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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1장 (2/21)

<1막-1장>

궁 밖까지 질질 끌려 나와 웬 마차에 올려 태워지고도,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에비가일은 정신을 조금 차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에비가일은 창밖을 망연히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자신이 있었던 궁에서 거짓말처럼 불길이 치솟고 있었으니까.

어느새 마차와 멀찍이 멀어진 궁이 시뻘건 화염에 둘러싸였다. 주변에 작은 불 하나 없는 어두운 밤이었으나 건물에서 타오른 커다란 화염에 사위가 밝았다. 불길에 환하게 밝혀진 잿빛 외벽이 누렇게 빛을 냈다.

“설마…….”

에비가일은 말을 채 다 끝내지도 못하고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가 에비가일의 말에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에비가일이 겨우 입을 달싹였다.

“당신, 이, 궁에 불을 지른 거예요?”

“증거는 인멸해야 하니까.”

“화, 황녀 전하는요! 비올레타 전하가 계셨잖아요!”

“황녀는 이미 죽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단호하게 떨어진 말에 에비가일은 할 말도, 넋도 잃었다. 마치 세상에서 저 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이 같았던 황녀는 죽는 순간까지 제가 죽는 줄도 몰랐었다. 괴한들이 들이닥치고 목 아래 칼이 들어와도 황녀는 방긋방긋웃으며 그들 사이를 돌아다녔더랬다. 에비가일이 죽지 않은 건 오로지 그 기괴한 광경에 암살자들이 당황한 나머지 시간을 지체시켰던 덕분이기도 했다. 에비가일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태 모르고 마냥 웃고 있던 아이는 칼에 찔리고 나서야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었다. 에비가일은 마치 어린아이가 악을 쓰는 것처럼 그 앳되고 처절한 울음소리를 떠올렸다.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도, 제 머릿속의 울음소리도 모두 꿈에서 있었던 일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 불쌍한 사람을, 어떻게…….”

에비가일은 못 박힌 듯 시선을 바깥에 둔 채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떻게 죽었는데 불에 태우기까지 해요. 어떻게…….”

남이야 앞에서 울든 말든 남자는 이제 대답조차 귀찮은지 에비가일의 시선을 따라 흘끗 창밖을 보고는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내렸다. 물론 에비가일은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울 것 같은 기분에 취해 있던 에비가일은 그 냉랭한 반응에 치를 떨었다. 남자가 문득 물었다.

“이름이 뭐지?”

“에비가일.”

“성은 없나?”

에비가일은 미간을 팍 찡그렸다. 대답을 듣자마자 그렇게 물어보는 꼴이 가당찮았다.

하긴 지금 에비가일은 제가 봐도 시녀인지 하녀인지 분간이 안가는 차림새기는 했다. 그리고 제 생각에도 제 처지가 평민이나 다름없기도 했다. 그러나 본래 갖고 있었던 반감에 악의적 해석이 더해지자 더없이 불쾌했다.

“있긴 있어요. 딜로아. 에비가일 딜로아.”

“그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가문이지?”

에비가일의 뾰족한 대꾸에도 남자는 개의치 않고 물었다. 정말로 그냥 궁금하다는 투라 왠지 사람을 더 불쾌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러나 에비가일은 불쾌하다고 달리 티를 낼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녀는 제 처지를 얌전히 상기하고 말했다.

“북쪽 변방 구석에, ‘처박혀’ 있었죠.”

“있었다? 지금은?”

“없죠.”

그녀의 간단한 대답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남자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에비가일이 괜히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잊어선 안 됐다. 저 남자가 불과 수십 분 전 제 목에 칼부터 들이밀었던 남자라는 것을.

“변방에서 시골 마을 몇 개 다스리던 자작가였어요. 지금은 그 작은 영지도 뺏기고 아무것도 없지만요. 시골이다 보니 마땅히 돈이 되는 것도 없고, 나라에서 세금은 점점 올리고, 그렇다고 영지민들에게 걷을 것도 없고,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산다면서 아버지가 좀 잘 살아 보겠답시고 빚까지 끌어모아 여기저기 투자를 했는데, 그게 죄다 망했어요. 아버지는 일만 다 벌여 놓고 자기 혼자 죽고, 영지는 넘어가고, 빚은 아직 산더미에 어머니는 병들어 누워계시고, 어린 동생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 호밀빵 한쪽도 귀한 판에 이딴 퍽퍽한 것 못 먹겠다고 유모 얼굴에 빵 덩어리를 던지기 일쑤고, 유모에겐 삼 년째 월급을 못 주고 있죠.”

에비가일은 담담한 투로 줄줄 읊었다.

“평범하죠, 뭐.”

아버지가 자살하고, 믿었던 외가에 외면 받고, 열네 살에 늙은 백작에게 팔려갈 뻔했을 때만 해도 에비가일은 제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줄 알았다. 그래, 그랬던 때가 있었다. 정작 그 세상에 나오고 나서는 그 정도 불행은 널리고 널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러니까 자신은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칠십이 다 된 노인으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야반도주까지 감행했고, 그 이후로 그들은 쭉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전전했다. 먹고 살기 위해 몸 파는 일만 빼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집안이 망한 후 그렇게 4년이 흘렀다.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왔던 어머니는 그렇게 4년이 지나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렇게 그녀는 곧장 궁정으로 왔다. 당장 닥친 어머니의 치료비를 위해서 라지만 본디 그란토니아에서 귀족 영애가 시녀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란토니아의 어리고 젊은 영애들은 마치 신부 수업처럼 궁정에서 몇 년을 지냈다. 그녀들이 하는 일은 하녀들의 허드렛일과는 엄연히 궤가 달랐다. 시녀들은 귀족으로서 충분히 교육받은 지식이나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주인의 교양 생활을 돕거나 비서로서 수행하기도 하고, 옷이나 장신구부터 방 안의 자그마한 장식까지도 모시는 주인에 맞게 수집하고 관여했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적인 일이었다. 궁정은 잠시 있다 사라질 귀족 영애나, 허드렛일 외에는 할 수 없는 하녀 이외의 존재도 필요로 했다. 그것이 바로 종신직이었다. 종신직으로 궁정의 시녀가 된다는 것은 곧 결혼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거의 일생을 헌납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만큼 계약금부터가 엄청났다. 피신 목적으로 많이들 들어오곤 한다지만 보통은 목돈이 급히 필요한, 집안이 좀 많이 기운 귀족 영애들이 아주 급하게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 에비가일은 바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계약금만으로 어머니의 치료비는 물론이고 산더미 같던 아버지의 빚도 10분의 1은 불입한 데다, 넉넉한 월급 덕분에 앞으로 30년만 더 죽지 않고 살아서 일하기만 하면 얼추 청산이 가능했다.

어쨌든 다른 이야기로 조금 넘어가 보자면, 에비가일은 아직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소녀였다. 비록 가문이 쫄딱 망한 이후 생계형으로 억척스레 살며 또래 소녀들이 으레 갖고 있는 사랑스러움 같은 것은 눈 씻고 봐도 없었지만, 그녀도 나름대로는 기대가 있었다. 제 가족들을 위해 선뜻 평생을 바쳤대도 나름대로 아주 조금의 환상은 있었다는 것이다.

에비가일은 꽤 반반한 얼굴을 가졌다. 물론 수도에서 그리 대단한 축이 아니라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았지만, 그래도 시골에서 평생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소녀로서는 기대할 만한 것이 있었다. 멀쩡한 황자님 하나 잘 꾀어내 팔자 고치는 것도 계획해 본, 에비가일은 그런 평범한 소녀기도 했다. 비록 그녀의 유모는 ‘계획’이란 음흉한 단어가 들어간 시점에서 이미 아가씨에게 스스로 ‘소녀성性’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직언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첫눈에 반할 만한 얼굴은 못 되었고, 그러니 계속 얼굴 보면서 정들게 하고, 색다른 매력 좀 발산하고, 여차여차 제 늪에 빠지게 하는 수밖에.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에비가일은 늪은커녕 황자를 저 멀리 점 하나로라도 볼 수 없는, 아니, 애초에 황자는 고사하고 사람 볼 일도 없는 곳에 떨어져 버렸다. 귀족은 망해도 3년은 간다는데, 딜로아는 3년 갈 이름값이 망하기 전에도 애초부터 없었다. 게다가 갖가지 채무로 신용도까지 바닥에 처박힌 가문의 장녀인 에비가일은 당연하게도 이 황궁에서 가장 구석의, 이름도 없는 궁에 뚝 떨어졌다. 웬 백치 같은 계집애 하나가 맹한 얼굴을 하고선 있고, 그분이 이제부터 네가 모실 황녀 전하라고 했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고, 시녀라고는 저 하나뿐이었으며,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정적에, 하녀 두엇이 새벽마다 소리, 소문 없이 그날 먹을 것을 갖다 놓고, 바깥을 청소하고 가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백치 상전도, 무료한 장소나 과도한 업무도, 사람이 없는 외로움도 아니었다. 바로 그녀가 종신직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평생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며칠을 멍하니 살던 에비가일은 이내 곧 수긍하고 현실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내가 뭐 그렇지. 되는 게 있을 턱이 없지.

에비가일은 그렇게 절망하는 대신 체념했다. 황자와의 로맨스는 영영 멀어졌지만 대신 20년 동안 편하게 해먹을 수는 있다고 자기 위로를 해 댔다.

그도 그럴 것이, 황녀는 정말 착했다.

5황녀는 다섯 살에서 마음의 성장이 멈췄다고 했다. 완벽하고 우월한 피의 계승을 주창하는 황가의 특성상, 장애를 타고난 황족은 황족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5황녀는 황후의 소생임에도 불구하고 장애가 발견되자마자 바로 모후에게서 떼어 내져 유모와 시녀 둘과 함께 이 궁에 유폐되었다. 그나마 유폐된 황녀를 친어머니처럼 기르던 유모가 6년 전 죽고, 한 시녀도 4년 전에, 얼마 전에는 마지막 남은 시녀마저 죽었다. 에비가일은 바로 그 마지막 시녀의 후임이었다.

다섯 살이란 말에 에비가일이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동생들의 지랄맞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황녀는 에비가일이 감히 자신하건대 세상에서 가장 얌전한 다섯 살이었다. 엎드려 누워 그림책을 보고, 자그마한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꽃잎을 만지고, 다 낡은 그네를 가끔 타는 게 행동반경의 전부였다. 늘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리 떼를 쓰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말도 잘 듣고, 가끔 배고프다며 제 곁에 와 드레스 자락을 잡고 흔들며 웃던 동갑내기. 열여덟, 제 나이보다 한참 작던 그 여자아이.

그 아이가 죽었다.

문득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목 뒤가 싸늘해졌다.

“당신은 누구죠?”

창문을 가린 화려한 커튼을 바라보며 에비가일은 불타고 있을 그녀의 궁을 생각했다. 이제야 정말로 정신이 들었다.

모든 게 뒤틀렸다. 제가 생각했던 미래, 제가 어렵게 선택하고 안주했던 현실, 그 모든 것이.

“왜 전하가 죽어야 했고, 당신이 왔고, 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렸고…….”

에비가일의 망연한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남자는 잠자코 에비가일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당신이 나한테 한 말은 뭐죠? 당신, 당신은 대체…….”

“…….”

“누구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커튼에 가려진 창문을 응시하던 남자가 에비가일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비틀리듯 맞물려 있던 입이 열렸다.

“라키엘 드 에델가르드.”

설마.

“에델가르드의 주인이다.”

“맙소사.”

“그리고 나는, 너한테 이렇게 말했지.”

“말도 안 돼.”

“네가 그 황녀가 돼야겠다, 고.”

마치 제가 너무 빨리 말하는 통에 제 말을 듣지 못한 상대에게 다시 한 번 천천히 말해 주는 것처럼, 남자는 친절하게도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내용만큼이나 그 침착함에 에비가일은 기가 막혔다. 물론 남자가 제 이름을 밝힌 이후의 말은 그녀에게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지만.

“얼마 전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셨죠.”

“그래.”

“그때, 선대 에델가르드 공작 각하께서도……. 함께 계시다 돌아가셨죠?”

“그랬지.”

“그리고 그분은, 황태자 전하의 외숙부이시죠.”

“맞아. 아주 잘 아는군.”

여섯 살짜리 아이를 칭찬하는 양 놀리듯 조금 비아냥대는 어조였다. 그러나 에비가일은 그저 멍하니 저 혼자 퍼즐이라도 맞추는 것처럼 조각조각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황후 폐하의 오라버니시죠.”

“그래.”

“당신은 그분의 그 유명한 후계자이자 아들이고…….”

“유명할 것까지야.”

“황후 폐하의 조카에.”

“이제 다 왔어. 힘내.”

남자가 빙긋 웃으며 응원 같지도 않은 응원을 내뱉자마자, 에비가일은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끼워 맞추었다.

“……비올레타 전하의 사촌 오라버니 되시는군요?”

“드디어.”

“말도 안 돼.”

“왜지?”

“어떻게, 사촌 동생이 죽었는데…….”

그녀는 남자가 죽은 황녀를 바라보던 그 무기질의 눈빛을 기억했다. 처음의 불같은 분노와 거짓말처럼 곧바로 차갑게 가라앉던 이성.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 잠깐의 분노마저도, 온전히 죽은 황녀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싸늘한 숨이 터져 나왔다.

“……마치 일이 그르쳤다는 양.”

“그 아이가 태어나고 십팔 년 동안, 난 단 한 번도 그 아이를 본 적이 없어.”

황녀가 유폐된 것은 다섯 살이었다. 에비가일이 의아한 듯 바라보자 남자가 이내 덧붙였다.

“유폐되기 전 오 년간은 내가 여기 없었고.”

제 표정에 말을 덧붙여 주는 것이 신기해 멍하니 쳐다보는데,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잇던 남자가 그녀의 시선에 곧바로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사실은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그렇게 남자가 자신을 재빨리 조정하는 게 에비가일은 놀랍고 어이가 없었다.

아니, 좀 씁쓸해 하면 어때서? 그게 당연한 건데.

“그런데 처음 본 것이, 이미 죽어 널브러진 시체야.”

“…….”

“내가 뭘 느껴야 하는 거지? 황녀의 죽음에서.”

정말로 순수하게 모르겠다는 듯 되물어 오는 말에 에비가일이 잠시 멍해졌다가 입을 떼려는데, 남자가 그녀의 말을 막듯 다시 말을 이었다.

“평생 아무 상관없이 살았다. 내게 황녀의 죽음 자체는 황녀의 암살자들의 죽음과 별반 차이가 없어. 단지.”

“황녀 전하가 갑자기 필요하시기라도 했나요?”

“그래.”

남자가 에비가일의 날이 선 물음에 순순히 긍정하며 한쪽 입매를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남자의 얼굴은 제법 근사했지만 딱 그만큼 거북했다. 비틀린 웃음에 속이 메스꺼웠다.

전하, 전하가 필요했대요. 처음으로 전하가 필요했대요.

“……처음으로 필요했는데, 필요한 게 하필 죽어 버려서, 그래서 화가 났군요.”

남자가 뭐라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잠시 달싹이다 그대로 꾹 닫았다. 에비가일은 떨리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제가 중얼거린 말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미 눈물은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올레타를 만난 이후로 그녀가 가엽고 불쌍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그러나 왠지 그녀가 죽어 버렸을 때보다도 더 눈물이 났다.

그 와중에 에비가일의 눈물을 발견한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에비가일도 기분이 팍 상했다.

“제발 그 역겨운 눈물 좀 치워. 계집 눈물은 질색이다.”

아, 여자가 우는 게 싫으시다?

순간 에비가일의 머릿속이 번뜩했다. 그녀는 곧바로 심부름 대행 길드에서 일할 적, 장례식에서 유족으로 열연했던 기억을 되살려 냈다. 두둑한 사례도 사례였지만, 동생들이 장례식에서 받은 음식을 마구잡이로 집어 먹으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하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고객 만족도 평가는 별 다섯 개 만점에 별 다섯개. 그래, 그때처럼! 에비가일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곡을 제대로 구성지게 하려면 사전에 깊은 심호흡은 필수다.

전하, 저에게 힘을 주세요!

“어허어어…….”

제기랄, 남자가 작게 욕을 내뱉었다. 남자의 신경질에 불끈 힘이 났다. 에비가일은 더 큰 소리를 위해 배에서부터 소리를 끌어 올렸다.

“어허어어어어어허엉!”

“젠장! 시끄러워!”

좀 징징거렸기로서니 남자가 칼까지 건드릴 줄은 몰랐던 에비가일은, 남자가 칼집에 손을 갖다 대자마자 아까의 악몽에 조용히 닥치고 말았다. 정말 아주 끔찍하게 여자가 우는 걸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실랑이가 끝난 뒤, 마차 안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남자는 아까보다 훨씬 지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남자의 살벌한 시선에 에비가일은 다시 비굴하고 온순한 태도를 되찾았다. 계속 작아진다. 이렇게 계속 작아지다 사라져 버린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정말 사람 피곤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군.”

“감사합니다.”

칭찬과 매우 흡사한 어조였던 탓에 에비가일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남자가 기가 막힌 듯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빨리도 물어본다는 양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에 왠지 조금 부끄러워져서 에비가일은 고개를 숙였다.

“에델가르드 공저.”

“저를 왜 데려가나요?”

“연극을 하려면 극본을 써야지. 그리고 연습이 필요하고.”

“연극?”

“네가, 황녀가 되는 연극.”

충격으로 잠시 멍하니 앉아 있는 에비가일에게 남자는 ‘설마 황녀가 백치라고 시녀까지 바보를 넣은 건 아니겠지’ 따위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해 댔다. 에비가일은 그제야 문득 떠올렸다.

‘네가 저 황녀가 돼야겠다’던, 저 남자의 말을.

도대체―.

“제가, 왜요?”

“지금, 황녀가 필요하니까.”

“전하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네가 황녀가 된다면 계속 살아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건 사기잖아요! 전 황가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아무도 몰라.”

“…….”

“아무도 모르는 진실은, 바꾸면 바꾼 것이 사실이 되는 법이고. 황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지?”

“아무도 모를 리가…….”

가만. 이 황궁에서 ‘성장’한 비올레타 전하의 얼굴을 누가 알지?

에비가일은 절박하게 제 머릿속을 헤집었다. 황녀를 키운 유모도, 측근 시녀 둘도 모두 죽고 없다. 유폐된 신분상 황녀의 궁에는 측근 시녀와 궁을 관리하는 최소한의 하녀들 외엔 아무도 출입할 수 없다. 에비가일을 이 궁까지 안내했던 것도 황족관리국에서 황녀를 담당하고 있다던 관리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조차 황녀의 궁 안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새벽이 되면 궁을 관리하러 오던 하녀들 역시 선천적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글을 배우지 못한 이들이었고, 황녀를 만날 수 없도록 황녀의 방이외의 곳만 관리하게 했다. 애초에 낮에도 비올레타는 기껏해야 자신의 방과 그 방에 딸린 작은 정원을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그 방과 정원을 직접 관리하는 것은 오로지 에비가일 혼자였다. 잠시라도 방을 나서야 할 땐 그 방을 제 손으로 걸어 잠그곤 했다. 그리고 저 역시도 궁 밖을 나서지 못했다. 그녀도 함께 유폐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성장한 황녀의 얼굴을 아는 자는 고작 에비가일과 황녀가 죽은 뒤 찾아온 이 남자, 그리고 이 남자의 수하 몇 명뿐이다. 암살자들이 초상 정보 하나 없이 한심하게 색깔이나 따지고 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던 열여덟 살.

“너, 나, 그리고 내 그림자. 황제조차 몰라. 황녀가 머리카락도 나기 전에 그래도 제 딸이라고 한 번 와서 안아 본 게 다라니까. 그 이후엔 황녀가 병에 걸려 몇 년간 면회가 안 됐고, 건강해졌을 즈음엔 정신이상이 발각됐고, 곧바로 유폐.”

“…….”

“어쩌면 황후는 아실지 모르겠군.”

“……맞아. 황후 폐하는요!”

“황후께서도 황녀는 필요해.”

그 말에 에비가일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가짜 딸까지 용납해 줄 만큼, 황녀가 필요한 것이다. 어쩐지 서글픈 기분에 눈가가 시큰거렸다.

“이왕이면 황후도 모르시면 좋겠지만, 알아도 상관없어.”

“어머니세요. 자기 딸을 모르실 리 없어요.”

“……그래. 그래도 상관없어.”

그러나 13년이란 세월은 길다. 성장 전과 후가 다른 경우는 세상에 너무나 많았다.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꼭 그녀의 탓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녀가 너무 불쌍해진다.

“여기까지는, 그래요. 아주 잘 알겠어요. 제가 황녀라고 나타나도 아무도 모를 거라는 거. 그런데.”

“그런데?”

“왜 제가 그래야 하죠?”

“내가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제가 왜요?”

“네 아버지가, 자살했다고?”

“…….”

“네 어머니는 몸져누운 데다, 동생들은 아직 어리고, 빚은 여전히 산더미에, 영지는 없고…….”

갑자기 제 불행들을 줄줄이 읊는 저의를 알 수 없어 에비가일은 일단 잠자코 들었다. 남자가 다리를 꼰 채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에게 최고의 주치의를 붙여 주지. 거기에 네 어머니가 원한다면 네 어머니의 종교에 따라 이 세상 어떤 신의 사제라도 붙여 줄 수 있다. 네 동생들은 제국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을 거야. 최고 아카데미에 입학시키지. 웰라운, 지펜, 게르테뉴. 어느 나라에 있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골라. 네 동생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될거야. 빚도 모두 해결해 주지. 작위도 네 남동생이 정식으로 승계받게 하고, 만약 고향이 불편하다면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새롭게 알아봐 주겠다. 가문의 신용도도 복권시키고, 삼대가 호화롭게 살 만한 재산도 주지.”

“…….”

“네가 황녀만 된다면.”

“내가, 황녀만 된다면?”

“죽은 네 아버지를 살리는 일 빼고 네 가족의 모든 불행이 해결되는 거야.”

남자의 입매가 매력적인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것을 홀린 듯 멀거니 바라보며, 에비가일은 어릴 적 그림 동화에서 봤던 악마를 떠올렸다. 분명 저런 얼굴로, 저런 표정을 하고서 악마는 여자를 유혹해 삼켜 버렸을 것이다.

에비가일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저건 분명히 잘못 엮였다간 삼대가 망할 상이었다.

“……그래도, 제가 싫다면요?”

“그럴 리가.”

남자가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너무 위험해요. 어차피 빚은 앞으로 삼십 년만 더 일하면 다 갚을 수 있고, 전 이미 그걸 각오하고 종신직으로 입궁했어요. 어머니 치료비도 마련했어요. 당신, 아니, 각하께서 줄 수 있는 그만큼의 수준은 아니지만, 어쨌든 진료 정도는 받을 수 있어요. 동생들도,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는 정도의 교육은 시킬 수 있어요. 근데 대체 제가 왜…….”

“그러고 보니 내가 제일 중요한 걸 말 안 했군.”

마치 집에 열쇠라도 두고 온 양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투로 남자가 말했다.

“황녀가 암살당했어. 그런데 그 시녀는 살아남았지. 그럼 그 시녀에게 내려질 수 있는 처분은 몇 가지가 있겠지? 첫째, 암살자로 몰려 고문 끝에 죽는다. 이게 제일 유력하군. 둘째, 암살자의 공범으로 몰려 고문 끝에 죽는다. 셋째, 황녀는 죽었는데 시녀는 감히 살아남다니 괘씸해서 죽는다.”

“…….”

“뭐, 더 있나? 더 죽을 수 있는 방법. 다 비슷할 것 같은데.”

“…….”

“설마 홀로 살아남은 게 장하다고 상이라도 받을 줄 알았나?”

에비가일이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남자가 에비가일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결론은, 네가 이 마차에서 내려서 황궁관리국으로 가는 순간 너도 죽는다는 거야.”

귓가로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음산했다. 에비가일이 얕게 떨었다. 목 뒤로 소름이 싸하게 돋아났다.

“바꿔 말하면, 네가 살 방법도 이것뿐이야. 도망? 네가 도망가는 순간 황실이 널 추적할 거고, 네 가족은 모두 죽어.”

에비가일은 조금 벌려져 있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에비가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이내 에비가일을 놓아주었다. 에비가일은 좌석 끝에 겨우 걸터앉은 채로 멍하니 제 치맛자락을 내려다보다 다시 눈을 들었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에비가일은 애써 침착하게, 그리고 최대한 꿀리지 않는 모양새를 가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죠? 당신, 아니, 각하의 극본 말이에요.”

“순식간에 계획이 뒤틀려 버려서 다시 짜야 하지만……. 일단 네가 죽어.”

“언제는 이게 내가 사는 거라며!”

충격적인 말에 흥분한 에비가일이 저도 모르게 발끈해 쏘아붙였다. 그러나 남자는 잠시 눈썹을 꿈틀한 것 외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네 ‘이름’을 말하는 거다.”

“……내 이름?”

“유폐된 불쌍한 황녀의 궁에 갑자기 원인 모를 화재가 났다. 황후를 밤늦게 알현하고 궁을 나가던 황후의 조카 에델가르드 공이 그 화재를 가장 먼저 발견했고, 사촌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급히 간다. 다행히도 황녀께선 측근 시녀 에비가일 딜로아의 희생 덕에 무사하셨고, 황녀를 구한 딜로아가의 영애는 황녀만 겨우 구출한 채 자신은 죽고 말았다. 후일 그에 대한 보상으로 황실에서는 딜로아가의 작위를 복권시키고, 법적으로 황족 구제의 상에 준하는 봉토와 보상을 하사한다.”

뉘 집 딸인지 참 눈물겹기도 해라. 그녀가 어이없는 얼굴이든 말든 남자가 무덤덤하게 읊어 내리는 연극 줄거리는 계속됐다.

“화재를 겪고 놀란 황녀를 그대로 혼자 둘 수도, 유폐된 신분을 모시고 황족관리국으로 갈 수도, 황후가 충격을 받으실까 걱정되어 황후께 데려갈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하나뿐인 사촌 오라비인 공작이 황녀를 임시로 공저에 모신다. 화재로 인해 제대로 모실 궁이 없으니 공작이 황녀의 후견인 자격으로 황녀를 보호하고, 다만 유폐 때와 같이 보안을 철저히 한다.”

“…….”

“이때가 바로 우리가 시간을 벌 부분이야. 네가 진짜 황녀가 되는 시간.”

“그리고?”

“그런데 알고 보니 놀랍게도 황녀는 알려진 것처럼 백치가 아니라, 정상이었다. 어릴 적 잠시 발달에 장애가 있었고 얼마간 정신 불안을 겪긴 했지만 그건 모두 너무 어린 나이에 병을 오래 앓았기 때문이었고, 유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적으로’ 돌아와 성장했다. 하지만 황녀의 유모와 측근 시녀 모두 같이 유폐된 신분이었던 탓에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으므로 황녀의 정상적 징후를 외부에 알릴 방도가 없었다. 황녀는 유모와 측근 시녀에게서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았고, 유폐된 궁의 서재에서 홀로 책을 읽으며 상당한 교양도 쌓았다.”

“아니, 잠깐. 정상적인 것까지는 모르겠는데, 그 교양이라는 걸 저도 제 사정상 그리 제대로 쌓지는 못했는데요.”

“상관없어. 시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말했잖아. 시간을 벌 거라고.”

“……계속해 봐요.”

“극본은 거기까지. 현재 후계 구도는 황태자가 죽은 후 1황비 베티스의 제1황자, 그리고 3황비 카트린느의 제4황자로 나누어져 있지.”

갑자기 넘어간 화제에 에비가일이 눈만 깜빡였다. 남자가 묘한 얼굴로 웃었다.

“빌헬미나, 칼리페, 아리안느. 이들이 누구지?”

“역대 여제들의 이름이죠.”

후계구도 말하다 말고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에비가일이 바라보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모두 황후 소생이었지.”

에비가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질렸다. 남자가 만족스러운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눈치는 빨라서 좋군.”

“그러니까, 당신 말은.”

각하도 빼먹고, 급하게 말이 나간다. 누가 갑자기 제 머리를 망치로 친 듯 머리가 띵했다.

“황비가 생산한 황자들이 제아무리 기를 써 봤자, 황후가 낳은 황녀가 무조건 계승권 우선이야. 제국법으로야 남녀 동등하다지만 실질적으로는 적자, 그리고 적자가 없다면 적녀지. 물론 적녀도 없다면 그들 같은 황후 이하 소생들도 가능했을 테고. 아니면 적녀가 양보했거나.”

“……당신 미쳤어요. 이건 아니에요.”

“처음엔 그들의 계승 구도만 흩트려 놓을 생각이었어. 사실 제국을 죄 망가트릴 생각도 했고. 백치인 황녀를 데려와 봤자 계승권에 근접조차 할 수 있을 리 없지만, 황실 법례상 사촌 간 결혼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그녀와 내가 결혼한다면 얘기는 달라지니까.”

에델가르드는 초대 황제와 함께 제국의 개국을 이룬 최고 공신 가문이었고, 초대 황제뿐 아니라 역대 황제가 에델가르드 직계를 황제의 직계인 최상위 황족과 거의 동일하게 대우했다. 황후를 역사상 가장 많이 배출했고, 역대 공작의 배우자는 절반이 황녀였다. 그만큼 에델가르드는 황실과 가장 가까이 엮여 있었고, 사실상 혈연적으로 황족이라 보는 게 맞기도 했다. 남자가 짐짓 오만한 투로 말하기는 했지만, 이 남자는 일반 백성들조차 보통의 황자 들처럼, 혹은 그들보다 더 크게 생각하는 존재였다. 비록 공작가가 밀던 황태자가 사고로 죽고, 공작이 함께 죽었을지언정 살아남은 이 남자의 존재감까지 같이 죽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제국을 망가트린다니.

그는 제국 최고 공신 가문의 주인이었다. 그 이상하리만치 진득한 증오에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에비가일은 남자의 이어지는 말에 생각을 멈췄다.

“하지만 그래 봤자 제국을 분열시키는 데 그쳤겠지. 황녀가 정상적으로 계승받을 수 있을 리 없고, 결국 아무도 황제가 될 수 없었을 거다.”

“……황자들이 있잖아요?”

“그들이야, 내가 망가트릴 테니까.”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는 그 오만한 말에, 에비가 일은 점점 결론이 두려워졌다.

“하지만, 황녀가 다행히 죽어 버렸고. 그래,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군.”

“…….”

“마침 아주 훌륭한 대용품으로, 너를 주웠어. 넌 백치도 아니고, 황녀와 비슷한 나이에 머리도, 그 눈까지 모두 똑같아. 그 빌어먹을 황제와 말이야. 그리고 황제가 좋아할 만한 적당히 예쁘장한 얼굴에, 무엇보다도 넌 ‘정상’이지.”

“그래서…….”

“너라면, 황제가 될 수 있어.”

상황과 그리 어울리지도 않는 달콤한 목소리로 남자가 속삭였다. 에비가일이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황실과 아무 상관도 없는 나를, 황제로 앉히겠다고요? 당신 미쳤어요. 황녀까진, 그래, 이해했어. 그런데 황제는, 황제는!”

“어차피 혈통 따윈 모두 허상에 불과해. 지금 황제에게, 초대 황제의 피가 얼마나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나?”

맙소사, 황계의 정통성을 뒤집어엎는 발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에델가르드의 주인 입에서 나오다니.

“당신 자리도 그 ‘혈통’으로 받았어요. 아니에요? 당신 말에 따르면 그 희미하고, 희미한.”

“그래서 난 ‘능력’이 있는 거야.”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말하며 남자가 씩 웃었다.

그렇게 대답해 버리면 제 쪽에선 할 말이 없었다. 게르테뉴 아카데미 최초 전 영역 종합 최고 성적에, 당연히 역대 최고 수석 졸업에, 제국 남쪽 에델가르드 공작령에 있던 그저 평범한 작은 항구 하나를 제국 최고의 무역항으로 거듭나게 만든 장본인이 제 앞에 있었다. 그는 심지어 열넷에 정식으로 기사 서품까지 받았다. 그리고 남자는 이제 고작 스물셋이었다.

능력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이 남자는 여전히 맨 꼭대기에 존재했다. 세상이 결국 불공평하다는 것을, 남자는 온몸으로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난 당신처럼 능력도 없어요.”

“생기겠지.”

여태까지의 행보와는 달리 밑도 끝도 없이 긍정적인 자세였다.

“나 못 해요.”

“해.”

“제발. 나 당신까지 망칠 수도 있어요.”

“그런 일 없어.”

“할 수 없어요, 나 못 해요. 제발.”

그러니까 제발 포기해. 에비가일이 간절하게 입안으로 되뇌었다. 남자는 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검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렇게 만들 거야.”

“…….”

“네가 아니라, 내가.”

라키엘은 책상 위에 놓인 묵직한 서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중소규모 영지 개발 5개년 보고서 뺨치는 규모였다.

“이게 다 뭐야?”

“그분의 이력입니다.”

“열여덟 살이라며.”

“네.”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산 거야?”

책상 앞에 서서 대충 집히는 대로 서류를 들고 쓱 훑어보던 라키엘이 이내 피곤한 얼굴로 책상 위에 내팽개쳤다.

“카일?”

“네.”

“읽어.”

“네.”

하룻밤 사이 제 수하들이 여기저기서 미친 듯이 긁어 온 저 서류들이 겨우 저런 취급을 받을 줄 알았다는 듯, 아주 당연한 동작으로 카일은 자신이 따로 정리한 파일을 꺼내 들었다. 그 동작에서 엘리트의 자부심이 한껏 묻어났다.

“에비가일 딜로아. 올해로 열여덟 살이고, 신원 확인 결과 일치했습니다. 딜로아 가에 부채가 비정상적으로 쌓이기 시작한 것은 육 년 전으로, 이 년 뒤 결국 체불액이 불어난 이자로 인해 730만 란트에 달하고, 아 참고로 딜로아 영지의 원래의 연간 수입은 110만 란트 정도였지만, 당시엔 몇 년간 지속하던 심각한 가뭄으로 35만 란트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마저도 영지민들에게 대부분을 분배해 심각한 적자 상태였다고 하고, 어쨌든 빗발치는 소송에 그분의 부친인 딜로아 자작은 성벽에 올라가 투신자살 했습니다. 이후 영지는 바로 근방의 슈페트 백작가가 그간의 채무를 포함하여 헐값에 인수했고, 이 과정에서 채무는 140만 란트로 감소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당시의 계약서 사본을 확인해 보던 중 특이 사항을 발견했습니다. 계약 조건에 백작과 딜로아가 영애의 혼인 조항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혼인 후에는 나머지 채무를 슈페트에서 전부 해결하겠다고 되어 있고요. 그분에게는 나이 차 많은 동생들 외에는 달리 동기가 없으시니, 여기에 기재된 영애는 바로 그분을 지칭하는 듯합니다.”

슈페트라면 그란토니아의 북부 변방에서는 꽤 큰 규모의 영지를 가진 귀족이었다. 양 갈래로 솟은 수염을 간사하게 달고 굽실거리던 그…….

“설마 그 칠십 먹은 노인네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당시 백작은 정확히 육십팔 세였습니다.”

“노망났군. 그 나이 먹고 더러운 주책은.”

라키엘은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며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래서, 그 영감과 결혼했다?”

“아니요. 영지가 인수되고 결혼식을 준비하던 중 온 가족이 야반도주했습니다.”

야반도주란 단어를 듣자마자 어쩐지 누구답다는 생각에 우스워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각하?”

용케 그 찰나를 본 카일이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얼어붙은 채로 라키엘을 멍하니 응시했다. 라키엘은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카일이 조금 움찔했다.

“계속해.”

“그리고 가족이 수도로 왔습니다. 수도에 온 뒤 그분은, 조사원의 정리에 의하면 ‘매춘과 유흥업을 제외하고 여자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잡다한 일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열네 살짜리가?”

“네.”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잡다한 일’이라는 게 뭔데.”

“인력 길드와 전속 계약을 맺고 여관 종업원, 우시장 안내원, 레스토랑 주방 식기 세척, 의상실 재봉사 보조, 커피하우스 서빙, 마차 관리, 연회장 청소, 선박 도색, 양산 공장에서 불량품 골라내기, 인쇄소 경리, 서점에서 서적 관리, 파본 골라내기……. 등 이외에도 쉰두 가지 정도의 일을 하셨습니다.”

“…….”

“그리고 심부름 대행 길드의 일을 가끔 병행하셨는데, 심부름 대행 길드에서는 결혼식에서 신부 친구 대행, 여동생 대행 등을 주로 하시고, 신랑의 애인 대행을 맡아 결혼식을 파투내기도 하셨습니다. 아, 장례식 유족 대행도 꽤 하셨네요. 그 외 아카데미 대리 시험, 대리 출석 등을 꽤…….”

“……그래서 그렇게 꺽꺽대며 잘도 울었군.”

“예?”

“그러다 시녀로 입궁한 건가?”

“아, 네. 모친이 갑자기 위독해져 치료를 위해 종신직으로 급히 입궁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황녀 전하의 측근 시녀가 죽어 자리가…….”

“비었을 테고, 유폐된 황녀와 평생 갇혀 살아야 할 자리에 제아무리 종신직이라 해도 수도 귀족 영애를 밀어 넣었을 리는 없고. 그래서 마침 가문도 생소한 저 계집이 그렇게 된 거다?”

“네.”

라키엘이 말없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든, 청소부터 깨끗이 하고 시작해야 한다.

눈을 감은 채로 라키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순식간에 주위가 냉랭해지는 기분에 카일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황궁부터 청소해. 일단 입궁 경로부터 철저하게 조사하고, 거기 연루된 인간들 다 골라내. 특히 에비가일 딜로아의 얼굴을 봤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인간들은 즉결해. 그 외에는 전부 이동시키고.”

“알겠습니다.”

“아까 슈페트라고 했나?”

“예?”

“올해 공작령에 백작이 공급한 물량 반환 시작하고 무역 교섭 중이던 게 있으면 다른 영지 산물로 전부 대체해. 갖다 붙일 이유야 많으니 남은 중개 계약 일절 해지시키고, 그간 기록해 둔 거래 탈세부터 영지, 개인 탈세 내역 적당히 큰 건으로 보기 좋게 포장해서 재무부에 찔러. 그리고 본인은 수도로 호송시키는 도중에 조용히 처리하고.”

“알겠습니다.”

카일은 입으로는 곧장 알겠다고 하고서도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라키엘은 다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에비가일 딜로아 본가에 티올리부터 보내.”

“수도 공저의 주치의를요?”

“최대한 빨리.”

라키엘은 마치 카일의 되묻는 말은 듣지도 못한 양, 자신의 말만 덧붙이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조금의 지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싸늘하게 얼어붙은 얼굴에 카일이 곧바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라키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집무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거대한 책장 앞에 섰다. 책을 찾는 듯 기다란 손가락이 두꺼운 서적들 위를 배회했다. 이윽고 라키엘의 손이 『교양의 종말』이란 책 위에서 멈추었다. 라키엘은 그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책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는지, 책은 책장을 빠져나오자 바로 옆 탁자에 놓였다. 책이 빠져나간 빈자리로 손이 들어가 무언가를 눌렀다. 그리고 마치 거짓말처럼 그 앞에서 천천히 거대한 책장이 열렸다.

그 안에 펼쳐진 것은 ‘진짜’ 공작의 침실이었다.

에델가르드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역대 공작들만의 공간, 엘데르디움.

그 중앙에 놓인 거대한 침대 위에는 에델가르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여자가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그것도 제 처지나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도 평온한 얼굴로.

이 방에 끌려올 때만 해도 하얗게 얼굴이 질려서는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느니, 제발 보내 달라느니 울며불며 횡설수설하던 것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그는 그것이 차마 더 보기가 싫어 몇 시간 내버려 두었고, 설마 아직도 그러고 있겠나 싶은 생각에 다시 열었다. 그리고 여자는 모든 예상을 애매하게 빗나갔다. 그녀는 라키엘의 생각처럼 여태 울지는 않았지만 깨어 있지도 않았다. 저렇게 매일 잠자던 제 방인 양 편안하게 잠든 모습은 그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전개였다.

라키엘은 그 태평하기 그지없는 숙면을 잠시 어이없는 듯 바라보다 이내 웃음기 없는 얼굴로 픽 웃었다.

내일 새벽쯤엔 제 고모가 여기로 들이닥칠지도 몰랐다. 아마 실망하고, 절망하고,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곧 이 여자의 필요를 인정하시리라.

그 ‘필요’라는 것이 제 것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어머니, 나 이상한 꿈을 꿨어.”

기껏 예의 바르게 불러 놓고는 반말로 마무리하는 이상한 말투였지만 소녀에게 어머니라 불린 여인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따스한 손길에 소녀는 한결 느슨해진 표정으로 살짝 웃었다. 제 어머니가 이렇게 쓰다듬어 주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또 무슨 이상한 꿈을 꿨니, 우리 에비가일?”

“그게 있잖아. 꿈에서 갑자기 궁에 어떤 미친놈이…….”

‘일어나십시오.’

소녀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깜빡거렸다. 간만에 휴가 나와서 너무 피곤한가? 웬 환청이…….

‘일어나십시오.’

“에비가일, 왜 그러니?”

“아니, 웬 이상한 목소리가…….”

‘일어나, 이 건방진 것.’

에비가일은 이불을 강탈당함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이 급하게 새어 나왔다.

“잠자리가 바뀌셔서 잠을 못 이루실까 걱정했습니다만…….”

“…….”

“잠은 아주 잘 오셨나 봅니다.”

“……말도 안 돼.”

아까 꿈에 나왔던 남자가 왜 내 방, 아니, 여긴 어디지? 에비가일이 입안으로 황망하게 중얼거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전하.”

이거 꿈이잖아? 이게 꿈이잖아? 혹시 나 지금 꿈에서 깬 거야? 아까 꿈에서 깬 게 아니고? 에비가일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꾹 감았다 떴다.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에비가일이 저 혼자 툭 내뱉었다.

“그게 꿈이야?”

“적어도 지금은 꿈이 아닌 게 확실합니다. 이제 일어나셔야 합니다.”

“…….”

“해가 중천에 뜬 게 보이실 겁니다.”

창문 하나 없는데 보이긴 뭐가 보인다고.

있지도 않은 창문 대신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에비가일 앞에 들이댄 것은 회중시계였다.

1시.

“……저기, 근데 태양이 가장 높이 뜨는 시각은 정확히 한 시가 아니라…….”

남자는 뭔가 잠시 울컥한 듯 이를 조금 악물었다가 이내 웃는 낯으로 정중하게 비꼬았다.

“아, 제가 실수했습니다. 정확히 그보다 삼십 분늦으셨습니다.”

남자가 정정한 사실에 이미 관심이 없는 에비가일은 아까부터 왜 자꾸만 제 팔에 소름이 돋는지를 생각했다. 그러다 순간 멈칫 숨을 멈추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나, 나한테 왜 높임말 쓰는 거예요.”

“황녀 전하께 그럼 감히 편히 대하겠습니까?”

“맙소사. 진짜, 진짜 해요?”

“그럼 농이겠나?”

남자가 결국 자기 성질을 참지 못한 듯 신경질적으로 대꾸하고 뒤의 의자로 가서 풀썩 앉았다.

“진짜 말도 안 돼…….”

“오늘 황후께서 오실지도 몰라. 아니, 오실 거야. 정확히 내일 새벽.”

“보자마자 아실 거예요!”

남자는 당연하게도 에비가일의 반응은 가볍게 무시한 뒤 자신이 다음으로 하고 싶은 말로 넘어갔다.

“세간에는 각본대로 황녀의 궁에 일어난 화재부터 황녀가 여기에서 보호받고 있는 것까지 알려졌다. 그리고 넌 죽었지. 네 부고는…….”

“설마 집에, 집에 벌써 갔어요?”

이렇게 빨리는 안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제 겨우 치료를 받고 있었다. 만약 충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원래대로라면 바로 그래야 하지만 일단 막아 뒀다. 하지만 화재가 수도에 떠들썩하게 이미 퍼졌으니, 네 가족들이 안다면 생존 확인 요청을 해 오겠지.”

그나마 당분간은 다행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병에 걸린 뒤로는 집 안에만 있었고, 동생들도 아직 어려 집 안에만 있으니 그나마 소문을 들을 만한 사람은 유모 정도였다. 아픈 어머니나 어린 동생들에게 소문만 듣고 섣불리 알릴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해. 에비가일 딜로아의 흔적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니까.”

울컥, 무언가 차올랐다. 목 안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아예 그냥 날 세상에서 없애 버리지 그래요.”

에비가일이 비꼬듯 던진 말에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내뱉는 숨이 따가웠다. 이렇게 쉽게, 이렇게 빨리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내’가, 죽었다고?

에비가일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머리를 천천히 식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설령 자신이 정말로 지금 당장 죽어야 한다고 해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는 게 그녀의 처지였다. 자신이 따르지 않으면 제 가족은 직계 황족 살인범의 부모, 형제로 몰려 길거리에서 돌팔매질당하며 개죽음이나 당하겠지만, 만약 제가 따른다면…….

제 가족은 황녀를 구한 공신 가문의 귀족이 된다.

거기다 제 어미, 제 동생들이 평생 써도 남을 돈, 그럴듯한 삶……. 적어도 제 동생들은 가난 따윈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살 것이다. 저처럼 누구 심부름이나 하러 학교에 갈 일 없이, 최고의 학교에서 공신 가문의 자제로서 당당하게, 예전보다 더 귀족처럼 살 것이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거짓의 결과라고 해도 자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두 죽는 것보다는 모두 사는 것이 낫다. 그 삶에 작위가 돌아오고 돈이 따라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낫다.

에비가일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나도 잘 알아요. 나, 선택의 여지 없다는 거. 각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나밖에 없는 측근 시녀였다. 거기다 황녀를 구하고 죽은. 기록이 지나쳐도, 기록이 너무 없어도 저절로 관심이 쏠리게 되지. 그리고 그 순간 너한테는 꼬리가 생기게 되고.”

그저 아까 전 제 말에 덧붙이듯, 남자는 담담하게 다시 설명했다. 그것은 마치 오해를 풀기 위해 부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비가일은 조금 당황한 채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넌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할 하수인이 아냐.”

“…….”

“이건 굳이 말하자면 ‘갑을 관계’지.”

남자가 이보다 평등할 수는 없다는 듯 선하게 웃으며 말했다. 멍하니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에비가일이 무언가 번뜩 떠올리고 고개를 멈췄다.

고용계약서에 을乙로서 서명만 수백 번은 한 내가!

“뭔 차이에요, 그게? 당신이 갑甲이잖아. 당신이 위잖아! 시킬 거잖아!”

“안 속는군.”

아깝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꼴이 매우 얄미웠다. 에비가일이 기가 막힌 듯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여유롭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하여튼 하수인은 아냐. 넌 황녀로 잠시 위장하는 게 아니라, 황녀가 되는 거니까.”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니 조금 신뢰가 가기는 했다.

“하지만 확실히 너에게 지금 선택의 여지는 없군.”

아니, 조금도 신뢰가 안 간다.

짙은 감색 로브로 몸을 가린 여자가 계단을 뛰어오르듯 빠르게 걸어 올라갔다. 반쯤 리본이 풀린 로브를 제대로 잡지 못한 나머지 흘러내린 로브가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지만, 여자는 그것을 인식할 여유조차 없었다.

서두르는 몸짓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다. 청년은 그저 그 위태로운 모양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여자를 바로 뒤따라 계단을 두 칸씩 빠르게 걸어 올라갔다.

5층.

쉬지 않고 올라온 통에 체력이 약한 여자의 숨이 거칠었다. 그러나 여자는 계단 끝에 올라서기 무섭게 걸음을 더 빨리해 어두운 복도로 들어섰다. 뒤따르던 청년이 서둘러 그런 여자를 앞질러 나가 복도 중반의 거대한 관문을 열었다. 2층 높이는 족히 넘을 천장까지 닿은 두꺼운 문이었지만, 문은 그 묵직한 무게가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소리도 없이 조용히 열렸다.

여자는 너무 빨리 움직인 나머지 앞으로 넘어질 것처럼 청년이 열어 놓은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그 문턱을 지나자마자 입고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몸에 걸쳐져 있는 것에 가까웠던 로브를 곧바로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여자의 성격처럼 단단히 틀어 올린 검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 로브에 쓸리며 조금 흐트러졌다. 여자는 몇 개의 문을 지났다. 그리고 어떤 문 앞에 이르자마자 탕, 하고 거칠게 문을 열었다.

“라키엘!”

5층의 관문을 공식적으로 통과할 자격이 있는 여자는 제국을 통틀어 단 한 명이었다. 그리고 공작의 집무실을 공작의 허가 없이 열어 버릴 만한 여자도, 단 한 명뿐이었다.

공작을 제외하고 유일한 에델가르드의 직계, 그리고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여자.

파사칼리아 드 에델가르드.

그녀의 조카는 그저 느긋하게 제 책상에서 일어나 파사칼리아를 맞이했다. 평소라면 그 태도에 잔소리를 쏟아부었겠지만, 파사칼리아는 숨을 가다듬으며 제 답답함을 애써 억누르고 라키엘에게 다가와 섰다. 그녀의 우아한 얼굴은 금방이라도 화를 터트리거나, 혹은 환하게 웃을 것 같아 기묘했다.

“부르시면 제가 갈 텐데요, 황후 폐하.”

“너 보러 온 것 아니다.”

“이제 에델가르드에 남은 것이라곤 이 조카 하난데, 제가 아니면 왜 오십니까?”

“네 고모 지금 농칠 정신 없다. 어디 있어, 그 아이.”

“보시면 혼부터 날 줄 알았는데요.”

“네 혼은 나중에 낼 거다. 그나마 그 망할 궁을 불살라 버린 것 하나 맘에 들어 지금 네가 멀쩡히 서 있는 줄 알아. 네 멋대로 그 아이를 꺼내 공저까지 데려와? 아무 대비도 없이!”

“그래도 기쁘신 것 압니다.”

한 번을 지지 않고 대꾸하는 조카가 이 와중에도 기가 막혀 파사칼리아는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어디에 두었어?”

“제 침실에요.”

“너 미쳤니?”

“어차피 제게 주기로 하셨다면서요. 상관없지 않습니까?”

“십수 년도 더 된 얘기를 이제 와 하니? 너랑 무슨 정신도 온전치 않은 애를…….”

파사칼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무심코 뱉은 말이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찔러 버린 탓이다. 그리고 침묵.

라키엘은 제 얼굴에서 장난기를 걷어 냈다. 그녀의 타박에 장난으로 받아치기는 했으나, 제 고모의 저런 반응이 오로지 제 아버지의 죽음을 잠시 잊은 데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라키엘은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상황에 대한 가설을 착실히 세우면서도 일부러 간과했던 순간이 왔다. 황태자가 죽은 지 이제 겨우 한 달째.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것도, 겨우 한 달째. 뭐라고,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제는 당신의 딸마저 죽었다는 것을.

친동생이나 다름없던 황태자의 죽음이 그의 세상을 무너지게 했던 것과는 달리, 생전 처음 보는 사촌 여동생의 죽음이 준 느낌은 순전히 낭패에 가까웠다. 여태껏 멀쩡하게 잘 살아 있다 왜 하필 필요해지자마자 죽어 없어졌나. 그 낭패감. 분노. 그것을 제외하고 그녀의 죽음이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소모하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이 순간 때문이었다.

자신의 고모가, 그녀의 죽음을 알아야 할 순간.

“엘데르디움.”

“……뭐?”

“공작의 침실에 두었습니다. 황녀는 지금 수도에서 가장 안전합니다.”

라키엘의 짧은 덧붙임에 파사칼리아는 그제야 아, 하고 조카의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이제 조카의 침실이 여자나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공자의 개인 침실이 아닌, 공작의 엘데르디움을 뜻함을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결코 상쾌한 깨달음은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파사칼리아는 애써 웃었다. 웃는 눈가 옆으로 주름이 두어 줄 생겼다 사라졌다. 그 나이에는 있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그러나 그 대수롭지 않은 흔적이 라키엘의 눈에 띄고 만 것은 그녀가 고작 몇 주 만에 몇 년을 늙어 버린 듯, 지친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내 정신 좀 봐라.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잊고. 네가 여태 공자님인 줄만 알았지 뭐니.”

자신에게도 듣기 달가운 말은 아니었다. 라키엘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황녀 전하께서는 정상이셨습니다.”

“뭐?”

“백치도, 무엇도 아닙니다.”

“그게 무슨…….”

라키엘은 대꾸 없이 책장으로 다가가 곧바로 『퀸클로니아 전기傳記』라는 책을 골라 꺼냈다. 차라리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파사칼리아는 그에게 있어 단 하나 남은 핏줄이었고, 가족이었고, 부모였다. 속일 수만 있다면 그대로 속이고 싶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면 될 것을 자신답지 않게 미루고, 거짓부터 선보이는 것은 그 일말의 기대 때문이다. 그답지 않게도.

그러나 책장이 천천히 열리고, 침대 위에 널브러져 여태 숙면 중인 여자를 발견한 라키엘이 입매를 조금 일그러뜨렸다. 사소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느 종교의 주장처럼 정말로 사람에게 전생이란 게 있다면, 저 여자는 잠을 못 자는 고문이라도 받다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모처럼 숙면을 한 기분이었다. 사실 에비가일이 잠을 제대로 못 이룬 건 어제 딱 하루뿐이었다. 중천까지 잤던 게 남자에게 어떻게 보였을 줄은 알지만 그건 그녀가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기 때문이다. 에비가일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무거운 몸을 뒤척였다. 마치 열흘 만에 잠을 잔 것 같았다. 그녀가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날부터 하루가 정말 열흘 뺨치게 길었다.

어쨌든 에비가일은 눈을 뜨기 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 정말 푹 잤다고. 그리고 눈을 뜨고 나서는…….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지.”

“……어, 어, 저기…….”

눈을 뜨자마자 웬 사람이 앉아 있고, 그 남자가 아니라는 이중적 발견에 급격히 당황한 에비가일은 ‘어’와 ‘저기’를 망연히 반복했다. 그녀가 멍청한 얼굴로 그러든 말든 그녀의 눈앞에 앉은 사람은 여전히 차분했다. 우아한 기품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중년 여자였다. 에비가일이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십삼 년 만이구나.”

나직한 한마디에 에비가일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황후였다. 머리가 순식간에 새하얗게 탔다.

대체 어떻게, 어쩌라는 말이지? 그 남자는? 제가 계획해 놓고 어떻게 저만 이렇게 쏙 빠질 수 있지!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황후께서는 내가 황녀가 아니란 걸 알고 계신가? 모르시니 13년 만이라는 말이 나온 건 아닐까? 아니, 지금 혹시 떠보는 건가? 정답은 바로 네 양심에 있노라고? 근데 왜 떠보겠어. 내가 황녀가 아니란 걸 아시면 지금이 냅다 엎드려서 빌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건 아닐까? 그런데 황후께서 앉아 계신데 지금 나 같은 게 누워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돼. 되도 않게 연기하다 사실 네가 황녀가 아닌 것을 안다, 이러면 그게 무슨 꼴이야. 가증스럽게. 근데 혹시 아직 모르신다면? 그럼 괜히 인정하는 것밖엔 안 돼. 몰라도 될 걸, 모르셔도 될 걸 알려 드리는 건데. 아니 근데 진짜 공작이고 뭐고 도대체 나한테 이걸 다 어쩌라고, 아…….

에비가일은 숨도 쉬지 않고 주르륵 생각하다 결국 그냥 울고 싶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에비가일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눈만 깜빡이자, 황후는 조금 더 다정해진 얼굴로 물었다.

“내가 무섭니, 아가?”

모른다. 모르는 것이다. 에비가일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어쩌면 좋지. 어떡해야 하지. 이럴 땐 뭘 말해야 하지. 이런 때라는 건 뭐지. 미친 사람처럼 결론도 없고 도움도 안 되는 생각들이 쏟아졌다. 에비가일은 낯을 가리기 때문인 것처럼 적당히 애매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움츠러들 것 없단다.”

에비가일은 할 수만 있다면 온몸을 구겨서 움츠러들고 싶었다. 그것도 사람이 움츠러들 수 있는 최대한으로. 그러나 곧이어 황후에게서 나온 말에 에비가일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가 내 딸이 아니란 것, 안다.”

에비가일이 어떤 생각을 더 할 새도 없었다. 그 나직한 말과 동시에 황후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말은 화를 내는 것도, 에비가일을 책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딸을 알아보지 못하겠니. 아무리 못난 어미라지만 어떻게 그러겠니.”

“……폐하.”

“그저, 어리석게도 기대를 했었다. 네가 내 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눈을 뜨면 날 어미라 부르기를. 그럼……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지.”

“…….”

“너는 아직 순진하여, 거짓말이 서툴구나. 정말로 그 아이처럼.”

에비가일은 황급히 일어나 앉았지만 제가 생각해도 이제 와 예를 차리는 건 아무 쓸모도 없었다. 황후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우는 얼굴로 온화하게 웃어 주었다. 그 웃는 얼굴에 오히려 눈물이 툭 떨어졌다.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에비가일은 잠시나마 그 정신 나간 남자의 뜻, 그러니까 저 ‘어머니’의 마음을 속이자는 것에 동의했다는 데 도망치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이렇게 멀쩡하게 자고 있던 자신을 보고 그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에비가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닌 건 아니었다. 에비가일에게도 어머니가 있었다.

“저는, 정말…….”

“내 딸의 마지막을 함께해 주어 고맙다. 네가 그, 라키엘이 죽었다고 하던 에비가일이겠지.”

“……그렇습니다.”

“네가 똑똑한 아이 같아 뽑았다. 직접 보고 뽑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 내 시녀장이 몰래 지시해 뽑았지. 얘기를 듣고, 내가 직접 뽑은 것이나 마찬가지란다.”

듣도 보도 못한 가문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선발이었다니 의외…….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심사숙고해 믿고 뽑은 결과가 딸은 죽고 쓸모없는 시녀는 사지 멀쩡하게 살아 팔자 좋게 잠이나 자고 있는 모습이라니. 에비가일은 황후를 마저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이불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정말로 그때 그 마차에서 내렸어야 했다. 남자가 무슨 말을 했든 그게 제게 벌어진 일에 맞는 결과였다. 얼마나 억울하든 어차피 저 같은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비가일의 생각보다 황후가 훨씬 더 좋은 사람이고, 제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다면 가족의 선처 정도는 받아들여 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잘못했습니다.”

“네가 무얼.”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황녀 전하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 염치도 없이 전하가 아닌 제가 감히 이렇게 살아남은 것……. 저를 당장 죽이신다 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 죽으라 하셔도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이리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겠지만, 제 죄는, 제가 기꺼이 받을 테니, 황후 폐하, 부디…….”

“아니, 널 원망하고 싶지 않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 어쩌면 이게 신의 뜻일지도 모르지. 비올레타, 그 아이가 갇힌 세상에서 더 고통받지 않고 차라리…….”

황후는 끝내 말을 더 잇지 못한 채 암담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고통, 그래, 고통일 것이다. 바깥에서 보기에, 그 좁은 방에서 평생을 제정신도 아닌 채 감금되어 사는 생이란 그저 고통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정작 에비가일이 지켜본 비올레타는 매일 즐겁게 살던 사람이었지만, 그 삶이 전혀 고통스러워 보이지도 않았지만……. 제 딸이 행복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고통일 어미였다. 에비가일은 그 말에 사실로 대꾸하는 대신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비가일은 저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기 위로인 것을 모르지 않았다. 저렇게 말을 해도 결국, 평생 가슴에 못처럼 박혀 있을 테니까.

“전하께서는, 황녀 전하께서는…… 오래 아프지는 않으셨어요. 다행히도.”

열네 살, 아버지가 죽고 제게 유일하게 다행이었던 사실이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즉사했다는 의사의 말에 에비가일은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그나마 제 아버지가 오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비올레타는 고통스럽게 죽어 갔지만 적어도 오래 아프지는 않았다. 그 짧은 시간만큼 허무한 죽음이었을지언정, 이것은 이 방에 틀어박힌 이후 내내 울던 에비가일에게도 그나마 위안이 되던 사실이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는 전혀 비할 바도 되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저라도 감히 이러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 줄 수 없었다.

에비가일의 말을 천천히 곱씹듯 황후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뒤 다시 눈을 뜬 황후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마주친 단단한 시선에 본능적으로 에비가일은 몸을 굳혔다. 마치 다른 사람 같은 눈이었다.

“라키엘이 널 이용해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

“아니, 사실은 알 것도 같지만 이젠 어찌 됐든 상관없어.”

“황후 폐하, 그냥 저를 벌하시고 부디…….”

“아니, 나는, 그저 비올레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 참을 수가 없구나. 이대로,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 오라비, 내 아들, 내 딸…….”

“폐하.”

“어떻게 이렇게 다 사라져 버릴 수가 있느냐.”

고고하면서도 참담한 음성이 기묘했다. 에비가일은 떨리는 눈으로 황후의 시선을 마주했다.

“라키엘이 널 황제로 만들겠다고 하더구나.”

“당치도, 당치도 않은 얘깁니다. 저는…….”

“나는 널, 내 딸로 만들 것이다.”

황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부탁이니, 에비가일. 비올레타가 되어다오.”

“…….”

“내 딸을 살려다오. 내 딸이 계속,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수 있게 해다오.”

자신의 딸을 살려 달라는 처절한 부탁이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러겠다는 말 한마디면 되는데, 좀처럼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황후의 말은 그녀에게 황송하게도 부탁이었지만 사실 에비가일에게는 이미 정해져 있는 선택지였다. 에비가일은 저도 모르게 잠시 착각할 뻔했으나, 이내 제게 선택할 권리 같은 것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라키엘, 그 남자가 벌써 빠져나갈 구멍 같은 건 다 틀어막아 놓았지 않나. 그러니 그냥 그러겠다는 말 한마디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후는 그녀에게 부탁했다. 명령이나 강요가 아닌 부탁. 차라리 명령이었다면 너무나 쉬웠을 대답이 부탁에 오히려 훨씬 더 무거워졌다. 에비가일은 떼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떼어 내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그렇게 할게요.”

이렇게 에비가일이 승낙하듯 말하는 것도 사실 우스운 일이었다. 황후는 에비가일의 말에 정말로 고맙다는 듯 웃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에비가일은 생각했다.

이젠, 정말로 제가 선택한 것이었다―. 제가 황녀 대신이 될 것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고맙구나. 조만간 정식으로 다시 궁정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전에 내 시녀장을 보내 네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챙기겠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여명이 밝기 전에 돌아가야 한단다. 참, 라키엘에게는 내가 아는 척하지 않을 테니.”

“네?”

“그 아이, 몇 시간이든 갖고 싶은 만큼 갖고 노렴.”

에비가일이 그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황후가 웃으며 일어났다. 에비가일은 황급히 침대를 뛰쳐나오듯 나와 섰다. 황후가 작게 웃었다.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야.”

“예, 폐하.”

“그때는 정말 내 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에비가일.”

황후가 나직하게 부른 제 이름에 왠지 모르게 먹먹한 기분이 들어, 에비가일은 고개를 숙였다. 돌아서는 드레스 자락을 멍하니 바라보며 예를 취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황후는 이미 방에 없었다. 에비가일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제게 했던 말을 곱씹었다.

에비가일.

마치 제 이름이 불린 게 마지막처럼 느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이제, 이 세상에서 누가 내게 이름을 불러 줄 수 있을까.

에비가일은 얼마간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어머니 생각도 났고, 유모 생각도 났고, 지긋지긋한 동생들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죽기 전에 어머니를 다시 한 번 볼 수는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없으리라.

그때가 정말로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더 예쁜 말만 할걸. 더 오래 볼걸. 더 안을걸. 사랑한다고…….

에비가일은 멍하니 눈물을 뚝 떨어트리며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왜 다시 눈물이 흐르는지도 알 수 없었다. 황녀 때문인지, 황후 때문인지, 제 가족들 때문인지, 아니면 모두 다인지.

어디서부터 제 인생은 이렇게 꼬여 버렸을까. 입궁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혹은 조금만 더 늦었다면 황녀를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아프지 않았다면 아예 궁정에 발을 들일 일조차 없었으리라. 아니, 애초에 수도까지 와서 고생하지 않았다면 제 어머니는 병을 얻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에비가일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가끔 후회하곤 했다. 그냥 고향에서 슈페트 백작과 얌전히 결혼이나 할 것을. 제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을 볼 때마다, 어머니가 아플 때마다, 동생들이 맛있는 걸 찾아 댈 때마다 에비가일은 몇 번을, 아니, 사실 수십 번을 후회했었다. 그깟 결혼이 뭐라고, 제 몸뚱이가 뭐라고 가족을 모두 이렇게 만들어 버렸을까.

결국 저는 저만 생각했던 건지도 몰랐다. 에비가일은 조소하듯 웃었다. 애초에 가족이 이렇게 된건 제 탓도, 자신들을 내버려 두고 자살한 아버지 탓도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저 때문에 가족이 조금 더 낫게 살 수 있었던 기회를 저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억울해서라도 몸은 팔 수 없었다. 뭐 때문에 고향을 떠난 건데, 적어도 고생시키는 어린 동생들에겐 떳떳해야 했다.

그래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건데. 아버지가 죽고, 오직 가족들을 위해 살아왔는데, 이제 가족들을…….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자르듯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고개 숙인 시야로 잡히는 고급스러운 구두와 세련된 검은색 수트 바지, 검은색 베스트, 검은색 크라바트cravate, 넥타이의 원형, 그리고 얄미운 머리에 달린 우중충한 검은 머리칼…….

온통 우중충했다. 저렇게 생물학적으로 잘생기고 재수 없어 보이기도 힘들 것이다. 에비가일이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남자는 에비가일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한번 쫙 훑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왜요?”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답이 튀어 나갔다. 제가 그렇게 말해 놓고 스스로 놀라는 바람에 에비가일은 애매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

“전혀 기대도 않은 걸 어떻게 해냈느냐고.”

역시 사람의 적응력은 무서웠다. 부쩍 건방지게 굴었더니 남자는 이제 웬만한 걸로는 그녀가 건방진 줄 몰랐다.

“무슨 말씀이신지.”

“황후께서 아무것도 모르시더군.”

그제야 무언가 뇌리를 스쳤다. 라키엘에게는 내가 아는 척하지 않을 테니…….

에비가일이 씩 웃었다.

“그거야…….”

“손가락 빨면서 백치 연기라도 했나?”

“황녀 전하께선 손가락 무는 짓 같은 거 안 하셨거든요.”

“하긴, 너라면 필요 없겠군.”

“뭐가요.”

“연기까지야. 원래가 모자람이 많으니…….”

넌 원래 바보니까 연기할 필요도 없으시다? 비꼬듯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매가 여간 밉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에비가일은 휩쓸리지 않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래요. 완벽한 연기 덕분이었죠.”

“백치 연기?”

“아니, 친딸 같은 연기!”

“그러니까, 아니. 황녀는 정상이랬지.”

에비가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라키엘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후께 정상이라 해 뒀는데, 자다 깬 네가 정상으로 보였을 리가 없다.”

“……없다, 이거예요?”

“네가 잘 생각해 봐.”

“그런 거 모르겠는데! ―요.”

라키엘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다는 양 미심쩍은 시선으로 계속 그녀를 내려다봤다.

됐어. 빈정 상했어. 나 안 해. 당신 안 갖고 놀아.

“속으실 리가 있어요? 내가 그럴 리 없댔죠.”

“……그럼 그렇지.”

라키엘은 제가 그녀들 사이에서 짧게나마 갖고 놀아졌다는 사실을 인식했는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에비가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라키엘이 했던 것과 같은 표정으로 한쪽 입매를 픽 치켜 올렸다. 하기 무섭게 정색한 얼굴이 보여 이내 스르르 내려갔지만.

“좋은 분 같았어요, 황후 폐하.”

“나쁜 분은 아니시지.”

“그냥 좋은 분이라고 하면 덧나나요?”

“모르겠으니까.”

“공은 하나라도 좋게 넘어가면 속이 뒤틀리시죠?”

“황녀 전하는 하나라도 안 걸고넘어지면 속이 어떻게 되시나 봅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바로 알아보셨어요. 제가 아니란 걸.”

라키엘은 어쩐지 조금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정말로 어울리진 않았지만 혹시 ‘고모’를 걱정했던 걸까. 에비가일이 묘한 눈으로 라키엘을 응시했다.

“역시 예상했단 얼굴이네요.”

“어차피 그다지 중요하게 상관있는 일도 아니야.”

“중요했잖아요. 그분께도, 당신에게도.”

“계속 내버려 뒀더니 이제 제법 건방진 소리까지 하는군.”

네 주제를 넘지 말라는 듯 남자가 딱딱하게 내뱉었다. 에비가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 속내를 조금이라도 들키는 게 저렇게도 싫을까.

“엘데르디움을 나서며, 조카 뜻대로 하겠다는 말이 다였다. 어쨌든 너랑 애초에 얘기가 잘 끝났단 거겠지. 그만하면 됐어.”

어찌 됐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됐으니 다른 건 관심 없다는 투다. 에비가일은 괜히 조금 울컥했다.

“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

“비올레타 전하의 이름마저 세상에서 사라지고 마는 걸, 참으실 수가 없다고 하셨죠.”

“그랬군.”

“여태 묻혀 있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선대 에델가르드 공에, 황태자 전하……. 불행이 아무리 한꺼번에 겹쳤다지만, 공 같은 분이나 생각해 낼 법한 황녀 대역이라는 건 꽤 극단적인 대안이잖아요. 아니, 아주 많이요.”

그래, ‘당신 같은’ 사람이니까. 에비가일은 그렇게 은근히 라키엘을 욕했다고 생각하고 뿌듯해 입매를 삐죽였다. 라키엘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어째서 황후마저 그렇게 극단적이 되신 거죠?”

“네가 말하는 사람의 차이는 문제가 안 돼. 적어도 지금은.”

“……무슨 말이에요?”

“물론 네가 방금 은연중에 욕한 나랑, 네가 좋은 분이라던 황후께선 달라도 한참 다르지.”

이 귀신같은 사람.

“적어도 네가 생각하는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해. 난 필요하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지만, 황후는 다르시지.”

“…….”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어쩌니 하는 문제를 지났어. 내가 어떤 사람이라서 그렇게 하고, 황후가 어떤 분이셔서 그러지 않는 문제는 지났단 말이지.”

“그럼.”

“상황 때문이지.”

간략한 대답과 함께 라키엘은 침대 맞은편의 테이블로 천천히 다가가 그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었다. 금색의 띠가 세밀하게 둘러진 찻잔에 물이 쪼르르 떨어지는 소리만 방 안을 잠깐 울리다 사라졌다. 이윽고 라키엘은 소파에 풀썩 앉아 편하게 기댄 채,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간다. 그 모든 동선을 좇던 눈이 지쳐 다시 제 무릎께로 떨어질 무렵,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황태자와 전 에델가르드 공작이 죽은 날, 기억나나?”

마치 그들이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라키엘은 무심하게 물었다.

“당연히, 얼마 안 됐으니까……. 온 수도가 난리였다고 했어요. 곳곳에 수도경비대에 황실근위병까지 깔려서는 일주일 가까이 도시 전체가 통제됐었다면서요.”

“그래, 그랬군.”

라키엘은 정말로 몰랐던 것을 물어본 것처럼 짧게 대답했다. 에비가일이 의아한 듯 라키엘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은 남자의 아버지이고 사촌 동생이었다. 사고의 당사자나 다름없는 사람이 어째서 아는 것이라곤 수도에 난리가 났다는 것뿐인 제 대답을 묻는 걸까. 그녀는 최근 세 달간 아예 황녀와 함께 유폐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황녀의 궁에 출입하던 하녀들과도 접촉이 불가능했고, 에비가일이 바깥과 연결된 통로라고는 황족관리국의 검열을 통과한 몇 장의 편지가 전부였다. 그 편지를 통해서 겨우 저 정도를 알고 있었고.

라키엘은 고개를 비스듬히 가눈 채 잠시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난 그날이 잘 생각나지 않아.”

가늘게 좁혀진 시선이 문득 그녀를 응시했다. 에비가일은 조금 경직된 채로 침대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때의 세상이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무덤덤하기 그지없는 평온한 목소리였으나 마치 귀에 박히듯 들리는 말이었다. 에비가일은 바보처럼 조금 벌어져 있던 입을 꾹 다물었다. 라키엘이 이전과 같은 동작으로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남자는 선으로 그린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아했다.

“아버지는 황태자를 아들보다 더 아꼈어. 사실 그 둘이 더 부자 같기는 했지. 미하일은 아예 아버지를 똑같이 빼다 박았어. 아버지가 그 아일 키우다시피 모든 걸 가르쳤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고. 다 착해 빠져선, 그래. 좋은 사람들이었지. 애초에 난 겉모습만 빼면 아버지를 별로 안 닮았거든.”

라키엘은 그저 좋았던 일을 회상하듯 말했다. 아주 잠깐의 찰나였지만, 그는 조금 웃기까지 했다.

에비가일은 처음 알았다. 저 남자가 저렇게 진심으로 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저 남자가 자신과 같은 인간처럼 보였다.

에비가일은 비로소 저 남자에게 선대 공작이, 그리고 황태자가 얼마나 중요하고 특별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얘기였다.

가족이니까.

“그날은, 아버지와 미하일이 사냥하러 갔던 날이었어. 둘 다 사냥을 좋아했어. 나는 비생산적인 활동은 질색이었으니까, 사냥은 항상 둘이 갔지. 수도 외곽에 있는 자그마한 공작령에 위치한 사냥터는 아버지가 미하일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거야. 애초에 그곳에 공작령을 설치한 것 자체가 수도에만 갇혀 산다며 답답해 하는 미하일을 위해서였지. 산지기만 곳곳에 서른 명을 심어 놓고, 가디언까지 두는 것도 모자라 황태자가 사냥할 동안 안전하도록 수도의 공저보다 가디언을 더 많이 배치해 놨어. 그런데, 그 작은 땅 안에서 돌아가는 길에 마차가 추락하는 사고가 났지.”

에비가일도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영지 안에 있던 사냥터를 가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산이 몇 개나 있었고, 작은 영지였지만 사냥터만큼은 근방 영지들 중에서도 제법 넓은 편이었다. 그러나 산지기는 고작 2명밖에 없었다. 그게 보통이었다. 물론 그만큼 그곳 산지기들의 밀집도가 높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작다는 기준이 그리 와 닿지 않았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그녀도 이미 대강은 아는 이야기다.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었단 건가요?”

“그렇게 높은 절벽도 없고, 그저 조금 높은 구릉에서 구르듯 떨어진 것에 가까워.”

“그렇다면 겨우 그걸로, 두 사람이 다 죽을 순 없잖아요. 곳곳에 산지기에, 가디언까지 있는데.”

“죽을 순 없지만, 죽이려고 작정해서 가능했던 거지.”

“……도대체, 누가. 대체 어떻게요.”

제국 최고의 공신 가문을 이끄는 수장과 그 가문을 배경으로 한 황후 소생의 황태자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도대체 그 누가 감히 죽이려고 들 수 있나. 에비가일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도에서 이 사고에 별달리 소문이 따라붙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들을 ‘사고’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죽일 수 있다는 건 제국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고 현장 가까이에 공작가의 마부복을 입고 죽어 있는 이는 내가 기억하는 얼굴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원래 마차를 끌던 마부의 흔적은 근처에서 찾을 수도 없었고.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선 것 자체가 일부러 자살을 각오한 일이지. 달리던 중 마부가 바꿔치기 당한 거야.”

“……하.”

“감시하는 눈이 몇 갠데, 사고가 일어나고 여섯 시간이나 지나서야 발견이 됐지. 왜냐고? 그 구역에 본디 있어야 할 산지기 한 명과 가디언 두 명이 모두 증발했거든. 마부처럼 흔적도 없이. 공작령 전역을 순찰하는 가디언 두 명이 도착했을 땐 이미 아버지와 미하일은 죽어 있었어. 순찰병이 전역을 순환하는 시간은 7시간이 걸려. 순찰 시간까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양, 사고 지점, 사고 시간, 모두 다 미리 짜여 있었던 것처럼 사고가 일어났어. 할 수 있는 최대한, 하지만 자연스러울 수 있을 정도에 한해 가디언이 가장 늦게 도착할 지점에서 말이지. 황태자의 복부와 공작의 흉부엔 마차 일부가 부서진 잔해가 박혀 있었고. 사인은 환부의 과다한 출혈.”

입이 바짝 말랐다. 목이 서서히 갑갑해져 왔지만, 라키엘의 목소리는 그저 덤덤했다.

“그 마차는 겨우 거기서 떨어지는 충격 정도로 조금이라도 부서질 마차가 아니었다. 항간에서는 마치 마차가 낭떠러지에서라도 떨어진 것처럼 말하지만, 그곳은 그저 높은 구릉이었고, 마차는 황실의 마차였으니까.”

황족들이 타는 황실의 마차는 극서 지방의 드워프들이 만든 것으로 특수한 방탄 재질로 제작된 것이었다. 드워프들은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진짜 난쟁이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불릴 정도로 수공이 가장 우수한 민족이었다. 그런 그들이 황실이 아니면 만들어 내지도 않는 마차였다. 웬만한 사고로는 어떤 충격이 가해질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인위적인 힘이 가해졌다?”

“그래, 마차의 부서진 일부는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보이려 노력한 흔적이었지. 시신은 누가 봐도 사고 후 ‘배치된’ 것이라고밖엔 볼수 없었고.”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사고 후 누군가가 죽인 거군요.”

“사고는, 기껏해야 크고 작은 타박상 정도밖에는 되지 않을 규모였다. 머리가 다치지 않는 이상.”

“머리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기엔…….”

마차의 파편이 박혀 있던 공작과 황태자. 에비가일은 입안을 짓씹었다.

“이건…… 마치 겉으로는 들킬까 봐 숨기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보란 듯이 죽인 것 같네요.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잠잠할 수 있죠? 황태자와 공작이 이렇게 죽었는데, 제국의 가장 높은 사람들인데. 당신과 에델가르드는 어떻게 가만히 있고요?”

“그보다 더 높은 이가 모든 것을 덮고 싶어 하니까.”

“……더 높은 이라면.”

“황제다.”

라키엘이 대수롭지 않게 툭 내뱉었다. 에비가일이 덩달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 아, 그렇구……. 네?”

“황제라고.”

“맙소사.”

에비가일이 멀거니 라키엘만 바라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건 말도 안 되잖아요.”

“어째서?”

“자기 아들을, 어떻게…….”

“그를 보통의 아버지로 생각하지 마. 죽은 황녀를 보면 모르겠나?”

“그건 황실의 오랜 관습이잖아요!”

“황녀처럼 불완전한 황족은 어느 시대에나 태어났지만, 모든 황제가 그러지는 않았어.”

“그래서, 황제께서 자신이 정한 후계자를, 황태자 전하를 죽였다는 건가요?”

“정확히 말하면 죽인 건 아니지. 그저 방관했을 뿐.”

“아니, 그게 그거잖아요.”

“그래. 그게 그거지.”

라키엘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어쨌든 황제가 진실을 원하지 않아.”

“원하지 않는다니…….”

“그러니 지금은 묻어 둘 수밖에.”

라키엘은 그렇게 씹어뱉듯 말하고, 찻잔을 아무렇게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일국의 황태자였다. 황태자가 저렇게 의문투성이로 죽었는데도 세상은 그의 죽음에만 요란하게 슬퍼할 뿐 죽음 이면의 문제에는 이상하리만큼 잔잔하고 고요했다.

결국 모든 것이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은폐를 원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황태자조차 그렇다면 죽은 황녀는.

“……제가 황녀 전하와 함께 죽었거나, 그저 제가 없어서 황녀 전하 홀로 돌아가셨다면…….”

“그저 불쌍한 황녀의 불행한 죽음, 그뿐이었겠지. 암살자들의 존재 따윈 아무도 모른 채.”

자신이라는 대역이 만약에 없었더라도, 그래서 세상에 그녀의 죽음이 알려졌다 해도 결국 그녀는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어떠한 진상 규명도 없이 그저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제국인들이 사랑하던 황태자조차 어떠한 진상도 밝혀지지 않은 채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나. 애초에 자신은 비올레타를 위해서가 아닌 저와 제 가족을 위해서 그녀의 대역이 된 것이었지만 이런 건 싫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녀가 사라진다는 건.

“……그럼 진짜 배후는 누구죠?”

“1황비, 카디링거 후.”

에비가일이 허탈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의외도 아니잖아. 황태자의 죽음이 누구에게 가장 기회일지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의외는 아니었다. 황제의 정비들 중 가장 대외적 평판이 좋은 1황비였으나, 제 아들의 유력한 계승권에 욕심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녀는 황제의 장자를 낳았다. 황태자의 죽음 이전에도 그녀의 아들은 계승 서열 2위로 공공연히 회자되곤 했다. 다만 그녀에 관해 떠들던 온갖 선량한 말들이 떠올랐다. 에비가일이 씁쓸하게 되물었다.

“심증인가요?”

“증발된 사고 구역의 가디언 외에 가까운 구역의 가디언 중 한 명이 검에 관통된 채 죽은 채로 발견됐어. 미처 거두지 못한 검에는 카디링거령의 네벤이라는 곳에서만 생산되는 펜게르란 광석이 포함되어 있었고.”

“끌리는 증거기는 하지만, 산지라는 이유 하나로 어떻게 증거가 되겠어요?”

“펜게르는 카디링거 후작령의 몇 안 되는 유출 금지 품목이거든. 광석은 물론, 광석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물건은 모두 영지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 후작과 그의 기사들을 제외하고.”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하겠네요.”

“그래. 상관없다, 유출됐다, 억울하다 우기면 그저 끝이니까. 전혀 결정적이지 않지.”

“그럼 그저 구십구 퍼센트의 심증이 백이 되는 정도밖에는…….”

“그래, 그 정도다.”

“4황자 세력일 가능성은 없나요? 가장 뻔하게 의심할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고, 카디링거 후작령의 광석이 든 칼이야 일부러 흘리면 그만일 텐데.”

황태자가 죽기 이전에도 1황비 베티스의 1황자 빌키어스, 그리고 3황비 카트린느의 4황자 킬리안은 황태자와 더불어 가장 유력한 계승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황태자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세력 역시도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1황자가 가장 유력했다. 과연 황태자가 죽으면 가장 좋을 사람이 자신들이라는 걸 세상이 전부 아는 이상, 제일 먼저 의심이 돌아올 일을 그들이 저지르겠는가.

“머리는 제법 썼다만 네가 곧장 생각할 만한 건 내가 예전에 생각했겠지.”

라키엘은 시큰둥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진짜 사태와는 무관하게 사람 자체가 밉상스러웠다.

“아직 3황비 세력으로는 불가능해. 그들의 입장에선 황태자를 제거하고 1황자와 4황자 둘이 남아 완전히 1황자로 우위가 넘어가는 것보다는, 황태자가 살아 있으면서 황태자와 1황자가 서로 견제하게 두는 게 훨씬 유리하고.”

“그렇겠군요.”

“카디링거는, 뻔히 의심받을 짓을 멍청하게 저지른 게 아니야.”

“그럼 뭐죠?”

“의심을 받아도 상관없기 때문에 저지른 것이다. 어차피 의심이 내 선에서 그칠 걸 아니까. 황제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아. 카디링거가와 직접적으로 어떤 거래를 했는지는 몰라도.”

“당신, 황태자 전하의 일…… 이대로 가만있을 건가요? 억울하잖아요.”

“애초에 사건의 진상으로 황제를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서 황태자와 공작의 죽음으로 바로 여론을 움직여 봤자 에델가르드에는 별로 도움이 될 게 없어.”

에비가일이 의아한 듯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바로 진상을 터트렸다면 제국인의 여론이 모두 당신의 편이 되지 않았겠어요?”

“그게 바로 그들이 원하는 바지. 제국민의 여론이 내 편이 되는 것? 결론이 없는 여론은 그저 잠깐이야. 차기 황제감도 없이, 결정적 증거도 없이 황제가 용인하는 1황비 세력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포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그것이 지금 에델가르드에 얼마나 이로울까. 순간의 억울함에 제 살 깎아 먹는 짓을 할 순 없지. 아직은 터트릴 때가 아니야. 그렇게 감정적으로 아까운 카드를 가치 없이 버릴 순 없어. 적어도 네 존재가 확실해질 때까진 잠잠한 게 좋을 거다.”

냉랭한 목소리로 내뱉는 내용이 꽤 야멸찼다. 아버지와 친형제 같은 사촌 동생의 죽음도 나중에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수’로 남겨 둘 만큼 남자의 냉정한 이성에 에비가일은 조금 질렸다.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이해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탄했으면서도. 그와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아버지와 평범한 아들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에비가일은 어쩐지 저 남자가 조금 안됐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그 억울함마저 그보다 먼저 이루어진 계산속에 숨겨야 한다는 건……. 글쎄, 모르겠다. 그녀는 적어도, 아버지의 죽음에 아무 생각 없이 목 놓아 울 수는 있었기 때문에.

당신도 다 가지진 않았구나. 이제 조금이나마 보이는 것 같았다. 그 태연한 얼굴 아래에 있을 증오, 분노, 절망, 투지, 갈망……. 당신에게도 수백 가지의 감정이 있으리라.

그래, 당신도 힘들겠구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고 싶지 않아.”

“…….”

“그렇다고 아버지를 잃고, 황태자를 잃고 이대로 가만히 수치스럽게 숨을 쉴 순 없지. 이대로 황후께서 모든 걸 잃은 채, 그 치들에게 패배한 여인으로 두고 싶지 않다. 그래서 비올레타가 필요했고, 죽어도 살려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널 택한 것이다.”

에비가일은 가만히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가만히’ 있겠나? 지금 네가 내 앞에 앉아 있는 이유가 가만히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데.”

“……그게 당신의 방식이군요.”

당신이, 당신의 가족을 위하는 방식.

라키엘의 입매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그래. 그게 내 방식이다.”

“전혀 고상하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지 만……. 좋아요. 알겠어요.”

어차피 사람마다 그 방식이란 것 다 다를 것이고, 저 역시도 제 방식에 따라 여기까지 왔다. 열넷, 결혼을 피해 고향을 버리고 가족들과 함께 수도로 향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에비가일은 오직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 그녀도 전혀 고상하지 않았다. 그것이 곧 제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저는 저 남자의 방식을 따라야 했다. 제 가족을 위해서, 그의 가족을 위한 방식을 따라야 했다.

결국 저 남자의 방식이 곧 제 방식이 된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옳아서, 좋은 길이라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남자의 방식을 굳이 미화시킬 필요도, 좋은 말을 갖다 붙일 필요도 없다.

그래, 상관도 없고, 사실 그럴 권리도 없으며, 또한 그럴 생각도 없다. 저부터가 가족과 제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그리고 가족에게 떨어질 재물을 위해 비굴하게 무릎 꿇고 시작한 일이었다.

다만, 에비가일은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데 조금 감사했다. 그저 정치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제 가족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것이, 적어도 자신에겐 작지만 좋은 명분이 될 터였다. 단순한 정치적 도구보다는, 그 작은 진심이라도 기반이 되는 편이 훨씬 더 기분 좋았다.

“나도 받아들일게요. 당신의 그 방식.”

라키엘이 네가 뭔데, 라는 듯한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에비가일을 바라보았다.

“넌 애초에 선택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얼굴이네요. 알아요. 하지만 말하고 싶었어요.”

“…….”

“받아들이고 싶어요.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정말로 받아들였기에 각하와 함께하는 거라고.”

남자의 서늘한 눈이 그녀를 재어 보듯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건 네 자존심인가?”

“아니요.”

부딪치는 눈길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에비가일은 마치 그것을 보지 못한 양 웃었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내 방식이에요.”

라키엘이 픽, 실소를 내뱉었다.

“줄에 걸린 마리오네뜨는 싫다?”

“그래요. 이만하면 제법 괜찮은 공모자 아닌가요? 적어도 일이 다 망가졌을 때 당신의 이 가짜 황녀가 ‘그땐 어쩔 수 없었고,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구차하게 변명하면서 저 혼자 발을 빼진 않을 테니까.”

“일이 그르쳤을 땐 어차피 아무리 혼자 빠져나가려고 해 봤자 나에게도, 너에게도 달라지는 건 없어.”

“결과의 차이 따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래, 이러나저러나 다 죽는다.

그러니까 자신은, 이왕이면 적어도.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준비하고 있을 사람을 계속 당신의 가장 가까이에 둬도 괜찮겠어요? 그런 사람을 믿을 수는 있느냐는 말이에요.”

변명이나 구구절절 늘어놓아야 할 ‘어쩔 수 없는’ 일 따위에 제 목숨을 걸긴 싫다는 것이다.

“아, 하긴. 네 가족의 목숨을 걸어 놓았으니 애초에 널 믿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죠?”

“일부러 성가실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공, 믿는다는 건 사람의 약점으로 안심하는 게 아니에요.”

“애초부터 믿음 같은 건 허락되지도 않아.”

“공은 여태 그렇게 아무도 믿지 못하고 살아왔나요?”

“믿었다면 지금 살아 있지도 않았겠지.”

비틀린 입매에 맺힌 말은 웃음기마저 잘게 섞여 있을 정도로 가벼웠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새까만 눈이 속을 죄여 왔다. 마치 제 속을 헤집은 채 그대로 보이는 듯한 느낌에 에비가일이 작게 몸서리쳤다. 그러나 에비가일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당당해 보이려 노력했다.

무릎 꿇고 시작했으나 죽을 때까지 무릎 꿇고 기어 다니긴 싫었다. 갑을 관계는 벗어날 수 없더라도, 적어도 동등한 척 정도는 그럴듯하게 할 수 있게, 그 정도는 되도록 해야 했다.

에비가일은 일방적으로 제 가족을 남자의 손에 매달아 놓기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저는 불안해서 언젠간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런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완전히 당당하진 않아도 당당한 척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만약 죽더라도 그것이 제 의지의 결과이기 위해서.

“난 당신의 믿음과 내 위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정이 필요해요.”

그녀의 말이 퍽 우스운 듯 라키엘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에비가일은 동요치 않고 말을 이었다.

“고작 날 믿는다고 해서 공이 죽진 않아요. 그냥, 날 믿으란 거예요. 내 약점 말고요.”

“정말이지 네 방식은 너무 성가시군.”

“황태자 전하도 믿지 않았나요?”

“……그리고 건방지기도 하고. 황태자를 감히 제 동일 선상에 올릴 줄이야.”

“우리, 일단은 사촌이잖아요. 이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가짜이긴 하지만. 작게 속삭이듯 덧붙이며 에비가일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라키엘이 유쾌한 듯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시건방이 지나치다는 생각은 아예 안 하고 있는 거지, 지금?”

시건방이라는 말은 에비가일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한 단어 선택이었지만, 라키엘의 말은 떠보거나 책망하는 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에비가일이 침착하게 물었다.

“각하께서 원했던 게 이런 것 아닌가요? 내가 마치…….”

“진짜처럼 구는 것.”

“그래요.”

“그래, 아주 잘하고 있군. 그런데 우리 대화 주제가 아무래도 상관없는 아주 사소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황녀께선 왜 이리 잡고 늘어지실까.”

“난 공의 믿음이 필요해요.”

“그건 서로 성가신 일이지. 애초에 네가 배신하지 않는 한 내가 널 버릴 일은 없어.”

“그런 거 말고요.”

흥미롭다는 듯 에비가일을 쳐다보던 남자의 눈빛이 갈수록 피곤해져 갔다. 여기서 제가 말을 조금만 더 길게 끌면 남자가 정말 화낼지도 몰랐다. 라키엘은 신경질적으로 씹어뱉듯 말했다.

“마음이나 양심 따위를 꽤 중요시하는 것 같은데, 넌 분명 이 일을 강제로 떠맡다시피 했고, 가책이나 죄책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지. 아닌가? 그저 내 탓을 하고, 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 모든 걸 돌리면 되니까. 네가 그렇게 중요히 여기는 ‘마음’이라든지 ‘양심’ 같은 것에 부끄러울 것 없이 마음 편하게 말이야. 그런데 네가 굳이 스스로 심적 책임을 지겠다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

“양심이라뇨. 잘못 짚으셨네요, 각하. 나는 소심한 거랍니다. 남의 의지에 내 목숨과 가족을 걸 만큼 대범하지 못한 거예요.”

남자는 말없이 웃었다.

에비가일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굳이 기분 나쁠 이유는 없었다. 제가 제 처지 이상의 말을 한 건 사실이므로.

“그래서, 너 역시도 똑같이 의지를 가지고, 나와 대등한 위치에서, 같은 크기의 책임감을 갖겠다……. 제법이네. 어떻게든 일방적으로 매이는 위치는 피하고 보겠다?”

“그렇기도 하고요. 시작을 어떻게 하는가는 언제나 중요하니까요.”

“네가 원하는 그 ‘시작’에서 내가 해 줄 일이 뭐지?”

“우리는 계약서를 남길 형편이 안 되니 그냥 확실히 다시 말해 줘요.”

“뭘.”

“내 위치에 대한 인정.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

“내가 무엇으로 널 믿지?”

“공을 믿는 것 외에는 일가족의 죽음밖에 선택지가 없는 데다 공의 믿음을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내 처지만 생각해도 어차피 공은 날 믿지 않고선 못 배기겠지만…….”

“…….”

“제일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내가 공을 믿으니까.”

“그건 나 역시도 네 믿음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공이 날 죽인다는 선택지를 제외한다면, 그렇겠죠. 당신이 나보다 선택이 자유로운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우리, 이만큼 말했으면 이제 그런 자질구레한 거 빼고 생각하자고요. 내 약점, 당신의 사정 모두 빼고. 계약서에 뒷사정 적는 거 봤어요?”

라키엘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어떻게 웃으나 남자가 웃는 건 여전히 재수 없었지만, 이번의 웃음은 재수 없어 보이긴 해도 승낙에 가까워 보였다. 남자가 소파 속으로 좀 더 몸을 깊숙이 기대며 나른해진 얼굴로 말했다.

“너와 난 애초에 협상할 위치가 아닌데.”

“아깐 내가 조금만 더 말하면 날 죽일 것처럼 노려보더니, 공이야말로 간소한 언사가 필요하겠어요. 남자가 좀 시원하게 굴면 될 걸 왜 이렇게 질질…….”

“네가 그 불리한 위치에서 협상처럼 이끌어 낸 게 제법 훌륭하다고 칭찬하려던 참이다.”

이어지는 말이 칭찬이자 에비가일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이 나를 상대로.”

남자는 정색하고 남을 칭찬하는 와중에도 자기를 더 추켜세우는 비상한 오만함을 가졌다. 그래서 칭찬을 들어도 기분이 좋기보다는 우선 재수가 없었다. 남자는 곧이어 딱딱하게 언약을 내뱉었다.

“에델가르드의 아들과 딜로아의 딸은 대등한 공모자로서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신의를 따라 계약에 반하지 않는다. 제국력 806년, 봄의 46일.”

“죽는 날까지요.”

“그래, 죽는 날까지.”

에비가일이 덧붙이는 말에 실소와 함께 응해 준 라키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도 일단락됐겠다, 모양새가 나가는 것 같아 에비가일이 반사적으로 반가운 마음에 씩 웃으며 바라보았다. 어쨌든 저 남자가 사라지면 몇 시간은 평온했다. 라키엘이 다시 정색하고 말했다.

“너, 내가 나가고 다시 잘 생각에 그렇게 실없이 웃는 거라면.”

“나를 뭘로 보고!”

네가 이 방에서 나간다는 게 좋은 거라고 에비가일이 눈으로 덧붙였다. 물론 더 자기도 할 생각이었다. 남자가 다정해 보이는 얼굴로 화답하듯 웃었다. 다정하다니 불길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부터 그 수면에 중독이라도 된 듯한 네 비생산적인 생활 습관은 금지야. 왜? 넌 오늘부터 숨 쉬는 것처럼 할 일이 많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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