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이매망량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고, 하늘은 맑게 개었다.
맑은 하늘엔 검은 형체의 타이탄과 로브를 입은 류신이 대치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군요. 이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류신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서울 시내 곳곳은 이매망량의 잿가루로 도시의 형상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그 안에서 방금 전 이매망량을 모두 소멸시킨 장본인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류신의 그런 호기심에 동했음인가.
이윽고 하늘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마법진의 중앙에선 급격한 온도 차에 발생되는 용오름이 생성되었고, 그 크기가 점점 길어져 바닥에 짙게 깔린 잿가루들을 빨아올리기 시작했다.
나풀거리며 날아다니던 잿가루들이 용오름에 빨려 들어가 마법진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 용오름이 수십 개가 생성되며 무자비하게 잿가루를 빨아 들였다.
무자비한 흡입력에 대부분의 잿가루들이 사라지자 류신의 얼굴은 지상의 한 존재에게 향했다.
“처음 뵙는 분이군요.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시우 님의 대화상대를 담당하고 있는 빌리언트라고 합니다.”
“대화상대요?”
“네. 비슷한 걸로는 채팅 프로그램이라고 할까요?”
“……그렇다고 하기엔 능력이 너무 출중하군요.”
“항시 뛰어난 분 옆에 있기 위해선 노력을 쉬지 않아야 하지요.”
“……항시 옆에 있는 다라.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한연맹 내부에서 정신질환자들의 상담도 겸하고 있거든요.”
“그대는 왜 혼 없이 혼의 흔적만이 존재하는 거죠? 그것도 본인의 것이 아닌 시우 님의 것을?”
“그건 제 존재가 시우 님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류신의 시선이 타이탄으로 향했다. 그의 입가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후후, 결국 스스로 고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혼을 떼어 내어 위안 삼을 존재를 만들었다는 겁니까?”
― …….
타이탄에 탑승한 시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건 아닙니다. 시우 님께선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저를 만드신 거지요.”
“그대는 결국 위안의 존재, 그만큼 시우 님에겐 고독이 가장 끔찍한 고통이란 것이겠지요.”
“시우 님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끝없는 고독 속에서도 한 번도 ‘포기’한 적 없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존재이지요. 제가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건, 결국 그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이 없는 존재가 감정 또한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충성심은 프로그래밍 된 것입니까?”
“저 또한 그리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 존재의 이유, 내가 목적한 바를 원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이 조작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말이죠.”
빌리언트 또한 타이탄을 바라봤다.
검은색의 외피는 온통 우그러지고 파손된 곳이 여러 군데 존재했다. 관절 부위에선 스파크가 튀거나 연기가 나는 곳도 있었지만, 그 오연한 분위기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초 그렇게 만들어졌을지 몰라도, 저 정도의 자아를 가진 존재는 곧잘 마스터의 의도를 무시할 수 있는 수준까지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러지 못했죠, 제가 마스터를 따르는 것은 이미 오랜 시간 마스터께서 걸어온 길을 확실히 봐왔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 않는 불굴의 의지.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 그것이 저로 하여금 마스터를 따르게 만들지요.”
“그런 것 치고는, 이미 포기하신 것 같은데, 실망스럽겠군요.”
“누가 말입니까? 마스터가 말입니까?”
“이미 시우 님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깊은 절망감 속에서 불안감을 극복하려 하시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죠. 제가 이미 이토록 시우 님을 옥죄고 있으니.”
류신의 손짓에 타이탄의 주변으로 타이탄을 감싸는 거대한 손이 구현화 되었다.
거대한 손에 이어 거대한 팔이 나타나고 그것은 곧 거대한 음양귀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거대한 음양귀는 양손으로 타이탄을 옥죈 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우득.
거대한 음양귀가 비명을 지르며 손에 힘을 쥐자 단단한 타이탄의 외피가 점점 더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걱정 마십시오. 시우 님을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 뿐이지요. 그것이 시우 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테니.”
꺄아아아아악!
음양귀는 더욱 큰 힘으로 타이탄을 옥죄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동시에 두 마리의 새로운 음양귀가 나타났다. 새로 나타난 음양귀 마저 타이탄을 옥죄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음양귀 세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서 있자 서울 시내엔 새로운 고층 빌딩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걱정하시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우 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부우웅
빌리언트의 말에 응답하듯, 타이탄의 부스터가 더 큰 화력으로 불꽃을 내뿜었다.
동시에 빌리언트의 손에서 기다란 창이 구현화 되었다.
[제우스의 창]
존의 안드로이드 인형에 장착된 공성병기인 제우스의 창이 만 볼트의 전력을 내뿜으며 음양귀의 등 쪽에 찍혔다.
항귀(抗鬼)용으로 제작된 제우스의 창은 야토가미 술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만 가지 귀신에 대응하는 제우스의 창은 구현과 비구현을 구분하지 않고 음양귀에 등 언저리에 박혀 뜨거운 전기맛을 보여주었다.
꺄아아아악!
음양귀 하나가 손을 놓친 사이, 타이탄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마법들이 생성되었다.
마법진들은 각기 파이어볼, 얼음송곳, 검은창, 바람칼날 등으로 변함과 동시에 일부의 마법진들은 음양귀에 붙어 그들의 실체화를 공고히 다졌다.
령체로 변화하여 마법을 피하려던 음양귀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타이탄은 음양귀의 손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빛의 검을 구현화하여 음양귀를 썰어 버리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 이제 끝내자.
“전 아직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습니다.”
― 그만 포기하라는 지리멸렬한 대화 따윈 나누지 않으마, 그것이 너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라 할 수 있겠지.
“감사합니다. 보답으로 한 가지 알려드릴까요?”
― …….
“지금 첫 번째로 이계 진입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와왁!
부스터의 터빈이 최대치 이상으로 회전하며 과열된 불꽃을 뿜었고, 타이탄은 공기의 압력에 의해 갑옷이 우그러질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 끝이다.
[천살지존검]
[천살]
빛의 검이 하늘을 잘게 수놓았다.
하늘을 조각조각 날라 내듯 류신의 몸을 조각조각 내어 버렸고, 그를 보호하던 귀령과 함께 잘려나간 그의 몸은 9조각으로 흩어졌다.
타이탄의 부스터가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출력을 버티다 망가진 엔진처럼 덜컥거리는 타이탄은 차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빌리언트 근처에 불안전 착륙을 했지만, 빌리언트는 여전히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류신의 몸 조각을 보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닌 거 같습니다.”
― 뭐?
타이탄이 고개를 들었다.
9조각으로 잘려나간 류신의 몸들이 형체 변화를 일으키며 하나하나 용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렇게 아홉 마리의 용의 몸이 합쳐져 거대한 크기의 오로치마루로 변하였다.
― 시발
일본 전설에 의해 내려오는 가장 큰 재앙인 오로치마루가 뱀 머리 9개 대신 용의 머리 9개를 달고 나타난 것이다.
아홉 마리의 용 중 다섯 마리의 용이 일제히 입을 열어 이매망량을 쏟아 낸다.
그사이 남은 네 마리의 용들이 마법진을 만들어 갖가지 마법을 쏟아 내었다.
땅의 건물이 무너지고, 하늘에선 흙의 폭풍이 내려쳤다.
몬스터도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갔고, 무인들은 전력을 다해 재앙의 범위 안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9개의 용이 쏟아내는 거대한 압력은 이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대 우주적 존재.
한계 이상의 한계를 가진 존재. 그것이 지금 류신의 위치였다.
타이탄은 빌리언트를 품에 안고, 용들이 쏟아 내는 마법을 피했다.
불안정해진 비행 시스템은 연신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일단 타이탄에서 내리셔야 할 것 같군요.”
빌리언트의 조언에 타이탄의 해치가 열리며 시우가 뛰어내렸다.
빌리언트는 마법진을 소환하여 타이탄을 자신의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부악!
용들의 입에서 붉은 브레스가 시우와 빌리언트가 있는 곳으로 쏘아졌다.
강철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단단한 현대의 건물조차도 브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블링크로 브레스를 피한 시우가 질리는 듯한 얼굴로 오로치마루를 보았다.
“대체 어떤 존재가 된 거냐, 류신. 상대의 전투력은 얼마나 되지?”
“추정 전투력 800,000NT 최대 가용범위는 1,500,000NT 까지도 가능한 것 같습니다.”
“팔십만? 마계 마왕 수준이네. 재앙이 따로 없고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할 수 없습니다.”
“알아. 그런데, 지금은 뭔가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희생을 감수하실 순 없으십니까?”
빌리언트의 말에 시우가 그를 바라봤다.
사실 빌리언트가 류신에게 이야기를 했을 때 조금 감동먹은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자신 또한 항시 궁금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빌리언트는 시우가 최초로 만든 에고이자 최후로 혼을 나눴던 존재.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아의 확립이 강해지고 언제든 자신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고는 언제나 시우의 옆에 남아 있었다.
“고맙다. 언제나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줘서.”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나의 마스터.”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
“단 한 사람의 희생도 감수하실 생각이 없으시군요.”
“알게니하 대륙에 처음 떨어졌을 때, 그토록 누군가를 증오하고 깊은 절망에 빠진 적이 없었다. 얄궂게도 그런 인생이었다면 빨리 죽어버리는 것이 좋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주 작은 희망으로 조금씩 살게 되더군. 하지만 일평생 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고독을 잊은 적은 없었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와 똑같은 절망을 겪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커.”
“알겠습니다.”
빌리언트는 시우의 앞으로 나섰다.
하늘에선 류신이 쏟아낸 이매망량이 구현화 되어 각종 귀신으로 변해 시우와 빌리언트를 찢어 죽일 듯 날아오고 있었다.
“길을 열겠습니다.”
[광자포]
[롱기누스의 창]
빌리언트의 오른팔이 변형되며 복잡한 기계들이 겉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드러난 기계들 사이로 8개의 총구에서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쿠카카카카카카.
공기를 찢어발기는 굉음과 함께, 하늘에는 빛의 터널이 휩쓸고 지나갔다.
류신이 쏟아 냈던 귀신들은 그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빌리언트의 뒤에 있던 시우는 주변에 수십 개의 복잡한 마법진을 띄우고 등 뒤로는 3개의 드래곤 하트를 공중에 부유한 상태였다.
[생체 조합]
[드래곤 하트]
등 뒤에 부유하던 검은 색의 수정구가 천천히 시우의 명치로 움직였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 시우조차도 꿀꺽 침을 삼킬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고, 검은색의 수정구는 그대로 시우의 몸속을 파고들어 갔다.
“크아아아악!”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튀기며 검은 수정구가 자취를 감췄고, 벌어졌던 상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다.
시우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피부 아래로 커다란 덩어리 같은 것들이 몸 사방으로 움직이고 고통에 겨운 듯 온몸을 비틀었다.
“크으, 으윽.”
머리카락은 급속도로 자라나고, 손톱은 날카롭게 변해 짐승의 그것처럼 변했다.
“크아아아악!”
결국 고통을 참지 못했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는 시우의 이마로 두 개의 검은 뿔이 솟아 나왔다.
“눈을 뜨십시오 마스터.”
빌리언트의 말에 시우가 고개를 들고 슬쩍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선 노린내를 풍기는 맹수의 그것과 같은 안광이 번뜩였고, 으르렁거리듯 벌린 입 안으론 길게 자란 송곳니가 보였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시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들의 앞에 종전의 거대한 음양귀가 다시 나타났다.
음양귀는 시퍼런 날을 자랑하며 일검으로 시우와 빌리언트는 물론 주변의 지형지물마저 없애려는 듯 강하게 내리쳤다.
시우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 안에선 검은색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폭사되어 나갔다.
푸칵!
털썩.
신체의 3분의 2가 깨끗하게 소멸한 음양귀가 뒤로 넘어갔다.
음양귀 너머 하늘에 뜬 채로 세상을 종말 시킬 듯 날뛰고 있는 류신을 보는 시우.
펄럭.
시우의 양어깨로 무려 10m에 달하는 거대한 날개가 생성되었다.