 자신도 뻔뻔해질 대로 뻔뻔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괜찮은 것 같군.”

“말들이 너무 거창해서 민망해요. 그리고 내 사격 솜씨는 정말 별거 아니라고요.”

“어차피 우리 사이에서나 내뱉는 저런 대단한 말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결국 그 말들과 같은 인상이지. 제국인들이 황녀를 떠올렸을 때의 그 인상. 인상은 말이 아닌 허상에 불과해. 저 말과 비슷한 인상만 제국인들의 머릿속에 구현시키면 그만이니까.”

인상이라……. 어쩐지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돌아갔다. 순간적으로 기묘한 현실감이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에비가일은 몸을 얕게 떨었다. 황제. 꿈처럼 아득한 단어에 현실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현실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카일에 의해 지성 개발에 관한 이야기는 전 분야에 걸쳐 끝도 없이 한참을 이어졌다. 그러나 에비가일은 3년 뒤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지는 아직 조금도, 티끌만큼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3년 뒤가 닥친다고 해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지만, 애초에 3년 뒤에도 무언가를 계속 미친 듯이 배워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카일의 계획이 4년 차로 넘어가려는 찰나였다. 공작의 집무실과 엘데르디움 간 열려 있던 책장 사이로 구세주처럼 그녀가 등장한 것은.

카일이 그 지긋지긋한 말을 멈추고 일어나 깍듯이 예를 취하고, 라키엘조차도 일어나 그녀의 손등에 친밀하게 키스했다. 에비가일은 교육 과정 브리핑의 여파로 멍해진 눈을 하고서 그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자신과 초면이고, 제게 인사를 위해 자신의 하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리고 고급스럽게 세공된 안경을 낀 귀족 부인은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한눈에도 수도의 대귀족 같은 품격이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엄격하고 매우 깐깐한 인상이었으나 눈을 마주치자 빙긋 웃는 것이 꽤 상냥해 보였다. 엘데르디움에 저렇게 들어온 걸로 봐서는 그녀도 제 정체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사실관계를 다 아는 사람을 두고 마치 제가 진짜 황녀인 양 하문하는 속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그래도 이제 한번 해 봤다고 제법 자연스럽고 친절한 어투로 말이 튀어나왔다.

“부인은 누구신가요?”

여자는 우아하게 몸을 움직여 예를 취했다. 자신도 질리게 배운 적 있는, 황족을 대하는 예법. 짧고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자신이 과연 저렇게 했던가는 의문이었다. 저렇게 우아했던가, 저 인사가.

“지고하신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아그네스 길데, 황후 폐하의 시녀장입니다.”

“아! 길데 백작부인.”

“아그네스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 전하.”

황후의 시녀장이라면 백작부인의 작위까지 수여받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시녀들의 전설적인 롤모델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꽤 유력한 가문 출신임에도 결혼이 싫어 종신직이 된 특이한 경우였다. 제국에서는 여자들이 집안의 작위를 직접 승계 받는 일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지만―이 경우는 남자와 동일하게 호칭한다.―, 저렇게 여자가 단독으로 작위를 받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보통 황궁의 고위 종신직 시녀들이 받았으므로 미혼 여성이었지만 전자의 경우와 구별하고 대부분 나이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존중하는 의미로 부인을 붙였다. 물론 그런 작위가 대부분 봉토도 없고 승계도 불가능한 명예 작위이긴 하지만, 같은 고위 시녀라도 작위가 있고 없음은 대우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게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남작부인 정도까지만 올라가면 출세 중의 출세였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출세 중의 출세 중의 출세 중의 출세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제 인생을 이토록 꼬이게 만든 주요 인물 중 하나기도 했다. 그녀를 비올레타의 궁에 집어넣은 장본인. 에비가일은 단념이 담긴 얕은 한숨을 쉬었다.

에비가일이 침대에서 일어나 라키엘이 앉아 있는 소파 대신 1인용 의자 두 개가 마주 보는 테이블로 손짓하며 걸어갔다. 아그네스는 공손히 따라와 에비가일의 맞은편에 우아한 동작으로 앉았다.

“전하께서는 초면이시겠지만, 저는 전하를 멀리서 뵌 적이 있답니다. 그때보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군요.”

모두 부인의 탁월한 선택 덕인 것 같네요.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경질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이젠 정말로 이들과 손을 잡았으니 별수 없었다. 에비가일은 애써 입매를 끌어 올려 예의 바르게 미소로 응대했다.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지요. 그 난리통에 옥체가 얼마나 놀라셨을지! 균형 있는 식단으로 몸의 균형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쏜튼 경, 제가 간단하게 황녀 전하의 식단을 준비해 왔으니 공저의 수석요리장에게 전해 줘요.”

간단하다며 아그네스가 카일에게 내민 공단 수첩은 300페이지는 족히 되어 보였다. 하여튼 이 동네는 도대체 간단하다는 둥 무리하지 않다는 둥 하는 기준이 죄다 글러 먹었다. 공손하게 수첩을 받아든 카일이 다시 가만히 서 있자 아그네스가 거기 멍청하게 서서 뭐 하냐는 듯 눈짓하며 말했다.

“쏜튼 경?”

카일은 짐짓 정중해 보이지만 ‘굳이 지금 제가 움직여야만 할까요?’라는 메시지 정도는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눈빛으로 반문했다.

“지금 말씀입니까, 백작부인?”

“당장 오늘 점심부터라도 전하께서 최상의 식사를 하셔야지요. 참, 전하, 조반은 드셨나요?”

눈뜨자마자 무려 황후 폐하께서 머리맡에 앉아 계셨고 지금에 이르렀다. 조반은 무슨 놈의 조반인가.

“아직 안 먹…….”

에비가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그네스는 라키엘을 책망하듯 바라보았다.

“그란토니아에서는 그저 스쳐 가는 객이라도 끼니를 대접하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제국인들의 성정이 아닙니까. 공자, 아니, 각하께서는 어찌…….”

“카일?”

아그네스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라키엘은 미간을 찌푸리고선 카일의 짧은 이름을 압박하듯 잇새로 내뱉으며 많은 말을 함축했다.

너 지금 당장 그 수첩 쪼가리 들고 셰프한테로 꺼져. 네가 그 수첩을 들고 나가기만 해도 내가 저 지긋지긋한 잔소리를 0.5초라도 더 들을 이유가 있을까. 네가 지금 당장 계단 5층을 뛰어 신속히 내려갔다가 양손 가득 그놈의 식단 중 오늘 아침과 점심 메뉴를 적당히 섞어 들고 온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내가 열두 살짜리 소공자마냥 고모의 시녀장에게 그란토니아인의 관습에 대한 일장연설을 더 이상 들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예상컨대 저런 말들이 말이다.

잠시간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그 불평등하기 그지없는 시선의 마주침을 에비가일은 목격했다. 어쩐지…….

“……다녀오겠습니다.”

에비가일의 동정 어린 눈길을 등 뒤에 달고 카일은 사라졌다.

“전하, 그런데 앉은 자세가 좋지 않으시군요.”

“네?”

“척추를 곧게 펴십시오.”

“이렇…… 게?”

“많은 영애들이 착각하지만, 허리를 곧게 펴는 것과 엉덩이를 뒤로 쭉 빼는 것은 아주, 아주 다르죠. 등허리 아래로 몸을 지지하는 느낌으로…….”

어깨는 뒤로 약간 더 젖히시고 긴장을 푸세요. 아니, 조금 늘어트리듯이, 너무 늘어트리셨어요. 거기서 가슴을 적당히 내밀고, 목은 그 부분을, 아니, 그게 아니죠. 되도록 목을 구부리지 마시고 턱을 끌어당기듯이. 아뇨. 그 부분은 일직선이 되도록 하세요. 거기서…….

자그마치 15번을 연달아 지적당하며 이리저리 몸을 조정하고 나서야 아그네스의 말이 멈췄다. 밧줄에 빙빙 돌아 감기다 한 번에 휙 풀려난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아그네스 역시도 수첩 하나를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에 목도했던 불길함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역시 예법보다도 자세부터 바로잡아 볼까요?”

에비가일은 이를 갈며 뇌까렸다. 저놈의 수첩들, 진짜 내가 다 불살라 버릴 거야.

“전하, 서 보세요.”

“네.”

“전하, 저기 카우치까지 걸어가 보세요.”

“네.”

“전하, 그 카우치에 앉아 보세요.”

“네.”

“전하, 모든 게 다 엉망이십니다.”

“네…….”

깐깐해 보이는 첫인상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족히 열 번은 넘도록 방 안을 왕복했지만 들리는 말은 ‘다시’와 ‘아니, 그게 아니죠, 거기서’로 시작하는 말뿐이었다. 아그네스는 하루 이틀로 고칠 일이 아님을 직감했는지 ‘전하, 그냥 앉으시지요’로 일단 마무리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수첩에 무어라적었다.

에비가일이 우울한 눈으로 아그네스에게서 라키엘로 눈길을 옮기자, 어느새 차나 홀짝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차라리 저 인간도 아까 나가 버리지. 밉상스러워 죽겠다.

“자세는 내일부터 조금씩 바로잡아 보기로 하지요. 이제 인사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에비가일이 포기한 듯 다시 일어나자 아그네스도 일어나 앞에 정중히 섰다. 그리고 그녀가 황족에 대한 예를 하려는 모습에 아그네스는 곁으로 약간 비켜섰다. 아무리 교육 중이고 연습에 불과한 것이라도 황족이 아닌 자가 황족에 대한 예를 받는 쪽에 서 있으면 황족 기만이었다.

에비가일이 왼손을 오른쪽 가슴 위쪽에 살짝 올리고, 오른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펼치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다음으로, 귀족 간에 일반적으로 쓰이는 인사로, 고개를 조금 숙이며 무릎을 까딱했다. 자신이 보기엔 그다지 흠잡을 데 없는 동작이었는데, 아그네스는 심각한 얼굴로 다시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내일부터 하실 게 많네요. 제가 적어도 일주일에 다섯 번은 와야겠어요.”

에비가일은 아그네스에게 보이지 않게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턱을 괸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라키엘이 피식 웃었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아그네스가 에비가일에게 고개를 가누는 가장 우아한 각도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의하고 있을 때, 카일이 저 멀리서 집무실문을 낑낑대며 몸으로 밀고 들어왔다. 향긋한 음식 냄새가 엘데르디움까지 흘러들어 왔다. 용케도 양손에 커다란 쟁반을 두 개나 들고서 올라왔다 싶었다. 카일이 힘들어 보이든 말든 음식 냄새에 에비가일은 마음의 평온이 찾아오는 걸 느꼈고, 카일은 인생에 회의를 느끼는 중이었다.

공저의 고용인들 중 5층을 공식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공작을 어린 시절부터 보필한 수석집사와 수석하녀장, 차석집사까지 단 세 명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수석집사는 공작령에 급사로 갔고, 차석집사는 외근에, 수석하녀장은 자기는 요즘 허리가 너무 아파서 각하 방 청소 매일 하기도 귀찮아 죽겠으니 5층은 되도록 하루에 한 번만 가고 싶고, 아쉽게도 오늘은 이미 새벽에 한 번 갔다 왔기 때문에 갈 수 없다며 이상한 궤변으로 자신을 내쳤다. 그렇다고 감히 기사단장을 불러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힘없는 문관이 뭘 어쩌겠는가? 이 거대한 요리들을 운반하는 몫은 온전히 카일의 것이 됐다.

하녀들을 달고 4층까지는 품위 있게 올라왔지만 두 개의 쟁반이 손 위에 놓인 순간부터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문득 엘리트로서의 자존감마저 잊은 채 음식을 운반하는 데 온몸의 신경을 집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회의감은 바로 거기서 출발했다.

아그네스가 일어나 직접 접시를 우아하게 에비가일의 앞에 하나씩 세팅하며 말했다.

“닭고기 스튜, 싱싱한 블루베리와 라즈베리, 토마토와 치즈, 호밀로 만든 케이크, 양상추 샐러드……. 셰프가 훌륭하게도 적절히 아침과 점심 메뉴를 섞어 줬군요.”

생각보다 아주 평범하고 단출한 음식들이었지만 재료들의 질은 한눈에 보기에도 에비가일이 평생을 본 것들과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블루베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딱 세 번 먹어 본 게 다인 고급 과일이 제 앞에 있었다. 딱히 배가 고팠던 것도 아닌데, 음식을 보니 배가 고파졌다.

“전하께서는 조반을 거르셨으니 이렇게 속에 자극이 가지 않게 드셔야 한답니다. 중반을 드시기에는 조금 이른 시기이니, 두 시간 반 뒤에 가벼운 디저트를 드세요. 그래야 석반까지 배가 허하지 않습니다.”

시간까지 정확히 지정해 주는 것에 에비가일은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2시간 뒤나 3시간 뒤에는 먹으면 안 되고 꼭 2시간 반 뒤에? 아무 때나 배고플 때 먹으면 안 되는 건가?

“스튜를 먼저 세 번 떠서 드시고, 속을 따뜻하게 데우도록 하세요.”

그 말에 따라 순순히 스튜를 세 번 떠 마시자 그녀의 말처럼 속이 따뜻해져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서도 왠지 네 번은 떠먹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소심한 느낌에 기분이 희한해졌다. 다행히도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다른 음식까지 완벽하게 세팅한 아그네스가 그 자리에 앉지 않고 라키엘에게 공손하게 손짓했다.

아그네스의 음식이 아닌 그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아그네스는 가는 모양이었다. 에비가일은 차라리 라키엘이 반가워 눈을 반짝였다.

그래, 먹을 땐 개도 안 건든다는데, 포크질 하나에 예법이 대여섯 개씩 튀어나오면 어떻게 밥을 먹을까. 저 인간이 아무리 재수 없어도, 적어도 밥 먹을 때만큼은 저 예법 선생님보다 나을 터였다.

“그럼 전하,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가시나요?”

“황후 폐하의 곁을 오래 비울 순 없지요. 내일 오전에 다시 올 거랍니다. 각하, 내일은 반드시 황녀 전하께서 조반을 거르지 않도록 하세요. 그리고 일과 중에는 전하를 사 층에 모시라는 황후 폐하의 전언입니다.

제가 객으로서 이 엘데르디움을 계속 드나드는 것도 무리이고, 또 언제까지고 공작의 침실에 미혼의 황녀를 하루 종일…….”

어쩐지 전언에서 잔소리 조로 이어질 것 같은 말을 라키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잘라냈다.

“그럴 생각입니다.”

엘데르디움엔 어떠한 객도 들이지 않는다는 불문이 있었다. 아무리 비공식적인 객이라 한들 오늘 엘데르디움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길데 백작부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라키엘의 얼굴에 아그네스는 싱긋 웃고는, 그들에게 우아하게 인사하고서 카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황급히 사라졌다.

바쁜 모양이었다. 하긴 황궁에서 제일 바쁜 여자 중 하나리라.

에비가일은 그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약간의 해방감마저 느꼈다. 정말이지 그녀가 바쁜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저 멀리로 집무실의 문이 닫히는 걸 보자마자 입안에 쏙 집어넣은 블루베리의 향이 입안에 가득 퍼져 나갔다. 에비가일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라키엘이 그 앞에 성의 없이 털썩 앉았다.

라키엘 앞에 놓인 음식은 고작 세 가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마저도 죄다 고기였다. 메인 디쉬만 단출하게 세 가지가 차려진 이상한 식사, 그리고 야채라고는 고기 곁에 장식처럼 몇 점 놓인 것이 전부. 저래 봬도 기사는 기사인 모양이었다. 에비가일이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기사라는 말에 그가 꽤 우람한 체격을 갖고 있으리란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에비가일이 평생 봐 온 얼마 되지 않는 기사들과 군인들은 모두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봐도 우람한 체격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습에 에비가일은 새삼스레 실망했다.

키도 큰 편이고, 어깨도 보기 좋게 벌어져 있는 데다 저 등 선 하며 전체적으로 참 잘 빠지긴 했다. 그러나 날카롭고 이지적인 인상 때문인지 군인보다는 차라리 문관 같았다. 그리고 그 느낌에는 저 손도 한몫했다. 만년필이 쥐어져 있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지는 하얗고 단정한 손.

우아한 칼질로 고기를 썰어 가던 그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에비가일이 멍하니 그 손에서 시선을 위로 들자, 무표정한 얼굴로 고기를 씹으며 그녀를 응시하는 라키엘이 보였다.

“뭐 하나?”

“아.”

“나는 그렇게 계집들이 밥 먹는 데 뜸 들이는 시간을 싫어한다.”

저게 최고 귀족이 할 말인가? 이 나라의 귀족들은 계집뿐 아니라 사내놈들도 모두 거북이 눈꺼풀마냥 천천히 먹었다. 에비가일은 속으로 쏘아붙였다.

물론 그의 말처럼 그란토니아의 영애들이 천년만년 식탁에 앉아 살 것처럼 유독 느려터지게 먹는 건 사실이긴 했다. 자신이야 어차피 일하면서 틈틈이 바쁘게 먹던 게 습관이라 이젠 느리게 먹고 싶어도 불가능했지만.

내심 기분이 팍 상한 에비가일은 그에게 싱긋 미소 짓고는 입안의 양상추를 최대한 천천히, 아주 꼭꼭 씹어 넘겼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빨리 먹어 줄 의향이 있었다. 이렇게.

그러나 남자는 그 반항과도 같은 행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라키엘이 신경질적으로 포크를 놓고 씹어뱉듯 말했다.

“황궁에 가서야 삼십 초를 씹든 한 시간을 씹든 상관없으나, 공저에서는 그러지 마. 길데 부인 앞을 제외하고는. 시간 낭비는 질색이니까.”

“그렇다고 쫓기듯 먹을 건 없잖아요.”

“너는 앞으로 매일 숨 쉬듯 할 일이 많아. 하루에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고 싶거든, 식사를 빨리하고, 잠을 덜 자라.”

그 말을 잇듯 무언의 재촉하는 눈빛에 떠밀려 결국 에비가일은 음식을 채 다섯 번도 삼키지 않고 모두 넘겨 버렸다.

“체할 일 있나? 품위 없게 걸신 든 것처럼 먹지마.”

에비가일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꼭꼭 빠르게 씹어 넘겼다. 그렇게 대화 한마디 없이 식사가 끝났다. 전쟁 같은 식사였다. 물론 에비가일의 마음속에서만.

라키엘이 손수건으로 단정하게 입을 닦아내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에비가일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요?”

“일어서.”

“네?”

“언제까지고 남자 침실에 종일 퍼질러 누워 있을 건가? 측실도 그렇게는 안 산다. 따라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는 사람을 기다리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제가 있으래서 있지, 있고 싶어서 여기 있나. 그리고 좀 가려면 같이 가든지. 하여튼 여유와 배려가 없는 인간이었다. 에비가일은 새침한 표정으로 손수건으로 입을 대충 톡톡 두드려 닦은 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쫓았다.

자신이 엘데르디움을 나서기 무섭게 책장이 저절로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모습을 입을 헤 벌린 채로 몇 초간 바라보던 에비가일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미 집무실을 벗어나고 없었다. 에비가일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에서 그를 겨우 따라 잡고 인내와 배려에 대해 몇 마디 해 줄까 입을 달싹이다, 그냥 그러지 않는 편이 신상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에비가일은 입을 다물었다. 대리석 바닥을 맑게 울리는 두 사람의 구두 소리가 교차하듯 높은 천장으로 울려 퍼졌다.

둥그런 아치 모양의 높은 천장이 이어지는, 넓고도 기나긴 복도에 이리도 작은 사람이 둘 있었다. 그녀는 다시 압도당했다.

눈물 바람으로 끌려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이 아득하고도 고고한 사치. 그렇게 거대한 관문 같은 것을 지나 조금을 더 걷자 고풍스러운 계단이 펼쳐졌다.

4층으로 층 하나를 겨우 내려갔을 뿐인데, 마치 다른 집 같은 느낌이 생경했다. 조금 더 화려했고, 조금 더 보통의 저택 같았으나 아무도 살지 않는 느낌이 들어 조금 기묘했다. 이윽고 그녀는 라키엘을 따라 어느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갔다.

새하얀 방이었다. 하얀색의 빛나는 대리석 바닥과 금사가 수놓인 상아색 커튼, 침대 위 이불, 새하얀 그랜드 피아노, 그리고 커다란 방을 가득 채운 흰색의 화려한 가구들. 멀리 한쪽 벽면에는 색색의 화려한 드레스가 걸려 있고, 천장까지 기둥이 연결된 거대한 침대에는 상아색의 레이스 캐노피가 흘러내렸다.

“황후 폐하께서 처녀 적 쓰시던 방이지. 쓸모없이 눈이 아플 정도로…….”

“정말이지 눈부셔요!”

라키엘의 부정적인 평가를 본능적으로 가차 없이 자르며 에비가일이 감탄 어린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황홀한 눈빛으로 방 안에 한 걸음씩 조심스레내디뎠다.

라키엘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신의 뒤로 문을 닫았다. 중앙에 서서 방을 훑어보던 에비가일이 라키엘 쪽으로 빙글 돌며 해사하게 웃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보다는 그의 뒤를 바라본 것이었지만.

곱게 휘어지는 눈매 사이로 암녹색 눈동자가 사라졌다가 찰나처럼 다시 되돌아온다. 그 잔상을 헤매듯 라키엘이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문득 그것을 깨닫고 입매를 딱딱하게 굳혔다.

그녀의 몸짓에 적갈색 생머리가 하얀 모슬린 드레스 자락과 함께 허공에 낮은 호선을 그렸다. 이 방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주제넘은 설렘이나 치기 어린 욕심 따위는 조금도 없는, 그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솔직하게 다 내보이는 순수한 황홀과 감탄. 라키엘은 저런 귀족 영애를 처음 보았다.

“제가 정말 이 방을 써도 되나요?”

“너 말고는 쓸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정말 태어나서 본 방 중에서 제일 아름다워요! 황후 폐하께서 친히 꾸미신 건가요?”

“여긴 엘데르디움이 아니니 어마마마라고 불러.”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은 에비가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긴 안전하지 않은가요?”

“수도 공저만큼 안전한 곳도 없지만, 그래도 사 층까지는 메이드들이 드나들어. 아니, 그냥 엘데르디움 바깥에선 무조건 철저히 해라.”

“알겠어요.”

“이 방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니, 황궁의 네 방도 이렇게 꾸미도록 황후께 고하지. 괜찮나?”

라키엘의 말에 에비가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좋아요!”

에비가일은 캐노피를 만지작거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 천진한 모양을 삐딱한 자세로 잠깐 응시하던 라키엘은 똑똑, 하는 소리에 뒤로 몇 걸음 걸어가 문을 열었다. 루데릭이었다.

“누구…….”

상큼한 얼굴로 뒤돌며 루데릭의 정체를 묻던 에비가일이 이내 말끝을 흐렸다. 말끝을 흐림과 동시에 얼굴도 흐려졌다.

그녀의 시선은 루데릭의 얼굴이 아닌 루데릭이 들고 있는 것에 오로지 꽂혀 있었다. 루데릭은 깍듯한 자세로 양해를 구하듯 라키엘에게 약식으로 인사하고는, 자신의 짐을 테이블에 한가득 올려놓았다.

루데릭의 정체 따윈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흔적조차 없없다. 이 방의 모든 사람이 그걸 알고 있었지만 하문은 하문이었다. 그는 에비가일의 앞에 와 섰다. 에비가일은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에 정신이 팔려 그가 앞에 와 있는지 어떤지에 관해선 관심도 없었다.

그는 에비가일도 모르는 새 뻣뻣하게 허공에 멈춰 있던 손등을 휙 잡아끌어 자연스럽게 키스했다. 그 감촉에 문득 정신이 든 에비가일이 화들짝 놀라 손을 빼내는 우스운 꼴을 연출했지만, 루데릭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단정하게 정리한 잿빛 머리카락 아래 무뚝뚝한 얼굴.

“루데릭 쏜튼입니다.”

“공작가의 기사다. 앞으로 황녀의 호위를 맡게 될 테고.”

“……설마 쏜튼 경의.”

“예, 동생입니다.”

형인 줄 알았는데. 에비가일은 입안으로 제 말을 삼켰다. 이리저리 루데릭을 뜯어보던 에비가일은 이내 푹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사실관계 다 알고 서 있는 것일 테니 조심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테이블로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갔다.

루데릭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은 바로 책들이었다. 올려놓았다기보다는, 사실 쌓여 있다는 게 맞다.

겨우 제 엉덩이 아래 높이의 테이블일 뿐인데, 책은 제 턱밑까지 쌓여 있었다. 이건 차라리 탑에 가까웠다.

에비가일은 멍청한 얼굴로 책들의 제목을 중얼거렸다.

“『동서대륙의 지방별 주요 특산품 및 지리』, 『그란토니아의 지역 특산물과 영지별 산업 정책』, 『세계는 지금』, 『세계 금융을 움직이는 배후 세력 상권?하권』, 『세계 명작 168선』, 『세상의 명시 250선』, 『거짓말의 진화』, 『민중의 반역』, 『사람은 어떻게 죽는가』, 『이렌시아 그들의 모순에서 답을 찾다』, 『전략론』, 『전쟁론』, 『설득』, 『돈의 역사』, 『전쟁과 인간』,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아, 그건 네가 이 주간 매일 남는 시간마다 한 권씩 읽어야 할 책들이지.”

“이 특산품 두 권만 해도 천 페이지는 되겠어요. 소설이 아니잖아요. 글자 하나하나가 죄다 암기인데 어떻게 하루에 한 권을 읽어요?”

“하면 되겠지.”

남자는 이상한 부분에서 굉장히 낙천적이었다. 에비가일이 미간을 찡그렸다.

“특산품이라니, 이런 책은 왜 읽어요?”

“연회에서 그만큼 쓸모 있는 게 없을걸. 누구를 만나든 쓸모 있어.”

에비가일은 할 말을 잃고 말을 돌렸다.

“세계, 그래요. 이 책들도 물론 유용하죠. 세계 명작…… 이거 한 권이 정확히 853페이지네요. 책 한 권에 168가지의 작품이 들어 있고, 이걸 고작 하루에 남는 시간에 다 읽어야 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아요.”

어색하고 작위적인 미소와 함께 에비가일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것도 아는 척하기엔 유용하겠네요. 명시도 마찬가지고. 거짓말, 그래요. 누가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지 잘 알아봐야죠. 민중, 그래요. 민심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사람이 어떻게 죽느냐? 그래요. 언젠간 모두 죽고 썩어 없어질 텐데 어떻게 죽는지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겠군요. 이렌시아가 어떻게 모순적인 짓거릴 했는지도 알아야 하겠고요. 전쟁과 전략은 얼마나 재밌을지 기대가 되요. 설득도 잘해야죠. 그리고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돈의 역사는 오죽 중요하겠어요?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그래요. 제국에 종교가 몇 갠데 신학 정도는 알아야죠. 그래요…….”

에비가일은 흡사 실성한 듯 웃으며 중얼거리다 홱 눈을 부라렸다.

“지금 이것들을 고작 이 주 만에 다 읽으라고요? 도대체 날 뭐로 보는 거예요?”

“뭘?”

“아니, 공, 나 정말 그냥 평범한 머리예요. 외국어를 세 개나 하라면서요. 역사도 네 개나 하라면서요. 예법도 배워야 하고, 피아노에 바이올린까지 해야 하는데 이젠…….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이 짧은 기간 동안 전부 소화하라는 거예요?”

“닥치면 다 하게 돼 있어.”

그건 오로지 너만의 생각이 아니겠느냐는 듯 에비가일이 퀭한 눈으로 라키엘을 응시했다.

“저녁 여덟 시가 되면 그날 읽을 책을 들고 엘데 르디움으로 올라와.”

“왜요?”

“어차피 잠은 엘데르디움에서 잘 거니까.”

“왜요?”

“혼자 두면 방종해진다.”

마치 천방지축 열한 살짜리를 단정하는 투에 에비가일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 방종이라니 제가 어린앤가? 그리고 고작 취침 장소 다른 걸로 어떻게 얼마나 방종해진다고.

“그냥 불안하면 불안하다고 하세요.”

“그래, 불안해. 네가 무슨 짓을 할지.”

아니, 내 신변을 불안해해야지. 에비가일이 기막힌 얼굴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그 책을 들고 올라와서 읽고, 네가 다 읽은 다음엔 내가 질문을 몇 개 할 거야.”

이젠 시험까지 에비가일의 일정을 비집고 들어왔다.

“대답을 틀리거나 하지 못하면 제대로 할 때까지 넌 못 자. 그리고 그렇게 못 자도 언제나 일곱 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도 알아둬. 오늘 밤부터.”

에비가일이 절망적인 얼굴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다음으로 던져진 것은 악보들이었다. 글자보다는 나았지만 굳은 손으로 이 악보들의 수준을 해내려면 얼마나 미친 듯이 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바이올린은 더했다. 음의 자리나 겨우 기억나는 수준이었으니까. 뒷골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예법은 아홉 시부터 열한 시까지다. 열한 시부터 열두 시까지는 내가 공용어를 가르칠 거고, 한 시부터 세 시까지는 카일이 역사를 가르칠 거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은 선생이 필요 없겠지? 당분간은 손이나 풀도록 해. 저녁 먹기 전까지 하도록 하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그날 배운 걸 복습하든 다음을 예습하든 마음대로 해. 그리고 여덟 시가 되면 책을 들고 엘데르디움으로 올라와.”

“근데…… 당신이 공용어를 가르친다고요?”

“문제 있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보다 다른 전문적인 어학 선생님이 좋지 않을까 해요.”

저 인간에게 얼마나 두루두루 까여 가며 배울지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에비가일의 조심스러운 말을 그의 전문성에 대한 의심으로 해석한 라키엘이 눈썹을 한 번 꿈틀하고는 오만하게 말했다.

“내가 그 전문적인 선생들보다 더 잘한다.”

저 뻔뻔한 자만을 좀 보라. 겸양과 평생을 담쌓고 살았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 말은 사실일 것 같았다.

“……물론 그러시겠죠.”

“곧 디저트가 올라올 테니 그거나 먹고, 카일이 올 때까지 피아노나 치고 있어. 역사도 오늘부터 한다.”

라키엘이 장갑을 벗었다 다시 끼며 점검하는 모습에 에비가일의 우울한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공은 어디 가요?”

“너 때문에 며칠째 업무가 엉망이라.”

“그게 왜 나 때문이에요.”

“그럼 누구 때문인가?”

“내 핑계로 당신이 농땡이 부린 거겠죠!”

라키엘은 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휙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라키엘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양 의자에 늘어지듯 기댄 채 에비가일은 무기력한 얼굴로 쌓인 책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악보를 뒤적거렸다. 아는 노래, 아는 노래…….

“찾았다!”

몰펜바흐의 <악흥의 순간>. 제 어머니가 좋아하던 곡이었다. 잠시 밝아진 표정이 다시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손을 풀기엔 어차피 부족한 곡이었다. 에비가일의 손이 다른 악보들을 뒤적거렸다.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격정적이고, 빠르고, 포르티시모로 처음부터 끝까지 때리듯 칠 수 있는 곡이었다. 빠르게 악보들을 넘기던 에비가일의 손이 멈췄다.

“뵐르니의 <폭풍의 눈>…….”

바로 이거였다. 1악장? 필요 없다. 2악장? 필요 없다. 악상 표현? 역시 필요 없었다. 3악장, 처음부터 끝까지 포르티시모로. 에비가일은 전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비가일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거리의 전위 예술가처럼 피아노를 쾅 내리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크고 짧은 소음에 루데릭의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 어색하게 굳었으나, 이내 멜로디가 어색하게나마 유려하게 흘러나오자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랜만인 것치고는 제법 잘 움직이는 손에 에비가일은 탄력을 받았다. 그리고 점점, 그 탄력을 발판 삼아 그녀는 피아노를 때리기 시작했다. 피아노에서 떨어졌다 다시 낙하하는 손이 어쩐지 전투적이었다. 천성적으로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루데릭의 눈빛에 당혹감이 어렸다.

피아노에 화가 난 건가? 루데릭은 예술과 평생 멀리 살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저게 예술은 아니라는 것.

루데릭은 품에서 회중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7시 49분.

에비가일은 역사 수업이 끝나고 카일이 3시에 방을 나간 후로, 미친 듯이 피아노만 쳐 댔다. 스물넷의 루데릭은 열여덟에 기사 서품을 받은 이후 고작 종일 가만히 서 있는 일에 힘들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가만히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게 힘든 것은. 루데릭은 뼛속까지 기사였고, 근무 중에는 무료함조차 잊는 남자였다. 그러니까 지금 힘든 게 기사들의 가장 큰 적이라는 ‘가만히 서 있는 무료함’ 때문이 아니란 소리다. 왜 자신은 이자리를 벗어날 수 없고 왜 저 소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지…….

여자는 피아노를 잘 치긴 했지만, 무슨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건지 부모의 원수를 만난 것 마냥 피아노에 학대를 해 댔다. 화풀이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곡은 계속 바뀌었지만, 일관성 있게도 폭풍우가 몰아치거나, 해일이 밀려오거나, 세상을 뒤집어엎을 기세의 곡만 선곡 되었다. 그녀는 저녁도 걸렀다.

루데릭은 회중시계를 또다시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마치 50분에 수업이 마치는데 43분부터 1분에 한 번씩 시계를 확인하는 초조한 모양으로. 이는 전에 없던 일이었다.

7시 53분. 10분은 지난 줄 알고 있었던 루데릭은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여덟 시입니다. 여덟 시입니다. 루데릭은 속으로 반복해 외웠다. 8시가 되자마자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그 와중에도 비극적이고 시끄러운 피아노 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녀는 엘데르디움에 여덟 시까지 가야 했다. 그리고 이제 7시 55분. 저 빌어먹을 피아노 의자에서 여자를 떼어 놓을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시간이었다.

“전하, 여덟 시가 다 되었습니다. 가셔야 합니다.”

미친 듯이 움직이던 에비가일의 손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에비가일은 잠시 멍하니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내 일어섰다. 그리고 테이블로 빠르게 걸어갔다. 냉랭한 눈이 테이블 위의 책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돈의 역사』 당첨.

에비가일은 중간에 있는 책을 잡기 위해 위의 책들을 보통 사람처럼 옆으로 옮기는 대신 휙 밀었다. 『돈의 역사』 위에 놓여 있던 책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비올레타는 흡족한 듯 그 붕괴 현장을 바라보았다. 루데릭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에비가일은 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책을 든 손이 조금 후들거렸다. 갑자기 무리한 탓이었다. 그래도 종일 피아노를 팬 탓에 속은 조금이나마 후련했다.

층계를 올라 5층에 도착하자 루데릭은 예의 그 거대한 관문 앞에서 그녀를 정중히 배웅했다. 오늘 자신이 고른 책은 그 징그러운 책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재밌어 보였고 제법 얇기도 했고 글자도 컸고 글자간 간격도 컸고 여백도 컸다.

여러모로 위안이 됐다. 오늘은 첫날이니 이걸 최대한 빨리 읽고, 빨리 자리라.

특산품 시리즈라도 보는 날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할 것이다.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기에 오늘 한 시간이라도 더 자야 했다.

공작의 집무실을 열자, 거대한 책상에 앉아 펜대를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라키엘의 모습이 보였다. 에비가일은 말끄러미 라키엘을 응시하며 다짐했다. 이 남자보다 더 쉴 새 없이, 소처럼 이걸 다 읽고, 침대에 빨리 눕고 말리라.

에비가일은 탁탁 걸어가 공작의 책상 앞에 섰다. 책상의 끝 너머로 하얀 모슬린 자락이 시야에 들어오자, 라키엘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에비가 일이 책장 쪽으로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열어 줘요.”

대꾸 없이 라키엘이 일어나 『그들의 종말에 고함』이란 책을 빼 들고 그 자리에 손을 넣었다. 육중한 책장이 끌리는 잡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린다. 이건 몇 번을 봐도 신기했다. 에비가일이 책을 꼭 껴안은 채 엘데르디움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에비가일이 뒤돌았다. 그는 다시 책상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안 닫아 줘요?”

그는 또 대꾸가 없었다. 그런 무시 정도는 이제 익숙했기에 에비가일은 가볍게 넘겼다. 그녀가 테이블로 걸어가 책을 던지듯 내려놓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듯 앉았다. 잠시간 그 상태로 멍하니 앉아 있던 에비가일이 이제 슬슬 시작할까 싶어 책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책 너머 맞은편으로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놓인 두꺼운 서류 뭉치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에비가일의 시선이 조금 더 위로 향했다. 라키엘은 또 대꾸 없이 자리에 풀썩 앉았다.

“공이 왜 여기서 해요?”

“원래 내 침실인데.”

“그걸 누가 몰라요? 여기서 뭐 해요?”

“공작령에서 올린 작년 재정결산보고서 검토.”

“아니, 그거 말고.”

“겸 널 감시한다.”

“…….”

에비가일이 잠시 말없이 있자 라키엘은 이내 자신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책 읽으라면서요. 책은 편안한 환경에서 편안하게 읽어야 잘 읽어지는 거 모르나요?”

“널 여기 혼자 두고 나갔다 다시 들어왔을 때 내가 본 모습은 모두 자는 모습이었지. 넌 편안하면 자더라.”

“며칠이나 됐다고. 남들이 보면 매일 그러는 줄 알겠어요!”

“매일 그럴 수만 있었으면 그랬겠지.”

순간 궤변에 그대로 휘말릴 뻔한 에비가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 읽어야만 잘 수 있다고 공이 그랬잖아요. 나 빨리 읽고 빨리 자고 싶은 사람이에요. 정말 딴 데로 안 새요.”

“그래, 알겠으니까 어서 신경 쓰지 말고 읽어.”

말도 안 통했다. 에비가일은 불퉁한 표정으로 자신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제법 시간이 흘렀다.

라키엘이 들고 온 서류는 분명 제가 지금 손에 든 책보다 두 배는 두꺼웠다. 글씨는 훨씬 더 깨알 같았고, 글자 간격도 빽빽했다.

보지도 않고 휙휙 넘겼던 건 아닐까. 에비가일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가 다 본 것처럼 넘겨놓은 서류를 응시했다. 서류에 체크된 흔적들을 보면 그런 게 아닌 것 같기는 한데, 고개를 내려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내려다보면 고작 반 조금 넘게 왔을 뿐이다.

에비가일은 이 상황이 그리 말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열한 시야.”

“…….”

“빨리 다 읽고 빨리 자겠다더니. 아직도.”

“그거 다 읽은 것 맞아요?”

“굳이 글자 하나하나 음미하며 읽을 이유가 없는 문서지.”

갑자기 열이 확 뻗쳤다. 애초에 불리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결코 자신이 무식한 게 아니라. 저 남자는 서류 검토였고 저는 독서가 아닌가. 게다가 저는 지금 글자를 하나하나 씹어 먹어도 이해가 될까말까한 어려운 내용을 보고 있었다.

이 책은 정말이지 끔찍하게 어려웠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양심이 말했다. 저 남자는 네 손에 들린 종이 묶음의 두 배에 달하는 종이를 봤고, 저 남자가 읽은 반도 안 되는 양을, 너는 저 남자가 다 볼 동안 그 절반밖에 보지 못했노라고.

라키엘은 의자에 조금 깊게 기대앉으며 답답했는지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했다. 낮과는 다른 나른한 표정 위로 머리카락에 의해 그늘이 생겨났다.

“당신, 피곤해 보여요.”

“피곤해. 너 때문에.”

“나 때문에 피곤할 수 있어서 다행이면서.”

자신의 가치를 자연스레 추켜올리는 말에 라키엘이 우스운 듯 픽 웃었다.

“근데, 정말 이거 자기 전에 다 읽어야만…… 하는 거겠죠?”

“그래.”

“하지만 공 정말 피곤해 보여요.”

에비가일은 짐짓 상냥한 투로 ‘나는 이걸 다 읽은 모습을 정말 꼭 자기 전에 너에게 보여 주고 싶지만 네가 피곤하다니 내가 어떻게 굳이 너에게 그런 폐를 끼치겠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서 자렴, 나는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말을 보이지 않는 괄호 안에 넣고 말했다. 그중 4분의 1 정도는 정말 진심이었건만, 라키엘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원래 하루에 보통 서너 시간씩 잔다. 아직 시간은 많아.”

“그게 인간이 할 짓인가요?”

“네가 하기 싫은 짓일 뿐이겠지.”

“그냥 가서 좀 자요. 내가 어련히 알아서 다 보고 잘까!”

“어련히? 네가?”

업신여기는 그 눈이 에비가일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에비가일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끈기와 오기와 인내로, 에비가일은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미친 듯이 책을 읽었다. 그 억지스러운 집중력에는 그의 그 업신여기는 표정도 물론 한몫했지만, 사실 이젠 다 필요 없고 그저 자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맨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서 환희와 희열에 찬손길로 양장 커버를 탁 소리 나게 덮고 에비가일이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앞에 앉아 있던 그가 미세하게 비껴 있던 고개를 틀어 시선을 마주쳐 왔다.

새까맣게 상념으로 가득 차 있던 눈동자가 단 한 번의 깜빡임으로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다. 그 냉랭한 갈무리를 목격한 에비가일은 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책을 들어 보이며 모른 척 활짝 웃었다.

어느덧 밤이 깊어 시간은 새벽 2시를 조금 지나 있었다. 취침 5시간이 자신의 마지노선이었던 에비가일은 평생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하루에 일을 서너 가지씩 해도 최소 5시간은 반드시 꼭 잤다.

지금 저 남자가 5초 만에 이 방을 나가고 자신이 바로 침대로 뛰어들어도 5시간에는 조금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얼추 비슷하게 맞으니까 아직은 괜찮았다.

“공, 나 이제 자도 되죠?”

“비커든 공국에서 투기 열풍의 시발점이 된 사건은?”

“…….”

“대답 못 하는군. 다시 읽어라.”

“…….”

에비가일이 예상 못 한 질문에 덧없이 무너져 내렸다. 뻣뻣하게 고개를 내린 에비가일은, 무기력하게 책을 다시 폈다.

그렇게 3시 반.

그래도 한 번 읽었던 책이라 이번에는 빠르게 읽었다. 서둘러 책을 덮고 테이블에 올린 에비가일은 재촉하듯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빨리 나한테 질문해 봐요.”

“비커든 공국에서 투기 열풍의 시발점이 된 사건은?”

라키엘은 친절하게도 질문을 바꾸지 않고 물어 왔다. 제가 그 부분을 얼마나 이를 갈며 유심히 봤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파란색 튤립! 파란색 돌연변이 튤립이 등장하는 바람에 너도나도 희귀종 재배해 보겠다고 그 사달이 났죠.”

“결과는?”

“대폭락. 귀족부터 평민까지 사람들이 죄다 덤벼드는 바람에 공국이 절반은 망했죠. 그 결과 펠로베르에 자연히 흡수됐고요.”

“최초의 은행은?”

“고대 로딘의 환전상!”

“고대 환전상을 최초의 은행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

“막혔군. 다시 읽어라.”

이럴 수는 없었다. 제게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런 건 책에 없었어요!”

“고대의 환전상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나?”

“그거야 나와 있죠.”

“그걸 보고 네 스스로 유추해 판단해야지. 지금과 비교했을 때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지, 그들의 역할이 과연 지금과 비교했을 때 은행이라 할 수 있는지.”

“…….”

“책이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지만 말고 네 머리로 다시 생각을 해. 다시 읽어.”

에비가일은 망연한 눈으로 테이블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다.

신이시여, 저 지금 졸려 죽을 것 같아요.

“누나, 맛있는 거 사왔어?”

“에비가일, 나 배고파!”

“누나, 누나! 나도!”

“밀리, 언니라고 불러야지?”

“밥 안 주면 언니 아니야!”

순간 자기도 모르게 밀리에나의 뒤통수를 후려칠 뻔한 에비가일이 제 손을 겨우 자제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폭력으로 해결해선 안 된다. 그래, 참자. 에비가일은 사방에서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흔드는 지긋지긋한 꼬맹이들의 손들이나마 떼어 보려 했으나 그것마저 잘 안 됐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죽겠다.

이러지 않아도 이미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제발 봐줬으면 좋겠다. 그녀는 열여섯 시간을 일했다.

“저녁 안 먹었니?”

“먹었어!”

“근데 맛없었어!”

“맛있는 거!”

그 맛없는 음식이 제가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란 것도 모르고. 쫑알거리는 꼴에 다시 욱했지만, 그러다가도 이내 눈에 들어오는 동생들의 허름한 모습에 에비가일은 결국 화를 내지 못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저들 나이 때 자신은 뭘 하고 있었더라. 그녀는 예쁜 드레스를 차려입고, 고상하게 제 방에 앉아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고,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배우고, 부모의 손을 잡고 꽃이 만개한 정원에서 뛰어놀았다.

부모는 그녀를 그 꽃들처럼 곱게 키웠다. 반면 아버지의 기억도 제대로 없이 부모님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글자나 겨우 깨치고, 허름한 행색으로 하루 종일 뒷골목 여관에 갇혀 마음껏 밖에서 뛰어놀지도 못하는 그녀의 동생들.

일가가 귀족이라고는 하나 남매 중 그나마 귀족답게 살아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다. 그 무거운 죄책감과 연민, 연장자의 책임감, 그리고 다시 이 아이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던 기회를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안함.

기실 자신이 미안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벌써 제법 머리가 큰 여동생이 그것을 알고 결혼이 뭐가 대수냐며 원망한 적 있지만, 에비가일은 여전히 그때의 결정이 잘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미안했다.

그녀의 유모는 그것이 비정상적이고, 지나친 생각이라고 했었다. 또다시 드는 답도 없는 막막한 생각에 숨이 콱 막힌다. 철모르는 동생들이 미워 보이다 가도, 이렇게 한 번씩 숨이 막힐 때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제자리걸음이란 말은 정말이지 사치스러운 말이다. 걸어서 제 자리라도 지킬 수 있으면 다행이지. 땅 위에 서 있을 수라도 있다면 감사하지. 물에 빠져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는데도, 그럴수록 점점 침잠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루하루 발목에 무거운 추가 달린 채, 아무리 팔다리를 휘저어도 끝도 없는 저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절망적인.

사실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언젠가 가라앉고 말 것을 안다.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기는 자그마한 손들이 비정상적으로 더 억세졌다.

점점 더 아래로 처박힌다. 이러다 언젠가는 바닥에……. 하지만 내가 누구 때문에……. 너희를 위해서……. 내가 죽으면……. 생각이 툭툭 끊어져 내린다. 그러다 문득 그 기묘한 이질감을 깨닫는다.

바닥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게 대체…….

“에비가일, 나 배고파.”

귓전에서 울리는 천진한 목소리와 함께 뒤에서 잡아당기는 느낌이 섬뜩했다. 드레스 아래쪽이 아닌, 허리에 달린 리본이 끌어당겨져 스르르 힘없이 풀어져 내린다. 그 가벼움이 지독히도 서늘했다. 에비가일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거짓말처럼 매달려 있던 동생들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리고…….

“에비가일, 에비가일…….”

피투성이 비올레타가 천진난만하게 웃고 서 있었다.

뚝, 뚝뚝, 뚝.

정확하지 않은 리듬으로 무언가가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비가일의 고개가 고꾸라지듯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발밑이 시뻘겋다. 모두 피였다. 에비가일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비올레타는 웃고 있지 않았다.

“전하…….”

“에비가일…… 나 죽는 거야?”

“아, 아…….”

“……나만?”

단 두 음절의 희미한 물음에 숨통이 콱 틀어 막히며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그 순수한 시선에 목이 졸린 것 마냥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차라리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 게 아까처럼 계속 동생들이라면……. 일순 생각이 멈춘 에비가일이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기억났다.

“에비가일, 나 아파…….”

입궁으로 가족들과 헤어지기 직전에, 사실 저는 그토록 사랑했던 동생들을 사랑하지 않게 됐었다. 꼴 보기 싫고, 지겹고, 질렸고, 징그러웠다.

진심으로 지독하게 그랬다. 그녀는 너무 지쳤었다. 한계는 넘어선 지 오래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돌아와 그 지독하게 순수한 이기심들을 맞닥뜨리면 자신도 모르는 새 혐오감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 지독해서 숨이 막혔다.

매달린 손들에 구역질이 났다.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동생들이 아니라 그런 자신을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언젠가 자신이 가족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녀는 어머니를 위해 제 평생을 바친다며 어머니의 가슴에 못까지 박고서, 황궁에 제 평생을 팔았다. 그 대가로 어머니를 치료하고, 동생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었고, 그녀는 그 집에서 해방되었다.

에비가일은 그렇게 편해졌다.

차라리 어머니가 그대로 죽기를 원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죽더라도 그저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어 주길 바란 걸 알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딸의 인생이 없어지는 걸 죽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모른 체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효녀인 양 굴며 모른 체했다.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그래, 나는 도망쳤다. 내 가족이 있는 집에서.

징그러운 위선자.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지.

그러고도 가증스럽게, 그들을 위해 당당하게 살아온 척한 것이다. 제 가족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 것처럼, 저 혼자 모든 걸 오롯이 다 버린 것처럼. 그토록 사랑했으면서. 눈앞에 보일 땐 증오하고 미워하다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눈앞에서 저를 귀찮게 괴롭히지 않으니 다시 사랑하게 된 거다.

‘내 가족’이라며 다시 사랑하게 되니 그제야 다시 보고 싶어진 거다. 다시 보지 못하는 게 고통스러워진 거다.

제 어머니, 제 언니 같은 유모, 제 동생들. 제 사랑하는 동생들……. 너는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그러나 보고 싶었다. 정말로, 보고 싶었다. 너무나 간절해서 이율배반적인 바람을, 그 가시 덩어리를 에비가일이 겨우 삼켰다.

“너무 아파…… 에비가일…….”

흘러내리는 눈물 아래로 기묘하게 굳은 에비가일의 얼굴이, 멍한 표정의 비올레타를 응시했다. 황녀도 그녀를 응시했다.

두 여자가 망연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벌 받는 것이다.

도망쳐서, 결국 이렇게 됐다. 다신 어머니도, 동생들도 못 보고 이 끔찍한 방에서, 정신 나간 황녀와 함께 갇혀서 영원히……. 나도 곧 죽을 거야. 암살자가 다시 올 거야. 나도 죽일 거야. 다시는 이 방을 나갈 수 없으리라.

미친 사람처럼 생각이 정처 없이 부유했다. 바닥이 기울었다.

발밑이 힘없이 허물어져 내린다.

“에비가일은 안 죽어?”

“모르겠어요…….”

“나만 죽어?”

“모르겠어요…….”

“……지금 넌 나야?”

“…….”

“내가 죽으면, 네가 나인 척할 거야?”

예리한 칼처럼 날아와 박히는 말과 함께 공간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그 말에 찔린 가슴이 불에 탄 듯 뜨거웠다. 무너져 내리는 잔해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한 채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자신이 아득한 아래로 추락해 그녀의 앞에서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그렇게 떨어지다, 무언가에 어깨가 탁 잡히는 순간.

에비가일은 별안간 벌건 눈으로 겨우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를 잡아 몇 번 흔드는 라키엘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라키엘의 표정이 이상했다.

꿈이었다.

에비가일은 잘게 떨리는 손바닥으로 식은땀이 맺힌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치 온몸이 묶인 듯한 막막한 비현실감을, 그녀는 가까스로 떨쳐 냈다. 가슴이 아직도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일곱 시예요?”

겨우 작게 나온 목소리는 쇠를 긁는 듯 거칠었다. 그 목소리에 라키엘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몇 초간 그녀를 살펴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겨우 두 시간을 잤다. 얕은 잠이나 겨우 잘 시간인데 마치 열 시간은 진탕에 빠져 있다 나온 것처럼 온몸이 축 늘어졌다.

“잘 깨웠네요. 너무 늦게 자서 못 일어날 줄 알았는데.”

에비가일이 몸을 일으켜 앉자 눈에 무겁게 달려 있던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지만, 에비가일은 그것조차 모르고 담담했다. 라키엘이 이불에 뚝 떨어진 눈물 자국을 보며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가 오늘 새벽에 황궁관리국으로 생존 확인 요청을 해 왔다.”

어머니 귀에 생각보다 빨리 들어간 모양이다. 에비가일이 한숨같이 말을 툭 내뱉었다.

“바로 부고를 보내 주세요.”

“곧바로?”

“네.”

“최대한 늦추고 싶어 하지 않았나?”

“언제까지고 숨길 수도 없고, 이미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통보가 오래 걸리면 어머니가 기다리다 더 지치실 거예요.”

유령 같은 얼굴을 하고는 잠긴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에 라키엘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불과 두 시간 전에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책을 집어 던지던―결국 그리되었다.

― 여자가 맞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저에게 대들던 것이 불과 두 시간 전이었다. 사람이 두 시간 만에 이렇게 돌변할 수는 없었다.

단념인가, 체념인가. 라키엘이 그저 가늠하듯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충혈된 눈을 제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단지 잠을 제대로 못 자서라고 하기엔, 혹은 안 좋은 꿈을 꿔서 그렇다고 하기엔 어딘가 깊숙이 뒤틀린 위화감이었다. 물론 가족에게 제 부고를 보내는 게 유쾌할 리는 없었다.

부고와 함께 가족들에게 있어 이제 저는 영원히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어지므로. 그러나 그것과도 달랐다.

“어머니께 사제를 보내 주실 필요는 없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신을 믿지 않거든요. 공저의 주치의로도 충분히 과분해요. 그리고 봉토가 주어진다면 질테르 지방이 좋겠어요. 그 정도는 공께서 해 주실 수 있겠죠.”

질테르. 수도에서 가장 먼 지역이었고, 서남쪽에 위치한 변경지역이었지만 동맹국인 캐롤링과 붙어 있어 국경치고는 퍽 안전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다할 것 같던 여자였으니 그들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수도에서 최대한 멀리 보내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여자는 그들을, 마치 수도의 위험보다는……. 그녀 자신에게서 최대한 멀리 떼어 내 버리고 싶은 것 같아 보였다.

라키엘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해되지 않았다.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제발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일고의 가치도 없이 잘라 버릴 생각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했다.

라키엘이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아랑곳 않고, 에비가일은 어느새 평상시처럼 돌아온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음, 그리고 또……. 아, 잠을 못 잤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네요. 남동생 셋이랑 여동생 하나가 있는데요. 중간에 둘은 쌍둥이예요. 아, 이건 상관없지.

어쨌든 남동생들은 공부를 싫어하긴 하는데, 그래도 영 멍청하진 않아요. 애들을 반드시 아카데미까지 보내 주실 필요는 없고, 그냥 공부하는 거 봐서 괜찮다 싶은 애만 지펜으로 보내 주세요. 아버지가 거기서 공부하셨어요.”

“그래. 그러지.”

“여동생은…… 예절 학교에 좀 처박아 둘 필요가 있어요. 아, 그리고 피아노를 갖고 싶어 했는데, 봉토가 하사되면 피아노 하나만 비싼 걸로 좀 사 주세요. 피아노 갖고 싶다고 이 년을 졸랐거든요.”

“네 여동생은 이제 갖고 싶은 건 모두 살 수 있다. 네가 굳이 나에게 그렇게 더 부탁하지 않아도 돼.”

“하긴,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아, 그리고 유모요. 나한테 정말 친언니 같은 사람인데, 우리 쫓아 수도에 오느라 아직 결혼을 못 했어요. 벌써 스물다섯인데……. 좋은 혼처 좀 구해 줘요. 이건 정말 부탁할게요. 재산도 따로 좀 챙겨 주고요.”

“…….”

“에비가일 딜로아의 유언은 이게 다예요. 그녀는 당신을 믿고 죽었어요. 알죠?”

단념도, 체념도 아닌 유언이었나. 에비가일은 멀쩡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하고는, 그것이 제가 아닌 양 간접적인 확인까지 받아 냈다. 라키엘이 그 환하게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짧고 명료한 대답에 에비가일이 마음에 드는 듯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을 마주하며 라키엘은 문득 지금 그녀의 미소가 어제와 다르다는 깨달았다.

오늘로 그놈의 공부를 시작한 지 나흘째였다.

이틀째엔 겨우 2시간을 잤었지만 하루를 스스로 심각하게 시작했던 터라 에비가일은 그 심각한 삶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텨냈었다. 물론 당시엔 겨우 하루 못 잤을 뿐이라 견딜 만했던 것도 있다. 하지만 어제에 이어오늘은 너무 졸려서 미칠 것 같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이 안 됐다.

잠을 토할 것 같았다. 마치 마차 위에서 멀미를 할 때처럼 잠이 속 언저리에서 울렁거렸다.

긴장감이고 나발이고, 도저히 분위기 잡을 때가 아니었다. 에비가일은 서서히 생존의 위기를 느꼈다.

내리 2시간, 3시간, 3시간 반을 잤더니 아침 먹다가 꾸벅꾸벅 졸고, 길데 부인―저를 아그네스라 편하게 부르라 했지만 하나도 안 편했다.―에게 찻잔 쥐는 법을 배우다 에비가일은 찻잔을 든 채로 고상하게 앉아 잠시 기절하기까지 했다.

그 무자비한 공작이 그런 그녀를 보고는 제 공용어 수업 시간을 빼 버리고 그냥 점심 먹을 때까지 잠이나 자라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자도 된다는 말에 각성상태가 와서, 에비가일은 결국 누워서 눈만 내내 깜빡였다. 다시 생각해도 속이 끓어올랐다.

그때만큼은 자신을 계속 못 자게 한 공작보다도 자지 못하는 자신이 훨씬 미웠다.

그러더니 점심때가 되자 더 졸렸고, 역사 시간엔 정말 이러다 죽을 것 같았다. 2시간이나 수업했는데 1시간은 아예 기억에 없었다.

그나마 13년 전쟁 얘기는 조금 집중해서 들었는데, 다 부수고 박살 내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때 제 심정이 바로 그랬으니까. 그리고 역사 수업 후에는 피아노를 치다가 졸고, 안 되겠다 싶어서 바이올린을 잡자 선 채로 잠이 들었다.

고작 십여 분이었지만, 스스로 고문하는 느낌에 몸서리가 쳐졌다.

도저히 안 되겠다. 에비가일은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피아노는 손이 빨리 풀리고 있었으니, 지금은 차라리 밤에 읽을 책을 미리 읽어 두는 것이다. 그렇게 타협점을 찾은 에비가일은 역시 똑똑하다며 스스로를 치하하듯 칭찬했다. 대체 뭐가 똑똑하다는 건지도 모를 막연한 칭찬이었다.

에비가일은 메이드를 불렀다. 그리고 커피 다섯 잔 분량의 원두에 한 잔 분량의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그것을 가차 없이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더없이 잔인한 처사였다.

에비가일은 전형적인 ‘매는 먼저 맞고 맛없는 음식은 먼저 먹는’ 타입이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오늘 고른 책은 『동서대륙의 지방별 주요 특산품 및 지리』라는 책이었다.

며칠간 누적된 피로에 벌게진 눈을 하고서 책에 고개를 처박은 모습은, 누가 봐도 그러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어떠냐고 권유할 만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에비가일은 그럴 수 없었다. 어제도, 어제의 어제도, 어제의 어제의 어제도 그 무자비한 남자의 업신여기는 표정 아래 새벽까지 강제로 정신을 붙잡은 채 두 번이나 책을 더 읽었다.

계속 그렇게 살 순 없다. 더 이상 업신여김당하지 않고, 못 자지 않고, 더 읽지 않을 것이다.

에비가일의 눈이 독하게 빛났다.

8시까지 다 끝내고 만다.

자신만만하게 책을 탕 내려놓는 에비가일에 한 번, 놓인 책에 한 번 시선을 준 라키엘은 그대로 제 손에 들린 서류로 다시 눈을 내렸다. 그 무관심한 얼굴을 지그시 노려보던 에비가일이 오전에 배웠던 대로 우아하게 드레스를 잡고 맞은편에 앉았다. 바른 자세로 꼿꼿하게 허리도 세웠다.

“공.”

부르는 소리에 고작 보이는 반응이라곤 눈썹 한 번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그의 무성의한 반응에 어느새 익숙해진 에비가일은 전혀 연연하지 않았다. 그녀는 산뜻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질문해 봐요.”

“뭘?”

“나 이 책 다 읽었어요.”

오자마자 한다는 말이 다른 날과는 아예 동떨어져 있었다. 라키엘은 그것을 헛소리라 간주하고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고개도 들지 않고 제 할 일만 계속했다. 에비가일은 말을 다시 골랐다.

“오늘 피아노랑 바이올린 안 했어요. 그 시간에 봤어요.”

그제야 고개를 든다. 제가 정해 준 대로 하지 않았다고? 그러나 에비가일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남자에게는 그다지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따르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 보였다. 제 눈을 보면 모를까. 에비가일은 퀭한 얼굴로 이 와중에도 감기려는 눈을 애써 깜빡였다.

“피아노는 생각보다 손이 빨리 풀렸어요. 굳이 의무적으로 매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바이올린은 아무리 봐도 지금 당장 병행하기엔 시간 낭비예요. 왜냐면…….”

“그래, 알아서 해.”

에비가일이 나름 논리적으로 준비한 이유를 채 다 개시하기도 전에, 라키엘이 싹둑 자르며 긍정했다. 기분 나쁘기보다는 그 시원한 긍정이 의아했다. 라키엘은 에비가일의 제안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그 시간으로 독서 시간을 앞당김으로써 적절하게 숙면하고 다른 일의 효율을 높인다는 데 동의한다.”

“……하?”

“처음부터 그 정도로 시켰으면 그것도 못했겠지.”

“…….”

“육십밖에 못하는 이에게 백을 시키면 나중에 팔십은 해내. 그리고 너 같은 애들은 목표를 크게 세우면 반은 하지.”

그제야 그 비현실적인 교육 과정이 이해가 됐다. ‘이거 하나만 빼면 다른 것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그녀가 스스로 말하길 기다린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처음부터 정해진 정도가 있는데 저를 일부러 그렇게 굴렸단 말인가? 알 수 없는 배신감에 휩싸인 에비가일에게 라키엘이 기습하듯 질문했다.

“서부 안텔 지방의 특산품 네 가지.”

“직물, 와인, 소, 밀…….”

“동대륙의 마제르에서 수입되는 주요 물품.”

“비단, 향료, 후추…….”

“로드리고의 영지는?”

“와인, 금, 은…….”

배신감에 휩싸인 와중에도 고작 며칠 만에 길들여지기라도 한 양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에비가일을, 라키엘은 제법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 인정하는 눈길에 되레 힘이 쭉 빠진 에비가일은 뒤이은 몇 개의 질문에도 힘없이 완벽하게 대답한 뒤, 터덜터덜 침대로 걸어가 풀썩 누워 기절했다.

“……이 사건은 펠로베르의 왕조사상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혹시 이 시기에 우리 그란토니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몰가와 지노비아 영지간의 전쟁?”

“훌륭하십니다. 그리고…….”

“아, 테로사 황후의 암살 사건도요.”

“첫 주엔 병든 병아리처럼 정신도 못 차리셨으면서 어떻게 기억하셨습니까? 전하께선 정말이지 훌륭하십니다! 이해하시는 속도도 빠르시지만, 기억력은 순간 암기가 워낙 뛰어나시기에 장기적인 것은 기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태 시기까지 세세하게 기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르치는 제가 다 놀랄 지경입니다.”

뭐 이 정도야. 사실은 그녀가 잊어버린 많은 것과 기억하는 적은 것 중 운 좋게 후자가 걸린 것에 불과했지만, 카일의 쏟아지는 민망한 찬사에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에비가일이 뻔뻔하게 웃었다. 심부름 대행 길드에서 괜히 아카데미 대리 시험으로 이름 날렸던 게 아니었다. 저 엘리트조차 자신을 인정한다.

이제 3주쯤 되었던가? 뻔뻔한 자들 사이에서 하루 종일 뻔뻔하게 살다 보니, 뻔뻔함만 더해 갔다.

“좋아요. 좀 더 칭찬해 봐요.”

“물론 이것은 가르치는 제가 워낙에 뛰어나다 보니…….”

“아니, 내 칭찬 잘하다 왜 경이 잘난 것으로 넘어가요?”

“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한 역사 하지 않습니까? 아카데미에서 제일 전공이 역사였습니다.”

“경 전공이랑 내가 열심히 한 게 무슨 상관이야? 머리털 빠지게 공부한 건 난데, 왜 경이 스스로 공치사를 해요?”

“그 머리털 빠지게 한 게 바로 접니다!”

“어디 감히 황녀의 머리털을! 경은 내가 만만하지! 만만하니 이러지!”

“다소 그런 것은 사실입니다!”

“뭐!”

루데릭이 문가에서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카일과 에비가일은 품위 없이 별 가치도 없는 갑을논박을 해댔다. 친해졌다는 반증이라고 하기엔 둘 다 본래부터 가끔 저렇게 비생산적으로 행동했다.

루데릭은 제 형을 보며 혀를 찼다. 황녀를 만난 뒤 옛 아카데미 시절에 향수라도 느낀 모양인지 정신연령이 급격히 퇴화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유치한 언사는 갑작스러운 라키엘의 등장으로 곧 막을 내렸다.

“내가 언제 황녀를 데리고 노닥거리라고 네 직무 시간을 쪼개어줬던가?”

라키엘은 카일을 싸늘한 말 한마디로 앉은 자리에서 쫓아내고 바로 그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평소와 같이 우아했지만 어딘가 성마르고 신경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에비가일이 라키엘의 눈치를 살살 살피다 이내 침묵이 답답해져 결국 먼저 물었다.

“왜 그래요? 갑자기 와서는.”

잔뜩 날이 선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표적이 자신이 아니란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이 정도의 눈을 할 일이란 게…….

“황제의 칙서가 왔다.”

“……네?”

“황제가 널 예정보다 빨리 찾는다.”

단 두 마디에, 방 안이 얼어붙었다.

“칙서를 거두시지요.”

“황실의 전령보다 에델가르드의 시종 발이 더 빠른 모양이군. 어찌 전령이 돌아온 것과 황후가 집무실에 닥치는 것에 차이가 없나.”

제 앞의 파사칼리아는 보지도 않고 루드비히는 곁에 선 시종장에게 싸늘하게 일갈했다.

“마커스에게 그 전령의 발목을 자르라 전하라.”

“예.”

저 황제의 광기 곁에 살아온 것이 벌써 스무 해도 훌쩍 넘는다. 일일이 그 미친 짓들을 시정하라 청하는 것은 다섯 살배기 어린 딸을 빼앗긴 이후로 그만두었다.

이제 곧 저 광기의 셀 수 없는 전례 중 하나가 될 전령의 발에 파사칼리아는 그저 잠시 속으로 유감을 표했다. 어차피 자신은 그 불쌍하고 죄 없는 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황제는 제가 그에 대해 입을 열면 발목 대신 목을 자르겠다고 할 사람이다.

“짐의 칙서에 무슨 문제가 있나?”

“열흘은 너무 이릅니다. 조금 더 에델가르드에 머물게 하세요.”

“굳이 왜 황녀가 궁밖에 더 있어야 하지?”

“그 아이는 안정이 필요합니다.”

“황제의 딸이 어찌 황궁 밖에서 안정을 찾나? 제집은 이곳이 아닌가.”

황제의 딸.

파사칼리아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뚫린 입이라고 어찌.

“황궁 안에서 큰일을 겪었습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궁 밖에 둘 것인가?”

“영원히 밖에 두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체 황후의 귀여운 조카가 뭘 꾸미고 있지? 황녀를 제 품에 가둬놓고 내보이지 않는 저의가 궁금하다.”

“에델가르드 공은 그저 에델가르드의 유일한 계승권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어 합니다.”

“이제 갓 약관을 넘긴 공작이 벌써 제 후계를 걱정해?”

“제 조카는 아비가 급사한 지 불과 두 달도 안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도 그 점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공손하게 자신을 겨냥하는 말에 루드비히가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루드비히는 책상에 기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파사칼리아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도자기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루드비히가 우스운 듯 낮게 웃었다.

“그래, 짐도 이해하지. 에델가르드가 잠시라도 공위空位 상태가 되면, 제국에도 그 피해가 막심하다. 그대의 조카가 가주로서 그 위치에 대해 자각하고 있음은 훌륭하다.”

“그러니…….”

코앞까지 다가온 끔찍한 거리에 파사칼리아가 말을 멈추었다. 그에 아랑곳 않고 한 걸음 더 다가온 루드비히가 파사칼리아의 귓가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 황녀가 더더욱 황궁에 어서 돌아와야지.”

파사칼리아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려 했으나 그보다 루드비히가 더 빨랐다. 그는 그녀의 팔을 낚아채 무자비하게 제 앞으로 끌어왔다.

“황제의 딸에게는 황궁이 제일 안전하다. 그것은 에델가르드의 작위 계승권을 가진 그대의 딸로서도 마찬가지다. 감히 처녀 적 살던 공저가 황제가 사는 궁보다 더 안전하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황후는 더 이상 황녀의 신변을 핑계 삼지 말라.”

사방이 칼인데 제 딸에게 황궁이 제일 안전하다니. 저렇게 우스운 말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황제가 저렇게까지 말하면 표면적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파사칼리아는 고요하게 가라앉힌 눈으로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루드비히가 천천히 그녀의 팔을 놓았다.

“그대의 조카에게도 그렇게 전해. 그대 조카가 보내는 전서도 이제 지겹다.”

“폐하의 말씀이 타당합니다. 따르지요.”

“좋아.”

웃으면서 제 목 언저리를 다정하고 부드럽게 스치는 손길이 서늘했다. 그러나 파사칼리아 역시 웃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 미치광이의 목에 칼을 꽂아 넣으리라.

겨우 10일 뒤라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고 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공저에 아그네스가 들이닥쳤다. 그것도 뒤에 무언가를 줄줄이 달고서.

“시간이 이리도 촉박할지는 몰랐습니다.”

“아그네스, 뒤의 귀부인은?”

“시모어 남작부인입니다. 황후 폐하의 의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급하긴 한 건지 직접 인사하게 하는 것도 생략한 채 아그네스가 중간에서 급하게 소개하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시모어 남작부인은 약식으로 인사했다. 그러고는 이내 라키엘은 물론 호위인 루데릭까지 방에서 남자는 모두 내치고, 에비가일의 드레스를 벗겨 슈미즈만 남겨 두었다. 그러자 남작부인을 따라온 여자 둘이 줄자를 가지고 와 온몸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남작부인은 그것을 수첩에 소상히 받아 적었다.

에비가일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여자들이라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저만 슈미즈 차림으로 있자니 부끄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전하께서는 백칠십 센티미터로 보통 영애들보다 키가 제법 크신 편입니다. 요 몇 년간 펠로베르에서 유행해 들어온 로맨틱 스타일깊게 파인 어깨선과 엄청나게 부풀린 소매와 과장된 머리 장식이 특징이 수도에서 인기긴 하지만, 키가 크거나 작은 영애들이 입고 있으면 모양이 우스꽝스러워 보이지요. 황녀 전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3황녀 전하께서 유행시키신 만큼 전하께서는 그와 전혀 다르셔야 합니다.”

3황녀가 몇 년 전 무도회에 입고 나온 이후로 아직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로맨틱 스타일은, 열광하는 이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우아한 우스꽝스러움에 냉소를 보내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원래 3황녀가 입었던 세련된 펠로베르의 스타일과는 다르게 그란토니아의 유행은 날로 과장되었다.

날이 갈수록 소매는 부풀어 오르고, 머리 장식은 거대해졌다. 에비가일 역시도 그 우스꽝스러움을 비웃은 적이 있어 설마 저에게 어울린다고 해도 격하게 사양하고 싶었다.

시모어 부인의 말대로 제 키에 머리에 무언가 주렁주렁 달고, 커다란 소매를 달고 다닌다면 그것보다 더 우스꽝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아까 입고 계시던 얇은 모슬린 드레스가 유행도 타지 않고 잘 어울리시긴 합니다만, 황녀의 품위와는 맞지 않습니다. 특히 아까 전처럼 외간 남자들에게 보여 주셔서는 안 됩니다. 훗날 부군께만 보여 주셔요. 아시겠지요?”

모슬린으로 만든 드레스는 에비가일의 기억으로는 돈 많은 자본가의 부인이나 딸들이 가끔 입고 다니던 꽤 고급스러운 드레스였다. 변방의 소귀족 출신인데다, 일을 하며 상대하던 계급이 완전히 상류 귀족은 아니었기에 에비가일은 여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나마 이 방에 걸린 드레스 중 부담 없어 보여서 입었을 뿐인데, 이들에게는 남편에게나 보여 줄 은밀한 옷이었다니. 그 계급적 까다로움에 어쩐지 갑갑해져 왔지만, 어머니처럼 타이르는 남작부인의 얼굴에 에비가일이 순순히 끄덕였다.

“체형은 보기보다 풍만하신 편이시군요. 가슴이 적당히 크셔서 보기 좋으십니다. 하지만 허리는 지금보다 일 인치 정도는 줄이셔야겠습니다. 그럼 완벽하실 거예요. 어깨선 하며 골격은 매끈하니 잘 잡혀 있어 옷태가 아주 좋을 것 같네요. 키에 비해서 뼈대는 다행히 가느다란 편이시고…….”

에비가일이 자신도 모르게 바닥으로 쳐지는 고개를 애써 치켜들었다. 슈미즈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서서 제 몸에 대해 조목조목 평가받고―거기다 배에 살이 좀 있는 것까지 들켰다.

― 있자니 얼굴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누군가 제 몸에 대하여 평가하는 것이 생전 처음이어서 더 그랬다.

사람들이 아무리 정중해도 어쩔 수 없이 수치스럽다.

“이제 옷 입으면 안 되나요?”

“아직은 안 됩니다.”

아그네스가 냉정하게 그 말을 자르고는, 뒤의 여자 중 하나에게 손짓했다. 여자가 수십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옷감들을 낑낑대며 들고 왔다.

예쁘다.

에비가일이 그 화려한 옷감들에 정신이 팔린 새 남작부인과 아그네스는 에비가일의 얼굴 아래에 이 색 저 색 대 보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이 남색은 괜찮군요.”

“이런 짙은 계열의 빨간색보다는 선명한 빨간색이 잘 어울리시네요.”

“이 상아색은 이번에 동대륙에서 들어온 비단인데, 금사가 화려해서 빛이 나는 것 같죠? 이 색이 제일 잘 어울리시네요.”

“이 색은 아니에요.”

그 수십 개를 일일이 다 대어 보고 난 뒤에야 두 사람이 에비가일에게서 떨어졌다. 아그네스가 남작부인의 수첩에 합격으로 분류된 색들을 대신 적고 있는 사이 남작부인은 고급스러운 화첩을 몇 권이나 꺼내서 에비가일의 앞에 펼쳤다.

소리 없이 감탄한 에비가일이 언제 부끄러워했느냐는 양 슈미즈 차림으로 의자에 풀썩 주저앉고서는 화첩을 한 장씩 넘겼다.

“와, 이 스케치들이 모두 부인의 작품인가요?”

“예. 부끄럽지만 펠로베르뿐 아니라 이렌시아, 제네트 8국의 유행까지 연구하고 또 제 나름대로 디자인한 드레스들이랍니다. 괜찮으신가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에요! 음……, 제 체형에는 여기 이거랑, 또 이거. 이런 라인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맞나요?”

“안목이 좋으시네요. 저 역시 황녀 전하를 보자마자 이것을 제일 먼저 염두에 두었답니다. 마침 미리 들고 온 것 중에 이 드레스가 있습니다. 지금 입어 보시겠어요?”

신 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에비가일을 사랑스럽게 바라본 시모어 부인이 뒤로 손짓했다. 연한 연두색 고급 공단으로 된 드레스는 화려하지만 요즘 유행과는 달리 딱 붙는 짤막한 소매와 아찔하게 파인 어깨선에, 페티코트를 몇 겹이나 안에 넣어 풍성하지만 결코 과하지 않은 라인이 아름다웠다.

모슬린 드레스를 입을 땐 필요 없었던 코르셋을 갑자기 착용하는 바람에 숨쉬기가 갑갑했지만 그 불편함마저 잊을 만큼. 다 입고서 전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서도, 에비가일은 제가 이런 옷을 입은 것이 실감이 안 나 얼마간 멍하니 서 있었다. 이렇게 좋은 옷을 입은 것은 어릴 적 이후 처음이었다.

아침에 메이드가 대강 땋아 준 머리에도 마치 동화책 속 공주가 된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설레었다.

“역시 어울리실 줄 알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어머나,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주변에서 민망한 찬사가 연이어 터져 나오자 에비가일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어 어색하게 웃으며 거울 앞에서 뒤돌았다. 시모어 부인이 어느새 다른 드레스를 들고 서 있었다.

“이 옷은 검소한 에른스트 왕국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인데, 우리 그란토니아에서는 바깥일을 하는 여성들이 가끔 입고 있습니다. 상의가 블라우스라 비교적 활동이 편안합니다.

보통 단정한 인상을 주려 에른스트처럼 어둡고 차분한 색의 치마를 입지만 저는 빨간 색으로 좀 더 산뜻하고 화려하게 만들었답니다. 여기 드레스 폭도 이렇게 조금 더 넓고, 주름도 화려하게 잡았죠. 마치 학자처럼 지적이면서도 도도하고, 강인하면서도 여성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화려해요. 쏜튼 경께서 전해 주신 전하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실 것 같고, 또 평상복으로 편안하게 입으시기에 좋으실 듯하여, 전하만 좋으시다면 이것에 조금 변형을 가해 다양한 색으로 만들어 올리려고 합니다.”

듣는 저까지 숨이 차는 느낌에 에비가일은 그녀가 말을 끝맺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해 주세요.”

길드의 중역 여성들이나 상단을 운영하는 귀부인이 엇비슷한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것을 에비가일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눈앞의 것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긴 했다.

그 모양새가 신기한 나머지 이런 드레스는 처음 본다는 말이 저도 모르게 나올 뻔했다가 간발의 차로 들어갔다. 황녀는 당연히 평생을 갇혀 살았고, 처음 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드물었다.

그 뒤로도 에비가일이 열 벌도 넘게 입어보고 나서야, 아그네스와 시모어 부인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몇 개의 대략적인 스타일을 정했다. 이것보다는 조금 덜 여성스럽게, 이것보다는 더 도도하게, 이것보다는 좀 더 화사하게, 이것보다는 조금 더 지적이고 고상하게…….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나자 아그네스는 급하게 황궁으로 돌아갔고, 시모어 부인은 잠시 남아 에비가일이 처음에 입었던 연두색 공단 드레스를 직접 다시 입혀 주었다.

“이 드레스가 제일 마음에 드셨죠?”

에비가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전하께 드리는 제 선물입니다. 황후 폐하께 청구하지 않을 거랍니다.”

“고마워요!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동안 누리지 못하신 만큼 앞으로는 더 많이 누리실 것입니다. 비올레타 전하.”

그 다정한 축복에 에비가일의 숨이 순간 멈췄지만, 시모어 부인은 눈치채지 못한 채 찡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몇 번 더 손을 대 드레스 매무시를 가다듬어 주고, 예를 취하고 방을 나갔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에비가일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

방 한가운데 망연히 서 있던 그녀가 천천히 거울로 다가가 마주 섰다. 거울 속에 모르는 여자가 서 있다.

호의로, 친근함의 표시로 불린 이름.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처음 불려 보는 그 이름. 그저 전하라 귀하게 불리는 것과는 달랐다. 그저 사람들이 황녀라 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불이라도 삼킨 듯 뜨거웠다.

비올레타는 죽었다. 제 눈으로 봤다. 제 눈앞에서 죽었다.

에비가일도 죽었다. 불타 죽어 시신 없는 장례가 끝났고, 황족을 구한 공신의 유가족들은 질테르의 봉토를 하사받고 수도를 떠났다. 그게 벌써 2주가 다 되어 간다.

그럼 거울 속 저 여자는 누구인가. 비올레타도 죽었고, 에비가일도 죽었는데……. 넌 도대체 누구이관데, 아직 살아서 비올레타가 평생 누려 보지 못한 것을 입고, 여기 서 있나. 막막한 울음이 북받친다. 뿌연 시야로 거울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염치가 없어 차마 흘리지는 못했다.

비올레타가 죽고, 비올레타의 것을 에비가일이 누린다. 그리고 그 에비가일이 죽어, 비올레타가 살아 있다.

그렇다면 저 일그러진 거울 속 살아남은 여자는 대체 누구인가.

에비가일은 눈을 좀 더 크게 떴다. 물기로 가려져있던 시야가 조금 맑아졌다. 여전히 여자는 낯설었다.

“이제야 좀 황녀 같군.”

얼마간 멍하니 거울 앞에 서 있던 에비가일이 굳어 있던 표정을 느슨하게 풀며 반 정도 뒤돌았다. 어느새 방에 들어선 라키엘이 눈을 내리깔고 그녀가 입은 드레스 구석구석을 뜯어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시모어 남작부인이 갖고 온 드레스인가?”

“네. 예쁘죠?”

“좋나?”

좋으냐는 말을 어쩜 이렇게 기분 나쁘게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젠 적응이 된 건지 에비가일은 그저 새침한 얼굴로 대꾸했다.

“드레스 싫어하는 여자 봤어요?”

“멀쩡한 것들 두고 하얀 천 쪼가리만 줄곧 입어 대기에 그런 줄 알았지. 괜찮군. 멍청한 3황녀가 유행시킨 멍청하게 커다란 소매라도 달고 있었으면 죄다 환불시키려 했는데.”

4개 국어까지 하는 3황녀가 멍청할 리 없다. 하지만 요즘 과하게 유행하는 소매가 다소 멍청해 보인다는 것엔 에비가일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도 굳이 둘 다 비하시키는 라키엘이 어쩐지 우스워 에비가일이 짧게 웃었다.

“남작부인에게 값을 더 쳐 줘야겠어.”

“부인은 선물이라고 하던데요.”

“그 여자가 웬일로?”

친절하고 다정한 여자였는데. 에비가일은 선물이라는 말에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는 라키엘이 잠시 이해되지 않아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한마디 툭 내뱉었다.

“……동정이겠죠.”

평생 이런 드레스 한 번 못 입어 봤을 그 불쌍한 황녀에 대한 동정. 거울 쪽으로 다시 곁눈질하니 아까 그 여자의 옆모습이 보였다. 거울을 얼마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에비가일은 이내 거울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는지, 노을빛이 아스라이 쏟아져 내리는 새하얀 방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노을이 드리운 방 안의 물건들 위로 무의미한 시선이 떠돌았다. 에비가일은 제가 이 방에 처음 온 날처럼 방을 차례로 둘러보고, 느릿하게 발을 옮겨 배회하며 조금 쓰게 웃었다.

시간이, 점점 더 빨리 흐르고 있다.

“내일부턴 길데 부인이 반나절은 족히 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요.”

“당연히 그래야지.”

“공부는, 아! 책은 어떡해요? 이제 고작 스무 권 남짓 읽었는걸.”

에비가일이 전혀 아쉽지 않은 어투로 아쉽다는 듯이 말하자 라키엘이 걱정 말라는 듯 씩 웃으며 친절하게 대꾸했다.

“괜찮다. 남은 날 동안 스무 권은 더 읽을 거니까.”

“…….”

“그리고 그 뒤로도 쭉, 계속 읽을 거니까.”

그럼 그렇지. 그런 것에 관해서는 이미 예전에 해탈한 에비가일이 허허롭게 웃어넘기며 물었다.

“그럼 다른 건……?”

“천재 소리 듣긴 이미 글렀어. 역사도 아직, 공용어마저도 아직.”

그가 정색하고 아쉬워하는 게 우스워 에비가일이 소리 내어 웃다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말을 골랐다. 어떤 책을 읽었었고, 무슨 말이 있었더라? 공용어로는 어떻게 말하더라? 에비가일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소리 내어 말했다.

“전쟁의 최초 동기로서, 정치 목적은 군사력의 목적과 투입될 군사적 노력의 양을 결정하기 위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공용어로 바뀌어 읊어진 『전쟁론』 중 한 구절에 라키엘의 눈이 조금 놀란 듯 커졌다.

생각보다 매끄럽게 튀어나온 말에 저도 놀라 잠깐 멍하니 서 있었던 에비가일이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뿌듯하게 말했다.

“이만하면, 공용어는 제법 괜찮지 않아요?”

그 뿌듯해 하는 얼굴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라키엘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양 이내 돌아왔다. 그리고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어젠 동화책도 제대로 못 읽더니.”

동화책? 사전처럼 두껍고 온갖 고어까지 출몰하는 그 『제네트 고대 신화(공용어판)』을 지금 고작 동화책이라 한 건가? 순간 울컥한 에비가일이 이를 악물고 웃으며 덧붙였다.

“배운 지 오래되어서 글 읽는 건 비록 좀 까먹었었지만, 이래 봬도 일하면서 말은 계속 써 왔거든요. 쏜튼 경더러 내 뒷조사 시켰으니, 내가 심부름 대행 길드에서 잘 나간 것 알죠? 내가 심부름 대행 길드에서 괜히 잘나갔겠어요?”

라키엘은 에비가일의 자기주장을 항상 그래 왔듯 들은 체도 않고 되물었다.

“전쟁론인가?”

저놈의 무시. 하지만 넘어가는 게 저에게도 편안했다. 에비가일은 입을 잠시 삐죽대고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 이 구절은 몇 번이나 읽고서야 겨우 좀 이해했죠. 아무리 봐도 그 군인 아저씨는 책을 너무 어렵게 썼다니까요.”

“그렇긴 하지.”

어려운 게 다 얼어 죽었느냐고 비꼴 줄 알았더니, 의외로 쉽게 동의하는 말에 에비가일이 픽 웃었다.

“공에게도 어려운 게 있어요?”

“누구도 모든 방면에 완벽한 전문가일 수는 없거든.”

심드렁하게 대꾸한 라키엘이 천천히 에비가일 쪽으로 다가갔다. 에비가일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공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기세잖아요.”

여섯 걸음. 라키엘이 조금 더 느릿하게 발을 옮기며 대꾸했다.

“그저 할 수 있는 최대한 직접 관할하고 싶은 거지.”

네 걸음.

“공 진짜 남 못 믿는구나…….”

두 걸음.

“그런데 넌 언제까지 공, 공 할 거지?”

“……네?”

다 왔다.

“라키엘.”

없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어느새 제 바로 앞에 와 있는 라키엘에 놀란 에비가일이 숨을 멈췄다. 한술 더 떠 그녀의 허리에 닿은 손이 그녀를 그에게로 당기자 에비가일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라키엘이라고 불러.”

“이, 이게…….”

“네 말대로 우린 하나뿐인 사촌인데…….”

“무슨…….”

“그렇게 딱딱하게 굴면 자연스럽지가 않지. 안 그래?”

에비가일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었다. 나른하게 내리깔린 속눈썹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마치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란 에비가일이 고개를 황급히 내려 그의 가슴에 가까스로 시선을 두었다. 맥박이 급하게 날뛰었다.

어린 나이에 집이 망해 사교계 경험 한 번 없는 에비가일은 이런 적이 아버지 빼고 난생처음이었다. 남자가 저와 틈 하나 없이 이렇게 붙어 서서, 그것도, 이 사람이…….

“제발 널 더 데리고 있게 해 달라 황제에게 전서만 스무 번을 넘게 보냈다. 이렇게 유대 없어 보여선 곤란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공, 이 손, 좀.”

“라키엘.”

“……라키엘.”

순순히 허리 옆쪽에서 손이 떨어져 나가는가 싶더니 아예 등허리 뒤로 둘러지는 단단한 손에 에비가일의 몸이 경기라도 일으킨 듯 파르르 떨렸다. 잔뜩 경직된 채로 제 품에 갇힌 에비가일을 내려 보던 라키엘의 입매가 오만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름 불렀잖아, 요……!”

“아까 길데 부인이 춤을 부탁하고 가서.”

“그럼 진작 그렇다고 했어야죠! 왜 이상한 식으로 갑자기 사람을 놀라게 하는, 어, 어어……?”

제 입과는 달리 몸이 저도 모르게 라키엘의 움직임에 따라 맥없이 이끌려간다. 에비가일이 살짝 올려다본 그의 얼굴 위에는 어두운 황혼이 내려앉아 있었다.

기분이 어쩐지, 조금 이상했다.

그의 말대로 ‘네가 성장盛裝한 김에 부탁받은 춤 좀 가르치겠다’라는 게 과연 그의 순수한 저의였는지, 혹은 무슨 꿍꿍이가 있었었는지는 몰라도, 에비가일은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에게 수도 없이 짓밟힌 발이 이젠 제법 고통스러우리라는 것.

변방의 소귀족 영애치고는 장녀로서 제법 넘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춤이 아예 처음도 아니었고 그저 오랜만이었던 것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제 발이 그의 발 위를 자꾸만 찾아갔다.

나름 조심하고 있었지만 또다시 그의 발을 밟았다. 꾹 밟아 버린 감각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가 잇새로 나직하게 내뱉었다.

“이걸로 열일곱 번째군.”

사정없이 일그러진 표정에 내심 기분이 통쾌했지만 에비가일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그럴 리가요.”

너 뻔뻔하기도 하다. 이런 눈길로 바라본다. 그래서 에비가일은 억울하다, 라고 눈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 몸이 본능적으로 공격하는 것 같았다.

장하다, 내 몸.

“의도하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지. 네 모든 동작이 멀쩡한데, 그렇다면 발만 고장 났나?”

라키엘이 찌푸린 눈으로 에비가일을 지그시 쏘아보다가 이내 진저리 나는 듯 그녀를 내팽개쳤다. 내팽개쳐진 에비가일이 울컥해서 말했다.

“아니, 여자한테 밟혀 봤자 아프면 얼마나 아프다고 그래요! 기사 서품도 받았다면서!”

“네 구두를 봐라.”

“…….”

“이왕이면 네 발을 네가 한번 밟아 보는 것도 좋겠군.”

고개를 내려 물끄러미 제 발치를 보자, 아까 남작부인이 드레스와 함께 제게 선물한 화려한 구두가 보였다. 굳이 밟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미안하…….”

“됐다.”

“많이 아파요?”

“됐다.”

그렇다니 사양할 필요는 없으리라. 에비가일은 다시 발을 움직였다.

시간이 쉴 새 없이 흘러간다. 에비가일은 어느새 비올레타로 불리는 것이 조금씩 힘들지 않게 되었다.

그사이 매일 반나절을 아그네스와 붙어 있으면서, 에비가일은 이전에 배워온 예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미소 짓는 얼굴, 목을 가누는 것에서부터 어깨의 각도, 손짓, 보폭까지. 아그네스는 시일이 코앞임에도 서두르지 않고 그녀의 몸을 섬세하게 가다듬었다.

여자의 모든 몸짓엔 기품이 실려야 한다. 아그네스는 그렇게 말했다.

에비가일은 알맞은 포크를 우아하게 골라 소리 없이 고기 한 점을 찍고, 작게 벌린 입안으로 쏙 넣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그네스가 웃으며 또 칭찬했다.

“잘하셨습니다.”

거대한 식탁 위에는 성대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지만, 아그네스는 음식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그저 에비가일이 먹는 모습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는 양 굴었다. 그리하여 앉아 있는 것은 셋인데, 손이 움직이는 것은 라키엘과 에비가일뿐이었다.

“아그네스도 먹어요.”

“먹고 있답니다.”

에비가일의 새삼 권하는 말에 아그네스가 그제야 포크를 들며 상냥하게 대꾸했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

칙서가 온 다음 날 그렇게 말했던 아그네스는 그 침착한 태도와 함께 점점 엄격함은 누그러뜨리고, 좀 더 온화해졌다. 물론 에비가일이 이전과 다른 집중력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룬 덕분이기도 했다.

에비가일은 비로소 그녀를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뿌듯한 인정이나 어느덧 애정을 담고 있는 시선과는 별개로 이 모든 상황이,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만 같아 에비가일은 입맛이 썼다.

배운 대로 우아하게 스프를 휘젓는 제 손등은 메이드들이 몇 주간 열심히 관리를 해 댄 결과, 하얗고 매끈했다. 평생 고생을 모르고 자란 듯 평범한 귀족 영애의 고운 손.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불과 몇 달 전에는 인쇄소에 앉아 파본이나 골라내던 먼지 낀 손이 있었는데. 에비가일은 조금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았다.

“먹는 데 집중해. 다른 생각하지 말고.”

“공이야말로 언제나 전하께 부드럽고 공손한 어조를 지키십시오. 사람들이 흉봅니다.”

깨작거리는 에비가일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라키엘이 한마디 하자, 아그네스가 라키엘에게 엄한 얼굴로 훈계했다.

“남들 앞에서 안 그럽니다.”

“공저의 고용인들 앞에서도 이러시지요?”

“그럴 리가요. 지금은 부인 앞이라 편해서 그런 거죠.”

라키엘이 태연하게 웃으며 잡아뗐다. 그럼 언제는 고용인들 앞이 불편하셨나? 에비가일은 속으로 빈정거리며 고기 한 점을 포크로 푹 찍었다.

“쏜튼 경에게 다 들었습니다. 어찌 황녀를 아랫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대하십니까?”

쏜튼……. 라키엘이 작고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뒤에 서 있던 루데릭이 괜히 움찔했다.

“아, 미안해요, 작은 쏜튼 경. 그대의 형 말이에요.”

“풉, 작은 쏜튼.”

덩치가 저렇게 큰데 작은 쏜튼……. 엉뚱한 데에서 웃음이 터진 에비가일이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은 채 큭큭 웃어 대고, 라키엘은 줏대 없이 떠들고 다니는 카일을 어떻게 응징할지 고심하는 광경을 아그네스가 온화한 눈으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치 한숨 같은 말이었다.

“……이제 이틀 남았군요.”

이상하게나마 평온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에비가일은 흐트러져 있던 자세를 바로 하며 제 앞에 놓인 음식들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이틀.

숨이 갑갑하게 조여 왔다.

시모어 남작부인이 새로 가져온 남색의 드레스는 동대륙의 비단으로 만들어 우아하게 잡힌 주름 위에 빛이 닿으면 밤바다의 파도처럼 찰랑거렸다. 황제가 좋아하는 색이라 했던가.

에비가일은 마음에 들었는데, 정작 드레스를 만들고 저에게 입혀준 시모어 부인은 이런 우중충한 색은 싫다고 투덜거렸다. 소매가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딱 붙은 채로 내려온 데다 가슴선이 그리 깊게 파이지 않아, 어두운 드레스의 색과 함께 단정한 인상을 풍겼다.

드레스를 모두 갖춰 입자, 시모어 부인의 조수들이 에비가일에게 전부 매달려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해 댔다. 그렇게 두 시간이 꼬박 지나고 나서야 에비가일은 거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잠을 거의 못자는 바람에 퀭했던 얼굴은 생기 넘치게 바뀌어 있었고, 생머리였던 긴 적갈색 머리는 물결처럼 구불거리며 가슴까지 내려왔다.

화장도 드레스도 모두 단정하고 깔끔했지만, 곱슬곱슬한 적갈색의 머리만큼은 화려했다.

고풍스러운 화장대의 거울 속에, 그렇게 에비가일도 모르는 에비가일이 앉아 있었다. 저를 둘러싼 여자들의 찬사 속에 에비가일이 조금 멍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는 새, 아그네스가 다가와 그녀의 하얀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파사칼리아 님의 목걸이입니다.”

무려 다이아몬드로 촘촘하게 이어진 체인에 크게 커팅 된 다이아몬드들이 앞에 우아하게 늘어져 있었다. 체인이 다이아몬드라니, 상상해 본 적도 없던 사치였다.

“……어마, 마마의……?”

“네. 결혼 전, 황제 폐하께서 직접 연인이었던 파사칼리아 님을 위해 극서 지방의 드워프들에게 주문하셨던 것입니다.”

둘이 연인이었다는 게 너무나 충격이었지만, 일단 그보다도 제 목에 걸린 목걸이의 역사가 지나치게 대단해 더 부담스러운 게 문제였다.

“그렇게 중요한 것을요?”

“그런 건 파사칼리아 님께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황녀 전하가 황제 앞에서 그 목걸이를 거시는 데 의미가 있을 뿐이지요.”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 되물어 보려는 찰나, 문밖에서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시간이 다 되었다. 에비가일이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공저에 온 지 한 달이 조금 지나, 처음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다. 작은 비상계단으로 울면서 질질 끌려오던 그때와 달리, 거대한 중앙 계단으로 내려가는 제 곁에는 황후의 심복인 백작부인과 남작부인이 따르고 있다. 그리고 1층의 거대한 홀 중앙에서는 그란토니아의 단 하나뿐인 공작이, 에델가르드의 주인이 저를 기다린다.

제가 정말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에비가일은, 아니, 비올레타는 이제야 절감했다. 화려한 구두로 딛고 선 땅이 얼음처럼 위태로웠다.

그녀는 얼음 위를 조심스레 걸어 그와 점점 가까워졌다. 그가 부드럽게 입매를 끌어 올리고, 중세 희극 속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과장된 우아함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My Lady?”짧고 고급스러운 발음의 공용어였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 대사였다. 비올레타가 마주 웃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학습된 우아함으로 그 손을 맞잡았다.

“My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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